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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을 위한 방편이어야 한다 / 홍사성
홍사성 <본지 주간>
[11호] 2002년 09월 12일 (목) 홍사성 본지 주간
   

홍사성
<본지 주간>

이 세상에서 최초의 교리나 사상, 형식과 제도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종교는 하나도 없다. 모든 종교는 태어난 모태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조금씩 형식과 내용을 변모시킨다.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문화와 접촉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모든 종교의 역사란 변화의 기록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만 그 변화가 발전인가 타락인가 하는 것은 새로 따져볼 문제다.

역사나 문화, 사상과 종교도 시대에 따른 변화가 불가피한 것이라면 불교사에서도 변화 자체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인식할 필요는 없다. 교리나 사상, 제도나 형식이 초기시대의 그것과 완전한 자기동일성을 갖지 못한다 해도 그것이 오히려 확대와 발전을 위한 것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대승불교가 초기불교의 자리(自利) 중심적 태도를 이타(利他)와 구제 중심의 사상으로 변모시킨 것은 확실히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변화였다. 특히 화엄이나 중관·유식으로 대표되는 대승불교의 철학사상은 불교의 웅대하고 화려한 철학체계를 보여준 일대 장관이었다. 중국철학사상의 자랑인 노장과 융합한 선불교는 초기시대의 출가 중심적 선정 수행을 보편화, 대중화시킨 공로가 뚜렷하다. 극동지역 불교사의 물줄기에 선불교가 없었다면 그 활력은 훨씬 왜소화되었을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불교는 새로운 변화를 끊임없이 거듭하고 있다. 서양으로 전래된 불교는 서구적 사고와 생활방식에 맞춰 형식이나 제도에서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불교는 머지않아 대승불교나 중국의 선불교가 그랬던 것처럼 사상과 이념에서도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런 징후는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동양의 불교전도사들은 동양적 전통을 서양에 이식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서양적 토양에 불교를 착근시키기 위해서는 낡은 전통을 버려야 한다는 인식이 점차 널리 퍼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모를 비판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면 마냥 긍정적으로만 평가하기 곤란한 측면도 많다. 불교의 역사적 변모가 바로 타락과 왜곡으로 직결된 흔적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의 경우 그 화려한 교학이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신앙상으로는 엄청난 후퇴를 가져왔다. 특히 타력신앙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 기복주의, 신앙심을 내세워 세속적 물량주의를 확대한 점은 불교의 본질을 훼손하고 왜곡을 가속화시켰다. 선불교의 경우는 그 활발자재한 선기(禪機)에도 불구하고 불교 본래의 종교적 윤리성을 왜곡시킨 문제가 보인다. 일체의 권위를 부정한 이념인 살불살조(殺佛殺祖)는 선수행자를 무뢰배로 만든 경우도 있었으며, 무애자재를 강조하다가 막행막식을 정당화하는 풍조를 조장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서양에 전래된 불교는 지나치게 신비화로 치닫는 점이 문제다. 서양인들은 환생과 윤회설에 심취하기도 하고, 또 일부는 선정 수행을 깨달음과 해탈을 위한 방법으로 실천하기보다는 명상 수련의 기법으로 이해하는 기능주의에 빠져들고 있다. 이런 경향이 바로잡히지 않는다면 새로운 문제를 배태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여기쯤에서 우리는 한 가지 곤란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불교의 역사적 또는 사회적 변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불교에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해 왔다. 하나는 변화를 현실로 인정하는 융화주의적 태도이고, 또 하나는 반대로 교리나 사상, 제도나 형식의 변화를 거부하고 초기시대의 그것으로 환원을 촉구하는 근본주의적 태도다. 전자를 진보주의라고 한다면, 후자는 보수주의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불교에서 보수와 진보의 문제는 다른 측면에서 보면 원칙과 방법, 또는 목적과 수단의 문제로 요약된다. 대체로 진보주의자들은 원칙이나 목적에 비해 수단과 방법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계율 문제만 하더라도 진보주의자들은 그 정신이 중요한 것이지 반드시 교조적 방법의 실천을 고수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새로운 제도나 방편의 도입은 불가피한 것으로 본다. 이에 비해 보수주의자는 방법과 수단도 중요하므로 멋대로 변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삼의일발(三衣一鉢)로 생활해야 한다고 규정해 놓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으므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목적과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거나 수단과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들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거나 옳다고 섣불리 편들기 어려운 점이 있다.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일어나면 좀처럼 간격이 좁혀지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불멸 후 100년경에 일어난 상좌부와 대중부의 분열은 보수와 진보가 갈등한 산물이었다. 아비달마불교와 대승불교, 교학불교와 선불교의 대립도 그 연장선상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특히 대승과 소승의 갈등은 오늘날 기독교가 불교를 불용(不容)하는 것 이상이었다. 그들은 분음하수(分飮河水) 즉 흐르는 강물도 갈라서 먹을 만큼 서로를 배타하고 인정하지 않았다. 똑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불교도들이 흐르는 물도 같이 마시지 않겠다고 했다면 그 갈등의 정도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보수와 진보의 갈등을 넘어서는 길은 없는 것인가. 보수적 가치와 진보적 가치를 화해시킬 방법은 없는가. 너무나 당연해서 좀 맥빠진 결론 같지만 해답은 하나뿐이라고 생각한다.

목적과 원칙은 목적과 원칙으로 인정하고, 수단과 방법은 수단과 방법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수단인지, 원칙은 어떤 것이고 방편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따지고 가려야 한다는 말이다. 진보와 보수의 갈등을 해소하는 실마리는 여기에서 찾지 않으면 길이 없다고 단언해도 좋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 ‘불교는 도그마를 강조하지 않는 종교’라는 점을 강조해온 태도는 반성이 필요하다. ‘불교’라는 깃발을 들지 않는다면 모를까 불교를 불교이게 하려면 폭넓은 관용주의 못지 않게 무엇이 원칙이고 진리인가를 거듭 확인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방법과 수단을 생각해야 한다.‘무당과 점쟁이가 포교의 첨병’이라는 식의 발상은 무책임하고 백해무익하다. 목적이 좋다고 수단을 무시하거나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고 원칙을 포기하다 보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불교의 변용은 필요하고 불가피한 측면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변화가 아무리 ‘필요하고 불가피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원칙을 넘어서는 것일 때, 목적과 상관없는 것일 때, 결과는 엉뚱하게 나타난다. 대승불교의 포용주의가 무당불교가 되고, 선불교의 자유주의가 도덕적 방종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바람직한 변화가 아니다.

수단이 목적화되면 목적 자체가 왜곡된다. 그리고 그 잘못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더 많은 왜곡을 일삼게 된다는 것이 역사적 경험이다. 따라서 불교가 참으로 정법의 당간을 바르게 세우고자 한다면 언제나 깨어 있는 안목으로 수단과 목적을 살피고 원칙과 방편을 구분하는 지혜를 잃지 말아야 한다.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는 것은 또 다른 전도몽상이다. 이 점을 확실하게 인식해야만 왜곡의 확대재생산을 막을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수단적 가치가 목적적 가치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방편을 정당화하기 위해 원칙을 왜곡하는 일이 너무 많다.

교리나 신행, 제도와 실천의 문제에서 본말이 전도돼 있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변화가 발전의 동력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왜곡과 타락을 견인하는 이 같은 현상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조고각하(照顧脚下), 지금 바로 발 밑을 살펴서 걱정거리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

2002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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