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고전

자연, 걸림 없음, 우리의 교육

1. 머리말

어느 시대에나 교육은 관심거리일 수밖에 없다. 교육받아야만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교육적 존재로서 인간(호모 에듀케이투스, Homo Educatus)’은, 자신의 몸을 지켜낼 수 있는 날카로운 무기를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너무 일찍 세상에 나오는 조기 출산의 숙명을 교육을 통해 비교적 잘 극복해왔다. 만약 제대로 된 교육이 없었다면 인류는 현재와 같은 문명은커녕 역사 속 어느 지점에서 사라져버리는 운명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현재와 같은 인류의 생존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오히려 지구별을 총체적으로 위협하면서 인류라는 종의 이익만을 무분별하게 추구하고 있고, 그 결과에 대한 비관적인 예측이 주류를 이루는 상황이다. 어쩌면 인간의 교육 자체의 목적과 방향을 다시 설정해야 하는 역사적 국면을 맞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게 보면 교육은 인간의 단순한 살아남음의 차원을 넘어서 제대로 살아내기를 위한 인식과 실천 역량을 갖추게 하는 일이 된다.

어떻게 보든지 교육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직면해야 하는 중대한 과업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오랜 시간 동안 영 · 유아기와 청소년기의 주된 과업으로 받아들여지다가 수명 연장과 산업체제 개편으로 인해 평생에 걸친 과업이라는 의미의 ‘평생교육’이 주목받기 시작한 지도 꽤 되었다. 우리도 평생교육법을 통해 모든 국민이 평생에 걸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있고, 모든 대학에 평생교육원 같은 기관을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강제하고 있기도 하다. 말 그대로 새로운 교육의 시대를 맞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육의 본질과 의미를 다시 고찰해보고자 할 때 떠올릴 수 있는 고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아마도 많은 사람이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이나 존 듀이의 《민주주의와 교육》 등을 떠올릴 것이다. 우리의 교육 고전 중에서도 《소학》과 《격몽요결》 《수심결》 같은 책들을 떠올릴 수 있을 테지만, 우리가 겪어낸 20세기의 역사를 통해 동양 전통은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져 적대시되는 경향이 있기에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보조지눌의 《수심결》 같은 고전은 종교 수행서이지 교육 고전일 수 없다는 편견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이른바 교육 전문가들과도 마주해야 하는 것이 우리 현실의 한 측면이다. 수행과 교육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는, 서구 근대의 이른바 세속화 압력이 우리 사회에서도 무분별하게 통용되는 결과물이다. 그리스도교를 전제로 하는 유일신 신앙에서 철학을 구해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지녔던 서구 근대 철학자들의 유령이 여전히 우리 철학문 담론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모든 고전은 그 시대의 산물임과 동시에 보편성의 지평을 지닌다. 시대의 산물이라는 특수성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읽어내기가 쉽지 않은 것이 고전이다. 서양 고전의 핵심으로 인정받는 플라톤의 《국가》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같은 고전에는 우리 시대의 눈으로는 용납될 수 없는 여성차별이 전제되어 있다. 《논어》나 《격몽요결》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들 고전은 모두 우리가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회를 어떻게 꾸려가야 하는지에 관한 보편적인 지혜를 담고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모든 고전은 그 시대에 맞게 재해석되어야만 하는 텍스트일 뿐이다.

 

2. 학문과 삶의 불일치: 루소의 《에밀》을 펼치는 곤혹감

무질서한 데다 거의 일관성이 없는 성찰과 관찰들을 모은 이 글은 깊이 사고할 줄 아는 어느 착한 어머니의 요청과 권유에서 시작되었다. 그 어머니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나는 처음에는 그저 몇 쪽 분량의 기록 형식으로 계획했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길어져 지나치게 두텁기만 했지 다루는 내용에서는 아주 하잘것없는 작품이 되어 버렸다. 나는 이 글의 출판을 오래 주저해왔다. ……더 잘 쓰기 위해 노력해 보았지만 별 뾰족한 결과를 얻지 못한 나는 이 상태 그대로 출판해야겠다고 마음먹기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이 주제에 대해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일이 중요하며, 내 생각이 비록 졸렬할지라도 그것이 더 좋은 생각을 싹트게 하는 밑걸음이 된다면 내가 시간을 완전히 허비한 것은 아니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말 번역본으로 800쪽을 넘기는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의 문제적인 교육 고전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지나칠 정도로 겸손한 서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실제 본문을 보면 교육을 보는 자신의 관점에 강한 자신감을 표출하고 있어 겸손의 가장이라고 볼 수 있는 서문이기도 하다. 루소 자신이 비서로 일했던 집의 며느리가 자기 아이를 교육시키는 일에 대한 지침서를 써달라고 부탁하면서 이 책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짧게 몇 장의 지침서로 대신하고자 했던 루소의 계획은 방대한 저서로 이어졌다. 그것을 출간할 것인지를 놓고도 망설였지만 결국 출판하여 우리에게 서구 계몽주의 교육 담론의 장점과 한계를 동시에 볼 수 있게 하는 고전으로 다가오게 하였다.

