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 현대시조와 불교 ③

1. 

현대 시조문학사에서 1960년대는 시조문학 구축기다. 이 시기가 시조문학 구축기로 정립될 수 있었던 것은 전통적 역사관을 통한 민족정신 강화와 국가재건에 대한 시조시인들의 시대의식의 발로에서다. 당시 한국 사회는 전쟁의 폐허와 복구 속에서 정치적 · 경제적으로 극복해야 할 수많은 장해로 진통을 겪었다. 한국전쟁에 이어 4 · 19와 5 · 16이라는 시대적인 갈등과 동시에 해소되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자본주의적 근대화가 가시화되었다. 이때 한국 문학사의 문학적 지형은 정치적으로 군사정권의 억압과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의 부흥이라는 역사적 토대에서 새로운 사회적 요구를 수용해야 했다. 그것은 혼란과 불안 속에서 희망과 미래를 지향하며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문학 담론으로 구성되면서 시조단의 경우 현대적 감수성을 갖추게 된다. 

1960년대 문학적 특징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순수 · 참여 논쟁을 들 수 있다. 순수 · 참여 논쟁은 시대성을 반영하는 담론으로, 현실을 조망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문학의 역할 모색이었다. 현실의 문제를 문학이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현실참여 문학이라고 한다면, 순수문학은 이를 거부하고 문학을 정치적 수단으로 도구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가운데 역사관과 전통의식을 생명으로 하는 1960년대 시조단은 순수문학적인 문학적 담론이 우세하게 작용했다.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1960년대 시조시인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조국을 옹호하면서 전통적 의식과 민족의 발전을 위한 시편을 주로 남겼다. 시조시인들의 활동 역시 이전과 달리 전개되는데, 등단제도와 문예지 창간을 들 수 있다. 1950년대부터 시작한 일간지의 신춘문예라는 신인상 제도가 1960년대 들어 활성화되면서 등단 제도권의 시조시인들이 배출됐다. 이러한 신인발굴제도는 시조백일장에 이어 문예지와 기관지로 확산된다. 바로 1960년 창간된 《시조문학》과 1964년 결성된 한국시조작가협회(한국시조시인협회)에서 1965년부터 발행한 기관지 《정형시》에서 신인들을 발굴했다. 이처럼 등단제도가 본격화되면서 시조 신인들이 대거 등장하였고, 작품 발표 지면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시조 동인의 활동뿐만 아니라 거점 도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 동인들의 동인지 발행은 소위 중앙 문단에 집중된 독점 문화를 분산시킬 수 있었다. 

1960년대 현대시조는 시조문학을 정립해 나가는 시발점을 넘어 현대문학사의 자립기반을 공고하게 하는 문학예술로 발전했다. 이 시기에 등단한 시인들은 시조와 자유시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전통적 서정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자유시와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시조는 전통 서정성을 바탕으로 하는 다양한 형식 실험과 내용 변주로 오늘날의 현대적이고 문학적인 감각성을 갖추게 된다. 이때부터 현대시조는 고유의 형식적 갈등을 겪으면서 고유의 정형 형식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과 반대로 감각적이고 실험적인 비정형 형식 추구에 대한 이론을 들 수 있다. 다만 비정형 형식의 경우 시조의 정형률인 4음보와 구수, 종장 3자 등을 유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여기서 문제는 지나치게 행을 분할 배열함으로써 시조 고유의 리듬을 파괴한다는 것이었다. 이 비정형적인 형식의 문제는 새롭게 구성되면서 많이 와해되었지만, 현재에도 전통과 갱신 사이의 다툼이 많다. 

이처럼 시조문학의 구축기로서 1960년대는 시조시인들의 활약만큼 시조론과 시조 작법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거기에 자유시와 같이 시조 창작기법에 대한 수사적인 측면이 강조되면서 모던한 시조가 창작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2. 

1960년대에 등단한 시조시인 40여 명 가운데 불교적인 소재와 관점에서 시조를 창작한 시인들이 있다. 이 시인들을 생몰순으로 나열하면 정완영(1919~2016), 정하경(1927~ ), 조오현(1932~2018), 김춘랑(1935~2013), 이상범(1935~ ), 박재두(1936~2004), 서벌(1939~2005), 김제현(1939~ ), 류제하(1940~1991), 이근배(1940~ ), 윤금초(1943~ ), 김호길(1943~ ), 김종윤(1944~ ) 등이다. 

