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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로 읽는 고전] 플라톤 《국가론(Politeia)》 / 윤세원
오늘, 다시 묻는 민주주의 정체(政體)
[84호] 2020년 12월 01일 (화) 윤세원 ysaeweon@hanmail.net

1. 시작하면서

   
 

플라톤의 《국가론》에 등장하는 정체 중에서 가장 나쁜 정체인 참주정은 민주정체를 숙주로 출현되는 정체이다. 이 글은 《국가론》의 중심 주제인 철인정치나 플라톤의 정치사상이 아니라, 철인정치의 타락으로 시작되는 정체의 변화 과정에서 가장 나쁜 정체인 참주제를 견인하는 민주정체에 대한 플라톤의 조롱과 폄하를 무상과 무아의 관점으로 독해해 보고자 하는 시론이다. 

《국가론》에는 몇 가지 독해 가능한 연기론적 코드가 있지만, 여기서는 다음 두 가지 점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는 플라톤이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6가지의 정체들이 조건의 변화에 따라 순차적으로 성격이 다른 정체로 변해 간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그가 설명한 국가의 타락 과정이 인간 본성의 발현 양상에 따라 순서적으로 진행된다는 논리에는 동의하기가 어려울지라도, 완성체로서의 정체를 부정한 점은 무상의 관점으로 평가할 만한 것이다. 무상은 ‘이 세상에 그대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이다. 둘째는 플라톤이 지적한 민주주의의 근거에 대한 비판, 즉 ‘형상의 형상 없음’은 형상의 무상함을 그리고 ‘근거의 근거 없음’은 정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가정하면, 그것은 정체의 본질 없음(무아)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필자의 이러한 가정은 오늘날 민주주의라는 어휘와 체제가 발휘하는 막강한 혹은 대체 불가능한 힘과 생명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하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민주주의에는 지배의 원리도 없고, 지배자인 민중의 형상은 형상이 없는 것이라는 그의 비판은 민주주의에는 고정된 실체나 불변의 원리가 없다는 지적이다. 필자는 이점을 바로 현대 민주주의의 생명력으로 보고, 불교의 연기론적인 세계관, 즉 무상과 무아의 원리가 현상의 존립을 가능케 하는 것과 같은 논리로 보고자 한다. 


2. 《국가론》의 성격과 주제

《국가론》은 플라톤 전집의 약 18%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고, 그 내용도 형이상학 · 인식론 · 윤리학 · 정치사상 · 심리학 · 교육론 · 예술론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는 플라톤 철학의 정수가 담긴 작품이다. 《국가론》의 서술은 플라톤이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진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지적처럼 ‘서양철학사가 플라톤의 주석에 불과’하다면 Politeia는 주석의 원전들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원전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론》의 주제들은 매우 광범위하다. 플라톤의 모든 대화편이 그렇지만 서술이 대화 형식이고 진술자가 본인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이기 때문에, 화자가 하는 말의 어디까지가 플라톤의 본심인지 아니면 역설이나 풍자를 담고 있는 문학적 형식인지도 불분명하다. 오랜 세월 동안 연구자들은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록》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표현한 것처럼 말해 왔지만, 그가 시라큐스(Sriacusa)의 폭군 디오니시우스(Dionysius)에게 보낸 ‘나는 그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쓴 것이 없고, ……모든 것은 소크라테스의 글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는 앞의 관점을 단정적으로 주장하기 어렵게 만든다. 또한 이 편지는 대화록이 전하는 내용이 플라톤의 견해인가 혹은 소크라테스의 견해인가 하는 문제도 제기하게 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들이지만, 후세에 더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플라톤이다. 그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제자였다는 사실에다 기독교 신학 · 철학 문제와 관련이 깊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의 역할과 관련된 일이다. 그는 플라톤의 철학을 기독교에 위협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기독교 교리와 상충하는 요소가 많은 위험한 철학으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한 그의 이러한 시각은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4~1274)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독교의 교리에 위협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해석해낸 13세기까지 지속되었다. 

   
 

《국가론》에서 플라톤은 정의(올바름)의 본질을 밝히려는 대화를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는데, 이는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잘(훌륭하게) 사는 것인지’라는 그의 문제의식에 관련된 것이다. 플라톤은 무분별하며 끝없는 탐욕의 자제는 진정한 의미에서 ‘잘(훌륭하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이해를 할 때만이 기대할 수 있는 일이라고 보았다. 

