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택 (본지 주간 / 고려대 철학과 교수)

조성택
(본지 주간 / 고려대 철학과 교수)
그것은 감동이었다. 한없이 느리면서 빠르고, 무거우면서 가벼운. 소리 없는 소리, 행함이 없는 행함. 상없는 상. 그래, 종교는 본래 감동이다. 설복도 아니고 권위도 아니다.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종교다.
전북 부안의 황량한 갯벌에서부터 세 걸음에 절 한 번하며 천 천 히, 느 릿 느 릿 왔다. 1년 전 붉은 악마들과 태극기로 대-한민국이 오르가즘을 느꼈던 “빛 광자” 그 광화문에. 신부, 목사, 교무, 스님, 그들은 천천히 그러나 재빠르게 그렇게 60일만에 도착했다.

1919년 3월 1일 이후, 근 100년 만에 여러 종교가 종파적 차이를 넘어서 민족에게, 아니 사람들에게 언제 이러한 감동을 주었던가? 교세 확장의 이기심으로, 내 종교만의 독선과 자만으로, 이 민족의 갈등과 반목에 한몫을 해 오던 종교가 감동을 준 것이다. 그것도 말없이.

오랫동안 종교는 ‘아편’까지는 아닐지라도 하나의 ‘걸림돌’이었다. 너와 나의 대화를 가로막고, 사랑과 자비의 이름으로 인류의 하나됨, 아니 생명의 하나됨을 가로막는 걸림돌이었다. 사람들간의 갈등과 반목을 줄이기는 커녕 ‘내 편과 네 편’으로 분열과 분파를 더욱 조장해왔다. 천당과 정토를 팔아 이 땅에 집 짓고 상(像)세우고, 입장료 받는 기업보다도 더 자본주의적이었다. 인간의 영성과 불성을 일깨워야 할 종교가 인간들의 호주머니를 더 털어 내기 위한 얄팍한 종교 세일즈 기법만 개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각기 다른 종교에 몸담은 네 분의 성직자가 천천히, 아니 재빠르게 종교야말로 본래 인간의 위대한 스승이며 모범이라는 사실, 이 너무나도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확인시켜 준 것이다. 종교가 자신들의 성전(聖殿)을 위해 인류를 파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아니 이 우주의 모든 생명을 위해 종교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단숨에 보여주었다.

그래, 생명에 비하면 종교는 ‘특수’요 생명은 ‘보편’이다. 종교는 인류의 공동선(善), 생명의 보편성에 봉사하는 것이고, 우리의 이기심과 자만심을 늘상 살피고 경책하게 하는 거울이요 사표이다.

최근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생물학은 인간을 물질로 환원시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종교성’과 ‘자기 초월성’조차도 일종의 화학물질의 분비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이기심’이란 것도 생물학적인 진화의 산물이므로 인간 스스로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마저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의 사회철학들에서 제시하는 사회 정의론에서도 인간의 이기심을 전제조건으로 삼아, 그야말로 ‘원초적 본능’의 이기심을 통한 정의의 실현을 주장하고 있다. 요컨대 이기심을 인간의 원초적 조건이라고 보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특히 최근의 많은 시위들은 대부분의 경우 집단의 이익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이익과 이익의 충돌을 조정하고 균형을 이루는 것이 바로 정치의 역할이다.

이러다 보니 공공의 이익이라 할 공동선은 집단의 이익에 밀리게 된다. 국제정치도 마찬가지이다. 각 국가의 이익추구가 계속되는 가운데 환경과 생태문제와 같은 인류의 공동선의 실현은 항상 뒷전으로 밀리기 십상인 것이다.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시장논리에 대한 유일한 해독제는 바로 종교이다. 인간에게 이기심을 버리고 작은 자기를 버려 진리로 돌아갈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21세기 종교의 가장 큰 역할은 복을 짓고 천당 가고 극락 가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이기심과 집단의 이익에 밀려 실현되지 못하는 인류의 공동선을 실현하는 것이다. 인류가 살아남느냐 아니면 멸망하느냐는 종교가 여하히 인류의 공동선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과 시장의 발달로 종교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오히려 시장논리에 끄달려 자신의 종교 집단의 이익에 몰두하고 있는 이때, ‘삼보일배’ 네 분의 성직자는 종교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또 어떻게 해야하는지 잘 보여주었다. 종교는 이래야 한다. 확성기가 아닌 침묵으로 말하고, 주먹질이 아닌 감동으로 사람을 움직여야한다. 남을 향해서가 아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참(懺)과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기 않겠다는 다짐’의 회(悔)라야 한다.

그들은 종교의 시위가 곧 수행이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수행이란 ‘변화’를 말한다. 그리고 변화가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을 말한다. 세속의 시위가 남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종교의 시위는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남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미워하는 내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나의 적이 스승”이라는 가르침을 실천했던 티벳의 독립운동가 애니 파첸 스님이나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던 예수님이나, 요지는 모두 나를 먼저 바꾸라는 말씀이다.

미움과 증오로 시작되어 끝내는 더 큰 증오와 폭력을 낳게 되는 요즈음의 시위 형태에 ‘삼보일배’ 네 분은 말없이 새로운 시위의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 우리의 적은 바깥에도 있지만 더 큰 적은 우리의 안에 있다는 것을 침묵으로, 그러나 더 할 수 없이 큰 목소리로 “할!” 하신 것이다.

 나는 확신한다. 네 분은 이번 삼보일배로 당신들의 할 일을 끝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천 이백 리 긴 여정 동안 수 없이 오체투지하는 가운데 인류에 대한 더 큰 사명감과 생명에 대한 더 큰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지혜를 얻었을 것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부안 갯벌에서 광화문까지의 그 길은 시위의 길이 아니라 수행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모처럼 종교가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감동을 말하면서 ‘내 종교’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족일수 있다. 하지만 삼보일배는 1,600년 한국 불교사의 일대 사건이기에 어쩔 수 없다. 이번에 수경 스님은 죽어 있던 한국 불교를 살려냈다. 근대 이후 언제 한국 불교가 이처럼 제대로 사회와 중생의 현실에 제대로 참여하고 주도한 적이 있었던가? 민주화 과정에서 청년불자들이 돌멩이를 던져야 하느냐 말아야하느냐, 어떤 것이 ‘불교적’인가 고민하고 방황 할 때 한국 불교는 그들에게 무엇이 불교적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던가?

또 민주화 과정에서, 통일 운동의 과정에서 늘 다른 종교의 주도 하에 밥상 차려놓으면, 어정쩡 숟가락 하나 더 놓는 정도의 참여밖에 더 있었던가? 또 그 힘들었던 민주화 시절 ‘호국불교’ 운운은 어떠하였는가? 중생이 아닌 정권을 위한 기도나 법회를 ‘호국’이라 호도하지는 않았던가?

사실 ‘호국불교’란 용어 자체가 애초에 가당찮은 말이다. 임진왜란 당시 서산과 사명 두 스님이 일으킨 승병으로 국난을 극복했다고 자랑스런 전통처럼 말하지만 늘 마음 한 구석에는 곤혹감이 있었다. 출가자가 창과 칼을 드는 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정말 그것이 불교적 선택이었나? 뜻있는 불자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불교적 삶’인가를 놓고 많은 고민을 해왔다.

깨달음과 현실 참여는 양자택일의 문제인가? “상구보리 하화중생”은 그렇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수경 스님은 우리에게 한 길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길을 직접 걸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환희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 환희심은 미묘법문(微妙法門)의 염화의 미소가 아니라 온 사람이 온 생명이 함께 하는 감동이라는 환희심이었다.

2003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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