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포스트휴먼 시대의 도래와 불교

1. 포스트휴먼 시대의 도래

명법스님
명법스님

고타마 싯다르타가 출가를 결심했을 때의 이야기다.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며 만류하는 숫도다나왕에게 태자는 네 가지를 들어주면 출가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 네 가지란 영원한 젊음을 누리며 늙지 않는 것, 영원히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것,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이별하지 않는 것이었다. 만약 2,600여 년 뒤에 태어났다면 숫도다나왕은 아들의 출가를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종교적 구원의 길을 떠났던 고타마 싯다르타와 달리 2,600여 년 뒤의 인간은 과학과 기술의 눈부신 발전에 힘입어 외부 환경의 개조를 넘어서 인간 자신의 신체적 지능적 향상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기획을 시도하고 있다. 이른바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인간을 물리적으로 조작하고 고성능 인간으로 개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런 개조 작업이 바람직하고 진화론적으로 불가피하다고 믿는다. 현대의 첨단 과학기술에 의한 인간향상 과정이 기하학적 속도로 진행되면 머지않은 미래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인간의 능력과 기능을 향상시킨 문자 그대로의 인간 이후의 인간, 생물학적인 몸을 가진 인간을 넘어선 신인류의 출현이 가능하며, 죽음까지 극복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날이 오면 숫도다나왕이 들어줄 수 없었던 영원한 젊음과 영원한 건강, 영원한 생명이 실현 가능한 현실이 되고 종교가 약속한 구원은 쓸모없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라는 저서를 발표한 캐서린 헤일즈 같은 학자들은 신인류의 출현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도달한 현재임을 과거형 시제를 사용하여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는 근대 이후 특권화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인간’ 개념에 내포된 가치와 세계관, 그것을 구체화한 제도와 체제가 더 이상 현실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인간 이후의 인간이라는 의미에서 ‘포스트휴먼’이라는 개념은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인 이합 핫산이 20세기 중반에 휴머니즘과 인간중심주의 시각에 갇혀 있던 근대성을 반성하고 해체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으로, 근대적 인간 개념과 인간중심주의가 내포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인간중심주의에 대하여 전면적인 반성과 해체를 요구하는 포스트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티 개념과 연결된 개념이다. 

포스트휴먼은 인간의 변화가 아니라 특정한 인간 개념의 종말을 의미한다. 인간의 이성과 기술 발전을 진보라고 확신하는 근대 계몽주의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극단인 ‘트랜스휴먼’ 개념과 달리, ‘포스트휴먼’ 개념에는 바로 ‘인간’의 의미가 근본적으로 달라졌을 뿐 아니라 신인류 출현 이후 도래할 기술 기계적 변화가 가져올 사회와 인간관계 변화에 주목할 때 특권화된 인간, 인간중심주의가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렵다는 통찰을 담고 있다. ‘포스트휴먼’은 유럽 여성 철학자 로지 브라이도티가 “‘포스트휴먼 조건’ 또는 ‘포스트휴먼 곤경’이라고 불렀던 우리 시대의 복잡한 역사적 조건에서 나온 것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조건의 복잡성을 표상”하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전은 단순히 인간의 삶의 외형을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따라서 포스트휴먼 시대에 종교의 의미를 다시 묻는 것은 기술과학에 의하여 인간의 가능성이 무한대로 확장되리라는 전망 속에서 논의되지 않는 미래의 인간에게 발생할 사회적, 정치적, 철학적 문제를 묻는 것이며, 그런 문제들에 대하여 인간의 실존적 문제들과 한계에 대한 답변으로서의 종교가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이 대답의 여하에 따라 종교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2. 포스트휴먼 개념과 불교

‘인간’은 서양 근대에서 특권화된 개념으로, “데카르트의 코기토 주체, 칸트의 ‘이성적 존재들의 공동체’ 혹은 사회학적 용어로 시민, 권리보유자, 사유재산 소유자로서의 주체”를 의미한다. 그것은 서양, 남성, 이성을 개념화한 것으로 “인간에게 개인적인 그리고 집단적인 완전성을 추구하는 거의 무한한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며 인간 이성의 보편적인 힘을 옹호한다. 이처럼 인간을 모든 가치의 중심에 두는 인간중심주의, 곧 휴머니즘은 서양에서 근대 이후 문명화의 모델로 여겨졌으며 비서구 지역에서는 문명과 진보의 가치로서 수용되었다. 

