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성 <본지 주간>

―창간 2주년에 부쳐―

부처님 본생담(本生譚) 형식으로 구성된 《자타카》는 인도 고유의 설화에서 불교적 가르침의 비유를 끌어낸 것으로 유명한 경전이다. 547개의 설화를 집록(集錄)해 놓은 이 경전은 중생의 어리석음을 일깨우고 구제하기 위한 부처님의 자비가 얼마나 거룩한가를 묘사하고 있어서 읽을 때마다 감동을 준다. 이중 322번째 본생인 ‘어리석은 토끼와 지혜로운 사자’의 이야기는 정견(正見)을 상실한 중생들이 얼마나 몰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이 본생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깊은 산 속에 사는 토끼 한 마리가 어느 날 타라 나무 밑에 누워 공상을 했다.

‘만일 이 대지가 무너진다면 어떻게 될까? 틀림없이 나는 죽게 될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털이 뻣뻣하게 서고 온몸이 떨렸다. 그때 마침 잘 익은 타라 나무 열매가 툭 떨어졌다. 어리석은 토끼는 드디어 대지가 무너지기 시작한 줄 알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를 본 친구가 물었다.

“자네는 왜 그렇게 놀라서 달아나는가?”

“지금 대지가 무너지고 있다. 그래서 달아나는 중이야. 너도 살고 싶으면 도망쳐!”

친구는 대지가 무너진다는 말을 듣고 겁이 나서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두 마리의 토끼는 금방 네 마리, 여덟 마리, 열여섯 마리…… 수백 마리로 늘어났다. 토끼들이 줄지어 달리자 풀을 뜯고 있던 사슴이 무슨 영문인지 물었다. 토끼들은 “대지가 무너지고 있으니 살고 싶으면 달아나라!”고 외쳤다. 그러자 사슴도 달리기 시작했다. 소문은 숲 전체로 퍼져서 돼지와 물소, 호랑이, 코끼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한 마리의 지혜로운 사자가 도망치는 무리를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

‘대지가 무너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들은 무엇인가 잘못 알고 있다. 지금 내가 나서서 말리지 않으면 이들은 틀림없이 바다에 빠져 죽게 될 것이다.’

사자는 우왕좌왕 하는 무리의 속으로 들어가 소문의 진상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우선 덩치가 큰 코끼리에게 묻자 코끼리는 호랑이를 가리켰다. 호랑이는 다시 물소, 물소는 돼지, 돼지는 사슴, 사슴은 토끼에게 들었다고 했다. 사자는 최초의 발설자인 토끼와 함께 타라 나무 밑으로 가서 현장을 조사했다. 하지만 대지가 무너졌을 리 만무했다. 사자는 모든 동물들을 안심시켰다. 숲은 다시 조용한 평화가 찾아왔다.
이 설화의 주제는 실제와 다른 허상을 사실로 믿는 중생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다. 남들이 한다고 무조건 따라서 하다 보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사실 돌아보면 우리는 옛날부터 그래 왔으니까 검증도 해보지 않고 무조건 옳다고 믿고 추종하는 일이 수없이 많다. 하지만 아무리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고, 많은 사람이 좋다고 동의하더라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불합리하거나 모순된 것인데도 전통이라는 이유로, 또는 잘못 건드리면 혼란만 가중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방치하다 보면 모두가 나락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 그것은 마치 조상이 대대로 외눈박이로 살아왔다고 멀쩡한 눈을 찔러 스스로 외눈박이가 되려고 하는 바보 같은 짓이다. 불교는 이 점을 일깨우기 위한 종교다. 앞서 예로 든 우화는 중생들이 아무 생각 없이 벼랑으로 달려갈 때 위험표지판을 들고 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것이 불교의 책무임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오늘의 불교는 과연 이 책무를 다하고 있는가. 사실과 현상을 잘못 인식하고 나락의 길로 향하는 중생의 앞길을 가로막고 바른 길이 아니라고 외치고 있는가. 아니 중생을 향한 외침은 그만두더라도 불교 자신이 걷고 있는 길에 대한 냉철한 성찰과 이에 따른 정법의 길을 가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숲속의 동물들이 영문도 모르고 시류에 휩쓸려가듯이 무엇이 불교의 가르침인지를 생각지도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살펴보자.

