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가르친 현대불교의 스승 10인

틱낫한(1926~2022)은 1995년, 2003년, 2013년 세 차례 한국을 찾았다. 첫 번째 방문 때는 한국에서 그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두 번째 방문 때는 그의 저서 《화》가 베스트셀러여서 국내에서 세계적 가수나 영화배우 이상의 관심을 받았다. 그가 가는 곳마다 수많은 대중이 운집했고, 카메라 불빛이 쏟아졌다. 그 소란 가운데도 시종일관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는 듯 온화한 표정과 몸짓, 느린 걸음으로 걸으며,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놓치지 않은 그의 모습은 ‘빨리빨리’라는 성급함이 지배하는 한국인들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었다.

2003년 그의 방한 기간, 강연과 걷기 명상 등에 거의 빠짐없이 함께하고, 그 해 여름 틱낫한이 머무는 프랑스 플럼빌리지에 가서 일주일간 머물면서 그의 모습을 더욱 상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한국에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 대해 깊은 애정을 드러내곤 했다. 플럼빌리지의 스님들은 “타이(틱낫한 스님의 애칭)가 한국에서 돌아온 뒤에도 일주일 동안 한국 얘기만 했고, ‘송광사에서 자면서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전생에 한국의 스님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플럼빌리지 방문 기간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미리 나와 얘기라도 했으면 그렇게 뛰어내리지는 않았을 텐데……”라며 몹시 안타까워했다. 그는 “정치 지도자들과 기업가들을 정신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어떻게 우리를 평화의 언덕으로 데려다 주겠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불교가 스트레스를 받고 절망하고 갈등하는 세상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언제 어디서나 그의 가르침은 간단 명료하다. 세상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한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에 그럴 것이다. 간단 명료한 것이 가장 훌륭한 것이다. 복잡하고 불분명하다는 것은 전달자 자신이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다. 베트남의 시골에서 태어난 틱낫한은 어떻게 수천 년 전통의 불교를 뚫고 나와 갈급한 현대인들에게 불교의 정수를 현대어로 전환해 감로수를 건넬 수 있었을까.

틱낫한은 1926년 10월 11일 베트남 중부 후에에서 탄생했다. 그는 16세 때인 1942년 후에의 뜨히우 사원으로 출가해 1951년 비구계를 받았다. 출가 때 법명은 풍쑤언으로, ‘봄을 맞는다’는 뜻이다. 1949년부터 법명을 낫한으로 썼다. 낫한은 일행(一行), 함께 길을 걷는 사람, 길동무, 도반을 말한다. 틱은 석가모니의 석(釋)이다. 따라서 틱낫한의 의미는 ‘석가모니의 길동무’쯤이 된다. 그는 일찍부터 전통사찰의 강원이 아닌 사이공의 일반 대학에서 불교가 아닌 일반 학문을 공부했고, 베트남에서 자전거를 탄 최초 승려 6명 중 한 명이었을만큼 현대적이었다. 그는 베트남 전쟁 중이던 1961년 미국에 가 공부하다가 1963년 베트남에 귀국했다. 이어 1966년에 미국으로 돌아가 이때 마틴 루서 킹 등과 함께 반전운동을 했다. 이런 활동으로 1967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으나 1975년 북베트남 공산정권이 베트남 남부까지 장악하자 틱낫한에 대해 귀국 금지 조치를 내렸다. 그는 미국에 머물 당시 프린스턴대학교와 컬럼비아대학에서 유학과 비교종교학을 강의했다. 더 이상 고국으로 귀국이 어렵게 된 틱낫한은 프랑스로 망명했고, 1982년 프랑스 보르도에 플럼빌리지(매화마을)란 수행공동체를 설립했다. 그는 마인드풀니스를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한 수행법을 담은 ‘웨이크업 학교’라는 교육프로그램을 전파했다.