인간 개념에 대한 비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68혁명부터다. 68세대는 자유주의적 정치체제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넘어 사회주의조차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고 비판하며 반휴머니즘을 주장하였다. 푸코와 68세대는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거대담론을 통해 인간에게 역사의 주체라는 고귀한 자리를 부과한 것이 ‘인간’을 세계 역사의 중심에 놓기를 고집하는 휴머니즘의 오만과 같다고 공격했다. 푸코는 1966년 《말과 사물》에서 ‘인간의 죽음’이라는 선언을 통해 규범적인 인간 형식을 강요하는 서구문화를 비판하면서 “오늘날 인간의 사라짐에 의해 남겨진 공백 이외의 다른 곳에서 사유하는 것은 이제 가능하지 않다.”고 진단하였다. 68세대는 인간 본성과 휴머니즘에 대한 보편주의적 태도에서 인간 행위자를 분리시키고 역사적으로 상대화함으로써 인간이 수행하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판단하고자 하였다. 그 까닭은 인간이 자율적이며 존엄한 존재라는 근대적 사유를 비판적으로 사고할 때, 이른바 역사적 진보를 책임져야 한다는 압력에서 벗어나서 사유할 때 더 날카로운 권력관계가 부상하며, 이를 통해 인간의 자유와 해방이 더 효과적으로 추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휴먼’은 인간을 정점으로 하는 형이상학적, 생물학적, 인문학적 위계질서의 허위성을 폭로한다. 그것은 근대적 인간의 타자로서 비(非)백인, 여성, 비정상인을 재조명하는 동시에 인간과 동물의 위계적 관계, 인간과 기계의 도구적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을 전복시킨다. 또한 인간종과 정치체계, 동물, 식물 나아가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그들과 맺는 관계의 틀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오만과 무제약적 자유와 권리를 문제시한다.

그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태아의 유전자를 선택하거나 기계장치를 몸에 삽입하는 일이 가능해짐에 따라 자연과 문화를 가르는 경계선이 사라졌다. 브라이도티는 포스트휴먼을 ‘자연-문화 연속체’라고 주장하면서, 자연과 문화가 질적으로 다르지 않지 않으며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자연과 문화는 대립된 것이 아니며 생명 물질은 자기를 조직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에 따라 브라이도티는 인간의 생명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생명을 평등하고 소중한 것으로 보는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중심주의적 주체를 넘어서 관계적 주체성으로 나아가게 하며, 인간 개념에 의해 타자화되고 주변화된 존재들을 복권하고, 생명과 기계, 인간과 다른 생명체 사이의 관계를 위계적으로 보는 관점을 폐기한다.

브라이도티의 주장 중 주목할 점은 인간/휴먼은 역사적 구성물이며 ‘인간 본성’에 대한 사회적 협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토끼의 뿔’ ‘거북의 털’처럼 개념적 구성물이라는 불교의 주장과 일치한다. 단일하고 항구적인 주체가 아니라 오온으로 해체되는 집합체이며 연기적으로 발생하였다가 소멸하는 조건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은 브라이도티가 주장하듯 사회적 협약이며 관례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인간 존엄성’이나 ‘자율성’ ‘권리’ 같은 본질적 가치를 주장하지 않으며 인간을 중심으로 한 서양 근대의 위계질서도 허용하지 않는다. 

불교에서 인간은 윤회의 여섯 가지 과정(육도) 중에서 천상과 아수라보다 하위의 단계로 동물, 아귀, 지옥보다 상위의 단계에 위치한다. 하지만 육도의 최상위에 위치하는 천상 세계조차 완전하지 않다. 육도의 모든 존재는 제한되고 불완전하므로 업의 증감에 따라 윤회의 과정 속에서 변화한다. 따라서 육도의 모든 존재는 본질적인 의미에서 위계적이지 않으며, 찰나적으로 변화하는 업의 이행적 특징 때문에 육도의 모든 존재는 각각의 한계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 한계는 불교에서 말하는 삼법인 곧 무상, 고, 무아이다. 그것들은 육도의 모든 존재자에게 공통된 특징이기 때문에 윤회의 과정에 있는 존재들이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욕망과 물질의 지배를 받는 허약한 존재이며, 절대적인 근거에 따라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찰나적으로 변화하는 업의 형성물이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나 ‘인간 존엄성’이라는 특권적 지위를 요구할 수 없다. 윤회의 과정으로부터 벗어남을 통해서만 완전한 고통의 소멸이 가능하므로 인간은 극복되고 향상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또한 업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육도의 서로 다른 존재들은 모두 공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불교는 공성에 기반하여 모든 존재의 평등성을 주장한다. 존재의 평등성은 대승불교에서는 인간만 아니라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죽이는 행위를 금하는 실천적 덕목으로 표명되는데, 《열반경》에서는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는 여래장 사상에 따라 “모두는 칼과 몽둥이를 두려워하며 목숨에 애착하지 않는 것은 없다. 나를 헤아리면 [남의 마음을] 아우를 것이니 살생하지 말고 때리지도 말라.”고 하여 살생뿐 아니라 육식까지 금한다. 

