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전후 시조

1. 

현대 시조문학사에서 1950년대 전후(戰後) 시조는 현대시조의 안정기로 평가한다. 현대시조 안정기의 전개 과정은 1910년대 현대시조 태동기와 1920~40년대 현대시조 개척기를 거치면서부터다. 1920년대 최남선, 이은상, 이병기, 조운 등에 의해 펼쳐진 ‘시조부흥운동’과 함께 고시조라는 구태를 벗었다면, 1950년대 안정기는 시조가 현대문학 장르로서 확립된 시기이다. 이 시기는 시조를 창조적으로 계승하면서 시조 일반 이론을 구축하는 등의 성과로 현대시조 형식을 개념화시켰다. 무분별한 서구 문학 모방과 모더니즘 지향을 따랐던 자유시와 달리 시조가 문화유산을 전후 전통론으로 삼았다는 것은 유의미한 일이다. 이 시기의 시조시인들은 민족주의 이념과 문학적 실천을 표방하고 있는데 특히 민족문학에 침윤된 불교적 사유가 주목된다.

1950년대 사회는 6 · 25전쟁과 함께 4 · 19혁명으로 마무리된 근현대사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급진적이고도 혼탁하게 전개된 시대다. 일제강점기부터 근대국가 형성에 이르는 과정에서 비롯된 분단 상황과 좌우의 정치적 대립 등 혼란한 사회상의 연속이었다. 남북 분단과 이산의 문제뿐만 아니라 내부 계층 간의 분열, 전통과 관습의 변화, 가치관의 혼돈 등은 1950년대 전후 시조의 형성에도 영향을 끼쳤다.

당시 소수 시조시인들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6 · 25전쟁의 참상과 폐허 속에서 실존의 위기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세계관을 시조문학을 통해 1950년대를 열어갔다. 이들은 민족의 유일한 주체적 언어로서 시조를 옹호하며 고전적 미의식과 형식미학을 일궈 나갔다. 거기에 삶의 변화와 시대적 문제를 시조를 통해 관찰하면서 이전에는 없었던 다양한 불교적 사유를 보여주었다.

1950년대 이르러 시조시인들은 자유시 시인들과 함께 동인을 결성하고 활동했다. 예를 들면 시동인 ‘아(芽)’ ‘맥’ ‘설창’ ‘시예술’ ‘양지문학’ 등은 자유시 시인과 시조 동인들이 함께 편집한 동인지를 발간했다. 모더니즘의 수용 과정에서 민족의 전통적 가치를 공유한 이들 시조시인과 자유시 시인들은 장르 구분 없이 민족정신으로 계승되어 온 시조의 중요성을 인식했기에, 시조 부흥에 일조할 수 있었다. 동인지는 시조를 전통적 가치를 지닌 형식미학으로 발견하고 새롭게 정립된 시형을 알리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편 1930년 최초의 시조 동인지 《참새》에 이어 1951년 순수 시조시인들로 구성된 시조 동인지 《신조(新調)》가 있다. 《신조》는 이병기와 함께 그의 제자였던 장순하, 최승범, 이태극 등이 주축이 되어 5집까지 발행하고 폐간되었다. 이 동인들의 의지를 모아 이태극이 1960년 《시조문학》을 창간했다는 점에서 《신조》는 최초의 시조 문예지 《시조문학》의 전신이 되기도 했다.

이 무렵 활동한 시조시인은 정소파(1912~2013), 이태극(1913~ 2003), 박병순(1917~2008), 김상옥(1920~2004), 장순하(1928~ ), 최승범(1931~ ), 송선영(1936~ ), 박경용(1940~ ) 등이다. 이들은 1950년대 시조문학을 대표하는 창작의 주체로서, 대체로 1910년 이후 출생자이며 1950년대 전후로 등단하여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앞으로 살펴볼 1950년대 시조 안정기 시편에는 1910~1940년대 현대시조 태동기와 개척기에서 볼 수 없었던 다층적인 불교적 사유로 시대정신을 산출하고 있다.

 

2.

