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현대 중국불교의 현실과 전망

1. 머리말

오늘날 중국불교는 얼른 보기에 한국불교나 일본불교와 다른 점이 없다. 물론 출가자의 복식이나 사원의 구조와 분위기는 많이 다르다. 하지만 불교도가 자유롭게 종교 생활을 한다는 점에서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그 다름은 종교 활동의 자유와 관련된다. 종교 활동은 사실 ‘신앙자와 신앙 대상 간의 관계’로만 한정할 수 없다. 그 종교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도 당연히 종교 활동에 포함되고 그것의 연장으로 사회상의 특정 이슈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행동하는 것도 종교 활동이다. 그 과정에서 정부나 정권의 정치적 입장이나 정책과 다른 주장을 펼칠 수도 있고, 때론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런 차이와 충돌 지점에서 ‘자유’의 존재 여부와 그것의 폭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불교가 타 국가의 불교와 달라 보이지 않는 계기는 아마도 개혁개방 때문일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의 쓰라린 실패를 맛본 후 1978년 12월 공식적으로 개혁개방을 결정했다. 우리에게 꽤나 미화된 덩샤오핑(鄧小平)은 부국의 길을 선택했다. 이후 중국은 우리가 알다시피 ‘공산당 일당독재’를 전제로 한 자본주의 국가를 표방했다. 물론 중국 정부는 개혁개방 이전부터 사용한 ‘중국특색사회주의’라는 개념으로 그것을 포괄했다.

본디 그 표현은 사회주의 종주국을 표방한 소련과 사회주의 2등 국가인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서구 자본주의와 차별화를 위한 말로 사용된다. 적어도 오늘날 그 특색은 ‘공산당 일당독재’일 것이다. 개혁개방 이후 수십 년 만에 중국 경제는 고속 성장했고 국가 위상도 한껏 높아졌지만, 정부에 의해 전격적으로 단행되는 특정인에 대한 ‘인신 구속과 재산 몰수’에서 중국 특색을 확인한다.

중국불교는 개혁개방 이후 급속한 경제발전을 바탕으로 그 교세가 확장했고 교인 수도 증가했다. 과거 중국 사원을 방문한 사람이 요즘 다시 그곳을 방문한다면 아마도 복구된 사원의 규모와 화려함에 대단히 놀랄 것이다. 하지만 종교와 종교 활동을 관리 감독하는 정부와 불교계의 관계는 변화가 없다. 모든 사찰은 등록된 ‘종교시설’이어야 하고 또한 이 등록된 공간에서만 종교 활동이 가능하다. 사실 이런 상황은 일찌감치 확정됐다. 이 글에서는 사회주의 중국 불교의 기본적인 성격 규정이 진행된 1950년대와 60년대 초 문혁 이전 시기 중국불교를 몇 가지 주제로 살펴본다.

 

2. 사회주의 중국의 건립과 종교 자유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毛澤東)은 베이징 자금성 남쪽 정문인 천안문 성루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했다. 청 제국이 붕괴한 지 40여 년 만의 일이다. 중국에서는 1949년 이후 중국을 흔히 신중국으로 묘사한다. 신중국의 수억 인민 가운데 스스로 사회주의 중국을 선택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국가 권력을 장악한 세력이 사회주의 정권이었을 뿐이다. 국민당 군대를 따라 고향을 떠나지 않는다면 그냥 중국 인민이 되고 말았다. 수많은 불교도나 불교계 인사들도 사회주의 중국은 염원한 세상이 아니라 닥친 세상이었다.