불교는 심지어 생명 있는 것과 생명 없는 것 사이의 차이도 부정한다. 프로이트가 언급했듯이 인간과 동물의 불연속성은 다윈의 진화론에 의해 부정되었고 인간과 기계의 불연속성은 최근의 디지털기술 및 인공지능의 발달로 사라지고 있지만, 불교에서 동물과 인간, 기계와 동물, 기계와 인간을 가르는 심연은 처음부터 없었다. 생명이 없는 것에도 불성이 있다는 불교의 ‘무정불성론’은 “‘생명’은 형이상적 개념도 아니고 기호학적 의미 체계도 아니고 [……] 생명은 단지 생명임으로써, 복잡한 신체적, 문화적, 기술적 네트워크 시스템들을 가로지르는 생기적 정보의 코드들을 통해 에너지의 흐름을 현실화함으로써 자신을 표현한다.”는 브라이도티의 주장에서 그 현대적 해석을 발견할 수 있다. 

일체중생, 산천초목까지 불성이 있다는 무정불성론은 《열반경》의 사상을 계승하여 길장(吉藏), 혜원(慧遠), 천태지의(天台智義), 담연(湛然) 등이 주장하였으며, 우두종의 선사들도 즐겨 설법하였다. 오늘날까지 논쟁적인 개념으로 남아 있는 이 이론은 일반적으로 무아, 곧 모든 존재의 무자성, 공으로 해석하지만 존재하는 것 모든 것을 식의 전변으로 이해하는 여래장 사상에 따라 생기적 정보들의 코드로 이해할 수 있다. 

불교에서 생명과 비생명의 연속성, 나아가 기계-인간의 연속체로서 사이보그나 인공지능을 장착한 로봇을 가로지르는 포스트휴먼의 확장은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인간향상이라는 기획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지만 물리적, 기계적 장치에 의해 인간향상이 실현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유보적이다. 왜냐하면 이 장치들 자체가 근본적으로 유한하기 때문이다. 또한 불교 교리에 따르면 영원한 젊음, 영원한 건강, 영원한 생명을 얻음으로써 고통이 완전히 소멸되는 일은 없다. 설사 질병과 노화, 죽음을 완전히 극복한 트랜스휴먼이라 하더라도 불교의 삼법인이 적용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설사 삼고(三苦) 가운데 몸으로 겪는 대부분의 고통, 즉 ‘고고(苦苦, dukkha-dukkhata)’는 소멸되더라도 사물의 변화에서 오는 ‘괴고(壞苦, viparinama-dukkhat)’와 모든 존재가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소멸하는 데서 오는 ‘행고(行苦, sankhara-dukkhata)’까지 극복하기는 어렵다. 물론 불교는 비물질적이고 내재적인 방식으로 고통의 근본적인 소멸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고통에서 해탈한 자로서 붓다를 인간향상의 궁극적 목적으로 설정하고 있다. 

인간향상에 대한 불교의 긍정적이면서도 유보적인 태도는 한편으로 과학기술이 인간의 미래를 완전히 바꿀 것이라는 맹목적 긍정과,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는 퇴행적 부정을 모두 경계하면서 과학기술의 발전을 인간의 삶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적용 가능한 꽤 유용한 관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3. 허무주의의 극복과 종교의 귀환

인간중심주의는 이성을 토대로 합리적이고 세속적인 문화를 형성하고 인간 이성에 근거하여 진보를 확신하면서 성스러운 텍스트들의 권위와 종교적 도그마에 맞서 인간의 권리와 이성을 주장했다. 신의 죽음은 진리와 가치판단의 절대적 기준이었고 삶의 목표와 의미를 제공하던 근거의 상실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초월적 가치와 내세의 구원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으며, 근거를 상실한 삶은 일회적이며 우연적인 것들, 쾌락과 물질적 향락에 빠져들었다. 

니체가 지적했듯이 허무주의는 ‘신의 죽음’이 가져온 결과이자 그것을 잉태한 배경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허무주의가 횡행한 것은 아니었다. 니체에 따르면, 처음에 ‘신적인 절대적 가치’를 대체한 것은 ‘인간적인 보편적 가치’였다. 신이 추방된 후 인간중심주의는 종교를 대신하여 대체종교의 역할을 맡았다. 이성에 의한 역사의 진보, 과학적 진리, 사회주의와 같은 이념, 경제 성장, 공리주의적 행복과 같은 것들이 삶의 목적이 되었다. 역사와 진보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삶의 무의미성과 무근거성에 대한 허무의 감정을 덮어 주었고,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확신이 인간의 나약함과 필멸성을 보충해주었다.

