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성 (본지 주간)

현대의 불교학 연구가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 풀어야 할 숙제는 실로 여러 가지다. 우수한 신진학자의 양성, 원전언어에 의한 연구, 세계불교학계와의 교류 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 온 과제들이다. 지난 세기 동안 불교학계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덕분에 이제 한국의 불교학계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우선 학자군의 저변이 놀라울 정도로 확대되었고, 이에 따라 학문적 성과도 넓고 깊게 나타나고 있다. 불과 50여 년 전의 한국불교학계를 생각한다면 한 해에 수백여 편에 가까운 연구논문이 쏟아지는 현실은 분명 축하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발표되는 논문의 주제나 수준만을 놓고 평가한다면 아직은 불만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현실 불교가 필요로 하는 주제에 대한 천착이 별로 없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그 중에서도 불자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다음 두 가지 문제가 아닐까 한다. 하나는 불교 내적인 것으로, 대승불교와 초기불교 간의 상호 모순된 주장들이 파생시키는 신행상의 문제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불교 외적인 것으로, 현대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불교적 해답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시원치 않다는 점이다. 교리적 문제의 경우는 그 의문의 역사가 자못 길다. 동북아 불교는 지난 수천 년 동안 금과옥조로 여겨온 오시교판(五時敎判)의 틀에서 교리와 사상을 해석해야 했다.

이에 따르면 부처님의 성도는 29세에 이루어졌으며 설법의 기간도 49년이나 됐다. 많은 대승경전은 부처님의 금구직설(金口直說)이며 이를 부정하는 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근대의 문헌비판이나 다양한 연구의 결과는 과거의 불교인들이 신념을 가지고 믿어온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내놓았다.

부처님은 오시로 나누어 설법한 적이 없으며 대승불교는 불교사상상의 발전일 뿐이었다. 불타 교설에 심천과 차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비역사적인 태도라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은 교리나 신앙상의 문제를 설명하는 데 심각한 문제점을 던져주고 있다. 경전에 등장하는 수많은 불보살에 대한 신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역사적 비실재인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을 신앙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기복주의는 불교인가 아닌가, 대승불교적 신앙과 불교 본래의 입장이 모순되는 문제점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등은 매우 골치 아픈 과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불교교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신행하는 방식에 일대 전환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불교가 겪는 사상적 혼란의 근거도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 불교학계는 이 문제를 얼렁뚱땅 넘겨왔다. 진실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사상사적으로만 설명하는 데 치우쳐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시비를 결택하지 않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애써 정면대결을 피해 왔다. 비불교적 주장마저도 회통불교의 이름으로 호도해 왔다. 불교 자체는 무오류일지 모르나 역사적 전개에는 오류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면, 이는 공부가 부족하거나 진리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하지 않는 탓으로 볼 수밖에 없다. 현대사회가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불교적 응답을 주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데미언 키온(Damien Keown)이 지적하고 있듯이 생명은 어느 지점에서 시작해서 어느 지점에서 끝나는 것인가, 불교에서는 인공유산을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 생명복제와 배아(胚芽)에 관한 실험은 어떻게 보는가, 안락사는 정당화되는 것인가.

현대불교는 이런 질문에 대한 신속하고 성실한 답변을 요구받고 있다. 그러나 불교는 이 쟁점들에 대해 지침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만족할 만한 대답을 주고 있지 않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위에서 열거한 쟁점에 대해 불교의 스승이나 학자들은 무관심하다. 그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불교가 전통적으로 출세간적인 해탈과 열반을 주제로 하는 논의가 아닌 것에 대해 크게 관심을 표시하지 않았던 것과 관계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불교가 출가수행자만이 아닌 모든 중생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가르침이라면 언제까지 세속적인 문제에 무관심할 수는 없다. 부처님도 세속적 현실의 문제를 무조건 외면만 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와 관련해 지금까지 불교의 스승이나 학자들이 보여온 태도는 석연치 못한 데가 많다.

놀랍게도 일부 스승이나 학자들은 현대불교학은 이미 이에 대해 충분한 대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들은 호교론적 고집과 학문적 권위를 내세우며 남이 알아듣든 말든 일방적으로 자기주장만 내세운다. 그런가 하면 달팽이처럼 숨어서 말을 아끼며 아예 집밖으로 나오지 않으려는 회피주의자들도 있다. 이들은 문제는 인식하고 있지만 확신이 부족한 탓인지 남의 눈치만 살핀다.

자칫 잘못 말했다가 시비에 휘말리느니 차라리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겠다는 식이다. 이들의 태도를 보면 무능력과 무식은 무관심으로 위장하고, 생소함과 두려움은 권위를 가장해 회피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이런 풍토가 개선되지 않는 한 한국의 불교학계는 ‘고립의 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불교학계가 이 같은 문제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럼에도 방향전환이 쉽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속내를 따져보면 개인적인 이유보다는 제도나 환경의 영향이 더 크다는 생각이다. 우선 불교학의 연구과제 설정부터가 문제다. 불교학의 연구주제들을 보면 아직도 구시대적 분류방법인 천태·화엄·중관·유식·계율·정토·밀교·선종 등 종파주의가 중요한 기준점이다. 불교학 연구의 본산인 동국대학교의 교과목은 철저히 이 기준에 의해 구성돼 있다.

그러다 보니 신진학자들은 연구주제를 선택할 범위가 매우 좁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주제에 도전하려고 하지만 지도교수도 없고 전공선택도 안 된다. 신진학자들마저 자료를 새롭게 ‘해석’한 논문보다는 훈고적 ‘해설’을 하는 수준의 글쓰기에 길들여지는 것은 이러한 현실과 무관치 않다. 현대는 대장경이 전산화되어 대중에게 제공되는 시대다.

과거처럼 자료정리와 주석만으로 학문적 업적을 평가받을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현대불교학이 요청하는 것은 자료해석의 안목이다. 그렇다면 현대불교학은 불교의 근본교설의 입장에서 어떤 것이 이단적인 것인지부터 따져야 한다. 현대사회에 제공될 불교의 메시지에 대한 교학적 접근과 해석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불교학의 교과목부터 개편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이른바 ‘순수불교학’의 분야를 과감히 축소하고 ‘응용불교학’ 분야의 교과목을 대폭 늘려서 불교사상의 현대적 적용을 본격적으로 공부할 토대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이 작업에는 원로학자들이 먼저 나서서 자신의 전공을 응용하여 과감하게 해석을 시도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유식을 불교심리학, 계율을 불교윤리학의 범주로 확대시켜 연구한다면 불교학의 지평은 얼마든지 넓어질 수 있을 것이다.

정치학·경제학·사회학·문학·생태학·생물학·교육학·복지학·여성학·자연과학·언어학·미학의 영역도 개발을 기다리고 있는 처녀림이다. 이렇게 방향을 선회하여 연구의 주제를 선택할 때 운신의 폭이 넓어진다. 한국의 현대불교학, 이제는 어떻게든 은둔과 협착의 옷을 벗어야 한다. 그 동안 우리가 몇 차례 이 문제를 제기한 것도 어떻게든 개선을 위한 물꼬를 터보자는 의도에서였다.

〈불교평론〉은 새해에도 이 문제를 가장 중요한 화두로 삼고자 한다.

은산철벽이 깨어질 그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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