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불교개혁의 선구자

1. 퇴경 권상로와 근대불교 이해

퇴경 권상로
退耕 權相老,
1879~1965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잠시 학문적 영역과 거리가 있는 방송국 자료실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그곳 기증 도서 가운데 근대에 발간된 불교계 잡지가 있었다. 1924년 7월 창간 이후 1931년 5월 제83호까지 권상로가 편집 겸 발행인으로 있던 월간잡지 《불교》였다. 이후 1933년 8월 제108호까지 편집 겸 발행인은 한용운이었다. 필자가 퇴경 권상로(退耕 權相老, 1879~1965)를 알게 된 것은 이때 《불교》를 접하고서였다. 그가 편집한 잡지를 읽으면서 근대 불교계의 활동이 어제의 일처럼 느껴졌다. 격동기를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간 불교계의 모습과 식민지 시대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고뇌가 전해지는 듯했다. 그 후 근대불교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어 박사학위 논문도 이 분야로 썼다.

퇴경 권상로는 1879년 2월 28일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에서 권찬영(權贊泳)의 장남으로 태어나 1965년 4월 19일 서울 청량리에서 입적하였다. 86년간의 생애는 한국사회에서 근대 격변의 시대와 일치한다. 승려이면서 학자였던 그의 삶 역시 세상의 풍파를 피해갈 수 없었다. 오히려 불교계의 격한 파도까지 더해져 힘든 고비를 넘어야 했다.

한국불교에서도 이 시대는 역시 격변의 시대였다. 많은 불교인은 지난 과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래 불교가 어떤 모습으로 발전되어야 하는지 고심하였다. 그런 역사적 궤도를 이해할 때 퇴경의 삶도 올바르게 이해된다.

1876년 개항 이후 유입되기 시작한 서양의 문물과 사상은 조선사회에 개화의식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시대적 변화는 봉건적 성향과 폐쇄적인 신분질서를 붕괴시키면서 새로운 시대의식을 형성시켰다. 그런 변화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유교를 중심으로 한 지배체제가 그 가치를 상실한 일이다.

유교적 치국 이념의 와해(瓦解)는 상대적으로 소외당하고 있던 불교가 새롭게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까지의 배불정책 속에서 자신의 위상조차 갖지 못했던 불교가 개혁의 배경으로 인식된 것이다. 그런 경향이 나타나게 된 것은 서학(西學)이 전래되면서 강조된 새로운 가치체계의 형성에 유교가 따라가지 못하자, 자연적으로 민족적인 색채가 강하고 평등사상을 담고 있는 불교가 당시 사회 분위기와 일치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음에도, 불교계의 역량은 사회 전반을 이끌어갈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조선 중기 이후 산중불교시대(山中佛敎時代)로 지내오면서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계승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교단의 힘은 쇠잔되어 있었다.

불교계의 현실이 사회변화를 주도하지 못할 만큼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그래도 여명은 밝아오고 있었다. 스스로 자신들의 신앙적 활동을 이어온 거사들의 모임이 형성되었고, 새로운 문물의 수용에 힘입어 수행자 가운데 개화 활동을 전개한 자들도 생겨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화의식을 지닌 선각자들이 불교사상을 배경으로 사회를 개혁하려는 활동에 힘입어 불교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들 모두 한국사회가 새로운 사회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조선조 불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변화되면서 오랫동안 불교계를 억눌렀던 악법도 제거되었다. 그것이 1895년 실행된 승니도성출입금지(僧尼都城出入禁止)의 해제이다. 세종 초에 시작되어 조선조 내내 지속된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된 것은 한국불교사에서 한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이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불교계는 심한 배불정책으로 승과(僧科)는 물론 도첩제(度牒制)의 폐지로 사회포교라는 본연의 임무를 할 수 없었다. 그런 여건에서 실행된 해금조치는 국민 자격과 종교인 자격을 회복하고 민중을 포교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실제 해금(解禁) 이후 나타난 교단 활동 역시 새로운 전기에 맞게 다변화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계기에도 불구하고 불교계가 자신들이 위상을 높여가는 데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것은 역량의 미숙과 조직체계의 결여 때문이었다. 이러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1899년 국가적인 차원에서 불교를 관리하려는 정책이 실시되었다. 먼저 흐트러진 전국의 사찰을 통할(統轄)할 수 있는 중심 사찰을 세우고 대법산으로 삼았다. 각 도의 중심사찰을 중법산으로 삼아 상실된 교단을 정비하고 잃어버린 승직을 제정하였다. 다음 그것을 효율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정부 부서를 두고 교단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정책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치는 격변의 시대라는 한계성과 담당자의 소명의식 부족으로 기대만큼 성과를 이룰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정책의 실행으로 불교계의 역량이 어느 정도 성숙될 수 있었다. 그것이 가교가 되어 1908년 불교계의 오랜 숙원이었던 종단이 건립되는 결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종단의 건립은 한국불교 근대사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다. 그것은 종단의 건립이 국가의 행정적인 조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불교계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실제 종단의 활동은 얼마 되지 않아 중단되었다. 일본불교와 연합 문제로 분열되었으며, 한일합병 이후 1911년 6월 제정된 사찰령은 한국불교를 식민체제에 맞도록 체제를 변화시키고 활동을 제한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항 이후 일제 강점에 이르는 짧은 기간 동안 격변을 경험한 한국불교인들은 현실적 모순을 떨쳐버리고 불교의 근본으로 돌아갈 때 생명력이 있음을 간파하였다. 그래서 스스로를 비판하고 그 역사의 연속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런 근대의 흐름에 놓여 있던 퇴경 역시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불교인이었다. 그의 생애와 활동 그리고 저술에 담긴 내용들이 그런 고민에서 나왔다.

