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老子, 기원전 5~6세기)와 불교의 관계는 참으로 깊을 뿐만 아니라 오래되었다. 깊다는 것은 불교의 핵심 개념인 ‘공(空)’이 처음에는 노자의 ‘무(無)’로 번역되었음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고, 오래되었다는 것은 불교가 중국에 도래했을 때 중국인들이 부처를 서쪽으로부터 온 얼굴 검은 노자로 여겨 ‘황면노자(黃面老子)’로 불렀음을 떠올리면 바로 알 수 있다. 

이제는 부처를 노자로 볼 사람은 없다. 불교의 현실적 위세는 이미 노자를 종주(宗主)로 삼는 도교의 영향을 맞먹거나 넘어선다. 우리나라에서는 물론이고 도교 세력이 강한 중국에서조차 그러하다. 도교는 노자를 섬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만물만사가 신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하게 변형되어 불교처럼 특정한 숭배 대상을 지니지 못한다. 도교 사원이라고 해서 노자를 모시는 것이 아니다. 중국 대다수의 도관(道觀)에 노자는 없거나 뒷전에 있을 뿐, 《삼국지》의 관우의 권위에 밀린다. 중국 사천의 상청산(上淸山) 같은 도교의 발원지에나 올라야 노자가 주신(主神)으로 모셔져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불교도의 인식에서 노자와 불교의 상관관계에 의아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부처가 노자로 불렸다니? 그 의식의 친밀성으로 돌아가 보자. 불교의 핵심 개념인 공이 무로 번역되었다니? 그 의미의 동질성에 다가가 보자. 아무리 일반설이지만 이런 개론조차 못 접해본 강호의 불교학자에게 말을 건네 본다. 무엇이 그렇게 통했는지, 그리고 그 통함이 오늘날 어떤 식으로 다시 만나야 하는지 생각해보자. 

사람은 자기의 수준대로 이해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은 예술의 감상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사상도 그렇다. 공자 전문가는 《논어》를 바탕으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고, 주자 전문가는 주자학의 이기론(理氣論)을 바탕으로 칸트를 읽는다. 동서의 반대도 마찬가지다. 철학사가로 유명한 코플스톤 신부가 주자에 대한 글을 썼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는 시대도 비슷한 아퀴나스의 시각으로 주자를 읽을 줄 안다. 생각이 생각을 읽는다. 

불교가 들어왔을 때, 중국인들이 갑자기 불교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부처의 관점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없이 그 핵심을 파악할 수 있었을까? 맨땅에 머리 박기로 불교를 알아간다는 것이 가능했을까? 

맨땅에 머리 박기로, 두엄 속 바늘 찾기로 외래 문명을 이해한 좋은 예는 일본의 의사 집안 출신인 스기타 겐파쿠가 네덜란드어로 된 독일 해부학 책을 번역한 예에서 찾을 수 있다. ‘A, B, C’가 글씨인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야말로 무식하게 번역을 이루어낸 것이 일본 근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해체신서(解體新書)》다. 사람의 몸에 대한 새로운 이해, 그것을 통해 그들은 새로운 세계를 맞이했다. 해체의 해는 《장자》 포정해우(庖丁解牛)의 예처럼 그 자체로 소의 해체 곧 해부(解剖)의 뜻을 지닌다.

불교는 다행히 책만 온 것이 아니라 사람도 함께 왔다. 후한 말 환제 건화 2년(148)에 중국에 온 안식국의 태자 안세고(安世高)는 낙양에서 20년 동안 대승 경전을 번역한다. 이후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으로 이어지고, 세월이 흘러 ‘삼장법사가 오공(悟空)과 함께 인도를 헤매다 돌아온 이야기’가 나온다. 불교에는 전도사가 있었고 그들이 불교를 설명했다. 

