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현대 중국불교의 현실과 전망

1. 들어가며

중국대륙의 불교는 중국공산당의 종교에 대한 정책에 따라 쇠퇴와 부흥의 길을 걸어왔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당시 불교를 포함한 종교에 대해 중국공산당은 세 가지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종교적 신념, 혁명의 조력자, 혁명의 적. 중국 헌법에 의거하면 중국의 공민들은 종교의 자유를 가지고 있기에 처음에는 종교 신념을 인정하였으며, 종교에 대한 바른 이해가 새로운 국가를 세워갈 종교인들과의 협력을 용이하게 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의 시각에서 종교를 혁명의 적으로 바라보았다. 결국 이러한 관점에서 문화혁명(1966~1976)이 발생하였고, 종교가 탄압받게 되었다. 마오쩌둥이 사망한 이후에는 종교의 자유가 어느 정도 회복되어서 국가에 위협을 가한다고 여겨지지 않는 한 이전 같은 탄압은 없었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 중국 고유의 전통문화라 바라보고 불교의 재건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오고 있다.

그래서 중국 불교학은 문화혁명을 기준으로 그 이전 시기와 그 이후 시기로 나누어 이야기해 볼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국가이념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였던 문화혁명 이전의 불교 연구는 주로 사상 연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으며, 불교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와 불교와의 비교연구를 통해 불교가 변혁 가능하며 마르크스주의와 공존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연구였다. 이와 관련해서는 1950년에 창간된 《현대불학》에 실린 글들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불교를 비판하며 유물론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연구로 대표적 연구서로는 런지유(任繼愈, 1916~2009)의 《중국중세불교사상비판(원제 漢唐佛敎思想論集)》과 호우와이루(侯外廬, 1903~1987)의 《중국철학사》가 있다. 종교 탄압의 시기였던 문화혁명 시기에는 불교를 비롯한 종교에 대한 연구가 거의 전무하였다. 1980년대부터는 서서히 종교와 사상의 자유가 회복되면서 불교는 다시 복원되기 시작했다. 사찰을 재건하고, 승려를 교육하고, 경전을 번역하고, 다양한 방면의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2. 마르크스주의와 불교의 화합을 위한 노력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이후 마르크스주의는 국가 통치의 기본 이념이 되었다. 새로운 국가의 새로운 통치이념을 인민들의 삶 속에 뿌리내리기 위해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교육과 다양한 개혁들을 시행하였다. 강력한 마르크스주의 국가이념 아래에서 불교 지도자들은 불교가 마르크스주의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할 수 있는 종교임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또한 불교 이론이 마르크스주의와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유사점을 가지고 있음을 여러 측면에서 증명하고자 했다. 물론 이들의 비교의 방식은 이전의 불교에서 파사현정 방식으로 불교의 우월성을 드러내던 것과는 달랐다. 마르크스주의가 불교보다 우월하다는 전제하에 마르크스주의 시각에서 불교를 비판하고, 마치 프로크루스테스가 침대에 사람들의 키를 맞추듯이, 불교를 마르크스주의에 맞추고자 했다.

이들은 1950년 9월 전국적인 불교 잡지인 《현대불학》을 창간하였고, 1953년 5월 중국불교협회를 창립하여 친마오쩌둥 입장에 서서 불교와 마르크스주의의 조화로운 공존을 꿈꾸며, 불교도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다양한 주장을 하였다. 대표적인 이들로는 천밍슈(陳銘樞, 1889~1965), 게쉐 쉐랍갸초(དགེ་བཤེས་ཤེས་རབ་རྒྱ་མཚ;ོ 喜饒嘉措, 1884~1968), 쥐잔(巨贊, 1908~1984), 자오푸추(趙朴初, 1907~2000) 등이 있다. 불교 지도자들이 마르크스주의 틀에서 논했던 주제들은 ①불교와 마르크스주의의 공통 기반 ② 불교가 비판받는 지점들에 대한 변론 ③ 마르크스주의와 불교의 다른 점 ④ 마르크스주의에서 찾을 수 있는 불교의 긍정적인 점 등이다.