퇴경에 관한 연구는 여러 사람에 의해 시도되었다. 필자 역시 근대불교사의 연구 속에서 그의 사상을 다룬 적이 있으며, 개별 연구로 퇴경의 개혁불교에 대해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살펴보면 그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 서술할 수 있는 연구자도 여럿이다. 그럼에도, 집필의뢰를 받고 선뜻 수락한 것은 20여 년 전 방송국 자료실에서 만났던 퇴경과의 인연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2. 한학과 근대학문을 섭렵한 수재

한학에 밝았던 퇴경은 해석의 권상로라고 불렸다. 당시 그와 한학에 있어 자웅을 겨뤘던 최남선을 자학(字學), 정인보를 작문(作文)의 일인자로 부른 것을 보면 그의 실력과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퇴경은 명진학교 졸업생 가운데 가장 우수한 학자로 꼽힐 정도로 신·구학문을 겸비한 수재였다.

1879년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난 그의 본관은 안동이며 퇴경은 아호(雅號)이자 당호(堂號)이다. 귀한 아들을 얻을 것이라는 범승(梵僧)의 말대로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4세 때 조각달을 보고 시를 짓는가 하면, 6세부터 향리 서당에서 과거를 위한 경사(經史)와 시부(詩賦) 등 한학을 공부할 정도로 명석하였다. 그런 노력에 힘입어 14세에 문경 백일장에 나가 장원급제 하는 등 일찍부터 문재(文才)의 출중함을 드러냈다.

평탄하던 삶이 어려움에 직면한 것은 14세 때 부친 권찬영이 동학 활동 중 사망한 이후였다. 주위의 핍박을 피해 여러 곳을 전전하였으며 그런 과정에서 16세 때는 어머니, 17세 때는 조부의 사망을 지켜봐야 했다. 인생의 무상함이 자연스럽게 그를 불문(佛門)으로 이끌었다.

18세가 되던 1896년 4월 문경 김룡사(金龍寺)에서 월명서진(月溟瑞眞)을 은사로 축발(祝髮)하였다. 이어 5월에 김룡사 대성암에 주석하던 혜옹창유(慧翁昶侑)에게서 사미계를 받고 불명을 몽찬(夢讚)이라 하였다. 그 후 태설(泰說), 정석(鼎奭) 등으로 고쳐 부르다가 마지막에 퇴경(退耕)이라 하였다. 출가 후 그는 20안거를 성만하여 법계가 대종사에 이르렀다.

퇴경은 수행 못지않게 교학도 부지런히 연찬하였다. 김룡사 강원에서 10년간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배운 후 계룡산 갑사, 가야산 해인사, 문경 대승사 그리고 예천 용문사 등 제방을 찾아 《기신론》 《능엄경》 《원각경》 그리고 《화엄경》 등 내전을 두루 섭렵하였다.

한학에 있어 퇴경의 능력이 출중하였음은 다음과 같은 이력에서도 알 수 있다. 1903년 7월 문경 사불산(四佛山) 대승사(大乘寺) 윤필암(閏筆庵) 강사로 초빙된 이후 여러 사찰의 강사와 학교의 학문교사를 역임하였다. 1904년 김룡사 화장암(華藏庵) 강사, 1906년 경북 사찰들이 연합하여 김룡사에 세운 경흥학교(慶興學校) 한문 교사, 1909년 함창군에 있는 성의학교(聖義學校)에서 한문 및 측량 교사, 1911년 경기도 장단군 화장사 화산강숙(華藏寺 華山講塾)의 한문 교사, 그리고 1911년 사불산 대승사 주지를 지냈다.