인간중심주의가 가져온 정치적 진보와 과학과 문화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그 긍정적인 요소와 문제적인 부분은 분리하기 어렵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성을 낳았고 자기결정성은 오만과 지배로 변할 수 있으며, 프로이트가 경고했듯이 과학적 이성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광신적 무신론에 빠져 있거나 정치, 경제, 과학, 문화와 같은 세속적 영역에서 주술적이고 반이성적인 문제들이 두드러지고 있다.

브라질의 정치가이자 미국 법학자인 웅거 역시 인간중심주의가 인간이 약점을 감추고 보통 사람들의 신성이나 위대성의 관념을 확립함으로써 대체종교의 역할을 했다고 비판한다. 그는 인간중심주의가 “민주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의 이름 아래 사회 재구성에 복무하고 동시에 주체의 표현과 주체의 형성에 관한 낭만적인 관념들에 헌신함으로써 더욱 효과적이고 보편적으로” “보통 사람들의 신성이나 위대성의 관념을 확립”했으며 “취약성이 인간 실존에서 교정 불가능한 약점은 아니라는 주장”을 정립했다고 지적한다.

진보적 정치 신조로서의 휴머니즘은 “서로 맞물린 두 개의 다른 개념, 즉 평등을 위한 인간의 해방과 합리적 통치를 통한 세속주의에 연결”되어 있다. 휴머니즘의 쇠퇴는 그 부작용으로 탈세속적 조건을 성장시키는데, 브라이도티에 따르면 “자기 확신에 찬 세속성의 구조물에 첫 균열이 나타난 것은 1970년대 말”로, “혁명의 열정이 식고 사회운동들이 분산되고 순응하거나 변질되기 시작하자, 이전에 전투적 무신론자였던 사람들이 전통적인 유일신 종교나 동양에서 수입된 종교로의 개종 물결에 합류”하는 등의 탈세속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세속적 지향성을 갖는 인간중심주의의 폐기가 종교를 소환하는 것은 당연해 보이지만 이런 움직임은 퇴행적인 경우가 많다. 웅거가 말하듯이 고통과 질병, 전쟁, 죽음, 그리고 삶의 비천함과 일상성 앞에서 인간을 가치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 세상을 정복하려는 인간중심주의의 오만한 자긍심이 무너져버린다. 또한 포스트휴먼 시대가 오더라도 보통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행하는 허드렛일이나 굴욕적인 경험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때 대중문화와 종교는 이 굴욕적 경험에 값싼 위로를 줄 뿐이다. 웅거는 포스트휴먼 시대에 허무주의가 더 깊이 뻗어가는 원인으로 종교의 탈신비화를 지목하였다. 종교에 대한 지식인층의 어중간한 태도 역시 그 경향을 가속화시킨다고 비판하면서 모든 종교의 “서사에 들어 있는 메시지를 계시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이성으로 파악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도덕적 · 사회적 관념들의 우화로 표상하면서 스토리와 교리를 해독”하는 것이 종교가 세상을 교란시키는 힘을 상실케 하고 “전통적인 세속적 인본주의”에 복무하게 한다고 주장하였다.

휴머니즘이 야기한 도덕적 위기는 그 세속적 지향과 관계 있다. 니체가 예견했던 것처럼 종교를 대신했던 대체종교마저 무너질 때 더 심각한 형태의 문제가 등장한다. 바로 허무주의이다. 신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이 모두 선언된 포스트휴먼 시대는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는 물론이고 세속적인 형태의 ‘보편적 가치’도 더 이상 신봉하지 않는다. 브라이도티가 지적하듯이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더 복잡하게 얽힌 상황”이며, “세속성의 자명한 원칙들에 대한 본질주의적 믿음으로 정의되는 세속주의의 위기는 근대 이전이 아니라 최근의 지구화된 포스트모더니티 사회와 정치 지평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포스트휴먼 담론은 무엇보다 인간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이성의 한계를 직시하기를 요구함으로써 어떤 윤리적 근거들을 모색하려고 한다. 하지만 신도 인간도 죽은 세상에서 삶의 무의미와 정체성 상실에서 비롯된 허무주의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포스트휴먼 시대에 종교가 소환되는 까닭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결과가 인간의 종말을 우려할 정도로 부정적이라는 점 때문은 아니다. 과학기술의 비인간화에 대한 염려 때문에 인간성에 대한 낭만적 주장으로 후퇴하고, 과거에 철학이 자신의 무능을 초월적인 존재를 끌어들여 해결했듯이 포스트휴먼이 겪고 있는 곤경을 과거의 초월적이거나 주술적인 종교를 소환함으로써 해결하려는 시도가 없지 않지만, 포스트휴먼 시대의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처방이 되지 못한다. 