둘 사이의 공통점을 논하는 데에서 학자마다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 달랐다. 예를 들어 정치가인 천밍슈는 불교의 공사상에 기반하여,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의 진리는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 진리의 자리에 마르크스주의를 자리매김하여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반면 타이쉬(太虛, 1890~1947)의 제자인 쥐잔은 이 의견에 반대하며 불교와 마르크스주의는 기본적으로 다른 점이 많은 이념이지만 공통점이 있으며, 이 공통점에 대해서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견해 차이는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불교가 탄압받지 않고 새로운 체제에서 지속될 수 있느냐는 고민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얼마나 유사한가에 대해서는 바라보는 시선에 차이가 있었지만, 둘 다 불교는 사회의 요구와 정치 상황에 맞추어 새롭게 탈바꿈하며 마르크스주의가 불교의 미신적이며 봉건적 요소를 제거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쥐잔에 의하면 대승불교와 마르크스주의의 공통점은 “중생에게 이익을 주려고 하는 것과 자신의 약점을 돌아보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는 모든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며 계급투쟁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즉, 유산계급을 동등한 구원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은 인민의 적을 포용하는 것으로 마르크스주의의 계급투쟁에 반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쥐잔은 이를 불교가 가진 한계라 표현하며 불교도들이 인민의 편에 서서 유산계급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불살생을 강조하는 불교의 교리에서 싸움과 적의 제거는 불살생의 교리와 서로 모순이 생길 수밖에 없었지만, 이 부분은 이미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기 전, 투쟁의 시기부터 정당화되고 있었다.

석가여래는 보살의 수행의 길을 이야기할 때 오백 명의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한 명의 나쁜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불교의 불살생 계율이 교의적으로만 볼 수 없다는 좋은 예이다. 개인의 명성과 이익을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계율을 어기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은 계율과 모순이 없다. 우리가 이러한 바른 믿음으로 무장할 때, 흔들림 없이 산속에 머물면서, 굳건히 산속의 도적이나 스파이들을 잡으려는 정부를 도울 수 있다.

한 승려가 1950년대에 중국공산당이 집단 노동에서 도망친 도적의 지도자를 숙청하는 것을 옹호하면서 했던 말인데, 이는 이후 공산당의 숙청을 불교도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론적 바탕을 제공하였다. 또한 중국공산당이 자아비판이 우월하다는 입장에서 불교의 참회 방식이 비효율적이고 형식적이라 비판하며 중국공산당의 방식을 따라야 함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자오푸추는 불교의 깨달음을 위한 자기 계발과 중국공산당에 참여하는 정치적, 경제적 활동은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불교도들의 목표는 “모든 악을 피하고, 선을 추구하며,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다. 사회 인민들의 고통과 괴로움의 뿌리인 착취구조를 없애는 것은 모든 악을 피하는 것과 똑같다. 인민들의 유물론적 문화적 삶을 더 낫게 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건립 활동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면 사회는 풍요롭고 행복하게 될 것인데, 이것은 모든 선을 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기적이고, 자신의 관심에 따라서만 바라보는 것을 멈추고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의 깨달음의 길을 이기심을 버리고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 힘쓰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재해석하면서 불교 지도자들은 불교가 마르크스주의와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불교가 가지고 있는 신비적인 서술들, 예를 들어 《유마경》에서 꽃비가 내리고, 갑자기 여러 불보살을 위한 음식과 의자가 나타나는 것 같은 이야기는 마르크스주의가 강조하는 탈미신, 과학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에 대해서 쥐잔은 불교를 포교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보고 중요한 것은 그 핵심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유마경》에서는 그러한 신비한 행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탈이분법, 어떤 종류의 언어이든, 언어를 가지고는 탈이분법의 진리의 문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는 것을 구별하고 불교의 핵심교리를 알아야 한다. 불교의 핵심교리는 실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합리적 지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과학과는 맞지 않는 영적인 힘과 상상력에 대한 논의는 단지 포교적 편의를 위한 방편의 은유적 표현일 뿐이다.

