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성 <본지 주간>

홍사성
<본지 주간>

당연한 말이지만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기독교가 예수의 가르침이고 이슬람이 마호멧의 가르침인 것처럼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리로 믿고 따르는 종교다.

 만약 기독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리로 믿고 따른다면 그 순간부터 기독교는 없다. 기독교라는 이름의 불교가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불교를 믿는다면서 기독교적 교리나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순간부터 불교는 없다.

불교라는 이름의 기독교가 있을 뿐이다.

 좀 짓궂은 가정이지만 이런 관점에서 우리 나라 불교도의 종교생활을 살펴보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

우선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다음의 두 가지 경전을 읽어보자.

부처님이 나란타 동산 장촌나림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가미니라는 사람이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하늘의 신을 섬기는 다른 종교의 사제들은 만일 중생이 목숨을 마치면 그를 천상에 태어나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세존께서는 법왕이시니 부디 목숨을 마친 중생이 천상에 태어나게 하소서.”
부처님은 대답 대신 가미니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예를 들어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깊은 연못이 있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크고 무거운 돌을 그 속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와서 합장하고 축원하기를 '돌이 떠오르게 하여 주소서'라고 했다. 그러면 과연 그 돌이 떠오르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많은 사람들이 축원을 했다고 해서 돌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런 경우는 어떠하겠느냐. 어떤 사람이 병속에 들은 기름을 연못에 부어 넣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와서 합장하고 축원하기를 '기름이 가라앉게 하여 주소서"라고 했다. 그러면 과연 기름이 가라앉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많은 사람이 축원했다고 해서 기름은 가라 앉지 않습니다."

가미니의 대답을 들은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 가미니여, 어떤 사람이 게을러서 바르고 착한 일을 하지 않고 열 가지 나쁜 업을 지었다고 하자. 그를 위해 사람들이 아무리 합장을 하고 천상에 태어나라고 축원을 했다고 해서 그가 천상에 태어날 수는 없다. 그는 연못에 빠진 무거운 돌처럼 악도에 떨어지리라. 그러나 가미니여. 어떤 사람이 부지런히 착한 일을 하고 열 가지 선한 업을 지었다고 하자.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합장을 하고 그가 악도에 떨어지라고 저주를 했다고 해도 그는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 마치 기름을 물에 가라앉히고자 하나 가라앉지 않는 것처럼.”

(중아함 3권 《가미니경》)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목련 존자는 효성이 매우 지극한 사람이었다. 출가하기 전의 이름은 나복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왕사성에서 알아주는 부자로 항상 착한 일을 많이 했으나 병이 들어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나복은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한 뒤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창고에 재물이 가득했으나 3년 만에 벌써 창고가 비었습니다. 하오니 저는 이제부터 외국에 나가 장사를 하여 돈을 벌어 오겠습니다.”

나복은 창고에 있는 돈을 꺼내 셋으로 나누고 한 몫은 어머니께 드려 집안을 보전케 하고 또 한 몫은 삼보께 공양하도록 했으며 나머지 한 몫은 장사밑천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청제 부인은 나복이 장사를 떠나자 아들의 당부와는 정반대되는 일만 골라서 했다. 수행자들이 오면 공양을 올리기는커녕 몽둥이로 쳐서 내쫓았으며, 재를 올리라고 남겨준 돈으로는 동물을 사다가 잡아서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나복의 집은 동물의 비명소리와 피비린내로 진동했다.

어머니가 이렇게 악행을 하는 동안 나복은 장사길에 나선 지 3년 만에 큰돈을 벌어 돌아왔다. 아들을 맞이한 부인은 그 동안 자신이 한 일을 감추고 삼보를 공경하고 착한 일을 한 것처럼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청제 부인은 나복이 돌아온 지 이레 만에 갑자기 중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나복은 어머니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내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한 뒤 부처님을 찾아가 출가했다.

나복은 열심히 공부해서 신통제일의 목련 존자가 됐다. 목련 존자는 신통으로 어머니가 태어났을 천상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목련이 부처님을 찾아가 여쭈었다. 부처님은 청제 부인이 살아서 인과를 믿지 않고 나쁜 업을 지었으므로 지옥에 떨어졌다고 했다. 목련이 신통력으로 지옥으로 찾아가니 과연 어머니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었다. 목련이 부처님을 다시 찾아 뵙고 어머니를 구할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애원했다.

이에 부처님은 이렇게 일러주었다.

“7월 보름 스님들이 해제하는 날 우란분재를 베풀어라. 그러면 지옥에서 벗어날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목련이 우란분재를 베풀어 수행자를 공양했더니 그의 어머니는 지옥에서 벗어나 정토에 태어났다.

(《목건련경》)

자료로 제시한 두 경전을 비교해보면 금방 모순점이 발견된다. 《가미니경》에서 부처님은 철저하게 ‘개인이 지은 업이란 누가 대신 받을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마치 돌이 물에서 떠오를 수 없듯이 악업을 지은 사람은 악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반대로 선업을 지은 사람은 마치 기름이 물에 잠기지 않듯이 악도에 빠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뒤의 《목건련경》은 이와는 정반대다. 목련의 어머니가 나쁜 죄를 지어 지옥에 떨어진 것까지는 인과의 엄숙함을 설하고 있는 것 같으나 결론은 다르다. 목건련이 우란분재를 올린 공덕으로 어머니가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되어 있다.

 어머니가 지은 죄를 사하기 위해 아들이 대신 합장하고 복을 빌어준 공덕 때문이다. 앞의 《가미니경》이 비유로 든 예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물 속에 가라앉은 돌이 떠오르고 연못에 던져진 기름이 물 속으로 가라앉는 꿈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경전인데 발상과 결론이 천양지차로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경전이란 기본적으로 ‘부처님의 말씀의 기록’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성립한다. 그런데 만약 부처님이 여기서는 이렇게, 저기서는 저렇게 말했다면 불설(佛說)은 일관성, 신뢰성에서 큰 문제가 생긴다. 설사 방편이라 하더라도 결론 자체가 달라서는 곤란하다.

과연 부처님은 여기서 이말 하고 저기서 저말 하는 사람이었던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부처님은 때와 장소에 따라 말을 바꾼 적이 없다. 문제는 불설을 표방하고 있는 경전에 있다. 불교의 경전 중에는 불설을 가탁한 위경(僞經)이 적지 않다.

효도와 관련된 《부모은중경》이나 앞에서 읽은 《목건련경》 등은 역사적 사실과 관계없는 대표적인 위경이다. 이 위경이 부처님이 직접 설한 가르침으로 둔갑한 데서 모순이 일어난 것이다. 인도에서 찬술된 수많은 대승경전도 사상의 문제가 아닌 역사적 사실의 문제라는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문제는 위경을 위경인 줄 모르거나, 설사 알고 있다고 해도 왜곡된 종교적 신념을 유지하기 위해 그것을 폐기하지 않는 데 있다. 그러다 보니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밀어내는 꼴’이 된 것이다. 한국불교의 경우 위경에 근거한 종교의례와 법사(法事)가 아니면 사찰운영이 안될 지경이다.

그러나 아무리 방편이라 변명해도 이는 불교적 태도가 아니다. 불교라는 이름의 힌두교, 또는 불교라는 이름의 기독교를 불교라고 우기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동북아 대승불교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모순을 해결해야 하는가. 언제나 해답은 문제 속에 들어 있다. 그 해답은 이렇다. 불설과 비불설을 결택(決擇)하는 것이다.

2001년 여름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