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糠山)절강산절. 우리는 그 절을 그렇게 불렀다. 내가 우리 나이로 다섯 살 때 약 여섯 달 동안 생활했던 절이다. 어머니가 앞장서고 머슴의 지게에 얹혀 산길을 십 리나 걸어서 들어간 절이었다. 전라남도 무안군 해제면 신길리 강산이라는 산속에 묻힌 절. 지금 생각나는 건 거의 없다. 조그만 대웅전과 풀이 무성한 마당 건너에 요사가 있던 작은 절. 절 뒤편의 옹달샘에서 개구리 알을 막대기로 헤집었던 기억이 있을 뿐. 나중에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로는 내가 태어날 때 포대기를 뒤집어쓰고 나온 탓에 절에 목숨을 팔아야 했고, 아버지가
1. 현대 시조문학사에서 1960년대는 시조문학 구축기다. 이 시기가 시조문학 구축기로 정립될 수 있었던 것은 전통적 역사관을 통한 민족정신 강화와 국가재건에 대한 시조시인들의 시대의식의 발로에서다. 당시 한국 사회는 전쟁의 폐허와 복구 속에서 정치적 · 경제적으로 극복해야 할 수많은 장해로 진통을 겪었다. 한국전쟁에 이어 4 · 19와 5 · 16이라는 시대적인 갈등과 동시에 해소되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자본주의적 근대화가 가시화되었다. 이때 한국 문학사의 문학적 지형은 정치적으로 군사정권의 억압과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의 부흥이라는
1. 들어가는 말필자가 인도 유학 시 가장 즐겨 보던 저술은 바로 인도 학자 비말라 추른 로(B.C. Law, 1892~1969)의 저서들이다. 로만큼이나 많은 저서를 낸 인도 출신의 학자는 알지 못한다. 평생을 연구와 집필만 하다가 살다 간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의 저술은 양적으로 많고 또한 여러 분야에 걸쳐 있다. 그래서 로 박사는 소개하고 싶었던 인도 학자 중 한 명이다. 그의 저술은 주로 인도불교 연구의 토대 학문이자 기초자료라 할 수 있는 인도의 자연, 지리, 인종, 민족, 역사, 언어, 종교, 사회 등과 관련되어 있다
1. 아버지를 흠모하고 그리워한 내성적인 소년어린 시절이란 신비와 비밀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누가 그 비밀과 신비를 말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이 어린 시절이라는 놀라운 숲을 지나왔고, 그 행복의 경이 속에서 눈을 떠 본 적이 있다. 그때는 인생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현실이 우리의 영혼에 밀려들어 왔었다. 그때 우리는 나 자신이 어디 있는지, 또 내가 누구인지를 몰랐다. 온 세상은 나의 것이었고, 나는 곧 온 세상이었다. 그때는 처음도 끝도 없는 무한한 삶(infinite life)이었다. 휴식도 고통도 없었다. 마음은
노자(老子, 기원전 5~6세기)와 불교의 관계는 참으로 깊을 뿐만 아니라 오래되었다. 깊다는 것은 불교의 핵심 개념인 ‘공(空)’이 처음에는 노자의 ‘무(無)’로 번역되었음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고, 오래되었다는 것은 불교가 중국에 도래했을 때 중국인들이 부처를 서쪽으로부터 온 얼굴 검은 노자로 여겨 ‘황면노자(黃面老子)’로 불렀음을 떠올리면 바로 알 수 있다. 이제는 부처를 노자로 볼 사람은 없다. 불교의 현실적 위세는 이미 노자를 종주(宗主)로 삼는 도교의 영향을 맞먹거나 넘어선다. 우리나라에서는 물론이고 도교 세력이 강한
어머니의 합장7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탑골승방(현 보문사) 부처님 앞에 합장하고 서 계신 어머니의 뒷모습. 초등학교 5학년짜리는 제법 먼 길을 걸어 기도 중인 엄마를 보러 갔었다. 한복을 입고 간절하게 두 손을 포갠 어머니의 뒷모습은 왠지 낯설고 조금은 거룩해 보였다. 선뜻 다가서지도 못하고 절 마당에서 한참 동안이나 서성거렸다. 그 한낮의 기온이 지금도 기억된다. 고요한 마당에 울려 퍼지는 독경 소리. 그분의 합장 속에 드리워진 비원(悲願)은 무엇이었을까? 이제 겨우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머니의 아들, 나는 왕
머리말하나의 역사적 사건에 대해 한국인과 일본인은 종종 상반된 역사적 기억을 지니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의 죽음이 그런 사례다. 이토는 일본에서는 최초의 내각총리대신, 조선 통감을 역임한 자, 일본 입헌정치를 확립한 정치가 등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의 뇌리에는 주로 일본 제국주의의 수괴, 침략의 원흉, 동양 평화를 파괴한 주범으로 각인되어 있다. 우리는 의사 안중근(1879~1910)의 가해 행위를 통하여 이토를 민족의 원수로 기억하지만, 당시 일본인 대부분에게 안중근은 흉악범이고 사형받아 마
