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포스트휴먼 시대의 도래와 불교

1. 코로나 팬데믹, 생명의 이중성을 폭로하다 

“먼저 공간의 엄격한 분할, 곧 그 도시와 그 지대의 봉쇄는 물론이고 그곳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그것을 위반하면 사형에 처했고 헤매는 동물들은 사살되었다. 나아가 그 도시를 명확하게 다른 지구로 세분하여 그곳에서는 1인의 행정관이 권력을 확립했다. 각 길거리는 1인의 담당자의 지배하에 놓였고, 그는 거리를 감시한다. 만일 담당자가 그곳을 떠나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지정된 날에 각자는 집 안에 머물라는 명령을 받았고, 외출이 금지되었으며 위반하면 사형을 당했다. (…) 그것은 세분화되고, 고정되고, 동결된 공간이었다. 각자는 그 공간에 고정되었고, 만일 움직이면 생명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감염되거나 처형된 것이다.”

위의 문장은 오늘날 코로나 팬데믹에 대처하는 중국적 접근방식을 서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17세기 말 프랑스의 조그만 마을 뱅센(Vincennes)에 페스트가 발생했을 때 내려졌던 방역 규칙을 묘사한다. 미셸 푸코가 자신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원형감시 체계(pan-opticism)’라는 제목의 장을 이렇게 시작하면서 ‘생명권력’과 ‘생명정치’에 관한 독특한 관점을 제시한다. 인간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전염병에 대처하기 위해 감염자를 격리하고, 잠재적 감염원을 통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방역 조치는 물론 이를 강제할 수 있는 권력을 전제한다.

전염병을 예방하고 통제하는 권력은 정당화할 의무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실제로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3년째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 시대에 우리는 실제로 더 강력하고 광범위하게 통제되었다. 국가 권위주의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경향이 있는 유교 문화권 동아시아에서는 이러한 국가 통제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감염원을 추적하여 통제하는 휴대전화 추적 기술이 사용되었고, 자가격리를 보장하기 위해 팔찌를 배포하기도 하였다. 중국 본토에서는 감염자가 떠나지 못하도록 집의 빗장을 밖에서 걸어 잠그거나 못질을 하였다. ‘제로 코로나’ 정책을 추구하는 중국은 지금도 감염자가 단 몇 명만 나오더라도 지역 전체를 봉쇄한다. ‘완전 폐쇄’는 국민에게 생명 이외의 어떤 자유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강력한 봉쇄정책을 시행할 수 있는 국가는 국민에게 유익한 ‘생명권력’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국민 대다수는 이러한 정책에 별로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괜찮다’ ‘문제 되지 않는다’는 것이 국가의 강력한 방역 정책에 대한 국민의 정서로 보인다. 그들은 마치 ‘우리가 통제되면 될수록, 전염병은 더욱 잘 통제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코비드19 바이러스는 우리를 ‘감염시켰을(infecting)’ 뿐만 아니라 국가권력과 정치에 대한 우리의 정서에 ‘영향을 준(affecting)’ 것처럼 보인다. 국가는 더 이상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는 권력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보장하고 복지를 증대시키는 권력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전염병을 통제하려면 국가권력에 의해 더욱 통제되어야 한다. 

여기서 푸코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통제하는 국가의 감시체제를 비판하기 위하여 만든 개념 ‘원형 감시체제(panopticism)’의 의미가 반전된다. 완전한 감시체제의 모델로 묘사되는 ‘판옵티콘(Panopticon)’은 1791년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죄수를 효과적으로 감시할 목적으로 고안한 원형 감옥을 말한다. 

이 감옥은 원형 공간의 중앙에 높은 감시탑을 세우고, 원둘레를 따라 배치된 건물에 죄수들의 방을 만들도록 설계되었다. 원형 감옥의 건축학적 구조는 중앙부의 감시탑에 있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보지만, 죄수들은 결코 감시자를 볼 수 없다는 특징을 가진다. 죄수는 자신이 감시받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결국은 감시와 규율을 내면화하여 스스로 자신을 감시하게 된다. 완전한 감시체제에서는 죄수가 현실적으로 감시될 필요가 없다. 이렇게 사람들이 자신을 스스로 감시하는 체제에서는 권력은, 권력을 행사하거나 그 대상이 되는 인격과 분리된다. 완전히 투명하게 감시되는 사회에서 인격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의 존엄과 자유는 부차적인 문제로 전락한다.

