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포스트휴먼 시대의 도래와 불교

1. 서론

김봉률 동국대 경주캠퍼스 교수
김봉률 동국대 경주캠퍼스 교수

포스트휴먼이라 하면 대개 사이보그나 안드로이드, 자율주행차, 군사화된 드론 들을 떠올린다. 디지털 기술로 만든 이들이 주체가 되고 인간은 배제된다고 생각한다. 이건 산업의 이익을 갈구하는 기술 찬양론자이든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기술 공포론자들이든 우리에게 억지로 구겨 넣은 상상력에 불과하다. 오히려 인간 대다수를 배제하려는 거짓이다. 이 글은 가부장제 문명 속에서 오랜 세월 존재하지 않았던 여자가, 여성적 원리나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포스트휴먼 주체가 되어 인신세(人新世)인 이 시대를 구제하는가에 관한 정치철학이자 윤리학에 관한 것이다. 

라캉은 ‘여자는 없다’고 했다. 그의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꽤 유명하다.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도 여자가 없다. 신에서 천사, 천사에서 남자, 남자에서 동물로 이어지는 ‘존재의 사슬’에서 여자는 영혼과 이성이 부족한 존재였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 여자는 페니스가 없는, 해부학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로서 생물학적으로도 함량 미달이다. 남자는 육체적으로도 완벽한(비트루비우스적), 영혼과 이성의 주체로 인간 범주의 대표자였다. 

포스트휴먼 시대, 역설이 일어난다.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는 포스트휴먼의 핵심을 탈-인간주의(휴머니즘)와 탈-인간중심주의로 규정한다. 휴먼이 사라지고 있다. 인간의 대표인 남자가 없다.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배제되고 부재였던 존재들이 일어나고 있다. 휴머니즘은 서구의 백인 중산층 남자를 주체로 보았다. 이와 달리, 휴머니즘 시대에 배제되었던 타자들, 성차화된 타자(여성), 인종화된 타자(토착인) 자연화된 타자(동물, 환경 즉 지구)들이 포스트휴먼적 주체가 된다. 

포스트휴먼 시대나 원시불교 시대는 자기의식의 시대이다. 포스트휴먼 시대를 긍정적으로 철학적으로 사유하기 위해서 우린 과거 2,500년 전 축의 시대 붓다의 철학과 수행에서 전환적 사유를 배우고자 한다. 카렌 암스트롱은 《축의 시대》에서 철기의 보급으로 인간이 끝없는 전쟁을 통해 살육과 파괴를 일삼던 시대에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고 인간존재에 대해 질문을 하기 시작한 시대로 그린다. 유행자(流行者) 사문들과 함께 붓다는 지혜와 자비라는 여성적 원리로써 살해와 파괴의 전사적 에토스를 아힘사(불살생)와 평화의 에토스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포스트휴먼 시대는 이와 유사하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이 만든 멸종의 위기를 자각하고 18세기 산업혁명 이후의 자본주의 시대를 “인신세”라 부른다. 베르나르 스티글러(Bernard Stiegler)에 따르면, 인신세는 이익 “계산이 모든 결정 기준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시대”이다. 가파른 경제적 이익 추구가 다른 생물종의 멸종을 가속화시켰는데, 알고 보니 이제 자동화와 알고리즘으로 생물종으로서의 인류가 멸종할 수도 있다는 걸 스스로 의식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렇게 나란히 닮은꼴의 두 시대에서 여성적 원리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돌봄과 치유라는 여성적 원리로 자동화 사회를 탈자동화 사회로의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고 본다. 자동화 사회는 무돌봄 사회이다. 인간은 기술의 처분에 맡겨진다. 축의 시대에 전쟁과 급격한 도시화가 만들어낸 엔트로피를 지혜와 자비, 그리고 열반 사상으로 부(負)엔트로피를 생산하여 살 만한 세상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포스트휴먼 시대 자동화로 얻은 시간을 탈자동화를 통한(인간과 동물뿐 아니라 모든 비인간적인 것 포함하여) 지구의 거주자들에 대한 돌봄 능력에 투자함으로써 가파른 이익 추구로 인한 엔트로피를 낮추는 부엔트로피(negentropy)의 생산을 통해 기후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환의 시대, 전환적 사유로서 여성적 원리는 성차/섹슈얼리티에서 도출될 수 있다고 필자는 본다. 여기서 젠더가 아니라 성차가 재사유된다. 유럽문화에서 그리고 주체성의 철학에서 ‘주체-구성의 주요 축으로서의 섹슈얼리티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된다. “성차가 정체성과 사회적 관계의 형성에 매우 중요한 중심축인 것은 바로 섹슈얼리티의 역사적 중요성” 때문이다. 섹슈얼리티를 통해서 차츰 이론적 사유, 즉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동하고 세계를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로 나아간다. 불교의 사유와 포스트휴먼의 사유가 만나는 지점은 관계적 주체론이다. 불교의 연기 사상과 무아론을 포스트휴먼의 관계적 주체와 관련하여 살펴보고 돌봄과 연대의 윤리가 나옴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2. 보철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기술혁명, 그리고 엔트로피

포스트휴먼 시대나 원시불교시대는 나란히꼴 시대로 볼 수 있다. 이 두 시대가 중요한 이유는 기술의 발전이 가히 혁명적이라 할 정도로 이루어지면서 효율과 부의 증진을 넘어 인류 자체의 존망이 위태로운 시대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른 생물과 달리 유년기가 유난히 길 뿐 아니라 털이나 두터운 가죽 없이 바로 대기에 노출되며 맹수들을 상대해야 하는 연약한 피부를 가진 종이며 이빨이나 손발톱, 뿔 들 공격이든 방어이든 대응할 무기도 몸에 장착되지 않은 존재이다. 인간은 이런 존재론적인 허약성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도구나 기술의 개발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즉자적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비극적 존재이지만, 도구나 기술에 필연적으로 의존해서 살아가는 보철적 존재이다.

