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세계를 가르친 현대불교의 스승 10인

1. 머리말

20세기 전반기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세상이 온통 황폐해진 시대였다면, 후반기는 그 전쟁의 폐허를 재건하고 사람들이 입은 육체적 ․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며 인류가 새로운 도약을 맞이할 수 있게 하고자 여러 분야에서 출현했던 선각자들은 오롯이 자신의 인생을 바쳤다. 이 가운데 불교계에도 세계적인 스승들이 나타나 불교적 가치와 사상을 바탕으로 피폐해진 인류의 정신세계를 회복시키며,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데 앞장섰다.

그들 가운데 한국불교의 전통과 사상을 세계에 알리며 세계인들의 마음을 일깨우고 치유하며, 그들로 하여금 불교적 가치와 사상을 기반으로 자아를 새롭게 발견하게 하며, 서로 평화적으로 화합하게 만들기 위하여 헌신한 세계적인 스승이 있으니, 바로 숭산행원(崇山行願, 1927~2004) 선사(이하 ‘숭산 선사’)이다.

 

2. 시대적 배경과 간략한 행장

숭산 선사의 속명은 이덕인(李德仁)으로, 1927년 8월 1일 평안남도 순천군 군내면에서 출생하였다. 1940년에 순천공립학교를 졸업한 그는 부친의 뜻에 따라 평양공업학교에 입학하였다. 숭산 선사가 이 학교에 다닌 시기는 일본 제국주의의 악랄한 식민 통치가 막바지로 치닫던 때였으며, 그의 고향 평안남도 순천군은 일제 강점기에 항일운동이 가장 강렬하게 일어난 대표적인 지역에 속했다. 10대 후반의 청년 이덕인의 가슴도 애국심으로 불타고 있었으니, 일례로 재학 중 지하 독립운동단체 활동에 가담하다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심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해방되던 이듬해 그는 동국대학교에 입학하지만, 신탁통치 찬반 운동과 국대안(國大案) 반대운동 등의 영향으로 당시 대학 사회 역시 극도로 혼란스러웠고, 정치권의 분쟁이 동족 간의 살상으로까지 이어지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 환멸을 느낀 그는 인간 생사의 궁극적인 질문을 제기하며 입산수도를 단행하였다. 입산 후 극한의 고행으로 용맹정진한 끝에 그는 마침내 본각진성의 참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 후 선사는 수덕사의 고봉 선사에게 인가를 받고 1949년 1월 25일에 비구계를 수지함으로써 경허성우, 만공월면, 고봉경욱 선사로 이어지는 덕숭법맥의 계승자가 된다. 1952년 육군에 입대 후 전역한 다음 해 선사는 화계사 주지로 취임했다. 한편 효봉, 동산, 청담, 경산 스님들과 함께 불교정화운동을 추진하였는데, 1962년 비구 ․ 대처 통합종단 비상종회 의장으로 피선되어 활약했다. 이 외에도 조계종총무원 총무부장, 재무부장, 초대 감찰부장 등, 전환기에 중책을 역임하며 종단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불교신문〉의 전신(前身)인 〈대한불교〉의 창간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966년에는 종단의 요청으로 도일하여 재일 홍법원을 설립하며 국제포교의 행보를 시작했는데, 일본에서 거둔 포교 성과에 그치지 않고, 1969년에는 그 지경을 홍콩으로 확장했다. 이후 1972년에는 미국에도 선원을 세우는데, 이것이 오늘날 세계 30여 개국에 120여 개 이상의 지부를 둔 세계적 수행단체인 관음선종(The Kwan Um School of Zen)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선사는 국내에서도 화계사와 계룡산에 국제선원을 설립함으로써 한국을 국제포교의 중심지로 만드는 작업에도 열정을 쏟았으며, 화계사 조실로 있던 2004년 입적하니, 법랍 57세, 세수 77세였다.

