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 대강백, 친일의 길을 걷다

이번 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승려 이회광(李晦光, 1862~1933)은 조선조 말과 일제강점기에 걸쳐 활동한 인물로 ‘불교계의 이완용’ ‘매종역조(賣宗易祖)의 친일승’ 등과 같은 수식어가 붙는다. 이회광은 조선조 말에는 강백(講伯)으로 명성을 떨친 승려였지만, 일제강점기에는 극렬한 친일 활동으로 강대련(姜大蓮), 곽법경(郭法鏡), 이보담(李寶潭) 등과 함께 일제 초의 대표적인 친일 승려로 거론되고 있다.근대 한국불교사 연구에서 항일−친일의 이분법적 접근이 거센 비판을 받는가 하면, 항일과 친일의 범주에 의한 역사 연구가 범죄수사 행위와 다름없다는 질타가 가해지고 있는 이 시점에 필자가 굳이 친일 승려인 이회광을 보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소박한, 아니 단순하기조차 한 다음의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먼저, 근대 한국불교사는 친일 승려들의 활동에 대한 면밀한 검토, 분석 없이는 결코 온전히 기술될 수 없다는 비감한 현실이다.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 한국 근대불교사를 주도적으로 견인해 간 이들은 불행히도 친일 승려였다. 그들의 활동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근대 한국불교사의 큰 그림이 그려진다는 사실은 모두가 공감하리라고 본다. 아마도 이회광은 그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한국불교계는 역사의 범죄자임에 분명한 친일 승려에 대해 과연 엄중한 역사적 단죄를 내린 적이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친일불교가 본격적으로 거론되며 승려들의 친일 행각이 구체적으로 폭로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990년대 초였고(임혜봉 《친일불교론》 1993), 그리고 이 분야를 연구하는 전문 인력은 과연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망설일 정도로 거의 전무에 가까운 실정이다. 이제 근대 한국불교사 연구에서 항일−친일의 이분법에 기초한 민족주의적 사관을 극복해야 한다는 미명 아래 친일 승려들에게 무조건적으로 면죄부를 부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최근에 거론된 외국의 한국불교 연구자들의 민족주의적 관점에 대한 비판은 다분히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국내의 연구자들은 그 덫에 걸려든 게 아닌가 하는 우려마저 든다. 한국불교계의 대처(帶妻) 문제를 친일과 항일의 범주로 재단하여 거침없이 비판을 쏟아 내는 그 논조는 단적인 예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근대 한국불교사의 전개가 일제의 종교정책에 순응한 친일 승려들에 의해 주도됨에 따라, 친일적 성향이 불교계의 주류를 이루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 때문에 친일 승려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분석과 이에 근거한 엄중한 역사적 평가는 그동안 많은 관심을 받아온 민족불교론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1. 조선 말의 대강백(大講伯)

이회광의 법명은 사선(師璿) 또는 유선(有璿)이고, 회광(晦光)은 그의 법호였다. 강원도 양양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집안의 자세한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이회광이 출가한 이후 33세(1894) 때까지의 행적은 조선 말의 스님 범해각안(梵海覺岸, 1820~1896)이 편찬한 《동사열전(東師列傳)》의 〈회광강백전(晦光講伯傳)〉에 간략히 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회광은 설악산 신흥사 설허(雪墟) 문하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은 후 전국 각처를 돌며 내전(內典)과 외전(外典)을 두루 섭렵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보운긍엽(寶雲亘葉) 선사의 조실에 들어가 법맥을 이으며 환성지환(喚醒志安)의 9세 법손이 되고 휴정(休靜) 선사의 13세 법손이 되었다. 이회광이 환성의 법맥을 이어 홀로 강당을 열었을 때 그의 가르침을 받고자 몰려온 학승(學僧)들 때문에 그는 1년 내내 한가한 시간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가 하면 그는 전국의 여러 명산과 대찰에 주석하면서 안거도 게을리하지 않은 청정한 수행승이기도 했다.

이렇듯 학식과 수행에 탁월했던 이회광을 두고 범해 스님은 《동사열전》에서 “전국의 학인들은 풀덤불을 헤치며 스님의 가풍을 우러러 몰려들었고, 봄에 사향노루가 산속을 지나가면 풀이 절로 향기로워지듯 인품의 향기가 남았다고” 평했다. 이회광은 33세 때(1894) 강원도 건봉사에 주석한 것으로 전하고 있는데, 그때까지는 조선의 대강백으로서 명성을 떨친 인물이었다. 지방의 대사찰에서 학승을 교육하던 이회광이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은 것은 20세기 초 불교연구회 회장과 명진학교의 교장직을 맡으면서였다.

