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성 <본지 주간>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에서 비교종교학을 가르치는 오강남 박사의 《예수는 없다》는 종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은 한국의 보수 기독교가 창조론과 종말론, 대속론과 부활론을 사실 그대로 믿는 것이 얼마나 유치하고 비상식적인 것인가를 쉬운 비유를 들어 비판한다.

또 종교적 메타포를 해석하는 새로운 안목을 제시하면서 성경 무오설(無誤說)에 입각해 성경을 문자주의로 해석하는 무지몽매를 깨부순다. 그 ‘용기’는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도 배워야 할 점이다. 특히 허구를 역사적 사실로 읽는 보수 신학자들을 향해 ‘벌거벗은 임금님’의 비유를 들어 신랄하게 야유하는 대목은 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오르가즘마저 느끼게 한다.

“……(만약) 그 어린이가 ‘임금님이 발가벗었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신하들은 분명 임금님 옷의 아름다움을 서로 자기가 가장 잘 알아볼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나라 안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학자들을 불러다가 그 옷에 대해 연구하라고 한다.

그러면 학자들은 옷에 관한 참고문헌이란 문헌은 다 뒤적여 그 옷의 천이 분명 페르시아의 비단임에 틀림없다고 보고한다. 또 다른 학자는 그 이론을 연장시켜 페르시아 비단의 기원과 역사, 그 제조과정을 연구하고, 다른 학자는 다시 페르시아 비단과 중국 비단의 차이, 페르시아 비단의 미래 등을 연구한다……. 이렇게 하여 이루어진 연구성과를 백성들에게 가르쳐준다. …… 그리하여 서로 다투어 이를 학습하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웃지 못할 희극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이런 웃지 못할 희극이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 뿐 아니다. 이런 학자들이 엮어 놓은 이론체계를 ‘교리’라는 이름 아래 마치 하늘에서 그대로 떨어진 진리나 되는 것처럼 여겨야 하겠는데 지금 같은 개명시대에 그렇게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이다. ‘지성의 희생’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그런 엉뚱한 이야기를 다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저 참자. 믿는 척하는 정도로 하고 살자.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우리가 지금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그리고 남을 속이는 것이다…….”

오박사의 이 같은 주장을 읽으면서 생각나는 것은 우리 불교학계의 현실이다. 사실 돌아보면 우리 불교학계는 벌거벗은 채 외출한 임금님에 대해 ‘임금님은 벌거숭이’라고 말하지 못한 부분이 너무 많다. 예를 들면 대승경전의 찬술의 비역사성 문제, 주술과 의례주의에 매몰된 기복신앙의 문제 등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단순히 침묵을 지키는 수준이 아니라 거짓과 허구를 도리어 진실로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온갖 이론을 전개하고 해설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해오고 있다. 그러다 보니 허구를 사실이라고 입증하기 위해 무리하게 견강부회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아직도 천태의 오시교판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것이 그 증거다.

물론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사실만을 문제삼아 대승경전을 무조건 ‘가짜 경전’으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또 대승경전은 부처님의 금구직설(金口直說)이 아니므로 모든 대승교리는 진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옳다고는 할 수 없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대승경전은 대승불교운동을 주도하던 사람들이 그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불설(佛說)을 가탁한 것이다.

대승의 불교사상은 평지에서 돌출한 것이 아니라 불타 교설을 재해석하고 신앙을 성숙화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교리적으로는 연기를 중도와 공으로 발전시키고, 종교적으로는 회향과 서원의 사상을 바탕으로 이웃에 대한 자비와 보시를 가르치고, 이를 실천할 이상적 인간상으로 보살을 내세운 점 등은 분명히 사상적 발전이고 자랑이다.

초기불교의 수도주의적 성격을 대중 구원의 사회적 성격으로 전환한 것도 매우 바람직한 방향의 진보였다. 이렇게 본다면 대승불교는 글자 그대로 ‘위대한 불교’로 평가받아 마땅한 점이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를 말할 때 딱 한 가지 걸리는 문제가 있다. 대승불교가 새로운 경전을 통해 불교사상을 새로 조직하고 ‘대승적으로 소화하고 있다’고 해도 허구적 사실을 바탕으로 경전을 ‘만든’ 허물만은 덮어지지 않는다. 불교의 성전들에는 엄연히 경율론 삼장의 구분이 있다. 경장은 부처님의 진리에 대한 말씀을 기록한 것이고, 율장은 계율에 관한 가르침이다.