1949년 중국공산당은 국공내전의 승리를 확신한 이후부터 신생 사회주의 국가의 새로운 질서를 설계했다. 1949년 9월 21일부터 30일까지 개최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에서 심의된 〈공동강령〉은 일종의 헌법 형식을 띠고 있었다. 국가 운영의 원리를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 핵심은 ‘제국주의 반대, 봉건주의 반대, 관료자본주의 반대’였다. 이것을 전제로 하고 〈공동강령〉의 각 조항은 설치되었다. 종교와 관련해 제5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은 사상 · 언론 · 출판 · 집회 · 결사 · 통신 · 인신 · 거주 · 이전 · 종교 신앙 · 시위행진 등의 자유권을 가진다.(第五條: 中華人民共和國人民有思想 · 言論 · 出版 · 集會 · 結社 · 通訊 · 人身 · 居住 · 遷徙 · 宗教信仰及示威遊行的自由權)

1949년 9월 중국 중앙인민정부 수립 직전 통과된 〈공동강령〉은 헌법 예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종교 신앙의 자유’는 종교를 신앙하든 하지 않든 혹은 종교를 신앙하다가 하지 않든 또는 어떤 종교를 신앙하든 그것은 완전히 자유라는 것이다. ‘천부신앙권’이라고 할 법하다. “〈공동강령〉은 종교 신앙의 자유를 보증하지만 ‘종교 신앙의 자유’ 정책은 불교도 혹은 어떠한 종교라도 사회주의 개조를 거절할 수 있는 호신부는 아니었고, 또한 불교도가 이 때문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거나 정부의 지도를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을 당시 불교계 지도자들도 분명히 인지했을 것이다.

1954년 온전히 제정된 헌법 제86조에 따르면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은 종교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만 18세 이상의 공민은 민족, 종족, 성별, 직업, 사회 출신, 종교 신앙, 교육 정도, 재산 상황, 거주 기한 등을 불문하고 모두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진다.” 이렇게 ‘종교 신앙의 자유’는 사회주의 중국에서도 공민의 권리로 명시된다. 그런데 사실 1954년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제88조는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은 신교(信敎) 자유가 있고, 또한 종교를 반대할 자유도 있고, 종교와 풍속 · 관습을 개혁할 자유도 있다.”는 규정이 원안이었다. 당시 중국불교협회(이하 불교협회) 주요 지도자와 판첸 라마 등은 이 원안에 찬성했지만 달라이 라마는 반대했다. 결국 마오쩌둥이 참석한 헌법 조항 조정 자리에서 원안은 폐기되고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은 종교 신앙의 자유가 있다.”는 조항으로 결정된다.

이렇게 헌법대로라면 종교에 대한 기본 입장에서 사회주의 중국과 서방 국가는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헌법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우리 헌법에선 “제11조 ①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 ·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했고, “제20조 ①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했다.

중국 현대불교를 연구하는 홈즈 웰치(Homes Welch)는 《마오시대 불교(Buddhism under Mao)》에서 “문혁에 이르기까지 공산당과 중국 정부는 불교(내지 모든 종교)에 대해 ‘통제하지만 박해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견지했고, 불교를 사원과 불교도의 사고 안에 가두고 그것이 공적 공간에서 생존하고 사회에서 발전하는 것을 엄격하게 제한했다.”고 평가했다. 통제와 박해가 충돌하지 않고 나란할 수 있는 개념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이 시기 중국 정부의 불교 정책은 그러했던 것 같다.

현대 중국불교를 대표하는 불교계 지도자이자 불교 거사인 자오푸추(趙樸初, 1907~2000)는 1993년 10월 ‘불교협회 제6차 전국대표자회의’ 석상에서 발표한 보고인 〈불교협회 40년〉에서 불교협회의 활동을 평가하면서 “1953년부터 1956년까지는 불교협회의 업무는 정상적으로 진행됐다.”고 회고했다. 사실 ‘불교협회만의 정상’이 아니라 중국불교 전체가 정상적이었다는 말이다. 굳이 1956년까지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듬해인 1957년부터 이후 수십 년간 반우파투쟁, 대약진운동, 문혁 등 이데올로기 투쟁과 군중 운동으로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불교계도 이 혼란 속에서 심한 공격을 받았다.

1957년 여름 중국공산당은 전국 각급 기관에 적극적인 ‘반우파투쟁’을 지시하고, 이어서 마오쩌둥이 일종의 정풍(整風) 운동을 독려했다. 각계각층에 여전히 암약하는 우파분자를 색출하여 처단하고 사회주의혁명을 완수하자는 기치였다. 이 운동의 여파가 오래지 않아 불교계에 닥쳤고 여러 고승과 거사가 우파분자로 몰려 비판받았다. 심지어 고령의 쉬윈(虛雲, 1840~1959)이 주석하는 사찰 주변에도 그를 비난하는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했다. 흥분한 군중은 고승을 귀신 씐 노인네 정도로 취급했다.

