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불교

“내가 남들보다 더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었던 덕이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의 표현을 잠시 차용해본다면 내가 불제자임을 자각하고 공명정대한 불법을 수지하게 된 데에는 불교계의 큰 거목 법정 스님과의 남다른 인연 덕이라고 생각한다. 법정 스님과의 첫 만남은 1968년 초 서울 명동에 있던 대한전척 사옥의 〈대한불교〉(현재의 〈불교신문〉) 기자 공채 시험장에서였다. ‘작문’ 시험 시간에 감독관으로 들어온 분은 훌쩍한 키에 파르라니 삭발한 두상에서 서릿발 같은 기상이 느껴지는 스님이었다. 그분이 당시 〈불교신문〉의 주간을 맡고 계셨던 법정 스님이었다.

그보다 앞서 불법과의 첫 인연부터 얘기하는 것이 순서겠다. 6 · 25 전쟁 때 부모를 잃었으니 부모 복은 없었다고 해야겠다. 대신에 스승 덕은 참으로 분에 넘치게 많이 입으며 살아왔다. 학창 시절엔 희곡 작가 유치진(柳致眞) 선생님을 위시한 은사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은 것은 물론, 사회에 나와서는 수많은 고승대덕을 만나 불법의 훈향을 잇는 불자가 되었으니 말이다.

불교와의 첫 만남

사실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불교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아니 문외한이라기보다 부정적 시각을 가졌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동국대학교에 입학한 뒤 불교학 개론 시간에 홍정식 교수로부터 괄목할 만한 강의를 듣게 되었다. 우선 싯다르타가 탄생 시 외쳤다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에 대한 해석이었다. 홍 교수는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아(我)를 당시 문학계에 풍미했던 사르트르와 실존주의를 연결해서 소아(小我)가 아닌 대아(大我)임을 역설했다. 뭔가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아, 불교에 저렇게 심오한 철학이 있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덧 졸업을 앞두고 취업 시즌이 되었다. 대한불교 기자 공채에 원서를 넣고 시험과목인 ‘불교 상식’에 관한 것을 알기 위해 당시 이재창 교수가 소장으로 있던 불교문화연구소로 이영자 조교(뒤에 동국대 교수)를 찾아갔다. 공부를 하든 안 하든 늦도록 캠퍼스에 어정거리는 바람에 웬만한 교수님들과는 안면을 많이 익히게 됐다. 이영자 선배가 마침 군승으로 파병됐다가 귀국한 권기종 씨(나중에 동국대 교수)에게 ‘불교 상식’을 일러주라고 부탁했다.

지금도 뚜렷이 생각나는 것은 그때 권 교수로부터 처음으로 듣게 된 ‘사홍서원과 팔고(八苦)’에 대한 기억이다. 사홍서원의 크고 넓은 원력에 압도되었다. 그동안 기독교 분위기에서 접한 기도의 의미는 언제나 개인의 안녕, 가족의 무탈 등 지극히 세속적이고 자기 욕구를 위한 간구에 매달리는 편이었다. 그런데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법문무량서원학(法問無量誓願學),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의 네 가지 서원은 차원이 달랐다. 대범하면서도 자기 성찰적이고 형이상학적이었다.

거기에 교과서에서 익혔던 생로병사의 사고(四苦)에 더해서 또 다른 고통의 원인이 설파되었음도 알게 되었다.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 원증회고(怨憎會苦: 미운 사람과 만나는 고통), 구부득고(求不得苦: 가지고 싶어도 얻지 못하는 고통), 오음성고(五陰盛苦: 물질, 느낌, 생각, 작용, 식별의 오음에서 비롯된 수많은 괴로움)를 합한 팔고(八苦)가 바로 그것이다. 솔직히 생로병사의 고통은 아직 꿈에 부푼 청춘에게는 그다지 실감 나는 괴로움이 아니었다. 그러나 애별리고나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음성고 등은 매일매일 당면할 수 있는 괴로움이었으니 가슴에 확 들어와 박혔다. “우와, 석가모니 부처님이란 분이 참으로 인간과 세상사에 대한 통찰력이 대단한 분이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어느 날 을지로통에서 동악(東岳, 동국대 캠퍼스)을 향해 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김숙현!” 하는 중저음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논리학 개론을 가르쳤던 박성배 교수(나중에 뉴욕주립대 교수)였다. 박 교수는 택시를 세우고 ‘학교에 가는 거면 타라.’고 하셨다. 원래 수업 때 열강하는 모습이 인상적이기도 했었지만 200명도 넘는 교양학부 수강생 중에서 내 이름을 똑똑히 외우고 계신 것에 놀랐다. 그런데 박 교수가 해인사 백련암 성철스님 휘하로 출가했다가 환속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교수직을 내놓고 출가를 했다는 사실도 충격적이지만 승가 생활을 포기하고 환속했다는 것도 놀라웠다.