이들의 초기 시조는 주로 역사와 민족, 자연과 생명 등을 주제의식으로 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시적 소재들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공간은 자연미로부터 민족과 국가를 의식하면서 전통미로 귀결된다. 이들의 시 세계가 나아갈수록 민족 고유의 정서를 시조 미학으로 구현하면서 민족적 정서와 전통성을 드러내는 반면, 현대적인 감수성을 사물화하여 서정적으로 재현한다. 특히 불교적 관점에서 살필 시조시인들의 시 세계 특징은 다양한 소재로 불교를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 시조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현대적 서정성을 지각하게 한다. 종교적 관점의 불교적 소재와 상상력이 문학적으로 심화된 시조 미학을 창출하게 된 것이다. 

1960년대 불교적 사유를 시조로 창작한 대표적인 시조시인으로 정완영과 조오현이 있다. 승속의 측면에서 정완영을 세속의 전형적인 시조시인이라고 한다면, 조오현은 승려로서 불가에서 일가를 이룬 특징적인 시조시인이다. 먼저 시조 미학을 자연과 불교를 두 축으로 하여 전통 서정을 전개했던 정완영은 격조 있는 서정성과 율격의 시조시인으로 손꼽힌다. 그는 1960년 〈국제신보〉 신춘문예에 시조 〈해바라기〉가 당선되고, 《현대문학》을 통해 추천되었다.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조국〉이 당선되었는데, ‘조국’이라는 시적 소재는 당시 많은 문학인들의 공통된 화두였다는 점에서 시대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정완영은 시조의 형식과 내용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살리는 등, 시조 미학의 완숙 단계로 진입하게 한 현대시조의 완성자다.

정완영은 불교적 사유가 드러나는 시편을 많이 남겼는데, 경북 김천의 직지사 인근에서 성장하면서 불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집안은 선대가 한학자 집안으로 동양적 사상이 유입되면서 사유체계 또한 불교의식과 밀접하게 작동된다. 요컨대 정완영의 시에서 배태된 시 정신은 유교 사상과 도가 사상이 불교와 결합하여 전통과 정통의 맥을 잇고 있다.

매양 오던 그 산이요 매양 보던 그 절인데도
철 따라 따로 보임은 한갓 마음의 탓이랄까
오늘은 외줄기 길을 낙엽마저 묻었고나.

뻐꾸기 너무 울어싸 절터가 무겁더니
꽃이며 잎이며 다 지고 산날이 적막해 좋아라
허전한 먹물 장삼(長衫)을 입고 숲을 거닐자.

오가는 윤회(輪廻)의 길에 승속(僧俗)이 무에 다르랴만
사문(沙門)은 대답이 없고 행자는 말 잃었는데
높은 산 외론 마루에 기거(起居)하는 흰 구름.

인경은 울지 않아도 산악만 한 둘레이고
은혜는 뵙지 않아도 달만큼을 둥그느니
문득 온 산새 한 마리 깃 떨구고 가노메라.
— 〈직지사운 (直指寺韻)〉 전문

4수 3장으로 된 이 시는 산중에 있는 절의 적막 속에서 무의 경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무는 없음의 없음이 아니라 없음의 있음을 현현하는 것으로 등장하는데, 4수 초장에서 인경 소리 역시 없음의 있음을 비춰준다. 첫 수, 초장과 중장에서 “매양 오던 그 산이요 매양 보던 그 절인데도/ 철 따라 따로 보임은 한갓 마음의 탓이랄까”라는 구절은 절은 그대로 있지만 마음에 따라서 같은 ‘절’도 다르게 나타난다는 표현이다. 사물은 본래 하나인데, 마음에 의해 이것은 저것으로 생겨나고, 이것이 없음은 저것도 없다는 것으로 현상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각자 마음의 움직임에 의한 인연으로 연결된다는 의미이다. 

일체 현상이 인연에 따라서 연기한다는 세계관은 직지사를 소재로 한 그의 시 〈직지사 인경소리〉 〈직지사 그 산, 그 물〉에서도 탐색된다. 이들 시조에서는 세상의 모든 생멸은 인경 소리를 중심축으로 시작되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펼쳐진다. 불교적 관점에서 기인하는 만물의 이치에 환유적으로 범종이 등장하며, 함축적인 방식으로 연기하는 세계를 보여준다.