플라톤은 올바름이 도대체 무엇인지부터 밝히는 일에 착수하는데, 그 출발점은 정의로운 사람은 정의로운 도시에서 발견될 수 있고, 정의로운 도시는 정의로운 개인의 확장으로 본다는 점이다. 플라톤은 만일 우리가 정의로운 도시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으면, 같은 방법으로 정의로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올바름은 한 개인의 영혼에서 보다 더 큰 규모인 국가에서 더 잘 찾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소크라테스와 그의 대화 상대자들은 도시에 대한 토론을 전개하게 된다.

플라톤은 인간을 본성상 공동체를 만들어 살 수밖에 없는 존재로 보았다. 스스로 충족시킬 수 없는 생존에 필요한 제반 욕구의 충족은 함께 모여서 서로가 서로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협력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많은 것이 결핍되어 있고 자족적으로 이 결핍을 채우지 못한다는 인간의 본성이 폴리스 형성의 원리(archê)요, 폴리스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폴리스의 생성이 인간의 한계에 기반을 둔 자연적인 것임과 동시에 폴리스 구성원들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라면, 그것은 자연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인위적인 측면도 있는 것이 된다. 일견 서로 상충하는 듯이 보이는 자연스러움과 인위적이라는 국가생성과 관련된 두 측면은 인위적인 인간들의 행위나 노력 자체가 생존을 위한 본성의 발현이라는 논리적 맥락에서 자연스러움의 선상에 있는 것이 된다.

이 책 2권에서부터 시작되는 국가(도시국가) 설립에 관한 토론의 내용들 즉, 성향에 따른 분업의 효용성 때문에 생기게 된 공동체인 나라는 농부, 직조공, 집 짓는 이, 제화공 등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4~5인으로 구성되는 ‘최소한도의 나라(hē anankaiotatē polis)’에서 ‘호사스러운 나라(triphōsa polis)’로 확대되어감으로써, 온갖 직업을 갖는 많은 사람이 살 수밖에 없는 나라가 되어, 영토 확장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이는 결국 같은 현상을 겪는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게 될지도 모를 상황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리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호자들이 필요하게 되는데, 이들이 수행해야 할 일은 다른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맡을 일보다 더 중요하며 그만큼 더 전문성이 요구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최소한도의 나라’나 ‘호사스러운 나라’는 공동체이기는 하지만 통치계층이 형성되지 않은 국가 생성 이전 단계이고, 그 내용들은 일정 부분 당시 그리스인들의 경험이 반영된 것들이었다. 새 도시의 설립은 당시 그리스인들이 흔히 했던 일이었다. 그들은 기존의 도시국가가 너무 복잡해지면 일부의 사람들이 집단으로 배를 타고 지중해로 나가 다니다가 적절한 곳에 정주하면서 새 도시를 건설하였다. 다시 말하면, 소크라테스와 동료들의 대화에 등장하는 정체형성 전 단계로서의 도시 설립에 관한 토론의 내용들은 당시 많은 그리스인의 도시 설립에 관한 공통의 경험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소박한 공동체에서 갖가지 욕망을 충족시키는 국가가 형성되면 국내의 통치나 외적의 방어에 종사하는 수호자 계급이 생겨나게 되고, 이 계급은 다시 통치자와 보조자 계급으로 분화되는데, 전자가 도시 안팎의 일을 결정하고 명령하는 계급이고, 후자는 이들을 보좌하는 군, 경, 행정관리가 되어 결과적으로 국가는 세 계급으로 이루어진다. 맨 아래에 서민 계급으로서 농공상인, 그 위에 수비 계급으로서 군인, 최고의 자리에 통치자로서 철인(哲人)이 있어 국가통치의 임무를 담당하게 된다. 이 통치자는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는 자라야 한다. 이 세 계급에는 각 계급의 직무적성이라고 할 수 있는 덕이 있어야 한다. 서민 계급에는 절제의 덕, 군인 계급에는 용기의 덕, 통치자에게는 지혜의 덕이 필요하며, 각각의 계급이 제각기 덕을 보존하여 자기 일을 실천할 때 국가 전체는 정의가 실현된 혹은 정의로운 국가가 된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어떻게 정의로운 도시를 조직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중요한 원칙은 도시가 정의로워지려면 지도자가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이 나라들에 있어서 군왕으로서 다스리거나, 아니면 현재 이른바 군왕(basileus) 또는 최고의 권력자(dynastēs)들로 불리는 이들이 진실로 그리고 충분히 철학을 하게 되지 않는 한, 그리하여 정치권력과 철학이 한데 합쳐지는 한편으로, 다양한 성향들이 지금처럼 그 둘 중의 어느 한쪽으로 따로따로 향해 가는 상태가 강제적으로나마 저지되지 않는 한 …… 인류에게 있어서도 ‘나쁜 것들의 종식’은 없다.”라고 주장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지도자의 지도자다움 혹은 지도자의 정의로움이란 바로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프리드리히(C. J. Friedrich)는 이 지혜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철인 계급의 사람들을 불교나 유교의 성인 개념에 가까운 유형의 사람으로 보았다. 


