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존중 모티프의 불교소설 면모

한국 불교소설은 신문학 이후에 국문학의 제재나 소재 전통을 계승해 왔다. 설화를 재구성하는 인물 중심의 불교소설이나 배경 중심의 공간소설이 그 주류를 이루어왔다. 필자의 지나친 생각일 수는 있지만, 현대소설로서의 새 지평을 보류한 채 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문학으로서 기능을 다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는 다분히 불교적 진리를 윤리적 측면에서 수용했거나 아니면 단순한 소재적 국면에서 수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문학의 윤리적 역행성이 불교 교리의 소설 수용에 제약을 가한 탓에, 삶의 모습이나 인간의 본체 규명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인간과 삶의 문제에 적극적인 대응 자세와 체험을 통하여, 그 본질을 관념 혹은 지식화하지 않고 실재화하여 불교소설의 새 지평을 열어야 함에도, 불교라는 큰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가 시대나 역사를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문학 양식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유보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소설의 서사구조는 삶의 실재 공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허구이다. 그뿐만 아니라 존재 양식에 의한 문학적 해명보다는 관계 양식에 의해서 인간과 삶을 해명하기 때문에 적합한 문학 장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성동이 《만다라》를 발표할 때 밝혔던 “이 척박한 시대의 척박한 땅에 태어나서 부당하게 배고프고 부당하게 고통받는 서러운 중생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으며 나아가 잠든 영혼을 각성시켜 줄 수 있는 종소리 같은 소설”을 쓸 수 있는 장르라는 의미이다. 현실도피적 모티프가 아닌 삶의 현장에서 중생과 함께하는 불교소설이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댄디즘 미학인 정신주의와 극기주의를 거쳐 타자와의 교정, 교응의 미학을 성취하는 불교소설이 바람직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필자의 욕심이다. 

그동안 살펴본 김성동의 《만다라》가 밀교적 미학으로 서사를 구조하고 허무와 절망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천착하려 했다면, 황충상의 소설은 현교적 인식을 통해 신비주의를 일탈하는 정공법으로 불교소설의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고, 정찬주의 초기 단편소설은 보이지 않는 존재의 끈을 불교적 상징과 인명 논리에 의해서 창작하고 있는 것이 한국 불교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소중한 작업이다.

하지만 불교소설의 진흥과 새로운 콘텐츠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불교소설의 중생화가 필요하다. 불교소설이 은둔이나 은일의 불교에서 벗어나 현실참여를 실천하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논거 제시는 그다지 어렵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삶의 다양성에 따라 또는 사회구조와 역사의 진행에 따라 대응해가야 하는 문학의 속성과 관련된 불교 교리의 재해석이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니기에 그 결과물을 도출하기는 어렵다. 불교 교리가 역사와 사회의 흐름에 따라 대응해야 하는 신축성을 지니지 못한 불변의 진리라는 점에서 문학 사상으로 수용하는 문제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교문학은 현세적이고 합리주의적인 문학관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우리 문학에 새로운 창작적 지평을 줄 것이라는 믿음은 변함이 없다. 불교의 인본주의적인 세계관과 초월주의적인 인식 논리, 그리고 그 미학이 문학에의 수용에 적합하며 서구문학의 오염, 침잠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길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비언어적 마음의 형상에서부터 밀교의 문학적 수용과 변용에 이르기까지 방법의 다양성이 제시되고 있는 지금의 자리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더욱이 불교는 인간의 고통을 해소해주기 위한 종교라는 점에서 문학의 사회적 기능, 교시적 기능과 원론적 국면에서 만나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종교처럼 성역화되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선(禪)이라는 수행방식이 은일이나 은둔사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실천적 삶의 방식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선은 수행의 첩경이 되는 것처럼, 불교소설의 현실참여, 즉 당대적 문제의 해명 의지가 체제나 조직이나 이데올로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 고통 해소를 통한 구원 의지에서 비롯된다면 이 또한 그 가능성은 확대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시각에서 최근에 발표된 이상문의 불교소설 〈불호사(佛護寺)〉(《불교평론》 2020 여름호)와 〈손님〉(《인간과문학》 2020 가을호), 그리고 박상률의 〈학스앵〉(《불교평론》 2020 봄호)을 살펴보려 한다.