한학과 내전에 능통한 그였지만 근대를 살았던 인물답게 신학문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그것이 1906년 불교계가 세운 명진학교의 입학이었다.

불교계 근대교육의 시작인 명진학교 설립 과정은 다음과 같다. 1899년 세워진 대법산 원흥사는 사사관리서가 폐지되면서 그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곳에 1906년 2월 홍월초, 이보담 등이 중심이 되어 불교연구회라는 새로운 단체를 세웠다. 원흥사에 본부를 두고 지방 각 사찰에 지부를 둔 연구회는 신학문을 가르칠 수 있는 교육기관 설립을 기획하였다.

불교연구회 총무를 맡고 있던 이보담이 1906년 2월 5일 내부(內部)에 청원서를 제출하였고, 내부는 2월 19일로 허가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교육을 개발하여 자비와 수선에만 힘쓸 것을 당부하였다. 허가를 받은 불교연구회는 각 도 수사찰에 통문을 보내 취지를 설명하고 1906년 4월 10일 학생을 모집한 후 개교하였다.

교과과정은 수행자에게 신학문을 가르쳐 포교 인재를 양성하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에 불교 관계 과목보다는 일반 교과목의 비중이 컸다. 그래서 외국역사, 외국어, 측량학, 농업초보, 산술, 이과, 도화(圖畵), 수공(手工), 체조 등을 이수하도록 하였다. 학기나 교과목에 따라 수시로 전문적인 강사가 초빙되어 수업을 진행한 것도 특색이었다. 초빙된 강사 가운데 장지연, 윤치호, 윤효정 등이 포함될 정도로 사회 명사가 많았다.
학교 직제는 찬성장(贊成長) 1인, 찬성원 약간명, 교장 1인, 학감 1인, 요감(寮監) 1인, 書記 1인, 강사 약간명으로 구성되었다. 이와 같은 직제에 따라 개교 당시의 찬성장에는 홍월초, 찬성원에는 신해영(申海永) 등이 추대되었다. 교장에는 이보담이 피선되어 초대를 지낸 뒤 2대에는 이능화, 3대에는 다시 이보담, 4대에는 이회광이 임명되었다. 이런 제도와 직제의 완비로 명진학교는 고등교육기관의 위상과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학업 과정이 상당히 어려워 소수의 정선된 졸업생만이 사회에 배출되었다. 졸업생들은 신학문의 영향으로 한국불교의 모순을 척결하려는 개혁 의지를 지녔으며, 그러한 사상이 불교를 근대화하는 데 일익을 담당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설립된 명진학교의 첫 번째 업적은 불교의 교육적 차원을 한 단계 끌어올려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모되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 업적은 명진학교 이후 불교계의 학교 설립이 전국적으로 추진되어 교단 안에 근대식 교육제도가 확립된 것을 들 수 있다.

어릴 적부터 문재가 뛰어난 퇴경은 27세가 되던 해 학교에 진학해 신학문을 배웠다. 명석한 그는 학업능력이 뛰어나 짧은 기간에 근대사회의 경향과 함께 서양문화를 습득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명진학교에서 측량학을 배워 한때 측량 교사로 일한 것을 보면 지식과 기술 습득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던 것 같다. 훗날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 가운데 가장 우수한 학자로 꼽혔다는 평가가 그리 과장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훗날 이 학교의 교수로 평생 연구와 후학 양성에 심혈을 기울일 수 있었던 그에게, 학교에서 배운 신학문은 자신의 장점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다.

3. 한국불교의 혁신을 주장한 개혁자

신학문을 배운 퇴경의 사회활동은 남달랐다. 지금까지 불교계에 없었던 잡지를 간행하면서 발행인 겸 기자로 활동하였다. 불교계 잡지 발간은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처음 잡지를 발간한 곳은 1908년 설립된 원종이었다. 1912년 1월 창간된 《조선불교월보》의 발행인이 된 그는 월보의 지면을 통해 불교개혁에 관한 글을 게재하였다. 그의 주장은 한국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친 서구 사조에 맞게 한국불교의 혁신이었다.