전염병에 대처하는 권력의 방식도 변화하였다. 미셸 푸코는 페스트와 함께 전염병 대처방식이 원형 감시체제와 구조적으로 같다고 말한다. 예컨대 나병이 창궐하였을 때는 나환자를 정상적인 사회 밖으로 추방하고 봉쇄하는 것이 대표적인 방역 조치였다. 살 사람과 죽을 사람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고 감염자를 공동체로부터 분리하여 배제하는 것이 나병에 대한 접근방식이었다. ‘나병 모델’은 배제이다. 이에 반해 페스트는 감시의 방역 모델을 제공한다. 모든 개인의 생활과 이동을 감시하고, 모든 사건을 기록하고, 모든 개인을 생존자, 병자, 사망자로 분류하여 관리하는 ‘페스트 모델’은 환자를 공동체에서 분리하지 않기 위해 개인에게 자기 감시 또는 규율을 요구한다. 우리는 점차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를 감시하는 권력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고맙게 생각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코로나 팬데믹과 함께 푸코의 생명정치 개념을 떠올리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스크 착용, 사회적 거리두기, 지역 봉쇄, 백신 접종 등과 같은 코로나 방역 조치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생명권력’과 ‘생명정치’라는 개념을 비판적 도구로 사용한다. 

이와 관련한 논쟁의 중심에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있다. 그는 2020년 2월 26일 자 웹로그에 올린 글에서 이탈리아 정부의 봉쇄 조치에 대해 분노하면서, “비합리적이고 전혀 근거가 없으며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비난하였다. 정부는 매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반적인 독감과 크게 다르지 않은 코로나 전염병을 과장한다는 것이다. 아감벤은 특히 이 글의 제목 “전염병의 발명(The Invention of an Epidemic)”으로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코로나가 ‘발명된 전염병’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아감벤이 촉발한 격렬한 반응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슬로베니아의 사상가 슬라보예 지젝의 발언이다. 선정적인 명제에 똑같이 선정적인 명례로 대응하겠다는 듯이 지젝은 “감시하고 처벌한다고? 예, 제발!”이라고 말한다. 코로나에 대한 방역 조치를 사회적 통제를 위한 생명정치로 읽는 것은 좌파의 과민에 불과하며, 이러한 해석이 코로나의 위협을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고 그는 단언한다. “이러한 현실이 우리의 자유를 효과적으로 축소하도록 강요하는가?”라고 자문하면서 방역 조치는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지만, 국가권력이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지젝은 “당신은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당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보여달라”고 요구한다. 국가권력에 대한 통제도 필요하지만, 국가는 무엇보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과 관련한 생명정치 논란은 결국 ‘생명’과 ‘권력’의 관계로 압축된다. 국가권력의 정당성이 오직 국민의 생명 보호에 있다면, 유럽과는 전혀 다른 중국의 접근방식이 훨씬 더 효율적일 수 있다. 동아시아의 사람들은 코로나 전염병에 대해 ‘우리가 훨씬 더 잘하고 있다’고 자부심을 느끼며 국가의 간섭과 통제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생명정치적 민족주의(biopolitical nationalism)”라고 명명될 수 있다. 이에 반해 유럽이 직면한 도전은 중국이 한 일을 더 투명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권력을 균형 있게 조율하려는 이러한 접근방식을 ‘자유주의적 생명정치(liberalistic biopolitics)’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두 접근방식이 모두 ‘생명 보호’를 목적으로 하지만, 생명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생명인가? 그리고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전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결국 후자의 질문에 대한 답을 결정한다. 그렇다면 아감벤이 코로나 방역 조치와 관련하여 언급한 현대적 생명정치의 두 가지 요소는 여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하나는 비상사태를 정부의 정상적인 패러다임으로 사용하려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최근 개인들의 의식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공포의 상태다. 전염병을 추적 관리하는 모든 형태의 조치와 모델링을 ‘감시’로, 그리고 능동적 거버넌스를 ‘사회적 통제’로 반사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류임에 틀림없지만, 국가가 어느 정도까지 국민의 삶에 개입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려면 우리는 우선 생명정치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

 