이렇게 주요 비판이 되는 신비적이고 비과학적인 부분을 방편일 뿐이라 방어를 한다. 또한 불보살의 이름을 부르는 수행에 대해서도 자오푸추는 불교가 이들을 실질적으로 숭배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방식을 통해 이타심을 증장시켜 인민에 대한 더 나은 봉사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불교에 대한 기존의 비판에 단순히 방어만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불교의 장점을 어필하기도 하였다.

불교의 원칙들은 사람이 아닌 진리, 언어가 아닌 언어의 의미, 지식이 아닌 지혜, 세속의 진리가 아닌 초월적 진리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마르크스주의 진리와 다르지 않고, 과학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이 마음으로부터 생겨났고, 오직 식일 뿐이라는 것은 정확하게 변화에 대한 마음/생각의 힘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변증유물론의 생각과 같다.

불교 내부의 과학 정신과, 변화를 만들 수 있는 마음의 힘은 불교 내부에 존재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요소로 강조하고 있다. 사람이 아닌 진리에 의지한다는 점 외에 다른 부분들을 불교의 과학 정신의 예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마음으로부터 모든 것이 생겨났다는 것을 마음의 힘으로 해석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설득력 있는 새로운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딩원준(丁文隽, 1905~1989)은 이 부분을 강조하며 다른 종교와 다르게 창조신에 대한 신앙이 없고, 인간의 마음의 힘을 강조하기 때문에 변증유물론과 비슷하다고도 주장하였다. 이러한 마음의 힘에 대한 해석은 단지 중국에서만 강조된 것이 아니며, 마르크스주의와 불교의 접점을 찾았던 다른 국가의 활동가들에게서도 똑같이 강조되었었다. 이것은 불교의 현대적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외에 이들이 강조했던 불교의 주요한 가르침과 마르크스주의와의 공통된 지점은 ‘일하지 않는 이는 먹지 말라’는 것이다.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위한 수행을 좌선이나 염불에 한정 짓지 않고, 일상의 노동, 일상의 행동까지 수행에 포함시켰다. 이 부분은 육체적 노동을 강조하며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국가를 안정화하려는 중국의 상황과 딱 들어맞았다. 그래서 공산당과 관련된 일상의 노동을 하는 것이 불교도의 길이라고 강조하였다. 공산주의하에서 자신의 일을 하며 주말에 사찰을 방문하여 영적 위로를 받는 것이 불교도이면서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정토의 현대적 모습인 마르크스주의 국가를 완성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과거 계급사회에서는 미래의 정토를 통해 민중들의 저항 의지를 꺾었지만, 마르크스주의에 의거해 다시 해석해보면, 현재 살고 있는 곳에 정토를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심지어 마오쩌둥을 불교의 문제를 해결하고 새 시대를 이끌 구원자, 나아가 정토를 다스리는 왕과 동일시하기도 하였다.

불교 진보주의자들이 시도했던 불교와 마르크스주의 공존은 불교가 살아남고, 불교도들이 새로운 국가의 일원으로 복무하는 것을 도왔다. 그들은 불교가 마르크스주의의 지도하에 새롭게 탈바꿈할 수 있음을 여러 측면에서 강조하였다. 그런데도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이들의 그동안 노력은 위험한 시도로 인지되었다. 원래 중국공산당과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의 불교를 포함한 종교에 대한 기본 입장은 호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했기 때문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이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타 종교 이론의 유사점을 강조할 경우, 마르크스주의가 뿌리내리는 데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 마르크스주의에서 바라본 불교 비판

중국공산당에게 불교는 유물론과 대립되는 봉건 착취계급의 착취를 도왔던 기존의 사상이었기에 새로운 마르크스주의가 뿌리내리는 데에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불교를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꼼꼼히 분석하고 재서술할 필요가 있었다. 런지유는 중국불교가 ‘중국적’인 정밀한 유심론 체계이기에 이에 대한 비판을 통해 ‘중국적’ 유물론 체계를 확고히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중국중세불교사상비판》에서 유물론의 입장에서 서서 불교 유심론이 가진 문제와 한계를 종파별로 분석하여 비판하였다.