1957년 ‘반우파투쟁’이 발생하고 이듬해인 1958년에는 그 유명한 ‘대약진운동’이 전개되었다. 대약진운동은 본래 정부가 입안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일환이었다. 마오쩌둥은 영국과 같은 서구 자본주의 국가의 농공업 생산량을 인민의 단결과 노동력으로 압도하겠다는 전혀 유물론적이지 않은 사회운동을 시도했다. 경제계획이나 생산 증대 운동이라기보다는 정신운동에 가까웠다. 농민들은 흙으로 용광로를 제작하여 눈에 보이는 쇠붙이는 다 집어넣어 녹였고 참새잡이를 하느라 북을 치면서 들녘을 돌아다녔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승려도 집단 노동에 참여했고, 사찰의 재산도 징발됐다. 그 결과는 불행히도 엄청난 마이너스 성장과 대규모 아사였다.      

중국 현대불교 연구자 슈에위(學愚)는 건국 초기 불교 활동이 비교적 정상적이었다는 주장에 대해 사실은 1950년대 초에 중국불교는 변형되고 파괴되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둥추(東初, 1908~1977)의 연구를 빌려서 1950년대 토지개혁은 불교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고 60년대 초 중국불교는 이미 “이름만 보존한 수준”이라고 평가한다. 둥추는 타이완 승려로 대륙의 불교협회를 공산당의 꼭두각시 단체로 여길 정도로 사회주의 중국에 적대적인 인물이다.

신중국 건립 이후 중국불교의 변화는 반우파투쟁이나 대약진운동에 앞서 둥추가 말한 대로 중국 정부가 단행한 토지개혁에 큰 영향을 입었다. 중국공산당은 국공내전 당시부터 이른바 해방 지역에서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분배했다. 그야말로 혁명적 사건이었다. 농민 출신이 황제가 되거나 노비 출신이 황제가 된다고 혁명인 건 아니다. 농민에게는 토지가 실존이었다. ‘자신과 토지’의 관계가 바뀌어야 혁명이었다.

1949년 반포한 〈공동강령〉에서도 봉건적 토지 소유제를 농민의 농지 소유제로 전환할 것을 규정했다. 또한 1950년 중국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토지개혁법’을 공포했다. 이 토지법에서는 사당, 사원, 교회, 학교, 각종 단체가 농촌지역에서 소유한 토지는 모두 몰수하여 국가 소유로 하고 그 건물은 보존하게 했다. 승려들은 농민과 동일하게 취급받았고, 농사를 지을 경우 토지를 배분받았다. 사실 토지개혁 이전, 사원은 자신 소유의 광대한 전답을 소작농에게 임대하고 매년 소작료를 받아서 경제를 운용했다. 사원은 일종의 봉건지주였던 셈이다.

토지개혁 이후 사원은 지주의 지위를 상실했고, 승려들은 농민, 노동자, 나무꾼 같은 직업인이어야 했다. 온전한 의미의 승려 신분은 보장되지 않았다. 안정된 상태에서 학습하고 수행하는 게 불가능했다. 사전(寺田)이 사라졌기에 자립경제도 불가능했고, 이른바 잉여생산물을 축적한 토지자본가나 상업자본가가 없기에 사원에서 시주 행위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후 진행된 불사(佛事)는 대부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지원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1951년부터는 지방정부에서 지속적으로 사묘재산 관리에 관한 법령이나 조례가 발표되어 사찰을 지방정부의 재산으로 귀속시키는 경우가 많아졌고, 사찰에 거주하는 인원도 엄격하게 제한했다. 그야말로 사찰에서 거주 이전의 자유가 사라지고 관할 지방정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해졌다. 사회주의 중국이 분명했다.

 

3. 중국불교협회의 성립

중국불교는 중국의 모든 종교가 그러하듯 중국 정부의 통제하에 있다. 현재 중국에서 불교계의 이익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정부의 정책을 불교계에 관철시키기도 하는 조직이 바로 불교협회이다. 사실 근대 시기 불교협회 같은 전국적 조직은 여러 차례 설립됐다.