 

3. 주요 활동과 가르침

한 인물의 가르침은 평소 그 사람의 언어생활에서 무엇을 강조했는가를 고찰하는 것이 한 방법이겠지만, 이보다 더 진정성이 있는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의 삶을 통해 무엇을 보여 주었는가 하는 것이 될 것이다. 특히 수행을 강조하는 불교에서 그 수행의 목적이 깨달음 자체에 있다기보다 깨달음이란 오히려 불교의 시작일 뿐, 깨달은 내용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듯이, 숭산 선사는 언어나 관념에 머물기 쉬운 깨달음을 자신의 삶을 통해 실천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그런 각고의 노력으로 형성된 숭산 선사의 생애와 그것을 통해 세상에 전한 가르침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생명에 대한 자비심과 포교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전 세계를 망라한 전법 활동을 펼친 것이며 둘째, 불교정신을 통해 세계인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화합하며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세계일화대회를 펼쳐나간 것이며 셋째, 〈불교신문〉의 창간 및 수행법 변용 등을 통해 소통과 공감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확산시킨 점이다.

1) 자비심과 포교 열정이 낳은 세계적인 전법 활동

불교를 소위 ‘깨달음의 종교’라고 하며, 실제로 불교사적으로도 깨달음을 강조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어느 종교를 불문하고 경시할 수 없는 분야가 바로 ‘포교’ 즉 ‘전법’의 영역이다. 포교는 모든 종교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근간이다. 뛰어난 교리를 갖고 있음에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거나, 아주 빈약한 기반의 종교로 전락한 경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붓다 역시 깨달음을 강조하였지만, 깨달음 이후 전법이 차지하는 가치를 역설하며 제자들에게 전법에 일념 할 것을 독려하였다. 그런 측면에서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인 동시에 ‘전법의 종교’이기도 하다.

한국 불교사에 여러 위대한 스승들이 출현하였지만, 숭산 선사만큼 일평생을 전법 활동에 전념한 인물은 드물며, 또한 그 활동 범위가 전 세계를 망라한 수준의 인물은 더더욱 드물다. 전술하였듯이 선사가 창건한 관음선종은 세계 30여 개국에 120여 개의 선원이 결합된 국제적 조직으로 성장하였는데, 이러한 세계적인 조직의 출발은 그의 생명에 대한 자비심과 포교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중반 서울 초동에는 동국대 기숙사로 사용되던 일본 서본원사 별원 건물이 있었다. 여기에 새 건물을 짓고자 공사를 하던 중 지하실에서 무려 4천여 구나 되는 일본군 유골이 발견되었다. 학교 측 의견이 그 유골을 없애는 쪽으로 기울어져 가던 중, 당시 동국대 상무이사와 종단 총무부장직을 맡고 있던 숭산 선사가 다른 의견을 제시하였다. 선사는 비록 그 유골이 식민 통치를 자행했던 자들의 것이라 할지라도, 훗날 한일 교류가 회복되고 그 후손들이 조상의 유골을 찾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골을 함부로 훼손하는 것은 출가자의 도리가 아니므로 다른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마침내 그 유골들은 화계사 명부전에 안치되었는데, 그 후 반년 만에 선사의 혜안은 빛을 발하게 되었다. 1965년 한일 간 국교 정상화가 되고, 일본의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가 방한하였는데, 수행단의 일원으로 동행했던 일본의 정치인들과 주요 신문사 기자들에게 화계사에 안치된 일본군 유골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며 이 사건이 국내외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이후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유골 인수를 요청하였고, 일본에 산재해 있던 한국인들의 유골도 되찾아오는 계기가 마련되기까지 하였다.

이 일로 숭산 선사는 한일 양국 간 긴장을 완화하고 화해를 촉진할 수 있는 상징적인 인물이자, 재일동포 불자들의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는 적임자의 이미지도 얻게 되었다. 오요다니 요시오라는 일본 국회의원이 서신을 통해 재일 한국인들을 위한 전법 활동을 추진해 주기를 수 차례 요청해왔을 뿐 아니라, 한국 정부와 종단으로부터도 일본에서 포교 활동을 해 줄 것을 권유받았다는 사실이 이것을 잘 증명한다고 하겠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와 북한이 함께 추진 중이던 재일 한국인 북송작업을 막고자 고민하며 그 소임을 감당할 인물을 찾고 있었는데, 숭산 선사를 적임자로 보고 전적인 지원을 약속하며 일본행을 요청하였다.

