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불교학 연구의 토대를 구축하다

불교학을 전공하면서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 이하 ‘대정장’)을 열람하지 않을 수는 없다. 다카쿠스 준지로 박사(이하 ‘다카쿠스’)는 이 대정장의 출판을 기획하여 편집하고 간행한 학자인 만큼,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역설적으로는 이러한 유명세 때문에 그의 학문적 역량과 교육적 열성과 같은 다른 진면목이 간과된 면도 적지 않은 듯하다.

일본 유학의 경험도 없는 필자가 다카쿠스를 맡아 소개하게 된 것은 영어로 출판된 그의 저서(The Essentials of Buddhist Philo-sophy, Honolulu, 1947)를 《불교철학의 정수》(대원정사, 1989)로 번역한 인연 때문이다. 이 책은 다카쿠스가 하와이대학교(Univer-sity of Hawaii)의 초청을 받아 1938년부터 1년간 강의한 내용을 현지의 학자들이 편집하여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 73세의 노령이었던 다카쿠스는 이 기간에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고, 1년간 더 체류해달라는 대학 측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으나 부인의 급서(急逝)로 귀국하게 되었다. 저자에 대한 해외 학자들의 인식과 이 책의 가치는 다음과 같은 편집자 서문의 첫 대목을 인용한 것으로 충분히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다카쿠스 교수는 1945년 6월 타계하기 이전 몇 십 년 동안, 영어권의 세계에서 불교의 기념비적 작품들에 대한 저술가요, 편집자요, 번역가로서 잘 알려져 있었다. 그가 영어로 쓴 작품으로서 가장 중요한 이 책에는 불교철학에 일생을 바친 연구의 결정이 나타나 있다. 다카쿠스 박사는 도쿄에서 원고를 준비하여, 객원교수로 있던 하와이대학에서 1938년에서 다음 해까지 일련의 강의로써 이 책의 내용을 가르쳤다. 1939년 여름 세계의 몇 개 지역에서 온 철학자들이 ‘동 · 서 철학자 회의’를 위해 하와이대학에 모였다. 그들은 논의의 대상이 되는 책들 중의 하나로서 이 강의의 내용을 이용하였다.

이에 의하면 다카쿠스는 영어권의 세계에서 영향력이 큰 학자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관한 내용을 제외한 다카쿠스의 생애와 업적은 국내에서도 이미 사토 아츠시(佐藤厚)에 의해 어느 정도 충분히 소개되었다. 일본에서는 진즉 그의 전기가 출판되었으므로 그에 관한 모든 것은 이 전기로 충분할 것이다. 필자가 그의 생애와 주요 업적에 관해 소개한 일반 내용은 이 전기에 의거하고, 그의 학문적 영향력에 관해서는 필자가 직접 열람한 자료들에 의거한다.
일본에서 인도철학과 불교학 연구의 토대를 구축한 다카쿠스의 대표적인 업적은 아래와 같은 다섯 가지 정도로 총괄할 수 있다.

-일본의 동경제국대학(이하 ‘동경대’)에서 최초로 산스끄리뜨어와 팔리어를 강의하여 인도철학 연구의 기반 구축.
-대일본불교전서 150권의 편집과 간행에 참여. 1911년 난조 분유(南条文雄)를 회장으로 추대하여 불교간행회를 창설, 모치즈키 신코(望月信亨)와 함께 1912년 5월부터 1930년까지 완결.
-고려대장경 재조본을 저본으로 삼아 한역(漢譯) 경전의 총서인 대정장을 편집하여 간행.
-남방불교의 불전인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 70권을 번역하여 간행.
-고대 인도의 철학서인 우파니샤드를 전서(全書)로 번역, 간행.

이 중에서 난조 분유(1849~1927)는 다카쿠스를 세계적인 학자로 견인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는 메이지유신(明治惟新) 이후 영국에 유학하여 산스끄리뜨(범어)를 습득하고 귀국했다. 이후 그는 일본에서 인도철학 및 불교의 원전 연구에 초석이 되었다. 다카쿠스는 그의 뒤를 이어 유럽으로 건너가 원전 연구의 학풍 습득하고, 귀국 후 동양인으로서는 한문 불전에 대한 지식으로 유럽 학계에 가장 큰 족적을 남겼다.

