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문명담론과 조선불교 구상

1. 머리말

최남선(1890~1957)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 ‘출판계, 문학계, 사학계, 언론계, 정치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친 근대인이다. 그러하기에 그를 간단히 ‘누구’로 규정하기는 힘들다. 중국의 경우라면 계몽사상가이자 학술가였던 량치차오(梁啓超)에 비견할 만하다. 하지만 최남선은 량치차오와 달리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근대학문의 개척자’로 ‘민족주의자’로 ‘친일분자’로 살았다. 이들 라벨 중 어느 하나로는 그를 온전히 식별할 수 없다. 문학연구자 서영채는 이광수와 최남선을 함께 다루면서 “그들은 거인이었고 배신자였다”고 평가했다. 근대시기 적어도 문화계에서 저들만큼 큰 사람은 또 없었다. 그 때문에 식민지 조선인들이 체감한 배신의 강도는 컸으리라.

량치차오가 근대 중국에서 불교학의 한 계기였듯 최남선도 근대 한국의 불교에서 특별한 역할을 했다. 그는 ‘민족불교’로서 ‘한국불교’를 구상했다. 또한 그는 불교에서 한국 민족의 우수성을 확인하고자 했다. 그에게 불교는 단지 조선불교가 아니라 조선 민족 나아가 동방문명의 정수였다. 그가 제시한 통불교론은 한국불교의 특징으로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필자는 이 글에 최남선의 방대한 저작이나 다양한 활동을 스케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불교 관련 활동에 집중해서 그가 어떻게 민족불교를 창안하는지 살피고자 한다. 특히 그가 일찍이 제기한 문명론과 관련 속에서 민족불교 구상을 분석할 것이다.

2. 중인 출신과 신문명의 흡수

최남선(1890~1957)
최남선은 1890년 4월 26일 한성 중부 상리동(上犁洞)에서 출생했다. 이곳은 현재 서울 중구 수하동과 을지로2가에 걸쳐 있다. 집안은 동주 최씨로 중인 가문이었고, 대대로 잡과 합격자를 배출했다. 아버지 최헌규(1859~1933)도 1879년 식년시 지리학에 합격한 후, 꽤 오랫동안 기술직 관리를 지냈다. 중인치고는 꽤 출세한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개화 풍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최남선이 10대 후반 벌써 두 차례나 일본 유학을 경험한 것도 부친의 이런 태도 때문이었다. 최헌규는 최남선을 비롯한 자식들이 일찍부터 신문명을 접하고 신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자식 셋을 일본에 유학시킬 정도였다. 최남선의 남동생 최두선은 와세다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해방 후에는 동아일보사 사장과 제3공화국 국무총리까지 역임한다.

최남선 자신도 중인 계층으로서 어느 정도의 자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조부는 유대치 같은 중인 출신의 개화파 지식인에 대한 숭모가 대단했고, 그 점을 어린 손자에게 일찍부터 가르쳤다. 이후 최남선이 유대치나 오경석 등 개화 지식인에 특별한 애정을 가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또한 조선시대 양반들의 무능함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기도 했다는 점에서 계층적인 대항 의식이 존재했던 것 같다. 중인 계층은 근대시기 실무 능력과 개방적인 태도로 인하여 비교적 쉽게 변화된 사회에 적응했고, 또한 이후 근대 엘리트로 자리 잡았다. 현재 한국사회를 다양한 분야에서 장악한 가계(家系)도 이 시기 중인 출신 엘리트에서 출발한 경우가 많다.

최남선은 장자가 아니었음에도 총명함으로 인해 부친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부친은 여러 면에서 그를 지원했다. 기대 또한 컸다. 그는 10대 이전 한글과 한문을 익혔는데, 한문 실력으로 당시 조선에 유통된 《자서조동(自西徂東)》 《시사신론(時事新論)》 《태서신사(泰西新史)》 같은 중국어로 소개된 서양 관련 서적을 섭렵할 수 있었다. 그는 1918년 《청년》에 기고한 글 〈십년〉에서 당시를 회상하면서 “비로소 천하의 큼과 인물의 많음과 사변의 복잡함을 알았다”고 적었다. 최남선은 인문지리지의 성격을 지닌 그런 글들을 통해서 ‘청나라와 조선’이라는 틀을 깨고 ‘세계’를 인식할 수 있었다.

1904년 대한제국 황실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 도쿄에서 유학했고 이듬해 귀국했다. 1906년에 재차 일본 유학길에 올라 와세다 대학 지리역사과에서 공부했다. 최남선에게서 일본 유학 경험은 일종의 문명 충격이었고, 그 기간 이광수나 홍명희, 안창호 등 조선 지식인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개인 단위가 아니라 사회나 민족 단위의 사고를 할 수 있게 됐다. 그가 보기에 조선에 필요한 것은 계몽이었다. 1908년 최남선은 일본에서 인쇄 기구를 들여와 경성에 신문관(新文館)을 설립했다.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최남선은 ‘신문명(新文明)’에 대한 희망과 계몽에 대한 의지가 확고했다.