이것은 인간의 인식과 사유에도 해당한다. 절름발이에게 인공 다리가 필요하듯이 인공물인 ‘정신의 목발’ 역시 필요하다. 인간 주체의 인식과 사유가 인간의 이성이라는 화수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기술적 도움으로 진행되고 발전된다. 동굴벽화, 문자의 발명, 인쇄술이나 CD나 usb 등 외부화된 기록장치 기술 덕택이다. 

하지만 철학은 주체의 인식과 이념만을 중심적인 사유 대상으로 삼았고 고대사회 이래 노예가 담당해온 노동과 기술은 사유 대상에서 배제되었다. 그래서 스티글러는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는 하이데거의 존재-망각이 아니라 기술-망각이었다고 한다. 이에 육휘(허욱)는 기술은 인간이 환경과 조우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우주론적이고 존재론적인 것이므로 코스모테크닉스(cosmotechnics)적으로 봐야 한다고 한다. 이제 기술-물음이란 단순히 기술학의 분과 속에만 존재하는 기능요소가 아니라 존재-물음보다 더 심오한 ‘조건’이 된다. 따라서 철학은 마땅히 기술-물음을 통해 새로운 형이상학, 그리고 새로운 코스모테크닉스를 창조해야 한다. 

이러한 보철적 인간존재론과 기술혁명의 문제는 포스트휴먼 시대의 디지털 컴퓨터와 인공지능 기술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기본적 관점을 제공해준다. 산업혁명을 통한 근대성은 사실상 기술의 도움으로 이루어졌지만, 이 기술을 사유와 정치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스티글러의 “테크놀로지의 무의식” 개념을 빌려서 육휘(허욱)는 기술의 진화를 사유 대상으로 취급하길 거부하거나 망각한 결과 기술에 대해 사유할 능력을 상실했다고 한다. “인간 자체가 그 거대한 기술적 네트워킹의 한 지절이 되어 세계를 총체적으로 사유할 능력을 상실”했다고 본다. 이런 상황에서 육휘(허욱)는 윤리의 문제보다는 “상상력을 포함한 지성”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육휘(허욱)는 “코기토에게 세계를 착취할 수 있는 의지와 자기 확신을 부여한 것이 이 테크놀로지적 무의식”이라고 한다. 과학자들과 투자자들이 우주개발 프로젝트를 실행시키는 것은 자신들의 계산 이성에 대한 확신에 차서 하는 것이지 그들의 행동이 지구의 인간과 비인간 모두를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유할 능력의 빈곤과 상실은 우주여행과 화성 개발을 전면에 내세우는 일론 머스크의 언행과 기행에서 보인다. 일론 머스크의 광대 같은 우스꽝스러운 행동 이면에는 오로지 투기적 버블을 통한 이문 추구가 본질이며 동시에 디지털 기술의 포스트휴먼 시대에 사유 혁명과 정치 혁명, 그리고 새로운 윤리학의 필요 급박함이 은폐되어 있다. 

다음 문제로 기술혁명으로 야기한 엔트로피의 급속한 증가가 생태계 파괴, 기후 위기 들을 불러일으키며 인간이 스스로의 서식처를 파괴해나가면서 멸종으로 나아가는 것을 살펴보자. 기술혁명은 필연적으로 엔트로피를 급속히 증가시킨다.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는 물체가 열을 받아 변화했을 때의 변화량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태양열에 의해 생명의 창조가 계속 일어나긴 하지만 지나친 자연 파괴로 엔트로피가 계속 증가하다 어느 순간 열(혹은 에너지)이 더 이상 이동하지 않는 열평형에 도달하게 되어 이른바 우주가 종말을 맞게 될 수도 있다. 

지금 시대를 인류가 인신세라고 부르고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인류의 멸종 가능성을 조심스레 예측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스티글러는 디지털 자본주의가 엔트로피의 더더욱 가파른 증가를 불러올 것이라 보고, 인간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엔트로피의 증가를 늦추고 부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대적 임무라고 보았다. 불교의 열반 사상은 가열된 엔트로피를 감소시키고 부엔트로피를 늘리자는 대표적인 전환적 사유이다. 

폴 셰퍼드(Paul Shepard)는 《자연과 광기》에서 “인간은 왜 스스로의 서식처를 파괴하는가”라고 물었다. 기술혁명이 진보의 속도를 엄청나게 가속시키는 대신 자연과 환경은 더 빠른 속도로 황폐해진다. 이건 개발자나 개별 자본의 비양심성 때문에 그러한 것이 아니라 보철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주어진 기술혁명의 숙명이다. 그래서 인류는 이성이나 영혼이 아니라 기술혁명에 대한 사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제 자본 비판이 아니라 기술 비판이다. 포스트휴먼 시대를 인신세라 하고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동안 금융자본의 지구화를 통해 이제는 더 이상 선진국의 엔트로피를 전가할 미개발 지역들이 급속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철기를 다루는 전사나 생산 노예인 농부의 처지에서 벗어나 유랑하며 지혜와 영적 진리를 갈구하는 사문들, 그리고 비구와 비구니 무리들에서 엔트로피를 낮추는 네겐트로피적 행위를 발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디지털 기술혁명 역시 파르마콘이다. 엄청난 풍요와 부의 축적 속도보다 더 파국적인 엔트로피의 증가를 막고 디지털 알고리즘의 자동화를 무효화시키는 탈자동화의 전환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전환기적 사유의 핵심이 된다.