1. 학문과 교육의 생애

출생과 주요 이력

다카쿠스는 1866년 6월 29일, 당시의 지명으로 빈고(備後)국의 미츠기(御調)군에 있는 농가에서 사와이 간조우(澤井觀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곳은 현재의 지명으로 히로시마(廣島)현 미하라(三原)시의 야하다초가가리(八幡町篝)이다. 그가 태어날 때 아버지는 호농(豪農)에 속했지만, 이후 여섯 형제를 더 낳은 그의 부모로서는 자식들의 교육에 그다지 넉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카쿠스의 본래 이름은 우메타로(梅太郞)였으나, 성이 바뀌게 된 것은 22세에 결혼해서 처가인 다카쿠스(高楠) 가문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이름도 준지로(順次郞)로 바꿨다. 그리고 그는 부유한 다카쿠스 가문의 원조로 영국에 유학하여 옥스퍼드대학에서 막스 뮐러(Max Müller)의 제자가 되어 유럽의 신학문을 수련할 수 있었다.

다카쿠스는 5세 무렵부터 할아버지의 지도로 한자를 익히고, 10세 무렵부터는 《시경(詩經)》과 《당시선(唐詩選)》 등을 낭창할 수 있었으며, 15세에는 소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그가 훗날 대정장을 편찬하고 스스로 한시(漢詩)를 짓게 된 것도 이러한 할아버지의 훈육 덕분일 것이다. 다카쿠스는 이후 17세에 히로시마 사범학교를 다녔고, 여장부였던 어머니의 적극적인 권유와 격려로 20세에는 정토진종(淨土眞宗)의 서본원사(西本願寺)가 교토(京都)에 류코쿠대학(龍谷大學)의 전신으로 설립한 보통교교(普通敎校)에 입학했다.

이하에서는 그의 생애 중 주요한 이력을 먼저 발췌해 두고, 특기할 만한 업적을 별도로 상술한다.

1885년: 현재의 류코쿠대학인 보통교교에 입학.
1887년: 재학 중 반성회(反省会)를 설립하고, 《중앙공론(中央公論)》의 전신인 《반성회잡지(反省会雑誌)》를 간행.
1890~1894년: 홀로 영국의 옥스퍼드대학 유학. 문학사 학위 취득.
1895년: 독일의 베를린(Berlin) 대학 유학.
1896년: 라이프치히(Leipzig) 대학과 프랑스 유학.
1897년: 귀국하여 동경대에서 범어학 담당 강사.
1899년: 동경대 교수.
1900년: 동경대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동경외국어대학(東京外国語大学)의 전신인 동경외국어학교의 교장 겸임.
1902년: 중앙학원대학(中央学院大学)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学校)의 전신인 중앙상업학교를 창설하여 경영.
1905년: 옥스퍼드대학에서 박사 학위 취득.
1922년: 《우파니샤드 전서》의 간행 개시.
1923년: 대정장의 간행을 기획하여 와타나베 가이교쿠(渡辺海旭)와 함께 책임을 맡아 착수.
1924년: 무사시노(武蔵野) 여자학원 설립. 대정장의 간행 개시.
1927년: 정년으로 동경대 퇴직, 명예교수. 무사시노대학(武蔵野大學) 중고등학교 전신인 무사시노여자학원 고등여학교의 교장으로 취임.
1931년: 도요대학(東洋大學)의 제8대 학장 취임.
1932년: 대정장 85권의 출판 완료.
1935년: 남전대장경의 간행 개시.
1938년: 하와이대학에서 객원교수로 불교철학 등을 강의.
1943년: 무사시노대학 부속 치요다 고등학원(千代田高等學院) 및 치요다 여학원 중학교의 전신인 치요다 여자전문학교의 교장 취임.
1944년: 1937년에 제정한 문화훈장을 받음.
1945년: 6월 28일 향년 80세로 서거.