신해혁명을 통해 봉건 중국이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성립된 후, 불교계는 근대적인 의미의 단체를 설립했다. 중화민국 원년인 1912년 4월 상하이에서 불교계 주요 인사가 모여 ‘중화불교총회(中華佛敎總會)’ 설립을 결의하였고, 고승 징안(敬安)을 회장으로 선임했다. 사실 청말(淸末) 각 지역 고승들이 주도하여 ‘승교육회(僧敎育會)’를 건립했었다. 중화불교총회는 ‘승교육회’의 각 지부를 계승하여 전국 조직을 만들었다.

1913년 중화불교총회는 상하이 정안사(靜安寺)에서 정식 성립대회를 개최했다. 1915년 위안스카이 정부는 ‘관리사묘조례(管理寺廟條例)’를 공포하고 중화불교총회를 해산했다. 중화불교총회는 중국 근대 최초의 전국적 불교 조직으로 “중국 불교도가 초보 단계지만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를 벗어나 연대를 통해서 외부 세력과 싸워 자신이 마땅히 가져야 할 권익을 보호하려고 시도한 조직”이기도 했다.

중화불교총회 해산 이후 불교계 내에서 불교계 내 세력을 통합하고 조직하려는 크고 작은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베이징 군벌 정부나 군벌 타도를 외친 국민당 정부나 할 것 없이 불교계 재산을 탈취했고, 불교계 세력화를 방해했다. 1929년 난징(南京) 정부가 ‘사묘관리조령(寺廟管理條令)’을 공포했다. 여전히 묘산흥학(廟産興學)의 기치로 불교계 재산을 점유하려 들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그해 4월 전국 불교계 대표가 상하이에 모여 ‘중국불교회’ 설립을 결의하고 위안잉(圓瑛)을 회장으로 선임했다. 위안잉은 1935년까지 중국불교회 회장을 연임했고, 1935년 중국불교회는 ‘제7차 전국대회’에서 조직을 개편하였으며, 위안잉은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1945년 태평양전쟁이 종결하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자 중국불교회는 해산했다.

신생 사회주의 중국이 온전히 정착하기도 전에 거대한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국내가 아니라 이웃한 한반도에서 일어났다. 1950년 6월 25일 한반도 북쪽에 등장한 사회주의 정권인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하 북한)의 군대가 38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무력 침공했다. 이른바 한국전쟁의 발발이다. 오래지 않아 UN은 한국전쟁 참전과 연합군 파견을 결정했다. 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북한은 중국 정부에 참전을 요청하고 소련은 이를 지지했다.

결국 1950년 10월 수십만의 ‘중국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에 진입했다. 중국에선 자신들의 한국전쟁 참전을 ‘항미원조전쟁’이라고 부르는데 항미원조(抗美援朝)는 ‘미국에 대항하고 북조선을 원조한다’는 의미다. 중국 정부는 참전 결정 후 ‘항미원조와 국가보위’를 기치로 대대적인 애국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많은 승려가 지원군으로 참전했고, 불교계에서는 무조건적 지지를 쏟아냈다.

 

토지개혁 운동 등의 세례를 겪은 중국 승려 대중은 점점 정치의 역량을 실감했고, 불교가 다시는 현실을 벗어나 홀로 존재할 수 없음을 분명히 인식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주동적이든 피동적이든 간에 항미원조 운동에 몰두하게 되고, 전쟁을 위해서 물질적 원조와 정신적 지지를 제공하고자 노력했다. 각지 불교단체와 개인은 불교계 지도자들의 고무 아래 적극적으로 정치학습과 선전을 행하고, 거리 시위를 거행하고 애국 공약을 제정하고 물자를 기부했다. 일부 청년 승려는 가사를 벗어던지고 군복을 입고 절을 나와 조선 전선으로 향해 조선 전쟁에 생명을 맡겼다.