그는 2007년 베트남 정부와 협상해 베트남에 귀국했고, 뇌졸중으로 몸이 부자연스러워졌지만 2018년 10월 26일 베트남으로 영구 귀국했고, 베트남 후에 뜨히우 사원에서 2022년 1월 21일 세수 96세, 법랍 80세로 입적했다. 틱낫한의 삶과 가르침이 우리에게 준 유산을 7가지로 정리해보았다.

 

1. 신비적 불교를 실제적 불교로

붓다는 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러분이나 나와 같은 인간이었고 우리처럼 고통을 겪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붓다에게 간다면 붓다는 자비 가득 찬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들의 마음속에 고통이 있기 때문에 그대들은 나의 마음으로 들어올 수 있다.’

국내에 《틱낫한 불교》(틱낫한 지음, 권선아 옮김)로 번역돼 소개된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불교의 심장)의 1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불보살들이 유일신의 신이나 힌두교 전통의 수많은 신들과 혼재해 ‘무엇이 불교인지’ 모호해질 수 있지만, 틱낫한은 그 모호함을 강물에 띄워 보내고, ‘붓다는 신이 아니고, 나처럼 고통을 겪는 나와 같은 인간이었다’는 간단한 진실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여러분이 불행하기 때문에, 마음속에 고통이 있기 때문에 붓다에게 갈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며 “마음속에 고통이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소통이 가능하다”고 했다. 붓다는 45년 동안 오직 고통과 고통의 변화에 대해서만 가르쳤다는 것이다.

붓다가 고통을 보고, 왜 그것이 생겼는지를 알고, 그것을 평화와 기쁨, 해탈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상세히 처방해 전했지만, 불교는 더 쉬워지기는커녕 더 난해지고 복잡하게 인식되었다. 불교 자체가 가진 심오함이 그렇게 보이게도 했지만, 스님들이 가르침을 더욱더 모호하게 해서 오직 자신들만이 고통으로부터 탈출법을 알고 있는 것처럼 현혹한 데도 원인이 있었다. 자신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종교인들의 그런 모습은 동서를 가리지 않는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는 가톨릭 수도원에서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책으로 믿는 성경을, 권력을 가진 수도사 외엔 누구도 접근할 수 없도록 성경에 몰래 독을 묻혀놓은 장면이 나온다. 불교 또한 일반 대중들에게 난해하게 여겨지면서, 대부분의 불자는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기보다는 붓다를 신과 다름없이 여기고, 기복적인 기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것이 부인할 수 없는 불교의 현실이다. 그런데 일반인들이 붓다의 가르침에 아주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불경에 묻은 독을 제거한 대표적인 20세기 인물이 바로 틱낫한이다.

 

2. 평화

틱낫한은 어린 시절 한 사진 속의 평화로운 스님의 모습을 보고 그처럼 평화로워지기 위해 1942년 16세에 출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의 고통이 늘 그를 에워쌌다. 1946~1954년 베트남 지배를 유지하려고 전쟁을 벌인 프랑스의 군인들은 먹을 것을 뺏으려 사찰을 공격했고, 저항운동에 가담한 승려들을 잔인하게 처형했다. 그는 “당시 프랑스 병사들이 너무나 싫었다”고 고백할 만큼 자신도 고통 속에 있었지만, 그 증오심에 매몰돼 있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 병사를 진정한 친구이자 형제로 받아들였다.

또 그는 1960년대 미국 순회 강연을 통해 미국에 의한 베트남전쟁의 비극과 반전 평화를 호소했다. 또 불교평화대표단 의장으로서 파리평화회의를 이끌며 비극의 종식을 호소했다.

그러나 베트남 정부는 평화에 대한 솔직한 표현들을 문제 삼아 그의 귀국을 금지했고, 그는 1973년 프랑스로 망명해 시골 마을에서 베트남식 불교 사원공동체 ‘플럼빌리지(자두마을 또는 매화마을)’를 가꾸며 고국의 전쟁고아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처절한 전쟁 속에서 평화를 찾기 위해 노력했던 그는 ‘고통받는 모든 중생이 현실에서 평화를 찾도록’ 일깨우는 데 일생을 바쳐 세계의 평화운동가들로부터도 깊은 존경을 받고 있다.

