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조와 불교 1 현대시조의 태동기와 개척기 민족의 가락에 불교를 싣다

1. 현대시조의 출발과 시대정신

최초의 현대시조는 1906년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대구여사(大丘女史)의 〈혈죽가(血竹歌)〉다. 〈혈죽가〉는 개화기 이후 최초의 활자 언어로 거듭난 근대 이행기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시조사에서 이 시는 민족의 혈관에 면면히 흐르는 전통적 가치를 현대적 시조 양식에 담아내어 최초로 문명화된 매체 역할을 감당했다. 거기에 급속한 문화의 변화와 다양한 길항들로 시대적, 문명사적 혼란스러움을 극복하는 데 고유한 주체성과 시대적 정신성을 견인하고 있다.

〈혈죽가〉를 현대시조의 효시로 보게 된 것은 2006년 7월 21일 있었던 한국시조시인협회의 현대시조 기념행사에서다. 이 시조가 발표된 날을 기점으로 시조시단은 현대시조가 100주년을 맞이했다고 선포하면서 ‘시조의 날’로 제정했다. 이로써 〈혈죽가〉 이후의 시조는 노래가 아니라 문학으로서의 시조로 한국 현대시문학사를 다시 쓰게 된 것이다.

〈혈죽가〉는 일제에 의해 조선 정부의 외교권을 무단으로 박탈하는 등 강제로 1905년 체결된 을사늑약을 비판하며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1861~1905)의 충정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작자가 대구여사로만 알려진 〈혈죽가〉는 민영환이 죽은 방에서 피가 묻는 대나무가 솟아나 그 절개가 정몽주보다 높다는 것이다. 그만큼 조선으로부터 내려오는 선비정신의 기개와 민족의 걸기(傑氣)를 이 시가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로 인해 일제강점기 백성들에게 민족정신의 귀감이 되었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본보기가 되었다. 그 후에도 이와 유사한 제목과 내용으로 이루어진 작가 불상의 시들이 3 · 1운동 전후해서 나타날 정도로 파장이 컸으며, 민족정신을 고취하기에 충분했다.

협실에 솟은 대는 충정공 혈적이라
우로를 불식하고 방 중에 푸른 뜻은
지금의 위국충심을 진각셰계 하고자

충정의 굳은 절개 피를 맺어 대가 되어
누상의 홀로 솟아 만민을 경동키는
인생의 비여 잡쵸키로 독야청청 하리라

충정공 곧은 절개 포은 선생 우희로다
석교에 솟은 대도 선죽이라 유전커든
하물며 방 중에 난 대야 일러 무삼 하리오

— 대구여사 〈혈죽가〉(〈대한매일신보〉 1906.7.21)

3수로 된 이 시 2수 초장 “충정의 굳은 절개 피를 맺어 대가 되어 있는” 혈죽을 중심으로 대나무 이미지가 각 수에서 펼쳐진다. 1수 중장 “방 중에 푸른 뜻” 2수 종장 “독야청청 하리라” 3수 중장 “석교에 솟은 대도 선죽”을 통해 다시 살아난 대나무 같은 충정한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실화를 배경으로 하는 이 시의 모티브는 나라와 백성의 치욕스러운 역사의 현장 앞에서 백성의 운명을 걱정하며 쓴 민영환의 유서에서 유래한다. 그가 유서에서 남긴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삶을 얻나니(중략)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구천에서도 기필코 여러분을 돕기를 기약하니”라는 역사적 전언이 〈혈죽가〉를 있게 한 것이다.

〈혈죽가〉는 1907년 3월 《대한유학생회보》에 실린 최남선의 〈국풍사수(國風四首)〉와 함께 초기 시조의 면모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국풍사수 〉는 ‘국풍(國風)’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나라의 풍속’으로서 민족의식을 대변하고 있다. 이 시는 첫 수만 단시조이고 나머지 세 수는 장시조나 사설시조 형태로서 가사 형식은 사라졌지만 서술 내용은 고시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고시조에서 현대시조로 행단하고 있는 최남선의 〈국풍사수〉 특징을 아래 1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육당 최남선
육당 최남선

 

기러기훨훨현해탄상거오
낙엽은 풀풀비예 산두비라.

만리타향에 외오운의 마음 갑졀이 슬프도다.
우리도 언졔 용약짐버셔 놋코 귀양고당학발친가.

