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현대 중국불교의 현실과 전망

1. 들어가는 말

불교의 근본 교리는 ‘연기(緣起)’이다. 연기의 근본 원리를 거칠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과 저것이 만나 새로운 변화 즉 새로운 것이 발생한다.” 이것은 불교가 말하는 법이도리(法爾道理: 존재 실상의 원리)인데 ‘불교’라는 사회현상도 예외가 아니다.

불교는 인도에서, 중앙아시아에서, 동남아에서, 중국에서, 그리고 현재 미국과 유럽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들과 만나기 때문이다. 큰 변화가 발생하기도 하고 혹은 미세한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항상 새롭게 변화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만일 불교가 자고이래로 동일하다면 불세존의 언설은 오류가 될 것이다.

동북아의 근대는 엄청난 고난과 변화의 시기였다. 폭풍 ‧ 벽력 ‧ 뇌우 속에서 사방을 분간하기 힘든 아수라장을 헤치며 한 걸음 한 걸음 허덕이며 걸어오던 시간이었다. 이런 점은 사실 근대의 세계 대부분의 현실이었지만 필자가 보기에 동북아는 좀 더 강하였던 것 같고, 그중에서도 중국은 더욱더 강력하였던 것 같다. 이와 같은 고난이 집중적으로 보이는 시기는 흔히 말하는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시기이다.

‘문화대혁명’(이하 ’文革‘이라 약칭)은 사회변화를 기도하였고, 또 사회는 변화하였다. 사회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불교 또한 예외는 아니다. 이 논문은 이 ‘문혁’ 시기에 발생한 불교의 ‘현상’ 및 ‘변화’를 서술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서술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논의되어야 한다. 첫째, 물론 불교의 정의 및 범위에 대해 논의하여야 한다. 단지 이것은 이 글에서 직접적으로 다룰 시급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선은 이 논문에서 다루는 ‘중국불교’의 정의 및 범위에 대해 논의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 논의의 초점 및 범위가 어느 정도 명료할 것이다.

둘째, 문화대혁명 이전의 불교 상황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간략한 고찰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어떤 변화가 발생하였는지를 알 수 없다.

셋째 ‘문혁’에 대해 알아보아야 한다. 단지 이 문제는 매우 복잡하여 여러 각도가 존재하기 때문에 간략한 고찰이 쉽지 않다. 그뿐 아니라 ‘문혁’의 진정한 발생 원인, 목적 및 당시 상황 등에 대해서는 아직도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이 매우 많다. 여기에서는 이 글과 관련이 있는 부분을 중심으로 가능한 한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물론 이 논고의 초점은 문혁 시기 중 중국불교의 ‘상황’ 및 ‘변화’이다. 그러나 ‘문혁’은 중국 근대의 한 시기이며, 중국의 공산화 이후 진행된 사회격동 중 일부이다. 그러므로 ‘문혁’ 이전의 불교 정책 및 문혁 이후의 중국불교 상황도 모두 문혁 시기의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어느 부분에서는 분리가 불가능한 면도 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2. 중국불교의 정의 및 범위

필자는 예전부터 개인적으로 혹은 중국불교 관련 서적을 보며, 중국불교의 정의와 범위에 대해 적지 않은 의혹과 고민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중국불교는 한전불교(漢傳佛敎) 및 중국에서 개종(開宗)한 중국의 종파불교(宗派佛敎)를 지칭하는 듯하다. 여기에서 이것의 정당성 등은 논하지 않겠다. 단지 이렇게 정의해 놓고 보면 문혁 시기의 불교 현상을 제대로 서술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필자는 이 글에서 중국불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그 범위를 정하겠다.

중국불교란 무엇인가? 중국 경내(境內)에 존재하는 불교 및 그와 관련된 현상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역대 중국불교의 범위는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근현대 중국불교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그것은 우선 중국의 국토를 어디까지 보아야 하느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불교와 관련하여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국불교이다. 대략 한전불교를 말하며 한족 중심의 불교를 말한다.