 

3. 축의 시대, 불교가 지혜와 자비로 답하다

1) 철기의 보급과 문자혁명과 엔트로피 폭증

기원전 6~7세기, 붓다의 시대인 축의 시대는 씨족사회의 원시 공화제와 부족국가의 전제 군주제가 대립, 갈등하다가 후자가 전자를 삼키는 시기이다. 이 시기가 그렇게 격렬하게 먹고 먹히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든 것은 고대사회 최고의 기술혁명이라 할 수 있는 철기의 보급 때문이다. 기원전 8세기경에 이루어진 철기의 도입은 포스트휴먼 시대의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기술보다 더 큰 게임 체인저였을 수 있다. 

기원전 6세기가 끝날 무렵 가장 크다고 손꼽히던 곳은 인도 남동부의 마가다와 남서부의 코살라였다. 붓다는 히말라야 기슭의 카필라성(가비라성)을 중심으로 한 석가족(釋迦族)의 작은 산촌 부족장의 아들이다. 석가족은 코살라에 먹히고 코살라는 마가다 왕국에 먹힌다. 당시 16개의 나라들이 마가다 왕국 하나로 흡수되었다. 이런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붓다는 왕국의 부침, 권력의 무상함, 생명의 허무함 들을 무시로 보게 된다. 살아서 자신의 나라가, 자신의 아버지가 패망하는 걸 지켜보기도 한다. 붓다가 출가를 감행했을 때, “그 어깨에 걸머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히 자기의 문제 자기의 고민”이었다. 

철기의 보급은 전쟁에서 살육과 약탈의 효율을 높여 정복의 속도를 빠르게 했을 뿐 아니라, 짧은 시간 내에 울창한 삼림을 곡창지대로 만들며 이를 통해 도시문명을 빠른 속도로 건설해갈 수 있게 했다. 마가다 왕국이 승리하자 전제 왕국의 부흥과 함께 도시 상업경제로 산업구조의 전환이 일어난다. 원시적 자본주의가 발달한다. 

경전에서 장자(長者)로 번역되는 바이샤들은 금융업과 상업에서 치열한 경쟁을 했으며 탐욕은 부에 대한 욕망을 부추겼고 경제 역시 가파르게 성장했다. 그 당시의 원시 자본주의는 21세기 포스트휴먼 시대에 알고리즘으로 작동되는 주식시장을 장악한 디지털 순수자본주의마냥 가파르게 발전하였다. 암스트롱은 “가축 약탈이 경제의 주축을 이루던 시기보다 삶은 훨씬 더 폭력적이고 무시무시하였다”고 한다. 신분의 급격한 변동과 부의 양극화, 일반 백성들의 노예 수준의 삶 그리고 황폐화되는 도시의 환경들. 이런 것들은 엔트로피가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철기의 보급이 정복 전쟁의 완성과 도시산업경제로 이끌었다면 ‘정신의 목발’이라 할 문자의 발명 역시 혁명적 진보를 일으켰다. 디지털 시대에 우리의 의식을 외부에 저장하기 위해서 usb나 컴의 메모리와 같은 기술적 장치를 사용하는데, 그 당시의 문자혁명은 빅데이터와 디지털 알고리즘을 훨씬 넘어서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문자의 발명은 피비린내 나는 살육 전쟁의 시대가 왜 그렇게 ‘축의 시대’라는 전환기를 불러왔는가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된다. “궁극적인 추상화에 다름 아닌 문자문화로 인해 복잡한 관념적 사상 체계”가 출현했고 글을 알고 있었던 “영적 지도자들을 고도의 의식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동력”이 되었다. 아마 이런 문자 기록의 역할이 자기의식의 시대를 만들고 인간이 스스로에 대한 존재 질문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의문이 생긴다. 축의 시대에 ‘왜 이 영적 지도자들의 메시지에 그토록 자주 여성 혐오사상이 따라다니는가?’ 하는 것이다. 대답은 “문자언어에는 본질적으로 반여성적인 어떤 것이 내재한다. 문자언어에 사로잡힌 남자들은 성차별주의자”가 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붓다는 살아생전 평등의 원리를 설파했다. 문자문화가 혁명적 진보를 일으켰던 시대에 붓다도 소크라테스처럼 문자언어를 멸시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자신의 가르침을 제자들이 문자로 기록하지 못하게 했다. 붓다의 교설은 간명했으며 설법과 선문답을 더 좋아했다. 글을 아는 극소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말로써 설법으로 계급을 가리지 않고 그들과 대화를 통해서 대기설법(對機說法)으로 자신의 지혜와 자비심을 전파하고자 했다. 

2) 전환적 사유와 불교의 여성적 원리, 네겐트로피를 지향하다 

철기의 보급과 문자혁명은 브라흐만의 세습적 카스트 제도를 부분적으로 흔들기는 했지만, 오히려 부의 양극화와 불평등을 가져왔다. 왜 이런 기술혁명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부의 축적과 명예를 위해 살지 않고 출가자로서 유행하며 탁발 걸식을 하는 거대한 지적 영성적 흐름을 만들어냈을까?

치명적 철기 무기로 전쟁에서의 살육뿐 아니라 사냥에서, 그리고 가축의 도축에서, 삼림의 벌채에 이르기까지 파괴의 속도가 가속화되고 있다. 그건 디지털 시대의 ‘파워 법칙의 역학’처럼 승자독식의 세계이다. 도탄에 빠진 사람들, 개탄하는 현자들, 무언가 역전의 흐름이 일어난다. 내면의 영적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공유하기 시작하면서 전환의 흐름이 만들어진다. 그건 전 세계적으로 번진 아힘사(불살생)의 외침이다. 