 

1. 이상문의 방생 혹은 적멸, 그리고 생명존중 

월남전을 모티프로 한 장편 《황색인》의 작가 이상문이 불교소설에 관심을 보인 작품은 〈방생〉이라는 단편소설이다. 동어반복이지만, 이 소설은 “이 시대의 역사적 흐름에 대응하다가 좌초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방생 혹은 자유의 의미를 환기시키는 소설이다. 4 · 19에 다리를 잃은 아버지,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집에 갇혀 있는 정길이, 동생 정길이를 속박의 공간으로부터 탈출시켜 자유의 공간으로 보내기 위해 음모하는 ‘나’ 무한이의 이야기가 입체적으로 그려진 〈방생〉은 이 시대의 단편적인 아픔을 그려놓고 있는데, 불교문학의 시각에서 볼 때 새로운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소설이다. 그 서사구조는 정길이를 자유 세계의 표상인 미국으로 탈출시키기 위해 사월초파일 한강에 방생하는 고기를 잡아 되팔아 그것을 미국행 티켓을 사는 데 사용하자는 ‘나’와 정길이의 음모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그 음모를 행동으로 옮겼을 때, 방생된 고기와 함께 그물에 걸려 올라온 정길이의 죽음으로 인한 그들의 자유에 대한 의지의 좌초가 이 소설의 감동을 증폭시킨다. 이 소설은 중생계 평등의 불타 자비사상의 실천 덕목 중 하나인 방생을 속박공간으로부터 자유로 나아가기 위한 서사구조로 차용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그것에 의해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아이러니 또한 이 소설에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자유의지→방생→죽음→자유 획득이라는 연기(緣起)의 도식은 이 소설의 메시지 구조인 셈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의 ‘방생’의 의미는 ①불타의 중생계 평등의식인 자비사상과 생명존중 사상 그 실천 덕목을 의미하는 동시에 ②이 시대의 파행적 현상으로부터의 탈출 의지를 수용한 ③현실 공간을 초월 공간으로 이행하는 통과제도와도 같은 내적 혹은 외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방생’이라는 불교적 실천은 살생 경계의 의미와 함께 인간구원 의지의 표명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이러한 불교의 원론적 의미 또는 존재론적 양식에 의한 의미 설정에 작가 메시지를 기초하기보다는, 관계양식에 의해 불상생, 방생의 의미를 변용한다. 즉, 사회와 인간관계로 그 의미를 구속하는 사회의 굴레, 사회의 제도적인 폭력으로부터 풀어놓는다는 의미 변용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방생에 다시 죽음으로 구속되는 이 소설 서사의 아이러니는 죽음의 의미가 단순한 삶의 끝이라는 생각보다는 또 다른 삶, 초월적 삶으로 나아가는 자유의지의 소산임을 환기하고 있어 불교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앞서 말한 불교의 성역화 현실 대응력에서 신축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세기가 바뀐 이 시대에도 유용한 불교소설인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상문의 최근 작품 〈불호사〉는 석우 주지, 대덕행 보살인 홍여진, 그리고 용담 회주를 중심으로 덕룡산 불호사라는 절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이야기가 지그재그 방식으로 엮어간 소설이다. 이원적인 입체 구조로 역사 사회적 상상력과 불교적 상상력을 교호시켜 구조를 이룬 불교소설이다. 시간적 배경은 현재라 해도 한국전쟁 공간에서 벌어졌던 이야기를 병립식으로 진행된다. 주지 스님 석우는 세납은 일흔이고 법랍이 예순인 고승이다. 회주 스님인 용담은 세납이 아흔여덟인 노승이다. 그리고 홍여진 보살은 석우 스님의 젖어미로 김삼수라는 청년과의 인연으로 위패를 모시고 사는 보살이다. 여진이 석우 스님의 젖어미가 된 것은 전쟁 공간에서 죽은 최 순경과 박 양 사이에서 태어난 석우를 젖 먹여 키운 인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시작은 여진이 회색 캐리어를 끌고 버스에서 내리는 것부터 시작된다. 석우 주지로부터 “부서진 수레는 구르지 못하고 늙은 사람은 닦을 수 없다”는 문자를 받고 절에 무슨 변고가 있을 것으로 짐작하여 불호사로 가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소설의 결말 부분은 용담 회주의 열반으로 끝난다. “여진이 가만히 불러보았다. 그는 대답이 없었다. 속삭이듯이 불러보았다.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고요였다./ 여진은 늪 같은 그 고요 속에 빠져들었다. 눈썹 하나만 좌복 위에 떨어진다 해도 천둥소리가 날 것 같은 고요 속이었다.//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용담 회주가, 세 시쯤에 시간이 나면 올라와 보라 했던 석우 주지였다.”로 마무리된다. 여진이 느낀 고요는 용담 회주의 적멸 공간을 이미지로 표현한 부분으로 주목되는 부분이다. 