현대시조 안정기, 김상옥은 이태극과 함께 ‘시조시’를 확립하면서 불교적 사유의 작품을 다수 발표한 대표적인 시조시인이다. 1939년 《문장》에 〈봉선화〉가 추천되어 문단에 나온 그는 〈동아일보〉 시조 공모에 〈낙엽〉이 당선되었다. 주로 경남 지역에서 중 ·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동인들과 시조 창작을 하였고, 시조 연구와 시조의 미학적 발전에 기여했다. 등단 이전부터 시조에 천착해온 김상옥은 1936년 조연현과 함께 동인 ‘아(芽)’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김기섭, 장응두, 윤이상과 함께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특히 15세 최연소의 나이로 1930년 시조 동인지 《참새》에 가입하여 동인 활동을 한 것으로 보아, 유년시절부터 유교적 전통에 대한 자긍심과 시조에 대한 애착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김상옥의 시조 미학은 고전적인 조형물을 통해 민족정신을 탐미하며 그것을 시대정신으로 삼았다. 그는 “가장 구체적인 조형언어로 빚어진 우리의 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조형의 시’는 우리의 시인 동시에 인간의 아픔, 즉 인간의 진실에 공명하려는 모든 인간의 시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지극한 사랑을 ‘자비’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그는 시조를 최상의 예술적 가치로서 민족정신이 빚어낸 ‘조형언어’로 보면서 부처님의 ‘자비’와 동일시하고 있다. 당시 문학사의 전통주의와 모더니즘의 대립 구도 속에서 김상옥은 민족정신을 신라 정신에서 발굴한다. 이러한 시 의식은 전후 전통주의 시인들의 ‘신라 정신론’이라는 시론을 낳기도 했다. 

그는 신라 정신과 불교 유적에서 한국의 미를 발견하고 민족적 정서로 승화시켰는데, 이는 〈다보탑〉 〈대불-석굴암〉 〈십일면관음〉 등의 시편에서 잘 드러난다. 

 

불꽃이 이리 뛰고 돌조각이 저리 뛰고
밤을 낮을 삼아 정 소리가 요란터니,
불국사 백운교 위에 탑이 솟아오르다.

꽃쟁반 팔모 난간 층층이 고운 모양!
임의 손 간 데마다 돌옷은 새로 피고,
머리엔 푸른 하늘을 받쳐 이고 있도다.

— 김상옥 〈다보탑〉 전문

 

다보탑의 웅장하고 장엄한 건축물 속에서 시인은 시적 영감을 극대화하고 민족의 영원성을 발견한다. 이 시의 첫 수 “불꽃이 이리 뛰고 돌조각이 저리 뛰고/ 밤을 낮을 삼아 정 소리가 요란터니,/ 불국사 백운교 위에 탑이 솟아오르다”는 불국사의 다보탑은 천 년 전의 유물이 아니라 생물로서 아직까지 기상이 솟아오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것은 둘째 수에서 “꽃쟁반 팔모 난간 층층이 고운 모양!/ 임의 손 간 데마다 돌옷은 새로 피고,/ 머리엔 푸른 하늘을 받쳐 이고 있도다.”와 같이 과거와 현재가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시간의 동시성 속에서 ‘다보탑’은 순간순간 새롭게 피어나고 있음을 형상화하고 있다. 김상옥은 “천 수백 년 전에 만든 다보탑이 시인의 눈 속에서 오늘로 살아나는 것, 나의 마음속에 신라와 지금을 한자리에 앉도록 한 것”으로 민족의 전통성을 신라 정신에서 구현하고 있다. 

말하자면 김상옥의 신라 정신은 불교의식을 치환한 것으로 〈대불-석굴암〉에서도 잘 나타난다. “가까이 보이려면 우러러 눈물겹고/ 나서서 뵈올사록 후광이 떠오르고/ 사르르 눈을 뜨시면 빛이 굴에 차도다// 어깨 드오시사 연꽃하늘 퍼오시니/ 나한도 물러서다 가슴을 퍼오시니/ 임이여! 큰 한 그 뜻은 다시 이뤄지이다.” 두 수로 된 이 시는 석굴암의 웅장함 속에서 부처님의 ‘후광’을 감지하는데 그것은 부처님의 자비로서 ‘큰 한 그 뜻’이 현재에서 이루어지기를 염원하고 있다. 다음 시편 〈십일면관음〉에서는 부처님의 자비가 이 땅에 임하길 간절한 바람으로 담아내고 있다. 

 

 

의젓이 연좌(蓮座) 위에 발돋움하고 서서
속눈썹 조으는 듯 동해(東海)를 굽어보고
그 무슨 연유(緣由) 깊은 일 하마 말씀하실까.
몸짓만 사리어도 흔들리는 구슬 소리,
옷자락 겹친 속에 살결이 꾀비치고,
도도록 내민 젖가슴 숨도 고이 쥐도다.

해마다 봄날 범에 두견(杜鵑)이 슬피 울고,
허구헌 긴 세월이 덧없이 흐르건만
황홀한 꿈속에 쌓여 홀로 미소(微笑)하시다. 