2. 불교연구회 회장, 명진학교 교장, 원종(圓宗) 대종정

이회광이 지방 강원의 강백의 신분에서 벗어나 중앙 불교계에 본격적인 행보를 내디딘 것은 일제에 의한 통감정치가 시행되던 때였다. 이회광은 1906년에 설립된 불교연구회에서 모습을 보였는데, 을사늑약 체결 후로 불교계도 일제 통감부의 간섭을 받던 시기였다.

1902년 대한정부가 전국의 사찰 관리를 위해 궁내부 소속의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를 설치했지만 이것이 별다른 성과 없이 2년 만에 폐지되자, 불교계는 1906년 2월 화계사 승 홍월초(洪月初), 봉원사 승 이보담(李寶潭) 등이 중심이 되어 한국불교의 근대화를 위해 원흥사에 불교연구회를 설립하였다(초대 회장 홍월초). 당시 불교연구회가 있었던 원흥사는 1899년(혹은 1902년) 대한제국 정부가 동대문 밖에(현 창신초등학교 자리) 건립한 사찰로 전국의 수사찰(首寺刹)인 대법산(大法山)으로 지정되는가 하면, 대한제국 황실의 원당(願堂)이기도 하였다. 원흥사는 1910년 도성 내에 각황사가 설립될 때까지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던 대표 사찰이었다.

이회광은 바로 원흥사에 두었던 불교연구회의 설립에 참여하였고, 또 다음 해인 1907년 불교연구회의 회장직과 연구회에서 운영하는 명진학교(明進學校) 교장직을 맡으면서 불교계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당시 불교연구회는 회의 설립 목적을 학문연구와 교육개발을 통한 자비(慈悲)와 수선(修善)으로 하였고, 원흥사에 본부를 두고 지방의 각 사찰에 지부를 설치하였다. 전국 사찰관리를 위한 사사관리서가 폐지되면서(1904) 폐사 위기에 놓였던 원흥사를 관리하였고, 근대교육에 큰 관심을 갖고 1906년 4월 원흥사에 근대식 불교학교인 명진학교를 설립하였다. 고등교육기관인 명진학교를 정점으로 하여 지방의 많은 사찰에도 기초학교가 설치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등 근대 불교교육의 제도 확립에 적지 않게 기여하였다.

 