이렇게 서두와 결말 부분만 보아도 이 소설은 불교소설로서 한국전쟁이라는 참담한 우리 역사 속의 불호사를 그린 소설로 보인다. 여진은 산사를 오르면서 일흔 해 전 한국전쟁 때 자신을 찾아오다가 행방불명이 된 서방이기도 한 김삼수라는 청년을 떠올리는 것으로부터, 숨어들어 온 인민군으로부터 사살당한 이야기와 석우 주지의 생부모인 의용경찰 최 순경과 박 양의 이야기가 과거 회상으로 구조되어 있다. 역사 사회적 상상력으로 인간의 생명존중 사상을 환기한 서사구조이다.

여진이 불호사를 찾아온 것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번뇌가 쌓인 탓에 다시 찾아” 뵙는다고 말하자 용담 회주는 “……기다렸습니다. 무여열반(無餘涅槃)이라, 두깨비는 지가 벗어놓은 허물까지 먹고 간다는디. 그동안 진짜 헐 일은 안 허고 헛짓만 허느라고 뺑돌이 같이 돌아쳤던 것 같구만이요.”라고 답한다. 여기에서의 ‘모든 번뇌를 끊고 분별(分別)의 지혜를 떠나 몸까지 없애고 적정(寂靜)에 돌아간 경지. 죽은 후에 들어가는 열반’을 의미하는 무여열반은 죽음을 예감하는 용담 회주의 법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석우 주지는 자신의 출생과 관련된 인연생기(因緣生起)를 용담 회주와 젖어미인 여진 앞에서 이렇게 토로한다.

“예, 어른스님. 저는 절집에서 태어나 자란 석종(釋種)이라서, 법 앞에서 게으름을 피워도 당연히 이 땅의 최고 사찰인 불호사에서 상단을 차지허고 안거 있는지 알었구만이라우. 그런디 이 자리서 주신 어른스님 말씀으로 그만 쇠똥밭으로 궁글어 떨어져 부렀습니다. 그런께 앞으로 잠자지 말고 공부허란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겄는가요. 주신 말씀 뼛속에 새겼구만이요.”

“시방 내가 주지헌테 허고 싶은 말은, 수레를 타고 갈람시로 미리 그것이 움직이는 이치까장 다 알고 난 뒤에사 타고 갈라고 허면 못 간다는 것이여. 이왕에 수레를 몰고 가는 사람은 몰고 가는 일을 잘허고, 이왕에 수레를 타고 가는 사람은 닿어서 헐 일을 잘허면 쓴다는 것이여. ……지목행족(智目行足)해야제. 또한 수범수제(隨犯隨制)해야제. 소소계(小小戒)는 파해 감시로…….”