2. 미셸 푸코: 생명과 죽음의 정치화

오늘날 우리는 생명정치라는 개념을 매우 친숙하게 생각하지만, 이 개념이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물론 일반 사람들에게 이 개념은 여전히 낯설지도 모른다. ‘생명’과 ‘정치’라니 또는 ‘권력’과 연결될 수 있다는 말에 아리송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그렇지, 정치는 곧 생명의 문제야!”라고 답할 수도 있다. 생명은 너무나 일반적이고 포괄적이어서 더 이상의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19세기 중반 서양에서는 이런 생명을 철학적 사유의 중심으로 올려놓은 일련의 사상가들이 등장하였다. ‘생명철학자’로 불리는 쇼펜하우어, 니체, 베르그송은 생명을 건강하고 좋은 삶의 규범적 기준으로 재평가하였다. 생명을 하나의 생물학적 사실이나 유기적 존재로 이해하든, 본능과 감정과 체험의 현상으로 이해하든, 생명은 근본적으로 ‘죽은 것’과 대립한다. 이런 맥락에서 생명은 추상 개념, 차가운 논리, 영혼 없는 정신처럼 일종의 석화된 것, 형해화된 것과 대조된다.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다 하더라도 구체적이지 않고, 형식만 있고 가치나 의미가 없는 생명은 ‘죽은 생명’이다.

생명은 개인의 삶만 가리키지 않는다. 집단과 공동체, 그리고 국가의 생명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주권국가의 모델이 완성되고 제국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한 20세기 초에 ‘생명정치’라는 개념이 만들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스웨덴의 정치학자 루돌프 젤렌(Rudolf Kjellén)은 국가를 개인과 마찬가지로 실재하는 “초개인적 생물”로 간주하였다. “생명 형식으로서의 국가”는 궁극적으로 계급과 집단에 의해 표현되는 이해관계와 사상에 대한 사회적 투쟁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사회집단 간의 시민전쟁에서 우리는 생존과 성장을 위한 생명 투쟁의 무자비함을 너무나 분명하게 인식하는 동시에 집단 내에서 존재 목적을 위한 강력한 협력을 감지할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 이런 현상을 “생명정치(biopolitics)”라고 명명한다.6) 생명정치는 근본적으로 국가권력과 생명 사이의 구조적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이러한 현상은 독일 제국주의의 토대가 되었던 지정학적 개념인 “생명 공간(Lebensraum)”에서도 잘 나타난다. 인종의 순수성이 보장되는 공간에서만 진정한 삶과 생명이 있을 수 있다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낯선 피의 침투에 의한 ‘인종 혼합’을 막기 위해 선택과 제거의 정치를 추구한다. 생명은 이렇게 국가권력과 연관된다.

코로나 전염병으로 분명하게 드러난 생명권력과 생명정치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우리는 생명정치를 권력을 행사하는 현대적 방식으로 파악해야 한다. 생명정치는 결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대한 보완이 아니다. 생명정치는 현대의 과학과 기술, 특히 생명 과학과 그로 인한 규범적 개념들이 정치적 행위와 그 목표를 규정하는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염병의 병원을 확인하고 백신을 만드는 생명 과학, 감염자를 구별하고 추적 관리하는 정보기술은 국가와 시민의 정치적 행위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 이런 이유로 미셸 푸코의 생명정치는 오늘날 인류를 위협하는 기후변화, 생태학적 위기로 인한 생명의 위협과 별로 상관이 없다. 생명정치는 결코 생명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환원되지도 않는다. 현대인은 여전히 정치적 삶을 영위하는 동물이지만, “생명체로서의 그의 삶(생명) 자체가 문제 되는 정치 안의 동물”이다. 

미셸 푸코는 자신이 1974년 한 강연에서 처음 사용한 생명정치의 개념을 《성의 역사 제1권: 앎의 의지》에서 체계적으로 다룬다. 푸코는 “죽음에 대한 권리와 삶에 대한 권력”이라는 제목의 마지막 장에서 주권(군주) 권력과 생명권력을 대조함으로써 권력의 행사 방식이 어떻게 변화하였는가를 매우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오랫동안 군주의 권력은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특권을 특징으로 하였다. 노예뿐만 아니라 자식까지도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를 가진 ‘가부장의 전권’에서 유래한 군주의 주권적 권력은 근본적으로 “죽게 하거나 살게 내버려둘(making die and letting live)” 권리에 기반한다.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로부터 생산물, 재산, 봉사, 노동과 피를 강제로 빼앗는 전통사회의 권력 유형을 생각하면, 주권적 권력 안에서는 삶은 항상 죽음을 담보로 허용되었다.