둘째, 우리가 말하는 티베트불교를 뜻한다.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장전불교(藏傳佛敎)라 칭한다. 일반적으로 신도는 대부분이 장족(藏族)이며 장문(藏文)으로 이루어진 대장경이 존재한다.

셋째, 중국 남방 특히 운남(雲南) 지역 등에 존재하는 남방불교가 있다. 중국 내 남방불교는 소수라 할 수 있지만 그 지역 내의 세력이 약한 것은 아니다. 일부 소수민족은 남자아이가 자라면 우리의 병역과 유사하게 출가를 한다. 다시 환속하거나 계속 승려 생활을 한다.

넷째, 민간불교 혹은 민간불교 활동이다. 역대의 민간불교 혹은 민간불교 활동에 대한 연구는 부족하다. 단지 청말 이후 이 부분은 비교적 중요하며, 문혁 시기 불교 현상 분석에도 비교적 중요한 일부이다.

그렇다면 중국불교에는 두 개의 대승불교와 한 개의 소승불교 그리고 민간불교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중 청말 이후 민간불교는 대부분 대승불교에 소속된다.

그렇다면 ‘문혁 시기 중국불교’에서 다루어야 할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문혁이라는 대변동이 이 네 가지 불교에 끼친 영향 및 그 결과이다. 둘째, 문혁 시기 이 네 영역 간의 상호영향 및 변화이다.

 

3. 문혁 이전의 중국불교

문혁 이전의 불교란 대략 청대 불교가 민국 시기를 거치고 다시 중국이 공산화된 이후 일정 기간이 지난 불교이다. 단지 크게 보면 기본적으로 청대 불교의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의 분류에 따라 살펴보겠다. 논의 순서는 논의의 편의를 따르겠다.

1) 남방의 남전불교(南傳佛敎)

중국 남방의 소승불교를 지칭한다. 중국불교 중 세력이 가장 미약하다. 단지 그 지역 및 그 민족에 있어서는 그 권위와 영향력이 거대하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청조(淸朝)는 아주 작은 소수민족에 대해서는 그리 크게 간섭하지 않았기에 그들의 불교는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비록 중국의 국계 안에 있고 법률상 중국인이지만, 그들의 정신적인 생활과 사상은 동남아와 훨씬 밀접하다. 그들은 승려가 된 뒤 다시 불교 공부를 한다면 일반적으로 동남아로 유학을 가서 학습한 뒤 돌아와 불교 지도자가 되었다. 즉 중국의 내지 불교와의 교류나 영향도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으며 생활 방식이나 사유 방식도 그러하였다. 이런 현상은 물론 청대와 민국 그리고 해방 초까지 정도는 다르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중국의 소승불교는 비록 작은 지역이기는 하지만 비교적 안정적인 방식으로 그들만의 세계를 꾸려 나가고 있었다.

단지 필자가 이 지역을 고찰해 보니, 멀지 않은 곳에 중국 사찰 즉 선종 사원이 있었다. 물론 신도는 주로 한족일 것이며, 소승 사찰의 신도는 그 지역 소수민족이 주류일 것이다. 그럼에도 오랜 기간 경쟁과 영향 그리고 길항 관계가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해방 후 공산당의 종교 정책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단지 매우 심한 파괴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듯하다. 지역이 제한적이고 그 지역 민중의 반발을 고려해서였을 것이다. 오히려 근래 상업화가 진행되며 사찰과 그 지역 소수민족의 관계가 예전만 같지는 않은 듯이 보였다.

2) 장전불교(藏傳佛敎)

우리가 흔히 말하는 ‘티베트불교’이다. 다만 ‘티베트’는 지역명인데 이 불교는 ‘티베트’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신도가 티베트인 즉 장족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장전불교’가 보다 정확하다 할 수 있다.

‘장전불교’의 상황은 두 가지가 비교적 중요하다.