그의 처신을 보면 그의 언행이 정치적 입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불교적 자비심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늘 고통받은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이라크를 공격한 부시 대통령에게는 “고통을 준 만큼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2001년 미국 뉴욕의 9 · 11 테러 이후에는 현지에서 10일간의 단식을 이끌며 희생자와 가족들을 위로했다.

그는 “고통을 회피하지 말고, 고통의 원인을 직시하고, 이해하는 게 수행”이라며 “고통을 통해 (상대에 대한) 이해와 자비를 가질 수 있으며, 이해와 소통을 통해 평화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상대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서로 소통하라는 것이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나기에 더욱 아름답다. 그도 음유시인이거나 명상가이기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쟁 체험 속에서 세상에 평화의 꽃을 싹 틔우기에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플럼빌리지의 첫 계율은 ‘모른다’다. 두 번째 계율은 ‘지금 알고 있는 지식이 언제나 변함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는 것이고, 세 번째 계율은 ‘남들에게 자신의 관점을 권위나 교육, 선동이나 돈을 통해 강요하지 마라’는 것이다. 그는 “불교 체계도 수행을 이끌어주는 수단일 뿐,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며, 인간이 당면한 모든 문제에 대해 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며 “불교가 완벽하다거나 오류가 없는 교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 자신만 옳고 타인은 그르거나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누구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낳아 평화를 깨고 갈등과 폭력을 낳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틱낫한이 방한 기간 중 가장 힘주어 말한 것도 평화 메시지였다. 그는 당시의 국제적 이슈였던 이라크 공격 반대와 한반도 화해 방법 등 줄곧 ‘평화’를 얘기해 왔다. 그의 ‘걷기 명상’도 개인과 세상의 평화를 이루려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었다.

그는 여러 번의 강연에서 줄기차게 “일상 속에서 평화를 매일 자라나게 할 수 있다”며, 그 방법이 “이해심과 자비심을 자라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서로 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에 몰이해와 적의가 생기는 것”이라며 “자신, 상대와 소통함으로써 이해심과 자비심이 생기고, 자신과 세상이 평화로워질 수 있다”고 설파했다.

 

3. 화의 치유자

틱낫한이 한국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화》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였다. 화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쉽고도 자비심이 가득하다. 우리는 화가 나면, 한시바삐 그 화를 내쫓으려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틱낫한은 “화는 보살핌을 간절히 바라는 아기”라고 말한다. 부엌에서 일하다가도 아기가 우는 소리가 들리면 어머니가 하던 일을 멈추고 아기를 달래러 달려가듯이 마음속에서 화가 차오를 때도 바로 자신에게 돌아가 화를 달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화를 주위 사람들에게 쏟아부어 자신과 주위를 모두 고통스럽게 하지만, 화가 났을 때 아기를 끌어안듯이 화를 끌어안고 10분이나 15분쯤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고, 걸음걸이를 자각하다 보면 화에 대한 깨달음이 일어난다고 가르친다.

불교가 화의 원인을 내적인 것에만 방점을 찍는 것과 달리 그는 좀 더 현실적인 화의 원인을 밝혔다. 즉 좁은 케이지에 갇혀서 스트레스를 받은 닭고기와 그가 낳은 달걀, 또 열악한 사육환경에서 길러진 돼지 등의 고기를 먹음으로써 화가 우리에게 전이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이 아니라 먹는 것, 살아가는 방식 모든 것이 화와 직결되어있다는 것이다.