우선 떠오르는 문제는 소승불교에 대한 오해다. 예로부터 대승불교는 초기불교를 소승이라고 폄하해 왔다. 아함(阿含)의 교설(敎說)과 수행법은 자기만의 이익에 중점을 둔, 근기가 하열(下劣)한 사람들이나 하는 불교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대승은 다른 사람을 구제하기 위한 위대한 불교라고 주장해 왔다. 한국불교는 중국의 천태지의(天台智확)가 확립한 오시교판(五時敎判)을 근거로 대소승 비교우위론을 사실로 믿어 왔다. 하지만 소승불교를 폄하하는 것은 불교의 교조(敎祖)를 폄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부처님은 대승이 비판한 소승의 교리와 수행법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또 천태의 오시교판은 역사적 사실과는 관계없는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이미 밝혀진 마당이다. 따라서 대소승 비교우위론은 지금쯤 용도 폐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대승 쪽에서는 좀처럼 이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신행상의 문제는 더 심각하다. 현재 한국불교의 현실은 기복주의가 아니면 견뎌낼 수 없을 정도다. 지식 수준의 고저를 불문하고 대부분의 불교신도들이 복을 빌고 복을 받기 위해 불교를 믿는다. 깨달음이니 해탈이니 중생교화니 하는 말은 저급한 기복주의를 호도하기 위한 장식품에 불과하다. 불교 지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까지도 ‘기복주의가 왜 나쁘냐’ ‘기복 없이 종교가 성립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기복주의 비판론자들을 도리어 비판한다. 출가 수행자는 복을 빌어주는 무당 또는 사제로서 성격이 바뀌었고, 사찰은 수행과 교화의 공간이 아니라 미신의 온상으로 바뀐 지 오래다.

힌두교의 숭배대상이었던 자재신(自在神)을 보살로 둔갑시켜 예배하는가 하면, 영가천도 같은 의례가 불교의 가장 중요한 종교행위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모든 행위가 옛날부터 그렇게 해온 ‘전통’이란 이름 아래 정당성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교단 운영 방식에 관한 문제도 그렇다.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절 살림은 출가중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 불교교단에서 출가중은 수행과 교화의 중심이고 재가중은 교단 외호와 재정적 후원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출가중이 사원경제 문제의 주체로 나서기 시작한 것은 승원제도가 확립되면서부터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문제점이 나타났다.

출가중이 본연의 수행과 교화의 길을 외면하고 세속적인 일에 더 정신을 팔게 된 것이다. 뜻 있는 사람들은 여러 차례 이 문제를 지적했지만 이 권고는 마이동풍이다. 오랜 세월 동안 전통으로 굳어진 일을 바꾸면 혼란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낡고 잘못된 전통을 다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그만큼 부정해야 할 것이 많다는 얘기다. 물론 낡은 전통이라고 다 부정해야 한다는 식의 발상은 위험한 데가 있다. 또 시대적 필요나 감각에 맞게 수정하고 보완해서 새로운 전통을 확립해 가는 것을 반드시 비판하고 매도할 필요도 없다. 다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사고가 너무나 전통적인 것의 권위에 눌려 한 번도 그 전통이 옳은지 그른지를 성찰하지 않는 데서 오는 폐해다.

잘못된 전통도 전통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고름도 살 속에 있으니 아껴야 한다는 식의 억지와 다르지 않다. 불교 지식인은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잘못된 전통과 그릇된 현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바른 길을 이끌어갈 ‘사자(獅子)’로서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다. 만약 이들이 침묵한다면 잘못된 인식에 근거한 그릇된 전통이 바로잡히지 않는다. 부처님이 그랬듯이 참다운 불교 지식인이라면 전통이나 권위에 심복하기보다는 진리에 근거한 정법을 주창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교평론〉은 시류나 권위에 밀려 잘못된 전통을 정통으로 알고 복속하려는 현실불교의 몰주체성에 도전하기 위해 창간된 잡지다. 지난 2년 동안 우리는 나름대로 여러 가지 주장과 도전을 거듭해 왔다.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눈치보기에 익숙한 풍토에서 이 새로운 시도는 쉽게 착근(着根)되기 어려운 한계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판을 거둘 수 없다.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더욱 우리를 분발시키기 때문이다. 〈불교평론〉의 문장(紋章)인 아쇼카 석주의 ‘포효하는 사자’에 걸맞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더 많은 분들의 성원과 질책을 바란다.

200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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