이듬해인 1909년 최남선은 한국 최초의 근대잡지인 《소년》을 창간했다. 어쩌면 ‘소년’ 조선을 향한 그의 외침이 이 잡지에 담겼는지 모른다. 최남선은 창간호에 자신이 쓴 저 유명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실었다. “철썩, 철썩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로 시작하는 이 글은 최초의 신체시로 불린다. 거대한 파도가 무언가를 무너뜨려 버린다. 이 글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법하다. 문명의 일대격변을 요구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 ‘파괴는 창조의 어머니’라고 하며 불교의 유신(維新)을 말한 한용운과 마찬가지로 최남선도 구습이나 구문명에 대한 거대한 저항 같은 게 필요함을 역설했다. 이후 《소년》과 《청춘》 등 잡지를 발간했는데 거의 일인(一人) 출판의 형식이었다.

최남선은 신문관을 기반으로 해서 잡지와 서적을 간행했고, 매체와 출판을 통해서 사회계몽을 기도했다. 아울러 1910년에는 조선광문회를 설립했는데 고문헌을 발굴하고 발간하고 국어사전을 편찬하려는 취지였다. 1918년까지 20여 종의 고전을 발간하고 최초의 국어사전과 현대적 한자사전을 편찬했다. 박은식, 김교헌, 주시경, 김두봉, 장지연, 현채 등이 참여했다. 계몽을 위한 계몽은 없다. 근대화를 위한 근대화도 없다. 그것은 분명 조선인의 계몽이고 조선의 근대화였다. 이러하기에 그는 조선의 것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자연스레 고전 연구에 힘을 쏟았다.

당시 조선광문회를 함께 했던 학자들의 영향도 컸다. 단군을 교조로 모시는 대종교 관련 인사들이 즐비했다. 그가 이후 조선 민족의 기원을 찾으려 애썼던 것도, 단군 연구에 힘썼던 것도 당시 시작된 조선 연구와 관련된다. 이런 경향은 근대 일본이나 중국에서 계몽된 지식인들이 국학 운동을 주도한 것과도 유사하다. 일본의 경우, 메이지 시기 일찌감치 국학운동이 있었고, 중국에서는 1900년대 초 《국수학보(國粹學報)》가 창간되어 전통 속에서 민족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있었다. 전통시대의 설화나 전설을 다루지만 그것의 쓰임은 결코 전통의 복원이 아니라 근대시기 시도된 민족국가 건설에 있었다. 적어도 민족국가라는 이름은 근대의 것이었고, 근대인에게 유통된 관념이기 때문이다.

3. 기원을 향한 질주와 불함문화론

최남선은 비록 일본에서 유학했지만 체류한 기간은 길지 않다. 하지만 문명충격은 대단히 컸다. 또한 이 시기 역사 연구에 강한 관심을 보였다. 2차 유학 시기에 《대한사》 《대한지리》의 미정고(未定稿)를 갖고 귀국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10대의 나이에 한국사 서술을 시도했던 셈이다. 역사지리과의 학생으로 자신이 학습한 내용을 조선(당시 대한제국)에 적용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최남선 연구자 류시현에 따르면 최남선은 일본 유학 시절 “초기 학문 형성 과정에서 요시다 도고(吉田東伍, 1864~1918)의 학문과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요시다는 역사학자이자 지리학자로 정규 대학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독학으로 역사지리를 공부한 인물이다. 그는 학계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그리고 1907년 《대일본지명사서(大日本地名辞書)》를 완간했다.

최남선이 요시다에게 받은 영향 가운데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점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요시다가 엄격한 역사학 혹은 지리학 훈련을 받지 않고서 최고 수준의 학자 반열에 올랐다는 점이다. 요시다는 1909년 학력이 없었음에도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탁월한 연구 성과를 박사학위 논문 정도로 인정해주는 분위기 속에서 그것이 가능했다. 최남선의 생애를 보더라도 그가 정규 교육과정에 참여한 기간은 길지 않다. 그도 독학으로 다양한 분야를 개척했고 주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두 번째는 요시다가 일본의 온갖 ‘지명’을 통해서 일본역사를 재구성한 점은 최남선이 이후 지명이나 산명 혹은 고어의 발음 등을 통해서 고대 신화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동아시아의 대표주자가 되었고, 러일전쟁의 승리로 유럽 세계에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른바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외침에서도 알 수 있듯 후진적인 아시아 제국(諸國)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럽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픈 심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유럽에 대항한 동양 일본의 우수성을 다방면에서 확인시키고자 했다.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1865~1942) 등 일본 학자들은 근대 유럽에서 많이 시도한 인류학, 인종학, 언어학 등을 동원하여 고대 일본 문명이 유럽 문명과 대항 가능한 문명이었음을 밝히고자 했다. 이때 출현한 동양학은 “일본이 아시아의 최선진국으로 유럽과 대등한 나라이며, 지리학적 동양 속의 중국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 문화적 구조로도 우수하다는 점을 확립하려 했다.”
동양학자 시라토리가 주로 동원한 방법론은 비교언어학이다. “그는 비교언어학을 객관적인 것이며 언어가 선사시대를 재현해주는 열쇠라 믿었다.” 시라토리는 이 방법론을 통해서 서양인이 중국을 중심으로 규정한 동양에서 몽골이나 일본 등을 분리해 내고자 했다.