‘하오리 하마까’라는 일본 승려들의 승복을 입은 이회광(李晦光, 1862~1933)
그러나 불교연구회는 일본의 정토종 개교사 이노우에 켄신(井上玄眞)의 권유를 받아 설립된 까닭에 처음부터 일본색이 짙은 단체로 파행적인 행보를 걷기도 했다. 회의 종지(宗旨)를 정토종으로 선포하고, 회원에게는 ‘정토종교회장(淨土宗敎會章)’이라고 새긴 배지를 달게 하는가 하면, 한국불교를 일본 정토종에 합병시킬 계획을 세우는 등 많은 문제를 드러내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에 불교연구회는 일본적인 색채를 탈피하고, 한국불교의 실정에 맞는 실질적인 조직으로 바꾸어 보고자 1907년 6월 각도의 사찰 대표자 50여 명이 원흥사에서 이보담의 후임으로 이회광을 불교연구회 회장, 명진학교 교장으로 선출하였다.이것으로 이회광은 한국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불교연구회 회장에 선임된 이회광은 다음 해인 1908년 3월 전국의 승려 대표 52명을 원흥사에 소집해 근대한국 최초의 불교 종단인 원종(圓宗)을 설립하고, 그 사무기구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발족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대종정(大宗正)에 선임되었다. 이로써 기존의 불교연구회가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원종종무원이 연구회의 뒤를 이어 종단의 사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당시 원종종무원은 이회광을 대종정으로 하여 산하에 총무부, 교무부, 학무부, 서무부, 인사부, 감사부, 재무부, 고등강사 등 8개 부서를 두며 근대적 형태의 집행부를 구성하는 등 이전과는 다르게 일본적 색채를 탈피한 모습이었다. 당시 종단의 이름을 원종으로 정한 데에는 원융무애(圓融無碍)의 뜻에서 취했을 것이라는 설과 《종경록(宗鏡錄)》에서 연유하였다는 설 등이 있다. 근대 최초의 불교 종단인 원종의 성립으로 조선 전기 이후 지속되어 온 무종단(無宗團) 시대는 비로소 막을 내렸다. 종무원에서는 1909년 12월 승려 대표 150여 명이 원흥사에 모여 한성부 도성 내에 불교총합소(佛敎總合所)를 건립하기로 결의하고, 다음 해 2월부터 공사를 착수하기로 했다. 이렇게 하여 건립된 사찰이 한성 중부 전동(磚洞, 현 종로구 수송동)에 자리한 각황사(조계사 전신)였다. 이회광은 이 절을 종무원의 사무소 겸 포교소로 운용하고자 했다. 원종 종단에 의해 각황사가 건립됨으로써 도성 안에도 포교의 기반이 되는 사찰이 마련되어 불교도 다른 종교와 같이 자유로운 포교 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원종의 대종정에 취임한 이회광이 무엇보다 먼저 착수한 일은 전국 각도의 사찰을 통할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을 목적으로 정부로부터 원종을 불교 종단으로 승인받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제 통감부의 간섭이라는 정치적 상황에 편승해 일본불교의 힘을 빌리게 되었다. 대표적인 친일 단체인 일진회 회장 이용구(李容九, 1868~1912)와 내부대신 송병준(宋秉畯, 1858~1925)의 권유를 받아 일본 조동종 승려 다케다 한시(武田範之)를 고문으로 추대했던 것이다. 이회광이 반역사적 친일불교자로 전락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아마도 원종의 종정 신분으로 있으면서 종단 고문으로 다케다를 영입한 사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케다는 1895년 일본 낭인들과 함께 명성황후(1851~1895) 시해사건에 가담한 전력이 있고 친일파 이용구의 비서, 종교 고문 등으로 일하면서 항일합병 운동에 투신한 정치 성향의 승려였다. 그는 1908년 한성에 있으면서 이회광이 원종종무원을 창설할 때 배후에서 조종했고, 종무원의 고문이 된 후에는 한국불교를 조동종에 병합시키려는 음모를 획책한 인물이었다.

이회광이 다케다를 원종 고문으로 영입한 이후 그의 친일불교 행각은 거침없이 계속되었고, 그것은 곧 근대 한국불교의 친일 성향에 중요한 한 축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과거 전국의 수많은 학승들로부터 존경받던 강백 이회광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친일불교의 거두로서 그의 반역사적 행보는 만년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3. 제1차 조일불교(朝日佛敎) 연합 책동과 임제종 운동

원종이 설립된 지 2년이 지나 1910년 8월 일제의 무력강압에 의해 한일합병이 이루어지자, 불교계도 발 빠르게 일본과의 합병책을 추진했다. 이회광은 한국불교의 장래를 위해 일본불교와의 연합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원종의 고문 다케다 한시와 함께 한국의 원종과 일본의 조동종과 합병을 책모하게 되었다. 물론 다케다는 이전부터 한국불교를 일본 조동종에 귀속시키려는 계획을 꾸준히 추진해 오던 중이었다.

1910년 9월 이회광은 72개 사찰의 위임장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 조동종의 관장 이시가와 소도우(石川素童)와 협상을 벌였다. 둘 사이의 쟁점은 이회광이 연합을 주장했던 반면, 이시가와는 일정 기간 한국불교를 조동종에 부속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회광은 이에 대해 부속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아 결국 조동종 종무원이 연합에 동의하게 되었고, 10월 6일 이회광과 조동종 종무대표 히로츠 셋산(弘津悅三) 사이에 7개 조항의 연합조약이 체결되었다.

