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세계를 가르친 현대불교의 스승 10인

1. 씨줄과 날줄 위에서 선 술락의 90년

참여불교(engaged buddhism)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틱낫한 스님이지만 국제 참여불교운동을 실질적으로 조직화하고 이끌어온 지도자는 태국의 술락 시바락사(Sulak Sivaraksa, 1933~ ) 박사이다. 1989년 술락 시바락사의 주도로 아잔 붓다다사, 틱낫한 스님, 달라이 라마 등이 고문으로 참여하고 여러 나라의 불교운동 지도자와 활동가, 학자들이 결합한 국제참여불교네트워크(INEB)가 창설되었다.

현재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은 날줄인 경도와 씨줄인 위도가 교차하는 지점을 나타내는 좌표이다. 한 인물의 삶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도 시간적 흐름과 공간적 상호관계성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출생부터 현재까지의 역사적 흐름을 종축에 두고 파악하는 통시적(通時的) 관점과 특정 시기의 주변 상황과 인물들과의 횡적 관계성을 파악하는 공시적(共時的) 관점에서 술락 박사의 삶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1932년은 파리에 유학했던 태국의 지식인들과 젊은 장교들이 주도한 무혈쿠데타가 일어난 해이다. 이 쿠데타를 이끈 주역은 프랑스 유학파인 프리디 바노명(Pridi Banomyong, 1900~1983)과 피분송크람(Phibunsongkhram, 1897~1964) 소령이었다. 이로써 샴(태국)은 강력한 왕권의 전제군주정에서 입헌군주정으로 바뀐다. 이 체제 전환의 시점인 1933년에 술락 시바락사가 태어났다.

술락의 부친은 부유한 화교 가문 출신으로 영국에 본사를 둔 다국적 기업(BATM) 방콕지사의 회계사였다. 술락 박사의 출생지인 태국의 서쪽은 인도아대륙의 길목인 버마, 북 ・ 동쪽으로는 중국으로 통하는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그리고 남쪽은 서태평양과 인도양의 관문인 말레이시아가 있다. 이런 지리적 위치는 태국이 인도차이나반도의 각축전과 냉전 시대의 파고를 벗어나기 어렵게 만든 지정학적 굴레가 된다.

1947년 9월 송크람이 다시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군부독재의 긴 터널로 들어간다. 1949년에는 중국이 공산화되었고 1955년에는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월남전)이 일어났다. 동남아시아 지역의 사회주의 확산에 대한 서방의 우려가 커지자 미국의 CIA는 세계적인 차원의 반공 전선 구축을 공세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1961년, 미국은 이미 태국 전역에 군사기지를 건설했다. 방콕의 돈므앙 국제공항은 베트남과 라오스로 출격한 폭격기의 80%가 이륙한 전략기지였다. 냉전 기간, 태국은 병참 기지국으로 전락했다. CIA는 우방국에서도 신나치 조직을 양성하고 여러 경로를 통해 내정에 관여했듯이, 음지에서 태국의 군부와 왕실을 관리하고 반공 전선에 불교계를 활용했다.

 

2. 술락의 성장과 민주주의

술락 박사는 부유하고 귀족적인 환경에서 성장하면서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그렇다고 왕실의 일원이나 귀족화된 엘리트 군부와 같은 반열에 있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술락은 2년간 동진 출가 경험을 했고, 가톨릭 재단의 초 · 중등 과정을 거쳐, 영국 웨일스의 람페터대학(College Lampeter)에 이르기까지 종교적 분위기가 강한 환경에서 수학했다. 술락은 웨일스에서 순탄치 않은 첫해를 보낸 후 런던으로 옮겨 미들템플법학원(Middle Temple)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웨일스와 런던을 오가며 공부한 끝에 3년 후에 람페터대학에서 철학, 역사학, 영어 학위를 받았다.

1957년 술락 박사는 BBC 방송국의 태국 뉴스 PD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에 잠시 태국으로 귀국했다가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 BBC에서 명성을 쌓았다. 1959년, 태국 뉴스가 중단되자 술락 박사는 BBC를 떠나 강사 생활을 시작했다가 태국 국왕과 왕비의 영국 방문을 앞두고 BBC에 복귀했다. 술락은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 1927~2016) 일행을 밀착 취재하는 동안 왕과 직접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갖기도 했다.