그는 동양에 새로운 문화권이 존재했고, 그것은 중국과 다른 언어와 역사를 가짐을 주장하려 했다. 중국 북방의 유목민족을 고대 일본 민족과 연결시키고자 했다. 그는 비교언어학으로 이들 민족 간의 유사성을 확인하고 동일한 계통의 민족임을 주장했다. 이른바 ‘우랄알타이 동(同) 계통론’이었다. 그는 훗날 최남선도 언급한 백두산의 옛 이름 ‘불함(不咸)’이 천을 의미하는 몽골어 텡그리와 관련됨을 지적하기도 했다.

최남선은 1916년 완성한 〈계고차존(稽古箚存)〉에서 한국 고대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미 드러냈다. 또한 이 글에서 단군에서 민족의 시원을 찾으려 했다. 그는 1919년 3·1 운동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있는 동안 ‘밝’이란 조선 중심의 문화 계통 원리를 모색했다. 그리고 1922년 〈조선역사통속강화개제〉를 《동명》에 연재했다. 여기서 그는 민족의 기원을 탐색하는 데서 민족사를 서술하겠다는 의도를 보인다. 그는 먼저 “조선 역사의 실제적 문제는 조선 민족의 연원이 무엇임으로부터 비롯한다”고 언급한다. 또한 그는 조선의 종족이 어떠한지, 어디서 출현했는지, 어떤 변동을 거쳤는지, 어떻게 현재의 국토를 갖게 됐는지, 민족성은 어떠한지 등의 주제를 살펴야 조선 민족의 연원을 밝힐 수 있음을 지적한다.

최남선은 〈불함문화론〉을 발표하기 전에 〈조선역사통속강화개제〉에서 이미 자신의 ‘불함문화론’을 제기한다. 그는 인류 역사에는 3대 문명 계통이 있고, 그것은 각각 인도유럽 계통과 중국 계통 그리고 ‘불함(不咸) 계통’이라고 말한다. 이는 그가 제시한 일종의 문명론이다. 최남선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런 문명론을 다룬 것은 〈불함문화론〉이다. 최남선은 이 글을 1925년 탈고해서 1927년 경성에서 간행된 일본어 잡지인 《조선급조선민족(朝鮮及朝鮮民族)》 제1집에 발표했다. 여기서 최남선은 단군을 조선 고대사와 극동 문화의 옛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열쇠이자 핵심이라고 천명한다. 단군이 태백산에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결국 조선과 조선 민족이 출현했다는 점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최남선은 태백산의 ‘백’같이 한국의 수많은 산이나 지명에 등장하는 ‘백’은 실은 단순한 광명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하늘, 즉 천신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는 ‘백’은 ‘(밝)’에 대응하는 글자로 보았다. ‘(밝)’뿐만 아니라 그것의 활동형인 ‘(밝은)’도 마찬가지로 본다. 그는 ‘(밝은)’을 ‘불함(Părkăn)’으로 표현했다. 한자 표현인 불함(不咸)은 중국 고대 문헌인 《산해경》에 이미 등장한다. ‘밝음’으로 대표되는 태양신이나 천신 사상에 기반한 문명권이 존재함을 그는 끈기 있게 밝히고자 한다. 최남선은 〈불함문화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가정으로 이 일대(一大) 문화 계통에 불함문화의 이름을 붙여서 종종의 고찰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 문화의 중심임과 동시에 거의 전부를 이루는 것이 , 이요 불함은 그 가장 오랜 자형임에서 취한 것이다. 이 문화의 전 내용을 이루는 종교가 조선에서 , , 불(Pur)의 이름으로 호칭되었음이 명백하므로, 이것은 이 문화권의 명칭으로 오히려 본래적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떻게 보면 동네에서 활동하는 ‘나름대로 사학자’의 유치한 주장 같지만, 최남선은 대단히 다양한 예증을 통해 자신의 문명론을 밀고 간다. 그는 물론 자신의 뛰어난 상상력도 발휘했지만 앞서 언급한 요시다나 시라토리 같은 일본인 학자들의 근대적 학문성과도 다양하게 반영했다. 그는 주로 지명이나 산명 등의 어원이나 발음을 분석하여 언어적 유사성을 문화나 혈연적 동질성으로 확대하려 했다. 분명 시라토리가 사용한 비교언어학적인 방법론에 기대고 있었다. ‘’이나 ‘’과 유사한 발음을 중국이나 몽골 그리고 일본 등지에서 추적했다. 최남선은 ‘불함 계통’의 문명권이 조선을 중심으로 중국 북동부, 몽골, 시베리아 그리고 멀리 카스피 해까지 그리고 일본과 유구까지 연결된다고 주장한다. 인도유럽 계통과 중국 계통의 문명권을 남방 양계로 분류하고 불함 계통은 북방계로 분류한다.