첫째, 청 시기에 장족 지구는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자치적인 상태였으며 이 자치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불교’ 즉 장전불교였다. 그러므로 장족 지구의 장전불교는 단순한 종교 조직이라기보다는 정치 업무도 일부 겸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장족 전체를 종교와 생활 양 방면에서 어느 정도 장악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민국 시기까지도 이어져 내려왔다.

둘째, 청나라 황실의 내부에는 장전불교를 믿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황실은 장전불교에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더욱이 청조는 유학적 통치를 하면서 은연중 ‘억도숭불(抑道崇佛)’을 하였기에 불교는 상당히 번성하였다. 그리고 장전불교도 장족 지구뿐만이 아니라 다른 소수민족이나 한족 지구에서도 점점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아주 명료하게 그리고 엄청난 정도는 아니지만 선종과 장전불교 혹은 한전불교와 장전불교가 습합하게 되었다. 만일 명대 불교를 ‘선정합류(禪淨合流)’라고 표현한다면 정도가 그만큼은 아니지만 청대 불교는 ‘한장합류(漢藏合流)’ 혹은 ‘선장합류(禪藏合流)’의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한국 사람이 중국 내지의 사찰에 가면 우리 사찰과 좀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되곤 한다.

셋째, 해방 후의 상황이다. 1949년 해방한 모택동과 공산당은 1950년 동부 장족 지구 ‘참도’ 지역을 공격하여 압박하고 1951년 장족 대표들을 위협하여 ‘티베트의 평화적 해방을 위한 협정’을 강제로 서명하게 했다. 이것은 여러 각도에서 분석해 볼 수 있지만, 최소한 ‘종교는 아편’이라는 공산주의 이론에 근거한 것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이후 장전불교의 장족 통치는 점점 어려워졌고, 반종교 교육도 점점 심해졌다. 그 결과 장전불교 및 장족과 공산당 더 넓게는 장족과 중국 통치부와는 치유하기 어려운 갈등이 발생하였고, 무장투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현상적으로는 많은 장전불교 지도자들과 장족들은 죽거나 망명하였고, 장전불교는 쇠퇴하는 듯이 보였다.

3) 한전불교(漢傳佛敎)

필자의 추측으로는 청나라 후반기 혼란한 시절 불교 신중(信衆)은 보다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유학 세력의 일부가 불교로 이동하거나 유불겸존(儒佛兼尊)의 상태로 변동된 것은 비교적 분명해 보이다.

민국 시기 손문(孫文)이나 장개석(蔣介石) 모두 불교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으나, 국민당이 직접적으로 불교를 파괴하거나 해악을 끼치지는 않았다. 단지 서구화 등의 경향은 불교에 그리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민간에서 불교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해방 후, 공산당 정부는 불교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으며, 불교에 대해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 이 ‘타격’은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첫째, 토지나 사찰 등을 몰수하는 등의 방식으로 경제적인 타격이다. 둘째, 종교는 미신이라거나 아편이라는 교육과 기타 수단을 통해 신도를 감소시키는 것이다. 이런 정책은 비록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본질적이고 기본적으로는 중국 해방 후의 일관된 정책이다. 비교적 강압과 교육으로 접근이 쉬운 한족들에게는 모두 강하게 이루어졌기에 한전불교는 쇠퇴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4) 민간불교(民間佛敎)

청대의 불교는 비록 흥성하였지만 다른 시대와 비교하여 불교에서 큰 학승이나 대덕을 배출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아마도 청대 불승들이 학습과 수행에 전념하지 않은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단지 청대에서는 불교를 연구하는 유학자들이 존재하였고 민간에서는 적지 않은 민간불교 단체가 있어서 불교가 봉기하기도 하였다. 여기서는 두 가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수많은 불교 단체이다. 순수 불교 단체도 있고 불도(佛道) 습합적이거나 혹은 다른 것과 섞인 것 등 매우 여러 유형의 불교 단체가 존재하였었다.