당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자이나교에서 아힘사(불살생)를 통한 해탈은 고귀하고 영웅적인 행위였다. 역전이 일어난다. 전사들의 에토스가 바뀌고 있다. 전쟁에서의 살해의 흥분과 명예, 공훈에 대한 욕망이 아니다. 자이나교의 금욕주의자들은 자신의 ‘호전적인 본능과 싸우고, 깨닫지 못한 모든 사람의 특징인 공격성’으로 일어나는 나쁜 결과를 막아내는 전사였다. 이들은 걸을 때마다 행여나 벌레를 심지어 이끼를 밟을까 봐 주위를 살폈고, 불을 피우지도, 땅을 파지도 않았다. 이들은 일상생활 하나하나에 모두 공감하며 그런 일상적 제약이 바로 영웅적인 제약이라 생각했다. 고타마 역시 이런 영적 분위기에서 성장하면서 그의 천성이 더 예민해지고 자비로워졌다. 어린 시절 복숭아나무 그늘에 앉아 쟁기질하는 밭에서 무수한 벌레들과 연약한 풀들이 죽어 나가는 걸 보면서 고타마는 살육에 대한 슬픔과 깨달음에 대한 해방의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고 한다.

이런 새로운 전환적 사유와 그 흐름을 주도하는 현자들과 수천의 사문들은 전사나 상인, 농부가 되지 않고 걸식을 하고 무소유를 명예로 여기는 대역전을 주도했다. 이것이야말로 철기와 문자혁명의 엔트로피를 낮추어 살 만한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혁명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바이샤도 크샤트리아도 왕과 왕족들도 이들을 후원하며 지지했다는 것이다. 바이샤들은 불교에 돈을 대고 왕과 크샤트리아들은 붓다의 전도를 안전하게 보호했다. 기술은 약과 독을 모두 가진 파르마콘이다. 기술을 거부할 수는 없지만, 기술의 독을 버리고 기술의 약을 나누자는 것이다. 즉 기술의 발전으로 얻은 그 풍요를 기술의 독을 줄이고 사용 방향을 전환하는 데 투자하고 그런 지혜와 영적인 흐름을 사회 전체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흐름을 만들어내는 원리가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요구되는 품성이자 원리였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붓다는 기존의 남성 성직자에게서 권력을 박탈하길 원했고 붓다의 본래 가르침에는 비폭력, 만인의 평등, 보편적 사랑, 수평적 사회계층과 같은 수많은 “여성적 모티프들”이 존재한다. 모든 불교 종파들의 모토는 지혜와 자비이다. 이 두 가지 개념은 전통적으로 “여성적 원리와 관련”되어 있다. 

니체가 내세우는 덕들과 달리 불교가 내세우는 덕은 부드러운 덕이라고 박찬국은 말한다. 니체가 귀족적, 남성적, 영웅적, 호전성을 생명의 의지와 연결시켜 찬미한다면, 불교가 지향하는 덕은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인 사무량심(四無量心)으로 자애와 사랑, 연민과 보살핌, 중생의 기쁨을 함께하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여 좋고 나쁨에 휘둘리지 않는 평정의 마음이다. 붓다가 내세운 이러한 여성적 원리는 첨예한 대립을 완화시키고, 전사적 에토스를 여성적 모성적 자비와 연민, 책임의식으로 전환하여, 단순히 종교적 치유기능이 아니라 인간 존망의 위기를 진정시키는 사상적 운동이자 실천 지침이라 할 수 있다.

 

4. 포스트휴먼 시대, 탈자동화와 섹슈얼리티

1) 포스트휴먼 시대, 탈자동화로 답하다

포스트휴먼에 관한 논의는 인공지능, 로봇공학, 유전공학 들에 대한 것에서부터 테크노크라트적 유토피아에서부터 트랜스휴머니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대체적으로 기술혁명으로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오고 있다는 점에서 앞에서 살펴본 철기의 보급과 문자혁명의 시대인 축의 시대와 나란히 닮은꼴이다. 시몽동은 특정 기술이 유용의 한계를 넘어 과도하게 발달하는 이러한 현상을 과진화(hypertelie)라고 하였고,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2014년 《인디펜던트》 공동기고문에서 인공지능은 “인류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고 또는 최악의 일”이므로 공포를 느껴야 한다고 하였다.

현대자본주의는 데이터기술을 통해 순수하게 컴퓨터적인 것이 되었다. 구체적인 인간의 노동과 정신을 떠나 자동화가 된 것이다. 이 자동화는 고성능 컴퓨터 처리로 만들어진 빅데이터를 통해 알고리즘적 논리로 이루어진다. 인간이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인간의 노동과 정신을 떠나 순수하게 컴퓨터적인 것이 되기까지 자본주의는 지속적으로 기술혁신을 이루어왔다. 이런 기술혁신을 기술 진화론적 관점이나 생산성 향상의 관점에서 좀 벗어나 인간의 존재 양식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에 중점을 두어 스티글러의 이론을 바탕으로 설명해보겠다.

18세기 산업자본주의는 인간이나 말 들 살아 있는 생명체의 힘에서 독립된 동력기관을 발명했다. 오랫동안 기술을 연마한 장인을 비롯한 숙련노동자들의 ‘노동의 노하우(know-how)’는 필요 없어졌고 노동자들은 단순 미숙련 노동을 하는, 노동 노하우의 상실과 빈곤화가 이루어졌다. 농부들이 토지에서 자유로워졌다(독립되었다, 박탈당하였다). 몸과 기술을 팔 수밖에 없는데 동력기관과 자동틀의 발명은 노동의 기술 축적마저 허락하지 않았고 노동자들은 분업으로 부품화되어 갔다. 