최남선이 단군설화의 주 무대인 태백산에서 ‘’을 상상했다면 한국의 대표적인 명산 금강산에서 텡그리(Tengri)를 상상했다. 그는 금강산의 금강은 번역어에서 왔다기보다는 원래 이름의 하나인 대갈, 또는 대가리(Taigăr(i))에서 유도됐다고 본다. 금강은 ‘머리’를 의미하는 ‘대가리’에서 나왔고, 이때 머리는 다른 모든 산에 대해 우두머리임을 의미하다고 본다. 바로 ‘신산(神山)’인 것이다. 최남선은 ‘대가리’라는 이 소리에 집중하여 몽골이나 일본 등 다른 지역의 유사한 발음을 추적한다. 그가 말한 ‘불함 계통’의 문명권에서 이 유사 발음의 쓰임새를 추적한 것이다.

대갈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어구인가 하면 조선의 현대어에서 그것은 단순히 머리를 의미함에 불고하지만 같은 조선어에서 다른 종류의 사례와, 동일한 어족 안에서 타국어와의 비교에 의하면 대갈이란 말이 고대에는 천을 표현하는 어구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바이다. 즉 터키, 몽골 등에서 탕그리, 텡그리의 유어이니 금강산의 어귀인 장경봉의 장경, 장안사의 장안도 실로 그 옛 어형을 지녀온 것이며, 따라서 금강산이 대갈 또는 텡그리 산이었던 증좌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나 ‘은’에서 천신을 상상한 최남선이었다. 그는 대갈이나 대가리에서도 여전히 하늘이나 천신을 상상했고, 고대 한국의 신화를 모두 이와 연결시켰다. 나아가 그것을 이른바 ‘불함 계통’의 문명권으로 확대했다. 이렇게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에서 키워드는 ‘’과 ‘텡그리’이다. 그는 금강산의 금강이 갖는 한자로서 혹은 번역어로서 의미보다, 장경봉이나 장안사의 명칭이 생긴 유래나 한자의 의미보다 그것의 발음이 가진 고대적 의미에 더 집중했다. 이 때문에 실제 지역적 특수성과 무관한 한자어 명칭들이 엉뚱하게 해석되는 경우도 발생했다. 이런 경향은 최남선이 문화나 민족의 실체성을 강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최남선은 민족이나 문화의 고대적 실체를 분명하게 인정하다. 물론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것이 일부 변형하지만 그 핵심적인 내용은 변함없이 지속된다고 생각했다. 실체론적인 문화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말한다. “지금까지 전승된 조선의 고대사란 것은 요컨대 이와 같은 종교적 신화, 신화적 성전이 역사의 형식으로 전해진 것으로서, 부족과 시대에 따라 그 명구의 자면이 어떻게 변화할지라도, 그 본체는 어느 한 근본 화형(話型)에 요약될 성질의 것이다.” 그의 말대로 문명이나 문화 또는 전통 속에서 ‘본체’를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추출할 수만 있다면 고대와 현재를 관통하는 문화 실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4. 불교 전래의 신(新) 루트

최남선은 1918년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출간에 즈음하여, 자신의 불교관을 서술한 〈조선불교의 대관으로부터 《조선불교통사》에 미쳐〉(이하 〈조선불교의 대관〉으로 약함)를 발표한다. 이 글은 1930년 발표한 〈조선불교, 그 동방문화사 상의 지위〉(이하 〈조선불교〉로 약함)와 더불어 최남선의 불교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글이다. 두 글이 발표된 1918년과 1930년 사이에 최남선은 〈조선역사통속강화개제〉(1922)와 〈불함문화론〉(1927)을 발표했다. 최남선이 말하는 이른바 ‘조선불교’도 그의 문명론 속에서 전개됐다. 〈조선불교의 대관〉에서 최남선은 “불교는 세계철학의 연원이요 동양문화의 집산지[叢藪]이다.”라고 말하고 “조선 고금의 문물은 직간접 불교의 감화를 받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고 평가한다.

최남선의 이런 찬양은 꼭 학문적인 입장에서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불교를 접했고, 말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전까지 자신을 불교도로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불교 인연을 소개하는 글 〈묘음관세음〉에서 조부가 개화파 지식인 유대치를 흠모하였고, 유대치가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다는 이유로 불교에 대해 매우 호의적으로 이야기했음을 언급한다. 이 때문에 자신도 불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좋게 생각하게 됐다고 술회한다. 이후 최남선은 10대 후반 《금강경》을 읽는 등 스스로 불교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고대문명사를 연구한 최남선에게 불교는 학문적으로 또 신앙적으로 중요한 주제였다. 그는 일본에서 근대적 불교학을 경험하고 불교의 가치에 대하여 자각했다.

일본으로 가서 차차 유럽의 철학 서적을 접하고 일변 불교의 철학적인 것을 알게 되었다. 또 불교가 산간적인 것으로만 여겼는데 세간적 활동과 문화적 교섭이 얼마나 큰지 일본의 교세 상황에서 보고 느끼게 되어 불교에 대한 흥미는 훨씬 늘어나게 되었다. (중략) 당시 활약하던 여러 학장들이 불교가 철학적임을 고조함에 대하여 은근히 큰 감격을 느꼈다. 불교의 본령이 이론의 뛰어남에 있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때 생각에는 철리적으로 서양의 그것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크게 든든한 생각을 주었음은 사실이었다.