푸코의 통찰력은 이러한 권력 행사 방식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했는가를 서술하는 데서 가장 잘 드러난다. 현대에 생명이 정치의 주된 관심으로 부상하면서 권력의 기제는 근본적으로 바뀐다. “징수(deduction)는 더 이상 권력의 주된 형식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 아래 놓여 있는 세력들을 선동하고, 강화하고, 통제하고, 감시하고, 최적화하고, 조직화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다시 말해 이 권력은 여러 힘을 방해하고 복종시키거나 파괴하기보다는 오히려 힘을 생성하고 성장시키고 조직하는 데 몰두한다.” 군주의 죽음에 대한 권리가 점차 삶을 관리하는 방향으로 바뀐 것이다. 푸코는 이러한 권력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렇게 간단하게 서술한다. “죽게 하든가 살게 내버려 둔다는 낡은 권리 대신에 ‘살게 하든가 죽게 내버려 두는(making live and letting die)’ 권력이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다.”

생명권력이 출현하면서 국가는 이제 삶과 생존, 우리의 신체와 종족의 관리자가 된다. 전통적 주권 권력이 우리를 죽게 하거나 살려줄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면, 우리의 생명을 증진하는 현대의 생명권력은 우리가 죽음에 이르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코로나 시대에 정부가 중증 환자가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관리하는 정책을 생각해보라. 과거 전통사회에서는 군주의 권력을 대변하였던 사형이 인도적인 차원에서 점차 폐지되고 있는 경향을 생각해보라. 푸코는 사형제도의 폐지가 인도주의적 감정의 출현 때문이 아니라 권력의 존재 이유와 권력 행사의 논리 때문이라고 말한다. 권력의 주된 역할이 생명을 보호하고, 삶을 안정시키고 뒷받침하고 증진하는 것이라면, 권력은 사형 집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생명의 관리를 통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억압적인 권력은 법적 주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를 다루는 삶에 대한 권력에 종속된다. 미셸 푸코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생명이 역사 속으로 들어왔다”고 주장한다. 생명이 인류 역사의 주요 동인이 된 결정적 계기는 18세기 산업생산과 농업생산의 증대와 인간 신체에 관한 과학적 지식의 증대였다. 이때부터 인간이라는 종의 생명에 고유한 현상들은 지식과 권력의 영역 안으로 진입했다. 국민의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생명권력은 생존의 조건, 개인과 집단의 건강, 인구와 수명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생물학적 요소가 인류의 역사와 정치를 규정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미셸 푸코는 생명의 기제가 역사의 과정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생명 역사(bio-history)”가 시작되었다고 말하면서, 생명에 관한 지식이 인간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주요 동인이라는 점에서 ‘생명권력’을 언급한다.

미셸 푸코는 생명권력의 두 가지 형태를 구별한다. 하나는 육체의 규율이고, 다른 하나는 인구 조절이다. 개인의 신체를 감독하고 통제하는 규율 기술은 이미 17세기에 등장했다. 인간의 몸에 관한 해부학적 지식이 발전함으로써 육체를 조련하고 활용할 수 있는 방법도 발전했다. 이렇게 발전한 “인체의 해부학적 정치”는 인간의 몸을 복잡한 기계로 간주한다. 기계로서의 몸은 결코 억압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몸의 지각 방식과 물리적 루틴을 구성하고 구조화함으로써 작동하는 기계이다. 노예제나 농노제와 같은 보다 전통적인 형태의 지배와는 대조적으로, 규율은 신체의 경제적 생산성을 증가시키는 동시에 정치적 종속을 보장하기 위해 신체의 힘을 약화시킨다. 우리 개인의 몸은 이제 국가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되는 정치적 대상이 된 것이다.