 

4. 걷기와 설거지, 일거수일투족의 명상

우리는 오래도록 앉아 있는 것이 명상이고 참선이고 깨달음의 유일한 길인 것처럼 여겨왔다. 오랫동안 앉아 있을 수 있는 선승을 ‘절구통 수좌’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틱낫한은 좌선만을 명상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 함께하는 명상엔 좌선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삶의 매 순간, 명상을 하도록 안내했다.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는 마음이 ‘깨어 있는 마음’이다. 걱정과 불안, 망상에 한눈을 팔지 않고, 마음을 호흡과 발밑에 집중하라. 온전히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라. 온갖 생각과 함께 방황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하는 일에만 집중하라. 그러면 걱정과 불안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다”

틱낫한은 “‘지금 여기’가 정토요 천국이다”라고 했다. 그의 안내대로 앉아 있을 때는 숨에만, 걸을 때는 걸음에만, 밥을 먹을 때는 먹는 데만 집중하다 보면, 마음과 행동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행동에 온전히 집중해 ‘지금 여기’에 머무르게 된다.

플럼빌리지에서는 숙소나 식당에 갈 때도 숨을 들이쉬고 두 발걸음을 걸으며 “바로 지금, 바로 여기”라고 속으로 새기고, 숨을 내쉬고 두 발걸음을 걸으며 “나는 도착했네, 여기가 고향이네”를 되뇌도록 한다.

망상 속에 방황하지 않고, 매 순간 ‘지금 여기’에 온전히 도착함을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셈이다.

틱낫한이 이끈 명상에 참가한 사람들은 “이렇게 쉽게 깨어 있을 수 있느냐”며 감격해했고, “수행을 힘들게만 생각했는데, 호흡과 걸음을 통해 아주 쉽게 평화로워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고 말하곤 했다.

플럼빌리지는 특히 엄격한 보통 사찰들과 다른 자유분방함이 독특하다. 수백 년 된 보리수와 곳곳에 그늘을 드리우는 대나무숲, 스님들과 함께 탁구를 하거나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거나 해먹에 누워 늘어지게 잠을 자는 수련생들로 사찰과는 다른 분위기가 연출된다.

틱낫한이 직접 진행하던 매일 오전 법회에선 법당 밖에서 다리를 펴거나 누워서 법문을 듣는 참여자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길에는 차가 많다. 아이에게 관심을 갖지 않으면 언제든 차에 치일 수 있다. 아이를 보호하려면 아이와 항상 함께 있어야 한다. 어린아이와 항상 함께하는 것이 수행이다. 여러분은 자신의 ‘수호천사’가 되어야 한다. ‘깨어 있는 마음’이 바로 수호천사다.”

틱낫한이 수련회에서 안내하는 좌선과 걷기 명상은 선불교적 전통이라기보다는 근본불교의 위빠사나(관찰)의 범주로 보였다. 위빠사나는 불경인 《대념처경》에 따라 좌선과 행선(걷기)을 번갈아 하며 사념처(몸, 마음, 감각, 진리)에 집중하는 수행이다. 대부분의 불교 수행은 그 초기 수행인 위빠사나의 변형과 발전으로 볼 수 있는데, 틱낫한의 수행도 위빠사나를 현대화한 것으로 보였다. 틱낫한의 수행은 위빠사나의 관찰처럼 세밀하지는 않다. 그 대신 대상에 집중하는 ‘깨어 있는 마음(팔정도의 정념)’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15분마다 종을 울리고,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호흡을 관찰하게 한다. 매사에 정신없는 현대인들을 깨어 있게 하기 위함이다.

위빠사나나 화두선은 오직 진리만을 추구하는 비타협적인 자세로 깨달음을 향해 가기에 ‘목적 지향적’이다. 그래서 수행 분위기도 삭막해지기 쉽다. 이에 반해 틱낫한의 수행은 일상의 삶에서 바로 이 순간 번뇌로부터 벗어나고, 자유롭고 평화롭게 하는 데 초점을 둔다. 그 과정이 고행이 아니라 평화롭고 아름다워 고행을 싫어하는 현대인들이 쉽게 다가서게 한다.

