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근대는 아편전쟁(1840년)과 청일전쟁(1894년)으로 대변되듯, 서양 제국주의 세력이 동양으로 침범해 들어오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로, 동서양 문화와 사상이 정면으로 부딪치며 갈등 · 융합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중국의 대표적 지식인이었던 양계초(梁啓超, 1873~1929)는 동서양을 포함하여 세계사상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 칸트를 들었다. 근대 이후로는 마르틴 루터, 베이컨, 데카르트를 근세의 성인(聖人)으로 꼽았는데, 이들 사상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한 엄복의 견해를 따른 것이다.이 중
1. 머리말스리랑카는 인도의 남동쪽에 위치한 섬나라다. 열여덟 차례의 식민통치를 받는 등 여러 서양 국가의 식민지 시대를 거쳤다. 식민지 역사는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영향을 받았고 그로 인한 득실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시의 비참한 사회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450년 동안의 식민지 시대를 벗어난 지 70년이 지난 오늘날도 그러한 무형의 의식 지배로 인한 갈등 끝에 결국 ‘국가부도’를 불러온 상태이다.이런 국가 위기를 진단하고 발전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현 사회 인식을 새롭고 올바른 방향을
1. 씨줄과 날줄 위에서 선 술락의 90년참여불교(engaged buddhism)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틱낫한 스님이지만 국제 참여불교운동을 실질적으로 조직화하고 이끌어온 지도자는 태국의 술락 시바락사(Sulak Sivaraksa, 1933~ ) 박사이다. 1989년 술락 시바락사의 주도로 아잔 붓다다사, 틱낫한 스님, 달라이 라마 등이 고문으로 참여하고 여러 나라의 불교운동 지도자와 활동가, 학자들이 결합한 국제참여불교네트워크(INEB)가 창설되었다.현재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은 날줄인 경도와 씨줄인 위도가 교차하는 지점을
1. 암베드까르(1891~1956)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폐지하고 1858년부터 인도를 직접 지배했다. 이를 위해 1858년 인도통치법과 1861년 인도입법위원회법(Indian Councils Act, 1861)을 제정하고 이후 영국의 정책에 따라 수차례 개정했다. 한편으로 1835년의 매콜리(Thomas Babington Macaulay)에 의한 교육안, 1854년 우드교육특송문(Wood’s Educ-ation Despatch) 등에 의거하여 인도의 교육제도를 수립하였고 커즌 총독은 1902년에 인도대학위원회를
오늘날 한국 불교계에서 불교 명상에 대해 얘기하고자 할 때 대개 한국의 간화선과 남방불교 특히 미얀마불교의 위빠사나 명상수행이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회자되고 있다. 사실 위빠사나 수행법이 한국에 알려진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1990년을 전후한 시기에 주로 미얀마의 수행 선사들이나 미얀마에서 위빠사나 수행법을 체험한 한국의 수행자들에 의해 알려졌다. 그런데 30년이라는 비교적 길지 않은 세월에도 불구하고 이제 한국의 불교 명상에서 위빠사나 수행은 빼놓을 수 없는 수행법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위빠사나 수행법이 지닌 몇 가지의
1. 머리말20세기 전반기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세상이 온통 황폐해진 시대였다면, 후반기는 그 전쟁의 폐허를 재건하고 사람들이 입은 육체적 ․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며 인류가 새로운 도약을 맞이할 수 있게 하고자 여러 분야에서 출현했던 선각자들은 오롯이 자신의 인생을 바쳤다. 이 가운데 불교계에도 세계적인 스승들이 나타나 불교적 가치와 사상을 바탕으로 피폐해진 인류의 정신세계를 회복시키며,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데 앞장섰다.그들 가운데 한국불교의 전통과 사상을 세계
티베트의 운명14대 달라이 라마(1935~ )는 정치적 불교도다.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정치와 불교는 분리될 수 없었다. 스스로도 종교적 은둔자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가 대승불교 전통에 있다는 점, 최근 300여 년의 티베트 전통에서 달라이 라마의 직위가 종교적, 현세적 지도자였다는 점 등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티베트의 슬픈 운명이었을 것이다.티베트 현대사는 참 슬프다. 중국의 티베트 점령과 폭압은 일본의 조선 탄압보다 10배, 100배 더 무자비해 보인다. 1950년 10월 중국이 한국