— 최남선 〈國風四首〉(《대한유학생회보》 제1호, 1907.3.3)

장시조 형태로 쓰인 이 시는 ‘만리타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기러기로 자신을 비유하면서 민족의 애환을 슬프게 달래고 있다. 〈국풍사수〉는 〈혈죽가〉와 마찬가지로 그 사유의 뿌리가 민족 정서를 바탕으로 한 민족의식과 전통적 가치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혈죽가〉가 유교적 충절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국풍사수〉 역시 민족의 애환을 전통 양식인 시조로 토로하고 있다. 이처럼 시조는 시대를 넘나들면서 역사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문학적 토대가 되어 왔다.

이들 작품 이후에 수백 편이 넘는 많은 시조가 〈대한매일신보〉 〈대한민보〉 등에 ‘가요(歌謠)’ 또는 ‘청구가요(靑丘歌謠)’라는 이름 아래 수록되었다. 이 시조의 대부분은 망국민(亡國民)의 우국충정 또는 매국 정권에 대한 저항과 문명개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담아내고 있다. 이는 1920년 현대시조 태동기 최초의 현대적 불교시조라고 할 수 있는 최남선의 《백팔번뇌》에서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2. 시조 태동기의 불교 지향성

최남선(1890~1957)은 이광수와 함께 민족정신의 회복을 시조 형식으로 담아내면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의 계급문학에 맞서 시조를 대표적으로 내세웠다. 그는 시조집 《백팔번뇌(百八煩惱)》로 시조가 ‘노래하는 음악’에서 벗어나 ‘읽히는 문학’으로 자리 잡는 데 기여했다. ‘백팔번뇌’는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에서 생겨나는 수많은 번뇌를 뜻한다. 최남선이 ‘백팔번뇌’를 제목으로 한 것은 일제강점기 국권 상실의 암흑기 상황을 108번뇌로 설정하고, 대중들의 암울한 마음을 지혜로써 극복해나가라는 의미로 파악된다.

최남선이 1920년부터 《조선문단(朝鮮文壇)》에 발표한 〈조선국민문학(朝鮮國民文學)으로서의 시조(時調)〉와 함께 이 시집은 시조와 함께 더불어 초기 국시 개념으로 등장한 우리말로 된 한 권의 노래로서 국난극복을 위해 조선의 국권과 민족의 생명력을 강조한다. 그것은 다른 시가보다 전통성을 담보하고 민족정신을 수호하는 데 전통 문학 형태 중에서 시조가 가장 적합한 양식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집 《백팔번뇌》에서 불교적 정서를 가장 심층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연작시조 〈석굴암(石窟庵)에서〉를 통해 최남선의 시적 세계관을 들여다볼 수 있다.

其一

허술한 꿈자취야
석양(夕陽) 아래 보자꾸나
동방(東方) 십만리(十萬里)를
뜰 앞 만던 님의 댁은
불끈한 아침 햇빛에
환히 보아 두옵세

其二​

대신라(大新羅) 사나이가
님이 되어 계시도다
이 얼을 이 맵시요
이 정신(精神) 이 솜씨를
누구서 숨 있는 저를
돌부처라 하느뇨

其三

나라의 골시 모여
이 태양(太陽)을 지었고나
완악(頑惡)한 어느 바람
고개들 놈 없도소니
동해(東海)의 조만 물결이
거품 다시 지리오

— 최남선 〈석굴암(石窟庵)에서〉(《백팔번뇌》 1926)

이 작품은 《백팔번뇌》 2부에 수록되었는데, ‘석굴암’은 우리나라 불교를 대표하는 전통사찰의 건축물이다. 경북 경주 토암산 중턱에 있는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로서, 신라 경덕왕 때에 김대성이 축조한 것으로 신라 정신과도 통하는 문화유산이다. 3수로 이루어진 이 시조는 첫 수의 ‘석양(夕陽)’ ‘동방(東方) 십만리(十萬里)’ ‘불끈한 아침 햇빛’에서, 둘째 수 ‘대신라(大新羅) 사나이’ ‘얼’ ‘정신’ ‘돌부처’에서, 셋째 수 ‘나라의 골’ ‘태양’ ‘동해’ 등을 통해 조선의 역사성과 불교적 가치관을 동시에 살필 수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천 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불교의 상징 ‘석굴암’을 통해 미시적으로 해방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시조로써 전달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최남선과 같은 시대에 시조의 현대화를 구현한 인물로 이광수(1892~1950)를 들 수 있다. 앞서 본 최남선의 시조는 문학적 의미보다 사회적 기능에 초점을 둔 공동체 의식의 문학적 경향이 두드러졌다. 반면 이광수의 시조는 명승지를 읊은 기행시조로서 개인적 정서의 표출이라는 점이 부각된다. 이 가운데 불교적 정서가 가미된 시조 또는 시조 율격을 가진 시편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의 불교적 정서는 이운허 · 이청담 등의 스님과 교류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광수에게 내재한 민족 사관과 불교적 사유가 결합하면서 문학으로 투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1925년에 발표한 현대소설 《꿈》 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삼국유사》나 《조신설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소설의 핵심 주제는 인간의 삶이 마치 꿈같은 것으로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불교에서 말하는 존재적 허상이다.