이상과 같은 이력에서 다카쿠스가 교육 분야, 그중에서도 여성 교육에 심혈을 쏟았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이전부터 여성 교육에 뜻을 세웠던 그가 무사시노 여자학원을 설립한 것은 관동(關東) 대지진이라는 재앙이 발생한 다음 해의 일이다. 여기에는 불교의 평등 사상을 사회적 이념으로 실현하려는 의지가 깔려 있었다.

관동대지진의 여파는 일본 사회에 조선인 학살과 사회주의자 탄압으로 번졌다. 특히 학살되거나 체포된 조선인은 6천 명 정도에 이르렀고, 헌병 대위가 무정부주의자의 부부와 조카딸을 사령부로 끌고 와 목을 졸라 죽이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 같은 사태에 침묵하는 사회를 목격한 다카쿠스는 평소의 소신을 교육으로 곧장 실천하고자 작심한 듯하다. 그는 정당한 비판력이 건전한 사회를 조성할 수 있다는 소신을 “군중심리에 동요되지 않는 비판력을 기르는 것은 교육의 책임이다. 국민의 비판력이 현저해 있으면 걱정할 일이 없다.”(《生の実現》 p.180)라고 천명한 바 있다.

다카쿠스가 여성 교육에 우선적으로 주력한 것은 여성에 대한 보수적 인식이 건전한 사회 조성에 가장 큰 장애라고 확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생각은 〈학원의 교육 방침〉을 발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것으로 표명되어 있다.

불교주의에 기초한 인간 성취를 기치로 내걸고, 이제 우리는 무사시노 여자학원을 경영할 것입니다. 종래 우리나라의 여자 교육이 남자의 그것에 비해 열악한 위치에 있는 것은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적어도 연구심이 왕성한 여성에게 남자와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은 허술하게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유학과 귀국

다카쿠스가 입학한 보통교교는 종립학교였지만 승속을 가리지 않고 일반 학생을 모집했으며, 영어 교육에 주력하고 영재 교육도 실행했다. 그가 재학 중에 불교의 해외 보급에 뜻을 세우고 구미불교통신사(歐米佛敎通信社)를 창립하여 해외선교회를 발기했던 것은 학교의 영어 교육에 힘입은 바가 컸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가 영국 유학을 결심했을 때는 원래 정치경제 분야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난조 분유의 소개장을 갖고 옥스퍼드대학으로 간 그는 막스 뮐러를 만나, “흥미를 위해 학문을 하는가, 돈벌이를 위해 학문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돈벌이보다는 흥미 쪽을 선택했다. 그는 막스 뮐러가 권하는 인도 연구로 방향을 바꾸고 런던으로 돌아와 영어 습득에 전념한 후, 다시 막스 뮐러를 찾아가 본격적으로 인도 연구의 학문을 수련하게 된다.

다카쿠스는 먼저 막스 뮐러의 제자인 빈테르니츠(Winternitz)로부터 산스끄리뜨를 배운 후, 독일로 건너가 도이센(Deussen)과 올덴베르크(Oldenberg)에게 배우고, 다시 프랑스로 가서 중국학 학자인 샤반(Chavannes)과 동양학 학자인 실뱅 레비(Sylvain Lévi) 등을 만나 수학했다. 이 같은 면학 끝에 그는 옥스퍼드대학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나서도, 독일에서 팔리어, 티베트어, 몽골어를 비롯한 우랄알타이어를 익히고 철학사를 공부했다.

일본으로 귀국할 때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그는 곧장 동경대 문과대학의 강사가 되어 산스끄리뜨를 강의했고, 언어학으로 개칭되기 이전의 전언학(傳言學)을 담당하다가 범어학 강좌가 개설되자 34세에 초대 담당교수가 되었다. 그는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우이 하쿠주(宇井伯壽), 기무라 다이켄(木村泰賢), 쯔지 나오시로(辻直四郎), 히가타 류쇼(干潟龍祥), 가나쿠라 엔쇼(金倉圓照), 나가이 마코토(長井眞琴), 미야모토 쇼손(宮本正尊) 등과 같은 걸출한 석학들을 배출했다.