틱낫한(1926~2022)은 1995년, 2003년, 2013년 세 차례 한국을 찾았다. 첫 번째 방문 때는 한국에서 그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두 번째 방문 때는 그의 저서 《화》가 베스트셀러여서 국내에서 세계적 가수나 영화배우 이상의 관심을 받았다. 그가 가는 곳마다 수많은 대중이 운집했고, 카메라 불빛이 쏟아졌다. 그 소란 가운데도 시종일관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는 듯 온화한 표정과 몸짓, 느린 걸음으로 걸으며,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놓치지 않은 그의 모습은 ‘빨리빨리’라는 성급함이 지배하는 한국인들 스스로를 돌아보게
20세기 중반부터 크게 성장한 대만불교는 20세기 말 대륙불교의 소생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 덕분에 최근 몇십 년간 중국대륙의 불교는 가히 경천동지의 폭풍 성장을 해왔다. 이 글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소박하나마 필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대륙불교의 시기별 변화 양상을 살핀 후 현 중국불교 발전에 공헌한 주요 불교 인물을 선별하여 간략하게나마 소개하고자 한다.20세기를 건너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화권 불교계에서는 너무도 많은 일들이 발생했고 많은 불교 인재가 출현했다. 이들은 급변하는 역사 사건들과 조우하며 지혜롭게 현대 중국불교를 지켜
1. 종교정책의 변화 추세공산주의 사상에서 종교는 반동적 의식 형태에 속한다. 그럼에도 중국공산당은 초기부터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종교의 보장 여부가 다양한 대중을 포용하는 통일전선의 구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정치적 효용성을 고려한 소극적인 용인에 가까웠다. 종교 자체에 대한 공산당의 부정적인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그 부정적인 입장이 노골화되어 종교 말살 정책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중국공산당의 종교정책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덩샤
1. 들어가며중국대륙의 불교는 중국공산당의 종교에 대한 정책에 따라 쇠퇴와 부흥의 길을 걸어왔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당시 불교를 포함한 종교에 대해 중국공산당은 세 가지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종교적 신념, 혁명의 조력자, 혁명의 적. 중국 헌법에 의거하면 중국의 공민들은 종교의 자유를 가지고 있기에 처음에는 종교 신념을 인정하였으며, 종교에 대한 바른 이해가 새로운 국가를 세워갈 종교인들과의 협력을 용이하게 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의 시각에서 종교를 혁명의 적으로 바라보았다. 결국 이러한 관점에서
1. 들어가는 말불교의 근본 교리는 ‘연기(緣起)’이다. 연기의 근본 원리를 거칠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과 저것이 만나 새로운 변화 즉 새로운 것이 발생한다.” 이것은 불교가 말하는 법이도리(法爾道理: 존재 실상의 원리)인데 ‘불교’라는 사회현상도 예외가 아니다.불교는 인도에서, 중앙아시아에서, 동남아에서, 중국에서, 그리고 현재 미국과 유럽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들과 만나기 때문이다. 큰 변화가 발생하기도 하고 혹은 미세한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항상 새롭게 변화한다
1. 머리말오늘날 중국불교는 얼른 보기에 한국불교나 일본불교와 다른 점이 없다. 물론 출가자의 복식이나 사원의 구조와 분위기는 많이 다르다. 하지만 불교도가 자유롭게 종교 생활을 한다는 점에서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그 다름은 종교 활동의 자유와 관련된다. 종교 활동은 사실 ‘신앙자와 신앙 대상 간의 관계’로만 한정할 수 없다. 그 종교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도 당연히 종교 활동에 포함되고 그것의 연장으로 사회상의 특정 이슈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행동하는 것도 종교 활동이다. 그 과정에서 정부나