— 김상옥 〈십일면관음〉 전문

 

〈십일면관음〉은 열한 가지의 얼굴을 가진 보살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중생들을 구제한다. 다양한 얼굴로 여러 가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적절히 구제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보살이 “속눈썹 조으는 듯 동해(東海)를 굽어보고” 있다면서 민족의 안녕과 번영을 기대한다. 따라서 이 시의 ‘동해’는 동방의 나라이고 ‘관음보살’은 우리 민족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표상된다. “몸짓만 사리어도 흔들리는 구슬 소리”와 “황홀한 꿈속에 쌓여 홀로 미소(微笑)”를 가진 ‘십일면관음’의 한량없는 자비가 생동감 있게 떠오른다.

 

195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에 〈휴전선(休戰線)〉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조 〈설야(雪夜)〉가 동시에 당선되어 시조단의 주목을 받은 송선영은 1956년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최승호, 마삼렬, 송기숙 등과 〈양지문학〉 동인회를 결성하고 동인지를 발간한 시인이다. 그의 시조는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표출하면서 초월적 자연이나 추상적 세계를 떠나 현실로부터 출발한다. 시대와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하여 민족의 전통적 탐색과 현실의 극복 의지를 시조 형식으로 담아내는 데 주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래의 시조 〈그믐밤〉에 등장하는 영재(永才) 스님은 삼국시대 신라를 대표하는 승려 시인이다. 이 시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영재 스님의 향가 〈우적가(愚賊歌)〉를 모티브로 삼아 신라불교의 호연한 기상을 표현하고 있다. 

 

언젠가
취한 망나니
제 너머 버리고 간

서슬 퍼런
칼이 하나
서천(西天) 아래 떠오르고

황급히
하산하는 바람,
영재(永才) 스님이 다가온다.

— 송선영 〈그믐 밤〉 전문

 

단수로 된 이 시는 3연으로 나누어지면서 3단계의 묘사로 구성된다. 첫 수에서 ‘술 취한 망나니가 버리고 간’ 것을 둘째 수에서 이어받는다. 그것은 ‘서슬 퍼런 칼’이며, 이 칼은 ‘서천(西天)’이라는 서방 극락세계 아래에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연 “황급히/ 하산하는 바람/ 영재(永才) 스님이 다가”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삼국유사》에서 영재 스님은 자신을 해치려는 도적의 칼날에 오히려 태연하게 “이 칼이사 지내고 나면 좋은 날이 새리니”라고 〈우적가(愚賊歌)〉를 부른다. 그러자 도적들은 이에 감동하여 함께 머리를 깎고 입산했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그믐 밤’ 이 땅 위에 떠오른 ‘망나니의 서슬 퍼런 칼’로부터 지켜주는 자비를 신라시대 영재 스님의 교법에서 찾고 있다. 송선영의 이 시는 시대를 초월하여 현상계에서 과거로 건너가 불교정신을 미학적으로 재해석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송선영은 어둠 속 좌절과 고통으로부터 희망을 신라 향가에서 찾아냈듯이 또 다른 시조 〈연꽃〉에서도 현상계에서 피어나는 장엄한 불교 세계를 담고 있다. 4수로 된 이 작품은 각 수에서 불교적 사유와 함께 이 땅에 희망이 퍼져 나가길 바라는 화자의 심상이 동반된다. “일렁이는 어둠이사/ 미소로 다스리고”로 시작되는 1수에서 “동녘땅 밝아오는” 희망을 제시한다. 그것은 ‘석종 소리’와 함께 2수에서 ‘뭇가에 단좌’하고 있는 아름답고 묘한 소리로 나타나며 “낭자히/ 어리어오는/ 말씀으로” 현현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새가’ 들려주는 것으로 현상계의 본체는 하나라는 부처님의 화신으로 작용한다. 이에 3수에서 “당신의 예지른 미소”는 부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우러러/ 새 가슴으로/ 읽어 버린 오묘”라고 묘사한다. 여기서 화자는 ‘새의 말’을 ‘새의 가슴’으로 묘파하는데 염화미소처럼 그것을 이것으로 깨달은 자만이 알 수 있다. 마지막 수에서 “천지간/ 조히 번지는/ 오, 동양의 아지랑이”는 ‘일렁이는 어둠’ 속에서 시대적 절망이 희망으로 퍼져 나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염원이 실려 있다.

 

3.

또 한 사람, 불교적 정서를 형상화한 작품 세계로 주목할 시인은 박병순이다. 1938년 〈동광신문〉에 시조를 수록하면서 등단했고, 1939년 대구 사범학교 심상과를 졸업했으며,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이병기의 제자이기도 한 박병순은 “시조는 나의 하늘이요, 나의 종교요, 시조는 나의 생명이자 생활인바, 나의 하늘을 겨레의 하늘로, 나의 종교를 겨레의 종교로, 나의 생명과 생활을 겨레의 생명과 생활로 널리 펴고 높이 끌어올리자는 것이 나와 나의 동지들 필생의 사명이며, 천명임을 깨닫고 그렇게 살아온 까닭에 이에 와서 새삼스레 오랜 긴긴 세월 우리 민족의 심혈과 우리 겨레의 숨결 어린 우리 시조와 죽어도 결별할 수 없다는 것이 절대적인 이유다.”라고 삶의 의미가 시조와의 인연에 있다는 것을 피력했다. 