3. 《국가론》 속의 불교적 코드

1) ‘형상의 형상 없음’은 무상함이다. 

불교의 교리체계는 연기론의 바탕 위에 구축되어 있다. 연기는 ‘조건적 발생’이라고 해석되는 불교 고유의 용어이다. 연기는 세상과 그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조건이나 원인의 변화에 연동된 생멸의 흐름으로 보게 한다. 따라서 연기는 모든 존재가 원인과 결과의 고리로 연결되어 찰나의 쉼도 없이 생성 · 소멸하는 과정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또 존재와 현상을 그러한 방법으로 인식하고, 그러한 방법에 의해서 확인되는 내용을 말하는 것이다. 

무상이란 연기하는 존재의 보편적 속성을 말하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줄인 말로 다음과 같은 3단 논법의 압축된 논리 구조를 함축한 용어이다.

조건 지워진 것은 변한다.
그런데 이 세상 속에 조건 지워지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로 모든 것은 변한다. 

모든 존재는 찰나도 멈춤이 없는 흐름의 연속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 속에는 불변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설명하는 개념이 무상이다. 따라서 무상은 외부세계에 대한 관찰 주체의 주관이 만들어낸 견해나 입장이 아니라, 궁극적인 실체가 없는 존재의 참모습을 설명해 주는 개념이다.

플라톤은 자신이 구상한 가장 이상적인 국가형태인 철인국가도 완성형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철인국가도 계급 간의 관계가 타락함에 따라 점차 정부 형태도 타락해 간다고 보았다. 정체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이상적인 정체든 최악의 정체든 불변의 완성체가 아니라, 조건의 변화에 따라 유동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연기하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불변의 본질이 없는 유동체라는 사실을 상기할 때, 국가체제에 관한 플라톤의 이 관점은 무상의 세계관에 매우 근접한 범주의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철인정치(Aristocracy)의 타락 이후에 등장하는 잘못된 국가체제의 순서를 명예정치(Timocracy)→과두정치(Oligarchy)→민주정치(Democracy)→참주정치(Tyranny)라고 했고, 이는 정체가 타락해 가는 순서이기 때문에 뒤로 갈수록 더 타락한 정체이며, 최악의 정체는 참주정이라고 보았다.

제8권에서 논의되고 있는 각 체제의 타락 과정을 살펴보면, 철인국가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정체이지만, 우생학적으로 훌륭한 자질을 가진 아이들의 출산에 실패하여, 특수한 능력과 자질이 필요한 통치자 계급 분열의 단초가 되는 이질적인 성향을 지닌 자들이 섞이게 된 데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최선자 정체도 인간들의 필요와 여러 가지 조건들의 결합으로 성립된 정체이다. 그 때문에 인간의 필요와 삶의 조건이 변하면 이 조건에 의지해 있던 정체도 그것이 어떤 정치체제냐에 관계없이 변화 · 소멸한다는 설명은 제행무상의 논리로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과 차이가 없어진다.

명예체제에서는 이성적인 것보다 격정적인 것이 우세한 탓으로 승리와 명예에 대한 사랑이 지배하는데, 축재에 대한 욕구도 매우 높다고 보았다. 지배층이 재물에 눈이 어두워 황금을 밝히다 보면 정치체제는 무너지게 된다. 금전 만능주의가 득세하면서 부자가 대접받는 반면 덕이 있는 사람들은 멸시당하는 사회가 되고, 이렇게 되면 누가 더 돈이 많고 적으냐에 따라 정치적 발언권이 정해지게 되면서, 재산이 정해진 기준에 미달하면 시민권의 자격은 물론 관직에도 나아갈 수 없도록 법도 바뀌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결국 명예체제는 붕괴하고 과두체제가 등장하게 된다는 논리로 대화는 진행된다. 