조오현은 불교적 사유를 테마로 50년 동안 시조를 창작했다. 시문학사에서 한글 선시조의 개척자로 불리는 그는 불교적 깨달음을 문학적 형이상학으로 승화시켜 선과 시조가 상생하는 새로운 불교문학을 완성시켰다. 선승으로서 구도적인 삶에서 획득한 불교적 깨달음을 현대시조로 견인해온 그의 문학세계는 선적 시조 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시를 처음 쓴 동기는 우연한 기회에 지인의 시조를 보고 자신도 한번 써 보고자 했던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1960년대에 이태극, 조종현, 정완영 등 당대의 대표적인 시조시인들과 교류했으며, 1968년 《시조문학》으로 등단했다. 첫 시조집 《심우도》를 1979년에 펴낸 후, 2018년 봄 〈열반송〉을 마지막 시편으로 남겼는데, 생애가 끝난 후에도 세인의 귀감이 되는 후일담이 끊이질 않는다. 

조오현의 시는 그가 선승임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깨친 자각의 주체를 부처나 선각자 등을 통해 수행의 표본으로 특정하지 않는다. 다만 이 세계의 작고, 하찮고, 쓸모없는, 말하자면 낮은 존재를 호명하는데 그것이 수행의 주체가 되고 깨달음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

이다음 숲에서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
— 조오현 〈적멸을 위하여〉 전문 

단시조 〈적멸을 위하여〉의 경우 초장에서는 삶의 의미를 모르듯이 죽음의 의미 또한 모르는 인간의 실상을 탐구한다. 중장에서 ‘벌레’로 동일화하거나 치환하면서 3연에 이르러 온몸을 새에게 바치는 보시행으로서 ‘보시바라밀’을 현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이다음 숲에서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는 화자의 다짐은 중장의 ‘기는 벌레’에서 온 것으로 벌레가 큰 시주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그의 시는 일상적 사고를 충돌시킴으로써 또 다른 의식을 창조하려는 시도로서 역설적 기법을 차용한다. 언어의 충돌 시 발생하는 역설적 진술로 일반적 상식을 전복시킴으로써 언어의 불완전성을 극복해 나간다. 그 지점에서 깨달음을 얻고 괴로움을 소멸시킨 청정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데 그의 선적 세계관은 문학을 통해 가르치려 하지 않고 가리킬 뿐이다. 


3.

사찰을 배경으로 하는 시조는 시대를 막론하고 수없이 많은 시적 소재가 될 만큼 역사적 의미와 종교적 의식이 깃들어 있다. 그곳은 민족사의 중심에서 문화공동체로서 공통의 기억과 고전적 감각을 보존하고 있으면서 종교적 상상력이 배가된다. 거기에 불교적 사유가 작동하는 원천으로서 영속성과 초월성 그리고 사후세계의 근원적인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1960년대 사찰을 배경으로 하는 시편 중에서 신라시대에 건립된 불국사의 석굴암을 찾아볼 수 있다. 석굴암은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부처님의 자비와 숭고미를 신비롭게 자아내는 걸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불국토 정신과 더불어 조국과 민족을 지켜주는 수호신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석굴암은 오랫동안 시적 테마가 되어 왔다. 불법을 수호하고 민족정신을 대변하는 석굴암은 시조문학에서 문학적 상상력으로 배태되면서 새롭게 조망되기도 했다. 

아래 시편 〈석굴암 관세음 취재〉를 창작한 서벌은 서봉섭이 본명이다. 그는 1964년 《시조문학》에 추천되어 등단했다. 서벌의 시조는 시적 긴장과 함께 안정감을 주는데 선경후정(先景後精)을 바탕으로 한다. 초장에서 자아 바깥의 사물이 먼저 묘사되고 중장과 종장에 이르러 자아 내면의 후정으로 전이된다. 이른바 외부 세계를 내면화하는 표현방식으로 말하자면 자연을 통해 자아의 보편적 정서를 드러낸다. 

어차피 가고 가는 달 같고 구름 같은
목숨을 눈에 어려 손쓰시는 대자대비
쑥돌을 고르고 골라 이리저리 나투셨네.

서라벌 천년의 꿈 동해와 속삭이는
그 소리 옷자락에 적시고는 날리면서
저승도 이승 없다면 있을 까닭 없다시네.