신문사 발령을 기다리던 중에 운 좋게도 불교계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만나게 되었다. 이재창 교수와 이영자 선배가 박성배 교수 댁을 방문하는 데 묻어가게 된 것이다. 수유리의 박 교수 집에 도착하니 뜻밖에 ‘작문 시험’의 감독관이었던 법정 스님이 와 계셨다. 늦깎이 박 교수는 그 나이에 행자 생활을 거치며 묵언수행을 2년 가까이 한 모양이었다. 박 교수는 양쪽 무릎에 두 딸을 앉힌 채 진솔한 모습으로 방문객을 맞았다. 법정 스님은 승가의 일원에서 이탈한 셈인 박 교수를 향해 “잘했습니다.”라고 진심으로 응원했다. 귀갓길에 스님은 아버지 무릎에 앉은 어린 딸들을 보니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고 말씀했다. 나중에 들으니 성철 스님은 박 교수의 환계식(還戒式)을 치러주셨다고 했다. ‘출가 원력이란 것이 교수직도 처자 권속도 버려두고 떠날 만큼 그토록 강렬한 것일까?’ 박 교수의 환속 결정 역시 보통 사람으로서는 엄두 내기 어려운 결단이니 그 구도열의 귀착점이 알고 싶어졌다.

 

법정 스님께 오계(五戒)를 받다

법정 스님은 당시 뚝섬(현재의 강남 삼성동) 봉은사 다래헌에 주석하셨는데, 불교신문사에 근무하던 필자가 원고를 받으러 가려면 광나루(현재의 광진구 광장동)에서 바지선을 타고 한강을 건너야 했다. 바지선을 내려서도 억새와 산딸기나무 등이 얽혀 있는 뚝섬의 들길을 10여 분쯤 걸어 들어가서야 다래헌에 닿았다. 그 시절 봉은사에는 전국 유수 대학에서 구법 차 몰려온 대학생들을 위한 수도원이 있었다. 매달 첫 번째 일요일마다 이한상 대한불교 사장이 주관하는 삼보회(三寶會) 법회가 열려 운허 스님, 탄허 스님 등의 《금강경》 《능엄경》 강의가 이어졌다. 새내기 기자로서 삼보법회는 건성으로 다녔지만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과 함께 법정 스님으로부터 향기로운 작설차를 대접받을 수 있는 다래헌 나들이는 언제나 즐거웠다.

결혼과 함께 불교신문사 퇴직 후 한동안 스님을 뵙지 못하다가 어느 초파일, 개구쟁이 두 아들을 데리고 다래헌을 찾았다. 스님은 그때까지도 아마추어 불자에 머무르고 있던 내가 딱했던지 “보살은 원력으로 태어나고 중생은 업에 끌려 태어나는데 내생(來生)에도 그렇게 그 모습으로 태어나고 싶으냐”고 꾸중하셨다. 뜻밖의 호된 꾸지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하여 1975년 9월 9일, 가사 장삼을 입으신 스님께서 나를 경상 앞에 무릎을 꿇게 한 뒤 근엄한 목소리로 오계(五戒)를 설하셨다. “살생하지 말라, 훔치지 말라, 음행(淫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 마셔 취하지 말라.” 불교도면 누구나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생활 규범과 함께 대련화(大蓮華)라는 불명을 주셨다.