1. 포스트휴먼 시대의 도래고타마 싯다르타가 출가를 결심했을 때의 이야기다.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며 만류하는 숫도다나왕에게 태자는 네 가지를 들어주면 출가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 네 가지란 영원한 젊음을 누리며 늙지 않는 것, 영원히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것,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이별하지 않는 것이었다. 만약 2,600여 년 뒤에 태어났다면 숫도다나왕은 아들의 출가를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종교적 구원의 길을 떠났던 고타마 싯다르타와 달리 2,600여 년 뒤의 인간은 과학과 기술의 눈부신
허1. 포스트휴먼 시대 -‘동물로의 전환(animal turn)’이 왔다그동안 분야별로 혹은 국지적으로 발전되어 오던 과학기술은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서로의 기술을 융복합하는 가운데 폭발적인 시너지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의 획기적인 발전이다. 인공지능의 발달과 응용 가능성은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만큼 실로 무궁무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소 이른 감이 없지 않으나 인공지능이 인간의 자연 지능을 완전히 초월하는 이른바 ‘특이점(singularity)’의 도래
1. 서론포스트휴먼이라 하면 대개 사이보그나 안드로이드, 자율주행차, 군사화된 드론 들을 떠올린다. 디지털 기술로 만든 이들이 주체가 되고 인간은 배제된다고 생각한다. 이건 산업의 이익을 갈구하는 기술 찬양론자이든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기술 공포론자들이든 우리에게 억지로 구겨 넣은 상상력에 불과하다. 오히려 인간 대다수를 배제하려는 거짓이다. 이 글은 가부장제 문명 속에서 오랜 세월 존재하지 않았던 여자가, 여성적 원리나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포스트휴먼 주체가 되어 인신세(人新世)인 이 시대를 구제하는가에 관한 정치철학이자 윤리학에 관
1. 들어가는 말 1967년 12월 3일 세계 최초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흉부외과 의사 크리스천 네이틀링 버나드(Christiaan Neethling Barnard)는 인간의 심장이식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이 수술에는 무려 30명의 의료진이 참가했으며 수술 시간만 9시간이 걸렸다. 인공심폐기의 발명에 힘입어 1950년대에 신장이식, 1960년대에는 간이식에 성공한 이후, 개심(開心) 수술의 시대를 연 것이다. 뇌사 이전의 심장 정지를 죽음으로 확정했던 시기, 심장이식 수술은 자신의 심장을 떼어 내 죽은 사람을 부활시킨 상징적인
1. 코로나 팬데믹, 생명의 이중성을 폭로하다 “먼저 공간의 엄격한 분할, 곧 그 도시와 그 지대의 봉쇄는 물론이고 그곳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그것을 위반하면 사형에 처했고 헤매는 동물들은 사살되었다. 나아가 그 도시를 명확하게 다른 지구로 세분하여 그곳에서는 1인의 행정관이 권력을 확립했다. 각 길거리는 1인의 담당자의 지배하에 놓였고, 그는 거리를 감시한다. 만일 담당자가 그곳을 떠나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지정된 날에 각자는 집 안에 머물라는 명령을 받았고, 외출이 금지되었으며 위반하면 사형을 당했다. (…) 그
보1. 시작하며인간의 몸은 첨단 과학기술을 통해 어떤 변화를 겪게 될까. 그 변화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며 그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 질문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으로 귀착된다. 그 질문은 다시 인간과 기계는 향후 어떤 관계를 맺게 될 것인가, 혹은 맺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으로 다시 확장될 수 있다. 최근 4차 산업혁명 혹은 4차 혁명, 4차 인간, AI 시대 등등 과학기술의 비약적 혁신을 시대에 담아내기 위한 표현들이 속속 등장한다. 그 명칭의 적실성 여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이전과는 확연히
1. 머리말20세기 후반 생명공학, 유전공학, 인지과학, 정보통신 기술, 컴퓨터공학, 나노기술 등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비인간 주체가 사회적 영역으로 급속히 부상하였다. 인공지능, 로봇, 복제된 생명 등의 존재는 ‘포스트휴먼(post-human)’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이끌어냈다. 기계인간에게 인류의 생존을 위협받는 내용을 담은 〈터미네이터〉나 〈배틀스타 갤럭티카〉 같은 SF영화는 막연하게 떠오르는 포스트휴먼의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수단을 제공하였고, 자율주행 자동차나 이세돌 기사를 압도한 알파고의 등장이 회자되면서 포스트휴먼은 현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