 

마치 일본제국이 중일전쟁 이후 총동원체제에 돌입하고 대규모 군중 운동을 선동한 것과 유사하게 한국전쟁 기간 중국 정부도 각계각층의 역량을 집중하여 전쟁 지원에 몰두했다. 신생국가로서 기반이 대단히 취약한 상황에서 ‘미제국주의에 맞서 조국을 지킨다’는 애국 운동과 국민 동원은 어쩌면 당연한 조치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수백만 명의 청년이 ‘애국’이라는 미명 아래 이국땅으로 몰려갔고, 수십만 명이 전사하고, 수십만 명이 부상을 입고, 수십만 명이 실종됐다. 한국전쟁 참전과 그 과정에서 진행된 애국 운동은 여전히 사회주의 중국이 어색한 중국 인민이 ‘조국 중국’에 집중하도록 했다. 선동과 억압에 의해 강제된 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중국 인민은 전장에서 죽은 넋을 기리는 과정에서 역사 공동체가 됐다.

한국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진 시기인 1952년 11월 15일 ‘중국불교협회 발기인회의’가 베이징에서 거행됐고, 불교계 주요 인사인 쉬윈(虛雲), 위안잉(圓瑛), 쥐잔(巨贊), 뤼청(呂澂), 자오푸추(趙樸初) 등과 티베트불교의 대표자로 쉐랍 갸초(Sherab Gyatso, 喜饒嘉措)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쉐랍 갸초는 중국 정부에 대단히 적극적으로 협조한 티베트 승려였다. 1953년 5월 30일부터 6월3일까지 불교협회 성립회의가 베이징 광제사(廣濟寺)에서 개최되었다.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 그리고 쉬윈 등이 명예회장에 선임됐고, 위안잉이 회장에 선임됐다. 본 회의에서 〈불교협회장정〉이 통과됐다. 〈장정〉 제2조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불교협회는 중국 불교도의 연합조직이고 그 종지는 다음과 같다. “전국 불교도를 단결시키고, 중국인민정부의 지도 아래 조국을 애호하고, 세계 평화를 보위하는 운동에 참가하고, 인민정부에 협조하여 종교 신앙 자유 정책을 관철시키고, 아울러 각지 불교도와 연계하여 불교의 우수한 전통을 발양한다.”

 

〈장정〉에 따르면 불교협회는 중국 정부의 분명한 통제 아래서 정부에 철저히 협조하는 것을 전제로 활동할 것임을 천명했다. 중국학자 슈에위(學愚)가 자신의 저서에서 ‘중국불교의 사회주의 개조’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사회주의 개조’라는 말은 공산당과 중국인민정부에 의해 불교가 개조됐다는 이야기이지만 단순히 억압과 탄압을 받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 과정에서 중국불교가 실제 변형됐음을 의미한다.

민족교육을 통해서 민족주의자가 나오고, 반공교육을 통해서 반공주의자가 나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결과다. 불교협회는 사회주의 개조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불교협회는 그냥 보면 정부 산하단체 아니면 관변단체로 보이지만 사회주의 중국에서 정부 통제를 벗어나는 단체란 존재하지 않았다. ‘불교협회’ 성립 후 수년간 협회 하부의 성급(省級) · 시급(市級) 불교협회가 계속해서 성립했다. 지역 분회의 성립은 문혁 발발 전까지 계속 진행됐다.

1954년 불교계 잡지인 《현대불학(現代佛學)》이 불교협회 기관지로 전환했다. 《현대불학》은 불교협회보다 먼저 출현한 잡지이다. 1950년 6월 불교계 주요 인사들이 집단으로 정부에 불교잡지 창간을 건의했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바로 그달에 ‘현대불교학사(現代佛學社)’가 창립되어 《현대불학》 간행을 담당하게 되었다. 사장은 천밍슈(陳銘樞, 1889~1965)이고 편집장은 쥐잔(巨贊, 1908~1984)이었다. 천밍슈는 국민당 정부 출신으로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유명한 불교도였다. 쥐잔은 학승이자 일찍이 월간 《사자후(獅子吼)》 주편을 맡은 출판인이기도 했다. 그들은 9월 15일 《현대불학》 제1호를 간행했다.