녹색 종이에 스님의 달필 붓글씨로 쓴 계첩을 볼 때마다 그날의 기연(機緣)이 떠올라 마음을 새로이 다잡게 된다. 여기서 기연이라 함은 불법의 교화를 받을 만한 인연이라기보다 스님을 어처구니없게 만든 신행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시절 아이들이 어린 데다 단손에 집안일 하랴 어쩌랴 뚝섬 봉은사까지 갔다 오는 일이 쉽지 않았다. 앞서 초파일에도 손위 시누이와 동행했다. 시누이는 법정 스님과 만나기 전에는 사설 암자 겸 생활 신수를 봐주는 일명 ‘절 할아버지’의 신도였다. 그런데 우연찮게 법정 스님을 알게 돼 이를테면 시누이올케가 같은 날 법정 스님의 유발상좌(有髮上佐)로 만나게 된 것이다.

처음에 스님이 불명(佛名)을 주신다기에 그냥 작명서 정도를 받는 것으로 알았다. 시누이가 ‘대도행(大道行)’이라는 불명을 받았다며 신바람이 나서 봉은사를 출근하다시피 했다. 어느 날 시누이가 다래헌엘 간다기에 내 불명 좀 대신 받아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스님께서 “바느질 품삯 아니니까 직접 와서 받아가라”고 하셨다고 했다. 그 까칠한 스님이 처음으로 유발상좌라는 걸 삼았는데 불교 예법이라고는 도통 모르는 천방지축 무지렁이였다니! 지금 생각해도 낯이 뜨거워진다.

우리에게 오계를 준 것이 다래헌의 마지막 일정이었음인지 스님은 송광사 불일암으로 내려가셨다.

불일암 템플스테이

시뉘올케는 띠동갑인 데다 같은 스님의 유발상좌가 돼서 죽이 잘 맞았다. 몇 해 뒤 대도행과 나는 불일암에서 묵언정진 중인 법정 스님을 친견하기 위해 호남선 열차를 탔다. 겨울 산사의 청량한 바람과 푸른 나무들의 청신한 기운을 받으며 송광사 큰법당에 참배를 했다. 그리고 군데군데 잔설과 살얼음이 깔린 오솔길을 굽이굽이 돌아 조계산 중턱을 오르자니 뒤에서 지축을 울리는 주장자 소리가 들렸다. 포행 중이던 법정 스님이 해맑게 웃고 계셨다. 시중에서 뵙던 모습이 아니라 핼쑥한 납승의 동안이어서 수백 마디 말보다 짠하게 가슴에 와닿았다.

저녁 공양은 표고버섯과 다시마로 우린 국물에 밀반죽을 뜯어 넣은 수제비로 마치고 필담으로 몇 마디 나눈 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새벽, 불일암 본채에서 죽비 소리가 났다. 우리는 30분 전부터 양치를 하고 법복을 갈아입은 뒤 기다리고 있다가 위채로 올라갔다. 이미 여러 번 방문했던 대도행은 불일암 예불은 간단하게 마치는 편이어서 놓치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10여 분의 입정을 끝내고 예불을 올렸다. 스님은 예불문 끝에 지장예문 가운데 “원멸사생육도(願滅四生六道) 법계유정(法界有情) 다겁생래죄업장(多劫生來罪業障) 아금참회계수례(我今懺悔稽首禮) 원제죄장실소제(願諸罪障悉掃除) 세세상행보살도(世世常行菩薩道)”를 독송하고 ‘멸정업진언’을 간절하게 세 번 봉송하셨다. ‘원컨대 멸하여 주업소서/ 사생육도를 윤회하며 법계유정의 다겁생래에 죄지은 업장을/ 이제 참회하여 큰절을 올리옵니다/ 원컨대 죄업장을 모두 다 소멸하여 주옵소서/ 세세생생 보살도를 행하겠나이다.’ 다른 독송문에 비해 쉬운 한문으로 이뤄진 멸정업진언은 얼른 들어도 대강의 큰 뜻이 가슴에 와닿았다. 거기에 매사 걸릴 것이 없어 보이는 스님의 오체투지하는 모습은 동참한 우리에게도 참회심이 크게 일게 하였다.