20세기 초반에 자본주의 생산의 고도화에 따른 잉여를 해결하기 위해 소비주의가 대세를 이루었다. 스스로 살아가면서 이루어가는 ‘삶의 노하우’를 축적할 기회를 상실했다. 스티글러의 말대로, 노동에 이어 ‘삶의 노하우의 상실과 빈곤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밥 짓기, 옷 짓기, 집짓기 들은 자본의 상품 교환관계에 들어가지 않고 스스로 해서 살아갔다. 여자들이 주로 무임으로 담당하긴 했지만, 가사노동은 살림 노동으로 삶의 주요한 축을 형성했다. 남자들이 집을 짓거나 동네의 다리를 놓거나 고치기도 했다. 포디즘-케인즈주의적 타협은 기술혁신으로 인한 생산성 향상의 노동 몫을 증진시켰고 임금 조건의 개선으로 이루어진 노동자들의 구매력 향상은 선순환구조를 이루는 듯했다. 하지만 이것은 소비를 미덕으로 보고, 소비주의에 매몰됨으로써 삶의 노하우를 상실하게 했다. 이를 스티글러는 상징의 빈곤, 즉 감수성의 프롤레타리아화라고 칭한다. 여기서 문화생산자인 TV는 지대한 공헌을 한다. TV의 프로그램은 우리가 골라보는 게 아니라 우리 소비자를 프로그램화하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으로 대변되는 보수주의(신자유주의) 혁명 이후 주주자본주의와 디지털 기술이 본격적으로 결합하게 되었다. 주주자본주의는 주식을 얼마나 가졌나에 따라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1인 1표의 민주주의를 거스르는 것으로 하버마스가 ‘재봉건화’로 지칭할 수 있는 것이다. 68혁명의 취지에 정면 반대하는 보수주의 혁명으로 법인세 감면, 노조 탄압, 실질임금 인하 들 자본의 몫은 급속하게 증가되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빈곤해졌다. 이것이 현대 디지털 자본주의의 자동화 기술을 만들어낸 직접적인 원인이다. 알고리즘 자동화 기술은 무언가 인간의 정신과 의지의 개입이 없는 듯하여서 사람들은 노동자의 몫 배분을 생활비 수준으로 늘리던 포디즘-케인즈주의적 타협이 끝났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었다. 금융자본은 디지털 자본주의를 통해 세계화되었고 이와 더불어 인신세와 기후 위기라는 지구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기술혁신은 기본적으로 부의 불평등에서 비롯된다. 기술이 느림보 발전이 아니라 가파른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본의 투여가 이루어져야 하고 그 전제는 자본의 대규모 집중이다. 즉 대다수의 빈곤과 극소수의 거부(巨富)라는 양극화가 전제된다. 사회 최대의 불안정을 연료로 하여 기술 대혁신이 일어난다. 엄청난 풍요 이면에 자연 파괴와 엔트로피의 파국적 증가가 일어났고 사회적 자연적 유대는 파괴되었다. 

21세기 들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들 ‘소셜’ 네트워크와 함께 메타데이터, 개인정보, 쿠키, 전자 추적 장치 그리고 여러 다른 트래킹 기술들이 등장했다. 이런 기술에 대해 스티글러는 “존재들의 자동화”를 만들어내는 기술이라고 한다. 지속적 규율과 즉각적 커뮤니케이션으로, 일주일 7일 24시간 잠자지 않고 깨어 있으면서 자동적으로 연결되는 24/7 자본주의가 되었다. 요즘 개최되는 멍때리기 대회나 걷기, 명상 요법들은 자동화된 존재의 네트워크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작은 움직임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문제 되는 것은 펠릭스 가타리가 말한 ‘가분체’이다. 가분체는 개체가 여럿으로 나뉘는 것이다. 우리가 넷상에서 쓰는 여러 개의 ID는 우리가 하나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방해한다. ‘존재의 자동화’와 더불어, 각종 생체 정보나 여러 가분체들의 축적물이 데이터은행(센터) 내 적분의 알고리즘으로 처리, 관리되는 ‘기계예속화(mechanic enslavement)’가 된다. 이리하여 자동화 사회에서 우리는 지식과 이론적 작업을 할 수 없다. 오히려 “전반적 망연자실과 기능적 어리석음”으로 몰린다.

엄청난 풍요 앞에서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그리고 로봇에게 맡기고 우리는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동화 사회의 환상 속에서 망연자실하게 살고 있는 우리에 대해 스티글러는 3번째 ‘상실과 빈곤화’를 얘기하고 있다. 이론과 지식의 노하우를 상실하고 가치와 지향점을 잃어버렸다. 지식의 모든 영역(어떻게 살고 행동하고 세계를 이해할 것인가)에서 가치와 지향점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에 주식시장의 알고리즘이나 코인, 부동산 가격 등락을 보는 일 이외에 무엇에 흥미를 느끼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2) 성차/섹슈얼리티와 관계적 주체 