그리움 외로움도 때로는 삭풍되어
앙가슴 도려내는 그런 녘 있다해도
아련한 한갓진 미소 잃지말라 합시누나.
— 서벌 〈석굴암 관세음 취재〉 전문

3수로 이루어진 서벌의 〈석굴암 관세음 취재〉는 석굴암 외부의 전이 또는 치환을 통해 내재된 의미를 서정적 심상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선경후정의 시작술로서 1수의 경우 초장 “어차피 가고 가는 달 같고 구름 같은” 외부의 자연 세계를 통해, 중장 “목숨을 눈에 어려 손쓰시는 대자대비”로 부처님 마음으로 치환된다. 그것은 종장에서 “쑥돌을 고르고 골라 이리저리 나투셨네”라고 석굴암에 얽힌 신라인의 정신을 투사시킨다. 2수와 3수 역시도 초장에서 석굴암을 둘러싼 외부 자연 세계를 형상화하면서 중장과 종장에 이르러 내면의 심상을 드러낸다.

다음으로 석굴암을 소재로 시를 창작한 류제하는 시조의 특성인 초장 중장 종장에서 연유한 삼장시(三章詩) 동인이다. 1966년 《시조문학》과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그의 시조는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한 자기실현과 인간의 본질 탐구라는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그는 ‘변조’ ‘데생’ ‘광인일기’ 등 90수에 이르는 방대한 연작시조를 다수 창작했는데, 그의 시조는 고시가의 음악적 명맥을 유지하면서 형식실험을 시도해 난해성을 띠고 있다. 인식론적 사유가 지향하는 그의 철학적 언어 체계는 실존의 세계를 감각적인 은유로 묘파하고 있다. 경희대학교 국문학과를 거쳐 홍익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를 나온 류제하는 198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어 현장 비평가로서 이름을 올렸다.

성큼성큼 동해로 걸어온 뜨건 해랑
맨 처음 악수하며 받은 햇살을
토함산 그 허리춤에 꽂아 주고 웃는 당신

계곡에서 빠져나온 세월을 데불다가
눈짓만큼 흐뭇한 가슴 하나 열어 놓고
석간수 한 오쿰 떠서 정갈하게 씻어낸다

그 무건 목숨들을 한 손으로 받쳐 들고
왼 하늘 일깨워 왼 누리 보는 당신
빈 자리 행여 있을까 숨소리를 채운다
— 류제하 〈석굴암 원경〉 전문 

이 시조는 석굴암을 모티브로 하여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신성성을 일깨워준다. 각 수에서 부처님의 자비로운 형상을 원경으로 자아내는데 점층적인 수사법이 쓰이고 있다. 1수 초장 “성큼성큼 동해로 걸어온 뜨건 해”는 중장에서 “맨 처음 악수하며 받은 햇살”로 나아가는데, 동해의 해가 온 누리를 비추는 햇살이 된다. 이를테면 종장 “토함산 그 허리춤에 꽂아 주고 웃는 당신”이 있는 것으로 ‘부처님의 웃음’이 곧 동해의 해이며, 온 누리를 비추는 햇살이 되는 것이다. 3수의 경우 중생들의 “그 무건 목숨들을 한 손으로 받쳐 들고” “왼 하늘 일깨워 왼 누리 보는 당신”인 석굴암이 중생들을 수호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사찰을 배경으로 하는 시편들은 시적 상상력과 내용에 따라 연시조에서 연작시조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현대시조에서 연작시조는 단시조나 연시조의 내용적인 면을 보완하기 위해 쓰이는 형식의 하나다. 하나의 주제로 여러 수가 서로 의존하면서 통일성 있게 전개되는 연작시조는 각 수마다 별개의 의미로 지어진 단형시조와 다른 양상을 가진다. 

다음에서 살필 연작시조는 장시조처럼 유사한 주제로서 내용을 나열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주제는 같으나 소재에 따라서 소제목을 정하는 것이 특징이다. 사찰을 소재로 하는 김종윤의 〈속리산 시초〉와 정하경의 〈산천무심(山川無心)〉은 연작시조의 특성을 잘 살리고 있다. 〈속리산 시초〉를 창작한 김종윤은 《시조문학》에 〈보리고개〉로 등단했으며, 196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정하경은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분에 〈불모의 거리에서〉가 당선되어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무위(無爲)
법주사/ 시린 물에/ 손발 적셔 보면
무위/ 한 자락/ 열어 놓은/ 산문(山門) 같은
그 마음/ 나래를 펴도/ 젖어드는/ 시름이여.