관련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두 삼장법사(三藏法師)는 다름 아닌 쿠마라지바(Kumārajīva, 344~413)와 현장(玄獎, 600~664)이다. 인도에서 넘어온 쿠마라지바, 인도로 넘어간 현장, 이렇게 둘은 번역가의 지위를 분명히 한다. 그들에게 주어진 멋진 칭호인 삼장법사는 오늘날 젊은이들에게는 ‘번역대사’로 불려야 마땅하다. 이 둘의 번역 없이는 오늘날의 불교가 없기 때문이다. 불교도라면 이러한 번역을 통해 오늘날의 불교가 탄생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말을 버리라고? 아니, ‘말을 버리라’는 것은 말이 아닌가. 

여기서 재밌는 문제부터 풀고 가자. 구마라집 또는 구마라습으로 불리는 쿠마라지바의 번역이 쉬울까, 아니면 인도 전역을 14년 동안 경전을 찾아 헤매고 다녔던 현장의 번역이 쉬울까? 이른바 쿠마라지바의 구역(舊譯)이 쉬울까, 현장의 신역(新譯)이 쉬울까? 인도 사람의 인도 말 번역이 쉬울까, 중국 사람의 인도 말 번역이 쉬울까? 달리 말해, 우리말이 짧은 미국 선교사가 말하는 기독교가 쉬울까, 한국인 기독교인이 말하는 기독교가 쉬울까? 의외로 사람이라는 것이 말을 잘하기 시작하면 말이 어려워진다. 그러나 말이 짧은 외국인들은 짧은 몇 마디 말로도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드러낸다. 전도를 목적으로 외국인을 위한 번역을 당연시한 결과다. 그러나 본국인들은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면서 굳이 원어를 쓰고 잘난 척을 한다. 세상일이 그렇다. 한마디로 구역은 중국어에로의 번역에 충실했다면, 신역은 산스크리트어 직역이 난무한다. 구역은 의역이 많고, 신역은 음역이 많다. 따라서 중국 사람이 한 중국어 번역이 더 어려워진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현장처럼 공부를 많이 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현상이지 초보자에게서는 벌어지지 않는다. 일단 이해부터 하고 보자는 것이 일반적인 접근이다. 도대체 그게 뭐래? 무슨 소리지? 좀 쉬운 말로 해봐. 아하, 내가 알고 있는 그거구나! 이것이 상식적인 이해의 순서다. 

불교는 말한다. 순야타(sunyata)! 중국인들은 뭔 소리인지, 뭔 뜻인지 모른다. 불교가 설명을 한다. 중국인들이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한다. 아, 세상에 고정불변한 것은 없다는 것이구나. 그렇다면 노자가 말하는 무(無)가 아닌가. 따라서 무로 번역하고, 불교는 노자가 인도로 건너가서 가르침을 주고 부처로 되돌아온 것이거나 인종적으로만 다른 노자구나 하고 생각한다. 노자가 인도로 건너갔다는 이야기가 ‘노자화호설(老子化胡說)’이고 노자의 얼굴색만 누렇게 된 부처가 ‘황면노자(黃面老子)’다. 

그러나 무에는 절대무도 있지만 상대무도 있다. 노자가 말하듯이, 절대무는 ‘있음은 없음에서 나온다(有生於無)’는 것이고 상대무는 ‘있음과 없음이 서로를 낳는다(有無相生)’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무는 상대무로 비치면 안 된다. 여기서 무로 쓰면 아니 되겠다는 고민이 생긴다. 

불교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을 가르친다. 그것은 일체무상이자 인생무상이다. 그런데 노자는 상(常) 자를 좋게 쓴다. 늘 그러한 진리를 가리키는 ‘상도(常道)’는 좋은 뜻이다. 《노자》 전반에 걸쳐 상 자는 ‘성인은 일정하게 고정된 마음이 없다(聖人無常心)’는 구절 외에는 좋게 나온다. 그렇다면 불교의 무상의 진리와 노자의 상의 진리가 축자적으로 부딪치고 만다. 설령 노자가 말하는 상의 진리가 상대를 넘어, 현실을 넘어, 언어를 넘어 일컬어지는 상이라고 할지라도 불교가 정작 말하고자 하는 무상의 진리와는 부딪힌다. 