위 인용문에서 용담 회주가 말한 소소계(小小戒)를 파해 가면서 지목행족(智目行足)과 수범수제(隨犯隨制)를 하라는 법문은 주목된다. 소소계(小小戒)는 가벼운 계율을 의미하는 것으로 소소계를 버리라는 부처가 입멸하기 전 말씀으로, 눈이 있고 발이 있어야 수행을 할 수 있으며[智目行足], 악행을 저지르는 자가 나타날 때마다 그 악행을 금지하는 계율을 제정하라[隨犯隨制]는 가르침은 부처의 마지막 법문이다. 그 가르침에 여진은 “또 스님께서 파하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반야공(般若空)입니다. 스님……”이라고 말하고 김삼수의 천도재를 지내고 절을 떠난다. 반야공 사상(般若空 思想)은 대승의 중심 사상이다. 《법화경》 〈법사품〉에서는 이렇게 설법한다. “법사는 여래의 방에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서 사부대중을 위하여 설법하라. 여래의 방이란 중생을 사랑하는 자비심이요, 여래의 옷이란 부드럽게 잘 참는 인욕심이요, 여래의 자리란 진리에 대한 바른 견해인 반야공(般若空)”이라는 설법은 법사의 마음 자세에 대한 설법이다. 따라서 여진의 말은 법사의 바른 자세를 환기한 말이다. 

이 소설의 결말 부분에서 김삼수의 주검이 그의 도민증과 인민군의 총알을 징표로 발견되고 용담 회주는 고요하게 적멸에 드는 것으로 이 소설은 끝난다.

이상문의 중편소설 〈손님〉의 서두도 〈불호사〉의 서두처럼 미륵사로 들어가기 위해 주지 스님 철우가 버스에서 내리는 장면 묘사부터 시작된다. 철우 스님은 도반을 화장하여 설악산에 뿌리고 오는 중이다. “꿩 꿔엉―, 꿩 꿔엉―, 산자락에서 장끼 한 마리가 억새밭에 울음소리를 떨어뜨리면서 날아”오르고, “장끼는 금세 산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마른 억새들이 사납게 날들을 세우고 있는 밑으로 돌아왔”을 때, 철우 스님은 “3간 초옥. 거적들로 문을 대신한 그 초옥”의 최기원네를 생각한다. 여기에서 최기원이라는 인물의 등장이 이 소설의 제목 ‘손님’을 표상하는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소설의 키워드는 ‘손님’이다. 그 ‘손님의 정체 찾기’가 이 소설을 읽게 하는 힘이 된다. 

지금 최기원은 어디서 무얼하고 사는지…. 그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그 일이 그새에 부채가 되어 있는 성싶었다. 오늘따라 그랬다. 최기원도 이런 마음이라면 미륵사를 한 번쯤 찾을 수 있을 텐데…. 

그가 퍼뜩 정신을 차린 것은 누군지 자신을 부른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어른스니임―! 주지 스니임―!

일주문이 코앞에 서 있었다. 그 안에서 궤짝을 등에 진 채로 두 팔을 들어 흔들면서, 성륜 행자가 달려 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열두 살짜리 몸에 비해서 커 보이는 궤짝이었다. 순간 편백나무 쌉싸래한 향이 콧속으로 확 밀려들었다. (……)

“허어! 그래 가지고 궤짝 속의 생명들이 얼마나 놀랐겠느냐? 도대체 ‘사위의’를 익힌 적이 없더란 말이냐?”

그가 시치미를 떼고 성륜 행자를 나무랐다. 얼굴에 잔잔한 웃음을 담은 채였다.

“허어! 노전 스님께서 벌써 깨우쳐 주셨네요. 더불어 ‘선원청규’도 깨우칠 수 있었네요.”

성륜 행자가 지지 않았다. 한술 더 떠서 그의 말씨까지 흉내 낸 것이었다. (……)

가끔 자신의 옛 모습이 겹쳐지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 속에 독사는 없다더냐?”

