인간, 사회, 시대 지향의 불교학 탐구자

미산(米山) 홍정식(洪庭植, 1918~1995)
미산(米山) 홍정식(洪庭植, 1918~1995)

미산(米山) 홍정식(洪庭植, 1918~1995)은 고아한 인품과 세련된 불교학자의 이미지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새겨져 있다. 동국대학교 교수로 22년을 재직하는 동안 그는 전통적인 불교학에 현대를 맞대어 잇는 학문적 노력으로 그 역할을 다하였다. 또한 정년퇴임 후에도 일반대중을 위한 불교교육의 저변확대에 힘쓰고 불교학계와 후학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근대 이후의 한국불교학을 일구며 마치 노학(老鶴)과도 같은 모습으로 고고하고 유연하게 평생을 살다 간 그의 학덕은 이 시대에도 아직 향훈이가득하다.


1. 중앙불전이 키워 낸 불교 인재

홍정식이 불교학을 처음 접한 것은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이다. 충남 공주 출신인 그는 부모가 모두 불자들인 가정에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불교적인 환경 속에서 자랐다. 1937년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반 때였다. 한창 진학을 고민하던 그는 불교종단으로부터 학비지원 조건과 함께 중앙불전 입학을 권유받고 선뜻 마음을 굳힌다. 우선 어려서부터 익숙하게 접해온 불교를 공부하는 것에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더구나 모두가 어렵던 시절에 학비를 지원해준다는 것이어서 중앙불전 입학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이것이 그가 불교학자의 길을 걷게 된 계기였고 첫 인연이었다.

당시 중앙불교전문학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긍지가 높았던 불교계 설립의 최고 고등교육기관이었다. 무엇보다도 불교학은 물론 문학, 철학, 역사, 어학 등 교과목의 다양성과 수업체제의 우수성, 당대 석학들로 구성된 교수진의 명성이 최고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불교학에서는 석전 박한영, 포광 김영수, 퇴경 권상로를 비롯해 김법린, 허영호 등 쟁쟁한 신·구 학자들이 포진했고, 불교학 이외 분야 역시 최남선, 이능화, 이병도, 박승빈, 김두헌 등 기라성 같은 한국인 학자와 일본인 학자들이 교수로 재직했다. 그 밖에 희귀본 장서가 많기로 유명했던 중앙불전 도서관, 불교종단의 훌륭한 학교시설 운영과 장학제도 등도 중앙불전의 자부심이 될 만했다.

불교종단의 장학제도, 즉 학비 지원은 파격적이었다. 당시 중앙불전의 재학생은 한 학년에 100명 정도였으며, 학교 설립자인 불교종단에서는 학년마다 총 2만 원씩을 보조(법인전입금)하고 있었다. 학생 1인당 200원씩 3년 동안 600원을 학비로 보조한 것이다. 오늘날의 화폐 단위로 환산하면 이는 약 2,400만 원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실제적으로 도움이 컸던 장학제도였다.

이 같은 불교종단의 학비 지원 아래 자유롭게 학문을 연마하며 홍정식은 중앙불전의 눈 푸른 불교학도로 성장해 갔다. 훌륭한 교수들의 지도 아래 불교학과 더불어 역사와 국문학, 어학 등 다방면으로 지식을 쌓아갔고 장래를 촉망받았다. 불교학 교수 가운데서도 특히 문학과 어원, 범어에 소양이 깊던 허영호 교수로부터 많은 영향을 입었으며, 허영호 교수 역시 홍정식을 아껴주며 큰 기대를 걸었다. 허영호 선생은 당시 김법린, 김잉석, 조명기, 김동화 등과 함께 신문학과 신지식을 갖춘 신진 불교학자였다.

1940년 중앙불전을 졸업한 홍정식은 이내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 종무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조선불교 총본산 창립사무를 겸직하였다. 1930년대 후반, 한국불교는 조선불교 선교양종 체제에서 총본산 태고사 건립을 추진하는 등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도 새 시대 불교의 건설에 역량 있는 인재들이 필요하던 시기였다. 이런 때에 종단이 중앙불전을 막 졸업한 홍정식과 같은 젊은 엘리트를 발탁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대략 5년 동안 불교종단에 몸담아 일해 온 그는 광복 직후 대전 보문중학교 교사에 취임, 새롭게 교직의 길에 들어선다.

이어 강경상업학교로 자리를 옮겼다가(1946), 조양보육사범학교(1947)를 거쳐 1953년에는 보문중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교장이 된 중앙불전 출신들은 그전에도 많았지만, 홍정식을 전후해 여러 명이 교직에 진출했다. 해동중 교장 김유섭, 광동산림고 교장 박병규, 보문중 교장 안부술처럼 불교계 설립 중고교의 교장이 되기도 했고, 영등포고 교장 박원서, 숭신중 교장 이경대 등 일반사립 및 공립학교 교장에 취임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중앙불전 출신들의 교육계 진출이 그만큼 활발했던 것이다.