한일병합이 조인된 지 45일 만에 있었던 한일불교 병합이었다. 국내 종단 인사들과 전혀 동의 없이 이회광 독단으로 체결한 이 연합조약문은 형식상의 연합이었을 뿐, 실제 내용에서는 일본 조동종에 원종을 예속시키는 것과 같았다. 그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먼저 고문의 파견은 조동종만이 가능하도록 했고, 또 원종은 조동종의 포교에 대한 편리를 도모하고 각 사찰의 숙식처를 제공해야 했으며, 조선의 청년 승려들은 조동종 승려 교육 대상이 되었다. 이회광은 조약을 체결한 후 돌아와 그 내용을 공개하지 않은 채 전국 13도의 주요 사찰을 돌면서 찬성 날인을 받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 그 전문(全文)이 통도사 승려들에게 누설되어 강력한 저항을 받게 되었다. 이회광이 일본 조동종과 맺은 조약 내용을 접한 뜻있는 많은 승려들은 종단을 팔고 조상을 바꾼 ‘매종역조(賣宗易祖)’의 행위라 하고 맹렬히 반대운동을 벌여 나아갔다.

이회광의 연합책동에 대한 반대 운동은 백양사의 박한영(朴漢永), 화엄사의 진진응(陳震應), 범어사의 한용운(韓龍雲), 오성월(吳惺月) 등을 필두로 하여 호남과 영남 지역의 승려들이 적극적으로 전개했고, 결국 원종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이회광의 매종 행위를 격렬하게 규탄한 스님들은 1911년 1월 조선의 불교는 태고보우(太古普愚) 이래로 임제(臨濟) 계통의 선종이라 주장하며 순천 송광사(松廣寺)에서 승려대회를 열어 임제종(臨濟宗)을 설립했다. 임시 관장에 선암사의 김경운(金擎雲)을 선출했고 임시 종무원은 송광사에 두게 되었다. 이때 한용운은 연로한 김경운을 대신하여 직무를 대행했다. 이로써 국내 불교계는 호남과 영남 지방에서 활동하는 남쪽의 임제종과 서울 각황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북쪽의 원종으로 양분되었다. 당시 각황사는 1910년 10월 초 경성 중부 전동에 준공되어 원종종무원이 자리하였고, 또 포교당으로 운용되고 있던 때였다. 이회광은 원종 종정의 자리에 있으면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배경으로 종단의 발전을 무모하게 추진했던 것인데, 이것이 결국 불교계를 임제종과 원종으로 양분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 것이다.

조일불교(朝日佛敎) 연합을 반대하며 조선불교의 정통성을 천명한 임제종은 1911년 10월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를 본산으로 정하고, 임시 종무원은 부산 범어사(梵魚寺)에 두고 중앙으로 그 세력을 확장해 갔다. 그래서 다음 해인 1912년 5월에 경성 중부 사동(현 종로구청)에 중앙 포교당을 열게 되었다. 포교당 개교식 때 참가자가 1,3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렇듯 임제종 설립 운동은 많은 불교도들의 호응 속에서 진행되었지만, 이것이 지속되지 못한 것은 1911년 6월 3일 조선총독부가 전문 7조의 사찰령을 공포하여 불교계를 30본사 체제의 새 교단으로 전환시켰기 때문이다. 이 법령으로 총독부는 불교계를 30개로 분할하여 각 본사 주지의 임면을 관할하고, 사법(寺法)을 인가하였고, 말사는 본사에 배속되어 본사의 지시를 따르며 주지의 임면은 지방장관의 인가를 받아야 했다. 이때 이회광은 30본사의 하나인 해인사의 초대 주지로 선출되어 1911년 12월에 총독부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총독부가 사찰령을 공포하며 원종과 임제종을 모두 인가하지 않게 되자 이회광이 의도했던 원종과 조동종의 연합은 일단 무산되었다. 1912년 6월 30본사 주지회의를 통해 종지(宗旨)는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확정되고, 원종종무원은 ‘조선불교선교양종 각본산주지회의원(朝鮮佛敎禪敎兩宗 各本山住持會議院)’으로 재편되었다. 그리고 이회광이 초대 주지회의원 원장에 선출되었다. 한편, 임제종은 총독부의 통첩(通牒, 1912. 6)에 따라 범어사의 종무원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조선불교의 정통성을 지키고자 했던 임제종은 결국 총독부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하지만 임제종 설립 운동은 1910년대 불교계의 자주적 수호 운동이었고 이후에 나타나는 불교계의 자주성 운동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해인사 초대 주지 겸 주지회의원 원장이 된 이회광은 30대 본산의 주지들을 자신의 휘하에 복속시키고 불교계의 종권을 장악했으며, 해인사 본말사법을 제정해 1912년 7월 총독부의 인가를 받았다. 이후 다른 본산들도 해인사 사법을 모범으로 하여 본말사법을 제정해 인가를 받음으로써 불교계는 총독부의 불교 정책에 순응하게 되었다.

