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성 본지 주간

홍사성
본지 주간

우리는 지금 20세기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서 있다. 시간을 1백 년 단위로 분절해서 파악하는 것은 진리의 세계에서 보면 허망한 것이지만, 현실의 세계에서는 불가결한 의미를 지닌다.

과거에 대한 반성은 곧 미래를 향한 진보의 첫발이 되기 때문이다. 불교가 시간을 삼세(三世)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과거의 시간인 20세기와 미래의 시간인 21세기를 잇는 이 시점에서 무엇을 반성하고,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

20세기의 세계는 과학문명의 진보와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특징지어진다. 산업혁명 이후 발전을 거듭한 과학문명은 인간의 발자국을 달표면에 찍은 사건에서 보듯이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또 경제적 부의 생산과 분배문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 대립구도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특징들은 직접 또는 간접으로 인류의 생존과 생활방식을 규정했다. 지난 100년 동안 인류가 경험한 풍요와 혜택, 갈등과 불행은 실로 여기에 근거한 것이었다. 20세기의 과학적 발전은 ‘동양의 종교’인 불교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불교의 서양전파는 19세기 동양학 붐이 남상(濫觴)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전파와 연구는 20세기에 들어와서 교통, 통신, 정보의 소통이 자유로워짐에 따라 가능한 성과였다. 불교가 동양인만의 종교가 아니라 ‘세계적 종교’로 확대된 배경에는 20세기 과학문명의 발전과 깊은 관계가 있다.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은 불교연구의 대중화가 급격하게 진전된 사실이다. 지난 수천년간 불교연구는 출가수행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역사적으로 뛰어난 불교사상가가 모두 출가승려였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이에 비해 20세기의 불교연구는 수많은 재가연구자들의 등장으로 급격한 대중화의 길로 치달았다. 물론 아직도 불교의 종교적 권위는 출가승단에 귀속돼 있지만 과거처럼 전능적인 것은 아니다. 이는 20세기를 통과하면서 학교교육의 보편화와 정보독점 체제의 해체, 지식수준의 향상에 따른 결과이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 자체의 입장에서 보면 긍정과 부정의 상반된 결과로 나뉘어진다. 불교의 오의(奧義)에 대한 이해가 대중화된다는 것은 불교적 이상이 보편적 가치로 확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많은 연구가들의 등장으로 일부 사이비 사상가들에 의해 비불교적으로 왜곡된 교리가 ‘제3의 눈’에 의해 비판되고 감시될 수 있게 된 점은 매우 긍정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도 도사리고 있다.

불교는 단순히 지식이나 이론만으로 습득할 수 있는 학문체계가 아니다. 수행과 실천이 뒷받침되지 않는 불교는 학문이고 철학이지 ‘불교’는 아니다. 불교가 철학의 차원을 넘어 인간고를 해결하고 해탈을 추구하는 ‘종교’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실천과 수행이 뒤따르지 않은 교리연구에는 분명 어떤 위험이 따를 것이 분명하다. 이제 우리는 20세기의 불교에 제기된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가 됐다.

그러자면 먼저 불교가 2600여 년의 긴 역사를 온축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왜곡시킨 붓다의 가르침은 어떤 것인지를 낱낱이 밝혀 바로잡는 일을 서둘러야 한다. 다음으로는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불교적 해답과 실천을 담보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 새 시대를 맞이하는 현대의 불교가 지향해야 할 목표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이러한 반성과 자각은 언제나 있어 왔다. 과거의 문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불교를 건설하려는 노력은 전불교사를 통하여 한결같이 나타나는 성격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불교는 태생적으로 비판과 도전을 기반으로 한 종교다. 인도사회의 바라문교적 종교의 전통에 통렬한 비판과 반기를 들고 출발한 불교는 진리와 비진리에 대한 결택을 그 생명으로 하였다. 붓다의 일생은 중생이 무명에 갇혀 인생과 세계를 바로 보지 못하는 데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여정이었다.

대승불교는 붓다시대의 종교정신을 잃고 제도와 형식에 얽매여 형해화된 부파불교를 비판하고 자기쇄신을 추구한 개혁운동의 산물이었다. 중국의 선불교는 교학불교의 관념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제시된 실천주의였다. 이러한 전통은 현대불교의 제문제를 극복하려는 사람들에게 좋은 전형을 제시해 주는 사례들이다.

계간 <불교평론>은 앞에서 지적한 우리 시대 불교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전위적 비판정신으로 극복하고 해결하려는 의욕으로 출발하는 잡지이다. 우리는 이 잡지를 통해 중생과 세계를 아우르는 참다운 구원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추구할 것이다. 과거의 교리해석이나 문화적 전통을 무조건 배척할 이유는 없지만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인간의 삶을 설명하고,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부적절하다면 거침없이 비판의 칼을 들이댈 생각이다. 보다 도전적으로 말한다면 용수나 세친, 원효나 의상이 해석한 불교에 문제점이 발견된다면 그것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용기를 갖고자 한다.

새로운 시대의 불교는 과거의 권위에 억압받지 않는 비판 정신과 도전 정신에 의해 열려져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세계가 불교를 향해 끊임없이 던져오는 새로운 질문에 응답하려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현대사회는 인구, 환경, 생명복제, 핵전쟁의 위협과 같은 새롭고 충격적인 문제들이 인류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불교의 경전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직접적인 해답이나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붓다의 관심이 인간에 관한 모든 문제, 특히 괴로움으로부터 해탈을 추구하는 데 있다면 거기에는 어떤 해결의 실마리가 들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내 창조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카오스적 혼돈으로 치닫는 현대사회에 제시할 것이다. 불교가 주는 새로운 메시지는 분명 현대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귀중한 원리가 될 것이란 것이 우리의 신념이다. 물론 이러한 의욕이 어느 만큼 현실화될 수 있을지는 솔직히 말해 우리 자신도 의문이 적지 않다.

비관론자들은 한국불교가 이런 문제에 제대로 응답하기에는 지적 능력이나 기반 자체가 취약하다고 자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패배주의를 긍정할 수 없다. 오히려 완벽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는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가진 동지들을 묶어서 불교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지식불교의 구심체로서 이 계간지를 발전시켜 나가고자 한다.

이제 겨우 첫발을 내딛는 우리 앞에는 많은 도전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렵더라도 그 문제들을 극복하고 해결해 나갈 것이다. 그리하여 이 잡지가 한국불교의 지식사회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나비의 날개짓’이 되도록 할 것이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이상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의 도전 정신에 뜻을 같이하는 분들의 관심과 성원을 기대한다.

1999년 겨울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