이때 가장 좋은 방법은 최고 개념을 빌려 쓰지 않고 독자적으로 만드는 것밖에 없다. 노자의 ‘빔(虛)’ ‘끝(極)’ ‘끝없음(無極)’을 넘어 아예 ‘공(空)’으로 독자적으로 쓰자. 이것이 처음에는 노자와 만났지만 나중에는 노자를 떠나는 불교의 결말이다. 

공이란 글자는 중국에서 강조된 적이 없다. 일본어에서는 하늘을 가리키는 소리로 읽히듯, 중국어에서도 공은 그저 허공이었을 뿐이다. 《논어》에 나오는 안회의 예에서처럼 ‘뒤주가 자주 비었다(屢空)’는 말은 쌀이 다 떨어졌는데도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것이지(數至空匱) 그의 마음이 불교에서 말하는 ‘공을 깨달았다’는 것일 수 없다. 공이란 글자가 한 번 나온다고 신이 나서 온갖 불교설을 갖다 붙이면서 해석하는 경우는 그야말로 어불성설이고, 공자가 말하는 일상의 철학과 완전히 위배된다. 그럼에도 어쩌랴, 불교의 진리를 가리키는 ‘공’ 자가 공자가 사랑하는 안회의 모습을 그리는 데 등장하는 것을. 쌀 궤짝과 공의 진리가 연결되는 순간이다. 

불교가 중국에 전파된 것은 이르면 한나라 때, 늦어도 위진 시대로 본다. 한나라로 잡는 것은 《홍명집(弘明集)》에 나오는 모자(牟子)의 《이혹론(理惑論)》 때문인데 후한 영제(재위 168~188) 말년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베트남으로 건너가 불교를 배워왔다는 것이나 유 · 도 · 불 삼교합일을 37조로 설명하는 것을 불교의 전래로 보기에는 석연찮다. 게다가 위에서 말한 안세고(148)가 그보다 몇십 년 이상 빠르다. 그런데 위진 시대의 불교와 관련된 논문은 오늘날도 읽히니 이미 위진 때는 불교가 사상적으로도 자리를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정확히는 진나라 시절로, 중국불교사에서 의미 있게 읽히는 많은 논설이 위진 시대가 끝나고 남북조 시대가 벌어지는 때에 쓰인다. 유명한 승조(僧肇, 384~414), 혜원(慧遠, 334~416), 지둔(支遁, 314~366) 등이 모두 이 시대에 속한다. 승조는 쿠마라지바의 고족제자이고 혜원은 쿠마라지바와 서신을 교환했다. 

이때의 불교를 흔히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부른다. 격의불교라고 해서 특별한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니다. 격의의 격은 마주한다, 바라본다는 뜻으로 대격(對格)의 뜻을 갖는다. 격물치지의 격의 뜻과 같다. 누가 무엇을? 중국인이 인도인을, 중국 사상이 인도 사상을 마주하여 나름의 해석을 가한다는 의미다. 그에 반하여 승의(勝義)는 불교 사상을 그대로 살린다는 것이다. 인도의 맥락이 이겨야지 중국의 맥락이 앞설 수 없다. 인도가 중국보다 나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빼어나다는 뜻을 담는 승 자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그러듯 황로학의 시절에 타협하기 위해 노자의 그늘 아래 불교를 두었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떤 승려가 자신이 부처의 가계임을 자청하고 성씨조차 석가모니의 석(釋) 자를 따르면서 불교의 진리를 무시하겠는가. 종이 한 장의 차이일 것이다. 그러나 그 종이 한 장의 차이는 컸다. 부처도 우리 중국인처럼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안 하고의 차이가 마침내 불교조차 격의와 승의로 나누고 만다. 