1966년 마침내 숭산 선사의 일본행이 성사되어 도쿄에 홍법원이 개설되었다. 그러나 착수 과정에서 그는 상당한 난관에 직면했는데, 한국 정부에서 지급하기로 한 지원금이 지연되어 사찰로 사용할 집을 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선사는 셋집에서 매주 법회를 열며 포교의 집념을 불태웠다. 또한, 조총련계 불자들이 신입 불자들을 교육한 후 북송하는 작업을 저지하기 위하여 그는 한국대사관과 공조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결국, 이러한 모든 노력이 결실을 거두어 재일동포는 물론 일본인들까지도 선사가 이끄는 법회와 참선 교육에 참여하였고, 마침내 신도들의 보시로 셋방으로 시작했던 법당을 벗어나 더 큰 사찰로 확장하게 되었다.

녹록지 않던 현지 상황에도 굴하지 않았던 숭산 선사의 포교를 향한 열정과 투지는 일본 홍법원이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그 흐름을 이어 1969년에는 홍콩 홍법원이 개설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1972년에는 미국에까지 그 지경을 넓히게 되었다. 미국에서도 초기 정착 시기에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선사가 몸소 세탁소에서 기계 수리공으로 일하며 미국인들에게 설법하고 수행을 지도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숭산 선사가 후세에 전하는 가르침은 생명에 대한 자비심과 포교를 향한 열정의 중요성이다. 선사가 평소에 품고 있던 생명에 대한 자비심이 작은 불씨가 되어 첫 국제포교를 위한 일본행이 성사되었다. 그는 고국을 식민지화했던 원수와 같은 일본군의 유골이라 할지라도 그 존재를 고귀하게 여기고, 그 유족들의 아픈 마음을 생각하는 자비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의 포교에 대한 열정은 자신이 어떠한 환경에 처해도 낙심하지 않게 했고, 현장에서 직면하게 되는 수많은 역경을 이겨냄으로써 결국 국제포교가 성공적인 단계에 안착하게 되는 결과를 얻게 된 것이다.

2) 세계인들의 화합과 평화 추구한 세계일화대회 개최

‘세계일화’라는 개념은 당대(唐代) 시인 왕유(王維)가 쓴 〈육조혜능선사비명〉에서 유래되었다. “세계일화 조종육엽(世界一花 祖宗六葉)” 즉 “세계는 하나의 꽃이요, 조사의 종풍은 여섯 꽃잎이라”라는 의미로 초조 달마대사로부터 육조혜능에까지 이르는 선종의 전등(傳燈)을 묘사한 글귀이다. 이 말이 만공월면(滿空月面, 1871~1946) 선사의 법문에 담기며 오늘날 한국 불교계에 널리 회자되었다.

만공 선사의 세계일화 사상은 숭산 선사 대에 와서 이 땅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전술한 바와 같이 미국 프로비던스 선원에서 비롯되어 전 세계 30여 개국에 120여 개의 선원이 결합된 관음선종이라는 단체로 성장시킨 것은 세계일화의 가르침을 실현해가는 과정의 하나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세계일화대회를 추진했는데, 1987년 수덕사 제1회 대회를 시작으로 전 세계를 돌며 3년마다 대회를 개최하였다.

숭산 선사가 세계일화대회를 추진한 것은 스승인 만공 선사의 세계일화 사상을 직접 실천에 옮기고자 함이었다. 이 대회는 오늘날까지 꾸준히 지속되며 전 세계 불자들이 함께 모여 세계일화 사상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고,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된 이 세계를 하나로 어우러지고 화합하는 장으로 만들고자 비록 작은 역할이라도 더한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숭산 선사가 세계일화대회를 통해 우리에게 전한 가르침은 명료하다. 불교적 가르침이 관념의 세계에만 머무르지 않고 인류의 평화와 화합 그리고 인간의 생명과 가치 존중 등을 위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이러한 목표가 너무 원대한 것이기에 많지 않은 불자들의 모임이 무슨 큰 힘을 발휘하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지라도 함께 모여 한목소리를 내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불교계 이익만을 대변하거나 세속 정치의 희생양으로 전락하는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균형을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런 측면에서 ‘세계일화대회’는 종교적 순수성을 고수하며 뛰어난 균형을 유지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3) 〈불교신문〉 창간과 미디어포교 활동