나그네
저문 산/ 저문 그늘/ 고요 속에/ 지는 하루
구층탑/ 큰 북 울어/ 멀어가는/ 노을길에
그 목련/ 그늘로 걸어/ 숙여가는 나그네

목탁
그늘진 법당 뜨락/ 불두화(佛頭花)/ 지는 봄날
구름도/ 석탑가로/ 둘레져 내리는데
가시섶/ 헤어진 세월/ 추스르는/ 목탁소리.

바위
마냥/ 버틴 삶도/ 오히려/ 인욕 같은
헤아려 헤아려도/ 다 못 헤일/ 생각 접어
스스로/ 무거운 그림자/ 눈을 감고/ 앉은 바위.
— 김종윤 〈속리산 시초〉 전문 

남원
세월 가고 설움 가고 절절한 사랑도 가고
보기 좋게 반백을 인 오작교가 광한루가
숱하게 흘린 깨알을 도로 줍고 있었다

월송정
정자 아래 검은 솥밭 그 너머 푸른 바다
언제 꾼 꿈이더라 하늘토록 닿은 물결
흰 물새 돛배랑 어울려 부르거니 따르거니

동해
울진 삼척 강릉 설악 동해안 쪽빛 만리
바위를 물어뜯고 부서지는 순백의 포말
양보다 심심한 바다 재롱 치며 누웠다

낙산사
낙산사 부처님은 산보다는 바다가 좋아
눈 아래 천리만리 푸른 물결 풀어 놓고
갈매기 모였다 흩었다 놀게 두고 있었다
— 정하경 〈산천무심(山川無心)〉 전문


김종윤의 〈속리산 시초〉는 4수의 연작시조로서 각각의 단시조에 소제목을 부여한다. 이는 제목에서 보여주듯 ‘속리산’에 위치한 ‘법주사’를 중심으로 4가지 의미로 전개된다. 이를테면 연작시조 〈무위〉 〈나그네〉 〈목탁〉 〈바위〉 등은 속리산 기슭에 있는 법주사라는 사찰을 통해 출현하는 시적 상상력으로서 불교적 사유를 발견하게 한다. 

4수 연작시조로 된 정하경의 〈산천무심〉은 한국의 주요한 산천을 배경으로 속세로부터 관심이 없는 무심의 경지를 나타낸다.  ‘남원’에서 “세월 가고 설움 가고 절절한 사랑도 가고” 없는 덧없음을, ‘월송정’에서 “언제 꾼 꿈이더라 하늘토록 닿은 물결”이라는 무상함을, ‘동해’에서 “바위를 물어뜯고 부서지는 순백의 포말”같이 헛된 것을, ‘낙산사’에 이르러서는 “낙산사 부처님은 산보다는 바다가 좋아/ 눈 아래 천리만리 푸른 물결 풀어 놓고”에서 보이듯 불교적 서정을 형상화하고 있다. 


4. 

위와 같이 1960년대에 활동한 시조시인들의 시편에서 불교적 사유가 직접적인 수사적 형태로 기록되는가 하면, 불교적 정서가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현현되기도 한다. 불교를 문학적으로 평면화하는 것이 아니라 시적 상상력을 통해 불교적 사유를 입체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와 문학의 만남은 불교의 종교성과 문학의 상상력이 서로 합치되면서 극대화되는 효과를 낳고 있다.

아래 이상범의 시편 〈별의 말〉은 설악산 밤하늘에 수놓은 별들은 조약돌로 만든 탑들이 쏟아내는 빛이라는 탁월한 상상력을 보인다. 이상범은 1963년 《시조문학》에서 3회 추천 완료했으며, 196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됐다.

하늘물에 눈 닦은 금박의 별마당과/ 내설악 물에 씻겨 보살이 된 조약돌/ 원력의 손엔 빈 바리때 뾰죽탑은 늘어갔다/ 장마 들면 거센 비질 탑이 온통 쓸려가도/ 길손은 혼을 밝혀 탑은 다시 태어나도/ 쌓았다 헐리는 시간 속 별자리도 기울었다/ 돌들이 돌을 깎아 빛을 끌어 당긴다/ 만해 그 매운 눈빛 등줄기에 꽂아두고/ 저물면 탑신이 걸어 나와 별의 말을 귀띔했다
— 이상범 〈별의 말〉 전문

3수 1연으로 된 이 시는 백담사 앞 개울에 크고 작은 조약돌로 만든 수백 개의 돌탑을 모티브로 한다. 이 돌탑은 중생들이 쌓아 올린 ‘원력의 작용’으로 투영된다. 불교에서 ‘원력’은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세운 ‘기원의 힘’이라는 의미다. 이 시는 보살의 궁극적인 목표인 부처의 경지를 이룰 수 있다는 중생들의 원력을 돌탑으로 보여준다. 설악산 하늘의 ‘별마당’은 “내설악 물에 씻겨 보살이 된 조약돌”이 만들어낸 원력의 작용으로서 땅의 돌과 하늘의 별을 서로 전치시킨다. 여기서 탑은 그냥 돌탑이 아니라 신성한 존재로서 ‘탑신’으로 극대화된다. 