 

1979년, 가족 모두가 부산으로 이사한 후 불일암 템플스테이는 우리 가족의 정례 나들이 행사였다. 아이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아름다운 절집 생활과 불교를 자연스럽게 훈습하도록 해주고 싶었다. 스님은 아이들을 연령대에 따라 잘 다루셨다. 조무래기일 때는 벽장에 숨겨둔 과자와 초콜릿을 안겨 파초와 산호수와 후박나무, 그리고 채마밭으로 둘러싸인 불일암 산야를 맘껏 누비도록 하였다. 초등학생 무렵에는 당당한 다인(茶人)으로 대접, 차방에 불러 아끼는 작설차를 음미하게 해주었다. 찻물이 끓는 동안 뒷산에서 각종 새소리가 들려왔다. 스님이 흡사 화두를 던지듯 “저 소리가 어떻게 들리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이 “짝궁짝궁!” “뻐국뻐국!” “홀딱 벗고, 홀딱 벗고요!”라고 저마다 대답하면서 깔깔거렸다. 스님은 파안대소하시면서 꾀꼬리 소리가 아름답다고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처음엔 둔탁한 소리를 내다가 점점 맑고 고운 소리를 내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스님께 ‘죄를 마음으로 짓는 것과 직접 행동으로 저지르는 것이 어떻게 다르냐’고 물었다. 스님은 소승에서는 마음으로 짓는 것을 더욱 무겁게 말하지만, 마음은 개인의 문제이고 번뇌이기 때문에 행으로 짓는 것이 더 무겁다고 하셨다.

외부 활동과 유명세가 높아짐에 따라 법정 스님은 불일암 생활이 부담되셨음인지 거주지를 옮기셨다. 그동안 아이들도 장성하고 〈부산일보〉 논설위원으로 재직하던 나도 출퇴근하느라 바빴다. 어쩌다 부산을 찾으셔도 일정에 쫓기시는 바람에 개인적으로 만날 여유가 없어 법회 장소에 가서 법문을 듣고 나가실 때 인사하는 정도였다. 2009년 여름, 스님이 위중하시단 소식을 듣고 너무나 친견하고 싶었다. 계신 곳을 수소문하니 종잡을 수 없게 여러 곳이 지목되었다. 다른 곳은 초행이라 엄두도 못 내고, 자주 찾았던 불일암은 눈감고도 찾아가리라 생각했다. 그 겨울 묵언 중이셨던 스님이 우리 일행과 마주쳐 지팡이를 꽝꽝 두드려 반기셨던 비탈길이며 비가 조금만 와도 물웅덩이가 생겨 길이 자주 끊기던 진창길이며 ‘ㅂ’ 자 밑에 아래아( ㆍ )를 붙이고 연꽃을 그려 넣은 나무 표지판도 옛날 그대로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길 끝자락에 이르러도 불일암은 나타나지 않아 결국 찾아가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내 마음속 불일암과 현실의 불일암 사이에는 그만큼 큰 거리가 생긴 듯싶었다.

결국 스님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병이 위중해지기 전 부산을 방문하셨을 때였다. 그날도 부산 롯데호텔에서 법회가 예정되었고 그에 앞서 열리는 기자회견에 참석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문이 열리자 뜻밖에 이계진 아나운서, ‘맑고 향기롭게’ 박수관 회장 등과 함께 법정 스님이 거기 계셨다. 2층에서 36층까지 함께한 짧은 만남이 이생에서의 마지막 친견이 되고 말았다.

2010년 봄, 송광사 전통 다비장으로 출발하는 스님의 법구를 TV로 보며 불일암의 겨울 새벽예불 중에 “세세상행보살도! 세세상행보살도! 세세상행보살도!” 하고 절절하게 발원하셨던 음성을 떠올렸다. ‘그래, 스님은 어디에 계시나 세세상행보살도로 회향하실 당체(當體)시니……’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일타 스님과 공해탈문(空解脫門)

법정 스님과 함께 나의 신심 증장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선지식은 불교신문사 재직 시절에 만난 동곡일타(東谷日陀) 스님이다. 일타 스님 이야기에 앞서 오늘날까지도 뗄 수 없는 도반인 부산의 이대원성 보살과의 인연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대원성은 1968년 봄, 내가 입사했던 불교신문사를 성지순례의 일환으로 방문했다며, 경상도 사투리로 쉴 틈 없이 신명을 내었다. 강화 보문사에서 백일기도를 마치고 왔다는데 나와 갑장인 아가씨가 그토록 열성적으로 불교를 신봉하는 모습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신기했다. 간단한 방문 기사를 내보냈는데 이후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왔다.