둘째, 청말의 거사불교이다. 양문회(楊文會, 1837~1911) 구양점(歐陽漸, 1871~1943) 등이 개창한 지나내학원(支那內學院)의 거사불교이다. 이들은 불교 특히 유식학으로 중국을 더 나가 세계를 구원하려는 거대한 희망을 품고 서원(書院)과 유사한 형태로 불교 집단을 운영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중국 근대불교의 시작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이들의 영향력은 현재까지도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이외 한청정(韓淸淨, 1884~1949)은 거사로서 삼시학회(三時學會)를 설립하고 북경에서 서당과 유사한 방식으로 유식학을 강의하였다. 제자들도 대부분 거사들이다. 당시 남구양북청정(南歐陽北淸淨)이라 불렸으며, 지나내학원만은 못하지만 그 영향력은 현재까지 존재한다.

여기에서 배출된 학덕이 높은 거사들은 민국 시기 그리고 그 이후까지 불교 전도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으며 제자가 다시 제자를 기르며 불학자들을 키우고 있다.

 

4. 문화대혁명이란 무엇인가

아마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문화대혁명’이란 어휘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단지 그 정확한 사건의 경위를 아는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로는 정확한 ‘원인과 경위’에 대해서는 아직도 불분명한 점이 많다고 여겨진다. 여기에서는 아주 대략적인 내용과 이 논문과 관련이 있는 부분만을 살펴보겠다.

‘문화대혁명’은 1966~1976년 사이에 이루어진 정치, 사회, 문화 등 전방위에 걸친 사회운동으로서 전체 명칭은 ‘무산계급 문화대혁명(無産階級 文化大革命)’으로 현재 중국에서는 ‘십년동란(十年動亂)’ 혹은 십 년간의 대재앙이란 의미로 ‘십년호겁(十年浩劫)’이라고 칭해지기도 한다.

거칠게 보면, 문혁은 당시 모택동이 홍위병을 동원하여 모택동에 반대하는 세력을 숙청시킨 운동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문화 변혁과 세뇌 등을 동반하게 된다.

당시 주적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주자파(走資派)이다.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사람을 지칭하나 넓게는 모택동을 반대하는 정치가, 간부 등이 모두 포함된다. 서구의 영향을 받은 반모택통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둘째, 구사회(舊社會)이다. 이것은 ‘파사구(破四舊)’로 요약된다. 즉 ⑴ 구사상 ⑵ 구문화 ⑶ 구풍속 ⑷ 구습관 이 4가지를 파괴하고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입장에서 보면, 유불도(儒佛道)는 모두 중국의 전통문화로서 파괴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에 해당한다. 이런 이유로 불교는 매우 강한 강도로 비판되고 파괴되었다. 당시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전통의 파괴이지만, 불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중국 당국이 자기 지지자를 동원하여 자행한 훼불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이 현상은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문혁은 당시 중국 지도자의 위기감에서 발동된 측면이 있다.

그리고 중국 정부와 티베트와의 관계는 1950년대 이래 극도로 악화된 상태였으며 소수민족들도 공산당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었다. 잘못하면 정권 더 나가 국가가 붕괴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이런 우려는 당시 중국에도 있었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문혁에서 파괴된 것은 주로 한족 전통이었다. 이런 이유로 상대적으로 남방불교나 티베트불교는 직접적인 피해를 적게 받았고, 한족 불교는 직접적이고 참혹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물론 이것이 해방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던 전 중국적인 반종교 정책이 폐기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자유가 주어진 것은 등소평 이후이지만 그럼에도―필자가 보기에― 반종교 정책은 은연중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라고 보인다.

 

5. 문혁 시기의 중국불교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문혁 시기 중국불교는 엄중한 재난을 당하였다. 그 줄거리는 위에서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었을까? 이미 앞에서 말한 문혁 이전의 불교에 대해 비교적 서술이 쉬운 부분부터 살펴보겠다.

1) 남방의 남전불교

남전불교는 내지(內地) 즉 중원으로부터 매우 먼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세력도 미약하고 소수민족 지역이다. 더욱이 그 소수민족 내에서의 위치는 확고하며 존엄하다.

