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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도는 과연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가/ 홍사성
홍사성 <본지 주간>
[13호] 2002년 12월 12일 (목) 홍사성 본지 주간

   

홍사성
<본지 주간>

올해 우리 나라 출판가에는 불교와 관련된 책 두 권이 장기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했다.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The art of happiness)》과 틱낫한의 《화(Anger)》가 바로 그것이다. 달라이 라마와 틱낫한의 책이 이처럼 장기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무엇보다 이분들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표적인 불교의 고승이자 정신적 스승이라는 점, 불교의 본질이자 목표인 마음의 평화를 단순하고 소박한 말로 가르치고 있다는 점 등이 꼽힌다. 특히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과도한 경쟁과 스트레스, 불안에 휩싸인 현대인들에게 ‘마음의 변화’를 통해 행복과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두 불교 스승의 가르침은 매우 설득력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달라이 라마는 정신과 의사 하워드 커틀러와의 대담을 책으로 엮은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에서 행복은 결코 먼 데 있는 것이 아님을 역설한다. 대담자인 커틀러는 단도직입적으로 “왜 모든 사람은 불행한가, 외로움을 떨쳐버릴 수 없는가, 공평하지 못한 세상에 대한 분노는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를 묻는다.

 이에 대한 달라이 라마의 대답은 너무나도 단순하고 명쾌하다. “어떤 순간에 행복이나 불행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자신이 가진 것에 얼마나 만족하는가에 있다. 타인들도 나와 똑같이 고통받고 있고 행복을 원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진정한 인간관계의 시작이다. 외로움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 친절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건강과 재산을 남을 돕는 일에 이용한다면 그것들은 우리가 더 행복한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이상 고통이 없는 해탈의 단계에 이를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하며 진정한 행복은 마음과 가슴에 더 깊은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틱낫한의 《화》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분노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주제로 한 책이다. 우리는 누구나 화를 내고 살아간다. 아무리 덕망 높은 수도승이라 해도 평생 화 한 번 안 낸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문제는 한참 동안 화를 내다보면 자신이 왜 화를 내는지를 잊어버리고 오직 화를 배출하는 데 급급한다는 점이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과연 화를 낸다고 화가 풀릴까?

틱낫한은 단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물건을 내팽개치고 음식을 마구 먹어도 화는 시원하게 풀리지 않는다. 흔히 화가 나면 분풀이 대상을 찾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화의 악순환만 초래할 뿐”이다. 그러면 화를 참아야 할까? 속은 부글부글 끓는데 겉으로는 태연한 척 위장해야 할까?

스님은 그 어느 것도 화를 푸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고 말한다. 스님이 제시하는 화를 다스리는 방법은 이렇다. “화는 함부로 떼어낼 수 없는 신체의 장기와 같다. 화도 우리 자신의 일부이므로 억지로 참거나 제거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오히려 화를 ‘울고 있는 아기’라고 생각하고 보듬고 달래라”는 것이다. 화가 났을 때 남을 탓하거나 스스로 자책하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감정에도 자극받지 말고 늘 평상심을 유지하는 명상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가르침들은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새롭거나 특이할 것도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복잡하거나 난해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라는 단순하고 소박하고 명료한 것이었다. 부처님 당시 수많은 제자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고 해탈의 길을 걸어간 것도 이 ‘마음의 변화’를 통해서였다. 《근본설일체유부 비나야》 31권에 나오는 판타카의 이야기는 그 전형을 보여준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판타카’라는 이름을 가진 형제가 있었다. 형은 먼저 출가하여 아라한과를 얻고 동생도 출가시켰다. 형은 동생에게 이런 게송을 일러주고 외우게 했다.

