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중국불교 부흥에 평생을 바치다

1. 서언(緖言)

양문회(楊文會)1837~1911
양문회(楊文會)1837~1911

청말(淸末)에 이르러 중국은 흔히 “삼천 년 이래 없었던 변국(三千年未有之變局)”이라고 표현되는 격동의 시절을 맞게 된다. 아편전쟁(1840~1842) 이후, 중국은 서구 열강의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한 무력 앞에 무기력함을 철저하게 느끼고,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자강운동(自强運動)’을 전개하였다. 서구 열강의 힘을 그들이 지닌 근대학문으로 파악하여 그를 서학(西學)으로 규정하고, 그에 대한 대응을 중국의 전통사상 속에서 찾아내고자 노력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국인들은 이미 민족종교로 자리 잡은 불교로부터 ‘자강’의 근거를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중국불교는 송대(宋代)로부터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여 청대의 철저한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쇠락한 상황이었고, 청말에 발생한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1851~1864)은 불교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태평천국의 교도들은 지나치는 곳마다 불교 사찰과 도교 도관 및 성황당 등의 모든 건물을 불사르고, 상(像)들을 부수었으며, 또한 불교와 관련된 수많은 전적을 태워버렸다. 태평천국의 난은 이미 쇠락한 불교에 더욱 심각한 피해를 주었다고 하겠다.

이 난세에 불교를 다시 부흥시키고자 평생을 바친 사람이 바로 인산(仁山) 양문회(楊文會, 1837~1911)이다. 근대에 유명한 개혁사상가인 양계초(梁啟超)가 《청대학술개론(淸代學術槪論)》에서 “만청(晩淸) 시기에 이른바 신학가(新學家)라고 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불교학과 관계가 있었으며, 불교에 대한 참다운 신앙자들은 양문회에 귀의하여 따랐다.”라고 평했듯이 근대 중국불교에서 양문회의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앞에서 언급한 서학에 대항할 논리를 불교에서 찾게 되는 과정과 민족종교로서 위상을 정립할 수 있었던 것도 실제로 양문회의 영향이 컸다고 평가할 수 있다.

양문회가 불교에 대하여 이룩한 업적은 간략하게 불교 전적의 각인(刻印)과 보급을 담당하는 ‘금릉각경처(金陵刻經處)’의 설립과 운영, 금릉각경처의 내부에 개설하여 교의에 대한 체계적인 강론을 담당하였던 ‘기원정사(祇園精舍)’와 ‘불학연구회(佛學研究會)’ 개설, 다양한 국제교류의 실행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양문회의 노력으로 중국에 근대불교학이 흥기하였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송대 이후 사상계에서 밀려난 불교가 근대에 이르러 시대사조를 주도하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양문회를 ‘근대불교의 아버지’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양문회의 생애와 불교사상, 그리고 금릉각경처와 기원정사의 설립과 운영 등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2. 양문회의 생애

양문회는 1837년 11월 16일에 안휘성(安徽省) 석태(石埭)에서 태어났으며, 자(字)는 인산(仁山)이다. 그의 부친인 양박암(楊樸庵)은 양문회가 태어난 다음 해에 전시(殿試)에 합격하여 관직을 맡아 북경으로 이사하였기 때문에 양문회는 북경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고향의 관습에 따라 3세 때 여섯 살 많은 소(蘇)씨 집안의 딸과 정혼하였는데, 9세 되던 해에 고향으로부터 정혼녀가 천연두에 걸려 얼굴이 곰보가 되었으니 파혼하자는 편지가 왔다. 부친이 양문회에게 의견을 묻자 “저와는 이미 정혼을 하였고, 곰보가 되었는데 누구와 결혼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정혼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11세에 부친은 양문회를 데리고 자신과 같은 해에 과거에 합격하여 우의가 깊은 증국번(曾國藩)을 방문하였는데, 양문회의 자질이 뛰어남을 보고 과거를 준비할 것을 권했으나 양문회는 공명(功名)에 뜻이 없음을 밝혔다. 그러나 증국번은 양문회를 높이 평가하여 이후 반드시 크게 쓰일 인재라고 평가했다. 16세에 양문회는 석태에서 원래 정혼했던 소씨 부인과 결혼하였다. 결혼 이후 태평천국의 교도들이 호남을 거쳐 남경으로 진군하자 양문회 일가는 여러 지방을 피난하다가 결국 항주(杭州)에 정착하였다.

