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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불교학자] 7.리즈 데이비스(T.W. Rhys Davids)
빨리경전 번역으로 초기불교 연구에 공헌
[84호] 2020년 12월 01일 (화) 황순일 sihwang@dongguk.edu
   
《PTS 저널》에 실린 리즈 데이비스 사

리즈 데이비스(T.W. Rhys Davids)는 1843년 에섹스(Essex) 콜체스터(Colchester)에 정착한 웨일스(Wales) 출신의 회중교회 목사(Congregational minister) 토머스 윌리엄 데이비스(T. William Davids)와 런던의 법무관(solicitor)의 딸인 루이자 윈터(Louisa Winter) 사이에서 태어났다. 리즈 데이비스는 법무관이 되기 위해 브라이턴(Brighton)에서 공부하던 중, 인도 파견공무원(Indian Civil Service)이 되기로 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독일의 영역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폴란드에 반환된 슐레지엔(Schlesien) 주의 수도 브레슬라우(Breslau)로 향했다. 당시 독일은 영국 학생들이 영어 개인교사를 하면서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던 기회의 땅이었다. 브레슬라우에는 유명한 산스끄리뜨(Sanskrit) 학자인 스텐즐러(A.F. Stenzler)가 있었고 리즈 데이비스는 그의 수하에서 문헌학적 훈련을 받고 범어 빨리어 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1863년 브레슬라우대학을 졸업한 리즈 데이비스는 인도 파견공무원 시험에 응시했고 세일론 파견공무원(Ceylon Civil Service)으로 채용되었다. 불과 21세의 나이에 콜롬보(Colombo)로 파견된 리즈 데이비스는 지역 언어인 싱할라어(Sinhala)와 타밀어(Tamil)를 익히고 총독 비서와 지방 순회판사 등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리즈 데이비스가 골(Galla) 지역의 지방 순회판사로 있을 때, 그는 마을의 불교사원과 관련된 법률사건을 맞게 되었다. 이때 스님들이 법원에 제시한 문서는 싱할라 문자로 기록된 빨리어(Pali) 율장(Vinaya)의 일부분이었다. 리즈 데이비스는 이 사건에 깊은 관심을 두게 되었고 자신의 산스끄리뜨어 능력을 활용해서 빨리어를 번역하고 이 사건을 해결하려 했다. 그는 당시 빨리어 학승으로 명망이 높았던 야뜨라물레 운난세(Yatramulle Unnanse)의 도움을 받게 되었고 이 사건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면서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리즈 데이비스는 1881년 있었던 히벗 강좌(Hibbert Lectures)에서 자신을 처음으로 빨리어와 불교의 세계로 이끌었던 이 스승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처음 나를 찾아왔을 때, 그는 지병으로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불치병을 앓고 있었으며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가 저명한 빨리어 학자이지만, 지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힘든 상태였지만 그가 한 외국인을 가르치기 위해 사원을 떠나 나를 찾아준 것에 대해서 아직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깊은 눈은 신비로운 광채로 빛나고 있었으며, 빨리어에 대한 질문에 그는 끊임없이 불교적인 내용을 첨가하여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경전 게송을 외우고 있었고, 불교의 윤리적 가르침에 정통했습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기쁘게 경청했습니다. 그에게는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는 신비한 매력이 있었으며 나의 마음은 그에 대한 존경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리즈 데이비스는 이를 계기로 빨리어와 불교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식민지 파견공무원으로서 남는 시간을 학문적 연구에 투자했다. 이를 통해 그는 당대의 학승인 왓까두웨 수부띠(Waskaduve Subhuti)와 인연을 맺고 계속 이어갔다. 리즈 데이비스의 이러한 재능은 세일론 총독에게도 알려졌고, 1868년 스리랑카 고대 왕조의 수도인 아누라다뿌라(Anuradhapura)의 고고학 조사관이 되었다. 그는 유적지를 정비하고 사진을 찍는 작업을 수행하면서 고대 유적지의 금석문을 수집하고 연구하여 《왕립아시아학회지(The Journal of the Royal Asiatic Society)》에 기고하면서 동양학자로서도 알려지게 된다.