숭산 선사의 업적 가운데 세계적인 포교 활동이 대표적이기 때문에 그것에 가려져 세간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가 국제포교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불교신문〉의 전신인 〈대한불교〉 창간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이 사실이 왜 중요한가 하면, 당시에는 불교방송 개국 이전이기 때문에 불교계 언론으로서 〈불교신문〉의 역할은 막중한 것이었다. 그러한 시기에 불교계 언론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일을 묵묵히 오랜 기간 감당하며 〈불교신문〉의 초석을 다진 그의 행위는 선각자다운 것이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쟁까지 겪었던 20세기 중반 한국 사회는 거의 모든 분야가 혼란한 상황이었고, 그중 불교계는 정화운동에 따른 비구와 대처 간의 대립까지 더해져 심각한 분쟁의 상황 속에 있었다. 1959년 대처 측에서 자체 기관지 〈현대불교〉를 창간하여 대처 측을 옹호하고 비구 측을 비난하는 기사를 다수 게재하자, 정화운동을 이끌던 당시 총무원장 청담 스님은 정화운동의 이념을 설파할 비구 측 언론의 설립을 염원하였다. 그 결과 1960년 1월 1일 ‘대한불교’라는 제호로 한국 불교계 최초의 현대적 신문이 창간되었다. 〈대한불교〉는 창간 이후 1980년 11월 30일 자 신문까지 20년 11개월 동안 ‘대한불교’라는 명칭으로 발간되었고, 1980년 10 ․ 27 법난을 전후하여 ‘불교신문’으로 개명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한불교〉는 창간 이후 4년 9개월 동안은 월간으로 발행되었고, 그 후 ‘주간 시대’로 접어들었는데, 월간으로 발행되던 초기 4년 동안은 총무원 측 인사들의 잦은 교체로 인해 사장과 발행인이 여러 차례 바뀌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유독 한 스님만이 예외적으로 〈대한불교〉의 창간 당시뿐 아니라, ‘월간 시대’에서 ‘주간 시대’로 전환된 이후에도 줄곧 막중한 역할을 유지하며 〈대한불교〉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니, 그가 바로 숭산 선사였다.

숭산 선사는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청담 스님과 함께 〈대한불교〉의 창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창간 7개월 만에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월간 시대’에서 ‘주간 시대’로 넘어간 이후에도 역시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서 역할을 계속해 나가며, 장장 13년 가까운 기간 동안 〈불교신문〉과 함께 동고동락했다. 불교신문사가 펴낸 《불교신문 50년사: 한 장의 불교신문, 한 사람의 포교사》에서도 “대한불교를 키운 종단의 제일 공로자”이며, “행원 스님이 없는 불교신문, 즉 대한불교는 존재할 수 없을 만큼 그 역할이 컸다.”라고 기록하고 있을 만큼 숭산 선사가 〈불교신문〉의 창간과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실로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대중포교 현장에서 불교계 신문이나 방송이 갖는 역할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 가운데 비록 신문보다 짧은 역사이기는 하나 불교 라디오와 TV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대중매체로서 불교계 신문의 역할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고 하겠다. 또한, 〈불교신문〉이 2022년 3월에 ‘불교신문 TV국’을 신설하며 그 범위를 확장해가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신문이 가지고 있는 대중적 기반이 TV 방송으로까지 연계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을 볼 때 한국 불교계 최초의 현대적 신문인 〈불교신문〉의 창간과 발전에 기울인 숭산 선사의 공헌은 실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것이다.

 

4. 한국 불교계에 미친 영향

1) 한국불교 세계화의 가능성 입증

숭산 선사가 일본에서 홍법원을 처음으로 개설했던 1966년은 근현대 한국 불교사적 측면에서 상당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니, 조계종단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해외에 전법 활동을 시작한 해라고 할 수 있다. 선사가 도일한 이후 초기에는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그에게 내재한 전법의 열정으로 기어이 홍법원을 성공적으로 안착시켰으며, 이후 홍콩으로까지 그 지경을 넓히게 되었고 마침내 1972년에는 미국에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타국에서 홀로 법을 전해야 하는 과제의 무게가 실로 무거웠음에도 숭산 선사는 온몸을 불사르는 열정과 헌신으로 그것을 감당해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불교의 해외 진출은 아시아 여러 나라와 비교해볼 때 확연히 두각을 나타냈다고 볼 수 없었으며, 특히 일본보다는 상당히 뒤진 상황이었다. 그 원인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데, 500년이 넘게 지속한 조선왕조의 억불숭유 정책이 막을 내리기가 무섭게 한반도는 다시 수십 년간 일제의 식민지배하에 놓였고, 이 시기에 일제의 사찰령에 근간한 왜색 불교화가 자행되었다. 이후 해방을 맞이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등, 소위 ‘격동의 시기’를 보내며 한국불교가 새로운 기틀을 확보하기 어려운 시대적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국제포교의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한참 뒤졌던 한국불교가 해외에 뿌리내리는 데에 여러 가지 형태로 이바지했던 이들이 있으며, 그 가운데 숭산 선사가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낸 대표적인 인물이다. 생전에 이미 ‘세계 4대 생불’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던 숭산 선사가 보여준 성과는 한국불교 세계화의 가능성을 실제 포교 현장에서 입증한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그의 활약상은 한국불교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수준에서 한 차원 더 나아가, 한국의 ‘회통불교’ 정신이 바탕이 된 세계일화대회와 같은 방식을 통해 한국불교가 세계의 불자들을 회통시키며 이끌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키워준 사례라고 하겠다.