박병순뿐만 아니라 당시 시조시인들의 글에서 시조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시조를 창작하고 보급하는 것은 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발로라는 점에서 시대적 사명으로 여겼다. 마치 민족으로부터 선택된 선민의식과도 같은 이러한 소명의식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침윤된 시조 안정기 시인들의 본질적인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오직 지아비를 위하여
청춘을 고스란히 바쳤다.

아들을 못 낳는다는
죄 아닌 죄로 하여,

산처럼 외로운 고독을
참아 가는 생부처!

단 하나 핏줄인
딸자식을 데불고,

빠끔히 트이는
희망을 의지하여,

어디든 살아 보겠다는
갸륵하다 생부처!

그대 생부처로
이생을 곱게 나서,

저승에 다시 만나
겁을 두고 누리다가,

인간에 되 태어나는 날
엉킴 없이 펴세나

— 박병순 〈생부처〉 전문

 

박병순의 〈생부처〉는 살아 있는 부처, 생불(生佛)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시에서는 아들을 낳지 못하는 아내를 표상한다. 1950년대만 하더라도 유교 이념이 팽배한 나머지 출가한 여자는 오로지 남편과 자식을 위해 헌신해야 했다. 게다가 남아선호(男兒選好) 사상으로 여자가 슬하에 아들이 없으면 대를 잇지 못한다는 이유로 가혹한 시집살이를 감내해야 했다. 이것을 대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부다처제가 암묵적으로 허용됐다. 말하자면 ‘딸자식’만 있는 화자의 아내는 “오직 지아비를 위하여/ 청춘을 고스란히 바쳤”지만 “아들을 못 낳는다는/ 죄 아닌 죄로” 평생 죄인처럼 혹사당하며 살았다. 이러한 아내를 화자는 2수 종장과 3수 종장에 와서 “생부처”라고 칭한다. “산처럼 외로운 고독을/ 참아 가는 생부처!”와 “어디든 살아 보겠다는/ 갸륵하다 생부처!”가 그것이다. 

원래 생부처는 불가에서 살아 있는 부처처럼 지혜롭고 자비로우며 인격과 덕행이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을 의미한다. 시인은 아내의 공덕을 세속의 법과 도덕에 구애되지 않는 완전무결한 인격체와 같이 생불에 비유하고 있다. 마지막 수에서는 이생이 아닌 저승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데 “인간에 되 태어나는 날”이라는 구절에서 윤회의식이 엿보이기도 한다. 

이 시기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시인으로 이태극을 꼽을 수 있다. 이태극은 이병기의 제자로서 박병순과 함께 활동한 한국 현대시조사의 중심 인물이다. 그는 와세다대학 전문부 2년 수학 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55년 〈한국일보〉에 시조 〈산딸기〉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이화여대 재직 시절인 1958년 《시조론》으로 시조 형식을 정립하고, 1960년 《시조문학》을 창간한 그는 시조 안정기의 시조시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근대 시조로부터 갈등을 빚었던 표현방식과 형식의 혼돈을 시조이론으로 정립한 그의 노력은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시조 동인을 시 동인과 연대하여 폭넓게 구성하는 등 이전과 다른 시조 창작과 시조 보급 운동을 전개하여 현대시조 이행기를 이끌었다. ‘시조’가 어디까지나 ‘시’임을 주장했던 이태극은 ‘자유시’와 다름없음을 강조했다. 이로 인해 시조는 ‘시조시’로서 궁극적으로 언어의 고유성과 민족의 전통성을 파급할 수 있었다.

 

솟아 솟으려구 창공을 떠받고서
수련한 숲과 숲의 철 따른 변화 속에
억년을 한 모양으로 살아온 넋이어라

해와 달 별빛 받아 사념은 깊어가고
구름과 바람 넘놂을 쓸어안은 채
너는 저 속념을 등진 생불로서 숨 쉬나

오가는 인간들은 애환의 멍엘 메고
역사의 톱니바퀴로 시각을 다투는데
지극한 예지의 미소로 명암(明暗) 속에 사나 너. 

