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뮐러(Friedrich Max Müller, 1823~1900) : 과학적 종교 연구의 개척자

1. 아버지를 흠모하고 그리워한 내성적인 소년

어린 시절이란 신비와 비밀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누가 그 비밀과 신비를 말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이 어린 시절이라는 놀라운 숲을 지나왔고, 그 행복의 경이 속에서 눈을 떠 본 적이 있다. 그때는 인생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현실이 우리의 영혼에 밀려들어 왔었다. 그때 우리는 나 자신이 어디 있는지, 또 내가 누구인지를 몰랐다. 온 세상은 나의 것이었고, 나는 곧 온 세상이었다. 그때는 처음도 끝도 없는 무한한 삶(infinite life)이었다. 휴식도 고통도 없었다. 마음은 봄날의 하늘처럼, 바이올렛의 향기처럼 신선하고 명징했다. 그것은 안식일 아침처럼 조용하고 신성했다. 
— 막스 뮐러 소설 《독일인의 사랑(Memories)》 중에서

 

막스 뮐러(1823~1900)
막스 뮐러(1823~1900)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Friedrich Max Müller, 1823~1900)는 산스끄리뜨어 학자이자 문헌학자, 비교언어학, 비교신화학 및 비교종교 분야의 개척자였다. 그는 독일 출신의 귀화한 영국인으로, 그의 나이 34세 때 쓴 소설이 바로 《독일인의 사랑》(1857)이다. 종교학자라고 하면 딱딱한 논문이나 책만 쓸 것 같지만, 뮐러는 이처럼 낭만적인 소설을 쓰기도 했다. 이 책은 한때 우리나라에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맞먹는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막스 뮐러는 1823년 12월 6일 독일 데사우에서 유명한 서정시인 빌헬름 뮐러(Wilhelm Müller, 1794~1828)와 그의 아내 아델하이트(Adelheid) 사이에서 태어났다. 빌헬름 뮐러는 독일의 시인 하이네(1797~1856)가 ‘오직 괴테에게만 1위를 넘길 시인’이라고 극찬을 한 촉망받는 문인이었다. 슈베르트가 그의 시집을 우연히 읽고 감동받아 작곡한 것이 두 연가곡집 《겨울나그네》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가곡 〈보리수〉(1827)는 바로 이 《겨울나그네》(1822)에 실려 있다. 그의 어머니는 그 지역 총리의 딸로서 유력자 가문의 후손이었다. 뮐러는 어머니와 대부인 작곡가 C. M. 폰 베버로부터 음악에 대한 강렬한 사랑을 물려받아, 후에 전문가 수준의 피아니스트가 되기도 했다. 말년에는 음악에 관한 자전적 에세이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1898)도 출판했다. 

이처럼 문학성이 뛰어난 아버지와 다정한 어머니를 둔 뮐러의 어린 시절은 참 행복했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버지 빌헬름 뮐러는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28세의 젊은 아내와 어린 두 남매만 남겨졌다. 그때 막스 뮐러의 나이 겨우 4세였다. 혼자가 된 뮐러의 어머니는 한동안 그 불행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후에 뮐러는 《나의 자서전》에서, 이로 인해 자신의 어린 시절은 “모든 빛을 잃어버렸다”고 술회했다. 뮐러는 후에 아버지를 회고하는 에세이 〈빌헬름 뮐러, 1794-1828〉(1871)를 씀으로써 젊은 나이에 생을 마친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틋함, 존경심을 표현했다.


2. 빅토리아 시대의 ‘공적 인물’ 그러나 사색적 인간형

뮐러는 몇 편의 전기적 에세이를 남겼다. 대표적으로 《나의 자서전(My Autobiography)》(1901)을 통해 어린 시절과 옥스퍼드 대학 시기까지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자서전에 비친 뮐러의 모습 중 하나는 낭만적 감성을 지닌 은둔형 학자이다. 그는 자신의 학문적 경력의 성공 비결이 “한편으로는 신앙심, 또 한편으로는 이 세속적 성공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perfect indifference as to worldly success)”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자신은 전쟁터에 나가 싸워본 적도, 재산을 불리기 위해 조합에 가입한 적도 없는, 평생 공부만 한 ‘응접실학자(stubengelehrter)’라고 평했다. 그러나 뮐러는 그것이 학자의 삶이라고 말했다. 