하지만 리즈 데이비스의 세일론 파견공무원 생활은 1872년경에 비극적으로 끝났다. 그는 자신의 상관과 끊임없는 갈등을 겪었으며, 담당 지역 사람들에게 과도한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는 진정이 이어졌다. 그는 권력 남용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되었고 결국 해임되었다. 영국으로 되돌아온 리즈 데이비스는 법률 공부를 시작했고 1877년에 법정 변호사(barrister)의 자격을 얻어 법률 판결기관인 미들 템플(Middle Temple)에 들어갔다. 

   
리즈 데이비스(1843~1923)와 캐롤라인 리즈 데이비스

변호사로서 리즈 데이비스는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몇몇 소소한 사건을 담당한 기록만이 남아 있다. 사실 리즈 데이비스의 관심은 세일론 불교로 기울어 있었고 《왕립아시아학회지》에 기고하며 저술작업에 몰두했다. 1878년 리즈 데이비스는 기독교전도협회(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의 의뢰를 받아 《불교(Buddhism)》란 저서를 출판했고 이 책은 1914년까지 23판을 찍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리즈 데이비스는 앞에서 언급한 1881년 히벗 강좌에서 빨리 불교문헌을 편집, 번역, 그리고 출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빨리경전협회(Pali Text Society)를 설립하려는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초기불교의 문헌들이 우리에게 전해져 있다. 세계사에서 유일하게 기독교에 필적할 만한 종교운동의 전체적인 기록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문헌들의 출판은 웨다(Veda)의 출판이 종교 및 종교사 연구에 공헌한 것에 상응하는 중요한 결과를 가져다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리즈 데이비스는 초기영어문헌협회(Early English Text Society)의 예를 따라서 빨리어 경전, 논서, 주석서, 그리고 역사서를 포함한 대부분의 빨리어 문헌들을 모으고, 편집하여 로마자(Roman sc-ripts)와 특수문자를 조합한 형태로 출판하고 각각의 출판물에 대한 영어 번역작업을 진행하는 빨리경전협회를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그리고 미국 동양학자들의 지지를 받았고, 유럽과 미국의 도서관에 흩어져 있는 싱할라 문자(Sinhalese scripts)로 기록된 필사본들과 세일론 섬에 무수하게 남아있는 필사본들에 관한 연구와 조사에 착수할 수 있었다. 1882년부터 1904년까지 리즈 데이비스의 공식적인 타이틀은 런던대학 유니버시티칼리지(UCL)의 빨리어 및 불교문헌 교수였다. 비록 타이틀은 교수였지만 강사료 이외에 정해진 봉급을 받는 자리가 아니어서 그는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있었다. 그는 왕립아시아학회(Royal Asitic Society)와의 인연을 이어갔으며 1887년에 총무(secretary)로 선출되면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되었다. 

리즈 데이비스에게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정치인으로서의 활동이 있었다. 사실 그는 자유주의 정치인(Liberal Politics)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오전에 국가 자유주의 클럽(National Liberal Club)에서 자유민주당 당원들과 친분을 쌓고, 오후에 왕립아시아학회에서 동양학자들과 교류하며 식민지 시대 인도학과 불교학 연구를 이끌었다. 이 덕분에 그는 식민지에서의 봉사 기간과 나이가 충분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1894년부터 매년 거액의 국가연금(Civil Pension)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리즈 데이비스는 자신의 제자이자 비서였던 캐롤라인 오거스타 폴리(Caroline Augusta Foley)와 결혼하여 안정을 찾게 되었고 인도학과 불교학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함께 얻게 되었다. 

리즈 데이비스는 1894~1895년까지 ‘종교의 역사 강좌(American Lectures on The History of Religions)’에 첫 번째 연사로 초청되어 코넬, 브라운, 콜럼비아,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강의했고, 이 강의는 1896년에 《불교, 그 역사와 문헌(Buddhism: Its History and Literature)》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의 표지에서 리즈 데이비스는 스스로를 빨리경전협회 회장, 왕립아시아학회 총무 및 사서, UCL 빨리어 및 불교문헌 교수라고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다.