여러 종파 중 가장 먼저 성립한 천태종에 대해서 필요에 따라 여러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필요에 따라서는 경전에 없는 구절, 예를 들어 무정중생불성론(無情衆生佛性論)을 추가하는 종파로 폄하하였다. 화엄종과 선종과 달리 중국철학의 인식론 논의를 더 향상시키거나 하지 않았고, 불교 유심론의 모순을 보완하려고만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천태종의 핵심 사상인 일심삼관(一心三觀), 삼제원융(三諦圓融)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먼저, 일심삼관에 대해서는 인간의 감각이나 사고로 인식할 수 없는 진리에 대한 신비적인 직관만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유물론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감각이나 사고로 인식할 수 없는 대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비과학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각과 사고를 통해서 인식할 수 없는 진리는 천태종뿐만 아니라 불교의 다른 종파에서도 이야기하는 것이기에 그는 화엄종과 선종을 비판할 때도 반복한다.

삼제원융에 대해서는 ‘모든 사물이 객관적 존재로서의 물질적인 기반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연화합의 가상에 불과하며 마음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점’을 문제 삼는다. 마음이 없으면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유물론에서 지적하는 유심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담연의 ‘무생물도 불성을 가지고 있으며 성불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불교의 불성을 보편성이 없는 관할구역의 협소함이라는 결점으로부터 구해내고 있다”고 하면서도, 이러한 행위가 바로 유심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비판하였다. 여기에서 불교의 불성이론이 보편성이 없다 한 것은, 담연의 무정중생불성론 이전의 유정중생불성론(有情衆生佛性論)이 성불의 범위를 제한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는 이러한 성불 범위의 제한이 불성론 내부에 논리적 모순을 낳았다고 보았다.

불교의 종교적 유심론 철학의 입장에서 말할 때 만일 그들이 불성에는 보편성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불성은 때때로 어떤 사물에 대해서는 작용하지 않고, 관련도 맺지 않게 된다. 또 불성의 위력이 한계가 있는 것이라면, 불성의 최고이면서 가장 광대하고 또 법력이 끝이 없는 신성한 불가침성은 평가절하되는 것이 된다. 불성의 관할구역을 일정 범위 안으로 규정한다면 그 관할구역의 밖은 유물론의 영역으로 되지 않을 수 없다.

기존 불성이론의 내적 모순을 드러내는 분석을 통해 결국 세상의 질서를 설명하는 데에는 유심론만으로는 부족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유심론으로는 세상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고, 결국은 유물론이 진리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담연의 무정중생불성론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였으나, 여전히 런지유는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불성론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영향에 대해서도 분석하였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① 불성은 피착취 계급인의 소망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이며, ② 이 허구의 가르침으로 인해 피착취 계급인들은 현실에서 변화를 꿈꾸거나 저항의 의지를 갖지 않게 되었고, ③ 이로 인해 착취계급은 통치가 용이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불성론이 마르크스주의의 적이 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불성론의 경우, 모든 존재의 평등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마오쩌둥조차 불성론의 평등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런지유는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의 시선으로 이를 비판하였다.