그의 시조 형과 시조 율격을 가진 작품에서도 불교적 사유를 담은 시편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지금도 불자들 사이에 널리 애송되는 시 〈애인-육바라밀(六婆羅密)〉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바라밀다’는 불교에서 이르고자 하는 보살의 수행 방법 중 하나이다. 이 시는 각 6연의 마지막 행에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등 여섯 가지 수행법을 일깨우며, 7연에 이르러 ‘애인’을 ‘부처님’으로 투사하고 있어 불교적 사유가 그대로 표출되고 있다. 1연은 “님에게는/ 아까운 것 없이/ 무엇이나 바치고 싶은/ 이 마음// 거기서/ 나는/ 보시(布施)를/배웠노라.”라고 시작된다. 이 시의 모든 시행이 동일한 장과 구를 구성하면서 공통적으로 시조의 4음보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조 운율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자수를 고려한다면 현대시조라고는 할 수 없다. 이광수의 시가 중에서 불교를 시조 형식으로 구현한 작품은 아래 〈관음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관음상 일워지다 대자대비 하신 모습
글로나 붓으로나 옮길줄이 있으리만
하그리 그리움 맘에 흙을 빚어봅니다.

시방 아모대나 아니 나심 없으시니
이 따이 부정키로 바리실줄 있으시리
임이어 헌신하소서 그 얼굴을 보이소서.

설흔 두 가지 몸 마음대로 낱우시니
끝동 회장 저고리 남치마로 차리시고
젊으신 어머니 되시와 오래 여기 겹소서.

— 이광수 〈관음상〉(《춘원시가집》 1940)

 

3수로 된 이 시는 화자가 흙으로 ‘관음상’을 빚고 있는데 그 형상이 32세 어머니의 형상과 닮아 있다는 것이다. 자비와 구원의 상징인 ‘관음상’은 ‘관세음보살’로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보살이며 중생을 위험으로부터 구제하는 보살이다. 이 시의 각 수마다 관음상의 형상이 전개되는데, 1수 초장 “관음상 일워지다, 대자대비 하신 모습” 2수 종장 “임이어 헌신하소서 그 얼굴을 보이소서”라고 하면서 3수 종장에 와서는 “젊으신 어머니 되시와 오래 여기 겹소서”라고 관음상의 형상을 어머니와 겹치게 함으로써 완전한 동화를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화자는 사랑의 화신인 어머니와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을 동일한 존재로 표상하며 나아간다.

최남선과 이광수 시조에서 보이는 표층적인 불교적 세계관을 보다 더 심층적으로 심화시킨 시인으로 한용운(1879~1944)을 들 수 있다. 한용운은 언어의 한계를 언어로 극복하는 불교적 심상을 시조로 재현하면서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선승이다. 설악산 백담사에서 출가한 한용운은 불교를 대표하는 독립운동 발기인 33인 중 한 명으로서 1910년 불교의 변혁을 주장하는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특히 1920년대 한국 시문학사의 근대 자유시 정착에 기여한 그의 시집 《님의 침묵》은 이념적 분화 속에서 사회적 반향과 당대의 특유한 정서가 합치되면서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한용운의 불교적 의식세계가 시대정신과 결합, 분출하면서 《님의 침묵》을 통해 시대의 절망을 서정성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그의 시는 희망을 기다리는 민족의 신조로서 다양한 의미를 창출하는 데 이바지했다.

이 시기 문학적 풍토로 한학을 공부했던 조선시대 선비 풍속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기에 시인들은 한시와 시가, 시조 등의 창작을 병행했다. 한용운 역시도 자유시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자유시뿐만 아니라 시조, 한시, 동시, 산시, 소설 등의 시가와 산문 등을 남겼다. 이 가운데 고시가 현대시조로 계승되고 정착되는 과정에서 한용운이 창작한 32편의 시조가 전해진다. 이 시조 중에서 불교적 주제를 다룬 시편으로 특정할 만한 것은 단수로 이루어진 〈심우장〉이 대표적이다.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 손 옷읍도다
만일 잃을시 분명타 하면
찾은들 지닐소냐
차라지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 한용운 〈심우장〉(《나라사랑 2》 1971)