1858년 22세에 양문회는 증국번의 군대에서 사무를 맡았다가 23세에 다시 항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시기에 양문회가 불교에 귀의하게 되는 ‘정연(情緣)’을 만난다. 양문회는 이웃에 사는, 시문(詩文)에 능통하고 서로 마음이 통하는 여인을 만나게 되어, 그녀를 둘째 부인으로 삼으려 하였다. 당시는 여러 부인을 두어도 허물이 아니었지만, 집안에서는 마침 소씨 부인이 아들을 낳았다는 이유로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그에 양문회는 모든 일에 회의에 빠져 매일 서호(西湖)를 산책하며 보냈다.

그러다 어느 서점에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발견하여 읽었다. 하지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어 주야로 침식을 잊은 채 반복하여 읽기를 거듭하다가 어느 날 홀연히 요지(要旨)를 깨달았다. 이후 양문회는 주변의 사찰들을 다니며 경전을 찾고 불법을 물었지만, 다른 불서도 구할 수 없었고 법을 물을 만한 승려나 인물들을 만날 수 없었다. 이는 청대에 철저한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중국불교가 쇠락했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862년, 양문회 26세에 집안이 안휘성 안경(安慶)으로 이주하였으며, 부친이 병을 얻어 세상을 등졌다. 그다음 해 27세에 고향인 석태로 이주하여 부친을 이장하였는데, 이 시기에 양문회는 몇 년간 오로지 불교를 연구하였다. 그러나 점차 집안의 경제 상황이 어려워졌는데, 마침 증국번이 다시 불러 미곡국(米谷局)의 사무를 맡겼다.

1864년 증국번이 태평교도들이 점령한 남경을 수복하고, 훼손된 남경성의 수리를 양문회에게 맡기게 되어 남경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양문회가 토목과 건축에 대하여 상당히 해박한 지식과 기술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홍장(李鴻章)이 남경에 금릉기기국(金陵機器局)을 건설하였는데, 양문회가 그 공사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당시 양문회는 동료 가운데 불교를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던 왕매숙(王梅叔)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의 소개로 정학천(鄭學川), 위강기(魏剛己), 조경초(曹鏡初) 등의 거사들과 함께 불교를 연구하였다.

이 시기에 양문회는 중요한 인물을 만났는데, 바로 위원(魏源, 1794~1875)이다. 위원의 호는 묵심(黙深)으로 공자진(龔自珍, 1792~1841)과 함께 공양학파(公羊學派)에 속하며, 모두 팽제청(彭際淸, 이름은 紹升, 1740~1796)의 법을 계승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청대의 불교는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철저하게 쇠락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를 지킨 이들은 오히려 이학가(理學家)들이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팽제청이다. 이에 대하여 양계초의 《청대학술개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논했다.

만청(晩淸) 사상가(思想家)들에 하나의 복류(伏流)가 있으니, 바로 불학(佛學)이다. 청대 전기(前期)의 불학은 극히 쇠락하여 고승(高僧)들도 이미 많지 않았으며, 혹 있다고 해도 사상계(思想界)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 건륭(乾隆) 시기에 이르러, 바로 팽소승(彭紹升: 彭際淸), 라유고(羅有高)가 있어 신앙이 독실하였다. 팽소승은 일찍이 대진(戴震)과 반복하여 논쟁하였다. 그 후 공자진(龔自珍)이 팽소승의 불학을 계승하였고, 만년에 보살계를 받았다. 위원(魏源) 또한 그러하여 만년에 보살계를 받았다.