그해 여름, 대원성의 끈질긴 요청을 받아들여 해수욕 삼아 동창 친구와 함께 부산을 방문했다. 그런데 부산역으로 마중 나온 대원성은 우리를 대뜸 범어사로 데리고 갔다. 범어사에서 일박하고 난 다음 날에는 또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해인사로 출발했다. 해인사 지족암에 도착하니 일타 스님(나중에 은해사 조실)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암자라고 해도 당시엔 그저 소박한 촌가와 다를 게 없었다. 대원성이 날렵한 솜씨로 뒷밭의 도라지를 캐다 무치고 된장찌개를 끓여 저녁밥을 준비했다. 공양을 마치고 비로소 일타 스님이 달여 주시는 작설차를 마셨다. 스님은 ‘차(茶)’ 자가 초두 변과 나무목 사이에 사람이 있음을 나타낸다고 풀이해주시며 끽다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다. 손가락 열두 마디를 연비해 뭉뚝해진 손으로 익숙하게 차를 따라 주시는데, 다시 한번 구도열(求道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큰절에서 저녁 예불을 알리는 범종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대원성을 따라 후다닥거리며 지름길로 내려가 대적광전에 닿았다. 하안거 기간이라 산중 수좌들이 저녁예불 때만 모두 참석한다고 했다. 법당에 들어가니 가사 장삼을 수한 스님들이 정좌하고 있었다. 예불이 시작되자 일백 명 가까운 스님들이 일제히 일어서더니 장엄한 목소리로 예불문을 봉송했다. 큰법당이 우렁우렁 울리는데 내 심장이 커다란 울림으로 터질 것 같았다. 처음으로 종교로서 불교의 참모습이 심금을 울렸다. 대원성은 나중에 부산 지역에서 ‘연꽃 모임’을 결성해 재가불자로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포교 일인자가 되었다.

자비로우면서도 고답적인 격식을 따지지 않는 일타 스님의 포용성은 기가 센 우리 집 배 처사도 유발상좌(불명 배덕운(裵德雲))로 이끌어, 이후 우리 가족은 일 년에 한두 번씩 지족암을 방문, 불법의 훈향을 맘껏 만끽할 수 있었다. 스님은 어떤 발칙한 질문을 해도 해박하고 거침없는 장광설로 받아주셨다. “사찰의 일주문은 문짝이 없이 항상 비어 있듯이 불법은 텅 빈 문, 공해탈문(空解脫門)으로 통하지.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고 나갈 수 있도록 닫는 일도 여는 일도 없어. 누구든지 수행만 하면 걸림 없는 세계로 들어선다는 것을 말해.” 스님은 〈초발심자경문〉에 나오는 원리악우(遠離惡友)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해석을 해주셨다. “악우는 크게 나쁜 사람이라서 악우가 아니야. 수행(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멀리 떠나라는 것이야. 사실 악우 가운데 가장 두려운 악우는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팔만사천 번뇌망상이지.” 그 말씀을 들으니 일타 스님이 30대 초반에 오로지 중노릇만 잘하리라는 발원으로 태백산 도솔암에서 손가락 네 개를 연비하며 6년 동안 피나는 정진을 하셨다는 상좌 스님의 전언(傳言)이 문득 떠올라 숙연해졌다.

어느 여름, 지족암에서 머물고 있는데 마침 그믐이라 방장 성철 스님의 포살법문이 예정돼 있다고 했다. 백련암에 가서 3천 배를 하지 않아도 성철 스님을 뵐 수 있을 것 같아 큰절로 내려갔다. 대적광전에 가사 장삼을 수한 수좌들이 가득 앉아 있고 법상에 계신 방장 스님이 주장자를 내리치며 일갈하고 계셨다. “선방에 들어앉아 절밥을 축내며 용맹정진은 하지 않고 졸기만 하는 놈은 몽둥이로 쳐 죽여도 괜찮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기세와 법력이 어찌나 단호하고 엄격하던지 그동안 절과 승단에 가졌던 느슨한 생각들이 일시에 사라졌다.