— 이태극 〈묏부리〉 전문

 

이태극
이태극

이 시조의 제목인 ‘묏부리’는 멧부리의 방언으로 산등성이나 산봉우리에서 가장 높은 꼭대기다. 이태극은 홀로 우뚝 솟아 있는 멧부리를 통해 ‘생불’을 발견하며 ‘부처의 미소’를 떠올린다. 첫 수에서 이 멧부리를 “솟아 솟으려구 창공을 떠받고서” 있는 역발상 속에서 “수련한 숲과 숲의 철 따른 변화 속에” 변하지 않는 “억년을 한 모양으로 살아온 넋”으로 표상한다. 이 ‘넋’은 ‘멧부리’의 변하지 않는 영혼으로서 유기체적인 존재로 투사하고 있다. 다음 수에서는 “해와 달 별빛 받아 깊어지는 사념” 속에서 ‘구름과 바람’이 넘나드는데, 그것을 쓸어안고 있다. 이에 멧부리의 넋은 모든 것을 초월한 이른바 “저 속념을 등진 생불로서 숨 쉬”는 존재로서 현현된다. 3수에서 멧부리는 인간들의 ‘애환과 멍에’ 속에서, ‘역사의 톱니바퀴’ 속에서도 “예지의 미소”를 잃지 않는다. 예지의 미소는 멧부리같이 살아 있는 부처님의 변하지 않는 자비로써 밝음과 어둠,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등의 명암을 비추고 있다는 말이다. 

〈묏부리〉 외에는 이태극의 시조에서 불교적인 성격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을 찾기는 어렵다. 그런 가운데 〈박제〉라는 시편에서 부분적으로 불교적 정서가 관찰되고 있다. 3수로 된 〈박제〉는 실제로 살아 있는 듯한 새의 야생성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것은 ‘허상’에 불과함을 형상화하고 있다. 보여주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에서 일어나는 시선에 대한 일종의 인식 작용을 통해 이 시는 무(無)를 사유하게 하면서 무지를 깨우치게 한다. 첫 수 종장에서 “날 듯한 그 자세에 자꾸 가슴만이 조인다”라고 죽어 있는 새의 생생한 날갯짓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한 공격성을 보인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보이는 것으로는 실재를 지각하지 못한다. 

이 세계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때 그곳이라는 시공간의 인연에 따라서 그렇게 보이고 들리고 만져질 뿐이다. 특히 2수 초장에서 중점적으로 불교적 사유가 드러나는데 “잃은 것도 얻은 것 있음도 없음인데” 모든 있다고 하는 것과 없다고 하는 것의 현상은 진실상이 아닌 것으로 파악한다. 더욱이 “나래 져 휘날자고 갈구하는 여울목에/ 비쳐든 아침햇살”과 같이 현상계의 실상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그림자와 같음을 그리고 있다. 그러므로 3수 중장에서 ‘바자님’(울타리) 안에 실재하는 세계는 ‘박제’와 같은 ‘허상’이라는 의미이다. 이 허상은 마음이 모든 것을 지어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상기하게 한다. 따라서 화자는 “청자의 맑음을 걷는 내일내일 아쉽어”라고 없는 것을 참모습인 줄 알고 쫓아가는 무지한 인간의 욕망을 성찰하게 한다.

이태극이 시조를 세계화의 문을 여는 기반으로 삼았다고 한다면, 이어서 살펴볼 최승범은 이태극의 시조 정신을 이어받아 세계화의 포문을 열었던 인물이다. 최승범은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58년 《현대문학》에 시조 〈등고(等高)〉를 추천받아 등단했다. 그의 시조는 전통적 시조시형에서 벗어나 다양한 생활 감각을 반영한 현대적 시조시형을 확립시켰다. 전북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조직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일본을 오가는 등 시조를 세계에 알리는 데 힘썼다.

 

푸르름 푸르름 속
알꼴 큰 촛불 밝혀
곧고 바르게 선
합장의 일념 기구
속된 이
범접도 못 하겠네
저 축원의
빛살

— 최승범 〈태산목련 꽃봉오리〉 전문

 

최승범이 쓴 이 시도 이태극의 〈묏부리〉와 같이 ‘꽃봉오리’를 묘사하며 함축적 의미로 불교적 사유를 드러낸다. 단수로 된 이 시는 달걀과 같은 모양을 이루고 있는 “태산목련 꽃봉오리”는 부처의 다른 형상이다. 그것은 “푸르름 푸르름 속”에 “큰 촛불”을 밝히고 있는 합장하는 모습이며, 전심으로 염불하고 있는 일념불생(一念不生)을 나타낸다. 이에 “태산목련 꽃봉오리”는 “일념 기구”로서 이 땅을 한결같이 ‘축원하는 빛살’로 관음보살의 또 다른 얼굴로 비친다. 한편 그의 단시조 〈인두겁〉에서는 “인간의 겸손과 오만/ 손바닥 뒤집듯// 구름이다가/ 바람이다가// 작태는/ 무성하여라// 인두겁을/ 썼는가”라고 찰나로 변화하는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사람 아닌 사람을 사람의 형상이나 탈을 쓴 존재로 묘사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구름’ 또는 ‘바람’같이 무상하다고 묘사하며, 우리 눈에 ‘무성’하게 보이는 것은 실체가 아닌 페르소나로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성찰하게 한다. 