또 위빠사나나 화두선 등이 개인 수행에 치중하는 데 비해 그의 삶과 가르침은 늘 세상의 고통과 함께했다. 그는 ‘나와 세상’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것을 가르쳤다. 그 가르침이 세상의 생명과 평화를 위해 반전 평화의 기운을 북돋우는 점에서 ‘대승적’이라고 할 수 있다.

 

5. 열린 종교관

플럼빌리지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2003년 플럼빌리지에 참석해 어떻게 불교 명상 수행처에 예수의 사진을 걸어두었냐고 물었다. 그러자 틱낫한은 “서양 스님들은 유대교나 기독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불교에 귀의해도 그 종교에 대한 애착이 있다. 이들에게 자기 종교를 버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자기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 불교를 공부하라고 한다”고 했다. 크리스마스 때는 플럼빌리지를 찾은 방문객들이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곤 한다. 그만큼 플럼빌리지엔 종교적 벽이 없다. 틱낫한은 “불교를 이해하면 기독교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고, 여기서 수행한 뒤 자기 종교로 돌아가 깊이 탐구하면 불교와 비슷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플럼빌리지에선 하느님의 왕국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한다고 가르친다”고 전했다.

《기도》라는 책을 보아도 틱낫한의 남다른 종교관을 알 수 있다. 그는 불교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자를 만날 때도 ‘기도하라’고 하는데, 가끔씩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며 ‘기도를 하면 효과가 있긴 있는 거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또 10여 년 전 비구니 제자 두 명에게 가톨릭 수녀원을 방문케 했는데, 거기서 돌아온 비구니들은 ‘수녀님들은 예수님을 완전히 믿고 모든 것을 의탁했다’며 ‘불교도는 모든 것을 자력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배웠는데, 가끔은 그것이 너무 피곤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틱낫한의 《기도》는 그런 의문들에 대한 답이다.

“우리는 신과 서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신의 의지가 우리 자신의 의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변화하고자 한다면 신도 이를 막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기도란 내 안의 위대한 힘을 깨우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그는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의 각도가 변하면, 보이는 대상 역시 변화한다”며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가 변화되면, 신의 의지 역시 변화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행한 과거 카르마(업)의 결과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신과 우리가 둘이 아님을 말한다.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는 예수의 연속이며, 모든 불교도는 붓다의 연속이다.”

그는 “단지 머릿속의 관념적인 대상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실존하는 그들 본성에 기도하는 것”이라며 “자신과 대상의 단일함을 이해할 때, 기도는 한결 깊어지고 효과는 강력해진다”고 한다. 틱낫한은 기도가 효과를 낼 수 있는 필수조건은 바로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 에너지를 내는 것이라고 가르쳐 준다. “‘마음’이라는 발전소에서 나온 에너지가 외부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6. 불교의 현대화

틱낫한이 방한했을 당시 마지막으로 비중을 둔 것은 ‘새로운 비구계’였다. 그는 중앙승가대학 강연에서 ‘참여불교’의 선구자로서 오랫동안 승가 공동체의 청정한 유지와 화합을 고민해온 결과물을 담은 계율 개정안을 발표했다. 비구계는 2,500년의 250개 조항 그대로지만 지금은 당시엔 없었던 자동차, 컴퓨터, 비디오 등이 생겨나고, 사회 풍조도 크게 달라져 변화에 따른 구체적인 지침의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 석가모니도 열반 때 ‘소소한 계율은 버리라’고 한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새 비구계는 ‘살생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 등 원래 계율을 존중하면서도, 이 시대에 승려들이 접하는 것들에 대한 계율을 제시했다. 비록 현대화한 계율이라지만 새 계율은 승려들에게 요구하는 엄격한 그의 기준이 엿볼 수 있다.