전형적인 단수 1연 6행으로 된 시조 〈심우장〉은 1971년 외솔회에서 간행한 《나라사랑》에 수록된 한용운의 유작 시조 17편 중 한 편이다. 심우장은 한용운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말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곳으로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다. 이 시조는 그가 심우장에 거주하던 시기에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해방 1년 전에 생애를 마감했으므로 이 시는 “잃은 소”를 통해 국권 상실에 대한 절망과 국권 회복에 대한 희망이 섞여 있는 작품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심우장(尋牛莊)의 어원은 선(禪)에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통해 본성을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단계 십우도(十牛圖)에서 유래한다. ‘심우(尋牛)’는 선의 수행단계를 소와 동자를 통해 알레고리 한 것으로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십우도의 첫 단계로 파악된다. 처음 선을 닦게 된 동자가 본성이라는 소를 찾기 위해서 산중을 헤매다가 마침내 도를 깨닫게 되는 과정에 이르게 된다는 환유적인 표현이다.

이 시편 초장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 손/ 옷읍도다”에서 잃은 소가 없는데 찾을 소도 없다는 것은 본래 소가 없다는 무(無)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존재의 실체성 자체가 없다는 모순을 보인다. 요컨대 있으면서 없고 없지만 있는 공(空)을, 소를 통해 존재의 본성을 역설적으로 찾아가고 있다. 중장 “만일 잃을시/ 분명타 하면/ 찾은들/ 지닐소냐”는 화자가 잃은 소를 찾는다고 해서 그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으로, 모든 실체성을 가진 존재에게 던지는 질문이 된다. 소라는 존재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거나 없는 비실체적인 것이며, 그것은 찾을 수는 있어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종장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는 것은 공(空)의 자리는 찾아지는 것이 아니므로 잃을 수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직 관계 속에서만 이루어진 세계에 대한 비실체성인 공의 자리를 현시하는 시편이다.

3. 사찰을 모티브로 한 시조들

이병기, 이은상, 심훈 등은 고시조가 근대적 형태를 갖추어 나가는 현대시조 태동기의 중심에 있던 시인들이다. 또한 1920년대 중반 최남선을 중심으로 현대시조의 주체로서 시조부흥운동을 전개했던 핵심 인물들이다. 이들의 시에서는 사찰이 주요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다. 불교에서 사찰은 수행과 전법의 중심지로, 부처님의 불상을 모시는 신성한 도량(道場)으로 특별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많은 시의 소재가 되어 왔다. 초기 시조에서 사찰이 중심 소재로 나타나는 것은 일제강점기라는 암흑기에 대중들의 정신적인 안식처로서 기능했기 때문이다. 시인들의 사찰 체험과 불교적 정서 속에 내재한 신성함과 성스러움을 표출하는 시편들을 만나볼 수 있다.

사찰을 모티브로 하는 시편 중 하나인 〈송광사(松廣寺)〉는 〈시조는 혁신하자〉로 알려진 이병기(1891~1968)의 작품이다. 현대시조에서 이병기는 유례없이 실감, 실정을 창작의 첫 번째로 내세웠다. 그것은 고전적 형식을 전승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맞게 현실을 표현하고 고어 투를 버리는 격조를 중시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고시조에 맞서 구체적인 형식과 내용에 대한 현대시조 이론을 제시하면서, 고시조에서 근대 시조로의 이행을 추구했다.

 

이병기
이병기

보성강(寶城江) 십오리를 거슬러 오르다가
그 강을 다시 건너 산으로 돌아드니
깊은 숲 으늑한 골에 종경(鐘磬)소리 들리어라
나무와 바위틈에 물소리 졸졸이고
금벽(金碧)을 뒤에 두고 청심문(淸心門) 높이 서서
이 문을 드는 이로 하여 시름 잊어 하여라

합장배례(合掌拜禮)하고 가부(跏趺)를 겯고 앉아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원불(願佛)을 우러러보고
이윽고 고요한 밤을 선삼매(禪三昧)에 드노라

새벽 예불(禮佛)소리 곤히 든 잠을 깨어
한 옆에 비어 있는 설법당(說法當)을 돌고 보니
고려판(高麗粄)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은 홀로 남아 있도다

— 이병기 〈송광사(松廣寺)〉 전문

전남 순천시 송광면에 소재하는 ‘송광사’는 조계종의 발상지로서 한국불교의 중심 사찰이다. 송광사는 삼보사찰 중 승보사찰로 일컬어지며, 고려 숙종 때 대각국사 의천이 직접 감수한 고려판 《대반열반경》을 보관하고 있다.