나가서 싸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싸우게 하자. 그러나 조용한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특별한 소명이 방해받지 않게 하자. 그것이 오래된 인도의 생각(old Indian idea)이다. 그것이 인도 브라만들이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이다. 게으름이나 나태를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다. …… 나는 학자로서, 사상가로서 탐방, 편지 읽기와 쓰기, 위원회, 대리인, 회의, 회식 등 여타의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청원한다. 이기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사람들이 왜 나와 같은 사람들을 전혀 쓸모없다고 생각하는지 이해한다. 그러나 세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사의 한 사람인 율리우스 시저가 키케로의 승리와 월계관이 전쟁터의 전사들보다 더 귀하다고 말한다면, 즉 로마의 지적 영역을 넓힌 것이 로마 국민의 영토를 넓힌 것보다 더 위대한 업적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이처럼 뮐러가 조용히 칩거하기를 좋아했던 학자라고 한다면, 그가 살아생전 100여 편의 저서와 활발한 강연 활동, 그리고 방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실 뮐러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서, 공적 무대에서 주요 인물로 활동했다. 그의 대중적 인기는 1875년 런던의 패션·문화잡지인 《베니티 페어(Vanity Fair)》에 그의 만화적 이미지가 전기와 함께 실렸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독일에서 태어난 막스 뮐러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자신의 거의 모든 생애를 지내면서, 군주 · 수상 · 외교관 등 그 시대의 지도자나 유명 인사들과 폭넓은 친분을 나누었다. 이때 남긴 방대한 서신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말 그대로 그는 빅토리아 시대가 이룬 업적의 등뼈, “두텁고도 강렬한 인맥 네트워크” 속에 있었다. 그의 학문적 성취도 이런 사회적 배경과 함께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광범위한 활동과 달리, 막스 뮐러 개인의 취향은 조용하고 사색적인 생활을 즐기는 것이었다.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금전에 관심이 없고, 세상 물정을 몰랐으며, 산스끄리뜨 사본의 교정과 번역작업에 몰두하기만 하여 사람들로부터 돈키호테 취급을 받고 걱정과 냉소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모든 사람은 다 각자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each man must find his own way in life).”


3. 프랑스 거쳐 영국으로, 주요 활동 공간은 옥스퍼드대 

남편의 사망 후 한동안 우울 속에서 몇 년간 외출도 하지 않던 뮐러의 어머니는, 이윽고 지극 정성으로 뮐러의 학업을 돕고 사랑을 쏟았다. 뮐러는 나이 6세 때 공식 교육의 과정을 받게 되었다. 1841년 장학금을 받아 라이프치히대학에 입학하였고 라틴어, 그리스어, 철학, G.F.W. 헤겔을 읽었다. 1843년 19세 때 〈스피노자의 윤리학 제3서(De Affectibus)〉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뮐러는 베를린에 머물 때 산스끄리뜨어 사본을 접했으며, 셸링의 안내에 따라 《우파니샤드》와 베다 문학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뮐러는 모든 신화 및 종교 이론이 리그베다 전체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후에 그가 《리그베다》 전집의 출간을 기획하는 계기가 되었다.

1845년 막스 뮐러는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파리에 갔으며, 그곳에서 그 시대 가장 위대한 산스끄리뜨 학자 외젠 뷔르누프(Eugène Burnouf, 1801~1852) 밑에서 배우며 오랫동안 친구로 지냈다. 1846년 뮐러는 《리그베다》의 출판을 위해 런던으로 와서, 동인도 회사로부터 인쇄 비용의 많은 부분을 지원받았다. 이후 독일로 돌아가지 않고 영국에서 여생을 보냈다. 1851년 옥스퍼드대의 현대 유럽 언어 교수로 임명되었고, 1855년 영국 시민으로 귀화했으며, 1859년 조지나 애들레이드와 결혼하여 네 자녀를 두었다.

영국에서의 삶은 그에게 영광과 함께 고뇌도 안겨 주었다. 1860년 뮐러는 옥스퍼드대학의 산스끄리뜨어 교수 채용에 지원했지만, 탁월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낙선 운동 때문에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이때 교수로 채용된 사람은 모니에 윌리엄스(Monier Monier-Williams, 1819~1899)였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뮐러가 독일인이라는 사실, 또 독실한 루터교 신자라는 사실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때의 경험은 뮐러에게 큰 상처가 되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뮐러에게는 “감춰진 축복(a blessing in disguise)”이었다고 뮐러의 아들은 《나의 자서전》에서 쓰고 있다. 