4. 이회광과 강대련의 종권 싸움

초대 주지회의원 원장(1912. 6~1913. 1)을 지낸 이회광은 1914년 1월 제2대 원장(1913. 1~1914. 1) 유점사 주지 김금담(金錦潭)에 이어 제3대 원장에 다시 선출되었다. 이회광은 제3대 원장 재직 중에 불교진흥을 내세우며 승려와 재가신도들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진흥회를 조직했다. 그런데 1910년대 불교계의 친일단체인 불교진흥회가 결성된 이면에는 해인사 주지 이회광과 용주사 주지 강대련(姜大蓮) 사이에 종권 다툼이 주된 원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3대 주지회의원 원장으로 선출된 이회광은 당시 총독부를 상대로 친일 행각을 일삼던 강대련의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자신의 위치에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강대련의 세력에 맞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고자 30본산의 주지들과 재가신도들을 규합해 불교진흥회를 설립했다. 조선불교의 발전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이회광의 사적인 권력 신장을 위해 불교진흥회가 조직되었던 것이다. 이회광은 1914년 11월 불교진흥회 발기인 대표로 선출되었고, 다음 해 1915년 1월 총회에서 회주(회장)에 선출되었으며 강대련이 부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간부진에는 재가신도로 장지연, 이능화, 이상화 등 다수가 참여했다. 불교진흥회는 그 설립 취지문에서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의 다짐을 표명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불교계의 친일단체로서 조선총독부의 시책을 홍보하고 법회를 통해 불교교리를 전파하고자 했다. 불교진흥회는 본부를 각황사(경성 수송동 82번지)에 두고 각 지방의 본산에 지부를 두었으며, 기관지로 《불교진흥회월보》를 발행했다. 설립 초기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불교진흥회는 1917년 2월 불교옹호회로 이름이 바뀌었고, 1922년 불교협성회로 이름이 바뀐 후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해산했다.

이처럼 이회광은 1914년 1월 제3대 주지회의원 원장에 선출되고, 그 해에 불교진흥회를 결성해 당대의 대표적인 친일분자인 강대련의 도전에 맞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다. 그런데 1914년 말 불교계의 강학과 포교에 대한 공동사업을 위해 본사 주지들은 30본산연합제규(三十本山聯合制規)를 제정하고 경성 각황교당에 연합사무소를 설치할 것을 결정하였다. 다음 해 1915년 1월 강대련이 이회광을 누르고 30본산 연합사무소의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30본산 주지회의원이 30본산 연합사무소로 체제로 바뀌며 강대련이 초대 위원장이 된 것이다.

이로써 강대련이 중앙 불교계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1908년 원종종무원 설립 이후 이회광이 장악해 온 불교계의 종권이 마침내 강대련에게 넘어간 것으로 이것은 중앙 불교계의 세력 다툼에서 이회광의 독주 시대가 막을 내리고 세대교체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연합사무소 위원장에 선출된 강대련은 그해 11월 불교계의 고등교육 기관인 중앙학림(종로구 숭일동 위치)을 설립하여 학문 부흥에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또한 이회광과 마찬가지로 개인적 욕망에 사로잡혀 노골적인 친일 행각을 일삼는 데 주저함이 없는 인물이었다.

강대련은 30본산 연합사무소 초대 위원장(1915. 1~1916. 1)에 이어 제2대 위원장(1916. 1~1917. 3)을 역임하며 이회광을 누르고 불교계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지만, 제3대 위원장에는 통도사 주지 김구하가 선출되며 그의 교권에도 균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1919년 1월 다시 위원장에 선출된 강대련은 불과 한 달 만에 자리에서 물러난 후 같은 해 11월 〈불교기관 확장의견서〉를 총독부에 제출하였다. 그 내용 가운데는 조선 왕족의 여자나 귀족의 여자 그리고 일반 서민의 여자를 일본 승려나 조선 승려와 결혼시켜야 한다는 등 노골적인 친일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물론 이 배경에는 전에 비해서 약해진 자신의 교권을 회복하기 위한 책동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무렵 이회광은 잃어버린 교권을 되찾기 위해 또 다른 음모를 벌이게 되는데 그것이 이른바 1920년의 제2차 조일불교 연합책동이다. 이회광은 1920년에 들어와 1910년의 연합사건과 흡사하게 조선불교를 일본 임제종(臨濟宗)과 연합시키려는 책동을 벌이게 되었다. 이 사건은 불교계에서 이회광의 입지를 더욱 좁게 하여 그의 몰락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5. 제2차 조일불교(朝日佛敎) 연합 책동
 