그의 기자 생활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30본산 체제가 되면서 창간된 《조선불교총보》의 편집부장을 맡았던 퇴경은 1917년 이회광, 강대련, 김구하 등 본산 주지들과 함께 불교시찰단의 일원이 되어 3주간 일본의 불교 및 문명의 발달을 살펴보게 되었다. 그는 일본불교의 시찰이야말로 한국불교가 발전할 기회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일본불교를 철저하게 연구한다면 침체된 한국불교를 중흥시킬 수 있는 동력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때 구성된 시찰단은 한국불교의 대표가 주도한 시찰인 만큼 교계의 관심이 컸다. 시찰단이 가는 곳마다 대대적인 환영이 있었다. 도쿄(東京)를 방문하자 각 종파의 대표자, 각 신문사의 기자, 조선 승려 출신의 유학생 그리고 동경불교호국단(東京佛敎護國團)과 불교연합회(佛敎聯合會) 등 각 단체가 환영하였다. 교토(京都)에서 역시 경도불교연합회가 환영회를 개최하는 등 시찰단에 대한 관심이 컸다. 시찰 기간 중 수상을 방문하고 일왕(日王)을 봉영(奉迎)하는 행사에 참석하는 등 관심이 남달랐다.

일본불교도 지대한 관심과 환영의 모습을 보였다. 일본의 여러 가지를 잘 보고 가서 인민을 개도(開導)하고 문화를 증진시키면서 정치를 보좌하여 정부의 어려움을 덜 수 있도록 기대하였다. 시찰단의 취재기자로 참여한 퇴경은 기행문을 직접 작성하면서 일본 문화 발전에 놀라움과 관심을 보였다.

이후 계속된 기자 생활을 보면 1922년에는 상주 보광학교(普光學校) 교수를 지내면서 〈동명주보(東明週報)〉 기자를 역임하였으며, 1924년 7월 창간된 《불교》의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약하였다. 1931년 5월 제83호를 끝으로 물러나자 한용운이 이어 편집 겸 발행인이 되어 1933년 8월 제108호까지 발간하였다.
이처럼 신학문과 일본불교의 시찰 그리고 편집인으로 바라본 한국불교는 구시대 모순덩어리로 가득 찬 집단처럼 보였다. 그런 한국불교의 모순을 척결하자고 주장한 글이 〈조선불교개혁론〉이다. 《조선불교월보》에 연재된 그의 개혁론은 정신적 개혁 방안과, 단체와 재단(財團)이 중심이 된 물질적인 개혁 그리고 교육에 관한 방안을 모두 5장에 걸쳐 자신의 소견을 제시하였다.

첫 번째 정신개혁에서 그는 한국불교계의 모습을 병든 나뭇가지에 비유하였다. 가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북돋아 주어야 병든 나뭇가지를 치유하듯 이러한 현상을 치유하는 데는 사람의 정신을 깨우치는 일이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정신을 강조하는 이유는 평범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한국불교의 치유책은 지엽적인 문제 해결보다는 근본적인 치유책이 선행되어야 할 정도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지금까지 한국불교가 유신(維新)하지 못한 이유는 모두들 유신을 한다고 하면서 저들이 하는 일이 서로 다른 것은 정신이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신이 같지 않은 것은 믿음의 뿌리가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정신을 하나로 합하여 모두가 믿을 수 있는 마음을 갖고 먼저 정신을 유신하면 뒤에 모든 일을 유신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불교가 비록 훌륭하지만 유신을 이룩하지 못하면 노쇠하고, 단체가 비록 단단하게 뭉쳤다고 하더라도 정신이 단결되지 못하면 재앙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두 번째 제도개혁을 살펴보면 단체와 재단으로 구분해서 서술하였다. 여기서 단체란 당시의 한국불교의 교단을 말하며 재단은 교단이 지니고 있는 경제적 가치물을 가리킨다.

퇴경은 한국불교의 많은 단체를 형태만 있는 단체, 힘만 있는 단체, 마음으로 뭉쳐진 단체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여기서 형태만 있는 단체란 상태만 있고 작용이 없는 것을 말한다. 힘만 있는 단체란 작용만 있고 형태가 없는 경우이다. 마음으로 뭉쳐진 단체는 형태가 없는 듯하면서 형태가 있고, 힘이 없는 듯하면서 힘이 있으며, 작용이 없는 듯하면서 작용이 있는 단체이다.

이 가운데 마음으로 뭉쳐진 단체가 필요하지만 6천여 수행자들은 모래를 쌓아놓은 것과 같아서 단체를 결성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전적으로 감각심의 부족이라고 주장했다. 한국불교는 깊은 산 속에 살면서 시대의 변천과 풍조의 흐름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헛된 꿈만 꾼다. 이런 종단의 무기력한 모습은 개혁해야 할 대상이라고 했다.