왜냐하면 뮐러는 이때부터 방향을 약간 전환하여, 《리그베다》 작업과 함께 대중을 상대로 비교철학과 신화에 관한 책을 쓰고 강의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861년과 1863년, 런던왕립연구소에서 ‘언어학’에 관한 일련의 강의를 하고, 이후 인기 있는 강연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1868년 옥스퍼드대학교에 ‘비교문헌학(comparative philology)’ 학과가 개설되자 첫 번째 학장이 되었다. 

뮐러는 생애의 마지막 30년을 비교종교(comparative religion)에 관한 저술과 강의에 바쳤다. 1873년에 《종교학 입문(Introduction to the Science of religion)》을 출판했으며, 왕립연구소(1870)와 웨스트민스터 사원(1873)에서 이 주제에 대해 강의했다. 1878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종교학에 대한 연례 ‘히버트 강의(Hibbert lecture)’를 시작했고, 1888년 글래스고대학교에서 자연 신학에 대한 ‘기포드 강의(Gifford lecture)’를 시작했다. 뮐러는 1888년에서 1892년 사이에 총 62개의 강의로 기포드 강의 4개의 과정을 제공했는데, 그의 첫 번째 강의에 무려 1,400명의 청중이 참석했다. 그는 1900년 옥스퍼드 자택에서 사망했으며, 그해 11월 1일 ‘모든 성인의 날’에 옥스퍼드의 홀리웰 묘지에 묻혔다. 


4. 종교학의 아버지: 언어학에서 신화학, 종교학으로 

산스끄리뜨 전공의 언어학자(philologist)인 뮐러가 영국 학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 계기는 1866년의 논문 〈비교신화학(Comparative Mythology)〉을 통해서였다. 그것을 통해 과학과 종교는 대립적인 것이 아니며, 과학과 종교 양쪽에 모두 충실한 ‘종교의 과학(Science of Religion)’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 논문을 계기로 주목을 받은 뮐러는, 19세기 중반과 후반부터는 ‘비교 방법(comparative method)’을 이용한 과학적 종교 연구를 중심으로 대중 강좌들과 저술 활동을 펼치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뮐러의 학문의 특징은 ‘언어학’에서 ‘신화학’으로, 그리고 다시 ‘종교학’으로 관심과 분야가 이동한다는 것이고, 또 그들 영역 사이에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뮐러의 핵심적인 학문적 관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1) 종교의 기원은 무엇인가? 종교와 도덕, 신화 사이의 관계는 무엇일까?
2) 그 물음을 연구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론은 무엇일까?

1859년 출판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 이후 서구 지성사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뮐러도 종교의 기원과 발달에 주목했다. 뮐러에 의하면 종교란 인간의 언어와 같이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선천적 신앙의 능력(faculty of faith)으로서,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언어가 동원되는 것처럼, 종교도 자신의 표현을 위해 언어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만일 이때 사용되는 언어가 건강한(healthy) 것이라면, 그 종교도 역시 건강하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그때 사용되는 언어가 유아들의 언어처럼 유치한 상태에 있다면 그 종교는 건강하지 못한 종교가 될 것이다. 뮐러에 의하면 신화(Myth)란 자연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감응이 그 당시의 언어의 미숙한 발달 상태로 인해 왜곡되게 표현된 것이다. 즉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감응이 건강한 종교가 되지 못한 것이 신화이다. 뮐러는 신화를 인간 역사의 초기 단계를 보여주는 불가피한 ‘언어의 질병(disease of language)’이라고 개념화했다. 예를 들면, 자연현상에 대한 단순한 은유적 표현(metaphor)이었던 언어가, 시간이 경과하면서 점점 자연현상에 인간적 성격이 부여된 수많은 신격들로 변모되는 것이다. 이렇게 언어적 표현을 실체화하고 착각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측면에서 신화는 ‘언어가 병든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럼에도 신화는 그 속에서 무한한 것 혹은 초월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사고가 반영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종교 기원으로서 자연현상의 인격화(personification of natural phenomena)와 인격화된 자연현상에 대한 숭배는 무한한 것에 대한 인간의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현상에 대한 인간의 감응이 왜곡되어 나타난 것이 신화라는 말은, 곧 자연현상이 종교적 경험을 일으키는 일차적 원인이라는 말이 된다. 다음은 뮐러의 종교에 대한 정의를 잘 보여준다.