2. 인도학과 불교학의 기초 작업

다카쿠스를 인도 연구로 이끌었던 막스 뮐러(1823~1900)는 독일 출생으로 1850년부터 옥스퍼드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서구 종교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선구적인 학자였다. 그는 《리그베다》의 원전을 교정하고 우파니샤드를 번역한 만큼 산스끄리뜨에 정통했으며 인도학, 비교언어학, 비교종교학의 권위자로 유명했다. 

그는 특히 동양의 고전들을 선별하여 번역한 《동방성서(The Sacred Books of the East)》 50권의 편집자로서 동양학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같은 그가 《관무량수경》의 원전 번역을 유학 중인 다카쿠스에게 맡겨 자신의 다른 역본과 함께 《동방성서》 제49권에 수록3)한 것은 다카쿠스의 학문적 역량을 인정했다는 증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막스 뮐러와 일본 유학승과의 인연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난조 분유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난조 분유는 카사와라 켄쥬(笠原研寿)와 함께 막스 뮐러의 문하생으로 수학했으나, 카사와라는 과도한 노력으로 병들어 귀국하고 이내 사망했다. 카사와라의 유고(遺稿)는 인도의 날란다(那爛陀)에 유학(1959~1964) 중이었던 나가사키 호준(長崎法潤)에 의해 뒤늦게 우연히 발견되었다.
나가사키가 7세기에 현장(玄奘)이 유학했던 날란다 학문사(學問寺)의 도서관에서 발견한 것은 범어로 작성된 Dharma-saṃgraha의 교정 출판본이었다. 불교 술어를 집성한 이 원전은 《법집명수경(法集名數經)》으로 한역되어 있다. 그런데 나가사키는 이 출판본의 서문으로 이것이 카사와라의 유고를 막스 뮐러와 벤첼(Wenzel)이 편집하여 출판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서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Dharma-saṃgraha의 원전에 주(註)와 색인을 덧붙인 이 판본은 가장 성실하고 근면하며 온아한 불교 승려, 카사와라 켄쥬에 의한 불후의 업적이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1876년(25세)에 영국에 와서, 1879년부터 1882년까지 내게서 산스끄리뜨를 배웠다. 그리고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서 이내 1883년(32세)에 사망하였다.

이 같은 사연은 일본의 불교학계가 세계적인 석학들을 배출하게 된 배경을 한눈에 드러낸다. 막스 뮐러의 눈에는 다카쿠스도 난조 분유와 카사와라 켄쥬처럼 성실하고 근면한 학생으로 비쳤을 것이며, 다카쿠스는 실제로 그의 기대를 훨씬 능가하는 업적을 이루어 냈다.

인도학 분야

다카쿠스는 《리그베다》를 초역(抄譯)하여 《세계성전전집(世界聖典全集)》의 전반부 15권 중 제6권 《인도고성가(印度古聖歌)》로 수록하였으며, 문하생 24명을 동원하여 우파니샤드의 번역과 감수를 추진한 끝에 《세계성전전집》의 후반부 15권 중 제3~11권(《우파니샤드 전서》 9권)으로 수록했다. 여기서 그는 가치의 비중에 따라 8종, 13종, 60종, 108종 등으로 취사선택되어 있는 우파니샤드의 전역(全譯)을 시도했다. 그는 《우파니샤드 전서》 제1권의 해제에서 이러한 시도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여기서 우리가 계획하고 있는 ‘우파니샤드 전역’에서는 모든 우파니샤드를 망라하여, 이 방면에 연구가 희박한 우리나라의 학계에 가능한 대로 그 전체를 제시하여 유감이 없게 하기를 희망한다.

그는 실제로 120여 편에 걸쳐 인도의 각파에서 전승된 우파니샤드를 일본어로 번역했다. 거의 100년 이전의 과업인 점과 다음과 같은 당시의 해외 상황을 고려하면 정말 대단한 업적으로 칭송할 만하다.