첫 수에서 셋째 수까지 ‘변해도 변하지 않는’ 무한한 시간을 상상하며 창작한 이 시는 《대반열반경》을 찾아가는 고달픈 여정을 주제의식으로 하고 있는데, 화자의 도정은 수도승의 수행처럼 녹록지 않다. 요컨대 첫 수 “보성강 십오리”를 갔다가 “그 강을 다시 건너 산으로 돌아”가고, “깊은 숲 으늑한 골에 종경 소리”를 듣고, 둘째 수 “나무와 바위틈”을 지나서 “금벽을 뒤에 두고 청심문”을 건너가며 시름을 해소시킨다. 이어서 셋째 수 중장에서 “보조국사의 원불을 우러러보고” 난 뒤, 넷째 수 중장 “설법당을 돌고” 난 후에서야 드디어 종장에서 “홀로 남아 있는 고려판 대반열반경”을 만나게 된다.

〈성불사의 밤〉을 창작한 이은상(1903~1982)은 1926년 시조부흥운동이 시작되면서 전통 문학과 국학에 관심을 가지고 현대시조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1932년 첫 시조집 《노산 시조집》을 발간한 그해 5월, 〈가고파〉를 시작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 시조의 특징은 화자가 겨울의 타향에서 고향의 사계절을 회상하는 향수와 함께 식민지 시대의 어두운 시대적 분위기까지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최남선에 이어서 이병기와 함께 한국 시조를 대표하는 거대 산맥으로서 현대시조의 전통을 일군 선구자로 평가된다. 이은상은 민요적인 리듬을 살린 시조들을 많이 썼으며, 특히 중장을 뺀 양장시조를 통해 시조부흥기의 시조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은상
이은상

성불사(成佛寺)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 소리
주승(主僧)은 잠이 들고 객(客)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댕그렁 울릴 제면 더 울릴까 맘 졸이고
끊인 젠 또 들리라 소리 나기 기다려져
새도록 풍경 소리 데리고 잠 못 이뤄 하노라

— 이은상 〈성불사의 밤〉 전문

2수 2연으로 된 이은상의 〈성불사의 밤〉은 중심 소재가 황해도의 사찰 성불사와 그곳의 깊고도 그윽한 풍경 소리이다. 사찰의 풍경은 물고기 형상을 매달고 있는데, 물고기는 깨어 있을 때나 잘 때나 심지어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않으니 수행자도 물고기처럼 자지 말고 항상 부지런하게 도를 닦으라는 뜻이라고 한다.

1수 중장에 등장하는 주승은 날마다 풍경 소리를 듣는 것으로 잠을 자고 있지만, 화자는 그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빼앗겨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의미로 1수 결구에서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하고 불교적 정취에 자아의 정서를 표출한다. 2수에서는 그윽한 풍경 소리를 빚어내는 성불사의 밤을 초장 “댕그렁 울릴 제면 더 울릴까 맘 졸이고”에서 더욱더 심화시키면서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화자의 심상을 드러낸다. 이같이 풍경이 우는 소리를 통해 화자는 번민하고 탐욕적인 세상에서 청정한 마음으로 홀로 깨어 밤과 섞여서 빛을 고이 감추고 있는 ‘화광(和光)’ 속 부처님의 ‘공덕’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성불사의 밤〉과 같이 사찰을 소재로 한 시는 1수로 된 〈장안사(長安寺)〉도 있다. 이 두 편의 시조가 가곡으로 불려 널리 알려졌다는 점에서 가창되어 왔던 고시조의 흐름을 살필 수 있는 대목이다. 거기에 시조 율격이 얼마나 안정적인 리듬을 조성하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한다. 〈장안사(長安寺)〉는 “장하던 금전벽우(金殿碧宇)/ 찬 재 되고 남은 터에/ 이루고 또 이루어 오늘을 보이도다/ 흥망이 산중에도 있다 하니/ 더욱 비감하여라”라고 노래하여, 삼국시대 창건된 금강산의 ‘장안사’가 중창 이후에도 재로 변하여 금으로 전각된 웅장하던 모습을 찾을 수 없듯이, 흥망이 산중 절에서도 무상하고도 비장하게 지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운연(雲烟)이 잦아든 골에 독경 소리 그윽ㅎ고나
예 와서 고려 태자 무슨 도를 닦았던고

그래서 내 집인 양하여 두 번 세 번 찾았네

— 심훈 〈고려사(高麗寺)〉 전문

단수로 된 이 시조의 소재가 되는 심훈(1901~1936)의 〈고려사(高麗寺)〉 역시 앞서 본 이은상의 성불사(成佛寺)와 같이 특정한 사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곳은 어느 고려 태자가 세웠다는 낡고 자그마한 암자를 말하는 것으로 정확한 장소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화자의 상상력을 통해 고려 태자가 사찰에서 닦은 도를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만나고 있다.

