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현대 중국불교의 현실과 전망

20세기 중반부터 크게 성장한 대만불교는 20세기 말 대륙불교의 소생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 덕분에 최근 몇십 년간 중국대륙의 불교는 가히 경천동지의 폭풍 성장을 해왔다. 이 글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소박하나마 필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대륙불교의 시기별 변화 양상을 살핀 후 현 중국불교 발전에 공헌한 주요 불교 인물을 선별하여 간략하게나마 소개하고자 한다.

20세기를 건너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화권 불교계에서는 너무도 많은 일들이 발생했고 많은 불교 인재가 출현했다. 이들은 급변하는 역사 사건들과 조우하며 지혜롭게 현대 중국불교를 지켜왔다. 아직 한국의 불교계에서는 현 당대(當代) 중국불교에 대해서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현대 중국불교 현황을 이해하고 중국인 불자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들과 국제적 네트워크를 만들어 함께 나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장차 상호 간의 불교 교류와 국제적 협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한두 사람의 중국불교 연구자로는 그 효과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동아시아 국제정세가 수시로 변하는 상황에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중국불교를 무시할 수 없고, 무시해서도 안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1. 무한 변신 중인 현대 중국불교  

오늘날 중국대륙의 불교는 놀라울 만큼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땅이 넓고 지역별 문화 차이도 크다 보니 일반화시켜 말하기는 어렵지만, 출가자 수가 대폭 증가하고 있고 교육 수준도 높아지고 있으며 일상생활에서 품위가 있고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지역 편차가 많기는 하겠지만 필자가 보았던 몇 가지 경험에 의거해서 시기별 변화를 되짚어 보기로 하자.

1) 1990년대: 기능이 중지된 채 방치된 전통 사찰들

한중수교 2년쯤 지났을 무렵 필자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연구 자료를 찾을 마음도 있고 해서 첫 방문지를 북경으로 잡았다. 오후쯤 도착했는데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에 바로 북경 기차역으로 가서 그날 밤 출발하여 다음 날 새벽에 산서성(山西省) 대동시(大同市)에 도착하는 기차표를 샀다. 대동시를 특별히 좋아해서 간 것은 아니었고 그저 시간적으로 따져보니 북경에서 밤에 출발하여 다음 날 새벽에 도착하는 가장 만만한 도시가 대동이었기 때문이다.

강의실에서 책으로만 배운 중국어에 의지하여 중국 땅에 도착하자마자 여행을 떠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은 젊은 패기였는지, 아니면 무식해서 용감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당시는 북경만 벗어나면 대도시라고 해도 정전이 밥 먹듯이 발생하고 얼굴을 씻지 않은 사람도 흔히 볼 수 있었으며, 머리를 감지 않은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국수 가락처럼 솟구쳐 저마다 제비집을 이고 있는 듯 보이던 시절이었다.

자정에 북경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다음 날 새벽 7시쯤 기차역에서 내리니 사방은 회색빛이었다. 건물도, 사람도, 간간이 서 있는 나무도, 심지어 공기 빛깔조차 회색이었다. 이런 곳에서 무슨 관광을 할 수 있을까? 수소문해 보니 가볼 만한 관광지는 절밖에 없었다. 그날 대동에서 첫 번째 간 곳은 현공사(懸空寺)라는, 그야말로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오랜 먼지가 쌓여 찾아오는 이 하나 없는 절이었다.

승려인지 일반인인지 알 수 없는, 이도 저도 아닌 복장을 한 남성이 절 입구 차가운 사무실에 앉아 화롯불을 쬐고 있었다. 사실 일대가 어찌나 조용한지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가 나중에야 그의 존재를 발견했다. 현공사로 올라가는 입구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문을 열어달라고 하자 그는 볼 것도 없는데 왜 굳이 들어가려 하냐며 어찌나 짜증을 내는지 나도 화가 나서 싸우고 싶을 정도였다. 춥고 귀찮아서 열쇠를 따주기 싫었던 모양이다. 불교나 사찰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는 전혀 없어 보였다.

현공사 입구를 통과하여 위로 오를수록 바닥은 무너져 내릴 듯 삐걱거렸고, 켜켜이 쌓인 먼지는 실망이라는 말도 아까울 정도였다. 모든 것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바닥에 구멍까지 난 낡은 버스에 의지하여 추위에 떨며 몇 시간을 달려온 결과가 겨우 이거라고 생각하니 실망감이 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버스의 차장 총각은 또 차비로 얼마나 바가지를 씌웠던지!