홍위병들이 도달하기도 어려웠고, 또 파괴의 중점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남전불교는 당시 적어도 대대적인 파괴는 없었다. 단지 이것이 해방 후 지속적인 파불정책(破佛政策)의 예외지라는 의미는 아니다. 상대적으로 심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가 여행하여 고찰한 바에 의하면, 1980년대까지도 그 지역 안에서 남방불교의 영향력은 상당하였다. 차라리 2000년 이후 상업화되고 그곳 주민들이 대부분 신교육을 받으며 그 영향력이 감소하는 느낌을 받았다.

2) 장전불교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장전불교 입장에서 보면 중국이 극도의 혼란기였던 문혁 시기가 차라리 상대적인 평온기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상대적’이란 1950년대 문혁 이후의 극심한 탄압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또 완전한 평온기라 평가할 수도 없다는 의미를 가진다.

단지 장전불교의 전통이나 장족들 내부에서의 장악력에 문혁 시기에 거대한 변화가 발생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라싸 등 장족의 중심지의 불교 사원들 상당수는 파괴를 피할 수 없었으며 고승들도 수난을 당해야 했다. 단지 승려와 주민 즉 신중(信衆)들의 저항이 워낙 강하였기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의 파괴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다수의 특히 비(非)중심지 사원들은 대부분 건재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으며 문혁 시기 신중이 사원으로부터 멀어지지는 않았다.

필자는 장족 지구를 여러 번 가본 적이 있는데 1980년대와 2000년대 이후의 변화는 매우 컸다. 다만 1980년대 이전 장족 내부의 불교 지위는 크게 변화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중국의 장족 집거지 중 큰 곳은 네 군데인데 각 지역의 상황이 동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3) 민간불교

여기에서는 한족 지역의 민간불교를 지칭한다. 크게 두 가지로 대별하여 살펴보겠다. 첫째, 거사불교, 둘째, 민간신앙 혹은 문화로서의 불교이다.

⑴ 거사불교

이미 앞에서 두 개의 대표적인 거사불교(군)을 이야기하였다. 사실상 이 이외에도 많은 거사불교가 있었을 것이다.

문혁 기간 이 거사불교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우선 영향력이 거대한 지나내학원을 살펴보자. 지나내학원은 구양점이 남경에 창설하여 여징(呂澂)이 이어받아 강학 출판 등을 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1949년 해방되고 오래지 않아 1952년 여징은 스스로 이 활동을 중단했다. 이 점만 보더라도 중국 해방 이후 불교에 대한 분위기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여징은 해방 후에도 여러 불교 활동을 하였고 1989년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문혁 이후 다시는 불교 저술을 펴내지 않았다. 그 원인은 분명하지 않으나 문혁과 관계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또 한 가지를 논해보자. 여징의 저서를 크게 보면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문언문(文言文)으로 쓰인 작품들이다. 둘째 백화문(白話文)으로 쓰인 작품들이다. 이 중 백화문으로 쓰인 부분에서만 이른바 유물사관의 입장이 중간중간 보인다. 여징 사상의 변화인지 시대의 조류에 영합한 것인지는 논의의 대상이 될 것이다. 단지 문혁 시기에는 이런 논의도 불편한 시기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삼시학회 출신들과 그 강학은 말할 것도 없이 거의 소멸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1990년대 후반 북경의 작은 민가에서 ‘한청정연구소(韓淸淨硏究所)’라는 푯말을 본 적이 있으며 현재 그의 저서가 활자화되어 나온 것이 있다.

단지 필자가 위에서 말한 ‘철저한 파괴’는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중국의 학계에서 지나내학원의 영향력이 아직도 상당히 강하게 존재하고 있다. 물론 홍콩, 대만 그리고 해외 화인 지역에서도 더욱 강력하다. 이들은 문혁의 피해를 견뎠거나 도피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영향력이 큰 거사불교도 파괴되었다는 것은 당시 중국의 각지에 있던 거사불교가 해방 후 약화되고 문혁 때 거의 소멸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혁 이후에도 거사불교는 예전처럼 활발하지는 않은 듯하다.