여기에서 양계초는 공자진이나 위원이 모두 팽제청의 법을 계승하였다고 했는데, 실제로 이들은 팽제청의 제자인 강원(江沅, 호는 鐵君, 1735~1815)으로부터 법을 계승하였다. 팽제청의 사상은 불교와 이학을 결합시켰으며, 불교사상으로는 운서주굉(雲棲袾宏)의 영향을 받아 화엄과 정토를 융합하는 특징을 보이며, 그를 중심으로 조사선을 포용하고 있다.

또한 팽제청은 《거사전(居士傳)》과 《선여인전(善女人傳)》을 찬술했는데, 이는 청대의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출가’가 상당히 제한적이었고, 또한 그 활동에서도 결코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불법을 펼침에 오히려 거사들이 나서야 한다는 ‘거사불교’를 제창하는 특징을 보였다.

이러한 사상은 그대로 공자진과 위원에게 전해졌고, 이는 다시 양문회에게 전해졌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중국의 근대에서는 수없이 많은 ‘거사림(居士林)’과 같은 거사들의 단체가 출현하여 ‘거사불교’의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는데, 이는 바로 팽제청으로부터 위원을 거쳐 양문회로 계승된 사상적 경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1866년 양문회는 왕매숙, 정학천, 위강기, 조경초 등 10여 인을 규합하여 “말법세계를 위해 온전한 경전을 유통시켜 널리 중생을 제도하자.”라는 의견을 모아 ‘금릉각경처(金陵刻經處)’를 설립했다. 이 금릉각경처에서 최초로 판각한 것은 바로 위원이 편집한 《정토사경(淨土四經)》이며, 이로부터 위원에 대한 양문회의 존중을 짐작할 수 있다.

1873년부터 양문회는 모든 직장을 사직하는 등, 세상일을 등지고 오로지 불교 연구에 매진하였다. 1874년부터 홀로 강소성과 절강성, 호남성 등의 사찰들을 돌며 불전을 수집하였으나 경비가 떨어져 1875년에 다시 사찰의 건축과 토목공사 등을 맡으며 불전을 수집하였다.

1878년 7월에 증국번의 아들 증기택(曾紀澤)이 영국과 프랑스의 대사로 임명되자 양문회에게 함께 갈 것을 요청해 3년간 유럽에 머물렀다. 이 시기에 양문회는 당시 옥스퍼드대학에 유학하고 있었던 난조분유(南條文雄)를 만나게 되었고, 이때부터 입적할 때까지 30여 년간 관계를 지속하게 되었다. 그를 통해 일본에서 발간된 《축각대장경(縮刻大藏經)》과 중국에서 사라졌던 《중론소(中論疏)》 《백론소(百論疏)》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1888년) 등의 전적 300여 종과 《대일본속장경(大日本續藏經)》(1905년) 등을 구할 수 있었다.

1880년 증기택이 러시아 대사로 임명되어 함께 가기를 청했으나 양문회는 귀국하여 금릉각경처의 일에 전념하였다. 1886년에는 유지전(劉芝田)이 영국 대사로 임명되어 함께 갈 것을 청하자 친분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영국에 가서 4년간 머물렀다. 1890년에 귀국한 이후에는 다시 어떤 일도 맡지 않고 오로지 금릉각경처 일과 불교 연구에 매진하였다.

1897년 남경 연령항(延齡巷)에 저택을 구입하여 모든 가족을 데리고 이사한 다음 그의 저택을 금릉각경처의 작업장으로 헌납하였다. 낮에는 각경(刻經)의 과정을 감독하고, 밤에는 불교 공부에 몰두하였으며, 교감과 각인(刻印) 이외에 경전을 읽거나 염불(唸佛)을 하고, 혹은 정좌(靜坐)하여 작관(作觀)하느라 자주 밤을 새웠다. 이곳의 금릉각경처에서는 현재에도 전통적인 방식으로 판각과 인쇄를 하여 불서를 유통하고 있다.