사실 루소는 교육적 관점에서 끊임없는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적 인물이다. 자신의 아이들을 모두 고아원에 보낸 패륜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에 관한 책을 쓸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가 논란의 출발점이다. 이 논란은 그가 “이 시대의 문학과 학문은 인성을 교화하기보다 그것을 훨씬 더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54쪽)고 강조하면서 《에밀》을 당대의 인성교육 지침서로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부각될 수밖에 없다.

학문과 삶의 일치를 지향하는 전통을 강하게 간직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조금 더 강한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이다. 루소가 이 책의 서문에서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썼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도 어쩌면 그런 자신의 흠결을 고려한 결과일지 모른다. 쓰고 싶지 않았고 또 쓸 자격도 없는데, 밥벌이를 위해 들어간 집의 여주인이 부탁해서 어쩔 수 없이 쓰게 되었고 내용 또한 ‘하잘것없는 것’이라는 위악적인 겸손으로 서문을 채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한 인간에게 완전함을 기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세계적인 성인으로 분류되는 붓다나 예수 정도를 제외하면, 공자나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들에게서도 완전함을 기대할 경우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 불완전함이 인간의 특성 자체이기 때문이고, 가까이 그 삶에 다가갈 경우 대부분 실망스러운 지점 하나쯤은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시민이라면 최소한 자신이 낳은 아이는 스스로 책임질 정도의 책임감을 가진 사람으로 기대하고, 그런 점에서 보면 루소는 제대로 된 시민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의 다른 고전으로 분류되는 《사회계약론》 같은 저술은 교육과 직접 관련된 것이 아니어서 조금 상황이 나을 수 있지만, 이 책은 지속적인 논란거리를 간직한 문제적 고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은 동서양의 교육고전을 언급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권위를 부여받고 있다. 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 배경 중 하나는 우리가 서구 근대에 지배받기 시작한 이후 아직까지 온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역사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흠결에도 분명히 주목할 만한 보편적인 교육 방향과 지침을 담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전자는 특히 칸트와 같이 이름 있는 계몽주의자가 이 책에 깊이 빠져들어 찬양을 아끼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권위 의존의 오류 가능성까지 포함한다. ‘그 위대한 칸트마저 감동하게 한 책이니 얼마나 위대한가’라는 정도의 천박한 문화식민성이 일제강점기 이후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우리 문화의 어두운 그림자일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이 두 측면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루소라는 인간 자신의 한계와 탁월함까지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지혜를 바탕으로 삼아 이 고전을 주체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면, 시간이 아깝다고는 말할 수 없는 매력적인 고전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3. 자연의 여여(如如)함과 인간의 교육

모든 것은 창조자의 수중에서 나올 때는 선한데 인간의 수중에서 모두 타락한다. 인간은 어떤 땅에서 나는 산물을 다른 땅에서 기르도록 강요하며, 어떤 나무의 과일을 다른 나무에게 주라고 강요한다. 인간은 또 기후와 자연조건과 계절에 혼란을 주며, 개와 말과 노예를 불구로 만든다. 인간은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보기 흉하게 만들며, 기형과 괴물로 만든다. 그들은 무엇 하나 자연이 만든 상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편견과 권위와 필요, 본보기, 그리고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모든 사회제도는 그에게서 본성을 질식시켜 그 자리에 아무것도 채워주지 않을 것이다. 본성은 우연히 길 한가운데서 태어나 행인들에 의해 마구잡이로 밟혀 으깨짐으로써 죽게 되는 한 그루 관목과 같으리라.