⑵ 민간 문화로서의 불교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청대로부터 민간에 적지 않은 불교문화 조직 및 활동이 존재하였었다. 이런 조직 및 문화는 해방 이후 점차 쇠락하였고 문혁 시기 거의 질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활동 및 조직은 ‘파사구(破四舊)’의 대상일 뿐 아니라 ‘봉건미신’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재 중국 사회와 홍콩, 대만의 사회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중국 사회의 이런 부분이 훨씬 적다.

하지만 이것도 조심스럽게 관찰해야 한다. ‘거의 질식’은 ‘사망’과 다르다. 현재 중국에서는 매우 많은 이와 관련된 조직 및 문화가 다시 부활되어 있다. 현재 우리가 많이 아는 ‘파룬궁(法輪功)’도 이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

다만 장시간 불교와 관계를 멀리했던 불교조직과 불교문화는 이전보다 더욱 민간적 요소와 도교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4) 한전불교

문혁의 가장 큰 피해자 박해자는 한전불교(漢傳佛敎, 민간불교 포함)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거대한 파괴와 몰수가 이루어졌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지방에 따라 후일 보고된 것이 많다. 대부분의 사원은 몰수되어 정부가 사용하거나 학교 등으로 전용되었고 일부는 개인들이 거처하는 곳이 되었으며, 출가자들은 환속시켜 생산 증대에 기여하게 하고 공산주의를 학습하도록 하였다.

일부 환속을 강력하게 거부하던 승려들도 사원의 일부에 어렵게 기거하며 제대로 된 불사(佛事)를 진행할 수 없었다. 문혁은 전체적으로 전통문화와의 단절을 의미지만 한전불교의 ‘단절’ 현상은 다른 불교에 비해 훨씬 심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불교의 삼보 중 하나이며 불교 전승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출가자에 대해 살펴보겠다.

⑴ 환속(還俗)

상당수의 출가자는 환속을 당하였다. 비구들은 환속하여 생산의 증대에 기여하도록 하였고, 비구니들은 강제 결혼까지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비구도 환속하여 결혼하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문혁 시기 강제로 환속한 출가자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는 아직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불교 내에서도 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는 편이다.

환속을 하여 평생을 신불자(信佛者)로 산 경우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중 후일 학계 등에 진출하여 불교를 연구하는 사람도 있으며 사업을 한 경우도 적지 않다.

필자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출퇴근 승려였다. 필자가 본 것은 노비구니였는데, 사원에서 승복을 거치고 승려 생활을 하지만 출퇴근하며 사원 밖에 집도 있고 남편과 자식도 있었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 것은 다음과 같다. 중국불교 즉 한전불교에서 계율을 바꾼 것은 아니나 문혁 시기 강제 환속되어 결혼한 경우, 후일 본인이 원하면 출가자로 인정해 준다는 것이었다. 일종의 특례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집안과 자녀들에 대한 배려도 하고 있다고 한다.

문혁 시기 환속자에 대한 배려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런 스님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⑵ 심산수도(深山修道)

현존 스님들에 의하면, 당시 도시에 있거나 가까이에 있는 사원은 그 피해가 더욱 컸으며 환속 등을 피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상당수 출가자들은 심산 혹은 인적이 드문 곳의 사원으로 도피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고 수도를 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상대적으로 앞에서 말한 ‘단절’이 덜하였을 것이며 본래의 수행을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비교적 많은 수의 강한 의지를 가진 승려들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장기간 꾸준한 정진을 하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⑶ 피난수행(避難修行)

당시 참혹한 상황에서 홀로 심산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세속에 들어가 홀로 수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즉 도피행각을 하며 수행하는 경우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환속은 아니지만 승중(僧衆)으로부터 분리된 상태이다. 형식적으로는 비승비속(非僧非俗) 혹은 사승사속(似僧似俗)의 형태라고 보아야 할 것이며 개인마다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문혁 당시 이런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고 하는데 현재 이런 분들의 후일담은 크게 들리지 않는다. 이것은 아마 필자가 과문한 탓일 것이다.