술락은 BBC를 그만둔 후에도 옥스퍼드대학 등 유수의 대학에서 강연 활동을 했다. 방콕에서는 다국적 기업의 임원직을 비롯해 여러 제안을 받았지만, 군부독재의 숨 막힌 세상으로 스스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자유롭고 안락한 생활을 누리던 어느 날 저녁, 런던의 ‘SOAS 캠퍼스’에서 한 사람을 만나서 삶의 항로를 바꾸게 되었다.

한 버마 사람이 술락에게 언제 귀국할 거냐고 묻자 술락은 “모르겠습니다. 여기가 좋아요. 아마도 나는 집에 가지 않을 겁니다.”고 답한다. 이에 “술락 씨, 귀국할 수 있다면 고국에 가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 무언가를 할 기회를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당신처럼 경력과 교육을 받은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 버마 사람과의 만남을 계기로, 술락은 미뤘던 변호사 시험을 준비해 1961년에 자격증을 취득하고 다음 해에 귀국했다. 술락이 입국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군의 군사기지 역할을 하고 있던 방콕 돈므앙 공항이었다. 술락 박사는 이후 60여 년간 태국의 독재 정권을 향해 쓴소리를 했고, 태국 시민사회를 비롯해 동남아시아 시민사회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활동해온 공로를 인정받아 대안 노벨상이라 불리는 ‘바른생활상(Right Livelihood Award)’과 ‘니와노평화상(Niwano Peace Award)’을 수상했다. 1993년과 1994년은 연속해서 노벨평화상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한편, 이러한 행동주의로 인해 술락은 두 차례에 걸쳐 망명길에 올라야 했고, 네 차례나 투옥되었으며 여러 차례 국왕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기소당했다.

옥스퍼드대학의 OWID ‘자유민주주의 지수’ 그래프가 태국의 당시 상황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한국과 비교하면 1970년경까지는 비슷하지만, 1987년 이후에는 격차가 크다. 태국의 민주주의 지수가 가장 높았던 때는 2004년으로 0.4였으며, 이는 1987년 직후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눈 떠보니 쿠데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데 2012년 이후에는 오히려 1970년 수준으로 퇴행했다.

운동가를 평가하는 작업은 칼날 위에 함께 서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한 사람이 일생 동안 어떤 활동을 얼마만큼 했고 무슨 결실을 이루었는지 나열하는 것보다, 때로는 비하인드 스토리, 혹은 사회정치적 배경이 삶의 무게를 온전히 보여줄 수 있다. 술락의 활동 하나하나는 냉전과 신냉전의 전선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곁에 두고 이룬 결실이다. 그것도 10년, 20년이 아닌 50년 이상 지속해온 현재 진행형이다.

 

3. 세 번의 기연(奇緣)과 술락의 진면목

술락은 귀국한 다음 해인 1963년부터 출라롱꼰 등 태국의 3대 국립대학교를 중심으로 출강하며 지식인의 사명과 역할을 알렸다. 계엄령이 발동되고 있었기 때문에 진실 보도와 정상적인 사법 절차는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엄혹한 상황에서 태국 민주주의 언론 역사에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는 《사회과학 리뷰(Social Science Review)》를 창간했다. 리뷰는 학생과 지식인의 의식을 일깨우고 분노와 결기를 표출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로 성장하게 되었다. 1967년에는 태국 최초의 대안 서점인 ‘수크시트 샴 서점(Suksit Siam Bookstore)’을 개업하여 토론과 행동을 조직화하는 허브로 자리매김한다. 서점 주변에서는 ‘커피숍 모임(Sapha Kafe)’ 등을 병행하여 조직을 확산하는데, 1973년 10월 14일의 민중봉기 지도부를 포함한 다수의 운동가들이 배출된 창구였다.