최남선은 일본에서 접한 근대적인 불교학을 통해서 어린 시절 다소 막연하게 생각한 불교에 대한 시선을 교정할 수 있었다. 그는 불교에서 세계적 가치와 조선적 가치를 함께 발견했다. 〈조선불교의 대관〉에서도 그는 이런 점에 집중해서 논의를 진행한다. 이 글에서 9개의 주제로 조선불교를 다뤘는데, 다섯 번째 제목의 결락을 빼면 여덟 개 주제는 다음과 같다. 〈조선 문화에 끼친 불교의 영향〉 〈동서 교통사에 대한 조선불교의 관계〉 〈불교 교통사 상에서 조선의 지위〉 〈불전 의해 상에서 조선의 공헌〉 〈조선 민성에 대한 불교의 3대 영향〉 〈불교도여 먼저 역사적 자각이 있어라〉 〈외방인의 조선불교에 대한 무지〉 〈일본사와 조선사, 더욱 그 불교사의 관계〉 등이다.

이상의 항목으로 알 수 있듯 〈조선불교의 대관〉은 불교의 세계적 가치와 조선적 가치를 강조한 것이다. 또한 자신이 전개하고 있던 문명론 속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위상을 어렴풋하게나마 그리고 있다. 그는 한국불교가 단순히 중국 전래품이 아님을 강조한다. 한국의 불교 전래가 시기적으로도 중국 못지않게 오래됐고, 중국 루트가 아닌 서방(인도, 서역)에서 직접 전래한 루트가 존재했음을 강조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로써 보면 조선에서 불교의 초전이 중국 이전 혹은 전후로 비슷한 시기임과 중국에서 수입된 것 외에 서역에서 곧바로 전해진 불교가 있었음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서방의 불교가 먼저 변경 바깥에 전래하고, 그 불교가 다시 두 갈래로 나뉘어 남으로는 중국으로 흘러들어 가고 동으로는 우리나라[槿域]에 퍼져 오랫동안 잠복·유행한 일대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며 그런 동시에 우리나라의 불교가 어떻게 오랜 연원을 가지고 중요한 계통을 이루었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최남선은 불교가 인도에서 출발하여 서역을 거치고 한 줄기가 남하하여 중국불교가 되고 또 한 줄기가 계속 동진하여 한국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그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한국 불교 전래의 중국 루트가 아닌 북방 루트를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인도와 서역 그리고 고대 한국을 잇는 불교 전래 루트가 존재했고, 그렇게 전해진 불교는 실제 한국에 오랫동안 잠복하고 면면히 흐르고 있었음을 말한다. 이는 이후 그가 주장한 ‘불함 계통’의 문명 루트와 꽤나 유사하다. 〈조선불교의 대관〉에서도 “이렇듯 조선의 불교는 당초부터 불교 유통상의 중요한 한 계통을 스스로 완성하여 중국을 벗어나서 스스로 구별되는 특수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일본 불교는 실로 이 계통을 직접 전해 받았다”고 평가한다. 물론 사실 여부는 따져 봐야지만, 적어도 최남선에게서 이는 불교 전래의 ‘불함 루트’ 혹은 ‘북방 루트’라고 할 법하다.

최남선은 ‘불함문화론’이나 ‘불함 계통’이라는 문명론을 통해 지속적으로 말하는 점은 고대 한국은 중국과는 다른 민족 기원과 문화 기원을 가지며, 또한 일본은 한국을 통해서 이 불함 계통의 문화를 전해 받았다는 사실이다. 다분히 민족주의적 발상이 엿보인다. 이런 사고 때문에 그가 구상하는 불교도 다분히 민족불교의 색조를 띠고 있다. 최남선은 10대 시절 유학 기간에 이미 이런 사고가 싹텄다고 자술한다.

일본 유학 중에 시세에 감분함이 있어서 책상을 팽개치고 고국의 정신운동을 위하여 작은 힘을 다하려고 돌아올 때, 국민정신의 환기와 통일에 대한 이상적 교과서 특히 역사 및 지리의 그것을 조선적 정지위(正地位)에서 편찬함이 급무일 것을 생각했다. 스스로 편찬의 임무에 당하여 불교와의 교섭은 생각하던 것보다 크게 심밀한 것이 있어 매우 깊이 불교적 교양을 가짐이 아니면 조선의 문화를 이해치 못할 것을 알았다.

최남선은 역사나 지리 연구를 통해서 조선(한국)의 올바른 위상을 정립하고 싶어 했다. 이를 통해 국민정신을 각성시키고자 한 것이다. 근대시기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계몽 운동가들의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 또한 ‘정신운동’으로서 학술연구와 편찬사업 등을 진행하고자 했다. 그의 불교 연구도 크게 보면 이런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국민정신을 환기하는 정신운동으로서 불교 연구. 그것은 당연히 ‘민족불교’의 형식을 띨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주목한 것도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는 민족불교를 염두에 둔 불교사 서술을 지지했다.