종교란 심적 능력(mental faculty)이나 자질(disposition)을 의미한다. 그것은 감각(sense)과 이성(reason)으로부터 독립하여, 아니 감각과 이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이름 아래서, 또는 여러 가지로 변장한 모습하에서 나타나는 무한(Infinite)을 감지(apprehend)할 수 있게 한다. 그런 ‘능력’이 없다면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저급한 우상이나 주물 숭배조차도 불가능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인다면 모든 종교에서 정신(spirit)의 신음 소리,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려 하고,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해 보려는 몸부림, 무한자 혹은 신의 사랑에 대한 동경(a longing after the Infinite, a love of God)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달리 표현하면, 뮐러에게 “종교란 무한에의 인식이 인간의 도덕적인 특성(moral character)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양상으로 표현된 것이다.” 즉 종교는 “유한자(finite)인 인간의 ‘무한(Infinite)’에 대한 감각, 즉 신성(神性)에 대한 보편적인 직관”만으로 성립되지 않고, ‘도덕 의식’이 연합되어야만 종교가 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폭풍이나 하늘, 해와, 달 뒤에서 발견한 어떤 미지의 힘을 발견하고, 그것을 위해서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낄 때 비로소 종교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5. 종교의 비교연구: “하나만 아는 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종교 연구의 방법론으로서 뮐러가 구상한 것은 ‘비교방법에 의한 과학적 방법론’이었다. 그는 언어학이나 다른 과학에서 사용하는 ‘비교의 방법’을 종교 연구에도 적용하고자 했다. 그것은 당시 통용된 과학적 방법이었다. 여기서 ‘과학적(scientific)’이라고 하는 것은 ‘귀납의 방법’과 ‘보편적 인과법칙’의 적용, ‘선험적 성격’의 배제를 말한다. 이것은 하나의 종교의 입장에서 지식을 연역적으로 추리하는 신학적(theological) 방법과 구별되는 것이다. 여기서 뮐러가 말한 그 유명한 ‘비교종교학’의 격언이 등장한다.

“하나만 아는 자는 아무것도 모른다(He who knows one, knows none).” 

뮐러는 이러한 학문적 구상을 자신의 인지도와 영향력을 통해 사회적으로 널리 인식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때부터 종교학은 ‘종교의 과학’ 또는 ‘비교종교학(Comparative religion)’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고, 종교 연구가 하나의 학문분과로 서서히 자리 잡게 되었다. 

인류의 모든 종교를, 혹은 적어도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종교들을 진정으로 과학적인 입장에서서 공평하게 비교 연구하는 일을 초석으로 삼는 이른바 ‘종교학(Science of Religion)’이 이제 그 탄생을 목전에 두고 있다. 남은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권위 있는 이들의 목소리가 그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것은 1870년, 막스 뮐러가 영국 런던의 왕립학술원에서 강연한 말로서, 후에 종교학의 초석으로 여겨지는 《종교학입문》(1873)에 실린 유명한 구절이다. 이러한 강연을 하고 학문분과 설립에 기여를 한 뮐러에게 종종 ‘종교학의 아버지(the father of comparative religion)’라는 명예로운 호칭이 따라 다닌다. 그것은 그가 단지 연구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학문분과를 주창하고 그것의 설립과 정착과정에도 큰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동방성전(Sacred Books of the East)》  (1879-1910) 총서

막스 뮐러가 한 일은 무엇인가? 그는 ‘종교학’이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업적 가운데 가장 작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가 종교학에 대한 충동(impulse)과 모양(shape), 용어(terminology), 그리고 일련의 이념들(ideals)을 주었다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  

비교종교학의 역사를 서술했던 에릭 샤프에 의하면, 막스 뮐러 이전의 종교 연구 분야는 비록 폭넓고 왕성했으나 조직적이지 못했다. 막스 뮐러 이후 비로소 하나의 방법론을 갖춘, 학문의 모습을 갖추었다. 또 학문 세계에서 하나의 새로운 힘이 실제로 태동하고 있다는 인상이 널리 실감 나게 퍼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뮐러의 생애와 저술 때문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그가 자료를 세상에 전달하는 데 발휘한 문체의 유창함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뮐러의 또 다른 명연설 일부를 음미하고 가야 할 것이다.

종교학(the Science of Religions)은 인간이 발전시킬 마지막 학문일 것이다. 종교학은 세상의 모습들을 바꾸어놓을 것이고, 기독교에도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것이다.