이같이 1960년대 시조시인들은 시적 상상력으로 시조의 정형성과 문학성을 확대하려고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시조에 대한 기존의 획일적인 고전적 관습을 현대적으로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돌파구가 아닐 수 없다. 먼저 시조 창작이 발전하고 정립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보편적인 시조 이론으로 새로운 창작기법을 기술하고 기존의 시조를 보전하는 시조 연구자의 노력이 필요했다. 

196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와 1961년 《시조문학》 1963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김제현은 《시조문학론》 《사설시조문학론》 《시조가사론》 《현대시조평설》 등을 저술하는 등 시조 이론을 정립해 나갔다. 경희대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를 받은 그는 시조 연구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형식의 계승과 혁신의 시대적 긴장 속에서 시조 창작에 힘쓰면서, 시조 전문지 《시조시학》을 창간하기도 했다. 

산공부 떠난 학승들/ 어디쯤 출렁이고 있을까// 아무리 기척을 해도/ 응답 없는 미황사// 고웁게 쓸린 안마당엔/ 만섬 적막이 쌓였네// 이런저런 근심 잊고/ 잊음조차 모두 잊고// 마음 문 닫았어도/ 새어 드는 달빛 달빛// 세상의 인연 끊으려면/ 절은 어이 섰으리.
— 김제현 〈미황사에서〉 전문

이 시 미황사는 땅끝마을 해남 달마산에 있는 대흥사의 말사다. 1만 부처와 같은 바위가 솟은 달마산은 달마가 인도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 머물고 있다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이다. 달마산 미황사가 배경인 김제현의 〈토말기 · 2〉는 2수로 되어 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한반도의 최남단 땅끝에 소재한 ‘미황사’에 온 학승들을 상상하면서 화자는 “고웁게 쓸린 안마당엔/ 만섬 적막이 쌓였네”라며 미황사 밖에 펼쳐진 수많은 작은 섬들을 바라본다. 이때 ‘만섬’은 수만 가지의 ‘근심’이라는 의미와 함께 출가한 학승들의 세속과 단절된 삶을 상징한다. 

절 또한 인연으로 빚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인연설을 매개로 하는 불교적 사유는 김호길의 시조에서 중의적으로 출현하기도 한다. 김호길은 시조와 인연의 지평을 국내 지역이 아니라 해외로 넓힌 시조시인으로, 미국 땅에 처음으로 시조 진흥의 깃발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1963년 개천예술제 시조백일장에서 장원, 1967년 《시조문학》에 〈하늘 환상곡〉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티끌 수보다 많은 죄의 짐을 부려놓고/ 무릎 꿇어 향 올리고 우러러 두 손 모으면/ 눈물도 죄만 같아서 몸 둘 곳을 모릅니다// 파초 한 잎 끝에도 되뇌이는 푸른 말씀/ 어지신 미소로도 깨침은 아득한데/ 처마 끝 풍경 소리는 아픈 번뇌를 깨웁니다// 고해의 그 한바다는 헤아림이 가이없고/ 온갖 나울에 씻긴 옥 같은 참회의 눈물/ 자비의 다슨 손길을 꿈결인 양 느낍니다
— 김호길 〈보리수 그늘에서〉 전문

김호길의 이 시는 제목이 보여주듯 ‘보리수 그늘에서’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을 소환하면서 전개된다. 3수에서 각각 참회의 눈물과 부처님의 행적과 말씀, 그리고 자비로움을 보여준다. 1수에서 부처님 앞에서 “티끌 수보다 많은 죄의 짐을 부려놓고” 자신의 참회가 시작된다. 무릎을 꿇고 향을 피우고 두 손을 모으는 화자의 의식은 눈물로서 피어나는데 2수에서는 부처님에 대한 ‘되뇌이는 푸른 말씀과 어지신 미소와 깨우침을 얻으면서 아픈 번뇌’로 이어진다. 3수 ‘고해의 바다’에서 가엾은 자신을 발견하고 ‘옥 같은 참회의 눈물’로 청청해지면서 ‘부처님의 따듯한 자비의 손길’을 감각하게 된다. 