앞에서 인간은 기술의 과진화에 의해 18세기 이후 노동과 삶, 지식의 노하우 상실과 빈곤화에 대해 서술하였다. 이에 대해 섹슈얼리티의 노하우를 상실해가는 디지털 극순수 자본주의에 대한 고찰을 통해 성차/섹슈얼리티가 어떻게 노동과 삶과 지식의 노하우를 되찾는 데 기여할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어보겠다. 그리고 불교의 무아론과 연기론에 나타난 섹슈얼리티와 비교하여 서술하겠다. 그것은 축의 시대와 포스트휴먼 시대가 나란히 닮은꼴인 것과 마찬가지로 초기불교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관점이 포스트휴먼 시대의 섹슈얼리티를 고찰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여자들에게 원하는 게 섹스밖에 없는 상황 속으로 남자들이 가파르게 몰락해가고 있다. 남자가 여자와 상호주관적 정열로 사랑을 나누지 않고 감정소비와 데이트 비용이 싫어서 테크노이브나 리얼돌, 그리고 사이버 섹스, 때로는 매춘을 통해서 오로지 섹스만을 충족하고자 할 때 남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동안의 역사에서 남자들은 가부장으로서 가족 생계비를 책임질 정도로 임금을 받고 승진이나 명예도 가졌기 때문에 자부심과 경제력으로 여자들에 대한 지배와 권력을 누렸다. 여자들에게 그동안 원했던 것이 임신 출산 육아, 살림, 섹스, 간호, 가정 꾸리기, 가정 재산 일구기, 감정노동 들이었는데 이제 남자들은 여자는 필요 없고 섹스 충족만 필요하다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이것이 바로 ‘섹슈얼리티 노하우의 상실과 빈곤화’라 할 수 있다. 여자들은 섹스를 하는 것보다 남자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난다는 걸 환영하기 때문에 기꺼이 감수하고자 한다. 최근 임금 노사협상에서 노동자 측은 가족 생계비를 최저임금의 기준으로 제시하나 사용자 측에서는 독신자의 최저생계비를 제시하고 있다. 자본이 요구하는 남자는 이제 가정의 왕좌에서 내려와 사이버 섹스나 인공지능 혹은 리얼돌과의 섹스를 하고, 배달앱으로 혹은 인스턴트 음식을 사 먹고, 휴대폰이나 컴퓨터로 접속할 때만 존재하는, 상호작용 없는, 투입(input)과 산출(outcome)만이 존재하는 기계(인간)가 되어가지 않는가? 정말 극순수 자본주의화되어 가고 있다. 

그동안 남성과 여성의 성차를 없애려는 방향으로 페미니즘은 여성해방 이론을 쓰고자 했다. 그것은 성적 차이, 즉 성차가 남녀 차별과 여성 억압의 원인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휴머니즘은 남자를 인간으로 보았기 때문에, 여자는 성차 때문에 남자에게 못 미치는 존재로 인간이 아니므로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휴머니즘적인 페미니즘은 성차는 사회구성주의적인 것으로 보는 젠더적 관점을 가진다. 이에 비해 포스트휴먼은 남자만이 인간이던 것을 멈추기 때문에 성차는 남녀 구별이나 차별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이리하여 성차를 긍정적으로 보고자 하는 포스트휴먼적 페미니즘 기획이 대두하게 된다. 성차의 기획 출발점은 여성의 “육체적인 산 경험의 구체성”을 역설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지로 남아 있다. 성차는 여성의 본질주의적 측면인데 성차를 그 몸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며, 여성들의 “육체적 실존, 경험과 다시 연결하려는 의지”이다. 그래서 이 페미니즘 기획은 “상동화, 즉 여성들을 남성적인 사고방식과 실천, 결과적으로 남성적인 가치 집합들에 동화되도록 이끄는 해방주의를 거부”한다.30) 

맛지마 니까야의 《앗쌀라야나의 경》에 따르면 붓다는 “인간은 누구나 월경, 임신, 출산, 수유를 갖고 있는 여인에게서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브라흐만도 마찬가지다. 붓다는 여성의 성차를 긍정하고 들어간다. 붓다는 성 자체가 생물학적 본성이므로 옳고 그름의 문제로 파악해서는 아니 된다고 했다. 남자의 자위행위도 여자가 생리하는 것처럼 생물학적인 것으로 보았다. 

붓다는 평등원리에 따라 남녀의 성차/섹슈얼리티에 대해 철저하게 대극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앙굿따라 니까야(AN. Ⅳ. 57) 《결박과 결박의 여읨에 대한 법문의 경》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의 성립과 한계에 대해 붓다는 설명한다. 여성성은 내적으로 여자의 신체적 특성에 기초하여 행동하고, 교만, 욕망, 소리 치장 들의 정신활동에 탐닉하며 환희하는 만큼, 이와 동시에 여성성은 외적으로 남자의 신체적 특징에 환희한다. 그런데 여자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남성성 또한 여성성과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된다. 불교의 교설인 연기법이나 무아론에서는 성차에 기반한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실체로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차가 문제 되지 않는다.

전재성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이라는 섹슈얼리티가 지닌 대극성의 본질은 특히 윤회 속에 감추어져 있다. 상윳따 니까야의 《어머니 경》 《아버지의 경》 《형제의 경》 《자매의 경》은 붓다가 남녀 고정된 성적 역할이나 젠더 구별에 매몰되지 아니하고, 남자는 남성성을 초월해야 함을, 여자는 여성성을 초월해야 함을 탁월하게 말하고 있다. 오랜 세월 거듭된 윤회에 따르면 일찍이 한 번도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가 아니었던 사람이 없기에 현세에 남성이라고 우월하거나 여성이라고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여성관과 달리 여성 섹슈얼리티의 악마성에 대해서도 평등원리로써 대극성은 관철된다. 앙굿따라 니까야 《여자의 경》에서는 남자의 입장에서 본 여성의 악마성, 즉 부정적인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해 설교하지만, 또한 여자의 입장에서 본 남성의 악마성에 관해서도 앙굿따라 니까야의 《남자의 경》을 통해 언급하고 있다. 

남녀의 본질적인 성차를 인정하지만 사회적 규범으로선 동등하게 보았다. 이런 결론이 나오는 것은 연기론과 무아론이라는 붓다의 혁명적 사유 덕택이다. 무아론은 포스트휴먼적 주체론인 관계적 주체와 연결되고 연기론은 포스트휴먼적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에 조응한다.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붓다의 사유는 시대를 초월하여 ‘이론적 지식의 상실과 빈곤화’라고 스티글러가 지칭한 21세기 초반의 디지털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이론과 지식을 제공하고 있다. 