오후에는 다시 시내로 돌아와 다른 사찰 한 곳을 둘러보았는데, 희미한 기억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도시의 서남쪽 모퉁이에 있는 화엄사(華嚴寺)를 갔던 것 같다. 회색빛 공기로 둘러싸인, 영하 10도를 한참 넘긴 차가운 겨울의 날씨, 사찰 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싶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무언가 움직이는 물체가 흐릿하게 드러났다. 가까이 다가가니 중년의 한 여인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오체투지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중국은 종교를 아편이라 한다던데, 사찰이 관광용 아닌 신앙용으로도 이용되고 있음을 처음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사찰의 화장실 옆에는 역대 비문들이 아무렇게나 깨져 쌓여 있었다. 한국 같았으면 박물관에 가 있어야 할 물건을 마치 폐기물처럼 방치하는 것을 보고 중국의 전통문화는 다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 2천년대 초반: 마침내 봄바람이 불어오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2006년 3월, 북경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필자는 같은 학교 중국인 친구 두 명의 제안으로 북경시 해정구(海淀區) 서북쪽에 있는 용천사(龍泉寺)라는 절에 가게 되었다. 해정구 일대는 북경의 대학들이 몰려 있는 곳이다. 북경대와 청화대, 북경사대 3개 대학생들의 동아리에서 연합하여 용천사에서 1박 2일 수련회를 한다며, ‘너는 외국인이니 중국인의 다양한 생활을 보아야 한다’면서 친구가 나도 같이 갈 것을 권했다. 당시 함께 간 두 친구도 알고 보니 처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중국 남부 복건성(福建省)에 광화사(廣化寺)라는 선진적인 불교사찰이 있는데 얼마 전부터 그곳의 스님이 직접 북경의 용천사를 이끌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친구들을 따라나섰다.

훗날 알고 보니 광화사는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하면서 조박초에 의해 중국 사찰의 표본으로 삼은 첫 번째 사찰이었고, 당시 광화사와 용천사를 이끌던 젊은 비구 스님은 바로 학성(學誠, 1966~ ) 법사였다. 학성 법사는 조박초 거사가 고르고 골라 키운 승려 인재였다. 당시만 해도 출가하려는 사람이 매우 적었고 학력 수준도 낮았기 때문에 조박초는 젊고 총명하며, 불심이 깊은 학성 법사를 매우 아꼈다. 개혁개방 후 처음으로 배출된 중국불학원의 수석 졸업생 학성 법사는 졸업 후 열과 성을 다해 광화사 불사와 불자 양성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랬던 그가 초심을 잃게 된 것은 어째서였을까? 나는 지금도 그것이 궁금하다. 내가 용천사에서 학성 법사를 본 지 10여 년이 지난 후 그는 중국 불교계 최고의 자리인 중국불교협회 회장이 되어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회장이 되고 3년쯤 지난 2018년, 학성 법사는 용천사의 젊고 용기 있는 제자들이 실명을 걸고 총 96페이지로 작성한 고발문과 함께 고발당했고, 그 혐의가 인정되어 하루아침에 쫓겨났다. 돌이켜 보면 중국대륙에서 불교가 너무 급격히 부흥하면서 발생한 부작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그날의 기억 속으로 돌아가 보자. 초봄의 북경 교외는 매우 쌀쌀했다. 친구들과 나는 다른 대학교 중국인 여대생들과 함께 우리가 잘 곳을 청소하고 이불을 옮겨오는 일을 맡았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곳은 숙소라기보다는 헛간이었다. 그냥 짚단을 쌓아두고 그 위에 잠을 자라는 것이었다. 이불로 모포 한 장씩이 제공되었을 뿐이다. 묵언과 함께 물을 아껴 쓸 것을 청하는 협조문도 붙어 있었다. 계곡물을 겨우 끌어와 사용 중이라고 했다. 무엇 하나 불편하지 않은 것이 없는 열악한 여건이었지만,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차가운 물에 고무장갑도 없이 사람들의 식기를 받아 닦는 그들의 손은 빨갛게 얼어 있었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는 기색이 없었다.

다음 날 새벽에 다 같이 일어나 아침예불에 참여하게 되었다. 밤새 짚단 위에서 추위에 떨다가 일어나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온 나는 순간 눈을 의심하였다. 컴컴한 이른 새벽, 서리가 하얗게 깔린 마당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서 아침예불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참가한 대학생이 약 20여 명 정도였는데, 이들 대학생 외에 인근의 중장년 재가불자 20여 명이 와 있었다.