논장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주석과 해설이다. 만약 대승불교 운동가들이 불교사상을 새롭게 해석했다면 ‘나는 이렇게 들었다’고 하면서 경전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이해한다’ 또는 ‘이렇게 해석한다’고 고백하면서 논서를 저술했어야 했다.

대승경전은 그 진리성 여부를 떠나 이렇게 허구에 기초한 경전이다. 허구나 소설이 그 나름의 진실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사실’은 아니다. 허구를 사실로 바꾸려고 하면 더 많은 허구적 사실을 만들어내고 변명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는 끝내 엄청난 부담으로 남는다. 다음과 같은 의문이나 문제제기에 답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첫째, 대승경전을 참다운 불설로 인정할 경우 새로 만들어지는 경전이 있다면 그것을 막을 명분이 없다. 왜냐하면 대승불교 운동가들도 경전을 만들었다면 우리라고 필요에 의해, 또는 사상적 발전을 반영하고 권위를 담보하기 위해 경전을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적지 않은 경전이 만들어졌다. 그러자 옛날 학자들은 경전의 권위를 위해 인도 찬술은 진경이고 중국 찬술은 위경이라고 구분하기도 했다. 하지만 후대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에서 만들어졌건 인도에서 만들어졌건 누군가에 의해 경전이 소설처럼 쓰여졌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를 진경이니 위경이니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경전은 우리가 불교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매우 귀중한 길잡이다. 거기에는 불타직설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거나 만들어졌는데도 그것을 부처님이 말씀한 경전으로 믿으라고 한다면 지성의 희생을 감수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결국 대승불교가 경전을 만든 문제는 오늘에 와서 도끼로 자기 발등을 찍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둘째, 신앙적 혼란의 초래다. 현대는 학문의 비밀창고가 사라진 시대다. 학술정보가 몇몇 사람의 머리에 저장돼 있던 과거와는 달리 누구나 고급정보를 함께 공유할 수 있다. 학문의 비밀창고가 사라졌다는 것은 유리한 자료는 내세우고 불리한 자료는 감추는 것이 불가능해졌음을 의미한다.

이런 환경은 대승불교의 다불다보살(多佛多菩薩)의 존재를 ‘사상이나 이론’이 아닌 ‘역사적 사실’로 믿으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럼에도 대승만을 내세우던 사람들은 관성의 법칙 때문에 쉽게 그 믿음을 거둬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미 사람들은 대승불교가 어떤 과정을 통해 성립되었고 그 문제점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데 혼자만 무오무류(無誤無謬)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보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대승경전을 중심으로 한 허구적 믿음을 계속 사실이라고 주장하자니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고, 그렇다고 부정하자니 지금까지 해왔던 것을 모두 부정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미타불의 서방정토는 우주 어디에 있으며 관세음보살은 언제 태어난 어느 부처님의 제자인지를 묻는 사람들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할지를 생각하면 머리가 아찔해진다. 허구에서 원천을 시작했기에 대승불교의 본뜻마저 훼손될 처지가 된 것이다.

현대불교학, 특히 대승불교권 불교학은 이 문제와 관련해 그야말로 진퇴유곡의 어려움에 빠져 있다. 겉으로 드러내놓고 말은 안 하지만 언제까지 무작정 이 문제를 외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대승불교가 역사의 광장에 나서자 적지 않은 사람이 ‘임금님은 벌거벗었다’고 말하고 있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학자들도 비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전개해온 ‘페르시아산 비단’ 같은 불교학 이론을 변설하기가 여간 곤혹스럽지 않게 되었다. 객관적 사실의 나열이나 가치중립적 입장의 고수가 학자들의 학문적 태도라고 말하기에는 진실에 대한 요구가 너무 거세다.

이 단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단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다. 대안도 없이 사실을 고백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식의 태도는 옳지 않다. 보다 솔직해져야 역사적 사실과 종교적 진실이 모순되지 않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연구할 토대가 마련된다. 우리도 이제는 이런 정도의 과제에 도전할 용기를 보여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2002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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