1. 인생은 나그넷길그는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인생은 나그넷길이라 했지만, 그래서인지 그는 모든 걸 잊고 오직 걷는 일에만 집중했다. 마치 인생 목표를 걷는 일로 달성시키려는 듯했다. 실제로 그는 ‘걷는 일’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달성시켰다. 티베트 불자들이라면 오체투지하며 라싸를 향해 평생에 한 번은 순례길을 떠나야 한다. 그러나 티베트인도 아닌 그는 동유럽 헝가리를 출발하여 중앙아시아 티베트의 어느 지점을 향해 말 그대로 맨발로 걸었다. 길 떠난 동기는 자기 종족의 시원과 그 언어의 뿌리를 찾는 일이었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
자연, 걸림 없음, 우리의 교육1. 머리말어느 시대에나 교육은 관심거리일 수밖에 없다. 교육받아야만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교육적 존재로서 인간(호모 에듀케이투스, Homo Educatus)’은, 자신의 몸을 지켜낼 수 있는 날카로운 무기를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너무 일찍 세상에 나오는 조기 출산의 숙명을 교육을 통해 비교적 잘 극복해왔다. 만약 제대로 된 교육이 없었다면 인류는 현재와 같은 문명은커녕 역사 속 어느 지점에서 사라져버리는 운명을 맞았을지도 모른다.물론 현재와 같은 인류의 생존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1. 현대 시조문학사에서 1950년대 전후(戰後) 시조는 현대시조의 안정기로 평가한다. 현대시조 안정기의 전개 과정은 1910년대 현대시조 태동기와 1920~40년대 현대시조 개척기를 거치면서부터다. 1920년대 최남선, 이은상, 이병기, 조운 등에 의해 펼쳐진 ‘시조부흥운동’과 함께 고시조라는 구태를 벗었다면, 1950년대 안정기는 시조가 현대문학 장르로서 확립된 시기이다. 이 시기는 시조를 창조적으로 계승하면서 시조 일반 이론을 구축하는 등의 성과로 현대시조 형식을 개념화시켰다. 무분별한 서구 문학 모방과 모더니즘 지향을 따랐던
불교학도가 되기까지나는 대대로 기독교를 신봉하던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청소년 때까지 예수 믿는 일은 나의 일상이었다. 주일학교를 거쳐 매주 수요일 밤, 일요일 낮에는 교회를 다녔고, 집에서도 온 가족이 토요일 날 모여 가족예배를 보았다. 고역이라면 한 달에 한 번쯤 돌아오는 나의 기도시간인데 어른들 앞에서 찬양과 참회를 섞어서 점잖은 표현을 하는 일이 힘들고 싫었다. 불교와는 철저히 차단되었고, 고2 때 불국사로 수학여행을 갔던 것이 불교와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예수 믿는 줄 알고 성장하였다.대학
1. 현대시조의 출발과 시대정신최초의 현대시조는 1906년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대구여사(大丘女史)의 〈혈죽가(血竹歌)〉다. 〈혈죽가〉는 개화기 이후 최초의 활자 언어로 거듭난 근대 이행기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시조사에서 이 시는 민족의 혈관에 면면히 흐르는 전통적 가치를 현대적 시조 양식에 담아내어 최초로 문명화된 매체 역할을 감당했다. 거기에 급속한 문화의 변화와 다양한 길항들로 시대적, 문명사적 혼란스러움을 극복하는 데 고유한 주체성과 시대적 정신성을 견인하고 있다.〈혈죽가〉를 현대시조의 효시로 보게 된 것은 20
1.장자(莊子)BC 369년 - BC 286년동아시아 불교에서 장자 사상과 불교의 관계는 중요한 과제다. 도에 깊지 못한 사람은 불교경전이나 논서를 열람하는 도중에 제자백가의 문장과 만나게 될 경우, 마치 호랑이도 만난 듯 그 언어문자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외도(外道)의 말이라 하여 일축하기만 할 뿐이다. 또한 《장자》의 어느 구절을 풀이하기 위해 불교경전을 인용해 입증하다가 한 마디라도 서로 일치할 경우 대장경이 장자로부터 유출되었다고 장담하기도 한다. 임희일(林希逸)은 《남화진경구의(南華眞經口義)》, 육장경(陸長庚)은 《남화