1919년 3·1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난 그해 11월 이회광은 일본 임제종(臨濟宗)과 조선불교의 합병을 추진하고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회광은 그의 추종자인 청암사 주지 김대운(金大運)과 실상사 주지 진창수(陳昌洙), 대원사 주지 조영태 등을 동반하여 ‘일본의 포교 방법을 배우고 일선융화를 도모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갔다. 그는 도쿄에서 그곳에 와 있던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조선총독을 만나 종명(宗名)을 바꿀 것과 사찰 재산을 정리할 것, 새로운 조선불교 종무원을 설립할 것 등을 제안했다. 그리고 교토의 묘심사(妙心寺)에서 일본 임제종과의 합병 문제를 논의했다. 1910년 조선불교와 일본 조동종과의 합병에 대한 모의를 벌인지 꼭 10년 만에 비슷한 일이 재연된 것이다. 이회광이 이렇게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와 연합하려는 시도를 폈던 논리는 사상(思想)을 판단하는 데 국가나 민족의 관념을 초월하기 때문에 일본과의 제휴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에 의해 고통받던 식민지 조국과 민중의 현실은 도외시한 채 오직 자신의 종교권력에 집착해 일본불교로 예속을 정당화하는 궤변의 논리를 폈던 것이다.

1920년 2월 일본에서 돌아온 이회광은 경상도 지역 8개 본산 주지를 모아놓고 조선불교의 개혁을 위해서는 종명을 개칭하고 종무원을 설립해 사찰재산을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30대 본산에 통문(通文)을 보내 그 동의를 얻고자 했다. 그러던 중 일본의 〈중외일보(中外日報)〉 1920년 6월 4일 자 보도를 통해 이회광이 조선불교를 일본 임제종 묘심사파와 연합하는 문제를 논의했다는 내용이 알려졌다. 이에 1920년 1월 제6대 30본산 연합사무소 위원장에 선출되었던 강대련이 이 기사 내용을 전국 각 사찰에 알리자 이 사실에 대한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불교계는 큰 혼란에 빠졌다.

강대련은 이 사건을 접하고 이 같은 사안은 위원장인 자신이 본산 주지들과 협의하여 처리해야 할 문제이지 이회광이 개인 자격으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고 반박했다. 이회광은 이 사건 때문에 전국의 많은 승려들로부터 거센 비난에 직면하자 종명을 임제종 태고파로 개칭하자는 뜻이었을 뿐, 일본 임제종 묘심사에 부속시키려 한 것은 아니었다고 변명했다. 이회광의 이러한 궁색한 변명에도 불구하고 그가 조선불교를 임제종에 귀속시키려 했다는 의도를 간파한 승려와 일반 신도는 물론 일본의 조선 유학승들까지 그를 비판하고 성토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불교계를 혁신하려는 청년 승려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불교청년회는 이회광을 조선불교를 망하게 하는 중대 죄인으로 규정하고 그의 연합책동을 규탄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결국 청년회의 반대운동은 이회광의 종교 책동을 좌절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920년에 있었던 제2차 조일불교 연합책동은 해인사 주지 이회광과 연합사무소 위원장 강대련 사이에서 일어난 교권 다툼으로 보고 있으며, 특히 이회광이 약화되어 가는 자신의 교권을 회복하기 위해 시도한 무모한 친일적인 책동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연합책동 사건으로 이회광에 대한 비판의 여론이 날로 더해갈 무렵 1923년 10월 해인사 승려들은 주지 이회광의 사임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했다. 이에 총독부는 연합책동 과정에서 이회광 일파의 독단적인 행동에 불만을 갖고 있었던 까닭에 탄원을 받아들여 이회광을 해인사 주지에서 퇴임시키고, 1924년 9월 김만응(金萬應)을 후임 주지로 인가하였다. 이로써 이회광은 해인사 주지에서도 물러나게 되어 불교계에서 그의 위상은 더 이상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로 추락하고 말았다. 또한 이회광 퇴임 후 해인사에서는 그가 주지직에 있는 동안 남겨둔 엄청난 부채를 갚기 위해 ‘해인사부채 정리위원회’를 구성해 처리할 정도였다. 이회광은 해인사 내에서도 사찰 재산을 유용하고 횡령하여 절에 감당하기 어려운 부채를 남기고 간 악명 높은 전임 주지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6. 일선융화(日鮮融化) 책동 : 곽법경 사건