불교의 연기설은 근대의 제1 과학법칙이라 할 인과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인중무과론(因中無果論)에 가깝다. 붓다가 깨달았다고 하는 법이 바로 이 연기법이다. 이른바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반드시 그것이 생겨날 원인과 조건에 따라 생겨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는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인 원인’이 함께 작용하여 성립한다는 것”이다. 연기법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우리는 자아를 중심에 놓고 주체라 생각하고 그에 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조지프 캠벨이 말하는 “팽창된 자아(inflated ego)”나 에드워드 사이드의 “과도하게 찬양된 자아”로 인해 사물이나 사건의 연기적 사고를 하지 못하고 자아중심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포스트휴먼은 휴머니즘적 자아중심적 주체를 거부한다. 영웅이나 뛰어난 개인이 세계를 움직일 수 있다거나 아니면 신적인 불가항력이라든가 이런 걸 거부한다. 콘텐츠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다양체로 구성된 관계적 주체”이다. 우리가 웹에 접속해서 무언가를 탐색하거나 생산하게 되면, 즉각적으로 어떤 무한한(!) 연결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 연결의 망상 조직에서 급기야 우리를 먹어버린다. 시몽동은 이를 ‘연합환경’이라고 부르는데 붓다가 말한 연기론의 그물망과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붓다의 연기론에는 따라서 자아나 주체가 없다. 비유하자면 ‘세 개의 갈대가 맨땅에 서려고 할 때 서로 의지해야 설 수 있는 것과 같이’ 홀로 독립된 자아는 없다. 무아론이다. 남자가 자신을 남자라고 고집 피울 자아는 없다. 

포스트휴먼 주체도 이와 다르지 않다. 브라이도티 역시 “‘나’(I)라는 종합의 권력은 문법적 필연성이요 …… 파편들의 모음을 함께 붙잡아주는 이론적 허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복수의 주체성이 “산 경험의 상이한 층들을 요청”한다는 브라이도티의 말 역시 붓다의 무아설에 다름 아니다. 그럼 이 무아설, 혹은 복수의 주체성이 지닌 실천적 의미는 무엇일까? 포스트휴먼 시대에 새롭게 정초하는 포스트 불교와 섹슈얼리티의 긍정의 윤리학을 살펴보자. 

 

5. 포스트 불교와 섹슈얼리티, 긍정의 윤리학 

붓다는 태어나면서 어머니 마야부인을 잃었다. 자신을 길러준 노령의 이모 마하파자파티의 출가조차 허락하려 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제자 아난다가 요청하자 마지못해 허락했다. 붓다가 사회적으로 또는 존재론적으로 남녀 섹슈얼리티의 평등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천적으로 부정적이었음은 왜 그럴까? 쉴레인이 보기에 붓다의 삶은 “근본적으로 ‘분만 충격’―어머니의 상실―을 겪은 한 개인의 전형적인 삶”에 들어맞는다. “영혼의 핵심을 침식해 들어가는 불치의 슬픔을 가진 남자만이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 아버지와 아들을 두고 …… 과도한 자기 학대의 삶”에 뛰어들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이러한 충격과 트라우마는 생명의 탄생 자체를 기쁨이 아니라 두카(苦)로 보고, 그 탄생으로 인해 윤회의 업보를 이어갈 수밖에 없는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 결과 사성제의 집(集)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갈애, 그 갈애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을 정욕이라 했다. 이리하여 원론적 평등원리와 달리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붓다의 관념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붓다 사상의 한계이자 그 시대적 한계일 수 있다. 포스트휴먼 시대에 포스트 불교로 새롭게 가치와 지향점을 전도시킬 필요가 있다. 아힘사와 공감과 자비의 사상에도 불구하고 생로병사, 즉 생명 자체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죽음의 철학일 수 있다. 기후 위기와 생물종의 멸종, 심지어 인류의 멸종에까지 이를 수도 있는 인신세에 전환적 사유로서는 부족하다. 위에서 불쌍한 아래를 내려다보는 자비와 연민이 아니라 지구의 생태에 대해 동반자로서 적극적으로 사유할 필요가 있다. 

해탈을 막는 삼독인 탐진치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다. 탐진치를 완전히 꺼버리면 해탈한 열반이 아니라 좀비적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재물이나 명예에 대한 갈애로서의 탐(貪)이 아니라 지혜와 진리에 대한 탐구로서의 욕망으로 탐이 필요하다. 특히 포스트휴먼 시대 자동화에 눌려 망연자실해서 ‘지식과 이론의 노하우’를 상실해가는 삶에서는 진리의 탐구가 매우 중요하다. 진(瞋)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눈을 부릅뜨고 화내는 것이 마음이나 관계에 좋지 않다 하더라도 부정과 불의, 불공정에 분노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 이 진에서 사회적 유대와 연대, 약자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 나온다. 특히 치(痴)는 버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장해야 할 미덕이다. 자기 이익에 그악스러운 세태에서 자기 이익에 좀 어리석을 필요가 있다. 주식시장 알고리즘과 부동산 축적에 대한 호모 이코노미쿠스적 탐욕에 대해 좀 어리석은 것이 오히려 경제의 극심한 부침에서 자유로워지고 투기 버블을 꺼버리는 열반 경제라 볼 수 있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포스트 불교는 자연스레 여성적 원리나 성차/섹슈얼리티의 긍정성과 조응하기 마련이다. 앞서 무아론이나 포스트휴먼 주체 이론은 관계적 주체, 따라서 차이 나는 복수의 주체성을 긍정하였다. 여성들은 관계적 삶과 복수의 주체성에 익숙하다. 아내이자 간호사, 살림꾼, 재산 일구기, 엄마, 할머니, 딸 들로 복수적 주체성을 가진다. 그건 여성들이 살아온 경험의 층위들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억압 속의 자매애”라는 젠더적 관점이 아니라, “재현으로서의 여성(문화적 이마고 ‘대문자 여성’)과 경험으로서의 여성(변화의 작인들인 실제 여성들) 간의 본질적 차이”를 알아내야 한다. 그리하여 여성 주체성에 대한 새로운 형상화에 적합한 재현 형식들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 예술가 신디 셔만의 〈역사초상〉에서 남성적 시각에서 재현된 여성들을 전복적으로 재현하거나 인형같이 생긴 하연수가 또박또박 자신의 권리를 찾아가는 것은 여성이 주체적으로 재현과 경험의 본질적 차이를 통합해내는 행위이다.