 그러나 급격하게 변화되어서는 안 되며, 그 사회나 단체가 수용할 수 있는 내용과 속도로 발전되어야 한다고 했다. 유신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때를 따라 적절하게 맞추어 나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절의 순서를 관찰하고 나와 상대방을 비교한다면 새로운 감각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개혁론에서 가리키는 재단이란 불교계가 지니고 있는 삼림, 토지, 건물, 기용(器用), 고물(古物), 보물 등의 경제적 효용가치를 말한다. 그는 이 같은 물질에 대해 긍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금력(金力)이 바탕이 된 경제적 질서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는 다른 종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재단을 가지고 있음에도, 사방에 산재한 까닭에 신경 쓰기가 어렵고,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지 못하며, 내 것과 남의 것이라는 관념이 강하여 공동관심사의 형성이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는 먼저 그러한 재단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사사로운 생각을 버리고 공공(公共)의 개념을 지니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재화의 수입을 기대하는 것보다 현재 지니고 있는 작은 재화를 소중히 하는 것이 불교 발전에 유익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재화를 모으는 것도 올바른 자세가 아니며, 가지고 있는 재화는 공공적 활용에 유통시키는 일이 유신의 안목을 지닌 사람들이 행하는 재단의 활용이라고 했다.

세 번째 교육개혁에서 퇴경은 불자의 사명은 안으로는 경전을 읽고 참선하고 밖으로는 전도, 포교를 실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한 사명을 올바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가장 근본이 되는 교리에 밝아야 한다. 교리에 밝지 못하면 참선도 맹봉치갈(盲棒痴喝)에 불과하고 전도와 포교도 헛소리나 잠꼬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세상에 불교교리를 밝히고자 하면 반드시 공부하는 사람을 양성해야 하며, 공부하는 사람을 양성하려면 반드시 교육기관이 개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교육기관에 대해 사범(師範), 서적, 체제, 장소 네 가지 사항을 강조하였으나 연재는 사범에서 끝나 개혁론은 미완된 상태이다. 그가 가장 먼저 사범을 강조한 것은 교육이란 문자를 가르치는 것만 가지고 완전한 교육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사상과 예의와 신행부터 먼저 가르치고 인도해야 하기 때문에 사범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 학식 높은 종사(宗師)나 대강백을 살펴보면 미천한 학식에도 불구하고 한 점 부끄러움도 없이 스승이 되어 한국불교계의 패권을 차지하고 있으니 이 폐단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학생과 스승은 젖먹이와 유모와의 관계와 같아서 스승의 행동거지를 모범으로 여겨서 본받는데, 스승이 사특하거나 잘못되면 수많은 청년들이 잘못될 수도 있고, 그르게 인도되어 인격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다.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을 구하기가 극히 어려워 사원에서 여러 해에 걸쳐 학교를 세우고자 했으나 완성된 곳은 드물어, 그 결과 영특하고 재주 있는 인재는 사장되고 한국불교의 장래도 허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퇴경의 개혁론 이후 1913년 5월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 1922년 〈조선일보〉에 발표된 범란 이영재(梵鸞 李英宰)의 〈조선불교혁신론〉이 그 뒤를 이으면서 근대 한국불교의 개혁에 대한 담론을 꽃피었다.

4. 불교학을 넘어 국학에 대한 애정

퇴경은 천재성이 있으면서도 노력형이었다.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막힘이 없는 실력이었지만 한평생 책을 읽고 공부한 학자였다. 수행자인 퇴경이 불교학을 연구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거기에 한정하지 않고 국학을 연구하는 데 한평생을 바쳤다. 대부분 국학 자료가 한문이었기 때문에 한학에 밝고 한문 교사를 지냈던 그에게는 적합한 분야였다.

누구보다 한국불교에 애정을 갖고 역사적 흐름을 밝히려 했던 그가 처음 세상에 선보인 저술은 《조선불교약사》였다. 불교가 전래된 이후 근대까지 한국불교를 시대별로 기술한 편년체 불교사이다. 그의 나이 37세가 되던 1917년에 간행된 것으로 볼 때 역사와 불교에 해박한 지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그 이후 발간된 여러 한국불교사의 선행연구로서도 그 가치가 크다.

