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성 (본지 주간)

홍사성
(본지 주간)
지금까지 동양의 불교도들이 불교를 연구해온 방법은 대체로 호교론적 관점의 것이었다. 불교가 얼마나 무오류의 사상이며 그것은 어떤 내용인가 하는 것이 주류였다. 더 과장해서 말하면 동양에서 불교는 그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비합리적이고 반이성적인 태도로 신앙되어 왔다.

이것은 한 서양의 불교학자가 지적한 대로 동양인에게 불교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의 종교이며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인지도 모른다. 사실 동양의 불교도는 진리를 믿기 때문에 불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동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불교를 믿는 경우가 더 많다. 이 점은 동양의 불교도에게 행운이자 동시에 불행이기도 하다. 불교도로 태어났기 때문에 불교를 믿는 것은 자칫하면 진지하게 불교를 공부하거나 연구하는 태도를 갖지 않는 원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양의 불교도들 중에는 자신들이 믿어온 고유한 신앙방법에 매몰되어서 그 같은 태도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조차 판단하려 하지 않는 일이 다반사다. 예를 들어 동양의 불교도는 전문적인 연구가를 포함해서 붓다를 절대신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중기 대승불교 이후 인도에서는 힌두교의 영향으로 붓다를 시바 신의 권화로 보려는 시각이 우세했다. 불교는 이를 엄정한 교판(敎判)을 통해 시비를 결택하기보다는 관대하게 포용했다.

그 결과 불교는 중생이 기도를 하면 소원을 들어주는 유일신교적 신앙을 정착시켰다. 불교가 동양사회의 지배적인 종교가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특유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교리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불교가 그토록 부정하고자 했던 기복주의, 주술주의의 의례종교(儀禮宗敎)로 흘러갔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형태가 어느덧 전통으로 굳어져 불교는 다른 종교와 전혀 차별성을 갖지 못하는 종교로 변질되어갔다.

동양의 불교가 오랜 역사를 온축하면서 왜곡과 타락의 길로 빠져든 것은 바로 이같은 환경적 조건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동양의 불교도는 맹구우목(盲龜遇木)에 비유되는 불교와의 만남 자체에서는 행운을 누렸지만 불교의 진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사색하지 않는 점에서는 불행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서양의 불교도는 오히려 정반대의 입장에서 행운과 불행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서양의 불교도는 전통적으로 모두 기독교도였다. 마치 동양의 불교도가 조상 대대로 불교를 믿어왔듯이 그들도 조상 대대로 기독교를 종교로 믿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동양의 불교도가 의심 없이 불교를 믿어왔듯이 기독교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갖지 않고 신앙해왔다. 그들에게 있어 기독교는 종교이자 생활이었다. 서양의 불교도는 바로 이런 환경에서 불교를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다. 서양인들에게 불교는 어디까지나 이방의 종교이고 이단의 종교였다.

따라서 그들은 우선 자기들이 믿어온 기독교와 불교가 어떻게 다르며, 불교에서는 무엇을 진리라고 주장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무조건적으로 불교를 믿는 동양의 불교도와는 이렇게 출발부터가 달랐다. 놀라운 점은 서양에서 불교도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불교의 진리가 합리적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가 기독교도였던 서양인이 불교도로 태어나기까지에는 수많은 고민과 사색이 있었다.

서양인들은 태생적으로 불교도가 아니기 때문에 불교를 믿기 위해서는 먼저 불교의 교리와 관련해 해볼 수 있는 질문과 의심은 다 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의심과 질문이 어느 정도 해소된 뒤에야 불교의 진리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하게 된다. 불교에서 믿음이란 불합리하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을 수 없는 명백한 진리이므로 믿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업에 의한 연기적 상호관계에 있다.’는 명제는 아무리 뒤집고 싶어도 뒤집어지지 않는 진리다.

일시적 착각으로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일 뿐이다. 철저한 이성주의가 불교의 기본성격이라는 사실은 서양의 불교도에게 큰 매력이었다. 저들이 자신의 종교적 전통인 기독교를 버리고 불교로 개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과정은 동양의 불교도와는 상반된 의미의 행운과 불행의 교차라고 볼 수 있다. 서양의 불교도는 쉽게 불교를 만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확실히 동양의 불교도보다는 불행하다.