반면 화엄종에 대해서는 다양한 범주들을 통해 존재를 설명하려고 한 점에서 인식론상 하나의 발전을 이루었다고 보았다. 당대의 뛰어난 철학인 마르크스주의에서도 상대되는 범주들 사이의 상호의존성과 변증법적 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화엄종이 그 부분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 보인다. 하지만, 화엄종에서 범주들―총상(전체)과 별상(개별), 동상(동일성)과 이상(특수성), 성상과 괴상, 시간과 공간, 본질과 현상―을 다루는 방식은 유물론 철학에 위배되는 궤변이라고 비판한다. 총상과 별상, 동상과 이상의 논의에서는 화엄종이 범주들의 상호의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개별적 존재들이 전체 속에 있고, 전체가 개별적 존재들에 있다는 표현을 통해 둘 사이의 구분을 혼동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혼동은 궁극적으로는 개별 존재의 특수성을 소멸한다고 보았다. 성상과 괴상의 경우도 성상이 괴상이 되고, 괴상이 성상이 되는 것을 통해 변화를 설명하고 있지만, 변증법적 발전과 다르다고 보았다. 성상은 성상이고 괴상은 괴상이어야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며 발전하는 변증법적 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의 비판의 요지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그들(화엄종)이 이끌어낸 결론은 일과 다에 분명한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화엄종은 일과 다의 관계를 논증하면서 일과 다의 상대적 대립관계 안에 절대가 있다는 것을 완전히 부정한다. 상대 안에 절대가 있음을 승인하고 안 하고는 확실히 변증법과 상대주의의 경계선이다. 그들은 상대를 절대화한다. 다만 상대만을 인정하고 절대를 부인하는 것이 됨으로써 필연적으로 상대주의, 궤변론, 유심론으로 빠져버린다. 화엄종은 바로 이 오류로 말미암아 샛길로 접어든 것이다.

상대적 대립관계 안에 절대가 있다는 것은 대대의 쌍을 가지고 있는 범주들은 상호의존하는 내재적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각각은 고유의 절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각 범주의 고유성을 인정해야 하는데, 화엄종은 오히려 둘 간의 상대적 관계만을 강조하고 있기에 ‘상대를 절대화한다’라고 말했다. 이로 말미암아 불교는 상대주의에 빠지게 되고,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궤변, 하나 안에 전체가 있고, 전체 안에 하나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런지유는 지적한다. 여기서는 이러한 사고의 흐름으로 인해 유심론으로 귀결된다고 말하였지만, 그의 전체 논지를 보면, 유심론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고 흐름이 이루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또 다른 주요 범주 개념인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는 화엄종에서 이를 주관적 관념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유물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시간과 공간은 모두 물질존재의 형식이다. 시간은 물질의 존재와 발전의 연속성을 표시한 것으로 물질로부터 떨어져 있는 추상적 존재는 아니며 생각마다 나타나곤 스러지는 관념적 산물이 아니다. … 그런데도 화엄종은 시간의 앞뒤는 주관적 관념에 불과하고 3세도 9세로 나눌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9세도 일종의 주관적 관념이라고 본다. 시간의 관념이 물질존재로부터 이탈한 것이며, 사상의 산물로서 추상화되어 객관적 사물의 운동 안에 출현한 순서를 따를 필요가 전혀 없고, 마음대로 앞뒤를 뒤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결론은 옛적은 이제와 다르지 않고 이제는 옛날이 된다.

불교에서 시간은 일종의 관념이기에 영원 속에 순간이 있고, 순간 속에 영원이 있으며, 시간의 길이도 깨달은 부처의 경우는 자유롭게 줄였다 늘였다 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유물론에서는 시간과 공간은 존재가 존재하게 하는 형식이다. 시공간이라는 틀이 없이 존재는 존재할 수도, 경험될 수도 없는데 불교는 이를 관념 속으로 소멸시켰다고 본다. 그래서 런지유는 모든 것을 마음과 관념으로 돌리는 불교는 계급모순으로 발생한 억압구조를 직시하지 못하게 했다고 비판한다.

대체로 화엄종 철학은 그 자질구레하고 번잡한 스콜라적 방법으로써 각 방면으로부터 객관적 물질세계가 존재하지 않고 인류의 온갖 고난은 계급의 억압에 의한 것이 아니며, 그것은 맞닥뜨린 현실의 사회제도와 사회 존재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논증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불교적 종교 선전을 받아들이게 하여 현상에 안주시킨다.