보문중고등학교 교장을 마친 홍정식은 1958년 경기대학 부교수가 되어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앞서 그가 5년 이상을 근무한 바 있는 조양보육사범학교가 바로 이 대학의 전신이었다. 불교학을 전공한 그가 대학에서는 국문학과 국어를 가르쳤다. 이는 중앙불전 시절 문학과 어원에도 소양이 깊던 허영호 교수로부터 받은 영향과 가르침과도 무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경기대에서 교수로 승진하고 도서관장을 지낸 다음 그는 다시 1961년 동국대학교 교수로 영입된다. 동국대학교는 중앙불전과 혜화전문을 거쳐 승격한 대학이어서 그에게는 그대로 모교인 셈이었다. 홍정식은 이제 모교이자 불교학의 총본산인 동국대학교에서 드디어 불교학자로서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처럼 불교학자로서 본격적인 연구와 교육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에게는 항상 또 다른 과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가 그의 안목과 행정적 능력 등을 필요로 하여 각종 보직을 계속 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교수 부임 이후 교무처장, 교양학부장, 불교대학장, 도서관장 등을 역임하며 대학 발전에도 크게 힘썼다.

그러나 그가 학교 행정 분야 보직에만 진력한 것은 아니다. 1973년에는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장에 취임하였다. ‘불교 및 불교 관련 동양문화의 연구를 통하여 민족문화의 창달과 인류문화 증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1962년에 설립한 불교문화연구소는 당시로는 국내 유일의 대학 부설 불교연구기관이었다. 그만큼 동국대학교에서 불교문화연구소의 위상은 높았고 그 책임 또한 막중하였다. 이곳에서는 《불교학보》의 간행을 비롯하여 정기적인 학술세미나와 국내외 불교학술 교류 등 수준 높은 불교 연구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는 1978년에도 다시 연구소장직을 맡아 불교학술 활동을 이끌었다.

한편 홍정식이 처음 연구소장이 되었던 1973년, 한국불교에는 매우 뜻깊은 활동이 개막되었다. 한국불교학회의 역사적인 출범이 그것이다. 전국의 불교학자와 사찰 및 크고 작은 불교학술 단체를 망라하여 한국의 불교학연구 역량을 집결하였는데, 이로써 한국불교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들이 드디어 결실을 본 것이다. 학회의 창립에는 발의에서부터 결실에 이르기까지 홍정식의 노력과 산파 역할이 주효하였다. 그는 그해 7월 한국불교학회 초대회장에 피선되어 3년 동안 학회를 이끌었고, 다시 1976년에 재임함으로써 초창기 학회의 기반 구축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 밖에도 불교계 활동으로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지도위원장, 재단법인 조계학원 평의원, 재단법인 보문학원 이사장, 대한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교종립학원연합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처럼 대학에서뿐만 아니라 1970~80년대 한국불교의 중요한 현장들에서 불교학자로서 역할을 다해온 그는 1983년 동국대학교를 정년퇴임 한다. 그러나 퇴임 후에도 원로 불교학자의 활동과 기여는 멈추지 않았다. 홍정식의 학문 세계와 열성은 불교계와 불교 대중을 위한 회향으로 이어져 그대로 한국불교의 토양을 더욱 북돋아갔다.

2. 저술과 번역 그리고 불교의 현대적 해석   

 

 《불교입문》
(신흥출판사, 1976).

불교학자로서 홍정식이 처음 펴낸 저술은 《불교입문》이었다. 총 7장 233면 분량의 이 작은 책자는 제1장 석존 출세 이전의 인도사회, 제2장 석존의 전기, 제3장 석존의 교설, 제4장 아비달마불교, 제5장 대승불교, 제6장 현대와 불교, 제7장 성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책의 서언에서 “불교를 새로이 공부하려는 사람들을 위하여 석존의 근본사상을 요약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어 “그동안 대학에서 불교개론을 강의하면서 한 번도 그 완결을 보지 못하였고, 또한 그 설명의 심천도 일정하지 못하였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왔다”라고 한 데서 이 책이 불교개론 과목의 강의를 위해 저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동국대학교에서 이 분야 교재로는 김동화의 《불교학개론》이 있었다. 주지하듯이 새로운 학문적 분류 방법과 해석으로 불교 전체를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있는 《불교학개론》은 오늘에 이르러 ‘근대불교학의 성과’로 평가받을 만큼 권위를 지니는 저술이다. 그러함에도 홍정식은 불교학개론 강의를 위해 자신의 《불교입문》을 저술한 것이다. 불교 공부의 초입자를 위한 저술인 만큼 책 제명을 《불교입문》이라 한 것도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의 성격을 감안하더라도 《불교입문》에서는 몇 가지 장점과 함께 그것이 지닌 입문서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있다. 1953년(단기 4286)에 탈고한 김동화의 《불교학개론》과 그보다 10년 후에 집필한 《불교입문》을 대비했을 때 대략 다음 몇 가지로 그 특징을 말할 수 있다.