⑷ 기거장사(寄居藏寺)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문혁은 중국 전역을 대상으로 발동한 사건이지만 한족 지역이 가장 큰 재앙을 받게 되었다. 소수민족의 지역이나 사원이 상대적으로 안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상당수의 승려들은 장족(藏族) 사원에 들어가 기거하게 되었다. 왜 남방 남전불교 사원으로 가지 않고 장족 사원으로 갔을까? 아마도 다음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첫째, 거리가 너무 멀고, 둘째, 숫자가 규모가 작고. 셋째, 대 · 소승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남전불교 쪽으로 피난하였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다.

비록 선종으로 출가하였지만 장족 사원에 들어가 장전불교를 공부하고 장전불교의 예식과 규칙에 따라 수행한 것이다.

문혁이 종결된 후 혹은 한전불교가 안정을 취한 뒤 이들은 대부분 한전불교 사원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이 밖에 해외로 나간 승려들도 있을 것이다. 단지 당시 중국 상황을 고려할 때 한전불교 출가자 중 해외로 도피한 경우는 매우 드물었을 것이다.22)

 

6. 문혁이 이루어놓은 중국불교의 상황

‘문혁’ 종료 후 중국 정부는 정부와 종교의 관계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1982년 중공중앙은 ‘관우아국사회주의시기종교문제적기본관점화기본정책(關于我國社會主義時期宗敎問題的基本觀點和基本政策)’을 발표했다. 즉 종교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기본정책을 발효하게 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에 부속되는 수많은 정책이 있다.

이후 중국불교는 신속하게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혁이 준 큰 충격과 그에 의해 발생한 현상들은 이 ‘회복’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이 점을 살펴보자. 여기에서는 상대적으로 ‘단절’이 적었던 소승불교와 장전불교는 논하지 않겠다.

1) ‘단절’과 ‘회복’

사실상 중국불교의 ‘단절’은 중국 해방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이 단절이 참혹할 정도로 이루어진 것은 ‘문혁’ 시기이다. 그리고 문혁 10년과 그 영향을 받은 시기에 중국불교는 가냘픈 숨만 쉬며 생존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어느 정도 자유와 보장을 얻은 이후 할 일은 당연히 ‘회복’이다. 회복이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감’이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 ‘회복’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단절’ 이후의 회복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보아도 매우 어렵다. 이 ‘단절’과 ‘회복’은 문혁과 그에 대한 대응으로 볼 수 있으며 그것은 현재 중국불교를 보는 중요한 관점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좀 복잡해 보인다. 현재 중국의 상황을 보면, 일부 승려의 제자군이 불교를 거의 장악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이 ‘일부 승려’란 위의 분류에서 보면 ‘심산수도’에 속하는 승려이다. 상대적으로 문혁의 피해를 덜 받은 승려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도 대략 짐작이 간다. 즉 피해 이전의 불교를 계승하고 있는 승려들이다. 대부분 심산의 사원에서 선수행(禪修行)을 지속해 오던 고승들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회복’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출가자들이라 할 수 있으며, 아마도 이것이 중국 불교계의 암묵적인 의지일 것이다.