한편, 불교에서 종교를 말할 때 종(宗)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스스로 체득한 깨달음 그 자체라고 한다면, 교(敎)는 그것을 언어로 표현한 가르침이 된다. 불교의 비유나 문학의 수사학 같은 경우 공통적으로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관념적인 것을 표현하는 데 쓰인다. 이른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드러내고자 할 때 현상계의 물질성을 토대로 사용한다. 아래의 종(鐘)을 테마로 하는 김춘랑의 시조에서 이러한 시 의식을 살필 수 있다. 김춘랑은 1965년 《율》 시조동인으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1968년 《시조문학》으로 등단했다.

당초에 우람스런 쇳덩이로 빚었으매/ 인하여 조작(造作)된 진리가 천년 가람 속에 녹슬었다/ 울울히 쌓인 회포를 울어예고 있는가.// 드디어 요람을 떠난 한 무리의 새떼가/ 기인 여운의 금속성 파편을 몰고/ 종요론(宗要論) 내 마음 뒷뜰에 죽지 접고 나리는가.// 소연히 무리 서는 별빛을 보고/ 구도자는 긴 고행의 먼 길을 예비하고/ 새들은 갈구의 늪을 찾아 산등이를 넘는다.
— 김춘랑 〈종소리〉 전문10)

종소리는 종(鐘)이 내는 보이지 않는 소리로서 청각적인 것에서 연유한다. 이 시의 ‘종’은 ‘종요론’과 연결되면서 원효의 사상을 일깨운다. 원효가 말하는 종요론(宗要論)은 “열면 무량 무변한 뜻이 종(宗)이 되고 닫으면 두 문과 한 마음(二門一心)의 법이 요(要)가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시인이 말하는 종소리는 세포막이 양쪽으로 열리면 외부환경과 연결되고 닫히면 내부세계가 확장된다. 이 종소리는 ‘호젓하고 쓸쓸한 자들에게는 별빛을 보게 하고, 구도자는 긴 고행의 먼 길을 예비하고 새들은 갈구의 늪을 찾아 산등이’를 넘어갈 수 있는 생명에의 길잡이가 된다. 
 

5.

대체로 위에서 언급한 시조는 불교의식이 시적 주제와 더불어 불교적 소재를 통해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 이것은 시조시인들의 시적 세계관 속에서 불교적인 사유가 의식적으로 작동하면서 산출된 시 의식의 결과다. 

한편으로, 불교적 세계관이 아니라 불교적인 소재가 행간에 삼투된 1960년대 시조를 살필 수 있다. 이 경우 시조시인들의 무의식을 통해 불교적 요소인 용어와 소재들이 단어와 구절로서 시행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예컨대 1960년대 등단한 시조시인들 중 박재두, 이근배, 윤금초 시조에서 불교적인 요소를 형상화하는 시적 경향이 눈에 띈다. 박재두는 196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되었고 《율》 동인으로 활동했다. 그의 시조는 섬세한 관찰과 예리한 묘사로 사물의 속성을 간파한다. 

하늘도 제일 높은 욕계(欲界) 삼천 구름 너머/ 너를 불러 타이르는 음성이 들리는가/ 무지개 오색 채운만 둥, 둥 저렇게 뜬다.// 열 손가락 마디마디 흐르는 더운 개울/ 한 가지엔 사랑을 딛고 또 하나는 그네를 달아/ 물결에 고운 꿈 실어 흔들리듯 너는 살고…// 저승 먼 강안을 돌아 또 한세상 본다면/ 나는 그대 가슴어리께 자리 잡은 한 송이 꽃/ 이슬로 가슴을 쓸어 이 시름을 달랠걸!
— 박재두 〈연밭 가에서〉 전문

4수로 된 이 시편의 도입 부분 “하늘도 제일 높은 욕계(欲界) 삼천 구름 너머/ 너를 불러 타이르는 음성이 들리는가”에서 욕계는 식욕, 성욕, 수면욕으로 불리는 욕계삼욕을 가진 중생들이 모여 사는 이 세계를 표상하는 불교 용어다. 이 같은 불교 용어는 이근배의 시조에서도 시재가 되고 있다.