그날 아침예불에 대해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스님이 너무 바빠 아침예불만 하고 바로 내려가야 한다고 들었는데, 그분이 바로 학성 법사였다. 그날 필자의 인상에 깊이 남은 것은 중장년 거사들의 경건한 표정이었다. 쌀쌀한 초봄의 새벽, 희끗희끗한 머리에 허름한 복장을 했지만 이들의 표정만은 맑고 굳건했다. 당시 한국의 책에서 보고 배운 중국과는 너무 달랐으므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3) 현재: 폭풍 성장 중인 중국불교

그로부터 또 10여 년이 넘은 지금, 중국에서 불교는 천지개벽을 했다. 오히려 너무 빠른 발전의 부작용을 걱정하며 불교의 상업화, 도덕적 해이 등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들릴 정도이다. 이제 바야흐로 중화권 불교의 중심은 점차 대륙으로 이동하고 있다. 현재 대륙의 출가자 수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공식적인 통계자료는 나오지 않았지만, 항간에서는 대략 50만에서 70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지인의 말에 따르면 복건성의 경우 작년 비구계 신청을 2천 명이 했는데, 이 중 300명만 계를 받았다고 한다. 출가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넘쳐나서 인위적으로 조절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지역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추세는 대동소이하다.

개인적으로 2015년부터 교류하는 상해의 한 불자 커뮤니티는 30여 명이 활동한다. 20대에서 40대 전문직 청년불자가 대부분이라 일찌감치 휴대전화 앱으로 매일의 수행을 공유한다. 가상 강의실이 있어서 그 안에서 불경 수업을 받고 아침에 일어나 각자 자신의 가정에서 예불을 하고 지도법사에게 보고한다. 채식 생활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 꽤 많다. 모임이 있는 날이면 음악과 미술 등 각자 가진 장기를 발휘하여 함께 나눈다. 이런 젊은이들은 수행이 일상생활과 함께 연결되니 빠르게 변하는 도시 생활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수년간 이들을 지켜보면서 중국불교의 미래가 탄탄하다는 생각이 든다.

 

2. 현대 중국불교 발전을 이끈 주역들

근현대 중화권 불교의 성장과 변화에 기여한 중화권 불교계의 큰 인물들을 살펴보자면 그 규모와 범위에 놀라곤 한다. 사정이 이러한 데에도 한국 불교계에서 중국불교 현황에 대해서 충분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앞으로 현대 중국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더 많이 늘어나고 더 많은 인적, 문화적 교류가 있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워낙 콘텐츠가 많아서 이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해서 소개해야 할지, 또 필자가 알고 있는 내용 또한 부분에 불과한데 제대로 적절한 선택을 해서 소개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은 있지만 용기를 내어 정리해 본다.      

1) 대륙불교를 되살린 3대 영웅 조박초, 성운, 남회근

오늘날 중국불교의 부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을 살피는 일은 매우 흥미진진하고, 이들에 대한 콘텐츠는 무궁무진하다. 문화대혁명 때 대륙에서 불교는 마지막 숨을 헐떡이던 상태였는데, 뜻밖의 천재일우의 기회를 번개처럼 낚아채서 지혜와 담력을 발휘한 중국 근현대 불교계 인물들의 스토리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삶에 비견된다고나 할까?

한국 불교계에 위 3인의 이름은 그다지 낯설지 않은 이름으로 대부분의 사람이 이름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조박초는 대륙에서 불교계 권력자라는 이미지를, 대만 불광산사의 성운 대사는 대만불교를 대표하는 비구 스님으로, 남회근 선생은 동양사상에 정통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세 사람이 대륙불교를 되살린 3인의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1) 동란기 대륙불교를 지켜낸 조박초 거사

조박초(趙樸初, 1907~2000) 거사는 중국 안휘성(安徽省) 태호현(太湖縣)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정통 한학교육을 받고 청년이 되어 소주(蘇州)에 있던 동오대학(東吳大學)에서 수학하였다. 학업 도중 우연히 건강이 나빠진 조박초는 요양 차 친척이 있던 상해로 가게 되고 거기에서 기라성 같은 불교계 인물들을 만나게 되었다. 요양을 하는 상황이라 시간적 여유가 있던 젊은 청년 조박초는 자선활동에 적극적인 재가불자 큰손 사업가들, 지식인 학자, 고승 등이 함께 활동하던 불교 조직의 운영을 돕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불교 수행법, 사회적 리더가 갖추어야 할 자질 등에 대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외침과 정치 혼란으로 격변의 시기를 지나던 당시의 상해는 도시나 인간이 무상하게 영화와 쇠락을 거듭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그는 평생을 불교 거사로서 부끄럼 없이 살았다. 청소년기에 건강이 나빠져서 채식을 한 이래 사망할 때까지 평생을 채식하며 살았다. 불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공산당 정치인들과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조박초는 늘 ‘고기 옆 반찬(肉邊蔡)’을 먹었고 모택동은 그를 ‘화상(和尙)’이라 칭하기도 했다. 조박초는 만찬장에서 채식하는 자신만을 위해 요리사들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가장자리의 채소만 집어 먹었다고 한다. 문화대혁명 기간에도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고 청렴하고 올곧게 살았다.