 

4. 

광주학생운동에도 참여했던 정소파는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유학파 시인이다. 1930년 18세의 나이로 동인지 《개벽》에 〈별건곤(別乾坤)〉을 발표한 그는 194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에 〈설매사(雪梅詞)〉가 당선돼 문단에 나왔다. 1957년 대한민국건국기념 전국백일장에서 시조부문 장원으로 입상하며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문단에서는 이병기, 백석, 조운 등과 교유하며 1959년 《시예술》 발기동인으로 참여해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했다. 자연 친화적인 암시와 여백의 미학으로 동양 정신을 불교적 사유로 구현하는 시조를 썼는데 〈산창일기〉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1.
봄 눈이 스러진 골/ 물소리 마냥 높다.//

볕 바른 미닫이를/ 산새 스쳐 날아가고,//

봉마다 머금은 불꽃/ 멍울 지어 트인다

 

2.
반나절 송경소리/ 졸음 절로 오는 데,//

부처님 미소 띠신 채/ 대서 내려 오시고―//

어디서 산꿩 우는 소리……/ 자즈러진 메아리―

 

3. 
옹기중기 솟은 맷부리/ 비치는 햇살!//

느릅나무 등걸마다/ 속잎 트는데,//

보조개 지우며, 웃는/ 꽃과 같은 젊은 승

 

4. 

천산처럼 살고지라!/ 비는 이 마음……//

숲길 거닐다 말고/ 한 모금 마신 샘물,//

사슴의 애띤 향기는/ 속된 얼에 스민다.

— 정소파 〈산창일기(山窓日記)〉

 

이 시조는 정소파의 대표작이면서 1957년 간행한 첫 시조집의 표제작이다. 4수 각 3장 연작시조로 된 〈산창일기〉에서 ‘산창(山窓)’은 산속에 있는 집의 창문을 의미한다. 이 창문을 통해 화자는 봄이 오는 무한한 생명력의 자연을 바라보면서 부처님의 공덕을 헤아리고 있다. 1수 초장 “봄 눈이 스러진 골”에서 발현되는 산속은 “봉마다 머금은 불꽃”으로서 ‘멍울지어 있는 봄’을 트이게 하는 신비로운 공간이다. 이러한 세계는 2수에서 불경을 외는 “반나절 송경소리”에서 “부처님 미소 띠신 채/ 대서 내려 오시고”로 열리게 된다. 이 땅에 가득한 부처님의 자비로 인해 3수에서 “보조개 지우며, 웃는/ 꽃과 같은 젊은 승”이 있는 것이며, 4수에서 부처님 마음과 같은 “천산처럼 살고지라!/ 비는 이 마음”이 생겨난다. 

이 시조는 각 수에서 “봉마다 머금은 불꽃” “옹기중기 솟은 맷부리 비치는 햇살!” “한 모금 마신 샘물” 등의 구절을 통해, 봄의 강한 생명력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산속 봄을 알리는 신비한 기운들은 인드라망과 같이 세계 곳곳에 머물고 있는 부처로부터 생겨난다. 그물코마다 보배구슬이 박혀서 발산되는 인드라망의 빛들이 무수히 겹치며 신비한 세계를 만들어 내듯, 봄을 태동시키는 불꽃 같은 햇살들이 ‘자즈러진 메아리’ 소리를 내고 있다. 

인드라망의 보배로운 구슬 소리는 여러 가지 형태로 여러 세계를 연결하고 관계 맺고 확산하는 불법의 세계를 의미한다. 수많은 조건과 상황 속에서 사물들이 상호의존하고 상호작용하는 것 역시 존재라는 각각의 구슬이 전체라는 구슬로 다자를 형성하고 있다. 

이 같은 존재의 연기적 본성은 장순하의 시편에서 사설시조로 전개된다.

 

소리란 소리, 글자란 글자들이 대천바다 백사장에 모래알로 널렸다.//

산 위에 야호 소리, 오려논 새 쫓는 소리, 신작로 경적 소리, 서당방 글 읽는 소리, 장바닥의 골라 소리, 곡마당의 나팔 소리, 선늙은이 잠꼬댓소리,/ 하룻밤 비바람에 말끔히 씻기면서 첫소리 가운뎃소리 받침소리가 모조리 훈민정음으로 분해되어 대천 바다 백사장에 모래알로 널렸는데,//

입술에 한일자 그은 탁발 스님이 바릿대에다가 흩어진 소리 흩어진 글자들을 연신 주워 담고 있었다. 

