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무엇을 먹는 것이 잘 먹는 것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는 어려운 문제이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70년대 한국인들의 염원은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로 표현되었다.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은 절대 빈곤이라는 경제 문제의 해결을 의미했다. ‘쌀밥에 고깃국&rsq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불교 전통에서는 12월 8일(음)을 성도절(成道節)이라 하여 붓다가 정각(正覺)을 이룬 날을 기념하고 있다. 붓다의 탄생을 기념하는 석탄일이 공휴일이고 불교인뿐만 아니라 타종교인들도 함께 축복해주는 명절인 데 비해 성도절은 불교 내의 행사에 그치고 그것마저 몇몇 단체의 썰렁한 행사로 그치고 만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불교인들에게 있어
불교, 특히 대승불교의 키워드 중의 하나는 불이(不二)라는 말이다. 불이란 ‘둘이 아니며’ 따라서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깨달음과 무명이 다르지 않고 성(聖)과 속(俗)이 다르지 않고,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 바로 불이의 세계관이다. 초월적 열반관(涅槃觀)을 부정하고, 저 너
그것은 감동이었다. 한없이 느리면서 빠르고, 무거우면서 가벼운. 소리 없는 소리, 행함이 없는 행함. 상없는 상. 그래, 종교는 본래 감동이다. 설복도 아니고 권위도 아니다.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종교다. 전북 부안의 황량한 갯벌에서부터 세 걸음에 절 한 번하며 천 천 히, 느 릿 느 릿 왔다. 1년 전 붉은 악마들과 태극기로 대-한민국이 오르가즘을
일반적으로 ‘불교’라는 표현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진리 그 자체로서의 ‘불교’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의 역사적 전개로서, 즉 진리 그 자체로서의 불교가 구체적 시간과 공간을 무대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됨으로써 성립된 역사적 현실태로서의 불교가 바로 그것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초기불교·
올해 우리 나라 출판가에는 불교와 관련된 책 두 권이 장기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했다.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The art of happiness)》과 틱낫한의 《화(Anger)》가 바로 그것이다. 달라이 라마와 틱낫한의 책이 이처럼 장기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무엇보다 이분들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표적인 불
이 세상에서 최초의 교리나 사상, 형식과 제도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종교는 하나도 없다. 모든 종교는 태어난 모태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조금씩 형식과 내용을 변모시킨다.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문화와 접촉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모든 종교의 역사란 변화의 기록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만 그 변화가 발전인가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에서 비교종교학을 가르치는 오강남 박사의 《예수는 없다》는 종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은 한국의 보수 기독교가 창조론과 종말론, 대속론과 부활론을 사실 그대로 믿는 것이 얼마나 유치하고 비상식적인 것인가를 쉬운 비유를 들어 비판한다. 또 종교적 메타포를 해석하는 새로운 안목을 제시하면서 성경 무오설(
―창간 2주년에 부쳐― 부처님 본생담(本生譚) 형식으로 구성된 《자타카》는 인도 고유의 설화에서 불교적 가르침의 비유를 끌어낸 것으로 유명한 경전이다. 547개의 설화를 집록(集錄)해 놓은 이 경전은 중생의 어리석음을 일깨우고 구제하기 위한 부처님의 자비가 얼마나 거룩한가를 묘사하고 있어서 읽을 때마다 감동을 준다. 이중 322번째 본생인 ‘어리
불기2545년 9월5일. 이날은 한국불교사에 영원히 남을 기념비적인 날이 될 것이다. 불교 전래 1600년, 고려대장경이 완성된 지 700년 만에 드디어 우리말로 번역된 한글대장경을 완간하고 기념법회를 가진 뜻깊은 날이기 때문이다. 총 318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한글대장경 완간을 바라보는 불자들의 가슴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1964년에 설립된 동국역경
당연한 말이지만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기독교가 예수의 가르침이고 이슬람이 마호멧의 가르침인 것처럼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리로 믿고 따르는 종교다. 만약 기독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리로 믿고 따른다면 그 순간부터 기독교는 없다. 기독교라는 이름의 불교가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불교를 믿는다면서 기독교적 교리나 믿음을
현대의 불교학 연구가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 풀어야 할 숙제는 실로 여러 가지다. 우수한 신진학자의 양성, 원전언어에 의한 연구, 세계불교학계와의 교류 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 온 과제들이다. 지난 세기 동안 불교학계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덕분에 이제 한국의 불교학계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우
중국 신문학의 개척자 노신의 대표작 《阿Q正傳》은 신해혁명을 배경으로 유랑하는 날품팔이꾼 아큐의 일생을 통해 중국 민족의 약점과 중국 사회에 만연한 사회적 병폐가 무엇인가를 폭로한 소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아큐는 4천년간 퇴영을 거듭한 중국 사회가 빚어낸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민족적 위기 앞에서 대국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궁핍한 물질생활에도 정신적 만족
지금까지 동양의 불교도들이 불교를 연구해온 방법은 대체로 호교론적 관점의 것이었다. 불교가 얼마나 무오류의 사상이며 그것은 어떤 내용인가 하는 것이 주류였다. 더 과장해서 말하면 동양에서 불교는 그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비합리적이고 반이성적인 태도로 신앙되어 왔다. 이것은 한 서양의 불교학자가 지적한 대로 동양인에게 불교는 태어날 때부터 하
잡아함 16권에 들어 있는 몇 개의 경전은 수행자들이 대화할 때 무엇을 화제로 올리는 것이 적절한가를 가르치고 있다. 예컨대 제411경인 《논설경(論說經)》은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부처님이 왕사성 죽림정사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오후 비구들은 공양을 끝낸 후 식당에 모여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날의 화제는 참으로
21세기가 의미 있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디지털 시대’ ‘정보지식사회’로 지칭되고 있는 21세기는 우리에게 문명의 전환을 경험하게 하고 있으며, 지난 세기와는 다른 사고틀, 새로운 인식의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에게 위기이자 기회이기도 하다. 변화된 환
우리는 지금 20세기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서 있다. 시간을 1백 년 단위로 분절해서 파악하는 것은 진리의 세계에서 보면 허망한 것이지만, 현실의 세계에서는 불가결한 의미를 지닌다. 과거에 대한 반성은 곧 미래를 향한 진보의 첫발이 되기 때문이다. 불교가 시간을 삼세(三世)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과거의 시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