현대적 생명권력을 구성하는 다른 하나는 인구 조절이다. 18세기 말에 등장한 이 권력 기술은 개인의 몸이 아니라 인구의 집단적 몸을 겨냥한다. ‘인구(population)’라는 용어로 푸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의 총합이라는 의미에서 법적 또는 정치적 실체가 아니다. 인구는 오히려 개인의 몸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독립적인 생물학적 몸을 의미한다. 그것은 출산율, 사망률, 수명, 건강 상태, 부의 생산과 순환과 같은 고유한 과정과 현상을 특징으로 하는 일종의 ‘사회적 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을 관리하듯, 국가는 사회적 몸이라고 할 수 있는 인구를 관리하고 통제한다. 특정한 인구 속에서 구체적 삶의 전체가 “안전 기술(technology of security)”의 목표가 된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는 인구의 안전과 보건이 국가의 핵심적 안보 문제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코로나는 사실 생명권력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생명권력이 행사하는 안전 기술은 인구가 생물학적 실체로서 존재함에 따라 발생하는 위험을 방지하거나 보상하기 위하여 인구의 특징적 현상과 조건을 목표로 한다. 여기서 적용되는 도구는 규율과 감독이 아니라 규제와 통제이다. 인구를 대상으로 하는 생명권력은 개인을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부 위험으로부터 전체의 안전을 보호하는 전반적인 균형을 달성함으로써 일종의 항상성을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가장 많이 들은 경고 중의 하나가 의료체계가 붕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전염병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료체계의 기능은 사망률의 관리다. 전염병으로 인해 어느 정도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의료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사망자가 불균형적으로 증대한다면 그것은 인구의 건강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규제와 통제를 기반으로 한 생명권력의 안전 기술에서 중요한 것은 인구의 항상적 평형상태지, 결코 개인의 생명과 건강이 아니다.

코로나 시대에 정부에 의한 강력한 방역 조치가 지속될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내부적으로 규율하고 스스로 통제한다. 규율과 통제가 습관이 되고, 아비투스가 된다. 우리는 과연 정부에 의해 통제되면 될수록 더욱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인가? 과거 죽음의 권리를 가졌던 주권 권력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생명을 보호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는 생명권력에 예속되었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주권 권력을 행사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결과적으로 죽음에 대한 권력은 삶과 생명의 이익에 봉사한다는 명분 때문에 모든 제한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아닌가? 어쩌면 생명정치의 역설은 생명의 안전과 개선이 정치 당국의 핵심 문제가 된 만큼 생명이 지금까지 상상할 수 없는 기술적, 정치적 파괴 수단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푸코가 경고한 생명정치의 역설이 코로나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현실로 다가온다. “일찍이 19세기 이래보다 전쟁이 더 처참한 적은 없었으며, 모든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그 이전에는 체제가 주민에 대해 이와 같은 대학살을 실행한 적이 없었다. (……) 전쟁은 더 이상 수호되어야 할 군주의 이름으로 행해지지 않는다. 모든 이의 생존이라는 명목으로 전쟁이 행해지며, 인구 전체가 생존의 필요성이라는 명목 아래 서로를 죽이도록 훈련받는다. 학살이 생명 유지와 관련된 문제가 되었다. 그토록 많은 정권이 그토록 많은 전쟁을 일으켜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생명과 생존, 신체와 인종의 관리자로서이다.” 만약 정권이 생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살게 만들거나 죽게 둔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도대체 어떤 생명을 살고자 하는 것인가?

 

3. 조르조 아감벤: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전염병이 창궐하고 잔혹한 전쟁이 벌어지는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다. 생존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중요해 보이지 않는 사회는 도대체 어떤 사회일까?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개념으로 생명정치를 비판한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을 소환한다. 코로나 팬데믹에 대한 아감벤의 발언이 불러일으킨 논쟁의 중심에는 의문의 여지 없이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이 있다. 아감벤이 자신의 주저 《호모 사케르》에서 서술하고 있는 ‘벌거벗은 생명’은 국가가 개인에게서 모든 시민권을 박탈할 때 처할 수 있는 상태다. 권리를 박탈한다는 것은 곧 개인을 정치적 영역에서 배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 영역에서 배제된 인간의 생명은 죽임을 당할 때까지 온갖 종류의 학대를 당하면서도 오직 자신의 적나라한 생존, 즉 벌거벗은 생명만을 걱정해야 한다. 

아감벤이 코로나 시대에 다시 ‘벌거벗은 생명’을 떠올린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는 코로나 팬데믹에 대한 자신의 글과 발언을 묶어 발표한 책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정치로서의 전염병》이라는 저서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언제나 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데에 익숙했던 인류는 우리의 삶이 순수하게 생물학적인 존재로 축소되고, 사회 · 정치적인 영역에서뿐 아니라 인간적 · 정서적인 측면까지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코로나 시대의 인간은 자신을 모든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켜야 하는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라고만 여기고 그 외에는 어떤 것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삶은 가치와 의미에 기반한 ‘좋은 삶’에서 단순한 ‘생존’으로 축소된 것이다.