루소 교육론과 관련한 글들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1부의 첫 문단이다. 여기서 주인공 에밀은 루소가 귀족 집안 출신의 건강하고 부유한 아이이지만 고아로 상정하는 가상의 인물이다. 이 책은 서문에서 시작해서 에밀의 성장기를 유년기에서 성년기까지 다섯 단계로 나누고, 각각의 교육을 신체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는 교육, 신체와 감관의 훈련, 지능과 기술교육, 도덕과 종교교육, 또 다른 가상의 배우자인 소피와의 결혼을 위한 교육 등으로 나누어 제시하는 구성 방식을 택하고 있다. 유년기 이후의 나이를 기준으로 삼아 다섯 살에서 열두 살까지, 열두 살에서 열다섯 살까지, 열다섯 살에서 스무 살까지, 스무 살에서 결혼까지 등 다섯 단계로 나누고 있다.

이 구분이 발달단계론의 심리학적 근거를 통해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오히려 루소 자신의 차별적이고 단계적인 교육목표 설정을 위한 임의성이 기준이라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다만 20세기에 들어와 장 피아제와 로렌스 콜버그 등의 도덕심리학자들이 확립한 몸 중심의 타율적 단계에서 마음 중심의 자율적 단계로의 성숙 과정 이론에 비추어보아도 크게 어긋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할 필요는 있다.

자연(自然)은 우리에게 오랫동안 있는 그대로의 세계였다. 인간 자신을 포함하여 무생물까지를 포함하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자연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했던 우리는, 그 자연의 질서를 도(道, Dao)라고 칭하면서 그것이 인간의 내면과 사회에 걸림 없이 통용될 수 있기를 희망해왔다. 고유사상인 풍류(風流)는 그것을 바람의 흐름과 같은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였고, 동아시아 사상의 시원을 이루는 유교와 도교는 각각의 도 개념을 정립하면서 이후 받아들인 불교의 다르마(dharma)까지도 도라는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루소 또한 이 자연(nature)을 모든 교육의 원천으로 상정한다. 네이처(nature)를 자연으로 번역한 것은 19세기 일본의 계몽지식인들이었지만, 그들은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바로 창조주라는 개념의 전제 여부이다. 동아시아 전통의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으로써 특별한 창조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 데 비해, 서구 전통의 자연은 절대자라는 창조주의 창조 과정을 전제로 해서만 비로소 성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루소가 살아냈던 프랑스 중심의 18세기는 혁명의 시기였고, 이 혁명의 시작은 이미 16세기 이후 지속된 종교혁명이었다. 중간 매개자를 통해서만 비로소 하나님이라는 절대적 존재자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로마가톨릭 전통에 반기를 든 루터와 칼뱅 등에 의해 ‘신과의 직접적인 만남’이라는 서구 개인주의가 뿌리를 내리면서 그것을 지탱하는 정치적 배경인 군주제를 뒤엎는 프랑스 혁명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배경에 있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고, 다만 만남의 방식이 달라졌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루소가 에밀이 열다섯 살에 이르면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도덕과 종교였고, 그 종교는 ‘이성의 최초의 빛들’로 상정되는 절대자의 존재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의 구도에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타락하게 되었다는 인간의 원죄 의식이라는 기독교적 전제가 강하게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그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교육적 구호 또한 기독교적 구호로 해석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불교에서 자연은 그 자체로 스스로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그 속성은 여여(如如)함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 무심함이 자연의 속성이고, 다만 그 안에는 붓다가 발견한 진리가 담겨 있어 주목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그 진리는 바로 연기법(緣起法)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 불교의 출발점이다. 붓다가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설파하는 과정에서 언급하는 방법인 ‘와서 보라’는 몸과 마음의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자연의 여여함을 강조하는, 넓은 의미의 경험적이고 자연주의적인 방법이다.

그럼 인간의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불교에서 교육은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그 가르침이 붓다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관찰의 결과로 찾아낸 진리를 전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연의 여여함을 자신의 내면과의 관련 속에서 깨닫게 하고 그 과정과 결과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하는 것이 불교적 관점의 교육이다.

그렇다면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루소에게 교육은 과연 무엇일까? 루소는 우리가 세 종류의 선생을 통해 교육받는다고 말한다. 각각 자연과 인간, 사물인데, 자연은 우리의 능력과 기관들의 내적인 성장을 책임지고, 인간은 그 성장을 이용하도록 가르치며 사물은 우리가 접촉하는 대상들에 대한 경험을 획득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세 선생의 가르침이 일치하고 같은 목표로 향할 때만 올바른 교육을 받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중에서 인간의 교육만이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인간에 의한 교육이라는 것도 그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는 행운이 따라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루소는 교육 자체에 대한 겸손과 함께 ‘자연과 함께 사는 것’ 자체가 에밀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직업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여기서 산다는 것은 그저 숨 쉬는 차원을 넘어서 활동하는 것이고, 가장 잘 사는 사람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해 자연과 세상을 가장 잘 느끼는 사람이라는 규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자연을 관찰하라. 그 자연이 당신에게 가리키는 길을 따라가라. 자연은 끊임없이 아이를 훈련시킨다. 자연은 온갖 종류의 시련으로 아이의 체질을 훈련시킨다. 자연은 그에게 일찍부터 고통과 역경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태어난 아이의 절반이 여덟 살이 되기 전에 사망한다. 시련은 아이에게 힘을 준다. 그리하여 그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되면 그 생명의 뿌리는 더욱 견고해진다.