양문회는 불교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907년 가을 금릉각경처에 기원정사(祗洹精舍)를 개설하고, 스스로 강석(講席)을 맡아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 당시 기원정사에서 학습한 승려들은 태허(太虛), 인산(仁山), 개오(開悟), 지광(智光), 관동(觀同) 등이었고, 거사로는 구허명(邱虛明), 사무량(謝無量), 구양경무(歐陽竟無), 매광희(梅光羲) 등이다. 바로 이들이 후에 중국의 근대불교를 이끄는 주역이 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기원정사는 2년을 못 채우고 경비 부족으로 1909년에 문을 닫게 되었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1910년 10월 다시 금릉각경처에 ‘불학연구회(佛學硏究會)’를 설립하여 불교연구와 강학을 지속하였다. 당시 양문회는 74세의 노령이었지만, 불학연구회 회장을 맡아 경전을 강의하였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되자 많은 이들이 모여 금릉각경처의 후사를 논의하는 회의를 개최하였는데, 그 회의가 진행 중인 1911년 10월 8일 오후 5시에 입적하였다. 이틀 후에 무창(武昌)으로부터 중국의 봉건왕조를 종결짓는 ‘신해혁명(辛亥革命)’이 발발하였는데, 이 배후에는 바로 양문회로부터 비롯된 불교를 바탕으로 한 ‘혁명’ 사상이 작용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3. 양문회의 불교사상과 민족불교

양문회의 불교사상에 대하여 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양계초는 《청대학술개론》에서 “양문회는 법상(法相) · 화엄(華嚴) 양종을 깊이 통달하였으며, 정토교(淨土教)를 공부하였다.”라고 하고, 또한 “사상에 있어서는 《대승기신론》을 추숭(推崇)하였고, 실천에 있어서는 정토에 귀심(歸心)하였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는 바로 양문회가 《대승기신론》을 통하여 불교에 귀의하게 된 개인적 경험과 더불어 팽제청과 위원을 계승하였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특히 양문회는 《대승기신론》을 중시하였는데, “대장경의 교전(敎典)은 권질(卷帙)이 방대하고 번잡하지만, 그 간요(簡要)하고 정심(精深)한 것을 구한다면 《기신론》만 한 것이 없다.”라고 했다. 《대승기신론》을 “으뜸 되는 가르침을 원융하여 불교를 배우는 요전(要典)”이고, “불교를 배우는 강종(綱宗)”이며, 그러므로 “항상 《대승기신론》을 스승으로 삼는다.”라고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다.

양문회는 난조분유를 만나자 《기신론》 범본(梵本)의 존재를 물었는데, 그 부재를 알고 크게 실망하였다. 만약 《기신론》의 범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필시 위서(僞書)일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의 각경(刻經) 원칙 가운데 하나인 이른바 ‘삼불각(三不刻)’ 가운데 “의서(疑書)나 위서(僞書)는 판각하지 않는다(有疑僞者不刻)”는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속적으로 《기신론》과 그와 관련된 전적을 출판하였고, 또한 1894년, 상해에서 영국인 선교사 티모시 리처드(Timothy Richard, 1845~1919)와 함께 《대승기신론》을 영역하여 중국불교를 세계에 알리고자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양문회가 품은 민족불교의 경향을 추론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양문회는 여러 가지 경로로 《대승기신론》의 범본이 없음을 결국 인정하게 되었고, 그것이 중국 찬술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오히려 중국불교의 특성으로 평가하게 되었으며, 그를 부각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더욱이 그는 도리어 역대 중국에서 한역되어 완성된 대장경을 다시 범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폈다.