1924년 9월 해인사 주지직에서 쫓겨나기 몇 해 전에 이회광은 불교계가 30본산체제를 극복하고 30본산 전체를 총괄하는 통일기구를 설치하려는 과정에서 생긴 사찰 또는 승려들 간 사이의 갈등과 대립 속에서 여전히 친일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1922년 1월 6일, 30본산 연합사무소에서 개최된 30본산 주지 총회는 조선불교유신회의 건의에 따라 조선불교도총회로 명칭을 바꾸고, 1월 9일 임시 통일기구로 총무원을 두고 그 아래에 포교와 교육을 담당하는 이무부(理務部), 서무와 재정을 담당하는 사무부(事務部)를 두었다. 이때 총무원 임시원장에 위봉사 주지 곽법경(郭法鏡)이 선출되고, 이회광이 사무부장(事務部長), 오성월(吳惺月)이 이무부장(理務部長)에 선임되었다. 비록 이회광이 30본산 주지회의원 원장에서 물러나고, 또 일본 임제종과의 연합 시도로 비난의 표적이 되며 그의 위상이 실추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불교계에서 요직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일제 지배하에 있던 조선불교계의 어두운 단면이었고, 한계점이기도 하였다. 당시 총무원은 30본산 주지들 사이에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해 통도사, 범어사, 석왕사, 해인사, 위봉사, 송광사, 백양사, 기림사, 건봉사, 봉선사 등 10본산만으로 구성되었다. 이때 해인사 주지 이회광은 총무원장인 곽법경과 함께 자주권을 지키고자 했던 총무원에 소속되었던 것인데 여기서의 활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주적 성격을 띤 총무원에 대항하기 위해 총독부의 지시 아래 1922년 5월 교무원이 설립되었다. 교무원은 이회광과 교권 대립을 벌인 강대련이 중심이 된 보수적인 본산 주지들의 결집체였다. 통도사, 범어사, 석왕사를 제외한 27개의 본산으로 구성된 조직이었다. 처음 총무원을 구성했던 10개 본산 중 7개의 본산이 교무원으로 전향해 갔고 통도사, 범어사, 석왕사만이 총무원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총무원에서 요직을 맡았던 이회광은 전향하여 교무원의 서무이사로, 그리고 곽법경은 학무이사로 옮겨갔다. 4개월 만의 변신이었다. 결국 총독부의 비호 아래 조직된 교무원은 1922년 12월 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았다.

 최초의 불교계 통합기구인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朝鮮佛敎中央敎務院)이 성립되었고, 이사에 이회광, 강대련, 곽법경, 김일운, 신경허 등 5명이 선임되었다. 교무원이 재단법인으로 승인됨에 따라 총독부 입장에서는 보다 원활하고 합법적인 방법에 의한 본산 통제가 가능해졌다. 중앙의 불교계가 총무원(3개 본산)과 교무원(27개 본산)으로 분열되어 극단적인 대립을 벌였던 것은 1923년 2월 두 기관이 각황사에 두고 있었던 사무실의 사용, 관리권 때문이었다. 처음 사무실의 사용을 놓고 서로 언쟁을 벌이다가 이것이 물리적 충돌로 발전됐고, 결국 법정소송으로 확대되기까지 하였다. 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교무원과 대치했던 총무원은 결국 총독부의 계속된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1924년 4월 3일 교무원에 흡수되었다.

당시 이회광은 곽법경과 함께 총무원을 결성하는 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지만, 조선총독부와 연계된 교무원에 합류하는 친일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회광이 교무원에 합류한 후의 구체적인 활동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한때 총무원의 핵심 멤버였던 까닭에 교무원에서 그의 활동은 자연히 일정한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1924년 9월 해인사 주지에서 물러남으로써 그의 영향력이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회광의 친일 행각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교무원에서의 열세 분위기를 역전시킬 또 한 번의 음모를 시도하였다. 1926년에 있었던 일선융화(日鮮融和)를 표방한 불교운동이 그것이다.