1917년 권상로는 《조선불교약사》를 편찬하면서 서문에 “불교가 있는 인도나 중국, 일본은 모두 불교사가 있는데 오직 조선만 없다. 내가 이를 안타까워했다.”고 말한다. 그는 민족 단위의 불교사 서술의 부재를 안타까워했다. 역사서술로서 불교사 서술은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근대 기획과 무관하지 않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이런 경황은 존재했다. 근대한국의 불교사 서술의 대표격인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 간행에 즈음하여 쓴 글인 〈《조선불교통사》에 취하여〉에서 왜 《조선불교통사》라는 엄청난 양의 불교사 서술을 시도했는지 밝힌다. “조선불교가 천5백 년 이래로 계통적 역사가 전혀 없었음은 저들이 자신의 계보를 몰라서 상놈이 되는 것과 같아서 한심하지 않은가.” 상놈이 아닌데도 상놈이 되는 한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불교사 서술’을 시도했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이능화는 조선인 혹은 조선불교도에게 조선불교의 순수한 혈통과 그것의 우수함을 외치고 있다. 이는 최남선이 조선과 조선 민족의 정지위를 재정립하고자 한 것과 유사하다. 최남선은 〈조선불교의 대관〉을 끝맺으며 자신이 일본 등 근대학술에 힘입어 이런 글을 굳이 쓴 이유에 대해서 “조선불교가 이렇듯 세계에 망각되고 무시됨을 확인케 하려 함이오. 그리하여 조선불교의 영광이 여지없이 매몰되고 조선불교도의 치욕이 갈수록 증가함을 절감케 하려 할 따름이”라고 말한다. 왜 한국불교가 망각되고 무시됐을까? 최남선은 우리가 역사에 무지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이능화의 말과 통한다. 그래서 이런 무지를 깨치고 조선불교의 영광을 밝혀줄 사람을 기대한다.

아! 조선불교는 바야흐로 막스 뮐러(Max Müller, 1823~1900)가 필요하고, 올덴베르그(Hermann Oldenburg, 1854~1920)가 필요하며, 스타인(Aurel Stein, 1862~1943)이 필요하며, 빌(Samuel Beal, 1825~1889)이 필요하지 않는가. 아니다. 조선인 자신 가운데서 막스 뮐러가 나오고, 올덴베르그가 나오고, 스타인이 나오고 빌이 나와서 자력으로 조선불교를 조사연구하고 대외에 선양하지 못할 것인가.

학술을 통해서 민족을 깨우려는 최남선의 의도가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가 거론한 인물들은 근대시기 서구의 대표적인 동양학자이다. 꼭 불교학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저들의 힘에 의해 고대 불교문헌이 정리되고, 서양인들이 불교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간행에 즈음하여 쓴 글에서 최남선은 근대 학술의 가치와 역할을 강조한다. 조선인 가운데 저런 이들이 나와야 함을 특히 강조한다. 그에게 불교 연구와 같은 학술은 특별한 의도를 가진다. 단순히 붓다 가르침의 현창이 아니다. 그는 학술로써 ‘민족’의 영광을 확인하고 나아가 재현하고자 했다. 그의 조선불교 구상도 실은 민족불교 구상의 일부였다.

5. 조선불교 구상과 통불교론

최남선은 1930년 《불교》 74호에 〈조선불교, 동방문화사 상에 있는 그 지위〉를 발표했다. 이 글은 같은 해 7월 하와이에서 개최된 범태평양불교청년대회(The First General Conference of Pan-Pacific Young Buddhist Associations)에서 한국불교를 소개하기 위해 쓰인 원고였다. 실제 이 글은 최봉수가 “Korean Buddhism and her Position in the Cultural History of the Orient”로 축약해서 번역했고, 서울 YMCA에서 7월 7일 인쇄되어 7월 21일 회의장에서 팸플릿 형태로 배포되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도진호는 귀국해서 그해 가을 《불교》에 〈범태평양회기〉라는 제목으로 총 세 차례에 걸쳐 참관기를 실었다.

실제 회의 내용과 무관하게 최남선의 〈조선불교〉는 이후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됐고, 영향도 컸다. 최남선은 〈조선불교〉를 “지금부터 반세기쯤 전에 서양의 한 저술가가 조선의 역사와 민속을 소개하면서 ‘은자의 나라(Hermit Nation)’로 묘사한 일이 있다”는 말로 시작한다. 이는 아마도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 1843~1928)가 쓴 ‘Corea, the hermit nation’(1894)을 말하는 듯하다. 그리피스는 일본에 오래 체류했고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는 미국 학자이다. 그는 주로 일본에서 일본 학자들을 통해서 한국에 대한 정보를 획득했다. 그리피스의 저 책은 부정확한 정보에도 불구하고 서구 세계에 초창기 한국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최남선은 〈조선불교〉를 통해서 ‘하와이’라는 공간에서 한국불교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요구한 격이다.