이러한 거대한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물론 코로나 팬데믹이 가져온 보건 긴급사태다. 예외적 비상사태가 계속되어 일반적인 ‘노멀’ 상태가 되면서 우리는 평범한 일상을 포기하고, 오랫동안 지켜왔던 정치적 자유와 신념까지 희생한다. 어디 그뿐인가? 비상사태는 우리가 사는 삶의 공간을 단번에 ‘수용소’로 만들었다. 우리는 지역이 봉쇄되고, 국가 간의 이동뿐만 아니라 국가 내에서 도시 간 이동까지 차단되어도 아무런 불평도 저항도 하지 않는다. 아감벤이 정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인류는 두 번의 세계대전이나 전체주의 독재하에서도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자유의 제한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코로나 전염병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곧 끝날 일시적 보건 비상사태에 대한 아감벤의 비판은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아감벤의 질문은 여전히 타당하다. “얼마나 지속할지 모른 채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익숙해져만 가는 나라에서 앞으로 인간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생존 외에 다른 인류의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진지하게 답하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감벤이 《호모 사케르》에서 전개하고 있는 생명정치 이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저서 하나로 일약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아감벤의 명제는 매우 도발적이다. 하나는 벌거벗은 생명을 정치화하는 점에서 민주주의와 전체주의가 내적으로 결탁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용소가 서구 생명정치의 핵심적 패러다임이라는 명제다. 여기서 아감벤은 미셸 푸코의 생명정치 이론을 수정한다. 푸코는 주권 권력과 생명권력을 시기적으로 구분하고 대조하였다면, 아감벤은 주권 권력과 생명정치 사이의 논리적 연결을 강조한다. 생명정치는 권력의 주권적 행사의 핵심을 형성한다. 따라서 근대는 서구 전통과의 단절이 아니라 서구의 고전적 초기에 이미 존재하였던 일반화하고 급진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감벤에 의하면, 주권 권력의 구성은 반드시 생명정치적 신체의 창조를 전제한다. 우리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정치 사회에 포함되는 것은 동시에 완전한 법적 지위가 부정되는 인간을 배제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생명을 지닌 인간다운 존재로 규정하고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를 정치적 공동체로부터 배제해야 한다. 벌거벗은 생명은 바로 배제의 대상이다. 여기서 아감벤은 고대 그리스에서 생명과 관련된 두 가지 용어를 끌어들인다. “조에(zoe)는 모든 생명체에 공통된 것으로 살아 있음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가리켰다. 반면 비오스(bios)란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 특유한 삶의 형태나 방식을 가리켰다.” 폴리스, 즉 정치적 공동체에 포함된 생명은 ‘비오스’이고, 단순한 재생산을 위한 생명은 ‘조에’이다. 정치를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것은 카를 슈미트가 말하는 것처럼 적과 친구의 구별이 아니라 ‘벌거벗은 생명’과 정치적 실존의 구별이라고 아감벤은 말한다. 우리는 모든 정치의 시작에서 이러한 경계선의 설정과 법의 보호가 박탈된 공간의 시작을 발견한다.

주권 권력은 이렇게 벌거벗은 생명을 공동체에서 배제하고 추방함으로써 정당화된다. 아감벤은 이러한 주권 권력의 모델을 ‘호모 사케르(homo sacer)’에 관한 로마법에서 발견한다. 라틴어 ‘사케르(sacer)’에 ‘신성하고 저주받은’이라는 대립적 의미가 들어 있는 것처럼, 호모 사케르는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지만 죽여도 되는 벌거벗은 생명이다. 간단히 얘기하면, 인간을 신에게 희생물로 바칠 수 있는 시대에 인간의 죽음을 신성화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도 배제된 것이다. 희생물로 바칠 수 없다는 것은 죽음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신에 의한 보호도 받지 못하고 법적, 정치적 공동체로부터 추방되어 언제든지 죽임을 당할 수 있는 단순한 육체적인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단순히 생존의 본능만 좇는 존재가 동물이라면, 벌거벗은 생명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단순한 동물에 불과하다. 