《현대불학》은 불교의 교리와 역사, 문화와 예술, 불교계 소식 등을 다루었지만 더 근본적인 창간 이유는 “정부의 종교 정책을 불교계에 온전히 전달하고 그것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불교의 사회주의 개조’를 위해 창간됐다고 할 수 있다. 《현대불학》은 비록 관제 잡지의 성격이 있지만 문혁 이전 사회주의 중국 불교의 상황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잡지라고 할 수 있다.

1955년 불교협회는 제1차 이사회의 2차 확대회의를 베이징에서 개최했고, 여기서 쉐랍 갸초가 불교협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아울러 ‘중국불학원 준비에 관한 결의’와 ‘국가발전 국민경제 제1차 5개년계획 옹호와 일체 반혁명 분자를 숙청, 세계평화 보위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켰다. 두 번째 결의 내용부터 보자면, 이는 온전히 정부의 방침에 대한 불교협회의 찬동과 지지이다. ‘1차 5개년계획’은 중국 정부의 장기 경제개발 프로젝트였고, 반혁명분자 숙청은 신중국 성립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된 정치운동이었다. 사실 이와 비슷한 모습은 한국에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불교계에서 여러 차례 이른바 ‘반공궐기대회’를 개최했다.

첫 번째 결의에서 준비한 중국불학원은 1956년 9월 28일 베이징 법원사(法源寺)에서 설립대회를 거행했다. “중국불학원은 격년으로 입학생을 모집했고, 4년제였다. 원장 쉐랍 갸초, 부원장 파쭌(法尊), 교무부장 저우슈자(周叔迦) 등으로 시작했는데 파쭌이나 저우슈자는 당시 출가와 재가를 대표하는 불교학자였다. 최초 입학생은 100여 명이었고, 주로 불교 교리와 역사 및 사상 등을 학습하고 연구했다. 1958년 8월 중국불학원 전수과(專修科) 제1기 졸업생을 배출했다. 1961년에는 대학원에 해당하는 3년제 ‘연구부’를 증설했다. 연구부는 불교 교리 분야와 불교 역사 분야로 구분됐다. 1962년에는 베이징 옹화궁(雍和宮)에 5년제 ‘티베트어불교 전공’을 증설했다.” 중국불학원은 1966년 문혁 발발로 운영이 중단되기 전까지 나름대로 발전했다.

     

4. 사회주의 정치학습과 티베트불교 문제

사회주의 중국이 성립한 후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정부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사회 전 영역에 관철시키고자 했고, 또한 전 영역을 완전히 장악하고자 했다. 전체 중국 인민을 단일한 체계 속에 집어넣고자 저 말단까지 섬세한 조직을 만들어 관리했다. 위에서 본 불교협회도 그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사상개조를 위해 ‘정치학습’을 강조했다. 이는 ‘사회주의 인간’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학습의 내용은 마르크스 · 레닌주의 이론과 중국공산당의 정책이었다. 사회주의 중국에서 승려를 포함한 불교인도 ‘마르크스 · 레닌주의’를 학습했고, ‘반서구’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등을 ‘애국’이라는 하나의 이념과 함께 익혔다.

1950년대 불교계 내부에서 꾸준히 정치학습은 진행됐다. 불교계의 이데올로그이기도 했던 쥐잔은 “승려는 표면상으로는 프롤레타리아이지만 사상과 행동에서는 오히려 프티부르주아”라고 보았다. 사회주의 입장에서 이 말은 지극히 맞는 말이다. 그래서 쥐잔은 사회주의 중국에서 승려는 “공산주의 교육으로 사상개조를 거쳐야만 훌륭한 불교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슈에위는 당시 쥐잔의 입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정치학습과 사상개조는 승려 내지 전체 불교계가 신시대에 적응하는 첫걸음이었다. 1952년 6월 쥐잔은 불교 사무의 4단계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첫째, 열심히 학습하여 사상을 개조한다. 둘째, 정부의 요청에 호응하여 노동 생산에 참여한다. 셋째, 불교계 내부를 정돈하고 조직을 강화한다. 넷째, 정법의 깃발을 세우고 인민을 위해 복무한다. 불교계 내에서 이를 확산하기 위하여 쥐잔은 상세하게 학습 내용을 해석하고 학습의 방법을 소개했다. (중략) 학습 중에 승려는 자신의 사상을 마르크스 · 레닌주의와 비교하고 그것과 모순되는 점을 개조하고 마르크스 · 레닌주의와 고도의 일치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쥐잔은 이런 개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반드시 격렬한 사상 투쟁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1950년 초반 승단과 승려는 사회주의 중국에 적응해야 했다. 당시 사회주의 중국에서 정치학습과 그를 통한 사상개조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였다. ‘사상 투쟁’은 정치학습 모임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한 개인의 내면에서도 일어났다. 이후 승려 가운데서도 불교 전통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아마도 그들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1950년대 내내 상황은 비슷했고, 후반으로 갈수록 그 정도는 강화됐다.