초장에서 화자는 사찰에서 구름과 연기가 잦아드는 ‘운연(雲烟)’을 경험하며 골짜기에 울려 퍼지는 부처님 말씀인 ‘독경 소리’를 듣는다. 이 독경은 무량한 시간 넘어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진리의 소리로서 과보(果報)를 통해 얻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중장에서 화자는 ‘고려 태자’가 ‘닦았던 도’를 상기하는데, 여기서 도는 참되고 아름답고 깨끗한 진리를 일컫는다. 화자는 이 장소에서 고려 태자의 생각을 좇아가면서 시공간을 초월한 인연으로 종장에서 “그래서 내 집인 양하여 두 번 세 번 찾았네”라고 조응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수행자의 마음은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으며 그 뜻을 알기에 도를 닦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태자의 마음과 서로 연결되며 그것이 다르지 않음을 알게 한다.

4. 시조 개척기의 다양한 불교 표상들

지금까지 살펴본 초기 현대시조에 나타난 불교적 주제의식과 시적 사유들은 1940년대 해방 전후 현대시조 개척기 시인들에게도 지속적으로 창작되고 있는데 조운, 조종현, 이호우, 이영도 등의 시조에 주목할 수 있다. 조운(1900~? )은 1926년 최남선 · 이병기 등과 함께 ‘국민문학운동’에 참여해 ‘시조부흥론’을 주장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1948년 가족과 함께 월북하였다. 그의 시조 〈구룡폭포〉는 현대 사설시조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시조 형식의 대표적 갈래를 이루며 시조단뿐만 아니라 자유시단에서도 높이 평가하는 작품이다.

사람이 몇 생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겁(劫)이나
전화(轉化)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샘도 강도 바다도 말고 옥류(玉流) 수렴(水簾) 진주담(眞珠潭)과 만폭동(萬暴洞) 다 고만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안개 풀 끝에 이슬 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연주팔담(連珠八潭) 함께 흘러

구룡연(九龍淵) 천척절애(千尺絶崖)에 한번 굴러 보느냐.

— 조 운 〈구룡폭포(九龍瀑布)〉 전문

3수로 된 이 시는 종장만 정형률을 지키는 반면, 초장과 중장은 정형성을 벗어난 사설시조 형태로 되어 있다. 이 시는 1수로부터 불교적 사유를 감지하게 되는데, 그것은 “사람이 몇 생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겁(劫)이나 전화(轉化)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와 같이 현실에서 더 높은 경지를 지향하는 연기론으로 귀결된다. 말하자면 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멸하는 상호 의존관계에 있는 연기설에 입각한 이 시는 모든 현상은 인연으로 생기는데, 2수에서처럼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안개 풀 끝에 이슬”처럼 생멸하고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이에 시인은 금강산 “구룡연(九龍淵) 천척절애(千尺絶崖)에”서 바라보면서 불교적 사유를 사설시조 형식으로 풀어낸다.

또한 이 시가 흥미로운 것은 윤회가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전화(轉化)’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연과 연기로 인해 저기서 여기로, 여기서 저기로 이동하는 시간적인 연속 속에서 변화하는 것을 윤회로 볼 수 있다. 요컨대 중장 ‘옥류(玉流)’에서 ‘수렴(水簾)’으로 ‘수렴’에서 ‘진주담(眞珠潭)’으로 ‘진주담’에서 ‘만폭동(萬暴洞)’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시간적 윤회로 표상된다. 화자는 ‘구룡폭포’의 맑은 물의 흐름을 통해 현실적으로 이어지는 윤회 속에서 청청해지기를 바라는 불교적 심상을 첨가한다.

시조 개척기 조운이 〈구룡폭포〉라는 감각적인 사설시조로 인연설과 연기설로 윤회를 나타냈다고 한다면, 조종현(1906~1989)의 〈생사관공(生死觀空)〉이라는 작품은 연시조형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본래성을 공사상으로 투사하고 있다.

산 것이 사는 것가 산 것 같지 아니하니
죽음도 그럴런가 죽음 속을 뉘 알리요
눈감고 스스로 볼 제 죽고 삶이 없구나.