리즈 데이비스의 이러한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1899년부터 1900년까지 인도를 방문했고 인도 총독이었던 로드 카준(Lord Curzon)을 만나서 인도 문헌 시리즈(Indian Text Series)를 발간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왕립아시아학회의 내부적 반발에 휩싸였고, 20년간 지나친 권력집중에 대한 문제 제기를 받았으며, 1898년 인도 북동부 피프라와(Piprahwa)에서 발굴된 석관과 사리함 및 금석문 위조 의혹에 관련되었다는 의혹을 받게 되었다. 결국 리즈 데이비스는 왕립아시아학회의 총무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1904년 맨체스터(Manchester) 빅토리아(Victoria) 대학의 오웬스(Owens) 칼리지의 비교종교학 교수로서 런던을 떠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출판된 그의 저서 《초기불교(Early Buddhism)》에서 리즈 데이비스는 스스로를 오웬스 칼리지 비교종교학 교수, UCL 빨리어 불교문헌 교수, 영국 학술원 회원 등으로 간략히 밝히고 있다.

리즈 데이비스는 맨체스터(Manchester)로 물러나면서 자신의 부인인 캐롤라인과 함께 빨리경전협회(Pali Text Society)의 일에 열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1901년 빨리경전협회 보고서에서 빨리 삼장(tipiṭaka)을 모으고 편집하여 로마자(Roman scripts)로 출판하는 작업이 거의 끝났으며, 협회 활동의 두 번째 단계로 경전의 번역과 분류 작업을 진행할 때가 다가왔음을 선언했다. 1901년 보고서에 나타난 빨리 삼장의 편집 및 로마자 출판 작업의 진행 상황을 보면, 율장(Vinaya)의 경우 이미 작업이 끝났고 경장(Sutta)도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 대부분 작업이 끝났으며, 논장(Abhidhamma)의 경우 작업이 절반 정도 진행되었다고 했다. 따라서 리즈 데이비스는 빨리어 문헌 번역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도구인 빨리어 사전 작업에 몰입하게 된다.

그와 유사하게 세일론 파견공무원 출신이었던 로버트 실더스(Rovert C. Childers)는 1875년에 최초로 빨리어 사전을 출판했을 정도로 유능한 언어학자였지만, 1876년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나버렸다. 실더스가 작업하던 빨리어 사전의 원고가 그의 사후 리즈 데이비스에게 전해졌고, 그는 40여 년에 걸친 평생의 작업으로서 이 사전 원고를 보완하고 추가하고 교정하고 편집했다. 그가 맨체스터에서 했던 사전 작업은 제자 윌리엄 스테드(William Stede)와 함께 1921년부터 1925년까지 빨리경전협회(Pali Text Society)의 빨리어 사전을 단계적으로 출판하였다. 1923년 《빨리경전협회저널(Journal of the Pali Text Society)》은 〈창립자의 서거(Passing of the Founder)〉란 제목의 간단한 전기와 사진을 통해서 리즈 데이비스의 죽음을 조용히 알리고 있다. 

복잡다단한 삶을 살았던 리즈 데이비스는 현대 불교학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식민지 행정관료로서, 빨리어 및 불교문헌 학자로서, 자유주의 정치인으로서 다양한 삶을 살았던 리즈 데이비스의 공과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과연 우리는 리즈 데이비스의 유산을 극복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리즈 데이비스는 영미권의 불교학이 시작되는 시기에 이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이후 불교학이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양과 서양의 만남에서 동양의 종교에 대한 서구의 일반적인 시각은 동양에 대해 처음 이야기하는 사람의 생각에 크게 의존한다. 초창기 영미권의 불교학자들이 리즈 데이비스와 빨리경전협회를 통해서 스리랑카 불교를 만났다는 것은 리즈 데이비스와 빨리경전협회의 견해가 태국,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를 포함한 전체 남방불교를 대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사실상 불교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직도 남방 테라와다의 빨리 삼장이 붓다의 본래의 가르침에 가깝고 따라서 순수하다는 생각들이 불교계에 널리 퍼져 있다. 마치 서구에서 스즈키(Suzuki)가 선불교를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일본불교에서 소수파에 속하는 임제선(Linzai Zen)이 선불교를 전체를 대변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것과 같다. 