가장 좋은 예가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이다. 불교에서는 다 놓으라고 말한다. 따라서 부모도 떠난다. 자식도 버리면서 부모를 못 떠날 까닭이 없다. 여기서 떠나고 버리는 것은 집착을 끊는 것이다. 나쁜 뜻이 아니라 좋은 뜻이다. 그런데 갑자기 부모의 은혜가 중하다니, 불교 내부에서 그 맥락을 찾기 어렵다. 그러나 《부모은중경》은 우리나라에서는 언해본도 나올 정도로 동아시아 불교에서 중시된다. 이것이 격의불교의 좋은 예다. 유가의 효(孝)를 이렇게 불교적으로 푼다. 불교의 언어에 효가 없는데도 이렇게 버젓이 효를 가르친다. 

기독교라고 이런 현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신성을 놓고 여러 차례 종교회의를 거친다. 마침내 신성을 부정한 사람들은 쫓겨나 전 세계로 흩어지고, 당나라 때 중국 장안까지 들어온 것이 이른바 경교(景敎)로 불리는 네스토리우스파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대승불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마야 부인에 대한 존숭은 그것이 비록 미미할지라도 중국 전통의 효 사상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서양인들이 한 낱말로 번역하지 못해 ‘자식으로서의 의무나 경애(filial duty; filial piety)’라는 두 낱말로 번역하고 있는 효는 서구에서만 아니라 인도에서도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다. 《효경(孝經)》이라고 직접 말은 못 하고 ‘부모의 은혜는 중하도다’라고 설명하는 불교식 효경은 격의불교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구체적인 실례가 격의불교 시기의 혜림(慧琳, 737~820)이다. 그는 직접적으로 《효경》에 주석을 단다. 이는 불교를 중국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불교의 유가적 이해다. 심지어 그는 《균선론(均善論)》과 같은 저작을 통해 유가적 질서를 옹호하고 불교의 탈속적인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불가이긴 한데 인도불교에 반하는 중국불교의 표본이라고나 할까. 혜림은 혜원의 ‘영혼의 불멸설(神不滅論)’에 반대하기까지 한다. 

상당히 세월이 흐른 다음의 일이지만 17, 18세기 성립한 일본의 고학파(古學派)들도 이런 생각을 했다. 오규 소라이는 《논어징(論語徵)》과 같은 작품을 통해 공자가 군대를 이끌고 일본을 쳐들어오면 그와 칼을 들고 싸울 것을 천명한다. 왜냐? 일본을 정벌하려는 공자는 원 공자 사상과 정반대의 공자라서, 그래서 내가 스승으로 삼고 있는 공자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놈의 목을 치겠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격의불교의 승려들도 그랬다. 불교로 입문하여 불교에서 학문을 세웠지만, 불교의 종지가 자신들이 배워온 곧은 가치를 훼손시킬 수는 없었다. 

과연 이런 현상을 어떻게 부를 수 있을까? 이는 ‘해석학적 지평(hermeneutic horizon)’에 이은 ‘해석학적 수직(hermeneutic vertic-ality)’이다. 이 땅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지만, 저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바라보며 가야 할 길을 잡는다. 별과 나 사이에 수직선을 그어 그리로 나아간다. 우리의 ‘해석학적 별’은 이렇게 총총하다. 우리가 만난 혜림의 별은 효를 중심으로 한 유가적 가치였고, 오규 소라이가 잡은 별은 일본이 좇아야 할 공자의 가치였다. 나아가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좇고 있는 별은 엑소더스 이후 유대인이 찾아 나선 가나안이었다. 유가보다 더 유가적인 중국인 승려, 중국인보다 더 공자를 따르는 일본인 유학자, 이스라엘인보다 더 구약을 믿는 한국인 기독교인이 이렇게 가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격의의 보편성이 자리 잡는다. 우리는 겉으로는 승의를 외치고 있지만 어차피 격의하고 있을 때가 많다. 나의 부처님은 기독교의 유일신과 맞먹을 정도로 전지전능해지고, 나의 공자님은 예수처럼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신이 된 절대자이며, 나의 예수님은 전국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길목 앞 미륵석상처럼 나를 보살펴준다. 격의는 이런 복합적인 현상을 담는 어휘다.  