인식(프라마나)으로서 종교와 열반(니르바나)으로서 철학불교는 종교(religion)이자 철학(philosophy)이다. 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nirvāna)이며 철학의 최종적 지향은 바른 인식(pra-māṇa)이다. 그래서 불교는 바른 인식을 근거로 열반을 지향하는 것이다. 즉 바른 인식 없는 열반은 맹목이며 열반 없는 바른 인식은 공허하다. 불교가 맹목과 공허 사이에 중(中)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열반이라는 하나의 수레바퀴와 바른 인식이라는 또 하나의 수레바퀴로 굴러가는 수레[乘]의 철학이자 종교이기 때문이다.여기서
1. 서언(緖言)청말(淸末)에 이르러 중국은 흔히 “삼천 년 이래 없었던 변국(三千年未有之變局)”이라고 표현되는 격동의 시절을 맞게 된다. 아편전쟁(1840~1842) 이후, 중국은 서구 열강의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한 무력 앞에 무기력함을 철저하게 느끼고,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자강운동(自强運動)’을 전개하였다. 서구 열강의 힘을 그들이 지닌 근대학문으로 파악하여 그를 서학(西學)으로 규정하고, 그에 대한 대응을 중국의 전통사상 속에서 찾아내고자 노력한 것이다.이러한 과정에서 중국인들은 이미 민족종교로 자리 잡은 불교로부터 ‘자강
“내가 남들보다 더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었던 덕이다”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의 표현을 잠시 차용해본다면 내가 불제자임을 자각하고 공명정대한 불법을 수지하게 된 데에는 불교계의 큰 거목 법정 스님과의 남다른 인연 덕이라고 생각한다. 법정 스님과의 첫 만남은 1968년 초 서울 명동에 있던 대한전척 사옥의 〈대한불교〉(현재의 〈불교신문〉) 기자 공채 시험장에서였다. ‘작문’ 시험 시간에 감독관으로 들어온 분은 훌쩍한 키에 파르라니 삭발한 두상에서 서릿발 같은 기상이 느껴지는 스님이었다. 그분이 당시
불교학을 전공하면서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 이하 ‘대정장’)을 열람하지 않을 수는 없다. 다카쿠스 준지로 박사(이하 ‘다카쿠스’)는 이 대정장의 출판을 기획하여 편집하고 간행한 학자인 만큼,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역설적으로는 이러한 유명세 때문에 그의 학문적 역량과 교육적 열성과 같은 다른 진면목이 간과된 면도 적지 않은 듯하다.일본 유학의 경험도 없는 필자가 다카쿠스를 맡아 소개하게 된 것은 영어로 출판된 그의 저서(The Essentials of Buddhist Philo-sophy, Honolulu, 1947)를 《
리즈 데이비스(T.W. Rhys Davids)는 1843년 에섹스(Essex) 콜체스터(Colchester)에 정착한 웨일스(Wales) 출신의 회중교회 목사(Congregational minister) 토머스 윌리엄 데이비스(T. William Davids)와 런던의 법무관(solicitor)의 딸인 루이자 윈터(Louisa Winter) 사이에서 태어났다. 리즈 데이비스는 법무관이 되기 위해 브라이턴(Brighton)에서 공부하던 중, 인도 파견공무원(Indian Civil Service)이 되기로 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한국 불교소설은 신문학 이후에 국문학의 제재나 소재 전통을 계승해 왔다. 설화를 재구성하는 인물 중심의 불교소설이나 배경 중심의 공간소설이 그 주류를 이루어왔다. 필자의 지나친 생각일 수는 있지만, 현대소설로서의 새 지평을 보류한 채 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문학으로서 기능을 다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는 다분히 불교적 진리를 윤리적 측면에서 수용했거나 아니면 단순한 소재적 국면에서 수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문학의 윤리적 역행성이 불교 교리의 소설 수용에 제약을 가한 탓에, 삶의 모습이나 인간의 본체 규명에는 미치지 못했던
1. 시작하면서플라톤의 《국가론》에 등장하는 정체 중에서 가장 나쁜 정체인 참주정은 민주정체를 숙주로 출현되는 정체이다. 이 글은 《국가론》의 중심 주제인 철인정치나 플라톤의 정치사상이 아니라, 철인정치의 타락으로 시작되는 정체의 변화 과정에서 가장 나쁜 정체인 참주제를 견인하는 민주정체에 대한 플라톤의 조롱과 폄하를 무상과 무아의 관점으로 독해해 보고자 하는 시론이다. 《국가론》에는 몇 가지 독해 가능한 연기론적 코드가 있지만, 여기서는 다음 두 가지 점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는 플라톤이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6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