이근배는 1960년 첫 시집 《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를 서정주 서문으로 출간한 이후에 1961년 〈경향신문〉에 시조가 당선된 이래 〈서울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등에 시조, 시, 동시 등, 문단 최초로 일간지 신춘문예 다섯 군데에서 당선된 시인이다. 한국 시문학사를 통틀어 그의 기록을 경신한 시인은 현재까지 없다. 
 
풀이슬 달빛 배어/ 그리던 십리정 밖// 피로 쓴 애정사의/ 발자국을 지우고// 내 가슴 먼 길을 헤쳐/ 달려드는 아리아여.// 여윈 흰꽃이듯/ 외로이 펴 곱던 그대// 바위처럼 도사려도/ 숨결 앞엔 모래 되어// 바닷물/ 밀려 오가듯/ 봄이 젖던 사람인데…// 저무는 창에 서면/ 떠오르는 아픈 영상// 역겨워 눈감아도/ 활화 같은 기념비여.// 그 불길/ 백팔번뇌로/ 한세상을 타는구나.
— 이근배 〈혼곡(昏曲)〉 전문

 
3수로 된 이 시편의 3수 종장 “그 불길/ 백팔번뇌로/ 한세상을 타는구나.”에서 등장하는 ‘백팔번뇌’는, 불교에서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생겨나는 수없이 많은 번뇌를 일컫는다. 불교적 사유가 깃든 이 같은 불교 용어로써 ‘혼곡’이 전해주는 시적 여운을 남기며 시 의식을 강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이처럼 불교적 소재와 불교 용어뿐만 아니라 불교문화가 배태된 작품은 아래 윤금초의 시조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19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윤금초는 옴니버스 시조라는 형식실험을 통해 시조의 다양한 지평을 넓혀갔다. 독보적인 그의 시작은 시조가 가지는 형식적인 제한성을 극복하려는 실험적이고 감각적인 시도로서 사설시조에 집중하고 있다.

두 가닥 솔잎같이/ 해로할 푸른 연분// 세상에 이내 속에/ 등을 잠시 받쳤단다// 그 가지 등걸에 맺혀/ 한 줌 흙의 풍화로// 이 목숨 더운 정기/ 끝끝내 불꽃인 걸// 평생 두고 재우지 못할/ 서실(胥失)의 티 하나도// 모래펄 달빛을 누벼/ 다 쓸었다 답하라.// 차라리 숨이 겨워/ 혀끝 절로 내두르는// 실오리 연기 자락/ 뼛가루 흩날릴 때// 내 영혼 해가 이울면/ 어느 곁에 머물까. 
— 윤금초 〈다비문(茶毘文)〉 전문

3수로 된 윤금초의 〈다비문(茶毘文)〉은 가장 대표적인 불교의례인 다비식을 주제로 하여 제행무상을 노래하고 있다. 2수 “이 목숨 더운 정기/ 끝끝내 불꽃인 걸// 평생 두고 재우지 못할/ 서실(胥失)의 티 하나도// 모래펄 달빛을 누벼/ 다 쓸었다 답하라.”라는 구절에서 인간의 목숨이 헛되고 부질없음을 상기하게 한다. 또한 타버린 육신으로부터 풍화된 더운 목숨을 깨닫게 하면서 영혼과 육체 사이 실체가 어디에 존재하는지를 되묻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전통 서정성을 추구하면서 다양한 형식에의 실험과 내용적인 변주가 이루어지던 것이 1960년대 시조의 특징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오늘날의 시조가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형식과 내용을 갖추게 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거기에 ‘시조의 구축기’라고 불리는 시기인 1960년대에 불교적 사유를 바탕으로 다양한 시조 창작기법과 다채로운 수사법을 펼친 작품들이 발표되었다.

또한 1950년대와 1970년대 사이 위치한 1960년대는 1950년대의 전후문학과 구별되며 1970년대의 산업화시대 문학과 도식적으로 구획된다. 1960년대 시조 담론은 1950년대를 견인하면서 1970년대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데, 불교적 사유와 정서를 바탕으로 한 불교 시조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 사이 사회적 변화에 따른 문학적 주체들은 새로운 시 의식을 확산시키면서 사상적 담론의 자장을 넓혀 나갔다. ■
 

권성훈 poemksh@naver.com 
문학평론가. 2013년 《작가세계》 평론 신인상 당선. 한신대 종교학과, 경기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고려대 박사후과정 수료. 시집 《밤은 밤을 열면서》 외 2권과 저서 《시치료의 이론과 실제》 《현대시 미학 산책》 《현대시조의 도그마 너머》 등이 있다. 현 경기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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