종교가 소환되어야 할 첫 번째 이유는 인간을 정점으로 하는 위계를 전복하기 위해서이다. 종교가 비록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분과화된 현대 학문들과 달리 인간 및 인간과 관련된 세계 전체에 대하여 설명을 제공하며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형식이기 때문에 인간중심주의로의 퇴행을 막고 새로운 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인간중심주의의 파기에 따라 새로운 주체로서 포스트휴먼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포스트휴먼’이라는 현상을 설명하고 기술하는 것을 넘어서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방법을 모색할 때, 그 핵심은 ‘포스트휴먼 주체 개념’이다. 인간과 생명, 인간과 기계,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관계 설정은 곧 이들 사이의 윤리를 확립하는 것이다. 브라이도티는 여기에 영토적 혹은 환경적 상호접속이 포함된다고 보면서 이런 교차적이고 상호적인 방식의 존재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적 주체성을 포스트휴먼의 주체성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고전적 휴머니즘의 규범에 따라 정의된 개별 주체의 자기 이해와도 다르고, 모든 종, 가상적 존재들과 세포 조작 합성물에 인권을 확장시키는 칸트주의자들의 도덕적 보편주의와도 아주 다른 윤리적 유대”이므로 “포스트휴먼 이론은 윤리적 관계의 기반을 공유된 취약성이라는 부정적이고 반동적인 토대가 아니라 공동의 기획과 활동이라는 긍정적 토대에 두어야” 한다. 

“포스트휴먼 되기는 공유된 세계, 영토적 공간에 대한 우리의 애착과 연계 의식을 재정의하는 과정”이므로 생명과학의 도움으로 생명을 연장하거나 증강된 몸을 갖는 것만으로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했던 삶의 방식을 내려놓고 인간종 내의 타자만 아니라 인간종 밖의 타자들에게까지 삶의 경험을 확대하기 위해 생명의 평등성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불교가 오랫동안 실천해온 불살생의 계율과 모든 생명에 예경하는 자세, 그에 기초하여 성립된 승가의 자연친화적인 삶의 방식 등은 인간의 동물 되기, 인간의 기계 되기, 인간의 자연 되기와 같이 낯선 영역과의 만남을 촉진하고 새롭게 경험하는 길을 안내한다.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브라이도티는 “비단일적 주체들을 위한 지속 가능한 윤리는 자아와 타자들(인간-아닌 즉 ‘대지’의 타자들을 포함해서)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확대된 의식, 한편으로는 자아 중심의 개인주의를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성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확대된 의식에 의존하고” 있으며, “포스트휴먼이 된다는 것이 우려하듯이 인간에게 무관심해지거나 탈인간화된다는 의미가 아니며” 오히려 “윤리적 가치와 확대된 공동체 의식을 결합하는 새로운 방식을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이 새로운 윤리를 위한 기준으로 비영리성, 집단성에 대한 강조, 관계성과 바이러스적 오염의 인정, 잠재적 선택 사항들을 실험하고 현실화하는 일치된 노력, 그리고 창조성의 중심 역할과 이론과 실천 사이의 새로운 고리 등”은 불교가 실천해온 공동체적인 삶과 이타주의의 수행을 통해 강화되고, 서로 다른 존재들이 상호 침투되어 있음을 밝히는 화엄의 법계연기적 사유는 “주체는 인간-아닌 관계들의 관계망에 완전히 잠겨 있고 내재되어 있는 횡단적 존재”라는 포스트휴먼 이론에 더 깊은 방향을 제시하며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관계, 새로운 형식들의 발명을 위해 필요한 상상력과 정서적 변용을 불러낼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브라이도티는 “생기적 과정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방법으로, 우리가 지금 여기서 여러 타자들과 공유하는 생명의 표현적 강도를 받아들이는 하나의 방법으로” 니체가 말한 ‘운명애’ 개념을 옹호한다.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할 적극적인 삶의 태도로서 니체가 주장한 ‘운명애’는 필연적인 것에 대한 사랑, 다시 말해서 그가 말한 것처럼 “필연적인 것을 단순히 견디는 것이 아니라 감추는 것이 아니라―모든 이상주의는 필연성에 대한 거짓이다―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 체험한 이러한 실험철학은 시험적으로 근본적인 허무주의의 가능성마저 선취한다. 그렇다고 이 철학이 부정의 말에, 부정에, 부정에의 의지에 멈추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철학은 그 정반대에까지 이르기를, -공제나 예외나 선택 없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디오니소스적 긍정에 이르기를 원한다. -이 철학은 영원한 회귀를 원한다. -동일한 것을 원하고, 매듭의 동일한 논리와 비논리를 원한다. 한 철학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상태는 삶을 디오니소스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내 정식은 운명애이다.” 니체의 운명애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긍정하는 것과 더불어 이 세계 안의 나의 필연성, 즉 나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니체가 말한 운명애를 종교적 실천과 연결시키는 것은 일견 어색해 보인다. 초월적 의미를 배제한 채 우리에게 주어진 필연성을 원하고 또 원하는 운명에 대한 사랑은 인간의 조건들, 인간의 취약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시작한다. 세속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 그대로의 세계,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은 종교가 약속하는 영생, 구원, 초월과 거리가 멀지만, 삶의 진실인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바탕이 무상과 무아임을 통찰하는 불교 수행은 니체가 말한바 디오니소스적 긍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존재의 공성에 대한 자각과 그들을 향한 평등한 나눔의 삶으로 이끌어준다. 더구나 생사를 넘어선 열반마저 개념적 차원의 분별로 이해하면서 영원한 수행을 계속하는 보살의 이상을 제시한 대승불교는 현재의 삶에 대한 완전한 긍정이 종교적인 실천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준다. 