필자가 보기에 조박초의 가장 뛰어난 점은 공산당 리더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불교계가 이들이 해결 못하는 부분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아는 데에 동물적 감각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또한 불교도로서 원칙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는 한계선이 어디인지도 잘 알았던 것 같다.

중국공산당 정권이 외교적으로 고립되었을 때 조박초는 불교를 이용하여 중국 정부의 외교적 고립을 막는 데에 일조하였다. 조박초가 이용한 주요 수단은 국제간의 불교문화 교류였다. 특히 일본 및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교류에서 조박초는 제1선에서 해당국의 불교계 인사들과 불교문화 행사를 수단으로 삼아 민간외교의 물꼬를 텄다.

구체적으로 몇 가지를 사례를 들자면 조박초는 일본 불교계를 움직여서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서 사망한 중국인 애국자들의 유골이 고국으로 돌아오도록 하여 주은래(周恩來) 총리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또한 당나라 승려로서 일본 율종의 초조가 되었던 감진화상(鑑真和尚, 668~763) 서거 1,200주년을 양국 불교계가 함께 기념하는 국제적 이벤트를 만들어 양국 간의 우호 활동을 벌였다. 1960년대 냉전 시대에 이런 대담하고 지혜로운 기획은 중국 정부도 일본 불교계도 무척 바라는 것이었다. 1980년에는 감진화상상(鑑真和尚像)을 일본에서 모셔 와 순회하는 행사를 전개하여 또 한 번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이러한 그의 기획력은 훗날 한 · 중 · 일 삼국의 황금유대라는 아이디어를 구상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황금유대’가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지만, 중국에서는 사회적으로 반향이 매우 컸고 중국인들의 가슴속에 강한 자부심을 불러일으켰다.

한때 그는 일부 사람들로부터 시기를 당하여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늘 청렴하게 살아온 그였기에 조사받는 과정에서 오히려 그의 청렴함이 돋보이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외교를 위해 간간이 정치가들과 자리를 같이하는 기회를 적극 활용하여 공산당 위정자들에게 불교의 유용성에 대해서 설파하기도 했다. 그는 모택동과 같은 최고의 권력자 앞에서도 불교 이론과 마르크스 변증법을 비교하며 설명하여 모택동이 “저 화상이 변증법을 아는구먼.”이라며 감탄하기도 했다.

홍위병들의 손에 불상이 훼손되고 고승이 끌려가 뼈가 부러지도록 얻어맞는 등 바닥을 알 수 없는 어두운 시절, 문혁 말기에는 조박초도 상당히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으나 마지막 순간까지 한 개의 사찰이라도 더 지켜내고자 노력하였다. 그 후 개혁개방이 이루어졌을 때 조박초는 마침내 대만, 홍콩, 마카오, 해외 화교 불교권과의 우호증진으로 범위를 확대하면서 이들과 힘을 합쳐 중국대륙에서 불교가 다시 꽃피우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2) 양안 불교 교류의 물꼬를 튼 성운 대사

한편 중국대륙의 불교 부흥에 혁혁하게 공헌한 대만 쪽 대표 인물을 꼽으라면 필자는 대만 불광산사의 성운 거사를 꼽을 것이다. 대륙의 조박초 거사와 대만의 성운 대사는 각각 대륙과 대만에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움직였고, 강호의 두 고수는 절묘한 시기에 만나 중국 현대불교의 역사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대륙이 경제적으로 매우 곤란하던 때에 많은 불교 문화재의 해외 밀반출이 있었다. 성운 대사는 탁월한 정치적 감각으로 대륙에서 밀반출된 불교 문화재의 대륙 반환이라는 명분을 십분 활용하여 대륙과 교류를 넓혀갔고 공산당을 안심시켰다.

또한 섬서성(陝西省) 법문사(法門寺)의 불지사리(佛指舍利)를 대만으로 운반하여 순회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성운 대사의 주도하에 대만의 불교계는 힘을 합하여 대만대학의 거단체육관(巨蛋體育館)에서 대규모 환영법회를 열었다. 당시 10만 이상의 불자들이 행사에 참여했으며 성운 스님이 법회를 이끌었다.

1989년 3월 27일 성운 대사는 72명으로 구성된 대륙 방문 정(正)대표단과 500명으로 조성된 부(副)대표단 ‘국제불교촉진회중국대륙홍법탐친단(國際佛教促進會中國大陸弘法探親團)’을 이끌고 40여 년간 단절되었던 양안의 교류를 성사시켰다. 이날 중국불교협회 회장 조박초는 외교부장 희붕비(姬鵬飛)와 함께 직접 북경공항에 마중을 나왔다. 북경공항에서 조박초는 성운 대사를 맞이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년에 한 번 올 기회가 왔소!”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으면 조박초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겠는가. 성운 대사와 조박초의 절묘한 호응으로 대륙에서 불교는 다시 점화되었다. 당시 대륙 방문에서 성운 대사는 중국 정부로부터 최고의 예우를 받고 인민대회당에서 국가주석 양상곤(楊尚昆)과 정협 주석 이선념(李先念)과 만났으며 북경인민대회당에서 강연을 하기도 했다.