《불교입문》은 첫째, 이해하기 쉽지 않을 정도의 한문 어투나 어려운 불교용어를 가능한 지양하고 불교 전체를 비교적 평이하고 간결한 문체로 서술하고 있다. 이는 저술의 시기적 차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저술자의 불교인식과 서술방법의 차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아마 홍정식이 대학에서 국어학을 가르쳤던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둘째는 다양하고 복잡한 교설을 모두 망라하는 대신 간결하게 요약하여 그 핵심을 제시하고 있다. 불교 공부의 초입자를 염두에 둔 배려였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불교입문》에 제시한 교상 및 그 서술에서 더욱 요령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입각해 있는 역사주의적 관점 때문이라 하겠다. 셋째는 간소한 책자이지만 《불교입문》은 전체 내용이 결코 가볍거나 간소하지 않다. 이는 앞에서 본대로 전체 구성이 충분히 말해주며, 특히 결론에 해당하는 제6장 현대와 불교에서는 현대에서 불교의 위상을 잘 파악해놓고 있어 인상적이다. 르네상스 이후의 인본주의, 합리주의, 실존철학의 사조와 경향에 대한 개괄과 함께 진리에 대한 자각과 대승의 대비행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의 당위적 요청을 강조하고 있음이 그러하다.

이 《불교입문》은 대학 강단과 일반 교양인들에 이르기까지 불교에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고 그 깊은 뜻을 친근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따라서 이 책은 제명을 《불교입문》보다는 《불교학입문》으로 했더라면 더욱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홍정식의 《불교입문》은 1960~70년대에 불교학을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지도서였고 그 영향은 일반 대중에게까지도 크게 미쳤다. 그런 점에서 학문적인 대중불서로서 이 책의 역할은 충분히 평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홍정식은 저술 쪽보다는 주로 경전과 선어록 등의 번역 및 역해에서 더 많은 업적을 남겼다. 《묘법연화경》(1966)의 번역과 《입보리행론》의 번역인 《보살의 가는 길》(1973)을 비롯하여, 1976년에는 《반야심경》 《금강경》 《법화경》 《유마경》 《회쟁론》 《육조단경》 《선어록》을 간행하였다. 이들 경론의 번역 가운데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산티데바의 《입보리행론》과 나가르주나의 《회쟁론》이다. 전자는 보리행 즉 대승에 있어서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실천적 교훈을 설한 것이다. 후자는 일체공무자성(=연기)에 대한 논란과 그에 대한 논파로 무자성·공의 학설을 선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들 논서의 번역은 깨달음의 추구와 대승교학의 근본 명제에 대한 역자의 관심 반영으로 읽힌다. 또 《금강경》은 범본 대조본, 《육조단경》은 돈황본 번역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번역서로 문고판 《화엄경(초역)》과 《법화경 요해》 등을 간행했으며, 《나무대자대비관세음보살》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홍정식은 주로 1970년대에 다수의 대승경론 번역과 주해에 주력하고 있다. 이런 노력은 대승사상에 대한 그의 학문적 관심의 일단을 보여주지만, 그는 한역경전이 완전한 진실일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말씀의 본질을 끝까지 규명하는 학문의 필요성을 확인하면서 그는 그동안의 불교학 풍토를 이렇게 비판한다.

흔히 한문경전을 금과옥조처럼 생각할 뿐 그것의 잘잘못을 비판·분석하고자 하는 바가 없었다. 또 소승불교를 무시하는 경향이 농후하고 대승사상이니 사교입선(捨敎入禪)이니 하지만 대승불교의 모태는 아함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 등을 너무 등한시해왔다. 조계종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의 공사상이 연기에서 비롯되는 것임에도 거기에는 연기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니 결국 ‘색은 공이요 공은 색이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왜 그런가를 끝까지 규명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또 근대 불교학문의 현실과 관련해서는 안타까움과 함께 불교학자로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자신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도 있다.

불교의 근본을 살피지 않는다. 왜 부처님이 법을 설하시는가, 중생을 구제하려 했던가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제외되고 교상판석(敎相判釋)에 머물고 말았던 것이 근대 불교학문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 사실 우리는 아직도 불교 공부에서 고답적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찍이 범어나 팔리어 서장어를 익혀서 원전을 보며 참다운 학문을 하지 못하고 한역경전이나 일본책을 보며 간접적인 연구에 국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는 나 또한 부끄럽게 생각한다.