일타 스님은 엄지손가락 하나만 남아 있는 손으로 붓글씨를 잘 쓰셨다. 그중에서도 나는 빨간 색지에 써 주신 ‘아송구 군영신(我送舊 君迎新)’이란 연하장을 가장 마음에 새기고 있다. 아집과 허욕에 사로잡힌 ‘낡은 나’는 보내버리고 밝고 너그러운 군자 마음의 ‘새로운 나’를 맞아들이라는 충언이다. 1999년 열반에 드실 때까지 중생들을 불법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공문으로서 한껏 비어 놓고 중생들의 신산한 삶을 따뜻하게 포용해주셨던 스님이 그립다.

 

일타, 법정, 지관 스님을 한자리에 모시고

1981년 봄, 대한불교조계종 최초로 단일계단 구족계 수계산림이 양산 통도사에서 열렸다. 그동안 전국 각 사암에서 중구난방으로 출가시켰던 제도를 비로소 종단 차원에서 체계화시키는 행사였다.

종단적인 행사라서 일타 스님, 법정 스님, 지관 스님(후에 동국대학교 총장) 등 중진 스님들이 대거 부산에 오셨다. 지관 스님은 그 시절 서울 삼선교의 청룡암에서 주석하고 계셨는데 부산에 이사 오기 전 2년 동안 청룡암 신도로 매월 초하루, 지장재일 법회에 참석했기 때문에 친근했다. 증명법사로, 계사로 사나흘 동안 수계산림을 하시는 중에 세 분 스님이 잠시 짬을 내어 우리 집에서 공양을 드시게 되었다. 한 분도 모시기 힘든 선지식인데 세 분 스님을 한 참에 모시게 되다니, 지금 생각해도 전생의 깊은 인연 덕이 아니었나 싶다.

비구니 단일계단 수계산림은 언양 석남사에서 진행됐는데 나는 통도사에서 출발하는 TV 방송사 차를 얻어타고 석남사에 도착했다. 오전에 계산림을 끝내고 법정 스님, 지관 스님, 무비 스님 등이 주지실에서 여담을 나누고 계셨다. 그때 인홍 스님(석남사 주지)이 ‘장학회 취지문을 포함한 좋은 모연문이 필요하다‘며 법정, 지관 두 스님께 부탁했다. 매섭다고 소문이 난 인홍 스님이었지만 젊은 스님들 앞에서는 한없이 자애롭고 흡사 누나처럼 다정해 보였다. 두 스님은 잠시 니미락내미락 하는 듯하더니 곧 자구를 서로 수정해가며 인홍 스님이 흡족해할 만한 모연문을 완성했다. 법정 스님이 향긋한 봄 미나리와 칼국수를 ‘낭화’라고 부르며 좋아하는 모습이 무척 천진스럽게 느껴졌다.

봉암사 대중공양의 기억

1980년대 초, 일타 스님의 상좌 가운데 도범 스님(현재 미국에서 포교 활동 중임)이 문경 봉암사의 주지로 부임하였다. 그때나 이때나 봉암사 산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대원성과 나 그리고 연꽃모임 회원 두 사람 등 네 사람이 대중공양의 힘을 빌려 봉암사를 방문했다. 도범 스님은 당시 방장 서암 스님을 위시하여 내로라하는 선지식을 일일이 친견하도록 해줬다.

그리고 도범 스님은 1947년 당시 성철 스님과 청담 스님을 주축으로 ‘부처님 법대로, 조사님 가르침대로 살자’고 치열하게 결의했던 ‘봉암사 결사(結社)’ 현장을 보여주면서 역대 선사들의 가행정진 일화를 자세히 들려줬다.