《미래의 종교》에서 웅거는 현재의 삶을 완전하게 향유하려면 인간의 실존적 약점들을 직시하고 종교에서 싸구려 위안을 구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서 기성의 종교를 개혁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미래에 일어날 변화들을 만들어낼 역량 강화를 위해 무엇보다 인간 자신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단지 현재 우리의 모습 그대로 인정된 인간 본성(우리의 기존 성향들의 묶음)은 많은 점에서 현재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할 것”이므로 인간 지능과 신체의 향상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제도들과 수정된 믿음들이 어떤 경험을 촉진하고 다른 경험을 억제하기 때문에 인간 본성은 천천히 한계에서만 변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웅거는 “인간의 필멸성, 무근거성, 충족 불가능성”은 미래의 인간에게도 변할 수 없는 조건이므로 미래의 종교가 출발하는 지점은 신이 없는 현실에서 인간의 한계를 직시하면서 “인간의 필멸성, 무근거성, 충족 불가능성을 확고하게 인정”하는 것이어야 하며 “이를 인정하지 않는 한 미래의 종교는 자신의 결단에서 전진을 이룩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지금까지의 세계 종교들이 행해왔던 인간 실존의 이런 약점들을 부정하는 방식이 “그 약점들의 위력을 무디게 하고 그 약점에서 사회와 주체를 와해시키는 힘을 제거”했으므로 포스트휴먼 시대의 종교가 백지 위에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할 때, 오늘날 종교가 보여주는 위험과 한계들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 현재의 종교를 개혁하는 것뿐이라는 그의 지적은 타당하다.

인간의 약점들의 철저한 인정이 미래 종교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근거는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인간 조건에 관한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 모든 기획을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에 대하여 위로를 주고 우리가 가장 격렬하게 바라는 영생을 제공한다는 종교의 주장은 자기기만의 감언이설에 맞서 우리 자신을 지키는 모든 방어 수단을 좌절시킨다. 종교적 위로의 파괴적인 결과는 “통찰이나 구원을 위한 엄격한 처방의 옹호”만 아니라 그 부인이 “참여와 초월의 본질적 속성을 완전하게 인정하고 표현하는 것을 억제”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그는 “인간 여건에 관한 진리를 수용하고 위안을 거부하는 것”이 위대한 삶으로의 상승을 위한 첫 번째 조건이라고 주장하면서 “허무맹랑한 철학과 종교가 사유와 구원을 위해 우리에게 강요한 그 어떠한 공식에 대해서도 진리만이 해법”임을 강조한다. 