불교는 그 자체로 격의불교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풍우란이 주장했듯이 ‘인도불교(Indian Buddhism)’와 ‘중국불교(Budd-hism in China)’는 다르다. 내 식대로 말하면 인도불교는 주류 사상에 반하는 정통이 아닌 이단이며 이미 사라지거나 흡수된 화석종교다. 기껏해야 현대에 들어 암베드카르가 신불교론(Neo-Buddhism)을 통해 불가촉들(the untouchables)과 함께 간신히 부활시킨 천민의 종교다. 그러나 중국불교는 독특한 색채를 지낸 채 문화대혁명의 고초를 이겨낸 살아 있는 종교다. 이 불교는 보리달마로부터 전래된 인도의 것만이 아니라 유가의 일상과 도가의 고차원을 흡수하면서 자신의 길을 걸어, 마침내는 선(禪)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불교를 만들어낸다. 어쩌면 불교와 선불교는 같은 흐름이지만 전혀 다른 길을 가는 두 갈래의 다른 종교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가 만나고 있는 불교는 노자와 한데로 모일 수 있는 길을 간다. 인도불교 그대로 노자와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중국불교일 때 노자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길을 간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혜림도 그렇지만 지둔도 《장자》의 〈소요유〉 편에 주해를 달아 자신의 주장을 담는다. 이를테면 지둔의 〈소요유〉에 대한 해석과 우리가 보고 있는 곽상의 《장자주》 내용은 매우 다를 뿐만 아니라 아예 대립적이다. 곽상은 ‘생긴 대로 살아’라며 대붕과 참새의 차이를 부정하는 반면, 지둔은 수행하는 불자로서 ‘열심히 몸 만들어야지’라며 참새 같은 사람일지라도 대붕과 같은 꿈을 지닐 것을 권유한다. 단적으로 말해, 곽상의 주장 속에는 신분주의적 사고가 농후한 반면, 지둔에게는 그런 불평등을 딛고 일어선 싯다르타의 정신이 살아 있다. 

불교도들에게 부처와 불교는 무엇이었는가? 불가는 어쩌다 유가와 도가와 더불어 중국사회의 주류 사상 가운데 하나가 되었는가? 불교의 매력은 어디에 있었기에 그 많은 사람이 그 속에 흠뻑 빠졌는가? 

유가와 관련되어서는 앞서 말한 효에 대한 이야기나 《주역》에 대한 관심으로 정리된다. 이를테면 동진 시대의 도안(道安, 312~385)은 불교와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가 어떻게 다른지도 보여주지만, 바로 그 《안반주(安般注)》 서문에서 《주역》 〈계사전〉의 “만물을 열어 할 일을 이룬다(開物成務)”는 구절을 인용할 정도로 유가와 도가를 일컫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안반이 무엇인가? 안반이란 ‘아나 아파나(āna-apāna)’의 음사로 아나반나(安那般那)의 줄인 말이다. 아나는 들숨, 아파나는 날숨, 한자로 말하면 바로 ‘호흡(呼吸)’이다. ‘후우’ 하고 내뱉는 ‘호’ ‘흐읍’ 하고 빨아들이는 ‘흡’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호흡인가? 안세고가 번역한 《대안반수의경(大安般守意經)》을 놓고 도안은 호흡에서 무위를 강조한다. 이후 불교에서 대두되는 ‘무위법’과 ‘유위법’의 구분이 벌써 시작되는 것이다. 장자가 말하는 토고납신(吐古納新) 곧 옛 숨을 뱉고 새 숨을 들이마시는 호흡법이 이렇게 불교식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런 격의불교는 위진 현학의 세 줄기 가운데 하나다. 내 구별법에서 세 갈래는 명교파(현학파), 죽림파(자연파), 격의파(반야파)로 불릴 수 있으며 그 마지막을 바로 격의불교가 장식한다. 격의불교는 일반적으로는 노장 사상과 관계를 맺는 것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위에서 본 것처럼 유가 경전과도 관련이 깊다.