우파니샤드 13종, 60종에 대해서는 영어와 독일어 번역도 있고 연구서나 범어 주석도 있다. 그러나 126종의 우파니샤드를 외국어로 번역한 것은 일본어 번역이 최초이고, 인도 본국에서도 이러한 시도는 없었다. 선생은 많은 제자들을 동원하여 그것을 번역하게 했지만, 대개는 더 이상 손볼 것이 없을 정도로 개역하여 명실공히 선생의 번역이었다.
—鷹谷俊之 《高楠順次郞先生伝》

이 같은 전집 번역 외에도 다카쿠스는 산스끄리뜨 고전을 번역하여 단행본으로 출판했는데, 그중에서 《나가난다(Nāgānanda)》라는 산스끄리뜨 희곡을 《용왕의 기쁨》(1923)으로 번역 출판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이 작품은 7세기 무렵 북인도 일대를 제패했던 하르샤(Harṣa)왕의 작품인데, 힌두교를 소재로 하면서도 자비와 이타행을 강조하여 불교적 색채가 매우 농후하다. 더욱이 현장 법사는 저자인 하르샤왕을 친견한 적이 있다. 다카쿠스가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를 이러한 배경에서 엿볼 수 있다.

인도철학 분야에서 유럽 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업적으로는 단연 《금칠십론(金七十論)》을 불어로 번역하여 서양에 최초로 소개한 것을 꼽을 수 있다. 《금칠십론》은 인도의 육파철학 중 한역으로는 수론(數論)으로 알려진 상키야(Sāṃkhya) 학파의 주석서로 유명하지만, 산스끄리뜨 원전은 전해져 있지 않다.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상술한다.

불교학 분야

【대정신수대장경】
일본의 대장경 간행은 한국보다 훨씬 늦은 17세기부터 시작되었으며, 중국 명나라의 대장경에 의거하여 복각한 황벽판(黃檗版, 1618부 7334권)이 일본 대장경의 권위를 대변한다. 이 대장경은 황벽종(黃檗宗)의 승려인 데츠겐(鐵眼) 선사(1630~1682)의 발원으로 10여 년에 걸쳐 1678년에 완성되었다. 만복사(萬福寺)에 소장된 황벽판의 판목은 소위 축쇄장(縮刷藏) 또는 대일본속장경(大日本續藏經)으로 편집 간행되었으나, 발행 부수가 너무 적어 전체를 열람하기에는 역부족했다. 일례로 다카쿠스가 팔리어 성전과 한역 아함경의 비교 연구를 강의할 때도 연구실에 있었던 한역 경전은 축쇄장 1부뿐이었다. 사진으로 복사한 출판본도 시도되었으나 많은 문제점이 노정되었다. 이 같은 불편을 해소하고자 다카쿠스는 새로운 대장경의 편집 출판을 계획하고, 와타나베 가이교쿠(渡辺海旭)와 도감(都監)이 되어 다섯 가지 원칙을 수립한 간행취의서를 발표했다.

5대 특색을 열거하여 이것을 본 간행의 표치로 삼고자 한다.
첫째, 엄밀하고 박섭(博涉)하게 교정한다. … 
둘째, 주도면밀하고 명백하게 편찬한다. … 
셋째, 범어와 한역을 대조하고 … 범어와 팔리어 및 다른 원본이 있는 것은 최대한의 노력으로 대조한다.
넷째, 경전의 내용을 색인으로 작성한다. … 
다섯째, 새로운 이 장경으로 본래의 경전을 편리하게 휴대할 수 있도록 실비를 저렴하게 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 … 

다카쿠스는 이 사업의 일차적 관건인 첫째 원칙에 따라, 중국 및 주변 지역에서 발견된 사본들과 서구에 소장된 간본들을 대조하여 교정하는 교합소(校合所)를 분야별로 사찰과 대학 등의 다섯 곳에 설치하고 전담자들을 배치했다. 나머지 원칙들은 그의 계획대로 추진되어 총 100권에 3,493부 1,3520권의 불전을 수록하는 대총서가 완간되었다. 대장경의 구입 부담을 최소화하여 널리 보급하려는 배려가 담긴 다섯째 원칙은 전체 분량을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구현되었다. 이를 위해 간행본의 한 면마다 3단으로 구성하여 약 1,500자를 수록했다.