그러나 비록 뒤늦게 불교를 만났다고 하더라도 불교의 진리를 바로 인정하고 믿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불교도가 된 것은 확실히 동양의 불교도보다 행운이다. 만약 저들도 조상 대대로 기독교를 믿듯이 의심 없이 불교를 믿어왔다면 동양의 불교도처럼 비불교적 샤머니즘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서양 불교도의 이러한 행운은 마치 초기불교시대 성문제자(聲聞弟子)들의 그것과도 비슷하다. 부처님 재세시 성문제자들은 오랫 동안 인도 사람들이 믿어왔던 바라문교적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바라문교적 인생관과 가치관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이 점은 고타마 붓다에게까지 해당된다. 그러나 붓다는 과감하게 이성적인 판단과 사색에 의해 진리를 깨달았다. 불교는 바로 이 깨달음을 기초로 한 종교다. 불교교단에 입단하는 많은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자신들이 진리라고 믿어온 교리와 불교의 가르침을 비교함으로써 어떤 것이 옳은가를 판단한 끝에 개종을 결행했다. 사리풋타와 목갈라나, 캇사파 형제들의 개종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부처님 재세시의 성문제자들이나 이제 막 불교로 귀의하기 시작하는 서양의 불교도가 불교를 대하는 태도는 일상적 안일에 빠져 있는 현대의 동양 불교도에게 신선한 깨우침을 준다.

초기불교시대의 성문제자들이나 서양의 불교도가 불교를 믿기 위해 품었던 여러 가지 솔직한 의문들은 동양의 불교도와 학자들에게 자신의 신앙적 태도나 학문적 연구과제의 설정에 매우 유의미한 주제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서양의 불교도는 동양의 불교도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은 주제를 문제로 제기하면서 해답을 요구한다. 저들은 불교의 교리를 공부하거나 책을 읽으면서 품었던 의문들을 감추지 않고 매우 진지하고 솔직하게 묻는다.

예를 들면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젊은 싯다르타가 아내와 자식을 무책임하게 팽개치고 출가한 사실을 페미니즘적 입장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도 저들에게는 의문이다. 특히 여성과 어린이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의식이 강한 서구적 가치관으로 본다면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유교의 배불론의 근거이기도 했던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종교라는 지적과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 욕망의 문제도 만만치 않다.

불교에서는 욕망이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동력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욕망의 억제 또는 단절을 통해 윤회에서 해탈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문제는 대답이 간단치 않다. 기본적으로 사바세계는 욕망으로 구성된 세계다. 그럼에도 모든 욕망을 부정하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가, 세속적 삶은 정말 무가치한 것인가.

흔히 ‘세계 부정적인 종교’ ‘반세계적인 종교’ 문제로 일컬어지는 이 문제들은 세계를 향해 불교가 설명해 주어야 할 과제들이다. 이런 식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해답을 추구하자면 현대불교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야 할 분야는 무변하다. 그러나 동양의 현대불교는 이러한 문제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

학문의 엄정성을 내세우며 불교문헌에 대한 훈고주석을 지상의 과제로 여기는 태도만 넘쳐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문제는 오히려 서양에서 더 관심을 갖는 경우가 많다. 현대의 제문제를 불교적 관점에서 연구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학자는 대부분 서양학자들이다. 최근의 ‘아시아적 가치 논쟁’에서 아시아인이 주체가 되지 못하고 구경꾼이 되었듯이 불교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동양의 불교도와 연구가들은 이런 현실에 대해 더 이상 함구로 일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문제에 대해 이미 완벽한 해답을 준비해 놓고 있다면 공개를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연구의 방향을 선회하든지 양단간에 액션을 보여주어야 한다. 만약 회피를 한다면 그 이유라도 밝혀야 한다.

그것이 동양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불교도가 된 행운을 만난 동양의 불교도가 해야 할 일이다. 그래야 오랫 동안 불교를 믿고 연구해온 불교도, 또는 불교학자의 이름에 값하지 않겠는가.

2000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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