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성 (본지 주간)

21세기가 의미 있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디지털 시대’ ‘정보지식사회’로 지칭되고 있는 21세기는 우리에게 문명의 전환을 경험하게 하고 있으며, 지난 세기와는 다른 사고틀, 새로운 인식의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에게 위기이자 기회이기도 하다.

변화된 환경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이미 세계의 많은 석학들이 불교사상을 21세기의 유력한 대안사상으로 지목하고 있다. 불교의 정신주의적 성격, 자연과의 친화성 등이 그러한 전망의 주된 근거다. 이러한 주장은 불교 본래의 교의를 토대로 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현실 속에서 신앙되고 있는 불교 또한 과연 그러한가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대답하기에 주저되는 바가 없지 않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오늘의 한국불교는 부처님이 가르친 불교와는 많은 상거(相距)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희망을 포기할 수 없다. 새로운 출발은 과거의 반성으로부터 시작되고, 참다운 지혜는 실패로부터 얻어진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패배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토대로 미래를 기획하는 것이다. 지난 20세기 한국불교의 성격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불교의 현대화, 대중화, 생활화를 지향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 5백년 동안 기나긴 침체기를 산중에서 은거하며 현실 세계에서 배제되어 왔던 불교는 구한말 왕조체제 해체기를 통과하면서 서서히 기지개를 펴기 시작하였다. 개항기를 전후로 한 각 본산의 포교소 건립운동 등을 시발로 현실 참여와 대중화의 첫발을 내딛은 불교는 해방 후 본격적인 현대화의 물결을 타게 된다.

최근에는 아파트촌에 도심포교당이 들어서고, 정기법회의 정착, 경전의 한글화, 찬불가의 제작 등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변화의 상당 부분은 불교의 내적 자각보다는 서구종교의 도전에 대한 응전이라는 측면이 강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성과 자체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우려할 만한 현상도 적지 않게 드러냈다. 예컨대 불교 본래의 사상과 교의의 왜곡이 심화되었으며, 교단적으로는 만해와 같은 선각자들이 주장한 불교유신론의 내용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전통적인 산중사찰에서조차 호구를 위한 재받이가 중요한 법사(法事)가 되었고, 도심의 유명한 포교사찰마저 입춘부적을 팔고 있다. 수많은 비불교적 관행들이 방편이라는 미명하에 무비판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 불교의 솔직한 자화상이다. 더욱 반성해야 할 점은 이러한 비불교적 신행 형태를 합리화하거나 미화하려는 경향이다. 여타의 종교와는 달리 전파되는 지역의 문화와 전통을 파괴하기보다는 존중하는 것이 불교의 특징이고 미덕이다. 그러나 불교의 핵심 교의에 어긋나는 것까지 관용과 방편이라는 미명 아래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불교가 인류에게 구원의 빛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민족종교 또는 민속종교의 한계를 뛰어넘은 고등종교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교 본래의 이 ‘고등종교성’을 되찾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돌아보면 지난 20세기의 한국불교는 절반은 성공, 절반은 실패라고 규정할 수 있다. 새로운 세기의 불교가 감당해야 할 과제는 지난 세기의 ‘절반의 실패’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불교평론〉의 기본적 입장은 불교 본래의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왜곡과 굴절이 일어나기 이전의 불타본회(佛陀本懷)를 밝혀 현실에 적용하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의 먹물분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자면 이미 창간호에서 천명했듯이 과거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비판 정신과 도전 정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번 호에 실린 여러 편의 글들이 이러한 기대에 어느 정도 부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직도 본격적인 문제제기나 대안제시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없지도 않으나 이를 발판으로 더욱 정치하고 실천적인 논의를 제시할 것을 약속한다. 디지털 시대에 종교가 유념해야 할 점은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의 혁신이다. 그 변화를 견인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많은 질책과 성원을 바란다.

2000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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