그는 말길을 돌렸다.

“예. 어른스님…. 딱 무독성 석화사 한 마리뿐입니다. 어제저녁 예불 끝나고 나왔을 때, 상좌스님이 지장전 뒤에까지 내려온 것을 보고 잡았답니다. 아까 저를 찾아서 뱀 궤짝을 지어 주고 다시 길을 새겨 주면서, 너는 은공을 참 많이 입는구나 하고, 말했습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불교용어는 ‘사위의’와 ‘선원청규’이다. 사위의(四威儀)는 수행자가 생활에서 갖추어야 할 네 가지의 몸가짐인 행(行), 주(住), 좌(坐), 와(臥)를 의미하고, 선원청규(禪院淸規)는 선원에 기거하고 수행하는 대중의 일상생활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규칙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불가의 일상, 그 단편을 독자들이 엿보게 하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그리고 성륜 행자가 들고 온 뱀 궤짝에 들어 있는 뱀이, 무독성 석화사가 ‘손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의 소도구이다. 이 뱀 궤짝은 위에서 나오지만 “전 주지 구담 큰스님께서 손수 만들어 당신부터 등에 지시고, 자운 주지 스님한테도 행자 시절에 이어 지게 하시고, 철우 노전 스님도 물론이고, 지금은 송 행자가 지고 있는” 뱀 궤짝이다. 그리고 그 뱀 궤짝의 사연은 이렇다. “6 · 25전쟁이 끝난 다음 해의 봄부터, 절 안팎에 느닷없이 뱀들이 우글우글했기 때문에 만드신” 것이고, “전쟁 중에 여기저기서 죽은 사람들의 원혼이 모두 뱀이 됐다고 여긴 것이고…. 일기진심수사신(一起瞋心受蛇身)이란 말씀을 자주 하셨다지. 요사채 안이며, 여기저기 벗어놓은 신발 안에 심지어는 불전의 상단에까지 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니까. 다행히 구담 어른스님은 젊었을 때 뱀 잡는 일에 도사”였기 때문에 “그것들을 집어서 뱀 궤짝에 담으면 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뱀 궤짝을 지고 밖으로 나가 등성이 세 개를 넘어가면 그것을 삼계 너머로 여기고, 흙언덕 밑에 풀어주었던 것이지. 뱀은 구멍을 파지 못한데. 그러니 자갈밭 같은 데는 피하셨다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쥐 한 마리를 잡아먹으면 한 달 넘게 더 먹지 않아도 끄떡없다지. 그래서 먹고 들어가 쉴 구멍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고. 뱀으로 돌아온 생명조차도 그렇게 귀하게 거둬야 한다는 생각이셨던 게야. 그래서 자운 주지 스님의 은사이시고….”가 그것이다. 여기에서도 역사적 상상력을 불교적 생명존중 사상으로 극복하고 있는 부분이다. 또한 뱀을 ‘손님’으로 표상한 창작적 상상력을 엿보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머리에 일곱 개의 점이 있다는 석화사는 위에 언급된 한국전쟁 때 죽은 원혼의 표상인 셈이다. 또한 ‘일기진심수사신(一起瞋心受蛇身)’ 설화에서 의미하는바, 악업을 짓지 않는 수행자들의 마음 다스림을 환기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간과할 수 없는 스토리는 장편소설이 아닌 중편소설로 서사 구조가 되어 있기에, 대사로 처리되고 있지만 최기원 모친의 여섯 식구가 미륵사에 빚진 이야기이다. 여덟 살 최기원이 한국전쟁이 끝난 그 이듬해 미륵사에 왔을 때, 뱀 궤짝을 만든 구담 스님이 주지로 계셨다. 최기원의 아버지는 해방공간에 여수 · 순천에서 좌익운동을 했던 사람이라 아버지는 물론이고 어머니와 동생들은 물질적으로 구담 스님의 은혜를 입게 된다. 특히 최기원의 부친은 식칼로 주지 스님을 협박하여 돈을 빌려 간다. 이것을 당시 자운 수좌가 목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결말 부분에서 그 빚을 10억과 헬리콥터 대절로 보시하여 갚는다. 