홍정식은 스스로 근대 불교학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했음을 자책하고 있지만, 그러나 근대불교학으로의 성장 과정에서 그의 역할은 일정 부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특히 그의 전통불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 노력들이 그러하다. 대체로 근대불교학의 진행 단계는, 전통강원의 학풍→전통교리와 근대교학과의 만남과 절충→근대불교학의 성장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그럴 경우 홍정식은 절충 시기에서 성장 시기로 나아가는 맥락을 연결 짓는 지점에 위치한다. 교학에 있어서 전통시대의 관습적이고 신앙적인 사고와는 차별화된 그의 불교학 해석과 학문적 자세가 이를 말해준다. 그 구체적인 예로는 먼저 그의 붓다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그는 붓다를 신비화하기보다는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일생과 가르침에 대해 설명한다. 대중들에게 불법을 전할 때에도 붓다를 신격화하는 태도를 경계했다. 붓다를 존경하고 또 귀의하는 이유는 그분이 초월적 절대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붓다를 인간의 선상에 놓고 인격의 위대함과 가르침에 대한 귀의와 신앙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처럼 붓다에 대해 더도 덜도 아닌 인간주의적 이해를 시도하고 있는 만큼 붓다의 출가와 깨달음 이후의 전법에 대한 시각도 남다르다.  “많은 불교학자나 스님들은 부처님께서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 나왔고 다른 사람을 위해 출가해 평생 설법하며 살았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부처님은 자신의 문제를 중심에 두고 출가한 면이 크다.” 이는 붓다가 사문유관 이후 출가한 것은 생로병사를 뛰어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받을 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이해이다. 그는 ‘부처님을 너무 평범한 인간으로만 생각해 죄송한 마음’임을 내보이면서도, 부처님과 중생이 처음부터 성인과 범인으로 갈라지는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진리를 깨달은 성자는 외롭다. 진리의 세계를 모르는 사람들 속에 홀로 있는 정각자의 고독 바로 그것이다. 성자가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범부 중생들을 자기 수준으로 끌어올려 자신과 유사한 부류를 형성해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가르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홍정식이 생각하는 불교 전도정신의 근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법이나 포교가 이타정신의 발로라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이타정신이 아니라 결국 자리(自利)의 정신이다.”라고 말한다.

‘포교도 결국 1차적으로는 자리행이며 2차적으로 이타행’이라는 이러한 관점을 그는 오늘의 포교 문제에도 적용시킨다. “단순히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한다는 생각이 들 때 더 열심히 할 수 있으며, 더욱 열정을 다하고 자기의 모든 힘을 경주하는 전법이 될 수 있다는 것. 오늘의 불교 포교에 있어서도 이런 정신이 왕성하면 할수록 불교가 더 활발하게 발전하고 또 융성해질 것”이라는 격려이자 기대이다.

계율 문제에 대해서도 홍정식의 생각은 불교학자로서의 소신을 느끼게 한다. 그는 계율을 중요하게 여겼다. 수행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청정한 삶을 가꾸기 위해 반드시 계율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었다. 그러나 지키지 못할 계율을 그대로 고수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계는 지키기 위한 것이지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지키지 못할 계를 갖고 있으면 그것은 자기에 대한 기만이고 사회에 대한 기만이다”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반드시 지켜야 할 계율과 계율의 정신도 존중해야 하지만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른 계율의 해석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그의 분명한 생각이다.

전통에 얽매여 관습적 신앙적으로 고수해오고 있는 불교 전반에 대한 그의 인식은 이상과 같이 새로운 해석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지향한다. 반드시 그것이 학문적인 범주에 속하는 문제가 아닐지라도 그의 남다른 시각과 확신에 찬 발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불교학의 다양한 전개와 발전을 자극하고 한국불교의 미래적 비전을 그려보기에 충분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3. 법화사상 중심의 학문세계

홍정식의 학문적 주요 관심분야는 대승교학, 그중에서도 특히 법화사상을 중심으로 말할 수 있다. 그의 학문세계는 그만큼 법화경 연구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다. 우선 그의 법화 관련 논저부터 연도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성문승 수기작불의 의의〉 《불교학보》 제1집, 1963.
② 《묘법연화경》(번역), 1966.
③ 〈법화경 결집자에 대한 고찰-특히 자위적 고심에 대하여〉 《불교학보》 제7집, 1970.
④ 《법화경 성립과정에 관한 연구》 동국대 박사학위 논문, 1974.
⑤ 〈현대사회에 있어서 대승보살의 이상〉 《불교와 현대세계》 동국대학교, 1977.
⑥ 〈법화불교의 연구〉 《동국대 대학원 논문집》 1978.
⑦ 《법화경 요해》 대한불교 천태종 총무원, 1986.
⑧ 《대자대비 관세음보살》 대한불교 천태종 총무원, 1986.