‘벌거벗은 생명’은 표면적으로는 정치와 가장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주권 권력이 벌거벗은 생명을 공동체로부터 배제함으로써 형성된다면, 벌거벗은 생명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생명정치의 견고한 토대가 된다.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벌거벗은 생명을 끊임없이 규정하고 만들어 내야 한다는 점에서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에는 기이한 인접성이 있다. 전체주의는 벌거벗은 생명을 배제하고 수용소로 추방한다면, 민주주의는 벌거벗은 생명을 보살피기 위하여 통제한다. 벌거벗은 생명은 “배제되는 동시에 포함되며, 해방되는 동시에 포획당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개인들은 중앙 권력과의 투쟁을 통해 자유와 권리를 획득하지만, 그들은 동시에 보다 깊숙하게 국가 질서 속에 편입된다. 그들은 거기서 해방되기를 원했던 바로 그 주권 권력에 더욱 예속된다.

여기서 ‘수용소’는 생명정치적 공간의 모델이 된다. 아감벤에게 수용소는 구체적인 역사적 장소나 정의된 공간적 통일성을 나타내기보다는 ‘벌거벗은 삶’과 정치적 실존의 경계를 상징화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수용소는 나치 강제수용소 또는 현대적인 강제 추방 수용소일 뿐만 아니라 ‘벌거벗은 삶’이 생산되는 모든 공간이다. “수용소는 예외 상태가 규칙이 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열리는 공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코로나 시대에 우리 스스로 자가 격리하고 감금하는 모든 생활공간은 수용소가 된다. 벌거벗은 생명이 과거에는 정치적 실존의 주변부에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점점 더 정치적 영역의 중심으로 확산하고 있다. 우리의 생명이 국가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모두 잠재적으로 이미 벌거벗은 생명일 수 있다. 생명정치는 오직 벌거벗은 생명이 있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감벤에 의하면 코로나 팬데믹은 생명정치의 민낯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현재의 예외 상태가 얼마만큼 오래가고,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연장될지 잘 알지 못한다. 문제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폭로된 생명정치의 메커니즘이 전염병이 사라진 뒤에도 계속될 수 있다는 점이다. 현대의 국가권력은 스스로 만들어 낸 ‘벌거벗은 생명’을 계속 유지하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삶을 다스리고자 하는 것은 이 시대의 광기다. 순수한 생물학적 존재로 축소된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며, 정부가 인간의 사물을 지배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4. 누구의 생명인가,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코로나 팬데믹이 현대사회의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주권자는 ‘비상사태를 결정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경험한 권력자들은 바이러스가 사라지더라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암암리에 예외 상태와 긴급 상태를 반복해서 사용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요구하는 보건에 대한 권리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이행되어야 하는 법적, 종교적 의무가 되면 될수록, 이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국가는 우리의 삶을 더 속속들이 관리하고 통제할 수도 있다. 자유보다 안전에 우선성을 부여하는 ‘바이오 보안(Biosecurity)’은 대규모 감시 도구를 정당화하고 광범위하게 정상화할지도 모른다. 유발 하라리가 예견한 것처럼 감시는 이제 “‘피부 위의 감시(over the skin)’에서 ‘피부 아래의 감시(under the skin)’로 극적으로 전환하여” 우리의 생명 전체가 통제될 수도 있다. 

생명정치는 정말 우리에게 자유를 박탈하고 사회를 탈개인화하는 디스토피아를 가져오는가? 그러나 보건 독재 또는 전체주의적 감시사회 등의 현실 정치적 비판으로 해결되지 않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생명이 설령 ‘벌거벗은’ 상태가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채워졌을 때도 생명은 언제나 정치와 결합하며, 그렇게 지적 논쟁의 대상이 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생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면, 우리의 생존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가 스스로 인간이라 부르기 힘든 경계선은 어디인가?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우리는 봉쇄로 할 수 없었던 것들이 사실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이었다고 깨달을 수 있다.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다른 이와 소통하는 행위가 벌거벗은 삶을 넘어서는 인간다움일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는 사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실현된다. 코로나 팬데믹은 생존 자체가 절대화되고 바이오 보안이 정치적 과제가 될 때 자유, 우정, 사랑과 같은 가치들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렇다면 벌거벗은 삶과 정치적 실존, 생존과 인간다운 삶, 안전과 자유는 서로 대립하는가? 벌거벗은 삶이 동물적인 것으로 축소된 인간의 삶이라는 정치적 철학적 비판은 맞지만, 벌거벗은 삶의 보호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요한 전제조건이 아닌가? 코로나 팬데믹 시대의 국가권력과 방역 조치에 대한 논쟁은 생명과 자유를 너무 대립시켰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정의에서 ‘이성’과 ‘동물’ 모두 인간존재를 규정하듯, 생명과 자유는 결코 대체적 관계가 아니라 보완적 관계에 있다. 