이는 만년에 ‘마명종(馬鳴宗)’의 건립을 선포하는 데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 양문회는 이소운(李小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명종’은 “《대승기신론》을 근본으로 삼고, 《대종지현문본론(大宗地玄文本論)》 가운데 ‘오위판교(五位判教)’를 의지하여 석가여래의 대법(大法)을 총괄하니, 부족함도 남음도 없다.”라고 하여, ‘마명종’이 “참으로 폐단을 구하고 치우침을 보충할 핵심적인 도[要道]”라고 말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대승기신론》과 《대종지현문본론》의 저자는 바로 ‘마명’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양문회가 ‘마명종’ 건립을 주장한 것에는 바로 중국불교의 핵심은 철저하게 《대승기신론》으로부터 발현된 것이라는 깊은 인식이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양문회는 바로 ‘민족불교’의 정립을 꿈꾸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의 서구 열강에 의한 침탈에 대응하기 위한 다양한 모색의 과정에서 ‘불교’를 재발견하게 되었고, 또한 그렇게 발견된 불교의 성격을 ‘민족주의’의 경향으로 이끌었던 흔적이 상당히 보인다. 이러한 과정에는 바로 양문회가 제창한 민족불교가 강하게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양문회의 영향을 받았던 채원배(蔡元培)는 《불교호국론(佛敎護國論)》(1900년)을 찬술했으며, 이후 많은 지식인들은 불교를 통한 ‘호국론’을 제창하였는데, 그 근간에는 바로 ‘민족불교’ 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4. 금릉각경처 설립과 기원정사

양문회의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금릉각경처의 설립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소실된 불전의 복구와 보급이 불교를 살리는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양인산거사사략(楊仁山居士事略)》에 따르면, 그의 생전에 금릉각경처에서 “백여만 권의 경전을 유통시켰고, 십여만 장의 불상을 인쇄하였다.”라고 한다. 1866년 금릉각경처를 창건한 이래 지속적으로 판각을 진행하여 얻어진 결과였다.

양문회가 금릉각경처를 설립한 목적을 그의 《유저(遺著)》에서 다음과 같이 논한다.

본인은 40여 년 동안 세상일을 두절하고, 각경과 유통에 전력을 다하여 남몰래 법을 널리 펴고, 중생들에게 이익 되게 함을 원(願)으로 하였다. 지금 이미 늙었으나 오히려 심원(心願) 가운데 아직 마치지 못한 일이 남아 있다. …… 본인의 뜻한 원은 금릉각경처의 판각이 완전한 대장경으로 이루어지고 대조, 교열과 인쇄 등이 모두 정밀하게 이루어져 오류에 이르지 않기를 삼가 바란다.

이로부터 양문회가 금릉각경처를 통하여 이루고 싶었던 것은 바로 ‘금릉각경처의 판각으로 완전한 대장경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분명한 ‘편장(編藏)’의 원칙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 주의를 끄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이른바 ‘삼불각(三不刻)’이다. 즉, “의(疑) · 위(僞)로 보이는 것은 판각하지 않음, 문장의 뜻이 얕고 속된 것은 판각하지 않음, 란단(亂壇)의 책은 판각하지 않음.”이다.

이는 각경의 대상에 대하여 엄정한 판정을 거쳐 선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양문회는 역사 속에서 다양한 전란으로 산실된 전적을 구하기 위하여 상당히 노력하였음을 그의 《유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일본의 《속장경(續藏經)》 편찬과 관련하여 중국에서 이미 사라진 전적들이 다시 나타나게 되자 그와 관련한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고, 또한 실천한다.

양문회는 일본과의 교류 과정에서 일본 《속장경》의 편집에도 어느 정도 관여를 하였고, 또한 그에 자극을 받아 일본과는 차별성이 있는 약 3천 권에 달하는 《대장집요(大藏輯要)》를 편찬하고자 기획하였다. 그는 이를 위하여 《대장집요서례(大藏輯要敘例)》를 찬술하여 유목(類目)을 정하였지만, 그의 생전에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그의 제자인 구양경무(歐陽竟無)가 금릉각경처의 사무를 주관하면서 《대장집요》의 기초로부터 새롭게 편찬한 《장요(藏要)》 3집을 출판하였다.