플라톤은 과두체제의 몰락과 민주체제의 등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과두체제의 통치자는 평가 재산에 근거하여 결정되기 때문에, 끝없이 재산을 끌어모으는 부류의 사람들과 이들에게 재산을 넘겨주게 된 가난한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 대립 양상을 보이게 된다. 민주정체는 이 대립에서 이긴 가난한 사람들이 과두정권을 장악했던 자들을 숙청함으로써 탄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은 민주정체의 주체인 데모스의 형상을 괴물의 이미지로 묘사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아르케’가 ‘아르케 없음’인 것처럼, ‘데모스’의 형상 역시 ‘형상 없음’이다. 정체에는 고유한 통치자의 자격과 형상이 있는데 민주주의 통치자인 데모스는 구체적이고 분명한 형상이 없다는 것이다. 데모스에는 온갖 형상들, 통치자와 피치자, 시민과 외국인, 노인과 젊은이, 여성과 남성, 인간과 동물들이 분별없이 섞여 있다. 그것은 반인반수의 형상들이 뒤섞인 집단 신체이다. 데모스로서는 누구든지 자격이나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무엇이든 주장할 수 있고, 그 어떤 이질적인 신체와도 하나의 신체를 조성할 수 있다.

2) ‘근거의 근거 없음’은 불변의 본질 없음이다

민주정체의 특징은 자유가 넘쳐, 무슨 말이든 할 수 있고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정체라고 설명한다. 민주체제 사람들은 끝없는 욕망에 시달리며 어떠한 내면의 질서와 규율도 없는 삶을 복되고 자유롭다는 착각 속에서 산다. 자유는 더 큰 자유를 원하게 되는 욕망의 속성에 따라, 어떤 지배자냐에 관계없이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자유를 허락해주지 않는 통치자는 비민주적인 인물이라고 비난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누가 지배하고 누가 지배당하는지 몰라 혼란은 극에 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부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이 과두정체를 몰락시킨 것처럼, 자유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과 그 밖의 다른 것에 대한 무관심이 민주정체를 몰락시키고, 참주정체를 탄생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민주주의에는 다른 정체에서는 볼 수 없는 원리상의 난점들이 내재하여 있다.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demos(민중)와 kratia(힘, 권력, 지배)의 합성어로 데모스가 힘을 갖는 혹은 지배하는 정체를 말한다. 이 정체에서 데모스는 통치자이면서 동시에 피치자이기 때문에 다스리는 사람들이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이 된다. 그들이 지켜야 할 규범이나 법규는 그들이 만든 것이고, 그들이 다시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의 복종은 그들의 자유가 결정한 것이다. 지배자인 데모스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데모스 자신이다. 그러니까 민주주의의 중요한 원리들은 어떤 구체적인 내용이나 형상이 아니라 데모스의 결정에 따라서 다양한 내용과 형상으로 나타나고, 새로운 결정이 이루어지면 내용과 형상이 또 달라지는 정체라는 것이다. 이렇게 민주주의는 통치자와 피치자, 자유와 복종, 주체와 객체가 한 존재에게 동시에 머무는 매우 역설적인 체제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두 가지 접미사를 사용하여 정체를 표현하였다. 군주정을 의미하는 monarchy, 과두정을 의미하는 oligarchy, 무정부주의를 의미하는 anarchy처럼 ‘지배, 근거, 원리’를 뜻하는 -archy(-archia)를 접미어로 붙이는 경우와, democracy, aris-tocracy처럼 ‘지배 혹은 힘’을 뜻하는 -cracy(-kratia)를 붙이는 경우이다. -archy라는 접미어가 붙은 정체는 누가 지배자이고 몇 명이 통치수단을 장악하는 정치체제냐에 관심을 둔 명명이라면, -cracy가 붙은 정체는 어떤 일을 해낼 능력 내지 역량에 주목한 명명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kratia가 붙은 정체이지만, aristocracy(최선자 정체)의 aristoi는 선을 알아볼 능력을 갖춘 소수로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외연의 한계가 모호한 demos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

민주주의에 내재한 이러한 원리상의 난점들에 대하여 플라톤은 8권(잘못된 국가체제)에서 다음과 같은 비판을 가한다. “이 정체는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 인해 온갖 정체들을 지니고 있어서” “나라를 수립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형태의 것을, 마치 정체들의 잡화점에 찾아간 사람처럼 고를” 수 있다. 또 “민주정체는 ……즐겁고 무정부 상태의(長이 없는, 혹은 원리 없는 ‘anarchos’) 다채로운 정체이며, 평등한 사람들에게도 평등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일종의 평등을 배분해 주는 정체”이다.