세상 것 있다 하나 있는 줄로 보올 것가
있던 것 없다 하니 없는 줄로 아올 것가
모든 것 나오자마자 고대 죽고 마는 걸.

죽고 사는 것을 없게 본다 없을 것가
본래 없었으니 이제 봐도 없는 것이
없는 줄 아는 마음도 또한 없다 하노라.

— 조종현 〈생사공관〉 전문

조종현의 이 시는 삶과 죽음은 독립된 것이 아니라 인식에서 생겨나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다를 것이 없음을 말한다. 색과 공의 동일성, 즉 불이(不二)를 나타내는데, 첫 수 초장 “산 것이 사는 것가 산 것 같지 아니하니”에서 산다는 것은 죽음 속에 있고, 죽음 또한 삶 속에 있다는 불가적 세계를 들여다본다. 거기에 삶을 모르는 존재가 죽음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면서 실체성이 없다는 것을 지각하게 만든다. 둘째 수 초장 “세상 것 있다 하나 있는 줄로 보올 것가”에서 세상에 보이는 것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구현하는데, 있음과 없음, 생성과 소멸, 봄과 앎의 세계가 있지만 종장에서 “모든 것 나오자마자 고대 죽고 마는 걸”이라며 그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나아가 화자는 있다고 하는 인식의 실체에 대하여 셋째 수 중장에서 “본래 없었으니 이제 봐도 없는 것이”라는 공의 실체를 드러낸다. 다만 그것은 종장 “없는 줄 아는 마음도 또한 없다 하노라”라는 무위심에서 모든 실체를 무화시킨다.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듯 그것에의 본체를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라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을 시조로써 형상화하고 있다. 1931년 《신생》에 발표한 이 시조는 현대시조의 태동기에서 현대적 감각으로 불교적 사유를 돋보이게 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용운과 같은 승려 출신 시인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시조 개척기에 다양한 불교적 사유를 표현한 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종교와 사상을 떠나 창작에 자연스럽게 불교적 심성이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시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 불교라는 고유한 민족정신이 시조라는 전통적 가락에 스며든 것이다.

다음에서 살필 이호우와 이영도는 남매지간으로서 시조 개척기에 자연과 삶의 문제를 서정적 정서로 풀어냈는데,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불교적 정서가 자연스럽게 작품에 배어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의식적으로 불교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만물의 이치를 단시조 형식으로 구현하면서 불교적 사유를 견인한 것이다. 이호우(1912~1970)는 한국의 고전적 시조를 현대 감각이나 생활 정서로 전환해 간결하고 독특한 시적 경지를 개척한 시인으로 호명되는 반면, 이영도(1916~1976)는 현대 최초의 여성 시조시인으로서 여성의 맑고 경건한 계시주의(啓示主義)와 한국적 전래의 그리움과 낭만적 정서를 섬세하고 정결한 언어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져서 더욱 피는
생명의 길 앞에서

차라리 아낌없이
저렇게도 잎 잎들은

스스로 몸들을 조아
남은 피를 뿜고 있다.

— 이호우 〈단풍(丹楓)〉 전문

사바(裟婆)도 고쳐 보면
이리도 고운 것을

유두(流頭) 달빛이
연연히 내리는 이 밤

꽃송이
곱게 떠오른
연(蓮)못 가로 나오라.

— 이영도 〈연꽃〉 전문

위의 단수시조 2수는 둘 다 간결하고 정결한 언어로 자연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자연은 피고 지는 가운데 생겨나는 부산물로서 일체 현상의 원인과 결과가 되는 인과(因果)법칙으로 스며들어 있다. 이를테면 “져서 더욱 피는” 이호우의 단풍은 “생명의 길 앞에서” 있는데 “차라리 아낌없이/ 저렇게도 잎 잎들은”이라고 아낌없이 베푸는 보시행을 나타낸다. 이 보시행은 육바라밀(六波羅蜜) 가운데 제일의 덕목으로서 자비의 마음을 뜻하는데, 낙엽들이 “스스로 몸들을 조아/ 남은 피를 뿜고 있다.”는 것이다. 낙엽이 단풍으로 아름답게 질 수 있는 것도 탐욕을 벗어나 스스로를 태우는 절대적 수행의 결과다.