억압구조를 직시하지 못하게 했기에, 중생들은 현실을 개혁하려는 의지도 갖추지 않게 되며, 개인의 마음만 다스리면 문제가 해결 가능하다고 생각하기에 투쟁 없는 삶을 추구하게 한다. 이는 계급투쟁을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유물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선종의 경우에도 런지유는 주관적 사유와 객관적 현실과의 모순의 문제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해서 중국 인식론에 엄밀함과 풍부함을 안겨주었다고 역사적 측면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다만 그 해결방안은 유물론이 아닌 유심론이었기에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선종은 피착취계급을 위한 불교로 긍정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들은 선종의 중심인물인 육조혜능이 노동자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백장 선사의 노동을 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는 노동 중시의 가르침, 보시 같은 것이 아닌 자기 안의 부처를 바라보는 명상 수행을 중시한 점에서, 기존 권위에 저항한다는 점에서 선종에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런지유는 선종에 대해서 객관적 유심론을 주관적 유심론으로 만들어서 오히려 사람들이 유심론에 더 깊이 빠지게 했다고 비판한다.

선종이 객관적 유심론에서 주관적 유심론으로 바뀌는 것은 한층 깊이 유심론의 늪에 빠져든 것이다. 그것은 온갖 현상의 객관적 진실성을 말살하여, 더욱더 거칠며, 더욱더 독단적이고, 더욱더 주관적이며, 극단적이고 유심론적인 인식론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주관적 유심론에 의한 인식론을 세움과 동시에 과거의 철학 학파에 비하여 매우 심각하게 한층 집중적으로 사유와 존재의 문제를 다루었다.

선종이 객관적 유심론을 주관적 유심론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외부에서 불성을 찾지 않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찾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런지유는 그러한 선종의 자신의 마음에 의지하게 하는 가르침이 현상의 객관적 진실을 삭제하고, 주관적으로 세상을 보며 개개인의 독단성을 키우게 했다고 비판한다. 선종이 경전 공부나, 외부의 부처에게 재물을 많이 보시하지 않아도 명상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고 가르쳤기에 대중에게 많은 호응을 받았으며, 선종의 강한 주관적 유심론이 퍼졌다. 그래서 런지유는 결과적으로는 신비주의에 의해 물질세계를 부정하는 유심론이 강화되었다고 비판한다. 나아가 나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귀결시키는 것은 화엄종의 관념만 바꾸면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될 것이라고 가르친다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기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불교의 발전 또한 마르크스 유물주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피착취계급이 착취자와 투쟁할 때 무력감에 내세를 꿈꾸게 된다는 레닌의 말에 근거하여, 후한 말 일어났던 농민봉기의 실패로 불교의 전파와 확산이 가능했다고 보았다. 후외려의 중국 철학사도 같은 전제하에서 불교와 제반 철학을 재서술하였다.

이처럼 불교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은 마르크스주의를 중국에 뿌리내리기 위한 과정에서 진행되었다. 그래서 불교의 역사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의 진리성을 확보하고, 불교철학의 모순을 지적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우월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러한 견해는 자연스럽게 문화혁명의 불교 탄압으로 이어졌다.

 

4. 마오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와 불교

마오쩌둥 사후, 불교에 대한 탄압은 멈추었고, 1978부터 재건사업이 시작되면서 정치 · 사회 · 경제적 요인들로 불교는 다시 부흥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 이후 중국 정부를 이끌었던 장쩌민(1989~ 2002), 후진타오(2002~2012), 시진핑(2012~ )의 시대를 거치면서 불교는 계속 성장했다. 장쩌민의 컬트 종교집단과의 전쟁에, 후진타오의 사회 안정과 사회적 화합을 위한 목표에, 시진핑의 중국 문화에 대한 자신감과 중국의 꿈이라는 각 지도자의 정치지도 이념의 기대에 부흥하며 불교는 자신의 자리를 되찾아갔다.