에밀의 삽화
에밀의 삽화

 

영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던 18세기 사람 루소가 아이의 병과 죽음을 자연이 주는 시련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시련을 이겨내고 살아남을 수 있게 되면 생명의 뿌리가 더욱 견고해진다는 그의 말은 절반 정도의 진리만 담고 있다. 아이들의 병과 죽음의 상당 부분은 예방주사로 막아낼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정기적인 예방접종이 필수가 된 우리 시대에 자연이 주는 시련은 일차적으로 극복의 대상이다. 다만 지나치게 온실 속 화초로만 키우려는 부모의 자세는 아이의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면역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의 대상이라는 교훈 정도로 루소의 충고를 받아들일 수는 있다.

인간, 자연과 함께 또 하나의 선생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사물에 대해서도 주목할 만하다. 루소는 선생으로서 사물이 우리가 접촉하는 대상들에 대한 경험을 얻을 수 있도록 한다고 강조한다. 몸과 마음이 분리될 수 없는 우리는 영아기와 유아기를 거치면서 먼저 몸을 통해 세상을 받아들인다. 20세기 초반 스위스를 중심으로 활동한 교육심리학자이자 교사인 장 파이제가 구체적 조작기라고 부른 열 살까지의 발달 단계에서는 세상의 중심이 자신의 몸이다. 거의 모든 것들이 몸의 성장에 맞춰지면서 사물과의 접촉과 주변의 의미 있는 타자들과의 관계 형성, 놀이 등으로 살아가게 된다. 따라서 이 시기의 교육은 몸에 맞춰져야 하고, 그 이외의 추상적인 교육은 조심스럽게 몸의 소리를 고려하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교육은 지나치게 이른 시기에 고도로 추상화되거나 왜곡된 지식의 일방적인 주입으로 아이들을 내몰고 있다. 사물이 스승이 되게 함으로써 몸이 접촉하는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체험적 지식을 축적해가는 방식의 교육으로 전환되어야 마땅하다.

 

4. 인간의 비참함과 걸림 없음[無碍]의 지향

인간은 모두가 벌거벗은 채 가난하고 불쌍하게 태어났다. 모두가 인생에서 온갖 종류의 불행과 비애와 고통과 궁핍에 빠지기 쉽다. 결국 누구나 죽게 마련이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진정한 모습이고,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다.

루소가 살았던 시기인 18세기에 유럽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두 가지 이념은 자유와 평등이었다. “인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민중이다. 민중이 아닌 자는 아주 소수여서 그들을 고려할 필요는 없다. 인간은 온갖 신분에도 불구하고 같은 인간이다.”라고 루소는 분명하게 평등을 주장하고 있다. 당시에 존재하는 신분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주 소수여서 고려할 필요가 없다.’라고까지 말하고 있을 정도다. 당대의 불평등을 민중을 중심으로 해소하고자 했던 루소의 사상은 《인간불평등기원론》 같은 다른 저서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민중의 평등을 전제로 인간의 자유와 보다 바람직한 사회에 대한 사유도 펼쳐나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주목받을 만한 윤리학의 주요 개념이 제시되는데, 그것은 바로 도덕감(道德感)이다. 칸트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개념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이 도덕감은 루소에게서 동정심으로 나타난다.