1924년 9월 이회광 후임으로 해인사 주지에 김만응이 임명되면서 주지직에서 쫓겨난 이회광은 총무원 설립 때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한 위봉사 주지 곽법경과 함께 친일 음모를 꾸몄다. 곽법경은 위봉사의 말사인 군산 보천사(寶泉寺)의 건물과 불상을 일본인에게 몰래 매각한 ‘매불(賣佛) 사건’을 일으키고, 또 사찰 재산을 횡령한 혐의로 1925년 2월 주지직에서 물러난 상태였다. 동병상련이라고나 할까 해인사와 위봉사의 주지직을 박탈당한 두 사람은 이전에 자신들이 누렸던 교권과 개인적 권위를 회복하기 위하여 또 다른 새로운 계책을 도모했다.

1926년에 있었던 일선융화 책동에는 이회광과 곽법경이 중심이 되고, 여기에 김보운(金寶運)과 김구하(金九河)가 가세했다. 특히 곽법경은 1926년 일정한 직업이 없는 일본인들과 어울려 일선융화를 표방하며 조선불교혁신회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또 김보운은 이회광의 스승으로 건봉사 주지를 역임한 적이 있고, 김구하는 통도사 주지와 30대 본산연합사무소의 제3대, 제4대 위원장을 지낸 승려였다.

모두 1910~20년대 중앙불교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승려들임에 틀림없다. 이들 일파는 일본인 마사키(正木一郞)와 조선인 송진욱 등과 의논하여 조선불교를 개혁한다는 미명 아래 일선융화를 표방하는 불교운동을 벌였다. 이 일파의 대표자 격인 곽법경은 건백서(建白書)를 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그것을 일본 수상에게 전달하기 위해 정계는 물론이고 재계의 주요 인사들과 만나 그 방법을 타진했다. 건백서의 내용은 현재 존립하는 조선불교의 모든 기관을 폐지하고 경성에 새로운 조선불교 총본산을 건설하고, 그 본산의 법당에는 석가여래와 메이지(明治) 천황, 고종(高宗) 황제를 한 자리에 안치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교일치(政敎一致)의 국가를 세워 일선융화를 실천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 사실이 국내 신문을 통해 보도되자 이들의 음모는 백일하에 폭로되고 이회광, 곽법경 일파의 계책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이것을 곽법경 사건이라고도 한다.

이회광은 1908년 원종 종정이 된 이후 1926년의 곽법경 사건에 가담하기까지 조선불교계의 중심에서 갖은 친일 행각을 일삼다가 이 사건을 끝으로 불교계에서 활동을 멈추었다. 이회광의 도를 넘어서는 친일 행각에 주위 승려들이 그의 행동을 묵과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불교계에서 더 이상 존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사건이 있은 지 3년이 지난 1929년 10월 스승 김보운이 건봉사에서 입적하자 이회광은 이 사실을 《불교》 66호(1929. 12)에 공고[圓寂界]했다. 이후로 이회광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1933년 한강 변의 견성선원(見性禪院)에서 세수 71세, 법랍 53년의 생애를 쓸쓸히 마감한 것으로 전한다. 저술로 《목암집(牧庵集)》(2권)이 있다.

이회광이 조선불교계에서 전개한 거의 20년에 걸친 행적은 제1.2차 조일불교 연합책동과 일선융화 책동(곽법경 사건)으로 이어지는 친일불교의 궤적으로서 근대 한국불교의 어두운 자화상이었다. 물론 당시 불교계가 떨쳐내기에는 너무도 어둡고 짙은 그림자이기도 했다. 이회광의 친일 행각은 한 개인의 행위이기에 앞서 근대기 한국불교계 전체를 굴절시킨 관계로 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한국불교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다. ■

  

윤기엽 /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졸업. 연세대 대학원 한국학협동과정 수료(문학석사·박사).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연구원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개화기 일본불교의 포교양상과 추이〉 〈일본 다이쇼(大正)시대 불교계의 편찬사업〉 등이 있고, 《고려후기의 불교−사원의 불교사적 고찰》 등의 저서가 있다. 현재 연세대, 동국대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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