2012년도 중국불교협회의 보고에 의하면, 33,000개의 사찰이 중국 내에 있으며, 그중에 티베트와 소수민족 지역 내의 사찰을 뺀 순수 중국 사찰은 28,000개라고 한다. 비구와 비구니의 수도 10만 정도가 중국인 승려이며, 티베트 승려 등을 포함하면 24만이 된다고 한다. 그 외에도 38개의 불교 학교와 대학이 있고, 100개 이상이 불교 잡지와 200개 이상의 인터넷 사이트가 있다고 한다. 불교인 수는 1978년 정부 공식 발표에 의하면 1억 명이었으며, 조사 기관에 따라 3억 또는 그 이상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 교단의 확산뿐만 아니라, 불교 관련 연구에서도 부흥의 움직임이 있었다. 비록 마오쩌둥이 종교연구소를 설립하고 중국문화로서 불교 연구를 독려했음에도 그의 생존 기간에는 연구가 활발하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사후 1980년대에 이전의 출판물들이 다시 출판되고, 불교 사상사 연구와 관련하여 많은 연구성과가 출판되었다. 런지유의 영향력은 여전히 컸고, 그 외에도 한국에도 잘 알려진 뤼청(呂澂, 1896~1989), 팡리티엔(方立天, 1933~2014) 등이 불교 사상사와 불교철학에 대한 깊이 있는 논문과 책을 출판하였다. 그 외에 불교학자인 구오펑(郭明)은 11종류 13권에 달하는 다작으로 불교학 연구에 기여했다. 이후 1990년대에 들어서는 연구성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축적되었다.

불교가 다시 부흥하면서, 사상적인 면에서 더욱 주목받은 것은 선불교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선불교는 피착취계급의 종파라는 이해들이 있었기에 마오쩌둥도 호의적으로 바라보았으며, 수행을 노동으로까지 확장시켰기에 마르크스주의 이념과도 통하는 점이 많았다. 또한 인도의 불교가 중국의 토양과 합쳐져서 만들어진, 가장 중국적인 종파라는 인식도 있었다.

이러한 긍정적 평가로 선불교는 대중 속에서는 생활선 수행으로, 학자들에게는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 부상하였다. 많은 선어록이 현대어로 번역되었다. 이 외에도 유식사상, 천태학, 화엄학도 활발하게 연구되었으며, 흥미롭게도 천태학은 ‘승려 학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정토종, 밀교, 율학에 대해서는 자료가 많지 않아서 연구에 어려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연구되고 있으며, 이 외에도 티베트불교와 윈난 지방의 상좌부불교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이 많은 연구들은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와 불교를 비교하지 않는다.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도 하지만, 문화혁명을 겪으면서 둘의 비교가 금기시되어 왔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이전에 비해서 학문의 자유는 가지고 있으나 연구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 그늘의 한계 속에서 시행되고 활용되고 있다. 중국공산당으로부터 자치권을 가진 연구단체는 중국대륙 내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의 지도하에, 그 틀 안에서 인민과 국가의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전제하에서 불교의 모든 분야에서 부흥이 이루어지고 있다.

 

4. 나가며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후 불교 지도자들은 마르크스주의와의 공존을 위해 국가가 원하는 방식으로 불교를 재해석하며 개혁하고자 했다. 불교와 마르크스주의 모두 공민을 이익되게 하고자 하는 공동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불교가 가지고 있는 미신적, 비과학적, 봉건적 요소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지도하에 정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불교의 유심론이 피착취계급을 현실에 안주하게 하여 혁명 의지를 꺾어버렸다고 비판하였다.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불교는 잠시 암흑기에 머물렀었지만, 건국 초기 마르크스주의와 불교의 화합 노력은 문화혁명 이후 불교 부흥의 토대가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와 불교의 연합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1930년대 아시아 식민지국들에서 시작되어 지금도 사회참여적 불교 운동에서 중요하게 고려되고 있다. 비록 현재 제2의 부흥기를 맞고 있는 중국불교에서는 더 이상 이러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과거 중국불교에서의 논의들은 현재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사회참여 불교 이론을 세우는 데 좋은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지혜경 schaffen@gmail.com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연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불교철학 박사). 버지니아 주립대학 방문교수 역임. 주요 논문으로 〈가상현실 시대에 불교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철학상담방법론으로서의 선불교 수사학〉 “A Rhetoric of Zen in contemporary Korean Buddhism-Pomnyun’s Quote” 등과 저서로 《근대불교인물열전》(공저) 등이 있다. 현재 연세대 철학연구소 전문연구원, 경희대학교 강의교수, 희망철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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