인간을 사회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약함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인간애를 갖게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바로 그 비참함이다.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면 인간애에 대한 의무를 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애정은 부족함의 표시이다. 우리 각자가 다른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타인과 협력하는 것을 거의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루브르 박물관 앞 장자크 루소 동상
루브르 박물관 앞 장자크 루소 동상

 

루소가 보기에 우리 인간은 타인의 행복에 대해서는 질투심을 느끼는 경향이 있지만, 비참함과 불행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느낀다. 그 동정심은 타인의 불행한 처지를 헤아리는 상상력으로 전개되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다른 사람과의 협력도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불행과 비참함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자들이고, 그런 비참함에 관한 동정을 토대로 삼아 사회를 만들고 가꾸어갈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상상력을 통해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동정심을 발휘할 수 있고, 그 과정 속에서 사회도 출현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인간의 처지는 고통으로 가득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때의 고통은 몸의 그것과 함께 마음의 지속적인 편치 않음을 주로 의미한다. 연기망의 끊임없는 변화에 따라 고정된 실체를 가진 것은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생겨난 것들은 반드시 사라지게 마련이지만, 우리 인간은 눈앞에 보이는 것을 고정된 것으로 착각하여 붙들고 놓아주지 않으려고 한다. 바로 그 상태가 고통이고, 깨침을 얻지 못하는 한 이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것이 붓다가 발견한 진리의 핵심이다.

루소의 비참함과 붓다의 고통은 물론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전자가 주로 현실적인 불행과 비참에 주목하고 있다면, 후자는 인간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되는 집착으로 인한 갈애(渴愛)와 탐욕, 분노 등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위의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루소도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음에 주목하고 있고, 붓다의 출가 또한 그 죽음에 관한 화두를 계기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지니기도 한다.

그렇다면 교육에서는 어떤 유사성과 차이점을 보일 수 있을까? 루소는 자연에 근거한 인간의 동정심과 양심을 키워가는 것을 교육의 핵심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것이 상상력이고, 따라서 루소 교육론의 주된 내용은 상상력 키우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상상력에는 욕망을 충족시키겠다는 희망으로 그것을 부추기는 것 또한 포함되기 때문에, 자연에 근거한 순수한 감각이 상상력을 일깨울 수 있는 방향으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 자연에 근거한 순수한 감각에는 양심이 포함되고, 양심은 근원적인 차원에서 자연의 질서를 따르고자 하는 경향이다. 따라서 교육을 통해 양심과 상상력이 한 개인의 내면에 굳건히 자리 잡아 진정한 자유인으로서의 삶과 평등한 사회를 영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루소 교육론의 핵심 테제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 교육은 붓다가 발견하고 깨달은 진리를 전하는 과정 자체이고, 그 진리는 연기법에 근거한 고통의 해소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자이면서도 늘 망각한 채 현재 달성할 수 없는 목표들에만 집착하고 있는 인간의 불행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면서 실천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것이 불교의 교육이다. 그 교육은 대상의 상황과 성향, 기질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이루어져야 하고, 몸과 언어, 언어의 초월 같은 다양한 방편들이 활용되어야 한다.

불교와 루소의 교육론은 모두 자연 또는 자연현상에 관한 관찰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는 유사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루소는 자연을 타락한 인간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원천으로 상정하고, 그것을 인간의 양심과 상상력에 근거해 되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자연은 인간의 삶에는 직접적인 관심을 갖지 않는 여여함으로 나타나고 있고, 교육을 통해 해야 할 일은 그 여여함에 담긴 진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것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실천 역량을 길러주는 일이다. 이러한 분명한 차이는 루소의 자연관이 그 창조자로서 신의 권위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데서 출발하는 불교에서 교육은 단지 자연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아 진리를 발견한 붓다의 모범을 따라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자신도 그 자연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도, 그 자연과의 거리를 바탕으로 하는 명상을 통한 진리의 발견과 실천이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걸림 없음[無碍]의 지향이라는 화엄(華嚴)과 선(禪)의 목표 또한 실천의 뿌리를 내릴 수 있다. 이 실천의 여정 속에서 스승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어느 단계를 넘어서면 제자를 도반(道伴)으로 인정해주는 불교의 독특한 사제관(師弟觀)을 통해 수행과 일상의 일치라는 경지로 문득 올라설 가능성 또한 열리게 된다. 자신의 교육관과 자식의 교육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루소의 허물을 반면교사로 되새길 만한 지점이기도 하다. ■

 

박병기 bkpak15@knue.ac.kr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와 같은 대학원에서 윤리학과 도덕교육학을 전공했고,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에서 불교철학과 계율을 공부했다. 전주교대 교수와 한국교원대 대학원장을 역임했으며, 한국도덕윤리과교육학회장으로서 2015 초 · 중 · 고 도덕과 교육과정 개정 연구를 총괄했다. 주요 저서로 《동양 도덕교육론의 현대적 해석》 《의미의 시대와 불교윤리》 《딸과 함께 철학자의 길을 걷다》 등이 있다. 현재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본지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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