2) 소통하고 공감하는 가치의 중요성 전달

앞서 기술했듯 숭산 선사가 〈불교신문〉의 전신인 〈대한불교〉 창간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사실은 불교계에서조차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청담 스님이 총무원장으로서 종단 차원에서 〈대한불교〉의 창간을 주도하였다면, 숭산 선사는 신문의 발행 현장에서 진두지휘하였다. 창간 후 7개월 만에 사장에 취임하였고, ‘월간 시대’에서 ‘주간 시대’로 바뀐 이후에도 편집인 겸 발행인의 역할을 계속하며 장장 13년 가까운 기간 동안 〈불교신문〉의 사회적 · 재정적 기반을 구축하고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신문과 방송을 주축으로 한 언론이 갖는 역할의 중요성은 시간이 갈수록 강조되고 있다. 또한,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사회관계망이 급속도로 발달함에 따라 개인과 개인 또는 개인과 집단 간의 소통과 교류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역시 많은 사람이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를 내다보는 선견지명으로 숭산 선사는 언론을 통한 소통의 중요성을 미리 간파하며 〈불교신문〉이 기초를 확립하는 데 묵묵히 본인이 맡은 소임을 다하였다. 혹자는 그 정도의 중요성은 웬만한 사람이면 간파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을지 모르나, 불모지와 같았던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오랜 세월을 헌신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숭산 선사는 〈불교신문〉이 종교계 언론의 선봉에 설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하였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불교계 언론의 존재와 그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깨닫고 그것이 실현될 수 있도록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어느 영역에서나 소통과 공감이 중요하다는 점을 전하고 있다. 제자들과도 언제나 대화하고 소통하는 데에 적극적이었던 그의 행동은 종단 전체가 소통하고 공감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우는 데 중요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일례로 그가 개발한 공안 참구의 과정인 ‘십문관(十門關)’에서는 간화선 수행 전통에서 강조되던 ‘입실참문(入室慘聞)’ 제도를 더욱 활성화함으로써 단계별 공안의 점검을 ‘공안 인터뷰’라고 지칭하며, 해외 제자들이 더욱 친근하며 쉽게 인식할 수 있도록 개선하여 소통과 공감의 가치를 수행 현장에서도 실천하였다.

 

5. 맺음말

“노랗게 물든 어느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로 시작하는 명시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에서 미국의 시인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1963)는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라고 고백한다.

숭산 선사도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고, 그것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은 황무지와 같을 때가 많은데, 숭산 선사가 걸어간 길도 그러했다. 그 길에서 선사는 고군분투할 때가 많았지만, 그런 상황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감내하였다. 그 결과 국내에서는 〈불교신문〉이 종교계 언론 중 리더로서 자리매김하게 하였으며, 해외에서는 관음선종이 세계적인 조직으로 뻗어가게 했다. 또한, 세계일화대회를 통해 전 세계 불자들이 함께 모여 인간 존중과 세계평화를 논하며 이것을 위해 불자들이 해야 할 책임과 역할을 도모하게 했다.

숭산 선사는 20세기를 빛낸 세계의 불교 스승 가운데 한 사람으로 언급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다. 한국의 불자들은 그가 보인 삶의 모범을 본받으며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

 

 

최용운 yuchoe@hanmail.com

연세대학교와 보스턴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서강대학교에서 박사학위(종교학)를 취득하였다. 현재 서강대학교에 출강하고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 〈숭산행원의 선사상과 수행론〉 〈한국간화선의 대중화 · 세계화를 위한 제안〉 등과 저서로 《숭산행원의 생애와 사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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