이를 시작으로 한 평생 연구와 저술에 매진한 퇴경은 많은 기념비적인 저술을 남겼다. 그의 후학들은 1990년 ‘퇴경 권상로 박사 기념사업회’를 세우고 저술을 모아 《퇴경당전서》를 발간하였다. 모두 10권으로 발간된 전서에는 한국불교에 관련된 저술이 많다. 앞서 소개한 《조선불교약사》를 비롯하여 《한국사찰전서》 《신찬조선불교사》 《한국선종약사》 《조선불교사 개설》 등이 실려 있다.

이 가운데 《한국사찰전서》는 퇴경의 학자적 노력을 보여주는 저술이다. 그는 30대부터 각종 문헌에 기록된 한국사찰에 관련된 기사를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모아 6,300개가 넘는 사암의 소재지, 존폐 여부, 창건 연혁, 중요 기사 등의 전거를 밝혀 1963년 발간하였다.

《신찬조선불교사》는 편년체가 아니라 한국불교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을 중심으로 사료를 정리한 것이며, 《한국선종약사》는 한국의 선이 중국 남종선의 전통을 계승하였음을 밝혔다. 그리고 《조선불교사개설》은 한국불교를 시대적으로 구분하고 각각의 특징을 밝힌 통사이다. 그는 이 책에서 불교가 전래된 이후 신라불교까지를 불교상향시대(佛敎上向時代)로, 고려시대는 불교평행시대(佛敎平行時代), 그리고 조선시대를 불교쇠퇴시대(佛敎衰退時代)로 규정하는 등 한국불교 1,500년의 역사를 자신만의 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퇴경은 한국불교와 관련된 자료집을 많이 엮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1938년에 시작하여 3년여에 걸쳐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불교 관련 기사를 발췌하여 《이조실록불교초존(李朝實錄佛敎鈔存)》을 발간하였다. 그 후 《퇴경당전서》에 있는 것을 보면 《한국불교자료초》 《삼국사기불교초존》 《증보문헌비고불교초존》 《고려불교초존》 등 한국 역사서에 있는 기본 사료를 정리한 공이 크다.

이런 자료집 편찬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방대한 기본 자료의 통독은 물론 관계 기사를 정확하게 적출하는 작업은 시간과 한학 실력이 갖추어진 실력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퇴경이 마지막까지 연구에 매진한 학자임을 알려주는 저술이 《한국지명연혁고(韓國地名沿革考)》이다. 1961년 81세의 노령에 발간한 저술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지명의 유래와 변천을 밝힌 것으로 《동국여지승람》을 기본으로 해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증보문헌비고》 그리고 《세종실록지리지》 등 기본 사료를 모두 섭렵해야 할 수 있는 작업이다. 이 저술을 통해 각 지방의 명칭이 삼국시대부터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에 이르도록 변천한 모습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노학자의 노력이 돋보인다.
그 밖에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해석, 《균여전 주석》 등 한국불교와 관련한 저술과 번역이 압도적으로 많아 그의 한국불교 사랑이 얼마나 컸던가를 엿볼 수 있다.

불교학에 밝다고 해서 모든 저술이 불교학 분야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종교학 분야로는 《조선종교사초고》가 있으며, 《종교사료》 《유(儒)에 관한 잡초(雜抄)》 등도 주목할 만하다. 여기에 1947년 저술한 《조선문학사》는 한문문학을 중심으로 쓴 문학사로 혜화전문학교 강의 교재로 쓰였다.

퇴경은 학문 연구에만 몰두한 것은 아니다. 그는 경전 번역에도 남다른 열정과 노력이 있었다. 1960년대 대한불교청년회가 한국불교에서 가장 시급하게 하여야 할 불사로 불전 번역을 인식하고 1962년 4월 불교학자들의 헌신적인 협력을 얻어 팔만대장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퇴경은 이 번역 사업에 김동화, 이운허, 김잉석, 서경수, 이종익, 김달진, 이청담, 김대은과 함께 집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5월부터 정릉 천중사(天中寺)에 집필 본부를 두고 대장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여 8월 말에 7천여 매의 원고를 탈고하였다. 위원들은 당시 고령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생전에 성전을 내놓겠다는 각오로 번역에 전념하였다. 그들은 대장경을 번역하여 출판하는 사업은 새로운 불교문화의 개척이라고 생각하여 진력을 다했다. 이런 노력에 의해 1963년 6월 법통사(法通社)에서 《우리말 팔만대장경》이 출간되었다.
이런 불교청년회의 대장경 번역과 출판 사업은 교계의 관심을 일으켜 1964년 7월 21일 동국대에 전문적인 불전번역 기관인 동국역경원이 출범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통합종단은 1964년 1월 12일 역경위원회를 구성하여 불교학자 가운데 60명의 역경위원을 위촉하고 동국대학교에 상설기관으로 동국역경원을 설립하였다. 초대 원장은 이운허가 맡아 30년 동안 매달 1권씩 출판하여 팔만대장경 전부를 6백여 권으로 발간할 계획이었다.