이 점에서 생명정치적 배제에 관한 아감벤의 관점은 너무 축약적이다. 아감벤은 ‘벌거벗은 삶’과 ‘정치적 실존’을 구별하는 경계를 차별화되고 차별화하는 일종의 연속체가 아니라 하나의 ‘선’으로 파악한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경계를 설정하는 것, 즉 경계선을 계층화되거나 차등화된 영역으로서가 아니라 확장이나 차원이 없는 선으로 이해하여 질문을 양자 택일로 축소하는 데만 집중된다.” 우리는 과연 벌거벗은 삶과 인간다운 삶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을까? 물론 현대사회에는 통상 인간존재에게 부여하는 권리와 희망을 거의 대부분 박탈당했지만 그럼에도 생물학적으로는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들이 있다. 살아 있지만 사는 것이 아닌 지점은 분명 존재한다. 

어떤 상황에서는 살아남는 것보다 죽음이 훨씬 더 인간 존엄을 지켜줄 수도 있다. 주권 권력이 죽음에 대한 권리로 표현된다면, 현대의 생명권력은 죽음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권력이 영향력을 확립한 것은 이제 삶에 대해서이고 삶의 전개를 따라서이다. 그리하여 죽음은 권력의 한계, 권력을 벗어나는 시점이고, 존재의 가장 비밀스러운 측면, 가장 ‘사적인’ 요소가 된다.” 생명정치 시대는 죽을 수 있는 권리가 완전히 박탈된 시대다. 우리가 죽고 싶을 때도 우리의 생명은 국가권력에 의해 연장된다. 생명은 공적인 문제가 되고, 죽음은 사적인 요소가 된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불투명하듯 벌거벗은 삶과 정치적 실존을 구분하는 경계선은 분명하지 않다. 그것이 선이라면 구멍이 많은 ‘점선’이다.

생명은 근본적으로 이중적이다. 살아 있으면서 죽음으로 내몰릴 수 있고, 죽음으로써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도 있다. 어떤 생명을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구체적인 개인이다. 우리가 사망자를 추모하고 기리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구체적인 한 개인에 대한 기억 때문이지 결코 생명의 가치 때문이 아니다. 코로나 사망자들과 제대로 이별도 하지 못한 채 단순한 시신으로 처리되는 것은 분명 비인간적이다. 

생명은 일반적이기에 앞서 언제나 구체적인 누구의 생명이다. 따라서 어떤 삶이 더 인간답고 고귀한 삶인지, 또 어떤 삶이 동물적이고 저급한 삶인지를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서는 ‘벌거벗은 삶’ 내에서의 단계적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 생명 자체보다는 생명의 ‘벌거벗음’에 훨씬 더 관심이 많은 아감벤의 생명정치는 삶의 미묘한 단계적 차이를 간과한다. 

코로나 전염병이 위협하는 생명이 언제나 누구의 생명이라면, 우리는 생명정치의 질문을 바꿔야 한다. 왜 생명이 보호되어야 하는가? 무엇을 위한 벌거벗은 생명의 보호인가? 권력에만 초점을 맞춘 이런 질문은 모두 생명을 일반화한다. 국가의 과제는 결코 일반적 생명의 보호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국가는 죽음을 가져올 수 있는 자동차와 알코올도 금지해야 한다. 국가는 오직 구체적 개인들이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고 자유를 실현할 수 있도록 기초 조건과 기반 시설을 제공한다. 간단히 말해 국가권력은 ‘생명을 보호할 개인을 보호’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개인의 생명을 보호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생명 보호의 방법이 어떤 생명인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시에 벌거벗은 삶과 정치적 실존, 생존과 자유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만 하는 개인의 과제다. 이렇게 생명정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생명 윤리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 ■

 

이진우 jinwoolee@postech.ac.kr
연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아우크스부르크대학에서 철학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거쳐 동 대학 총장, 포스텍 교수, 한국니체학회 회장, 한국철학회 회장 등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니체의 인생 강의》《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 《중간에 서야 좌우가 보인다》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정치철학》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하버마스의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등 다수가 있다. 현재 포스텍 명예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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