먼저 장좌불와로 유명한 해인사 원당암의 혜암 스님의 일화였다. “그 노장님은 어느 날 이렇게 선언하셨답니다. ‘이전까지 밥 도둑놈(몸뚱이)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는데 오늘부터는 네 말을 듣지 않겠다. 여태껏 줄 것 다 주었으니까 더 이상 먹을 것 달라고 하지 마라’고 자신에게 일갈하셨다는 거예요.” 혜암 노장을 가까이 모셔본 도범당은 말끝에 “몸집이 작으셔서 다른 스님들보다 적게 드셔도 버티는 힘이 강하셨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누워서 잠을 주무시지 않다 보니까 조는 일이 잦았어요. 어느 날은 심하게 졸다가 봉당 밖으로 나가떨어져서 대중들을 놀라게 했지요.“

일타 스님과 각별한 사이였던 성수 스님(경남 산청 해동선원)의 용맹심도 전해 주었다.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어느 생을 기다려 이 몸을 제도할까, 수행의 가장 큰 장애는 해태(게으름)와 수마(睡魔)야, 수마! 잠귀신이 자는 것이지 눈이 자는 것이 아니니 잠귀신에게 항복 받으면 된다’고 성수 스님은 늘 말씀하셨죠. 노장께서 한창 선열(禪悅)이 올랐을 때는 마음이 급해서 ‘6개월 동안 앉지도 않고 서서 밥을 먹고 잠을 자지 않아도 끄떡없었다’고 불퇴전의 용맹심을 토로하시기도 했어요.”

 

지안 스님과 호진 스님의 《성지에서 쓴 편지》

2006년 11월, 조계종 역경위원장을 역임한 뒤 승가대학원장으로 재임 중인 지안 스님이 영천 은해사에서 제자들에게 강맥(講脈)을 전수하는 전강법회가 열렸다. 우리 부부는 지안 스님이 회주로 있는 통도사 반야암(1999년 창건) 가족법회에 개원 당시부터 매월 참석하고 있었다. 배 처사가 부산 구도회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상임법사였던 지안 스님의 반야암 신도로 발전한 것이다. 반야암은 튼실한 거사회(회장 김성태)로 매월 가족법회를 열며 ‘반야불교문화원’을 운영하고 ‘반야학술상’을 시상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전강법회에는 증명법사로 참석한 월운 스님을 위시해 은해사 주지 법타 스님 등 사부대중 800여 명이 참석했다.

특기할 일은 불교신문사 재직 시절 이후 오랜만에 뵙는 정각사 광우 스님을 만난 일이었다. 다가가 인사를 드리려니 그 곁을 떠나지 않는 웬 스님이 한 분 있었다.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기림사 동암의 호진 스님(동국대 교수)이라고 했다. ‘비구 2인이 프랑스 수도원으로 유학한 일’은 당시 교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나는 그 유학생들의 후일담이 늘 궁금했다. 승려와 가톨릭 수도원의 이질적 만남은 나의 작가적 호기심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마침 호진 스님은 지안 스님과는 절친이었고 나와는 동기동창이어서 학창 시절에 얽힌 교우와 학내 사건 등에 두루 통했다. 호진 스님이 쓴 〈나의 프랑스 유학기〉가 게재된 《석림》 40호를 빌려줘, 가톨릭 수도원에서의 생활과 소르본대학에서의 박사학위 취득 과정을 감동적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언어의 소통이 자유롭지 않은 타국에서 경제문제마저 자체 해결하며 동분서주한 10년간의 고충이 그야말로 필설의 지면 밖으로 뻗쳐 나오는 듯해 가슴이 먹먹했다.

2008년, 호진 스님은 ‘인간 부처의 원형을 찾겠다’면서 인도로 출발했다. 2,500여 년 전 붓다가 걸었던 1,600리 길을 순례하며 ‘붓다는 누구인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를 새로이 성찰하겠다고 했다. 호진 스님은 보드가야에서 쿠시나가라에 이르기까지 수백㎞의 길을 몸소 걸으며 길 위에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그때그때 편지로 도반인 지안 스님에게 알려왔다. 지안 스님으로부터 그 편지를 건네받아 읽어보니 우리 불자들 모두가 읽으면 환희심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꽤 까다로운 호진 스님께는 나중에 질책받기로 하고 〈불교신문〉의 이성수 기자에게 연락, 지안, 호진 두 스님의 편지를 지상에 공개했다. 부처를 닮기 위해 일생을 바친 두 도반 스님 간의 진솔한 문답 편지는 교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켜 이후 《성지에서 쓴 편지》라는 명저로 출간, 베스트셀러가 됐다.