이런 기대 속에 진행된 역경 사업은 1965년 6월에 이르러 아함부 가운데 첫 권인 《장아함경》이 출판되었다. 당시 이를 보도한 기사를 보면 한자로 된 경문이 비교적 부드럽고 매끈한 생활어로 바뀌어 세상 사람들에게 친근히 다가왔다고 평가하였다.

이처럼 한국불교에 관해 많은 저술과 자료를 정리하였고, 경전을 번역한 퇴경의 업적을 보면 오늘날 한국불교를 연구하는 많은 연구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가 비록 호교적(護敎的)인 자세로 연구하였다고 할지라도 분명 이 땅에 들어와 대중 속으로 전해진 불교의 본 모습을 찾으려 한 학자의 노력만큼은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5. 인간 권상로의 영욕

퇴경은 1931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였다. 1942년 혜화전문학교 시절 학생들이 태평양전쟁에 징병되어 학교가 폐쇄될 때 잠시 불교 총본산 태고사 교학편수위원을 지낸 것 외에는 줄곧 후학을 양성하였다. 광복 후 1946년 혜화전문대학이 동국대학교로 개명할 때도 교수로서 여전히 후학을 양성하였다.
언제나 탄탄대로를 걸을 것 같았던 퇴경에게 뜻하지 않은 시련이 찾아왔다. 광복이 되면서 일본강점기의 그의 친일행각이 심판대에 오른 것이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조선에 대해 전쟁 물자를 보급하라는 압박과 함께 불교로 하여금 전쟁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요구하였다. 당시 많은 조선의 불교인들은 심전계발(心田啓發)이란 명목하에 대중들에게 일제의 전쟁이 당연하고 협력해야 할 일로 선전할 수밖에 없었다.

지식인이었던 퇴경 역시 총독부 시국 강연반의 연사로 전국을 다니며 중일전쟁을 미화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주의의 침략을 대승적 교의와 연결해 일제의 만행을 미화하는 글을 연재하였다. 1945년에는 친일의 글로 엮어진 《전쟁과 불교》를 간행하였다. 이런 행적이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비판받게 된 것이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제헌국회는 일본강점기에 일본인에게 협조하여 악질적으로 행동한 반민족적 행위자를 조사하기 위하여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어 1948년 9월 7일 국권강탈에 적극 협력한 자,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하거나 박해한 자들을 처벌하려는 목적으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시켰다.

반민특위는 국회에 조사를 담당하는 특별조사위원회, 기소 및 송치 업무를 담당하는 특별검찰, 재판을 담당하는 특별재판소 등을 별도로 설치하였다. 반민족행위자 7천여 명을 파악하고 1949년 1월 8일부터 검거활동에 나섰다. 권상로 역시 반민특위에 불려가 친일 행동에 대해 조사받았다.

그러나 이런 반민특위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반민특위를 와해시키기 위해 갖가지 방면으로 방해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정권에 참여한 친일파들을 위해 반공을 내세워 옹호하였다. 이런 반대 세력 때문에 반민특위의 활동은 지지부진하다가 1949년 6월 6일 특별경찰대가 강제 해산하면서 해체되고 말았다.

시련이 지나가자 그의 활동은 다시 원기를 찾았다. 1952년 6·25 전쟁으로 부산으로 옮겨 간 동국대학교의 학장에 취임하였고, 1953년 종합대학교로 승격하면서 초대 총장에 올랐다. 1953년 정년 후 명예교수로 추대된 그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퇴경에게 다시 시련을 준 것은 정화운동이었다. 정화운동을 이해하려면 일제의 한국불교 통제정책을 알아야 한다. 1910년 8월 29일 한국을 합방한 일제는 한국불교를 통제하기 위해 1911년 6월 사찰령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시행령에 의해 모든 사찰이 사법을 제정하도록 하였다. 본말사법은 모두 13장으로 구성되었고 총독의 인가를 받았다.