《노자》에 집중해보자. 《주역》을 불교로 해석하는 《주역선해(周易禪解)》가 있는 것처럼 《노자》와 《장자》를 불교로 바라보는 작업은 오래되었다. 우리의 탄허 스님이 위의 세 책을 외전(外傳)으로 강의하고 해석한 것과 같다. 무엇이 노자를 불교로 읽게 만들까? 

무엇보다도 무와 공이다. 유가가 유의 철학이라면 도가는 무의 철학이다. 현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문명세계의 건설을 내세우는 유가는 있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도가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노자는 그렇지 않았다. 모든 있음 뒤의 없음을 보았다. 

불교는 반실체론이다. 어떤 실체도 긍정하지 않는다. 실체는 불변의 것이며 항존의 것이기 때문이다. 실체적 사고 때문에 우리는 자아가 있으며, 자아가 있기 때문에 집착이 생기고, 집착이 생겨서 우리는 괴로움에 빠진다. 그러나 내가 없으면 괴로움도 없다. 해탈의 방법이자 원리가 바로 무아다. 

노자의 무와 불교의 무아는 이런 점에서 상통한다. 노자도 ‘나 없애기(無私)’를 말하고 ‘나는 스스로 그러할 뿐(我自然)’을 드러냄으로써 나를 실체화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고정된 내가 있어서 나를 조정하지도 않고 불변하는 내가 있어 나를 고집하지도 않는다. 현상을 실체의 투영이나 발현으로 보려는 사고가 없다. 그저 그럴 뿐이다. 

한문에 충실한 사고라면 불교식 한자는 거칠다. 그것은 번역어라는 한계에 기인한다. 영어식 발음과는 다른 이상한 알파벳 표기법을 현대 중국어에서 병음(倂音)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산스크리트 원어를 멋대로 음역해놓고 이렇게 부르자고 강요한다. 반야(般若; 포뤄)나 보리(菩提: 푸티)만 하더라도 한자 발음이 ‘반약’이고 ‘보제’인데도 ‘반야’와 ‘보리’로 읽으라고 명령한다. 그처럼 불교는 무를 공으로 대체하면서 많은 것을 잃기도 하고, 많은 것을 얻기도 한다. 

불교의 공은 유무를 뛰어넘는 것이다. 《반야심경》의 ‘공즉색, 색즉공’이라는 말이 이를 대표하며 이론적으로 중론(中論)의 핵심이 이것이다. 유무를 넘어서고자 하는 노력은 노자에게서 찾아볼 수 없지만 장자는 ‘말도 아니고 말 없음도 아니다(非言非默)’라는 사고에서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나가르주나의 중론은 여러 층차가 있지만, 나는 그의 입장이 실체적 주장보다는 언어적 주장에 방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승의제(勝義諦)와 세속제(世俗諦) 모두 ‘말(言)’일 뿐이다. 그 둘은 하나다. 그것이 용수의 이제(二諦)다. 

노자의 말도 ‘말로 하면 안 된다’면서 ‘말한다’. 그것이 “도를 말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라는 《노자》의 첫 구절이다. 이를 《중론》으로 풀자면 ‘말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승의제 곧 진제(眞諦)고 ‘말한다’는 것이 세속제 곧 속제(俗諦)다. 진제가 상도(常道)의 세계라면 속제는 범도(凡道)의 세상이다. 그러나 그 둘을 나눌 수 없다. 소박(素樸)한 삶은 세속에 있으며, 현원(玄遠)한 생각은 승의에 있다. 