 

미산 화갑기념 특집호 《불교학보》(14집)
고희기념논총
《한국불교학》(11집).

이들 논저 외에도 그는 불교계의 여러 잡지 등에 법화와 관련한 수많은 논설과 글들을 발표하였다. 그가 이처럼 《법화경》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계기는 1960년대 한국불교계의 혼란스럽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대략 1950년대 초부터 시작하여 60년대 말까지도 한국불교는 이른바 분규 혹은 정화의 극심한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비구·대처승 간의 종권분쟁, 사찰쟁탈의 반복 등 참담한 일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 같은 한국불교의 대립갈등과 혼란을 지켜보면서 홍정식은 불자로서 자괴감을 느꼈고 불교학자로서 고민이 깊었다. 함께 불교 안에 있는 이들 두 세력을 이념적으로 화해 통합할 방법을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홍정식은 《법화경》에서 그 해답을 발견한다.

내가 법화사상을 좋아하고 유달리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해방 이후의 심각한 종단 싸움과 만연된 파벌의 내부환경을 해소할 수 있는 말씀이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었다. 회삼귀일(會三歸一)의 포용사상은 대승·소승 모두를 일불승(一佛乘)으로 융화시키는 데 주저치 않는 것이다. 또 여인성불(女人成佛)이라 하여 재래의 분별개념을 벗어나 있고 끝내 데바닷다까지도 성불시키는, 즉 모든 것을 안아버리는 법화사상이 불교의 궁극적인 귀결처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외도까지도 교화해나가는 불교가 하물며 불제자를 표방하는 같은 무리끼리 합일하지 못한다는 것은 학문 이전에 선결되어야 할 문제이다.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이 종파나 파벌에 매여서는 결코 안 되며, 그것은 분명히 타파되어야 할 일이다.

물론 이 같은 생각이 곧바로 불교계의 대립과 갈등 문제를 해소시킬 실질적인 대안으로 작용할 수는 없었다. 투쟁하는 현실과 학문적 이상은 그만큼 서로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이후 그의 《법화경》 연구는 더욱 진지하고 깊이 있게 진행되었다. 그가 《법화경》에서 맨 먼저 주제로 삼은 연구논문은 앞에서 본대로 〈성문승 수기작불(授記作佛)의 의의〉이다. 역시 한국불교 현실 문제의 해결에 대한 자신의 고민과도 관련이 있어 보이는 이 논문의 요지만을 간추린다.

현재의 《법화경》 28품은 한 시기에 모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 가운데 서품(序品) 제1로부터 수학무학인기품(授學無學人記品) 제9까지의 9품은 《법화경》의 근원적인 원시분에 해당한다. 이들 각 품은 부처님이 성문들에게 성불을 예언하는 내용이다. 성문 상근인 사리불을 비롯하여, 성문 중근인 수보리·가전연·마하가섭·목건련, 성문 하근인 부루나 등 1천2백 성문·5백 비구·학무학 2천 인과 같은 모든 성문들에게 차별 없이 수기(授記)하고 있는 것이다. 대승경전인 《법화경》이 성문인에게 수기함을 골자로 하고 있음은 무슨 이유와 목적에서일까. 대승불교의 교의상으로 보더라도 성문들을 언제까지나 성불의 권외(圈外)에 방치할 수는 없다. 평화와 자비를 특색으로 하는 동일한 교단에서 배타적인 사상으로 성불·불성불의 구분을 세우는 것은 불가하다. 여기에 소승·대승 간의 쟁투를 지양하고 양 불교를 조화시키려는 새로운 운동을 전개함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할 때 대승불교의 수기사상은 실로 새 시대의 각광을 받으며 등장한 혁신적인 조화사상이라 할 만하다. 《법화경》은 근본불교의 교법을 대승화하여 성문·연각 이승을 방편 세계에 포섭하고자 한다. 따라서 보살승의 독점물이었던 수기작불 사상을 성문승에게 개방하여 소승과 대승의 쟁론을 지양하고 있다. 《법화경》의 원시분인 앞 9품으로 볼 때, 이 경은 양 불교의 조화라는 기치를 높이 들고 출현한 경이다.  

홍정식은 ‘대승이 소승에게 수기를 주었다는 것은 소승을 포섭하고 용납했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외도까지도 포용하고 교화하여 부처님께 귀의하도록 하는 것이 불교인데 의견이 다르다고 서로 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비판하는 그는 오늘의 현실에 대해서도 타이름을 잊지 않는다. “현대의 불교와 사회를 막론하고 진보·보수의 대립을 일으키는 사람들도 법화경의 가르침을 새겨들어야 한다”는 것. 법화 연구자의 확신과 진심 어린 충고이다.