이를 통해서 소설 〈손님〉에서의 ‘손님’은 구담 스님에게 은혜 입은 최기원인 셈이다. 법당으로 몰려드는 악업의 화신인 뱀도 손님이기 때문에 궤짝으로 모셔 다른 곳으로 보내주기도 하지만, 은혜를 갚기 위해 보시하는 최기원도 손님인 셈이다. 

이상문의 많은 소설은 역사 사회적 상상력에 의해 써온 소설들이다. 그러나 최근에 발표한 위의 두 편의 소설에서 우리는 그의 창작적 의지의 한 단편을 엿볼 수 있다. 인간의 근본문제를 역사 사회적 상상력으로 해명해보려 했던 창작의도를 선회하여, 불교적 인식으로 혹은 불교적 모티프로 해결하려는 창작의도가 그것이다. 역사 사회적 상상력에 의해서 당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도 가져야 하겠지만, 인간의 근본문제를 창작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불교적 상생 인식이 중요함을 보여준 소설이다.

2. 박상률의 〈학스앵〉의 경우

박상률의 소설 〈학스앵〉은 이른바 승려의 성장 과정 소설이다. 소설의 제목 ‘학스앵’은 학승과 학생을 합친 조어이다. 사미승으로 정규 학교를 다니는 학생을 ‘학스앵’이라 부른다. 이 어투에는 사투리 어조가 섞여 있다. ‘학스앵’인 화자 ‘나’는 열네 살 되는 봄, 걸승 차림의 희명 스님의 손에 잡혀 산문에 들어선다. 이 소설의 스토리는 ‘나’의 과거의 이야기와 현재의 이야기가 지그재그로 전개된다. 

첫 구절인 “희명 스님, 아니 은사 스님이 입적했다는 것을 알았다”라는 현재 이야기부터 소설이 시작된다. 그 소식을 ‘나’는 〈불교신문〉 입적 기사를 보고 알게 되면서 과거 출가 때의 일을 회상한다. 희명 스님은 은사 스님으로 ‘나’에게는 은사 이상의 존재였다고 토로한다. 그 이유를 “희명 스님은 내게 또 넘어야 할 산이었고, 부수어야 할 얼음 덩어리였으며 탈옥해야 할 감옥을 지키는 간수 같은 존재”라고 토로한다. 이 토로는 이 소설에서 ‘나’의 화두이며, 극복 대상이다. 희명 스님은 ‘나’의 돌아가신 조모가 다니던 작은 암자 구지암의 주지다. 그 인연으로 ‘나’는 중학교를 포기한 채 희명 스님에게 맡겨진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나도 구지암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 고등학교도 중학교와 같은 울타리에 있고, 중학교 동창들이 대부분 그대로 진학하였다. 게다가 절에서 다니는 줄 다 알기에 밥만 싸가도 다들 이해했다. 이제는 학스앵이라는 호칭도 아주 자연스럽게 되었다. 학승이 학생! 아이들은 절에서만 살아도 학승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순사 젊은 스님들 말에 따르면 진짜 학승은 강원이 있는 절에 가서 학문적으로 제대로 공부하는 스님이란다.

출가승들도 정규 학교 교육을 받게 된다.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학스앵’의 신분으로 중 · 고등학교를 다닌다. 스님인데 스님이 아닌, 학생인데 학생 신분이 아닌 심적 갈등을 안은 채 배움을 길로 들어서지만, 위의 인용문처럼 “진짜 학승은 강원이 있는 절에 가서 학문적으로 제대로 공부하는 스님”이다. 화자 ‘나’의 “큰절 생활은 쉽지 않았다. 군대생활보다 더 힘들다는 행자 생활을 6개월 넘게 한 뒤 겨우 사미계를 받았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은 본격적인 공부를 해야 하는 강원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 4년여의 강원 생활을 마치고 가까스로 비구계를 받아 정식 스님이 되었다. 구지암에서 중고등학교 6년, 강원에서 4년 6개월, 그리고 보니 절에서 산 지 10년이 되어서야 스님이 된”다. 이 과정을 그린 스토리가 주종을 이루지만 이 소설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이 보살 누나와 윤 처사의 이야기이다.