— 장순하 〈백사장에 널린 소리〉 전문11)

 

이 시를 발표한 장순하는 1951년 시조 동인지 《신조(新調)》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956년 원광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57년 개천절 경축 전국백일장에서 〈통일 대한〉으로 장원 당선하고, 1958년 《현대문학》에 〈울타리〉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50년대에 평시조를 비롯하여 엇시조와 사설시조에 이르기까지 현대시조를 감각적, 실험적으로 창작했다.

이 시는 “대천바다 백사장 모래알” 속에서 널려 있는 ‘소리와 글자’들을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흩어진 소리와 글자들을 인드라망의 상상력에서 바라보면 모래알은 인드라 그물의 씨줄과 날줄로서 백사장을 이루고 있다. 모래알 하나하나는 각각 분리되어 있는 것 같지만 서로 얽힘과 되먹임이 속에서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 그것도 영롱한 구슬과 같이 서로 결절점으로 관계하며 빛과 소리를 내고 글자를 이룬 것이다. 수많은 모래알은 중장에서 “산 위에 야호 소리, 오려논 새 쫓는 소리, 신작로 경적 소리, 서당방 글 읽는 소리, 장바닥의 골라 소리, 곡마당의 나팔 소리, 선늙은이 잠꼬댓소리” 등을 자아낸다. 종장에서는 ‘스님’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스님은 “입술에 한일자 그은 탁발 스님”으로서 묵언수행을 하는 분이다. 따라서 “바릿대에다가 흩어진 소리 흩어진 글자들을 연신 주워 담고” 있는 것은 말로 할 수 없고 말 밖에 있는 깨달음일 것이다. 그러한 깨달음을 주워 담는 스님의 바릿대는 인드라망의 그물적 사유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박경용은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거쳐 동국대 국문과로 편입해 1962년 졸업한 시조시인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찍이 1958년 시조 〈청자수병(靑瓷水甁)〉과 〈풍경(風磬)〉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당선됐다. 문학 활동의 상당 기간을 어린이를 위한 동시집이나 동시조집을 출간하면서 한국 동시조를 개척한 만큼, 세속에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순진무구한 인생관이 그의 문학적 질료다. 또한 그의 시조는 자연과 생태에 대한 근원적 탐구로부터 실존적 개인사에 이르는 여정을 담고 있다.

 

곬진 주름살마다

일렁일렁 나울이 잦던

시름의 나울, 바램의 나울

그 바다는 잠이 들고

바닷가 밀려난 조개론듯 오, 

깨어 남은 한 쌍 염주!

 

먼 훗날 잠든 임자의

그 바다가 도로 깨어

해일(海溢)토록 넘친단들

시방 오죽한 외롬이야

오늘에, 뉘 바다에 들어

씻기고플 것이여. 

— 박경용 〈염주〉 전문

 

박경용의 〈염주〉는 서로서로 연결되어 처음과 끝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인간의 번뇌와 고통을 위무하는 법구다. 이 시에서 염주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품으로 나타난다. 그는 “할머니 살아 계셨을 적, 한 쌍 염주를 보듬으셨다. 생전에 지니셨던 것 모두 가신 임자 몸 따라 자취 감추었는데, 오직 그 염주 한 쌍만이 빈 방의 빈 벽에 걸려 남아 있었다.”고 말한다. 불교에서 염주의 구슬은 보살의 훌륭한 과를 표상하는 것으로 구슬들의 중간에 구멍을 뚫린 것은 번뇌를 근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할머니의 오래된 염주는 바다 같은 할머니의 마음을 생태학적으로 형상화한다. 1수에서 “곬진 주름살마다/ 일렁일렁 나울이 잦던/ 시름의 나울, 바램의 나울”과 같이 한시라도 파도치면 안 되는 바다와 할머니를 병치한다. 이를테면 썰물이 지나간 자리에 조개가 남듯이 할머니라는 삶이 지나간 자리에 “한쌍 염주”가 있었다는 것이다. 2수에서 죽었던 할머니(바다)가 살아나더라도 넘쳤던 외로움은 “해일(海溢)” 같은 파도에도 씻지 못한다. 이처럼 할머니의 ‘염주’는 외로움이라는 번뇌를 없애는 유일한 법구로서 쌍을 이루는 동반자 역할을 하고 있다. 

 

 

5.