한편 〈법화경 결집자에 대한 고찰〉은 《법화경》이 대·소승의 정통성 시비가 치열할 때 대승 쪽에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자위적(自衛的) 고심으로 편집되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 논문의 결론 부분을 다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서기 1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석존 재세 시 불교 본연의 모습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혁신적 불교운동이 일어나고, 이 운동의 주동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천명하기 위해 새로운 경전을 결집한다. 이 같은 경전결집은 재래의 보수적 교단을 자극함으로써 이들은 혁신 불교교단을 외도, 이단시하고 전통과 권위를 앞세워 혁신불교 운동자들을 위압하려는 태도를 취하였다. 양 세력 간의 이 같은 반목과 대립은 자연히 경전 결집에도 영향을 끼쳐 새로 결집된 대부분의 경전에는 그런 사정들이 기술되어 있다. 《법화경》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이 경은 특히 다른 경전에 비하여 철저하게 자위에 대하여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는데, 그것에서는 다음 몇 가지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첫째, 법화경을 소의로 하는 새로운 불교혁신운동은 역사적 전통 속에서 탄생했다. 둘째, 법화불교 운동자들을 가해하는 자에 대한 협박(죄보의 나열)은 이 운동이 지극히 약소한 형편에서 출범하였음을 추측하게 한다. 셋째, 이 운동의 집단은 자신들의 소신에 확고부동함이 있었고 이러한 확신이 그들에게는 무한의 용기를 주었다. 그들은 자파의 세력확장을 위하여 적극적인 전도활동을 과감하게 펼쳐간 집단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상의 두 편 논문은 다 같이 《법화경》에서 엿보이는 사실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자가 불교 안에서 서로 다른 입장을 대승적 정신으로 포섭·조화하려는 데 중심을 두고 있다면, 후자는 법화 운동자들의 불교혁신을 위한 이념적 확신과 함께 자기방어적 수단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고심에 주목한 것이다. 어느 측면에서 말하든 이는 법화교학에 대한 홍정식의 역사주의적 관점 또는 안목의 반영이다. 그는 대승불교에 있어서도 그 이면에 담긴 역사적 사실을 함께 고려하면서 교학사상을 바라보고 있다. 굳이 말하자면 법화사상 중심의 그의 학문세계는 현실 문제를 기점으로 출발하여 대승의 방편과 이상을 탐색하고 다시 현실 속으로 복귀하여 인간사회에 평등, 조화, 대비를 구현하려 한 정신으로 표현해 볼 수 있겠다.
이 같은 그의 《법화경》에 대한 천착은 마침내 하나의 결실로 나타난다. 1974년 동국대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법화경 성립과정에 관한 연구〉가 그것이다. 이는 법화·천태 분야에서 나온 첫 박사학위 논문으로, 1980년대 이전까지는 이 분야 연구의 유일한 성과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법화 연구를 개척 선도해온 그는 한국불교학의 다양화와 그 발전에 한 주요 부분을 담당해온 학자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법화사상을 중심으로 홍정식의 학문세계를 살펴보았지만, 물론 그의 학문적 관심과 노력이 법화교학만으로 다한 것은 아니다. 법화 이 외의 연구물 가운데서 다음의 논문들을 일별하면서 그의 학문세계의 또 다른 면에 대해서도 짚어 보기로 한다.

① 〈태국사회의 불교적 배경〉(연구보고서), 1968.
② 〈불교의 정치사상〉 《불교학보》 제10집, 1973.
③ 〈고려 천태종 개립과 의천〉 《박길진 박사 화갑 기념 한국불교사상사》 1975.
④ 〈불교윤리의 본질-불교와 효〉 《한국불교학》 1977.
⑤ 〈고려 불교사상의 호국적 전개〉 《불교학보》 제14집 1977.
⑥ 〈원효의 진속원융 무애론〉 《철학사상의 제문제:한국철학의 근원탐구(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⑦ 〈불교사상의 현대적 이해를 위한 고찰〉 《한일문화 교류 협의회 제10차 대회기념 불교학술 논문집》

이들 논문에서 주제의 공통성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그의 연구가 불교와 관련하여 정치, 사회, 윤리 그리고 한국불교의 역사와 사상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고르게 분포해 있음을 확인할 수는 있다. 이를 굳이 말한다면 교학적 이론과 사상보다는 응용불교 또는 불교의 실천에 관한 그의 관심이라 하겠다. 참고삼아 여기에서는 한국불교의 문제를 다룬 〈고려 불교사상의 호국적 전개〉에서 고려시대에 국가에서 선보다는 교를 흥융시키고 있는 이유를 두 가지로 논한 부분을 요약하여 옮겨둔다.