새로운 대장경을 간행하려는 다카쿠스의 의지는 인력으로만 실현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그 의지의 실현은 당연히 재정적 뒷받침으로 가능하다. 그가 최초의 간행을 시작할 즈음에 인쇄 직전의 지형(紙型)이 관동대지진으로 모두 불타 버렸다. 그는 이에 따른 경영의 책임을 모두 떠안게 되었고, 1934년 총 100권을 완간할 당시 그에게 남아 있는 부채는 약 30만 엔(현재 가치로는 약 5억 엔, 한국 화폐로는 약 55억 원)이나 되어,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며 만년을 지냈다고 한다.

【남전대장경】
다카쿠스는 대정장을 완간하고 나서, 이것만으로는 불교를 충분히 연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남방의 불전을 ‘소승’으로 폄하해서는 안 되며,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남방으로 전파된 불교의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가 남전대장경의 번역 출판을 단행한 것은 “인간으로서의 붓다가 인간에게 친근하게 다가가 인간을 교화하는 교설은 바로 지금 우리의 남전대장경 안에 빠짐없이 기술되어 있다.”라고 하는 지론의 구현이었다.
남전대장경의 제1권(1935년)은 8명의 문하생과 팔리어 학자가 번역에 참여하여 발간되었다. 1941년 2월에 이르러 최종 제65권이 발간됨으로써 남전대장경의 간행은 총 70책으로 완결되었다. 여기에는 율부 5권, 경부(장부 · 중부 · 상응부 · 증지부 · 소부의 다섯 니까야) 39권, 나머지 논부 및 기타 장외(藏外) 문헌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로써 원시불교의 성전을 모두 망라한다.
빨리어 불전에 대한 다카쿠스의 업적으로 세계 불교학계에 공헌한 것은 《선견율비바사(善見律毘婆沙)》의 원전 편집을 꼽을 수 있다. 산스끄리뜨 불전의 주석가로는 세친(世親)에 비견할 만한 붓다고사(Buddhaghosa)의 주석인 이 불전은 남방불교의 계율 연구에 필독서로 꼽힌다. 다카쿠스가 제자인 나가이 마코토(長井眞琴)와 함께 편집한 이 불전의 원전(Samantapāsādikā)은 팔리어 성전 편찬으로 유서 깊은 영국의 PTS(Pali Text Society)에서 1934년에 출판되었다.

3. 해외 학계를 선도한 학문

《왕오천축국전》은 프랑스의 탐험가 펠리오(Pelliot)에 의해 1908년 중국의 둔황(敦煌) 석굴에서 최초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후 당나라의 승려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졌던 이 문헌의 저자가 신라의 혜초(慧超)로 확정된 것은 1915년 다카쿠스의 연구 덕분이다. 이로써 한문 불전에 관한 다카쿠스의 학문적 역량이 재확인되었다. 다카쿠스에게는 그럴 만한 역량이 이미 입증되어 있었다.

다카쿠스의 역량이 유럽 학계에서 최초로 공인된 것은 1896년의 사례이다. 그는 의정(義淨)의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을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했다. 이 문헌은 의정이 인도에서 목격한 7세기 전후의 사정을 낱낱이 기록하여, 현장의 《대당서역기》와 함께 부정확인 인도사의 일부를 연구하는 데 지침서로 간주될 만큼 중시되었다. 의정은 인도철학계에서는 언어철학으로 유명한 바르트리하리(Bhartṛhari)에 관해 다른 문헌에서는 볼 수 없는 정보를 비교적 소상하게 제공한다. 다카쿠스의 번역으로 이 문헌이 소개되자 이후 유럽 학계에서는 바르트리하리에 관한 논의가 크게 활성화되었다.