이즈음(1966년) 술락에게 귀국의 필요성을 일깨운 버마인을 만난 기연처럼 또다시 삶의 전환점을 갖게 세 인물을 만난다. 첫 번째 인물은 생태 농업과 쌀, 옥수수 종자의 발전을 주도함으로써 세계적으로 알려진 시티폰 크리다카라(Sithiporn Kridakara, 1883~ 1971) 왕자이다.

왕자는 “술락, 바로 이 나라에는 지적인 잡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잡지가 지적인 자위가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고 말했다.

술락이 자신은 글로 국민들을 돕고 있고, 태국의 지적 역사를 다시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자, 왕자는 “농민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그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데도 당신은 그것을 모릅니다.”…… 이 만남은 술락의 세계관을 극적으로 바꾸었다. 그는 자신의 하향식 접근법이 얼마나 오만하고 결함이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이제 그는 비판을 통해 지식인 엘리트들을 교육하는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의미 있는 행동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서민들의 삶과 투쟁을 목격하기 위해 태국 전역의 시골 마을, 사원과 논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인물은 방콕에서 남쪽으로 600㎞ 떨어진 숲속의 사원 ‘수안 모크(Suan Mokkh)’에 있던 아잔 붓다다사(Ajan Buddhadasa, 1906~1993))이다. 붓다다사의 책에 감동한 술락은 먼 거리를 내달려 그를 만났다. 그는 술락 박사의 불교관에 가장 깊고 넓게 영향을 미친 인물로 이후에도 여러 차례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왕당파로 알려진 술락 박사의 군주제에 대한 시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인물이 있다. 태국에서 국왕이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할 때 술락이 군주제에 대한 입장을 바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서두에 언급한 프리디 바노명이다. 술락은 1960년대 초부터 여러 매체를 통해 망명 중인 프리디에 대해 융단폭격 수준의 공격을 지속했다. 전 국왕인 아난다 마히돌(Ananda Mahidol, 라마 8세, 1925~1946)의 의문사 배후가 프리디라는 소문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계속된 공격에도 10여 년을 침묵하고 있던 프리디가 1972년부터 반박하면서 라마 8세의 죽음은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러다가 1980년 5월 반전이 일어났다. 프리디의 부인이 보낸 〈라마 8세의 죽음에 대한 새로운 판결〉이라는 자료를 접한 술락 박사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프리디에게 참회와 용서를 구했다.

공감하는 그 순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귀국이라는 고난의 길을 택한 결단, 선지식과의 짧은 법담으로 운동에 대한 세계관과 운동방식을 전환하는 태도, 자신의 오류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도 모자라 반정부 인사로 낙인찍힌 망명 인사를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가는 담대함은 술락의 진면목을 잘 드러내는 사례다.

 

4. 고난을 극복하고 참여불교네트워크 조직

술락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초창기 운동이 확산되자, 재단법인 설립 등 합법적인 방식과 제도를 활용했다. 1969년에는 국제참여불교네트워크(INEB)를 비롯한 여러 조직의 모태 법인 역할을 하는 ‘사티라코제스-나가프라디파 재단(SNF)’을 설립하여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71년에는 ‘코몰 킴통 재단(KKF)’을 설립하여 전무이사를 맡아 활동을 직접 기획하고 집행하였으며, 이후 이사장이 되어 2005년까지 재임하였다. KKF를 지렛대 삼아 사회운동, 농촌 재건운동 그리고 청년과 승려 리더를 양성하는 활동을 본격화하였다.