첫째는 호국신앙적인 입장에서이다. 현종이 대장경 조조(雕造)를 발원한 것도 호국신앙에 의한 것이며, 의천의 교장(敎藏) 조조 발원 또한 ‘중흥불법·보리(普利)국가’에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제불의 호념과 제천의 옹위력이 되는 것’으로 신앙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호국신앙을 고취할 수 있는 것은 선보다 교에 있었다. 호국신앙의 대표적인 불사가 《인왕경(仁王經)》에 입각한 것임은 물론이지만 거의 모든 대승경전에는 제석천을 비롯한 천신들이 불법수호를 약속하고 있다. 특히 《화엄경》은 그러한 호법신들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경이다. 따라서 호국신앙의 고취를 위해서는 화엄학을 비롯한 교종의 부흥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당시의 국제관계로 볼 때 선보다는 교의 흥륭이 국가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다. 고려는 요(遼)보다는 그와 대치 관계에 있는 송(宋)에 더 호감을 갖고 있었다. 문치주의로 알려진 당시의 송조는 선보다는 교를 특별히 외호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세계 최초의 대장경 개판을 진행시킨 것도 송조였다. 만일 당시의 송조가 이렇게 교학 외호에 힘쓰고 있었다면 고려의 교학 육성 또한 그러한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볼 때 당시 고려의 교학 육성은 신앙적으로나 국제외교상으로 국가 안녕과 발전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불교 응용 및 실천에 대한 관심으로서 홍정식의 학문세계의 일단을 짐작해보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학술적인 논문 이외에 그의 수많은 단문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는 1960년대 말부터 1990년까지 《불교사상》 《법시》 《법륜》 《불광》 《신행불교》 등 불교계의 여러 잡지들에 140여 편의 글들을 싣고 있다. 이 많은 글에서 그는 불교와 인간을 사색하고 불교의 사회적 관심을 표출하는가 하면 자비의 눈길로 대중을 바라보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 이는 법화사상 중심의 그의 학문세계와도 크게 동떨어져 보이지 않는다. 그것에서도 대승 보살행자의 보리심과 그의 묵묵한 실천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4. 한국불교를 향한 기대와 회향

위에서 살펴왔지만 홍정식이 남긴 저술과 연구논문으로만 본다면 그 양이 결코 많은 편은 아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의 《불교입문》은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 불타 교설의 핵심과 이후의 교학 전개, 불교의 영원한 가치와 진리탐구의 인생을 강조한 ‘현대와 불교’ 등의 내용은 훌륭한 불교입문서이자 개설서로서 모자람이 없기 때문이다. 또 《법화경》 초기의 문제를 다룬 대표적인 두 편의 연구논문과 박사학위 논문도 불교에 대한 그의 현실인식의 반영과 함께 법화 연구의 개척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주목받는다.

《법화경》 《금강경》 《입보리행론》 등 대승경론과 《육조단경》 선어록 등의 경론 번역 및 역해들은 비교적 양이 풍부하다. 작업이 이루어지던 시기 등을 감안하면 이들 역시 그의 학문적 업적으로 말하기에 충분하다. 특히 이 같은 다양한 경론의 번역 노력은 그 자신이 불교를 탐구해가던 한 과정이며 방법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평소 경전에서 눈을 떼지 않는 학자였다. 이런 홍정식에게 경론들의 번역과 역해 작업은 진리와 지혜의 길을 찾아가는 스스로의 방법이기도 했을 것이다.

한편 그는 후학들의 지도와 격려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이 경우,그의 애정 어린 충고와 격려 속에는 항상 닮기를 권하는 모델이 뚜렷하였다. 곧 인류의 스승으로서 붓다와 그 시대 붓다의 제자들이었다.

부처님은 중생보다 한 가지가 많아 부자이고 한 가지를 버려 가난뱅이이다. 그분은 반야지혜가 있어 부자이고, 무명과 탐욕이 없어 가난하다. 부자가 되기를 희망한다면 먼저 가난해져야 한다. 자신이 부처님의 제자이자 불교학자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잠도 안 자고 수행하다 눈이 먼 아나율 존자처럼 온몸을 바쳐 공부하겠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

제자들에게 들려주는 이 말에서는 그 자신이 붓다를 신앙의 대상인 초월적 구세자로서가 아니라 닮아 가야 할 최고 이상의 인격으로, 친근한 스승으로 삼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고귀한 진리를 얻기 위해선 어리석음과 탐욕에 빠지지 말라는 전언(傳言)을 실천하며 살다간 그 역시 제자들에게는 현학적인 불교학자이기보다는 친근한 스승이었다.

또 학생들을 가르칠 때마다 그 말과 몸짓은 느릿느릿 유연했지만, 강의 내용은 항상 신선하고 의연하였다. 전통이라는 이름의 관행과 의식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불교해석과 이해들이 그러하였다. 그는 불교가 본래 희론과 교권주의를 배격하는 종교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같은 불교 본래의 입장은 그대로 그의 불교적 관점과 사유들이기도 하였다.