최남선의 〈조선불교〉는 한국불교를 중국불교의 아류 정도로 취급하는 다카하시 토루(高橋亨, 1877~1966) 같은 일본인 학자에 대한 대항이기도 하고, 한국불교에 대해 무지한 서양세계에 대한 대항이기도 했다. 실제로 한국에서 자생한 불교 전통보다 중국에서 전래한 불교 전통을 더 우월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존재했다. 불교에서 유통된 ‘사대주의’라고 할 법하다. 이런 점에 주목하면 한국불교는 중국불교를 닮고자 하는 주변부 불교일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대한제국의 성립으로 조선(한국)이 정치적으로 중국에서 독립했듯 종교나 사상 면에서 독립을 시도한 경우도 있었다. 물론 새로운 동경 대상으로 일본이 출현한 상황에서 발생한 일이기는 하다. 다음은 정황진이 1919년 발표한 글이다.

수백 년 이래로 우리 해동 총림에서 큰 병통이 하나 생겼다. 이는 어떤 종파든지 중국에서 전래한 종파만 정종(正宗)으로 인정하고 우리 해동에서 창립한 종파는 다 산종(散宗)이라 명칭을 달아서 항상 전자만 숭배하고 추앙하니 이 어찌 터무니없는 잘못이 아니겠는가. (중략) 나는 의상의 화엄종보다는 오히려 원효의 분황종을 해동 정종으로 삼아 더 존숭하며 태고의 선종보다는 보조의 조계종을 해동의 정종으로 삼아서 더 존숭하며 순경도증의 유가종보다는 경흥의 유가종을 해동 정종으로 삼아 더 존숭하노라.

위의 글은 최남선이 〈조선불교의 대관〉을 발표한 1918년 이듬해에 쓰였다. 이 시기 한국불교의 독자적인 전통을 탐색하려는 경향이 이미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정황진은 중국불교 전통을 정종(正宗)으로 보고 한국불교의 전통을 산종(散宗)으로 취급하는 기존 불교계의 사고를 비판했다. 그는 이에 대한 거부로 오히려 한국불교 전통을 정종으로 여기겠노라 선언한다. 원효나 경흥이 당시 중국불교에 대항적으로 자신의 불교 혹은 신라의 불교를 시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황진은 1919년이라는 맥락에서 원효의 화엄학이나 경흥의 유식학을 해동정종으로 묘사한다. 이는 민족 단위의 불교 사유가 출현했음을 증명한다.

당시 불교계의 여러 사람이 민족불교를 요구했지만 민족불교의 특수성으로서 뭔가를 제시한 사람은 드물다. 우리가 최남선의 〈조선불교〉에 주목하는 이유도 실은 이 때문이다. 최남선은 한국불교의 독창성은 이론과 실천이 원만히 조합된 것에서 찾는다. 이 때문에 “인도 및 서역의 서론적 불교, 지나의 각론적 불교에 대하여 조선은 최후 결론적 불교를 건립하였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결론적’이라 함은 일종의 완성태를 가리킨다. 완벽한 상태라는 이야기다. 최남선의 이런 논의는 이후 불교계에서 어느 정도 유통된 듯하다.

〈조선불교〉가 발표되고 몇 달 후 김경주는 〈현하세계의 불교대세와 불타일생의 연대고찰〉(《불교》 77)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 불교는 문화가 교차하는 지역에 처함이 서역과 동일하여 원효대사 등의 출현으로 각 종파를 통일하는 불교[統一的佛敎], 즉 결론적 불교로 완성되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 말대로 하면 서역불교도 통일적 불교이고, 결론적 불교여야 한다. 하지만 최남선은 서역불교는 서론적 불교로 취급했다. 여기서 분명한 차이를 보이지만, 김경주는 최남선과 마찬가지로 통일적 불교와 결론적 불교를 함께 거론하고 둘을 동일시했다. 최남선은 ‘결론적 불교’라는 표현 외에 한국불교의 독창성으로 ‘통불교’란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조선불교〉 제4장 ‘원효, 통불교의 건설자’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성인 원효[曉聖]의 불교가 불교적 구제의 실현인 일면에 다시 통불교·전(全)불교·종합불교·통일불교의 실현인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중략) 불교는 중국까지 오는 동안에 원심적인 경향으로 발전하다가 한반도에 와서는 점차 구심적 경향을 나타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원효를 만나서 단일 교리에 의한 최종적인 완성을 실현하게 되었다. 불교통일(佛敎統一)의 내적 요구는 다시없는 대건축가 원효를 발견하였다.

위 인용문이 아마도 꽤 긴 〈조선불교〉 원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구절일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불교의 정체성으로 흔히 일컬어지는 ‘통불교론’이 처음 등장하기 때문이다. 최남선은 한국불교의 특징으로 통불교를 말했고, 이는 당시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에도 박종홍 같은 관제학자들에 의해 다시 발굴되어 불교학계와 사상계에서 각광받았다. 조명기는 1940년 발표한 〈조선불교와 전체주의〉에서 한국불교의 특징을 여전히 통불교론으로 파악한다. 그는 전체주의와 통불교론을 연결시켰다. 박종홍은 1950년대 이미 최남선의 통불교론에 주목했고, 1960년대 관제학자로서 역할을 감당할 시기에 그것에 힘입어 원효에게서 한국사상의 원형을 찾으려 했다.