둘째, 이러한 각성이 인간을 바로 지금의 삶으로 일깨울 수 있기 때문이다. 웅거는 “죽음의 공포, 허무주의의 그림자, 충족 불가능한 욕구의 힘은 우리를 몽유병에서, 삶을 허비하게 할지도 모르는 위축된 의식의 상태에서 일깨운다.”고 하면서 죽음의 전망이 우리를 완전한 삶으로 이끄는 데 일조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일깨워진 “생명에 대한 감정을 우리가 정신 속에서 지속시킬 수 있다면 이러한 감정은 인간을 압도하고 환희로 마비시킬지도 모른다. 생동하는 상태에 대한 환희는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을 방해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생명에 대한 감정의 공존을 통해서만 이러한 대조적인 공포와 환희를 통제할 수 있고, 이 두 가지 감정이 우리가 위축되지 않는 실존과 현재 순간의 각성으로 전향하는 것을 돕도록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셋째, 바로 “그러한 인정을 통해 삶의 긍정과 소외의 극복이 프로메테우스주의(자기 신격화와 권력 숭배)로 타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프로메테우스주의라고 명명한 “의지와 지배의 숭배는 모든 허약성의 부인을 하나의 전제로 삼기” 때문에 이러한 제약 요소들의 진리를 의식의 이론적 관념이자 동시에 영구적 특성으로서 직시하는 것이 그 치유책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정신적 경험에서의 변화가 어떤 의미에서 종교혁명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그는 자신이 말하는 변화가 “전혀 종교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익숙한 세속적 인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수정으로 보일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는 인간 경험에서 종교적인 것과 다른 것의 구분을 확정 짓는 방식은 존재하지 않으며 종교가 그 내용을 결여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 실존에서 위안할 수 없는 상처들에 응답하는 것, 그리하여 기술적인 것과 규정적인 것의 구분을 극복하면서 삶에 대한 지향을 세계 비전에 착근시키는 것, 합리적인 근거들이 항상 불충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실존의 결단을 요구하는 것, 결과적으로 위태롭게도 우리 자신을 타자에게 넘겨주도록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 등이 역사적 범주로 채용된 종교의 뚜렷한 특징들”이라고 한다. 

또한 삶의 종교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 사이의 단순한 구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변화가 단지 “철학적 태도에서의 변화가 아니라 실제로 종교적 비전에서의 변화”여야 하며 “온갖 야심적인 종교적인 변화는 [……]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시도”하며 “정치적 변혁의 모든 원대한 기획은 제도적 변화의 프로그램 그 이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혁명은 반드시 의식에서의 변화이자 동시에 제도에서의 변화이어야” 하므로 미래의 종교는 과거의 유산과 단절하면서 인간 조건에 대한 끔찍스러운 진리를 수용하고, 죽음의 확실성과 허무주의에 대한 허약한 대책 가운데 왜소화에 대한 취약성을 포함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구원종교들이 신에게 귀속시킨 초월 권능에 대하여 인간의 몫을 확대시키면서 위대한 삶을 자력으로 성취하려는 결정을 함으로써, 결국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확신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의 변혁이 철학이 아니라 결단으로 이루어지며 그런 결단은 위대한 삶에 대한 용기와 비전을 주는 종교만 제공할 수 있다는 웅거의 주장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구원종교들이 신에게 귀속시킨 초월 능력에 대하여 인간의 몫을 어떻게 확대시키는가’이다. 이 점에서 20세기 페미니즘이 평등과 상징적 재인을 획득하기 위하여 다양한 대안적 영적 실천들을 해낸 것은 중요한 선례가 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상징적 의미에서 머물지 않고 현실적으로 인간의 실천적 결단과 행위를 촉발하기 위한 종교적 실천을 확산해가는 것이 필요하다. 페미니즘이 찾아낸 대안적 영적 실천 가운데 여성 보살로서의 타라 또는 관세음보살이 보여주는 자비와 연민의 수행이나 불교 여성 출가자의 역사적 성취들과 틱낫한, 달라이 라마 등이 주도하고 있는 참여불교는 종교적 실천이 현실적 실천을 촉발하고 다시 종교적 실천을 심화하는 새로운 시대의 종교의 본보기이다.

브라이도티가 주장하듯이 “합리적 행위성과 정치적 주체성이 실제로는 종교적 경건함을 통해 전달되고 지지될 수 있으며 상당한 영성도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신앙 체계와 제의들이 비판적 사유와 시민권의 실천과 양립 불가능하지 않다.” “과정 중심의 정치적 존재론은 탈세속적 선회를 수용할 수 있으며 [……] 정치적 주체성에 종교적 행위성을 연결시키고, 이 둘을 다시 대립적 의식에서, 부정성으로 정의되는 비판에서 분리하는 이중의 도전이 포스트휴머니즘 조건이 야기하는 중요한 문제 중 하나다.”라는 브라이도티의 주장은 종교적 실천이 정치적 실천과 연결될 수 있다는 웅거의 생각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웅거와 브라이도티는 세속성에 기반하여 종교적 실천이 가능함을 인정한다. 브라이도티는 횡단적 연결의 긍정성을 수용하고 인간향상의 가능성에 대하여 열려 있는 반면, 웅거는 인간의 취약성에 주목하면서 인간향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갖는 등의 차이가 있지만 포스트휴먼 시대에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윤리성이며 그것은 과거의 윤리적 명령이 아니라 종교적이고 실천적인 윤리성임을 인정하는 점에서 일치한다. 또한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완전한 긍정에 도달함으로써 얻게 되는 깨달음과 기쁨이 ‘인간’의 죽음이 불러온, 무의미와 절망으로 위축되는 회의주의를 치유하는 궁극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그렇다. 