석존의 교설은 경험적 현실을 초월한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다. 항시 극히 현실적인 것, 즉 문자 그대로의 생활적인 점에 특질이 있다. 따라서 석존의 교설은 인간의 이론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 아니고 호기심과 지식욕을 만족시킴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 상대 인간의 내면적인 변화를 일으킴을 목표로 하고 이 내면적 변화를 통하여 참다운 관조적 지혜를 획득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최고의 목표에 도달하게끔 하는 것이 최대 관심사였던 것이다. …… 이론을 위한 이론은 무의미 무가치한 것으로 보았다. 즉 초경험적 형이상학적 문제들은 무기(無記) 또는 희론이라 하여 배척한 것이다. 

불교계 잡지에 기고한 이 글은 《불교입문》에도 동일하게 나타나 있다. 이 같은 불교의 근본 입장과 사유를 바탕으로, 전통적 사고의 불교를 오늘의 불교로 새롭게 일구어내고자 한 그의 노력은 강의실에서만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밖으로도 많은 사람에게로 향하였고, 전국의 대학생 불자들 또한 그 영향을 크게 받았다. 

1960년대 초부터 몇몇 대학들에서는 대학생 불교단체의 활동이 일어났고 이들은 1966년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를 결성하였다. 불교 지성들의 이런 움직임은 아직도 구태에 멈추어 있던 한국불교에는 희망의 새바람이고 새로운 물결이었다. 따라서 이 무렵 시대의식에 깨어 있는 몇몇 스님들이 앞장서 이들을 지도하기 시작했고 각 대학의 이름 있는 불자 교수들도 함께 참여하였다. 당시 젊은 교수이던 홍정식 또한 이런 ‘대불련’ 활동에 각별한 관심과 정성을 쏟았다. 그가 대불련 지도위원단에 합류하고 뒷날 지도위원장을 맡은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의 사유 자체가 이 시대에 살아 있는 참된 불교를 지향했던 것과도 같은 맥락이었다.

매년 여름과 겨울 방학이면 으레 대불련이 주최하는 전국 규모 산사수련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홍정식은 대학생들과 함께하며 자상한 지도를 폈다. 대화와 특강으로 젊은 불자 지성들의 시대의식을 일깨우고 보살적 사명을 고취시켜 간 것이다. 그의 지도를 받으며 젊은 불자들은 붓다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새로운 눈을 얻었고 저마다 걸어야 할 보살의 길을 그려볼 수 있었다. 1960년대 대불련이 중심에 있던 민중불교는 어떤 의미에서든 한국불교를 진일보하게 했고, 1970~80년대 대학생이 중심이 된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을 변화시켰다. 이를 굳이 관련지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느 부분 홍정식의 이 같은 대불련 지도활동 및 영향과 전혀 무관하다고만 말할 수는 없겠다.

정년퇴임 이후 홍정식의 활동은 주로 일반 신자 대중을 위한 교육이 중심이 되었다. 불자들의 불교 이해와 신행 향상을 위해 불교 교양대학들이 출현하던 시기에 그는 천태종의 금강불교 교양대학장을 맡아 열성을 다하였다. 이 같은 활동 역시 한국불교에 대한 기대와 회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의 불교가 반드시 불교학을 통해서만 발전할 일은 아니며, 그것은 일반 신자 대중의 교육을 통해서도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만년에 홀로 수심(修心)하고 독서를 하면서 유유자적했던 홍정식은 여전히 한국불교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언제나 불교 서적들이 쌓여 있곤 했다. 의외로 그 대부분은 신간 불교학술서이거나 각종 불교 관련 학회의 논문집들이었다. 후학들의 새 저술이나 연구논문들이 나올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읽고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한국불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부끄러워했던 그는 정년퇴임 기념 강연의 자리에서도 똑같은 심정을 밝혔다. ‘후인을 위해 충분한 학문적 여건을 만들지 못해 미안한 감이 든다’는 고백이었다. 만년까지 후학들의 저술과 논문을 일일이 챙겨 읽고 있음은 혹시 이런 미안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말하든 홍정식은 여전히 한국불교학계에 애정 어린 관심과 기대를 갖고 끝까지 눈길을 보내고 있었음이다. 그리고 이는 한국불교와 불교학계를 향한 노학자의 회향 그것이었다. ■

 
이봉춘
/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박사).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 교수·불교문화대학장·대학원장, 원효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삼국·통일신라불교의 주체적 수용〉 〈태고보우 시대의 불교사회〉 〈뇌허 불교학의 비전과 계승〉 등이 있고, 저서로 《불교의 역사-인도·중국·한국》 《조선시대 불교사 연구》 등이 있다. 현재 천태불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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