절 살림은 ‘나’보다 열 살 많은 이 보살 누나와 중늙은이 윤 처사가 도맡아 하고, 희명 스님은 법당에서 목탁을 치거나 ‘나’ 응식이는 암자 뒷산을 쏘다니거나 큰 절 도순사를 다녀오는 산사의 일상생활에 빠지기는 했지만, 어떨 때는 희명 스님의 혼꾸멍에 절 생활을 그만두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이 보살 누나 때문에 참고 살았다. 

어느 하루, 하교해서 살림집 부엌에서 나물을 다듬고 있는 이 보살 누나의 팔뚝을 기어오르는 지네를 보고 ‘나’는 머윗대로 걷어내어 죽이게 된다. 이를 안 희명 스님은 생명 있는 것은 어느 것이든 죽여서는 안 된다는 꾸지람과 함께 절을 108번 절을 하고 ‘생명 있는 것을 다시는 해치지 않겠습니다’를 외치라는 벌을 준다. 이 부분이 이 소설의 불교사상을 엿보게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나’의 이 보살 누나에 대한 사랑과는 관계없이 누나는 출가하여 청도의 큰 비구니 절로 공부하러 떠난다. 하지만 도순사 젊은 스님들은 이 보살이 학승 자격을 따면 구지암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한다. 

한편, 윤 처사 아저씨는 운동권 학생이었던 아들이 군대로 끌려갔다가 죽는 불행한 사건을 겪게 된다. 그 사실을 덤덤히 내뱉는 것을 보고 ‘나’는 딸기 팔러 갔다가 죽은 아버지를 떠올린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자 희명 스님은 중노릇을 제대로 하기 위해 큰절로 가라고 한다. ‘나’는 큰절 강원에서 참선수행을 마치고 떠돌기로 한다. 속세에서 떠도는 것도 수행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떠돌다가 충청도 해안가 절에서 희명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는다. ‘나’는 그곳을 떠나 구지암으로 향하면서 이 소설은 끝난다. 

박상률의 〈학스앵〉은 ‘나’의 사미계(6개월여)→학스앵(중고생 6년)→강원 학승(4년 6개월)→비구계를 받고 참선수행과 만행까지의 여정을 통해 절 생활의 어려움을 그린 스님으로의 성장 과정 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짤막한 이야기이지만 이 보살 누나의 팔뚝에 붙은 지네의 살생 에피소드를 통해 불교의 생명 중시 사상을 역설한 부분이다. 이는 불교의 연기적 생명관이다. 불교의 최고의 도덕적 덕목은 ‘불살생 방생(不殺生 放生)’이다. 《화엄경》 〈여래현상품〉에서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가 의미하는바, ‘불(佛)’은 생명이며 그 생명이 온 우주에 충만하다는 것에서도 불교의 생명존중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불교는 인간의 유한한 생명성을 바르게 인식하며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는 종교이다. 불교가 중생의 각각의 성격이나 삶의 방식에 따라 제시해주는 종교라 할 때, 소설도 이러한 불교의 문예창작적 기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 인간 생명의 중요성을 역설해야 한다는 점에서 같은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불교소설은 불교적 제 요소를 모티프로 한 소설로 인식되어 왔다. 절과 승려를 소재로 한 소설, 불교사상을 함유한 소설 등을 불교소설로 규정해온 것이다. 이러한 불교소설에 대한 개념 정의는 소설을 불교 포교의 방편으로서의 문학으로 인식한 결과물이다. 이러한 인식은 불교라는 종교적 범주 안에서만 그 효용성이 극대화된다는 한계를 갖는다. 그로 인해 불교소설의 확장성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불교소설의 확장을 위해서는 이제 불교소설의 정의를 수정 보완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불교적인 소재가 아니어도 작품 속에 불교사상이 함유된 소설을 불교소설로 포함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불교의 성격을 지닌 모든 소설로 그 범주를 개방해야 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불교적인 사고로 삶을 영위하면서 소설을 쓰는 작가들의 작품 속에는 자연스럽게 불교적 인식이나 사상이 스며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욕망 하나 버리지 못한 채 바른 삶을 마무리 짓지 못한 작가에게는 불교소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을 전제로 해서 하는 말이다.