 

4. 새로운 보편적 가치의 실천과 불교

포스트휴먼 시대의 도래와 함께 인간과 동물, 인간과 기계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됨으로써 우리는 생명과 물질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얻게 되었다. 이제 물질은 단순한 질료가 아니라 체현된 인간이라는 특정한 물질까지 포함하여 지능이 있고 자기 조직적이라는 사실을 기반으로 인간과 기계, 인간과 동물 사이의 차이가 절대적이지 않음이 인정되고 있다. 생명과학과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물질이 문화나 기술적 매개와 변증법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이라는 사실에 기초하여 인간의 몸과 지능을 증강시켰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종교의 귀환은 인간과 인간-아닌 형태들을 분할하는 이원론으로부터 생명의 평등성과 연결성을 회복하는 새로운 전체론적 접근으로서 시도되어야 한다. 그것만이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포스트휴먼 곤경을 극복하고 지구적 위기들을 해결해 갈 수 있는 길이다. 불교는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공경과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깊은 존중을 통해 인간과 인간-아닌 형태들의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자연적 필연성의 영역에서 해방되기를 강조하기보다는, 그 영역 안에서 그 영역과 조화를 이루며 발생하는 해방의 형식”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보편적 가치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보편적 권리와 융합하고 잔인하게 접속이 끊어졌던 것들을 치유하면서 “교육, 정체성, 존엄성, 지식, 애정, 기쁨, 배려 같은 더 높은 문화적 욕구만큼이나 음식, 쉼터, 건강, 안전 같은 기본적이고 구체적인 필수조건도 포함한다.” 이러한 구체적인 조건들을 마련할 때 기후 위기와 지구환경 위기, 최근 경험한 감염병의 문제 등이 고려되어야 하며 포스트휴먼으로서의 윤리적 실천이 요청된다. 

포스트휴먼 주체는 다수의 소속을 허용하는 생태철학 안에서 다양체로 구성된 관계적 주체로서 차이들을 가로질러 작업하고 또 내적으로 구별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현실에 근거를 두고 책임을 지는 주체이다. 포스트휴먼 주체성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작용하며 실천의 과정 속에서 체현되기 때문에 공동체의 건설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그런 점에서도 교리뿐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는 공동체를 근거로 하는 종교는 포스트휴먼 시대의 곤궁을 극복하기 위한 방식이 될 수 있다.

웅거가 지적하듯이 종교의 혁신적 변화는 관념과 실천이 결합할 때만 가능하다. “식자층의 어중간한 믿음과 야만적인 대중적인 헌신의 공존은 과거에 수차례 그래 왔듯이 관념과 경험의 시각에서 구원종교의 자체 개혁을 방해”한다는 웅거의 지적은 근대 불교학의 도입 이후 불교를 철학 또는 과학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론으로만 학습하는 한국 불교계의 풍토에도 해당한다. 

기독교 기반에서 웅거가 말한 ‘구원종교들이 신에게 귀속시킨 초월 능력에 대하여 인간의 몫을 어떻게 확대시키는가’라는 문제를 불교에 적용한다면, ‘전통적인 교학체계 안에서 설명되고 있는 붓다의 실천을 어떻게 현대적인 생활 속으로 확대하는가’라는 문제로 바뀔 것이다. 불교의 인간관과 생명관은 포스트휴먼 시대의 대안적 영성, 미래의 종교에 적합하며 필요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한 논의는 차후의 과제로 미뤄두고, 그러한 통찰들이 불교 속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보다 그 통찰들을 어떻게 현실화하는가에 대한 비전과 실천이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브라이도티가 주장하듯이 포스트휴먼 주체성은 체현되고 환경 속에 위치한다. 불교의 진리가 시공을 초월한 것이라도 그것을 현재의 현실에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

 

명법 myeongbeop@gmail.com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동 대학원 미학과 졸업(박사). 해인사 국일암에서 성원 스님을 은사로 득도. 운문승가대학 졸업. 주요 저서로 《선종과 송대 사대부의 예술정신》 《미국 부처님은 몇 살입니까?》 《은유와 마음》 《미술관에 간 붓다》 등과 〈서양 현대예술에 나타난 선과 오리엔탈리즘〉 〈한국불교의 세계화 담론에 대한 반성과 제언〉 외 논문 다수. 현재 해인사 국일암 감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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