당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중국에 다양하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도움을 주되 정치적으로는 부담을 주지 않는 대만 불교계의 전략은 매우 적절했으며, 마침내 불교가 대륙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성운 대사에 이어 법고산사의 성엄, 자제공덕회의 증엄, 중대선사의 유각 등 대덕고승들이 재가불자들이 힘을 합쳐 마침내 대륙불교의 부흥을 이끌어 냈다.

(3) 대륙인들에게 불교 정신을 불어넣은 영웅 남회근

남회근(南懷瑾, 1918~2012) 선생에 대해서는 그가 펴낸 책이 한국에 이미 많이 번역되어 있기에 여기서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고, 대신 대륙에서 불교 부흥에 대한 그의 공헌만을 간략히 소개한다. 남회근은 1993년 하문(廈門, 샤먼) 남보타사(南普陀寺)에서 ‘남선칠일(南禪七日)-생명과학과 선수행 실천연구’라는 프로그램을 개최하였다. 당시만 해도 대륙에서는 중국 전통사상의 가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동안 봉건사상의 잔재라며 타도하는 데에 바빴기 때문이다. 남회근이 진행한 프로그램은 대륙인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당시 녹화한 자료가 총 42회로 유튜브에 공개되어 있으므로 관심 있는 사람들은 언제든 살펴볼 수 있다. 책에 의존하지 않고 기억에만 의지하여 그처럼 많은 고전을 수시로 인용하며 자신의 수행 경험에 의거하여 강연을 이어가는 모습에서 심오한 내공을 느끼게 한다.

2차 대전이 끝난 1949년부터 대만과 홍콩 등지에서 거주하던 남회근은 중국대륙의 인민들이 불교와 전통사상의 가치를 재발견하도록 하기 위해 그의 만년을 바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하여 2004년부터 남회근은 중국대륙에 들어와 상해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2006년 이후로는 강소성 소주시 오강묘항(吳江廟港)에 태호대학당(太湖大學堂)을 세우고 광화교육기금회(光華教育基金會)를 설립하여 대륙의 젊은이들에게 중국 전통사상, 특히 불교의 이론과 수행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그는 2012년 사망 직전까지 마지막 한 점의 에너지까지 모두 소진하며 교육에 헌신했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오늘날 사회적 엘리트로 활동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중국의 저명한 화학자로서 중국과학기술대학(中國科學技術大學) 총장, 남방과기대(方科技大) 초대 총장을 역임한 주청시(朱清時, 1946~ )는 남회근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 인물이다. 필자는 유명한 방송 기획자 겸 진행자이자 중국 포털 바이두의 부총재를 지낸 양동(梁冬, 1974~ )도 대담 프로그램에서 남회근의 영향을 받았다고 술회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를 좇아 배운 적이 있는 북경대학 중국여세계연구중심(中國與世界研究中心)의 한 학자는 남회근을 다음과 같이 추모하는 글을 적었다.

중국문화의 거대한 집이 무너져 내리고, 인류 정신 유산이 침몰하는 때를 당하여 일생을 물길을 거슬러 오르며 나라 안과 밖에서 떠돌았네. 유불도 3교와 여러 학설들, 고금 학문을 종횡무진으로 노닐었으나 한 물건에도 집착함이 없었고 한 톨의 먼지에도 물들지 않았네. 천년 이래 여러 영웅호걸 있었다 하나 몇이나 그와 비견하리!

남회근 선생의 경우 불교를 중심으로 하되 유불도를 회통하는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당시 대륙의 젊은이들이 불교에 호감을 느끼도록 하는 데에 더 유리한 결과를 낳았다는 것을 위의 인용문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전통사상을 봉건으로 몰아 과거를 부정하는 교육만 받아왔던 대륙의 젊은이들에게 남회근의 출현은 그야말로 큰 충격을 주었고, 전통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불교 수행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조박초 거사와 성운 대사가 정치적인 지혜를 발휘했다면 남회근 선생은 대륙인의 마음속에 불교의 정신을 불어넣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2) 미국에 중국불교의 씨앗을 심은 심가정 거사

심가정(沈家楨, 1913~2007) 거사는 중국대륙의 절강성 소흥(紹興) 출신으로 모친이 독실한 불자였다. 상해 교통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그는 격동의 세월 속에서 사업을 위해 여러 곳을 옮겨 다니다가 홍콩과 인도를 거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인도에서 티베트불교에 정통한 장진기(張澄基, 1920~1988) 거사를 만났고, 함께 미국으로 건너온 이래 오랜 도반으로 지냈다. 심가정은 미국 정착 초기 당면한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미국 동부의 세인트존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오대호 연안의 선박 운수 사업으로 거부가 되었다, 아내와 함께 평생을 독실한 불교 수행자로 지내온 그는 사업이 일정 궤도에 오르자 1960년대부터 미국에 중국불교를 전하고자 발원하여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혼신의 힘을 기울인 거목이다.