귀국 후 10년여의 활동 성과는 술락 박사가 40세가 된 1973년 10월 14일의 민중시위로 실현된다. 타놈 정권의 붕괴와 민주 정부의 출현으로 ‘민주주의가 꽃핀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사마나 포티락(Samana Pothirak)의 산티아속(Santi Asoke, 1934년 출생)이 출범한 시기(1975)이기도 하다. 1976년 3월 술락 박사는 가톨릭의 마이클 분루엔 만삽 주교, 개신교의 코손 스리상 전 회장과 의기투합해 ‘종교와 사회 통합단(CGRS)’을 창설했다. 불교와 기독교 전체를 아우른 인권단체 CGRS는 태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인권 전문지인 《태국 인권보고서(HRTR)》를 발행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시각에서 볼 때 인도차이나 상황은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1975년 4월 캄보디아 공산당이 수도 프놈펜을 점령했고 같은 달 북베트남(월맹)이 사이공을 함락했다. 그해 12월에는 라오스에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베트남전에서 패배한 미군은 1976년 6월 태국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그로부터 4개월인 후인 1976년 10월 6일, 미국의 인도차이나 반공 보루인 태국에서 동남아시아판 5 · 18광주학살이 발생했다. 사실상 국왕의 승인하에 탐마삿 대학교를 봉쇄한 상태에서 공수부대와 태국왕립경찰, 우익 민병대(Village Scout) 등이 시위대에게 조준 사격을 한 것이다. 박격포와 대전차포 등 중화기가 사용되었고 시체를 훼손하는 일도 자행되었다. 술락의 샴 서점도 불에 탔다. 친구들과 동료들은 공산주의자로 내몰려 살해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술락의 첫 번째 2년의 망명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민주주의 꽃은 그렇게 스러졌다.

1979년 술락은 모든 종교와 이데올로기의 벽을 뛰어넘고 협력하기 위해 ‘태국 종교 간 개발위원회(TICD)’를 발족했다. 술락은 전매특허와 같은 잡지 발행을 하는데 1985년부터 영어판으로 제작해 홍보와 연대, 후원의 적극적인 수단으로 삼았다.

출가자들에게는 숲속 명상 센터나 연수시설을 운영하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재가자로서는 쉬이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활동가들의 재충전을 위한 쉼터, 장기 연수 혹은 주민들과의 공동체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연수형 센터는 꼭 필요한 공간이다. 1984년 술락은 방콕에서 동북 방향으로 80km 거리에 있는 땅을 기부하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술락은 기부자들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 시설을 웡사닛 아쉬람(Wongsanit Ashram)으로 명명했다. 이 아쉬람은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금은 회관, 기숙사, 도서관 등이 포함된 지역 공동체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국내외 연수프로그램과 활동가들의 쉼터로도 활용된다. 1986년에는 산하에 산티 프라차 담마 연구소(SPDI)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술락 박사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그동안 쌓은 신뢰 덕분에 1989년 2월 태국에서 11개국 36명의 출 · 재가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참석자들은 3일간의 회의 끝에 국제참여불교네트워크(INEB) 창립을 결의하였으며, 이는 세계불교 운동사에 깊이 각인될 전환점이 되었다. 각국을 순회하며 개최되는 세계참여불교대회는 2003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13차 대회에 이어 2022년도 제20차 대회도 국내에서 열렸다. 지금은 23개국의 59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5. 사회변화를 위한 불교행동주의

술락 박사는 지난 수십 년간 극우세력으로부터는 빨갱이, 극좌로부터는 왕정주의자 또는 CIA 요원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실제로 CIA가 아시아재단을 통해 종교계와 비영리조직에 자금을 살포했는데 《사회과학 리뷰》에도 흘러 들어간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이에 대해 술락 박사는 이렇게 대응했다.

“스님이 탁발을 나갈 때 ‘이 음식은 강도의 음식입니까, 아니면 당신이 훔친 음식입니까?’라고 묻습니까?” …… “아니요, 스님은 그냥 음식을 받습니다. 나도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미국의 일부 죄를 씻을 수 있도록 했을지도 모릅니다!”

혹독한 사회환경 등을 감안하면 이해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충분히 의심되는 음식은 보시자에게 확인하는 것이 옳다. 그의 전기 작가인 마테오 피스토노(Matteo Pistono)는 독재정권하에서 《사회과학 리뷰》가 지속될 수 있었던 요인 중에는 ‘적어도 술락이 편집자로 있던 6년 동안 완 와이타야곤 왕자의 후원 영향’이 작용했을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왕실 인사들이 지속적으로 출판문화 운동에 참여한 상황을 전체적으로 살피지 못한 판단이다.