그런데 그분들을 만나서 좀 더 알아보면, 거의 대부분 예외 없이 승려인 동시에 공산당 당원들이다. 즉 승려이며 당원이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수 있으나 어떤 면에서 보면 좀 기묘하다. 왜냐하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동거이며 불교와 비불교의 혼종이기 때문이다. 물론 고충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최소한 적극적이지는 않더라도 중국불교 지도자들은 중국공산당의 선택 혹은 지원 최소한 반대가 없는 인물들이 대부분이란 의미이다. 그렇다면 불교 내부의 움직임에 중국공산당의 의지도 담겨 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리고 ‘회복’은 단순하고 순수한 의미의 ‘회복’이 아닐 가능성도 농후하다. 이 문제는 넓게는 해방 후 중국 현실에 적응된 불교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는 문혁을 거치며 중국 현실에 적응된 중국불교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 중국에서 말하는 ‘선풍의 회복’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지는 좀 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특징은 상당 부분 ‘문혁’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즉 ‘단절’과 그로 인해 발생한 당위인 ‘회복’과 문혁으로 보여준 중국 현실, 이 세 가지 요소의 합작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2) 취장보한(取藏補漢)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한전불교는 대부분 ‘단절’되었고 상당수 출가자는 장사(藏寺)로 도피하여 장전불교에 기숙하며 피난하다가 문혁 이후 돌아왔다. 그들은 비록 선종 출가자이지만 이미 장전불교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다. 특히 출가 후 얼마 되지 않았던 스님들은 적(籍)은 비록 선종이지만 익히고 배운 것은 거의 장전불교였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편 생각해 보자면, 당시 적지 않은 선승(禪僧)들은 장전불교의 은혜를 받은 것이며 동시에 오랜 기간 그들과 교분이나 우의는 적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돌아간 뒤에도 상호 간 왕래가 어렵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필자가 1980년대 중국의 사찰에 가 보면, 불교 예식 등에서 갈등과 문제가 있었다. 즉 선종 사찰의 의식이 장전불교의 방식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그 주된 원인은 ‘단절’의 결과 많은 예식이 사라졌거나 제대로 보존되지 않았을 경우 그것을 장전불교의 방식으로 대체한 것이다. 이 상황은 충분히 이해된다 할 수 있다.

다시 시간이 지난 근래에는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 보인다. 아마도 ‘회복’의 정도가 강화되어 많은 부분이 다시 선종 전통으로 돌아와 그런 것일 것이다.

본래 선종은 수행불교이다. 교학 부분은 상대적으로 박약하다고 볼 수 있다. 장전불교는 교학과 수행 체계가 엄밀하게 갖추어진 불교이다. 예식 등의 문제가 대략 해결되었다 해도 뒤에 한장(漢藏)불교의 상호 간 영향과 합류 특히 한전불교에서 장전불교를 수용하는 문제는 아직도 진행 중이며 여러 이유로 앞으로도 당분간은 지속되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길게 보면 청대 이후 진행된 것이나 그것을 가속화 혹은 심화시킨 계기는 문혁이라 판단된다. 이 현상은 차후 중국불교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고 찻잔 속의 태풍으로 마무리될 수도 있다. 장기간의 관찰이 필요하다.

  

7. 나가며

필자가 보기에, 불교사란 불세존이 세상에 나와 청중의 근기에 따라 설법을 한 뒤로 넓은 의미의 근기라 할 수 있는 환경과 조건 속에서 불교가 변모하며 전개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만약 이렇지 않다면 연기가 아니다. 불교는 연기설의 주장자이며 동시에 연기 안에 있는 일물(一物)이기도 하다.

‘문혁’은 근대 중국에서 벌어진 엄중한 현실이다. 즉 환경이며 조건이다. 그것은 분명 불교를 변화시켰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교가 그대로라면 그것은 연기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를 제대로 보기에는 아직 시간이 너무 짧다고 여겨진다. 그뿐 아니라 문혁 시기 많은 상황은 아직도 분명하게 공개되지 않고 있으며 객관적인 연구도 많지 않다.

그러므로 문혁 시기 불교에 대한 상세한 고찰도 좀 더 후일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문혁 이후 변화된 불교를 보기 위해서도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단지 위에서 서술한 여러 요소들이 그 변동의 주요한 원인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중국불교의 변동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중국이 다시 부강해진다면 그 불교가 세계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

 

서대원 dayuans@hanmail.net
연세대학교 철학과, 동 대학원 철학과 졸업(석사). 중국 북경대학에서 왕필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연세대, 원광대 등에서 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언어와 실제의 관계’ 등의 주제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유불도(儒佛道) 철학과 그 교류사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현재 충북대 교양교육본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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