그는 1980년부터 사업에서 완전히 은퇴를 선언하고 부부가 같은 뜻을 품고 불교를 위해 전 재산과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당시 북미에는 중국인 불자 이민자들이 신앙생활을 할 여건이 마련되지 못한 실정이었다. 그는 미국불교회(美國佛教會) 창립, 보리정사(菩提精舍), 대각사(大覺寺), 장엄사(莊嚴寺) 등의 사찰을 창건하여 미국의 중화권 불자들이 불교 수행을 이어 나갈 수 있고 서양의 학자들이 미국불교 연구에 관심을 갖게 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심가정 거사는 서양 학자들이 불교를 포함한 세계 종교를 객관적으로 연구하도록 하고자 뉴욕대학교에 세계종교연구소(IASWR)를 설립했으며, 여러 언어로 적힌 7만 권 이상의 귀중본 서적과 5만 권 이상의 마이크로필름을 소장한 ‘세계종교도서관’을 세웠다. 또한 대만과 홍콩의 고승들을 미국으로 초청하여 포교를 할 수 있게 도왔고, 출가자 인재를 발굴하여 조용히 후원하였다. 이때 도움을 받은 대표적 인물이 법고산사를 일군 성엄(聖嚴, 1931~2009) 스님이다. 심가정 거사와 성엄 스님의 인연 스토리는 1998년 뉴욕 장엄사에서 두 사람이 나눈 대화에 잘 드러난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이 자료는 중국대륙이 공산화된 이후 대만을 중심으로 성장하던 중국의 출가자들과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아가던 중국인 재가불자가 어떻게 서로를 도우며 불교의 발전을 이끌어 갔는지 엿볼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자료이다.   

그는 또한 1970년에 대만 복엄정사(福嚴精舍)에 ‘역경원(譯經院)’을 설립하여 한문대장경의 영문번역 사업을 추진했는데, 1978년부터는 성엄 대사를 역경원 원장으로 위촉하고 사업을 맡겼다.

심가정 거사의 또 하나의 숙원 중 하나는 전자불전 불사였다. 공학도였던 심가정 거사는 불전을 한시바삐 전산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일찌감치 갖고 있었고, 1994년 마침내 미국 내 중국인 거사들과 함께 의논하여 정복보(丁福保)의 《불학대사전(佛學大辭典)》과 《금강경》의 다양한 판본들을 전산화하는 것으로 작업의 첫걸음을 떼었다. 그 후 대만의 중앙연구원 및 여러 전문가와 함께 ‘중화전자불전협회(中華電子佛典協會)’를 설립하였다. 하지만 인연이 충분히 성숙되지 못하여 그의 오랜 염원이었던 불전 전산화 사업은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오늘날 ‘중화전자불전협회(Chinese Buddhist Electronic Text As-sociation)’는 심가정 거사가 주도한 것은 아니지만 심가정 거사의 노력을 기려 그가 처음 만들었던 협회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한다.   

이처럼 심가정 거사는 미국에서 성공한 중국인으로서 자신이 성취한 부를 미국에서의 중국불교 정착과 대만의 불교 인재 양성에 바쳤다. 그가 양성한 인재들은 미국과 대만은 물론 동남아, 대륙의 불교 발전에 기여함으로써 불교 자원이 선순환되는 데에 큰 기여를 하였다.

3) 근현대 중국 불교인물 자료를 펴낸 우릉파 거사

우릉파(于凌波, 1927~2005)는 중국 하남성 낙양에서 태어났다. 12세에 어머니를 잃고 수업 중 적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리를 듣고 후방으로 도망을 갔다가 우연히 군의관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인연으로 군의관이 되어 국공내전에서 패한 국민당을 따라 대만으로 들어가 군의관으로 일하다가 1959년 퇴역했다.