소설의 질료는 지극히 세속적이다. 살아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 산재해 있는 삶의 이야기들을 소재로 끌어와야 하기 때문에 속될 수밖에 없다. 품위 있는 사람의 이야기보다는 속되고 천박한 일상적인 이야기를 끌어와야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의 본성과 삶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파헤쳐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소설을 성(聖)스러운 소설, 신비의 소설로 인식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측면에서 이러한 속된 이야기를 담은 불교소설에서 실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이 불교소설의 한계임은 자명하다. 그러나 이제는 불교소설도 개방되어야 한다. 소설은 윤리나 제도권 지성의 해체를 통해 인간의 본체를 드러내는 데 바쳐져야 한다. 속(俗)의 가장 중심적인 이야기가 소설의 이야기에 담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점에서 밀교적 불교소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불교소설이 신비성을 갖춘 성(聖)스러운 문학이어야 한다고 고집하더라도 창작적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반복되는 이야기이지만, 불교의 신비성은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의 원형으로 내재되어 있음을 환기할 때 그 방법은 보인다. 예컨대 통칭 ‘한(恨)’이라는 한국인의 원형질적 정서에는 현실의식이나 윤리의식과는 무관한 정서의 핵이 있다. 이에 대한 해명은 합리적인 사고나 전범적인 규정에 의해서 가능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 본질 자체가 영혼적 혼돈의 소산이기 때문에, 세속적이며 합리주의적인 방법론으로는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그 한(恨)이라는 정서를 생명존중 사상으로 인식할 때 가능성은 열린다. 한국인의 초자연적 체험은 서구인의 그것에 앞선다. 불교에서 초월적인 세계를 체험하려고 하는 우리네의 기원 사상에서도 그것을 엿볼 수 있다. 신비 체험의 불교소설이 리얼리즘 소설의 역행 현상으로 나타나는 근거는 여기에 있다. 

불교소설에서 불교 교리를 수용하는 틀은 있을 수 없다. 소설이라는 틀에 들어오면 그것이 무엇이든 해명 방식에 따라 변개될 수 있는 비유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해석에 대한 열린 가능성, 그 영역이 무엇보다도 넓고 깊다는 의미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인간 본체의 해명, 그 다양성에 근거한다. 불교와 소설의 접점인 철저한 인본주의적 입장에서 설정된 의식이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인간 본체를 흐리게 하고, 삶의 근원을 파악하는 데 불필요한 무명(無明)을 거부하며, 그것을 가로막는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고 멈춰 있기를 거부하는 개연성이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불성(佛性)이 있다는 말을 환치하면, 불성은 인성(人性)을 의미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학이 인간 삶에 기초하는 것처럼 불교가 인간 중심의 종교라는 점과 접점을 이루기 때문에 불교소설이 우리 문학권 안에서 확산될 것은 자명하다. ■

 

유한근
시인 · 문학평론가. 동국대 국문학과, 동 대학원, 명지대 대학원(박사)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평론) 당선 등단.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교수 역임. 시집 《사랑은 흔들리는 행복입니다》 평론집 《현대불교문학의 이해》 《인간, 불교, 문학》 등 저서와 논문 다수. 만해불교문학상, 문학평론가협회상, 동국문학상 등 수상. 현재 《인간과 문학》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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