리즈 데이비스 이전에도 스펜스 하디(Spence Hardy), 폴 비간뎃(Paul Bigandet), 아드헤마드 르클레어(Adhémard Leclère)와 같은 식민지 시대 관료와 선교사들이 스리랑카, 미얀만, 캄보디아에서 불교를 접하고 불교에 관해 연구하고 책을 썼다. 이들은 자신들이 있는 지역의 불교인들이 가장 많이 보고 듣는 싱할라어, 미얀마어, 캄보디아어 자료를 번역하고 이를 바탕으로 부처님의 일생을 재구성했다. 이들은 비록 자신들이 처음으로 접한 불교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자신들의 번역만큼은 정확하므로 당시 불교인들의 일반적인 불교와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즉 자신들이 이해하고 있는 불교의 정통성을 자신들이 얼마나 당대의 불교를 잘 대변하는가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리즈 데이비스는 이들과 상당히 달랐다. 

   
《불교, 그 역사와 문헌》(1907)과 《초기불교》(1908) 표제지

리즈 데이비스는 1878년 출판한 《불교(Buddhism)》의 서문에서 스펜스 하디의 Manual of Buddhism에 대해 12세기 이후 싱할라 문헌에 근거한 것으로 너무 광범위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무시했다. 또한, 폴 비간뎃의 The Life or Legend of Gaudama, the Buddha of the Burmese에 대해서도 그 저본이 된 Mallalinkara Woutoo의 저자와 시기를 알 수 없으며 1700년대 중반에 미얀마어로 번역되었을 뿐이고 대부분 내용이 스리랑카에서 전해진 것일 뿐이라며 평가절하하고 있다. 그는 당시 아시아 전역에서 나타나는 불교의 다양성에 관해서 이야기한 후 스리랑카에 남아 있는 빨리어 삼장이야말로 부처님과 그 제자들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자료이며 이를 통해서 진정한 부처님의 일생과 원래적인 불교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 강변하고 있다. 즉 그는 자신이 이해하는 불교의 정통성을 현재 살아 있는 불교를 대변하는 것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스리랑카 빨리 삼장의 정통성에서 찾으려 했다.

앞에서 언급했던 1881년 히벗 강좌의 주제는 불교의 기원과 발전이었다. 여기에서 리즈 데이비스는 불교를 진화론적으로 보았을 때 실패한 종교라고 하며, 불교의 과거는 뛰어났지만 현재는 퇴화하였고, 미래에 종교로서 희망이 없다고 단언했다. 따라서 자신이 빨리경전협회(Pali Text Society)를 설립하고 스리랑카 빨리 삼장을 통해서 불교의 원래적인 모습을 찾아서 보여주겠다며 아시아의 불교인들은 자신을 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에게 빨리경전협회는 불교의 정수를 본래적이고 순수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복원하는 수단이었다. 리즈 데이비스는 빨리경전협회를 통해 ‘가장 뛰어나고 본질적인’ 자료인 빨리 삼장을 영미권에 광범위하게 보급했고, 이를 번역할 수 있도록 빨리어 사전을 만들어서 함께 보급했다.   

근대 불교학계에서 리즈 데이비스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스리랑카불교가 모든 불교를 이해하는 표준이 되었고 대승불교와 티베트불교는 후대에 인간들에 의해서 타락한 것 또는 사실상 불교가 아닌 것으로 취급되었다. 이는 남방불교의 연구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스리랑카불교만이 진정한 불교로서 연구의 대상이 되었고 동남아시아 각 지역에서 발전한 자생적인 불교는 불교가 아닌 것으로 연구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물론 동남아시아 불교의 랑카중심주의(Lanka Centric Attitute)는 리즈 데이비스만의 책임이 아니었다. 1767년 미얀마에 의해 수도 아유타야(Ayutthaya)가 함락된 이후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딱신(Taksin)을 제거하고 오늘날의 태국을 건설한 차끄리(Chakri) 왕가의 라마 1세 통두앙(Thongduang)이 불교를 정화하여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승려들에게 철저하게 빨리 삼장에 의거할 것을 명했고, 이후의 왕들이 이를 충실하게 실천했다. 아직도 동남아시아의 자생적인 빨리어 불교문헌들은 현대 불교학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고, 현재 테라와다불교 교단의 관심에서도 멀어져 있다. 