최남선이 한국불교의 특징으로 내세운 ‘통불교’ 개념은 해방 이후 다양하게 변주되어 여러 학자의 ‘한국불교사 기술(記述)’ 속에 침투했다. 회통불교나 총화불교 같은 표현도 통불교 담론의 연장선 위에 있다. 하지만 통불교 담론은 순수하게 최남선의 민족주의 열정에서 연원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통불교’ 개념은 일본 메이지불교가 생산한 다양한 담론 지형 속에서 출현했다. 일본에선 ‘불교통일론’이나 ‘통불교론’은 최남선이 〈조선불교〉를 쓰기 수십 년 전부터 통용됐다. 통불교론 담론과 구체적 관련 있는 메이지불교의 인물은 무라카미 센쇼(村上專精, 1851~1928), 타카다 도겐(高田道見, 1858~1923), 이노우에 세이코(井上政共) 등이다.

근대 한국에 가장 많이 소개된 인물은 무라카미인데, 그는 1901년 《불교통일론(佛教統一論)》 제1편 〈대강론〉을 출간했다. 1912년 권상로는 이 책 일부를 소개했다. 무라카미의 불교 통일론은 최남선뿐만 아니라 총화불교를 말한 조명기도 중요하게 거론한다. 1917년 무라카미는 식민지 조선을 방문하기도 한다. 타카다는 《통불교일석화(通佛教一席話)》(1902)와 《통불교안심(通佛敎安心)》(1904)을 간행했다. 조은수는 제임스 키틀러(James Ketelaar)의 연구에 힘이어 최남선의 통불교 개념이 타카다의 논의와 가장 유사하다고 파악했다. 이노우에는 《통불교》(1905)와 《통불교강연록》(1911)을 간행해서 ‘통불교’ 개념을 대중에게 알리려 노력했다. 박한영은 1916년 《조선불교월보》에 이노우에의 《통불교》 내용을 소개하기도 한다.

필자는 위에서 소개한 세 사람 가운데 무라카미가 최남선의 통불교론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본고에서 이 점에 대해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한국 근대불교 전체에서 무라카미의 ‘불교통일론’ 영향은 최남선이 아니더라도 확인할 수 있다. 최남선은 통불교론을 민족불교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이론 기제로 동원했지만, 일제가 총동원체제를 발동했을 때, 그것은 국민 동원의 구호와 유사하게 사용됐다. 해방 후 독재정권 시절에는 민족단결이나 총화단결이라는 기치 아래 통불교 담론은 단결의 구호로 재생되기도 했다. 조은수의 표현대로 최남선이 시작한 통불교 담론은 ‘민족주의와 식민주의 사이’ 어디쯤 위치한다고 할 수도 있다. 이런 과거가 있기에 우리는 통불교 담론을 시대 맥락이나 정치색을 빼고 순수하게 학술적인 시선으로 다룰 수가 없다. 당연히 그래서도 안 된다.

6. 맺음말

지금까지 최남선의 문명론과 민족불교 구상을 성글게나마 살폈다. 그의 문명론은 분명 민족단위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문명론은 한국민족을 염두에 두고 시작했고, 그것을 통해서 한국민족의 위상을 제고시키려 했다. 한국 고대문명은 ‘불함 계통’의 문명이고, 그것은 중국과 다르고 또한 일본 문명의 연원이라고 말했다. 이는 중국 문명에 대한 전통적인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였고, 또한 근대시기 기세등등했던 일본에 대해서는 문화적 우위를 주장하려는 시도기도 했다. 그의 민족불교 구상도 크게 보면 이런 맥락에 닿아 있다. 그는 한국불교가 세계문명사 속에서 담당한 역할을 강조했다. 또한 세계불교사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의 불교였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는 그것을 ‘통불교’ 개념으로 정식화했다.

불교학계에서는 주로 〈조선불교의 대관〉이나 〈조선불교〉를 중심으로 최남선의 불교를 분석했다. 특히 ‘통불교 담론’에 매몰되어 그의 불교를 본 점도 있다. 하지만 〈조선불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최남선이 말하는 불교는 방대하다. 근대시기 그가 상상한 세계나 상상한 불교는 우리가 실감하는 세계나 불교보다 월등히 크다. 그가 상상한 공간과 그가 풀어낸 공간은 지금 우리로선 신천지라고 할 수 있다. 불교학의 경계를 넘어 포괄적인 시야로 최남선의 문명론과 불교를 연구한다면 여태껏 알지 못한 한국의 근대와 불교를 만날지도 모른다. ■

 

김영진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HK연구교수.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동 대학원 졸업(박사). 저서로 《불교와 무(無)의 근대》 《근대중국의 고승》 《공(空)이란 무엇인가》 《중국근대사상과 불교》가 있으며, 역서로 《중국근대사상사 약론》과 《대당내전록(大唐內典錄)》(공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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