플라톤은 “온갖 성격으로 장식되어 있는” 이 정체는 “아마도 정체들 중에서는 이게 가장 아름다운(훌륭한)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어떠한 권위도 존중되지 않는 지배의 근거와 지배자의 성격이 규정되지 않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피통치자들이 통치자처럼 굴고, 여성들은 남성들과 같은 지위를 갖는다. 노인들은 권위를 포기하고 젊은이들을 흉내 낸다. 스승들은 학생들에게 아첨하고 학생들은 스승들을 조롱한다. 외국인과 이방인이 자국 시민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심지어 동물들조차 길을 갈 때 자유롭고 당당하게 걷는 버릇이 들어 길을 비켜서지 않으면 들이받으려 한다. 모든 게 이런 식으로 자유가 넘친다.

민주주의는 ‘이 정체에서 가장 훌륭한 것으로 평가되는’ 개개인에게 주어진 ‘만족할 줄 모르는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의 향유로 인하여 정체의 아르케가 없고, 사람들 사이의 분별도 없다는 플라톤의 조롱으로부터 적어도 플라톤 시기의 아테네 민주주의를 특징짓는 두 가지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추론은 민주주의 그 자체로 하나의 정체이지만 동시에 “정체들의 잡화점”이라는 사실이다. 민주주의를 규정하는 ‘아르케(archē)’는 ‘아나르코스’, 즉 ‘아르케 없음(anarchos)’이 된다. ‘아르케’는 ‘지배, 지배자’ 혹은 ’근거, 원리’를 뜻한다. 그러니까 민주주의 정체에서의 지배는 ‘지배 없음’이고, 민주주의의 근거는 ‘근거 없음’인 셈이 된다. ‘아르케’는 “더 이상 그 밑에 놓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서 모든 실존에 앞서 그것들을 근거 지우는 것인데, 민주주의에는 그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논리는 무상의 설명 논리로 원용해서 무아로 귀결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하는 것(무상한 것)은 고유한 실체가 없는 것이다.
고로 불변의 실체가 없는 것(무아)에는 민주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4. 아르케 없음은 바로 근현대 민주주의의 생명력

필자는 《불교평론》 제72호에 기고한 〈민주주의의 당면과제와 불교의 역할〉이라는 글에서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가 2014년의 저서 《정치적 질서와 정치적 쇠퇴》에서 말한 내용을 간략히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무리 이념투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한 이념일지라도 ‘계속적인 자기경신을 하지 못한다면 결국은 쇠퇴 · 자멸’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의 롤모델 역할을 해온 미국의 정치 질서가 심각한 쇠퇴 국면에 놓여 있다고 주장하였다. 역사상 이데올로기 간의 마지막 우월성 경쟁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최종 승자가 되어 이념투쟁으로서의 역사는 끝났다고 선언했던 그가 채 30년이 지나기도 전에 민주주의가 쇠퇴하고 있다고 한 진단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후쿠야마의 상황인식은 미국 민주주의의 역동성 저하와 관련된 것이다. 민주주의도 끊임없이 변해가는 조건의 흐름에 맞게 자기갱신을 하지 못하면 결국은 쇠퇴 · 자멸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정치사상이나 제도가 박제된 동물처럼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인식의 산물이다. 정치이념이나 제도가 최종 완성형으로 고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내포된 이 경고가, 세상과 사물을 지속적인 변화와 흐름으로 인식하기를 요구하는 중도의 설법으로 들리는 것이 결코 아전인수는 아닐 것이다. 

플라톤의 민주주의에는 아르케가 없다는 비판은 민주주의는 조건의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유연한 내연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자기 확장적 외연을 가졌음을 의미하는 말이 된다. 근현대 민주주의의 강인한 투쟁력과 생명력은 변화와 흐름의 속성, 즉 무상과 무아의 속성에서 나온 것이다. 이 속성의 작동이 원활하지 못하자 바로 쇠퇴와 자멸의 징후가 보인다는 경고가 나왔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윤세원
인천대학교 명예교수.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정치학박사). 주요 논문으로 〈진흥왕과 전륜성왕 사상-아쇼카 ‘따라 하기’와 ‘넘어서기’를 중심으로〉 〈선출공직 진출후보자 선택의 불교적 기준〉 〈현대사회의 병리적 작동원리와 불교의 역할〉 등이 있고, 저서로 《중국적 사유와 삶》 《백범 김구》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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