리즈 데이비스는 또한 근현대 불교인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역사주의(historicism)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불교인들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부처님의 일생에서 전설적이고 신비적인 이야기들을 제거하면 합리적이고 냉철한 인간으로서 붓다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세기 초반 영국에서는 부처님의 완벽한 영국 신사(Perfect English Gentleman)로 표현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리즈 데이비스는 앞에서 언급한 《불교(Buddhism)》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붓다의 전설에 있어서 사실상 역사적인 편견이 있다. 붓다의 일생에서 거짓을 제거하고 사실을 밝힐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것이 전적으로 어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고 답하고 싶다. 이러한 전설을 유통한 사람들은 교활한 위조범들이 아니라 단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우리는 그들이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를 추정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우리는 불교인들이 붓다를 신으로 받아들이고 종교적으로 숭배하며 신통력에 열광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추정해볼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기원전 5세기경 인도 동부 갠지스강 유역에서 어떤 일이 가능하고 어떤 일이 불가능한지도 잘 알고 있다. 학자들이 이 모든 점에 대해서 다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많은 전설적인 부분들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이성을 동원해서 비판적으로 붓다의 일생을 살펴보면 실제로 일어났던 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부분들이 비록 작지만 남을 것이란 점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비록 적지만 불교의 기원을 밝혀줄 역사적인 부분들을 밝히고 허구적인 내용을 포함한 많은 부분을 제거하는 것이 나의 작업이다.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부처님의 모습을 밝히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러한 자의적 판단들 속에서 부처님의 전설을 둘러싼 다양한 배경과 이러한 전설이 오늘날의 불교를 이해하는 데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사라지고 있다. 사실상 부처님의 일생에서 전설적인 부분을 제거하면 역사적인 붓다가 남은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중요성이 제거된 단순한 일화들만이 남을 뿐이고, 이를 통해서는 어떠한 종교적인 영감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현대 불교학자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여전히 있겠지만 여전히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역사주의(historicism)가 팽배해 있으며 스스로를 과학적인 불교학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학자들에 의해서 부처님의 일생이 다양한 방식으로 재단되고 있는 것이 학계의 현실이다. 

   
《불교》(1894) 개정판 표제지

리즈 데이비스는 빨리 삼장을 통해 진정한 부처님의 말씀을 복원하려고 했다. 따라서 그는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에서 일반적으로 수행되는 대부분의 불교의식에 침묵했다. 사실상 리즈 데이비스에 의해 복원된 초기불교의 모습에 불교의식이 설 자리는 없었다. 그는 합리적이고 냉철한 불교를 초기불교라고 칭했고 이것이야말로 이상적인 불교이며 원래적인 불교이고 진정한 불교라고 했다. 사실 여기에서 리즈 데이비스와 교류한 스리랑카의 스님들이 대부분 학승이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리즈 데이비스를 불교와 만나게 해준 야뜨라물레 운난세와 빨리경전협회의 설립에 도움을 준 왓까두웨 수부띠는 당대의 학승들이었다. 이들은 사찰에서 일반 신도를 만나고 이들의 공덕 쌓기(merit making)를 도와주는 분들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을 통해 스리랑카불교를 만난 리즈 데이비스는 스리랑카불교를 불교의식이 없는 불교, 종교라기보다는 철학에 가까운 불교로 인식했다. 사실상 리즈 데이비스에게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의 다양한 불교의식들은 불교의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외래적인 것이며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 불교의 현실은 어떠할까? 스리랑카는 남인도와 끊임없이 교류했고 남인도의 시와계 힌두교와 서로 많은 영향을 받으며 발전했다. 동남아시아에서도 불교는 정령신앙, 힌두교, 대승불교 등과 같은 다양한 배경에서 독특한 불교의식이 발전했다. 스리랑카에서 행하는 불교의식에는 남인도적 요소들이 많이 남아 있으며, 우리는 사실상 이를 통해서 스리랑카불교의 특징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행하는 불교의식 또한 동남아시아적 환경에서 지역화된 동남아시아 불교의 특징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즉 리즈 데이비스에 의해 시작된 불교의식이 제거된 초기불교의 이미지가 오늘날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의 살아 있는 불교가 가지고 있는 진면목을 가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비록 리즈 데이비스가 막스 뮐러(Max Muller)와 같이 심각한 인종적인 편견을 갖지는 않았지만, 빨리어와 불교의 연구를 통해서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공고히 할 수 있다고 홍보하고 다닌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자신이 빨리 삼장을 통해 진짜 불교를 찾아줄 테니 식민지의 국민은 자신을 따르라는 태도를 보였던 것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비판받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빨리경전협회를 설립하고 평생의 노력을 통해 서구의 문헌학에 입각한 불교학의 토대를 마련한 그의 공로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정치인으로서 리즈 데이비스는 왕립아시아학회(Royal Asitic Society)의 활동을 통해 동양학 연구의 진작이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널리 알렸다. 당시 영국 동양학의 상황은 독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영국의 경우 산스끄리뜨 교수직이 단 2개뿐인 것에 비해서 독일에는 적어도 20여 개 이상이 설치되어 있었다. 사실상 왕립아시아학회와 리즈 데이비스의 노력으로 런던대학에 동양학 아프리카학 대학(SOAS,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이 설치되어 오늘날까지 세계적인 동양학과 아프리카학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점은 그의 공적이라 할 수 있다. 