“1958년 1월에서 5월까지 불교도의 사회주의 학습을 대규모로 조직하였다. 베이징, 상하이, 우한, 시안, 청두 등 각 성과 시의 불교도 대표 1,100여 명이 모여 학습좌담회를 열었다. 또한 불교계는 《현대불학(現代佛學)》을 통해서 불교도의 시대적 책임과 노력의 방향을 제시했다. 불교계 주요 지도자들은 지역을 돌면서 지역 불교도와 간담회를 진행하여 불교도가 사회주의 건설에 참여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정부 차원에서 진행된 인민의 사회주의 개조는 불교계에도 미쳤고, 정부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던 불교계 주요 지도자들은 이 ‘개조’에 적극 동참했으며, 그들은 불교 신앙과 수행이 사회주의 국가 건설과 충돌하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그야말로 ‘사상학습’을 진행했다.

1950년대 중국불교를 다루면서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는 티베트불교의 문제이다. 티베트와 티베트불교는 하나의 범주라고 할 수도 있다. 전통적으로 제정일치의 국가였고, 달라이 라마는 망명 정부에서 오랫동안 행정수반 역할을 했다. 망명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티베트는 원나라와 명나라 때는 몽골의 영향이 컸고, 청나라 때는 만주족의 통치를 받았다. 물론 당시 티베트를 조공국 수준의 독립국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청의 영토로 볼 것인지 매우 다른 의견이 존재한다. 하지만 청의 티베트 지배력은 절대적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물론 청 황실의 티베트불교 신봉은 ‘정치적 관계’를 은폐시키는 효과를 내기도 했다.

신해혁명 이후 청 제국의 여러 지방은 독립선언을 했다. 이후 북벌 과정에서 대부분 통합되었지만 완전히 다른 지역이었던 몽골이나 티베트 등은 통합되지 않았다. 몽골의 경우는 독립선언 이후, 1924년 사회주의혁명을 통해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고, 오늘날까지 독립국가로 존재한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국공산당은 청나라 영토를 자신이 승계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위구르인과 티베트인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신중국이었지만 구중국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력으로 그 지역을 이른바 ‘해방’시켰다. 중국 정부는 오늘날도 자신들의 티베트에 대한 군사 행동으로 ‘봉건 농노제’에서 고통받던 티베트 민중을 구해냈다고 선전한다.

당시 달라이 라마 등 티베트 지도자들은 이른바 티베트 ‘해방’을 승인했다. 그들은 온전한 자치권을 획득할 수 있고, 전쟁을 피할 수 있다면 그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중국 정부의 종교 정책에서 티베트불교는 대단히 중요했다. 달라이 라마 등 티베트 지도자를 여러 차례 초청하였고, 특별한 지위를 부여했다. 또한 불교협회에 티베트 불교계 인사를 상당수 포진시켰다. 중국공산당은 달라이 라마나 판첸 라마를 여러 차례 초청하고 불교계 행사에 참여하도록 하여 그들과 그들의 민족을 중국 내부로 들어오게 했다. 하지만 1950년대 말 ‘반우파투쟁’에서 보이듯 중국 정치는 조금씩 좌경화했다.