“몸과 말과 생각으로 나쁜 업을 짓지 말고 / 세간의 여러 생명들을 고뇌하게 하지 말라. / 정념으로 탐욕의 대상이 공한 것인 줄 알고 / 아무 이익 없는 괴로움에서 멀리 떠나라.(身語意業不造惡 / 不惱世間諸有情 / 正念觀知欲境空 / 無益之苦當遠離)”

그러나 그는 석 달이 지나도록 이 시를 외우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바보 판타카’라고 놀렸다. 판타카는 스스로도 실망하여 환속을 결심했다. 그때 마침 외출에서 돌아오던 부처님은 눈물을 흘리는 판타카를 만나 자초지종의 사연을 들었다. 부처님은 그가 비록 머리가 나빠 법문 한 구절도 외우지 못하지만 매우 진실한 사람임을 알고 도리어 이렇게 칭찬했다.

“어리석은 사람이 스스로 어리석다고 말하면 / 이것을 이름하여 지혜로운 사람이라 한다. / 그러나 어리석으면서 스스로 지혜롭다 하면 /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愚人自說愚 / 此名爲智者 / 愚者妄稱智 / 此爲眞愚癡)”

이어 부처님은 그에게 아주 쉬운 수행법을 일러주었다. 외출에서 돌아오는 비구들의 발을 닦아주라는 것이었다. 대신 비구들은 그때마다 판타카에게 ‘먼지를 쓸고 때를 닦으라(拂塵除垢)’는 법문을 일러주도록 했다. 판타카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 일을 묵묵히 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문득 먼지와 때가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먼지란 번뇌요 때란 나쁜 업보였다. 탐욕·분노·질투·수치 같은 번뇌를 쓸어내고, 몸과 입과 생각으로 지은 업보의 때를 닦아낸다면 해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마음의 변화, 또는 전환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판타카는 비로소 형이 일러주었던 게송의 참뜻을 깨닫고 드디어 아라한과에 오를 수 있었다.

판타카 스토리가 우리에게 특별히 감동을 주는 것은 이야기의 서사구조가 매우 극적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바보였던 그가 마음의 변화를 통해 해탈을 얻는 장면은 아무리 생각해도 감동적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정말 놓쳐서 안 될 대목은 극적인 반전이라는 결과가 있기까지 부처님과 그 제자들, 그리고 판타카 자신이 기울였던 노력이다. 우선 부처님은 환속하려는 그를 만류한다.

일종의 정신박약증세를 보인 그에게 쏟은 부처님의 애정은 각별한 것이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비구들이 그에게 발을 내밀며 인내심을 가지고 설법하는 장면도 여간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그들은 판타카를 바보라고 무시하지 않고 도반으로서의 관심과 애정으로 법구를 일러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저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부처님이 가르친 대로 실천하는 판타카의 진실된 행동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진실한 불교도들의 삶이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얻을 수 있다.

불교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한다면 ‘마음의 변화’를 통한 삶의 질적 전환을 추구하는 종교다. 팔만대장경도 결국 이것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의 불교도들은 이 가장 중요한 점을 망각하고 이상한 공리공론에 빠진 감이 없지 않다. 멀리서 그 예를 찾을 필요도 없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불교 믿은 지 수십 년이 된 불자나, 수행을 한 지 수십 년이 된 수행자의 행동거지나 마음씀씀이가 어떤가를 보면 우리가 얼마나 거짓으로 불교를 해왔는지 금방 드러난다. 마음의 변화도 없이 형식과 이론으로만 불교를 하다보니 매양 싸움이나 하고 남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불교계의 숨김없는 적나라한 실상이다.

누구를 탓하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한 해를 보내며 우리가 반성할 일은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오히려 부처님의 가르침에 열광하는데, 도리어 불교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신행을 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워서 해보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마음을 바꾸는 불교를 해야 한다. 말로만 하는 불교는 그만두고 마음을 바꾸는 불교를 해야 한다.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백 번 불교를 믿는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인생이 바뀌지 않는다. 이것이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이고, 틱낫한의 가르침이고, 부처님을 비롯한 모든 불교의 위대한 스승들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얼마나 마음의 변화를 일으켰는가? 문득 달력을 쳐다보니 올해도 벌써 다 끝나 가는 12월 하고도 절반이 지났다. ■

2002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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