리즈 데이비스에 의해 설립된 빨리경전협회(Pali Text Society)를 우리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현재 빨리경전협회는 로이 노만(K.R.Norman), 리처드 곰브리치(R.F.Gombrich), 랑스 카진(L.S. Cousins)의 뒤를 이어서 브리스톨대학의 루퍼트 게틴(M.L. Gethin)이 이끌고 있다. 오래전부터 빨리경전협회 내부에서는 자신들이 빨리 삼장에 대해서 지나치게 근본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반성이 일어나고 있었다. 따라서 빨리경전협회는 빨리 불교문헌들의 편집, 교정, 번역, 출판, 장학 사업 이외에 동남아시아의 다양한 불교 문헌들의 수집하고 보존하는 피터 스킬링(Peter Skilling)의 작업을 또한 지원하고 있다. 그는 태국 방콕에서 FPL 재단(The Fragile Palm Leaves Foundation)을 설립하고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등에서 태국으로 흘러나오는 오래된 필사본들을 수집하고 보존하고 분류하는 작업을 오랫동안 진행해오고 있다. 비록 늦었지만 빨리경전협회가 랑카중심주의(Lanka Centric Attitude)를 버리고 이러한 필사본들에 관심을 두게 되었으며, 이들의 편집과 교정을 통해 빨리경전협회 편집본들을 교정하고 발전시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빨리경전협회에서 번역된 경전은 흔히 불교혼성영어(Buddhist Hybrid English)라고 농담 삼아 이야기하는 복잡하고 난해한 용어들로 가득 차 있다. 이는 불교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의 접근을 막고 불교 전공자들 사이에서만 의미가 전달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다행인 것은, 빨리경전협회가 기존의 번역이 가지는 문제점을 인정하고 새로운 현대적인 영어로 번역된 문헌들을 빨리경전협회의 번역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비쿠 보디(Bhikkhu Bodhi)의 상윳따 니까야(Saṃyutta nikāya) 번역인 Connected Discourses of the Buddha,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 nikāya) 번역인 The Numerical Discourses of the Buddha, 비쿠 냐냐몰리(Bhikkhu Ñāṇamoli)의 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āya) 번역인 The Middle Length Discourses of the Buddha가 빨리경전협회의 번역 목록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빨리경전협회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황순일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교수. 동국대 인도철학과, 동 대학원 철학과, 영국 옥스퍼드대 졸업(박사). 태국 출라롱콘대, 일본 사이타마대 객원교수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무기설을 통해본 무여열반의 의미〉 〈Mahakapi Jataka의 변천, 동물우화에서 인간적 합리적 이야기로〉 등이 있고, 저서로 Metaphor and Literalism in Buddhism, The Doctrinal History of nirvana, Sermon of One Hundred Days: Part One, 《테라와다불교의 동남아시아 전파》 등이 있다. 현재 동국대 불교대학장 겸 불교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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