불교가 무라는 말로 노자의 것을 공유했다면, ‘다듬지 않은 통나무(樸)’나 ‘밥 주는 어머니(食母)’ 그리고 ‘굴러다니는 돌멩이(옥같이 반들반들 녹록(碌碌)하지 않고 돌처럼 거칠거칠 낙락(珞珞)한)’와 같은 현실을 일찍부터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육조대사 혜능이 보여준 것처럼 무식한 나무꾼이야말로 진리를 체현한다. 이와는 반대로, 불교가 공이라는 말로 무를 떠나면서 역설적으로 동양적 사고에서 생소한 실체론적 사고를 전파하게 된다. 불교가 실체론을 가르친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실체가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실체와 현상이라는 이원론적 구조를 동아시아인에게 전파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성리학의 ‘체용(體用)’ 관념이다. 그에 이어 나오는 것이 바로 이기론(理氣論)이다. 순전한 이치가 보장하는 순선의 세계를 이제 동아시아인도 향유하게 된다. 

노자의 무는 위에서 말한 절대무와 상대무 이외에도 쓰임으로서의 무 곧 ‘무의 용(無之以爲用)’을 주장한다. 그런데 불교는 무의 용을 말하지 않는다. 노자의 무의 용은 빈 것이 있어야 쓰일 수 있다는 것으로 그릇이나 방 같은 것을 가리킨다. 그릇에 빈 데가 없으면 물을 마실 수 없으며, 방에 빈 데가 없으면 사람이 살 수가 없다는 논리다. 허무라기보다는 허공이다. 

노자가 말하는 절대무도 불교는 강조하지 않는다. 노자는 무가 유를 낳을 뿐이지, 유가 무를 낳는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유가 낳는 것은 모든 있음을 가리키는 ‘하나(一)’일 뿐이다. 그리고 그 하나가 둘과 셋을 낳고 만물을 낳는다. 그러나 불교에는 그런 착실한 순차적인 생성론이 없다. 인도 신화에 바탕을 둔 감정적인 우주발생론은 있을지라도, 절대자의 전능 때문에 절대무의 역할은 오히려 상실한다. 

노자의 상대무 정도가 상생의 관계를 지니며 공의 논리적 구조에 가장 근접한다. 높고 낮음, 어렵고 쉬움, 아름답고 못생김 또한 상대적이다. 그러면서 그 상대성을 넘어 사고하고 처신할 것을 강조한다. 그 모두 사람이 불러주는 이름에서 나온 것일 뿐 현상 그 자체와는 무관하다. 시비와 생사조차 상대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장자에 이르러 이런 상대성의 병치는 완성되지만, 노자도 ‘잘하고 못함(善不善: 노자에게는 선악이 없기 때문에 이를 선과 악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이 서로 키워준다고 함으로써 그 단초를 분명히 제시한다. 

나는 불교가 왜 노자의 ‘현(玄)’에 집중하지 않았을까 늘 궁금하다. 현은 크게 보아 유무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빛이 없었던 어둠의 세계에서는 유무, 고하, 난이, 미추가 모두 하나가 된다. 만일 불교가 이제설로 진제와 속제 둘을 모두 잡으려 했다면, 현 자만큼 좋은 개념이 없다. 노자가 말하듯 ‘검고도 또 검다(玄之又玄)’라는 시어(詩語)로 《중론》의 중을 담을 수 있었다. 

장자도 ‘고리의 가운데(環中)’라는 표현으로 중을 말한다. 반면 유가에게 ‘중용(中庸)’이 중요해진 것은 주자학 이후이므로 《주역》의 ‘시중(時中)’ 정도가 매력적인 어휘였을 테지만, 시중은 생활 속의 적당함을 가리킬 뿐이었다. 쿠마라지바와 같은 위대한 번역가가 ‘가운데 보기(Madhyamaka)’를 일상적인 용어인 ‘중’으로 옮긴 것은 《중론》의 복잡다기한 발전과정에 비해 참으로 단순한 의미의 전달이었다. 