처음 본말사법이 제정될 때에는 각 본말사의 주지를 비구계를 수지한 자로 제한하였다. 그리고 비구계를 수지할 때 대처식육한 자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일제의 강점이 오래 지속되자 한국의 승려들은 일본 승려와 같이 점점 계율에 대해 관용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는 대처식육을 허용해야 한다는 논의로 이어져 본말사법이 개정되었다.

1926년 10월 총독부는 각 본말사법 제16조 주지자격 규정 ‘비구계를 구족’ 조항을 삭제함으로써 승려의 가취(嫁娶)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비구계 수지자를 한층 우대하는 방법으로 고등과 졸업의 학위인 대교사와 대선사는 반드시 비구계첩을 소지한 자가 아니면 이 법계를 수여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렇지만 이것은 생색에 불과하였고 개정이 결정되자 총독부 학무국은 한국의 모든 사찰이 본말사법을 고치도록 독려하였고, 많은 수행자가 결혼하면서 한국불교의 오랜 전통인 계율 의식이 변질되게 되었다.

1945년 8·15 광복은 일제의 통제를 받던 불교가 식민지 체제에서 벗어나 민족적인 종교로 태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광복 후 결성된 진보적인 불교혁신동맹은 불교계의 혁신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미 군정의 비호를 받는 종단 측은 연맹 측을 좌익으로 모략하여 활동을 위축시켰다. 한국불교의 새로운 집행부가 된 교무원은 1946년 8월 모범총림을 시설하여 선, 교, 의식 등으로 도제를 양성하려 하였으나,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총림은 5년 만에 해산되었다. 한국불교의 자정 노력도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휴전되면서 정상적인 환경으로 돌아오자 불교계는 한국불교의 선풍진작을 위해 고심하였다. 그래서 1953년 비구승들은 마음 놓고 수행할 수 있는 사찰을 종단에 요구하였다. 이어 1954년 5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의 1차 유시가 발표되면서 왜색불교의 잔재를 일소한다는 취지에서 가정을 두고 있는 승려에게 사찰에서 나가 살 것을 천명한 정화가 시작되었다.

이런 움직임은 여러 과정을 거쳐 1962년 4월 1일 종정에 비구 측의 이효봉(李曉峰), 총무원장에는 대처 측의 임석진(林錫珍)을 선출함으로써 통합종단을 출범하였다. 그러나 승려 자격과 종회의원 구성으로 반목하면서 종단은 다시 갈등에 휩싸였다. 결국 1969년 10월 대법원에서, 1962년 3월 제7차 대한불교비상종회에서 제정한 대한불교조계종 종헌은 유효하고, 종회에서 효봉을 종정으로 선임한 결과가 유효하다는 판결이 나옴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런 정화과정에서 권상로는 대처 측 일원이었다. 일본강점기 대부분의 승려가 결혼했듯이 퇴경 역시 39세가 되던 1918년 결혼하였다. 1896년 18세에 문경 김룡사에서 출가하고 1903년 7월 문경 사불산 대승사 윤필암 강사를 맡은 이래 수많은 강원의 강사를 역임하였다. 또한 1931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1953년 정년까지 50여 년 동안 후학을 양성하여 한국불교의 승려 가운데 퇴경에게 배우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당대의 학승이었다. 이런 그가 후학들과 마주 앉아 승려의 자질 등을 논의하며 대처승 측 정당성을 변론하는 일 자체가 괴로운 일이었다. 비구·대처의 갈등은 시대적 변화와 요구였지만 퇴경이 받은 마음의 상처는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퇴경은 학승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비구 대처의 분열을 떠나 이 시대 불교계가 필요로 하는 일에 대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1954년 불교 총본산 태고사 중앙포교사와 국어심사위원, 1955년 국사편찬위원, 법계교시위원, 1957년에는 법규위원, 1959년 대한종교신도연맹 고문, 그리고 1960년 동방고서 국역위원에 피선되었다.

1962년 동국대학교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정부의 문화훈장을 받은 후에도, 1963년 우리말 팔만대장경 편수위원, 불교종단 고문, 1964년 중앙불교연구원장, 동국역경원 역경위원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그런 그의 생애를 살펴보고 있노라면 자신이 처한 시대, 불자로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준 개혁자의 풍모가 떠오르는 것은 필자만의 감상은 아닐 것이다. ■

 

김경집 / 진각대학교 교수. 동국대 불교학과,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주요 논저로 〈경허의 定慧結社와 그 사상적 의의〉 〈근대불교의 기점과 개혁적 전개〉 등 60여 편의 논문과 《한국 근대불교사》 《한국불교 개혁론 연구》 《역사로 읽는 한국불교》 등 1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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