술락이 주도한 단체들은 모금 자금의 대부분을 환경단체를 비롯한 시민단체 활동가와 농민, 종교계 리더의 역량을 키우기 위한 훈련 프로그램에 활용한다. INEB 산하 기구로 영어와 참여불교 이슈를 교육 훈련하는 SENS는 매년 아시아의 활동가를 초청해 3개월간 훈련하는데, 술락 박사가 모금한 기금으로 참가자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해왔다. 술락 박사가 설립한 단체 중에서 특히 SEM(Spirit in Education Movement)은 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수많은 단체 활동가들의 역량강화 훈련을 지원하거나 단체활동을 지원해왔다.

이러한 지원 노력은 아시아의 민주주와 평화, 정의와 지속가능성을 증진하기 위해서다. 미얀마의 미쯔온 댐 (Myitson Dam) 건설을 저지하는 데에 자원을 지원했던 사례, 2012년 이후 미얀마에서 로힝야 무슬림과 불교도 간의 폭력 사태가 빚어졌을 때 갈등 해소를 위한 노력에서 그의 불교행동주의를 확인할 수 있다. 술락은 2013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INEB 회의에 참석한 미얀마 승려들에게 로힝야 사람들을 돌보고 더 나아가 갈등 해소를 위해 노력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승려들은 미얀마에 돌아가서 교단의 여러 스님들과 의논해봐야 한다고 답했다. 그러자 술락은 ‘스님이 5명만 모여도 승가다’라며 당장 여기서 결의하라고 압박했다.

이와 같은 술락의 행동주의의 기반은 붓다의 가르침에 있다. 술락은 “불교적 실천은 사회,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팔리어 경전에 나타난 것처럼 붓다의 가르침은 사회, 정치적 문제들에 주목했다. 불교의 사회적 차원을 떼어놓고 불교를 이해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며 붓다의 가르침을 현대의 사회, 경제적, 정치적 딜레마에 적용할 것을 주장했다.

술락의 행동주의는 변화를 거듭했다. 지난 기간 그는 국가의 특정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여왔다면 이제 그는 구조적인 폭력에 주목한다. 술락은 저서, 《지속가능성의 지혜(The Wisdom of Sustainability)》에서 구조적인 폭력이란 “사회자원이 불평등하고 불공평하게 분배되어 사람들이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 제도적인 방식”이라고 설명했다.9) 이러한 고통의 구조가 어떻게 유지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는 모든 개인에게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 불교의 근본 가르침을 되돌아본다. “이 삼독이 고통의 원인이다. 명상과 성찰을 통해서 이 독이 완전히 근절될 수 있고 자비와 자애, 지혜로 변화될 수 있다.”며 세계와 사회경제 시스템의 변화에서 개인적인 수행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정치적, 경제적 제도의 개혁 그 자체만으로 해방을 달성할 수는 없다. 개인의 변화는 출발점이다. 사회 안의 개인이 평화로울 때만 평화가 사회에 퍼질 수 있다. 탐진치가 개인사를 지배하면 우리 사회의 제도 속에서도 탐진치가 나타나게 되어 영원히 사회변화를 이루지 못하게 할 것이다. 진정한 안전은 우리 스스로의 수행에 달려 있다.10)

활동가들이 꼽는 참여불교운동의 대표적인 네 분 중에서 세납이 가장 많은 틱낫한 스님은 지난해 자리를 비웠다. 올해로 아리야라뜨나는 아흔 둘, 술락은 아흔, 달라이 라마도 2년 후에 아흔이다. 술락은 고령에도 지난해 문경과 서울에서 개최된 INEB회의에 참석해, 세계 각국의 참여불교 운동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 그가 60년 동안 흔들림 없이 전하고자 했던 참여불교정신과 불의를 향한 사자후에 후배들이 거듭 귀를 기울여할 때이다. ■

 

민정희 mujin21@gmail.com

불교단체에서 국제연대 사업을 주로 맡아왔다. 현재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환경 · 경제 · 사회정책위원회(CEESP) 위원으로 활동하며, 국제참여불교네트워크(INEB)의 이사, 국제기후종교시민(ICE) 네트워크의 사무총장 등을 맡고 있다. 옮긴 책으로 《과학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때 불교가 할 수 있는 것》 《적을수록 풍요롭다》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아주 구체적인 위협》(공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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