 

연극 〈자물쇠는 뻐꾸기 소리에 맡겼다〉의 회향

가수의 운명은 첫 히트곡, 배우의 일생은 자신의 첫 출세작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속설이 있다. 변명 같지만, 불자로서 첫 발심이 문자였던 탓인지 나의 신행 생활은 모태 신심인 불자들에 비하여 독경에서도 염불 주력에서도 백팔배나 좌선 정진에서도 진척이 없었다.

그럼에도 앞서 기술한 스님들을 포함한 청담 스님, 자운 스님, 경봉 스님 등 당대 큰스님들을 모두 친견하고 거기에 개인적으로 외호와 적공을 입으며 불법을 배웠다. 불은(佛恩)을 갚는 길은 위대한 생명존중의 불교, 인간뿐만 아니라 사물의 본질에 이르기까지 적확하면서도 투명하게 밝힌 ‘지혜의 불교’를 널리 알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부산일보〉 12년, 〈불교신문〉 18년간 불법의 보편성과 불연의 지중함을 알리는 칼럼을 쓰는 일에 매진했다.

작품 활동에서도 원효 스님의 득도 이야기인 〈환화여, 환화여〉(2007년, 부산문화회관 공연)를 비롯, 불교와 관련된 희곡을 여러 편 썼다. 그 가운데도 〈자물쇠는 뻐꾸기 소리에 맡겼다〉(2018년, 한결아트홀 공연)는 백척간두에 서서 치열하게 정진하는 참구자(參究者)들의 구도열과 열망을 주제로 한 나의 회심작이었다. 〈자물쇠는 뻐꾸기 소리……〉 공연은 지안 스님을 위시한 반야암 식구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안국선원(수불 스님), 대광명사(목종 스님), 홍법사(심산 스님) 등의 신도와 일반 관객들의 커다란 호응 속에 대성공을 거뒀다. 호진 스님은 ‘공연에 부쳐’라는 멋진 격려사와 함께 경주에서 10여 명의 관객을 대동, 축하해주었다.

앞으로도 “칠보(七寶)의 탑은 결국 무너져 먼지가 되나/ 일념의 청정한 마음은 정각(正覺)을 이루네”라는 문수보살의 게송을 마음에 담고 총기(聰氣)가 남아 있는 한 문자포교를 계속하여 불은에 보답하고 싶다.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세음보살님!

큰 수술 자국은 사주팔자에 나온다고 한다. 일주일 이상 입원했던 대수술이 두 번, 찰과상으로 면상에 봉합 수술을 두 번 받았다. 첫 번째 찰과상은 1980년대 초, 동국대에서 뒤늦게 석사과정을 밟을 때 입었다. 친구와 차를 타고 가다가 서울 외곽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얼굴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친구는 사고 뒤처리를 하느라 현장을 지켰고 나 혼자 병원을 찾아 헤맸다. 10여 분 만에 낯선 의사 앞에 얼굴을 내맡기고 누웠는데 너무나 불안했다. 그래서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세음보살님! 당신의 천의무봉(天衣無縫) 솜씨로 꿰매주소서.’ 하고 계속 빌었다.

그 이후 수술대에 누울 때마다 불보살의 가피를 빌었다. 덕분에 4번의 수술 모두가 후유증이 최소화되었고, 나는 이것을 위신력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가 가장 외롭고 힘들 때 불보살님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자랑스러운 일인가!

대련화 합장. ■

 

김숙현 sukhyeon9626@daum.net
극작가. 동국대와 경남대에서 석사와 박사학위(국어국문학) 취득. 경성대, 부경대, 경남대 강사 역임. 부산일보 논설위원, 부산국제영화제(BIFF) 자문위원 등 역임. 주요 저서로 희곡집 《외줄위의 분장사》 《바이올렛 왈츠》 《새는 동굴에서 울지 않는다》 《자물쇠는 뻐꾸기 소리에 맡겼다》와 에세이집 《가슴에 폭탄을 품은 여자들》 등이 있음. 한국희곡문학상, 현대문학상, 봉생문화상, 올빛상, 이주홍문학상 등 수상. 현재 불교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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