라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여성’이라는 기표를 버리기 전에 그 기표의 다면적 복합성”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여성의 가사노동을 예로 들어보자. 가사노동은 여성이라는 기표 자체이다. 여성억압의 대표적인 대명사이다. 그런데 이 기표를 버리기 전에 다면적 복합성을 찾아보자. 이 가사노동이 포스트휴먼 시대 해방의 서사를 쓸 수 있다. 가사노동을 순우리말로 하면 ‘살림’이다. 이 ‘살림’노동은 생명 재생 행위이자 치유와 돌봄 행위인데, 무돌봄 사회라 할 수 있는 디지털 알고리즘과 자동화에 저항하는 가장 최전선의 영역이다. 

남자들의 존재 회복 역시 이 살림노동에 달려 있다. 이안소영은 “맞벌이가 아니라 맞돌봄과 맞살림이 필요한 시대”라고 말한다. 맞돌봄과 맞살림은 여성에게만 가사노동을 맡길 것이 아니라 아내와 남편을 포함하여 할머니 할아버지 아이들까지 모든 구성원이 돌봄과 살림에 대해 책임과 권리가 있음을 말한다. 그리하여 생활 무능력자에서 벗어나 활기를 되찾고 화폐에의 의존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플랫폼 경제에서 벗어나 스스로 살림의 주체가 된다. 이 과정에서 삶의 노하우, 노동의 노하우를 다시금 서서히 획득해나갈 수 있다. 그와 함께 섹슈얼리티의 노하우 역시 회복된다.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부정성은 비구와 비구니로 꾸려진 승가의 세계에서 차별적이고 권위적인 태도를 취하게 한다. 사실 갈수록 비구니가 많아지고 비구니의 역할도 많아짐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상부나 정책 결정 과정에서 비구니는 배제된다. 비구니 스님이야말로 포스트 불교적 가치, 즉 여성적 원리와 열반 경제로 전환기적 사유와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에너지가 많은 집단이다. 선불교의 두 가지 요소, 남성적 성격을 지닌 대장부의 길과 가부장적인 계보주의에 익숙한 종단에 비위계적이고 수평적이며 대중과 함께하는 가볍고 명랑한 불교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적격이라 생각한다.

스티글러는 자동화로 인한 풍요로 이루어진 노동의 종말과 그로 인해 해방된 시간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노동을 재발명할 수 있는 문화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한다. 자동화의 무돌봄 사회를 탈자동화의 돌봄과 살림의 행위로 뚫고 나갈 수 있는 주체는 역사적으로 폄훼 받았던 성차/섹슈얼리티의 긍정성에서 나온다. 탈자동화는 사람이나 자연을 직접 돌보는 것이고 치료하는 것이라고 볼 때 그건 여성적 원리와 가치가 사회체제적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하는, 즉 가치의 전도가 일어나야 함을 의미한다. 

여성 주체의 긍정성이 담보되기 위해서는 자동화 사회의 과실이 공정하게 분배되고 부의 불평등이 해소되어야 한다. 고용을 통한 일자리로 이루어지는 재분배가 아니다. 남에게 고용되던 노동은 끝났다.44) 스티글러는 수분경제를 언급한다. 수분이란 벌이 꿀을 모아오는 행위이다. 한 마리의 벌이 모아오는 꿀은 미미하지만 거대한 꿀통을 만들어낸다. 수억 명의 사람들이 날마다 검색하는 구글, 네이버 들이 바로 수분경제이다. 그러므로 기여분을 기본소득으로 분배해야 한다. 노동에서 일정 해방된 남녀들이 손수 텃밭 가꾸고 공동축사 꾸리고 뜨개질하고 술 빚고 밥 짓는 사회, 할머니 할아버지와 손주들은 서로 돌보고 작은 마을들이 올망졸망한 그런 탈자동화된 사회는 삶 자체가 예술이고 혁명이다. 

여성들의 성차/섹슈얼리티는 ‘노동과 삶, 이론적 지식과 섹슈얼리티의 노하우’를 되찾고 기쁨 속에서, 간헐성의 여신으로 긍정 윤리학의 바탕이 될 것이다. ■

 

김봉률 kim-bongyoul@hanmail.net 
서울대 사회교육과 졸업. 부산대 영문학 박사. 연구방향은 그리스 인문학(신화, 서사시와 비극)과 자본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문 경제이다. 소수의 사상가나 이론에 천착하기보다 소위 억견(doxa)을 전복하는 데 관심이 많다. 저서로 《이안 와트의 소설발생론과 장르정치학》 《어두운 그리스》 《문명의 불안-그리스신화와 영웅 숭배》 들이 있다. 현재 동국대 경주캠퍼스 교수, 연구공간 수이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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