1959년 들어 티베트 일부 지역에서 티베트인과 티베트 주둔 중국인민해방군 간 충돌이 있었고, 3월 들어 중국 중앙정부가 달라이 라마를 압박하는 형국이 되었다. 중국 군대가 달라이 라마를 납치할 것을 우려한 수십만의 티베트인이 3월 10일 달라이 라마가 거처한 여름 별궁 ‘노르부 링카’를 에워쌌다. 그들은 중국 정부의 티베트 통치에 항의했고 중국 군대의 티베트 철수를 요구하는 이도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이 봉기를 반란으로 규정하였고, 달라이 라마에게 분명한 조치를 요구했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는 중국공산당이 요구하는 수준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중국공산당은 달라이 라마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이 생겼고 무력 진압을 결정했다. 중국 군대는 3월 19일 라싸의 ‘노르부 링카’와 주요 사원에 포격을 시작했고 군대가 진입했다. 며칠 안 걸려 전체 지역이 장악되고 ‘반란자’ 검거를 시작했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 군대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인 3월 17일 비밀리에 인도 망명길에 올랐다. 오늘날까지 달라이 라마는 망명 정부를 이끌고 있다. 중국은 달라이 라마의 인도 망명 이후 ‘종교탄압’과 ‘민족탄압’이라는 이미지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까지는 사회주의 개조가 분명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문혁 때와는 달리 종교 활동이 일부 지속됐다. 그래서 자오푸추도 1993년 불교협회 활동을 평가하면서 “1953년에서 1956년까지는 불교협회가 정상적으로 활동했고” “1957년부터 문혁까지는 활동이 지속되었지만 좌절을 경험했다.”고 회고했다. 그 기간 협회 차원에서 국외 불교 행사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국제간 불교 교류를 계속했고 정부의 지원으로 항저우 영은사(靈隱寺) 같은 고찰을 중수하기도 했다. 또한 방산석경(房山石經)의 발굴과 정리, 탁본 작업 등이 1959년 말에 완료되기도 했다.

 

5. 맺음말

문혁 이전 중국은 현실 사회주의 국가였다. 실제 모습이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이념에 얼마나 부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국 사회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했고, 가시지 않은 혁명정신이 적어도 공산당 내에서는 팽배했다. 당시는 완결되지 않는 혁명을 완수하고자 실험이 지속됐다. 불교의 사회주의 개조도 사실 그 실험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원이론에 따르면 적어도 공산사회에서는 사라지고 말 종교가 통제 대상으로 여전히 존재했고, 시한부여야 할 종교는 주동적이든 피동적이든 간에 자기 개조를 계속했다.

1950년대의 중국불교는 종교 신앙과 정치 체제 간의 간극을 보였고, 또한 강제된 조화도 보였다. 이 시기 분명 불교는 개조되었다. 이후 사회상에서 필요한 불교의 역할을 불교계가 규정하는 게 아니라 정부가 규정했다. 대약진운동이나 문혁의 환란을 겪었기 때문에 오히려 1950년대는 정상으로 보이고, 개혁개방 이후 불교는 신교(信敎)의 자유가 보장된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종교 활동’이란 차원의 종교 자유는 강하게 제약당하고 있다. 물론 이는 꼭 종교만의 상황은 아닐 테다.

이 글에서 중국은 종교 자유가 없고 한국은 종교 자유가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한국의 경우 정부가 종교 자유를 억압하거나 신앙의 형식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종교는 주류와 비주류가 있고, 다수와 소수가 있다는 사실을. 연말 연예 시상식에서 수상자가 영광을 그리스도가 아니라 알라에게 돌리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했다가는 당장 쫓겨날 것이다. 이슬람교도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주류에서 배제되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정부의 정책 결과는 아니지만 사실 한국에서도 종교의 자유가 그리 많은 건 아니다. ■

 

김영진 1722dew@hanmail.net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동 대학원 졸업. 주요 저서로 《중국근대사상과 불교》 《공(空)이란 무엇인가》 《근대중국의 고승》 《불교와 무(無)의 근대》 《중국 근대불교학의 탄생》 등이 있고, 역서로 《대당내전록》(공역), 《근대중국사상사약론》 등이 있다. 대원학술상(저서 부문)과 불이상(학술 부문)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WISE캠퍼스 불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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