이 계율은 △비싸고 좋은 차를 소유하지 말 것 △이성과 단둘이서 자동차를 타지 말 것 △세속적인 필름과, 음악, 전자게임을 소유하지 말 것 △운동경기나 세속적인 영화 · 공연을 보지 말 것 △담배를 소지하거나 피우지 말 것 △부모나 스승, 친구에 대한 은혜를 부인하지 말 것 △세속적인 소설을 갖거나 읽지 말 것 △가사와 장삼을 세 벌 이상 지니지 말 것 △주식을 사거나 투자하지 말 것 등이다.

틱낫한은 다섯 가지 마음 다함 훈련법과 그에 준한 세 가지 항목을 추가해 여덟 가지 실천 항목을 만들었다 △삶에 대한 경외심 △관대함 △올바른 성생활 △주의 깊게 듣고 상냥하게 말하기 △올바른 소비 △소박하고 정결한 생활 △소박한 침실 △식사 때를 지킴이다.

 

7. 참여불교 운동

틱낫한이 석불에 갇혀 있는 붓다와 불교에 숨을 불어넣어 현세를 정토세상을 만들기 위해 들고나온 것이 참여불교 운동이다. 베트남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외세에 오랫동안 짓밟혔다. 더구나 틱낫한이 출가한 이후 베트남 전역이 전쟁에 휩싸여 출가 수행자도 세상을 떠나서 은둔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승려들도 사원 안에서 명상만 해야 할지, 아니면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대승적 활동에 나서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찍부터 절을 떠나 일반 대학에서 공부할 만큼 세상에 눈을 뜬 틱낫한은 1960년대 초반 베트남에서 청년사회봉사학교를 설립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비폭력에 근거한 사회봉사 활동을 전개했다. 또 사회운동가와 학자, 교육자들과 함께 사이공에 반한불교대학을 설립하고, 라보이출판사를 통해 비폭력 평화를 전하는 정기간행물을 발간했다. 또 1966년엔 ‘오더 오브 인터빙(Order of Interbeing)’을 설립했다. 인터빙이란 세상 만물과 모든 일이 서로 연관되고 상호 의존해 공존한다는 뜻으로 틱낫한이 창안한 말이다.

그는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베트남전쟁 종식을 위한 비폭력 평화운동을 전개하며, 참여불교(Engaged Buddhism)란 말을 만들어냈다. 불교도 은둔해서 명상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비폭력 평화의 세상을 이루기 위해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참여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종교를 끌어들이는 역사적 종교 위선자들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그는 우리가 지금 적대하고 있을지라도, 적이 바로 나임을 깨닫도록 이끌고 있다. 틱낫한의 대표 시 가운데 하나인 〈부디 나를 참이름으로 불러다오〉는 끝없는 대립과 갈등과 다툼과 살육이 어디로부터 비롯되며, 어디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지 인류의 가슴속 깊이 울림을 전해준다.

 

나는 깨끗한 연못에서
행복하게 헤엄치는 개구리다
그리고 나는 소리도 없이
그 개구리를 삼키는 물뱀이다

나는 대나무 막대기처럼
뼈와 가죽만 남은 우간다 어린이다.
그리고 나는 우간다에
살생무기를 팔아먹는 무기 판매상이다.

나는 작은 배로 조국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가 해적에게 겁탈당하고
푸른 바다에 몸을 던진
열두 살 소녀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해적이다.
볼 줄도 모르고 사랑할 줄도 모르는
굳어진 가슴의 해적이다.
……부디 나를 참이름으로 불러다오
그리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내 가슴의 문을
자비의 문을
활짝 열 수 있게 해 다오.

 

조현 cho@hani.co.kr

한겨레신문 사회부, 정치부, 문화부 기자, 논설위원 등 역임. 주요 저서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세계 어디에도 내 집이 있다》 《인도 오지 기행》 《은둔》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 등이 있다. 〈한겨레〉 종교전문기자. 수행 · 치유 웹진 ‘휴심정’과 유튜브 ‘조현TV 휴심정’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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