1960년 어느 날 우연히 양계초가 쓴 《불교여군치관계(佛教與群治關係)》를 읽고 불교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되었다. 차츰 불서를 가까이하면서 마침 잡지 《보리수(菩提樹)》의 발행인 주비(朱斐, 1921~ ) 거사와 교류하게 되면서, 불교에 정식으로 귀의하게 되었다. 그 후 이병남(李炳南, 1889~1986) 거사의 문하로 들어가 정토염불 불교를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1961년 무문관 수행을 마친 한 스님의 병을 치료해 주면서 사부대중을 위해 봉사할 병원을 세우기로 발원하였다. 마침내 불교 사부대중과 일반 빈민을 대상으로 병원을 열어 3년여간 1만 7천여 명의 빈민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그는 불문 귀의 후 스스로 혹독한 용맹정진과 예불, 송경을 이어갔으며 마침내 스스로 얻음이 있었다. 이에 그는 1960년대에 불교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는바, 〈지식인들에게 불교를 소개함(向智識分子介紹佛教)〉이라는 글을 불교 월간지 《보리수》에 연재하였고, 후에 단행본으로 발행되었다. 이 책은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어 그 후 수십 년간 대만, 동남아, 미국, 캐나다의 중국인들에게 애독서가 되었으며, 대륙이 개방된 후에는 대륙에서도 널리 읽혔다. 총 100만 부 이상이 팔려, 1960년대 출간된 중화권 최고의 베스트셀러 불서가 되었다. 그 후 그는 학교를 세우고 한때 시의원으로 활동하며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왔다.

그러나 1981년 외부와의 인연을 끊고 다시 수행에 전념하고 불교를 연구하여 《반야심경려해(般若心經蠡解)》 《간명불학개론(簡明佛學概論)》 《유식학강요(唯識學綱要)》 《유식삼론금전(唯識三論今詮)》 등을 저술하였다. 1990년대에 마침내 대륙이 개방되자 모든 공직을 내려놓고 대륙으로 들어가 폐허가 된 대륙불교의 상황을 둘러보았다. 본래부터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우릉파 거사는 공백으로 남은 근현대 중국불교의 역사를 본인이라도 기록하겠다는 생각으로 10여 년간 발로 뛰며 자료를 찾아 《중국근현대불교인물지》 《민국불교고승전》 《민국불교거사전》 《민국불교학인전》 및 2천여 명의 출가 대덕의 전기를 모아 《현대불교인물사전》을 펴냈다. 필자가 우릉파 거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중국근현대불교인물지》를 읽게 되면서였다.

그가 자료 수집을 나서던 당시 대륙은 문화대혁명을 겪고 생활 환경은 극도로 열악했으며 교통수단도 매우 불편했다. 그의 나이 또한 이미 60을 넘고 있었다. 종교를 죄악시하던 당시 사회에서 중국 근대 인물에 대한 실오라기만 한 자료라도 얻기 위해 오래된 신문이나 잡지 분석, 수소문, 인터뷰 등 초인적 의지로 작업을 수행해 나갔다. 그가 아니었으면 중국 근현대 불교인물 상당수가 기억 속에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내용 하나하나가 너무 소중해서 이 책을 발견한 후 필자는 몇 날 며칠을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그는 불교 발전에 기여한 사람들을 고승뿐 아니라 재가불자와 학자들까지 포함해서 살폈다. 이것이 역대 불교인물 관련 기록과 다른 독특한 점이라면 독특한 점일 것이다. 필자는 이 책 한 권만으로도 우릉파 거사가 중국불교에 끼친 공헌은 지대하다고 확신한다.

우릉파 거사는 원래 이 책을 대만의 출판사와 계약하면서 당시 대륙 사람들이 경제적인 형편이 어려운 점을 감안하여 대륙에서 출판 시 대만 출판사가 판권을 갖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했다. 대만의 혜거(慧炬)출판사에서 출판할 때는 《중국근대불문인물지》라는 제목으로 총 100여 명을 다루었다. 그 후, 2005년 대륙에서 출판할 때는 이 책의 서문을 쓴 한정걸(韓廷杰) 거사에 따르면 《중국근현대불교인물지》로 서명을 살짝 바꾸었다. 이유는 현대의 인물도 들어 있기에 근대라고 칭하는 것이 부적절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원래 대만에서 출간했을 때는 출가자와 거사, 학자를 구분하지 않고 순서를 배열했지만 대륙에서는 보기에도 일목요연하고 출가자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명승편(名僧篇)’을 상편으로, ‘거사학자편(居士學者篇)’을 하편으로 구성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1994년 우릉파 거사는 앞에서 언급한 심가정 거사의 초청으로 세계종교연구원의 연구원으로 위촉되어 해외불교 발전 과정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그는 수년간 미국, 캐나다를 위시하여 동남아 각국, 사찰 커뮤니티, 고승대덕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미국과 캐나다 화인사회 발전사(美加華人社會發展史)》 《해외홍법인물지(海外弘法人物誌)》를 간행하였다.