 

시조시인들뿐 아니라 자유시 시인들 또한 시조 형식과 유사한 형태로 불교적 사유를 드러낸 시편들이 있다. 시조의 정형율격과 전통 방식을 고집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민족 정서가 4음보 율격으로 배태된 자유시들이다. 이를테면 김달진(1907~1989), 조지훈(1920~1968)과 박재삼(1933~1997)의 경우가 그렇다. 김달진의 연작시 〈님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너무나 작고 더러운 존재오라./ 영혼의 속속들이 눈부시는 빛 앞에/ 화살 맞은 비둘긴 양 날개만 파득일 뿐”(전문). 1연 3행으로 된 이 시는 4음보 율격을 취하고 있지만 3행의 1음보가 네 글자라는 점에서 단시조가 아니다. 그렇지만 이 시편은 눈부신 광명의 빛을 통해 너무나 작고 초라한 인간의 존재를 불교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부처님을 표상하는 찬란한 빛의 아우라에 자신의 내면은 물론 영혼마저 속속들이 빼앗겨버린 것으로 형상화된다. 이에 그 앞에 서면 시인은 마치 화살 맞은 비둘기같이 날지 못하고 쓰러지는 연약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조지훈의 〈승무〉의 경우, 총 9연 중 앞의 3연까지는 시조 율격을 취하고 있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불교 의식을 소재로 한 이 한 편의 시를 완전한 시조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나머지 연에서는 불규칙한 자수와 음보로 인해 시조적 율격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마치 한 송이 연꽃이 피어나듯 승무를 추고 있는 여승을 시인이 바라보면서 인간의 번뇌를 고찰하고 있다. 

앞서 본 김달진과 마찬가지로 조지훈의 이 시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시편에서도 시조 형식과 유사한 시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고전미와 전통율격을 창작의 기본 틀로 삼았음을 반증한다. 

 

名分도 없는 水道를
사이하여 바라뵈는
뭍에선 봄 기운이
띠를 흘러 흐르는데
세월은 주저앉은 채
한시름 푸는 중이다.

갈매기 두어 마리
無心 끝에 오르고
다만 손짓으로는
가릴 수 없는 햇살,
화안한 배추밭 하나
눈썹 위에 와 있다

아무리 둘러 봐야
드디어는 물새처럼
모가지 휘어지는
하얀 뒷덜미 설움,
뭍으로 오르다 그만 
지쳐 쉬는 바다여.

— 박재삼 〈섬에서〉 전문

 

박재삼
박재삼

자유시뿐만 아니라 시조 창작에도 관심을 가졌던 박재삼의 위의 시편은 시조 형식으로 쓰인 연시조다. 3수 각 3연 6행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 분별이 없는 무분별심(無分別心)이라는 불교적 심상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첫 수 “명분(名分)도 없는 수도(水道)를/ 사이하여 바라뵈는”에서 사방이 바다이고 허공인 섬은 더 넓고 광활한 세계를 볼 수 있는 장소가 아닐 수 없다. 둘째 수 “갈매기 두어 마리/ 무심(無心) 끝에 오르고/ 다만 손짓으로는/ 가릴 수 없는 햇살/ 화안한 배추밭 하나/ 눈썹 위에 와 있다”는 바다밖에 없는 망망대해에서 화자는 비로소 무상한 인간의 본성을 발견한다는 내용이다. 현실의 삶을 떠나 창공 높이 오르는 갈매기를 보면서 속세에 관심이 없는 경지인 ‘무심(無心) 끝에’ 이른다. 마지막 수에서 “아무리 둘러 봐야” 아무것도 없기에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섬에서” 화자의 의식은 세속의 경계가 없듯이 상념 또한 사라진다. 나아가 청정한 섬처럼 무소유의 삶을 체득하는 데 집착을 버린 무념무상의 상태를 드디어 가지게 된다.

 

이와 같이 전후(戰後)의 시조시인들은 시대적 좌절과 폐허 속에서 전통의식을 추구하며 시조 부흥에 이바지했다. 불교적 사유가 스민 시조의 창작을 통해 민족 정서를 보존하고 시대정신을 계승하는 데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혼돈과 격동의 시기에 표출된 불교의식은 초월적이기보다는 현실적으로 가동되며 실존적인 문제를 파고들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1950년대 시조 안정기 시인들의 작품에는 불교정신과 함께 시대의 어둠을 빛으로, 부정을 긍정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승화하려는 의지가 표출되고 있다. 이는 조화와 화합으로 민족정신을 강화하면서 다음 1960년대를 건설하는 밑바탕이 되어 주었다. ■

 

권성훈 poemksh@naver.com 
문학평론가. 2013년 《작가세계》 평론 신인상 당선. 한신대 종교학과, 경기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고려대 박사후과정 수료. 시집 《밤은 밤을 열면서》 외 2권과 저서 《시치료의 이론과 실제》 《현대시 미학 산책》 《현대시조의 도그마 너머》 등이 있다. 현 경기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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