양문회의 또 다른 중요한 업적은 바로 본격적인 불교교육을 실행했다는 것이다. 양문회는 “근세 이래, 승도(僧徒)는 고루(固陋)에 빠져 있어 배움도 없고 수행도 없으니, 불법이 중국에 전해온 후, 가장 타락한 시기가 되었다.”라고 당시 불교계를 진단하고, “제방(諸方)의 명찰들에 인재를 키울 학당이 없어 날로 불교가 추락하고 있다.”라고 하여 불교 위기의 원인을 교육의 부재로 보았다. 또한 직접적으로 “불교의 진흥을 바란다면, 오직 석씨학당(釋氏學堂)을 개설하여야만이 비로소 전기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오직 교육만을 통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인식으로 1907년 가을 금릉각경처에 기원정사(祗洹精舍)를 개설하고, 스스로 강석(講席)을 맡아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비록 경비의 부족으로 2년을 채우지 못했지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때 기원정사에 참여하거나 관여한 이들이 중국 근대불교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태허법사는 이후 ‘인간불교(人間佛敎)’를 제창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불교의 방향을 획정하였다.

양문회는 1910년 10월 다시 ‘불학연구회(佛學硏究會)’를 설립하여 회장을 맡아 경전을 강의하다가 입적하였다. 이러한 양문회의 불교교육에 대한 발원은 양문회를 계승하여 금릉각경처를 운영한 구양경무에 의한 지나내학원(支那內學院) 설립(1922년)으로 이어진다. 지나내학원은 단순히 금릉각경처에 소속된 단체가 아니라 국가의 인가를 받은 정식 교육기관으로, 중국 역사에 나타난 최초의 불교대학이다. 비록 중국공산당이 사회주의국가를 세우고, 이후 1953년에 스스로 폐원하였지만, 30년 동안 지나내학원에서 배출한 인재들이 근현대의 중국 불교학을 주도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5. 결어

이상으로 간략하게 양문회의 생애와 불교사상, 그리고 금릉각경처와 기원정사 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사실상 양문회를 언급하지 않고는 중국의 근대와 현대불교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가 입적한 이후에 심증식(沈曾植)이 찬술한 《양거사탑명(楊居士塔銘)》에는 “말법(末法)이 창망(滄茫)하고 종풍(宗風)이 마르고 끊어진 시대를 맞이하여 떨치고 일어나 몸은 도에 맡기고, 논사(論師) · 법장(法將) · 장주(藏主) · 경방(經坊)의 네 가지 일을 과감하게 겸하고, 삶을 마칠 때까지 게으르지 않고 정성을 다하였다.”라고 평가했다. 그의 업적을 가장 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이 문장을 통해 양문회의 일생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즉, ‘논사(論師)’로서 그는 끊임없이 불교를 연구하고 찬술하였으며, ‘법장(法將)’으로서 당시의 추락한 불교계를 개혁하였고, 또한 기원정사와 불학연구회를 개설하여 친히 강의를 담당하였으며, ‘장주(藏主) · 경방(經坊)’으로서 금릉각경처를 세워 수많은 불전(佛典)을 편집하여 각경(刻經)하고, 출판하여 유포시켰다.

이러한 양문회의 노력은 쇠퇴한 중국불교를 다시 부흥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위기에 처한 근대 중국의 상황을 불교의 사상과 원력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새로운 사조를 배태하게 하였다. 그것이 바로 ‘민족불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후인들은 그에게 ‘근대불교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부여하게 된다.

사상사의 측면에서 본다면, 송대로부터 사상계에서 밀려난 불교가 근대 시기에 서학에 대항적 사상으로 중시를 받고 시대사조를 주도했으며, 불교를 통하여 ‘혁명’ 사상을 배태시켰다. 최종적으로 ‘신해혁명’이 발생하여 2천 년이 넘게 지배해온 봉건왕조의 체제를 종식시킬 수 있었던 배후에는 바로 양문회가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

 

김진무 kimjinmoo@naver.com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동산법문의 선사상 연구〉로 석사학위를, 중국 남경(南京)대학 철학과에서 〈불학과 현학의 관계 연구(佛學與玄學關係硏究)〉(中文)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부교수 역임. 저서로 《중국불교거사들》 《중국불교사상사》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 《불교와 유학》 《선학과 현학》 《도해 심경(心經)》 《도해 금강경》 등이 있다. 현재 원광대, 동국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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