쿠마라지바 입장에서는 당시 유행하던 현학 내지 삼현학(《노자》 《장자》 《주역》)과 불교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운데(한데)’는 왼쪽도 오른쪽도 아니라는 점에서 공간적이지만, ‘검음(어둠)’은 해가 있고 없는 것처럼 시간적이기 때문에 의미의 층위가 다르다. 그는 이점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현학의 시대 이후 당 대의 도사 성현영(成玄英)은 중현학(重玄學)이라는 이름으로 불교 삼론종의 반야학을 흡수한다. 그리고 그 중현학은 선종의 성립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렇게 현학은 불교와의 교섭 관계를 지속한다. 

《노자》를 읽으면서 늘 고민스러운 것이 어디까지가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무위의 한계 설정이다. 물꼬를 보는 것, 잡초를 뽑는 것, 물레방아를 돌리는 것, 거름을 주는 것에서 순치기와 접붙이기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손이 가지 않는 것이 없다. 오늘날 자연의 관점에서는 크게 거슬리지 않는다. 그러나 화학비료 주기와 제초제 뿌리기에 이르면 많은 사람들은 무위가 아니라고 느낄 것이다. 

성불을 위한 노력도 마찬가지다. 어디까지가 사람이 해야 할 일이고 어디까지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인가? 어디까지가 무위법인가? 깨달음을 위해서라면 극단적인 수행도 용납할 수 있는가? 불교에 나오는 손가락 태우기나 살 자르기는 어디까지 용납해야 할까? 고행의 길은 자연은 아니더라도 무위라고 할 수 있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모든 것에 불성이 있다면 우리는 불성을 깨우치기 위해 얼마만큼의 수련을 감내해야 하나?

불교로 노자를 바라보거나, 노자로 불교를 바라볼 때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이 이것이다. 어디부터가 수양이고, 어디까지가 무위인가? 노자에도 수양론이 있고, 불교에도 무위설이 있다. 시대에 따라 무위와 수양은 해석의 정도가 다르다. 그래서 내 개인적으로는 ‘나에게는 자연, 남에게는 무위!’라는 원칙을 세우고 있다. 남을 어쩌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무위이고, 나의 소리를 잘 듣는 것이 자연이라는 말이다. 좋든 싫든 남을 내버려둘 수 있는 것이 무위이고,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자연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이 남에게 얽히지 않도록 하는 것은 무위이고, 아무리 힘들더라도 인격 도야를 위한 자발적 수양은 자연적인 것이 된다는 작은 결론에 이른다. 무위는 남에게 집착을 버리는 것이며, 자연은 스스로 정진하는 것이다. 머리를 빡빡 깎든 치렁치렁 길렀든, 가부좌를 틀든 자리에 누웠든, 코끼리를 타든 소를 타든 불교와 노자는 이렇게 만나는 점이 많다. 

마지막으로 불교의 전래 과정을 그려보자. 중국인에게 부처는 인종적으로 같지 않은 이방인의 종교였다. ‘황면’이라는 말 자체가 차별적 발언이다. 심하게 말하면 이는 ‘깜둥이 노자’로도 들린다. 그런데 그 혼혈 흑인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다. 황면은 어느덧 황금(黃金)이 된다. 이제 부처는 ‘황금노자’가 되었다. ■

 

정세근 sgjeong@cbu.ac.kr
국립대만대 박사. 미 워싱턴주립대와 대만삼군대에서 강의했다. 주요 저서로 쌍둥이 책인 《노장철학과 현대사상》 및 《도가철학과 위진현학》, 어머니의 철학으로 읽는 《노자 도덕경》, 불교에서 윤회를 버리자는 《윤회와 반윤회》가 있고, 편서로는 노장 이후 세계관의 변화를 모은 《위진현학》이 있다. 현재 충북대 철학과 교수, 한국철학회 차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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