만년에 그는 대만 곳곳의 불교단체로부터 강의를 요청받고 주로 유식학 분야를 맡아 강의했으며, 이병남거사기념문교기금회(李炳南居士紀念文教基金會)를 세워 불교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병남(1895~1286) 거사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자세히 다루고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 외에 대만 비구니 소혜(昭慧)가 주도하고 다수의 대만 불교계의 동의를 얻어낸 비구니 팔경계 폐지 운동도 중화권 불교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3. 중국 미래불교의 전망

최근 10여 년간에는 이공계를 나온 사회 지도층 인사들 중에 불자이거나 친불교적인 인사들이 대만과 대륙에 적지 않다. 필자의 눈에 들어온 인사만 따져보아도 전기 분야 전문가로서 대만에서 국가과학원장, 경제부부장(부장은 장관), 국방부부장 등을 역임한 진이안(陳履安, 1937~ ), 앞서 언급한 남회근의 제자 주청시(朱清时, 1946~ ), 홍콩 이공대학 총장을 역임한 반종광(潘宗光, 1940~ ), 전 대만대학교 총장 이사잠(李嗣涔, 1952~) 등을 거론할 수 있겠다. 이들 대부분은 서구 유학 경험을 가진 최고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다. 이들이 직접적으로 불교를 거론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곧 사회적으로 불교에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이 외에 필자가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거나 알고 있어도 지면 관계상 일일이 소개할 수 없는 인물들이 적지 않다.

이제 중국대륙에서는 지역마다 불학원이 체계를 잡고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고대 한어와 불교학 관련 과목은 물론 영어교육을 중시하는 불학원도 흔하다. 북경에 있는 중국불학원의 경쟁률은 대학입시보다 몇 배는 더 경쟁이 치열하고 전국 명문대 출신 출가자도 적지 않다.

또한 불교 전문 포털 사이트에는 불교계 뉴스가 수시로 올라오고 각종 유용한 정보가 풍부하게 올려져 있다. 이 중 불교도항망(佛教導航網, www.fjdh.org)은 가장 다양한 최신 정보를 많이 담고 있으며 국내외 다른 불교 포털과 사찰 홈페이지가 링크되어 있다. 국가종교국 산하의 중국불교협회와 중국불교협회 직속 사찰을 제외하면 정치선전을 하는 일은 없다.

도시의 잘 정비된 환경을 갖춘 사찰들은 대부분 시대 변화를 잘 읽어내는 지혜를 갖춘 리더들이 있으며, 컴퓨터 활용 능력이 뛰어난 IT 인재들이 이들의 배후에 있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사찰은 사찰대로 소규모 커뮤니티는 소규모 커뮤니티대로 편리한 앱을 개발하여 신행 활동에 활용하고 있다. 이들의 네트워크는 지리적 공간을 넘어 상호 연결을 유지한다. 해외 출장이나 해외 이주로 중국 경내를 벗어나 있다 해도 SNS나 다양한 앱을 활용하여 가상세계에서 함께 아침 · 저녁예불을 하고 하루의 수행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참선을 위주로 하는 사찰에는 젊은 불자나 지식인 불자가 많은 편이고 정토신앙을 위주로 하는 사찰에는 상대적으로 연령이 높은 불자들이 많다.

비구니 도량의 약진도 눈부시다. 비구니 2명의 원력으로 시작된 오대산 보수사(普修寺)는 아시아 최대의 규모를 갖춘 오대산니중불학원(五台山尼衆佛学院)으로 거듭났다. 이곳에는 현재 1천여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정진하고 있는데 계율이 엄격하다. 강서성불교협회 회장이자 조동종을 대표하는 사찰인 조산(曹山) 보적사(寶積寺)의 주지를 맡은 비구니 양립(養立, 1972~ ) 스님은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프랑스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의사 출신이다. 선농병중(禪農竝重)의 기치를 걸고 비구니 스님들이 철저한 계행과 수행, 노동을 병행하며 수행하고 사회복지에 힘쓰고 있다. 평흥사(平興寺)는 중국 복건성 복정시(福鼎市)에 위치한 비구 스님들의 대표적 계율 전문 도량이다. 평흥사 율학원(律学苑)에는 젊은 출가자들로 넘쳐난다.

이처럼 빠르게 중국불교가 팽창하다 보니 물론 여러 가지 부작용도 없지 않다. 그러나 필자는 중국불교의 미래가 매우 건강하며 장차 그 역량은 더욱 확대되리라 생각된다. ■

 

전영숙 lanzhi@naver.com
연세대 중어중문학과 박사, 순천향대학교 초빙교수, 대만사범대학 조교수, 불교여성개발원 불교여성연구소 소장 역임. 주요 논문으로 〈대만불교 성장의 숨은 동력〉 〈대만 불교계의 대륙 불교 부흥을 위한 전략과 노력-통일 대비 북한불교의 재건을 위하여〉 〈중국불교는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등이 있다. 현재 연세대학교 중국연구원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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