다카쿠스는 이어서 20세기 벽두에 《바수반두법사전(婆藪槃豆法師傳)》을 영어로 번역하고, 이에 관한 논문을 1823년 창간된 영국의 유서 깊은 학술지에 발표했으며, 《금칠십론》을 불어로 번역하여 발표했다. 그의 불어 번역은 인도에서 영어로 재번역되어 남인도의 학계를 대변하는 마드라스대학의 학술지에 1932년부터 2회에 걸쳐 게재되었다. 다카쿠스가 번역한 《금칠십론》과 이에 관한 그의 견해는 나중에 《금칠십론》을 산스끄리뜨로 복원할 때 소중한 일차 자료로 참조되었다.

《바수반두법사전》과 《금칠십론》은 세친의 생존 시기 및 상키야 철학의 역사에 관한 학술적 논의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다카쿠스를 통해 비로소 두 문헌의 내용을 알게 된 당시 유럽의 학자들은 다카쿠스의 견해를 일차적인 논거로 삼아 논의를 전개했다. 다카쿠스의 견해를 계기로 이 논의가 활성화된 것은 두 문헌의 밀접한 연관성 때문이다.

《바수반두법사전》의 역자는 진제(真諦)로 알려져 있고(사실은 저자일지도 모른다), 진제는 한역으로만 전해져 있는 《금칠십론》의 역자이며, 《바수반두법사전》에서 가장 흥미로운 기사는 세친과 상키야 논사들 사이의 경쟁 관계이다. 그리고 여기서 전하는 일화를 역사적 사실과 결부하여 고찰할 경우에는 세친의 생존 연대, 상키야의 초기 역사 및 문헌 성립사 등에 관한 수수께끼를 푸는 실마리를 끌어낼 수 있다.

다카쿠스에 의해 야기된 쟁점의 사례로는 먼저 세친의 생존 연대에 대한 추정을 들 수 있다. 그가 추정한 연대는 서기 425~500년이었는데 이로부터 280~360년, 320~400년, 400~480년 등의 견해가 제기되었고, 더 나아가 고세친(古世親)과 신세친(新世親)이라는 2인의 세친이 있었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게 제기되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바수반두법사전》에서 상키야의 논사로서 세친의 논적으로 언급된 빈도하바사(頻闍訶婆娑, Vindhyavāsa)의 정체에 관한 다카쿠스의 견해도 쟁점으로 대두되었다. 고전 상키야는 자재흑(自在黑, Īśvarakṛṣṇa)이 저술한 《상키야송(Sāṃkhya-kārikā)》으로부터 전개되는데, 다카쿠스는 《상키야송》의 저자가 《금칠십론》의 원전을 작성했다는 가설을 세워 빈도하바사와 자재흑은 동일인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물론 산스끄리뜨 원전들이 새롭게 발굴되거나 많은 학자에 의해 더욱 다각적으로 연구되면서 다카쿠스의 견해가 재고되거나 일부 부정되기도 한 것은 인문학의 생리적 귀결이자 발전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선도적인 학자의 열의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이다.

이상에서 부분적으로 간략히 예시한 다카쿠스의 학문이 지금으로부터 100년 내외의 과거인 점을 고려하면, 다카쿠스는 당시 유럽의 인도학 분야에서 연마한 학문적 역량으로 곧장 그 분야에 출중하게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일본에서 이러한 역량과 열의를 최선으로 발휘하여 불교학은 물론이고 인도철학 연구에 튼튼한 토대를 구축하면서 생애를 마감했다. 영국 유학 이래 다카쿠스의 평생은 자신이 말한 불교주의를 실천하면서 현대 불교학 연구의 토대를 구축한 생애였다. ■

 

정승석
동국대 석좌교수.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철학박사. 동국대학교의 불교대학 인도철학 전공 교수로 불교대학장, 불교대학원장, 일반대학원장, 불교학술원장 역임, 주요 논문으로 〈불전과 Mahābhārata에 수용된 Rāmāyaṇa의 소재〉 〈상키야 철학에서 인식의 동시성과 순차성 문제〉 〈유식(唯識)의 이유에 대한 요가 철학의 비판〉 등 90여 편과 저서로 《인도의 이원론과 불교》 《윤회의 자아와 무아》 《버리고 비우고 낮추기》 등이 있으며, 편저로는 《불전해설사전》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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