또한 불교적 세계관이 자연과 합일시켜 웅숭깊게 그려지는 이호우의 시편으로 단시조형인 〈하(河)〉를 빼놓을 수 없다. 시인은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서 우리 인생도 그러한 자연의 질서와 조화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데 “어떻게 살면 어떠며/ 어떻게 죽으면 어떠랴// 나고 살고 죽음이 또한/ 무엇인들 무엇하랴// 대하(大河)는 소릴 거두고/ 흐를 대로 흐르네”라고 성찰한다. 모든 시작과 끝은 흐르는 대하(大河)와 같이 연결된 자연의 일부분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고 구분할 수도 없으며 또한 다른 것도 아닌 ‘생사불이(生死不二)’와 같이 하나의 원처럼 돌고 도는 흐름 속에 있다는 점에서 불교적 생사관을 관통하게 만드는 시조다.

이영도의 〈연꽃〉을 살펴보자. 연꽃은 주지하다시피 불교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꽃이다. 사바세계(娑婆世界)는 고통이 끊이지 않는 진흙탕 같은 곳인데, 연꽃도 다름 아닌 그러한 세상에서 피어난다고 묘사하고 있다. 첫 수 “사바(裟婆)도 고쳐 보면/ 이리도 고운 것을“이라는 시구에는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사상이 내재해 있다. 행복과 불행도, 극락과 지옥도 마음으로 생기며 마음으로 표상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수에서는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 날인 유두(流頭)의 ”달빛이/ 연연히 내리는 이 밤”처럼 맑고 청명한 세계로의 진입을 알린다. 종장 “꽃송이/ 곱게 떠오른/ 연(蓮)못”은 번뇌와 탐욕을 제거한 청정한 마음 상태로 피는 연꽃을 통해 불교에서 추구하는 진 · 실 · 상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같은 그녀의 불교적 인생관은 단수로 된 시편 〈탑 · 3〉에서도 펼쳐지는데, ‘탑’이라는 불교 소재가 ‘이별’이라는 낭만적 정서로 빚어지고 있다.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번 흔들지 못한 채/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愛慕)는/ 사리(舍利)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떠나가는 님과 보낼 수 없는 화자 사이에서 촉발되는 안타까운 ‘애모(愛慕)’의 감정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돌탑’처럼 굳어 버린 것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화자 눈에 맺힌 눈물을 탑 속에 들어 있는 ‘사리(舍利)’로 비유하면서 “푸른 돌로 굳어” 참된 사랑의 결실이 되기를 노래하고 있다.

5. 결론

이 글에서는 현대시조의 태동기와 개척기에 쓰인 작품 중에서 불교적 사유가 담긴 시조들을 만나보았다. 먼저 현대시조의 효시가 된 대구여사의 〈혈죽가〉와 최남선의 〈국풍4수(國風四首)〉에서 현시된 시대정신을 찾아볼 수 있었다. 또한 현대시조에서 최초의 불교적 사유를 담은 최남선의 〈석굴암(石窟庵)에서〉를 통해 전통에 함의된 불교를 보았다. 이로써 현대시조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적 가치를 담아내는 통로로써 시조 형식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대시조 태동기에는 최남선, 이광수, 한용운 시조를 통해 불교적 사유와 함께 국권 상실에 대한 절망을 극복하기 위한 바람과 희망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또한 이병기, 이은상, 심훈 등, 초기 시조시인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불교적 세계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어서 해방 전후 시조 개척기 시인들의 다양한 불교적 정서를 조운, 조종현, 이호우, 이영도 시조에서 찾아보았다. 이때부터 단시조, 연시조뿐만 아니라 사설시조까지 현대적 감각과 문학적 다양성으로 시조의 외연을 확장하면서 불교적 사유가 표상되고 있다.

191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 ‘현대시조 태동기’와 ‘현대시조 개척기’ 시조에 나타난 불교적 정서는 공동체 안에서 역사적, 문화적, 교리적 가치들을 계승하거나 고유한 잠재적 능력을 확대시키는 것이었다. 시조는 불교를 매개로 하여 민족정신을 구현하고 시적 의미가 확장되었다. 불교적 사유를 시조 형식에 견인하는 시조 미학을 통해 불교는 문학을 통해 구도자적 관점에서 불교 정신을 추구하고 깨달음에 대한 다양한 존재 해석을 가능케 한 것이다.

다음 글에서 다루게 될 1950년대는 ‘현대시조의 안정기’로, 더욱 다채로운 불교적 사유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권성훈 poemksh@naver.com
문학평론가. 2013년 《작가세계》 평론 신인상 당선. 한신대 종교학과, 경기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고려대 박사후과정 수료. 시집 《밤은 밤을 열면서》 외 2권과 저서 《시치료의 이론과 실제》 《현대시 미학 산책》 《현대시조의 도그마 너머》 등이 있다. 현 경기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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