 

6. ‘잊힌 성전들(forgotten Bibles)’ : 《동방성전》 그리고 불교와의 만남 

뮐러의 학문적 업적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50권짜리 《동방성전(Sacred Books of the East)》(1879-1910)의 편찬이다. 그는 유럽과 인도의 최고의 동양 학자들로 구성된 소규모 팀을 조직하고 동양의 신성한 책의 번역 시리즈를 출판하기 시작했다. 그 자신도 《리그베다》 《우파니샤드》 《담마파다》 등 불교 경전의 일부를 번역했다. 뮐러가 사망할 당시인 1900년까지 48권의 번역본이 출판되었고, 한 권은 출판될 예정이었다. 마지막 50번째 권은 모리츠 빈테르니츠(Moriz Winternitz)에 의한 인덱스 작업으로서 1910년 출판되었다.

뮐러는 《동방성전》을 편찬하면서 그 당시 유명한 학자 거의 전부를 편집인, 번역자, 주석자로서 참여시켰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도학(Indology) 분야에서 가능한 최고의 수준의 결과물을 산출하였다. 이들 학자는 리즈 데이비스(Rhys Davids), 헤르만 올덴버그(H. Oldenberg), 제임스 레게(J. Legge) 등 쟁쟁하다. 전집의 구성은 총 6개의 비기독교적 종교들, 즉 힌두교(우파니샤드와 베다) 21권, 불교 10권, 자이나교 2권, 조로아스터교 8권, 이슬람 2권, 중국(유교와 도교) 6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방성전》은 사실상 오랜 시절 ‘잊힌 성전(forgotten Bibles)’들로서, 종교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추적하기 위한 막스 뮐러의 노력 결과이다. 이 전집의 출판은 비교종교의 방법론을 실제 적용한 대표적 사례일 뿐만 아니라, 이후 서구에서의 소위 ‘종교 간 대화’의 토대를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종교별, 지역별 안배가 불균형하고, 동양문화가 서구의 이해와 해석의 구조에 따라 배열된 것이라는 오리엔탈리즘적 문제 제기도 있다. 

한편, 막스 뮐러는 불교연구 영역에서도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1880년 일본의 정토진종 승려인 난조 분유(南條文雄, 1849~1927)와 가사하라 겐주(笠原研寿, 1852~1883)가 막스 뮐러로부터 서구의 산스끄리뜨와 불교문헌학을 공부하기 위해 옥스퍼드로 왔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서구의 문헌학을 수용한 최초의 동양 불교학자가 되었다. 

반면, 뮐러는 그들에게서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산스끄리뜨 불교 문헌을 구입했고, 막스 뮐러의 대승 경전 번역은 난조 분유 등의 일본 유학생들의 협조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난조 분유는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의 근대적인 불교학의 기초를 세우고, 막스 뮐러의 종교학 책을 번역해 일본에 소개했다. 《동방성전》의 제49권 가운데 《관무량수경》을 번역한 사람은 대정신수대장경의 편찬자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郎, 1866~1945)였다. 다카쿠스 역시 1905년 옥스퍼드대학으로 유학하여 뮐러의 지도를 받은 학자였다. 이런 업적 등으로 뮐러는 동아시아의 근대 불교학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준 대표적 학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7. 고대 인도 동경했던 암체어 스칼라(armchair scholar) 

학문 초기부터 인도 연구에 몰두한 막스 뮐러는 《베다》의 종교를 ‘자연종교(natural religion)’에 가장 가까운 이상적 종교로 인식했다. 그리고 인도가 자연이 베풀어준 위안과 아름다움을 가장 풍부하게 지닌 나라라고 생각했다. 인도에서는 자연현상 배후로부터 ‘무한’을 찾아내는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과, 신화의 쇠퇴 과정이 시작되기 전에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무엇을 도출해내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고 하였다.  

베다의 찬송에는 신성의 첫 계시, 최초의 경이와 의아해하는 심경의 표현을 통해, 가시적이고 소멸해가는 세계의 뒤편에는 무엇인가 눈에 보이지 않고 영원불멸한, 혹은 신성한 것이 있음에 틀림없다는 최초의 발견이 담겨 있다 … 베다의 주요 신들은 거의 예외 없이 물리적인 성격의 흔적을 분명히 지니고 있다. 그들의 이름만 보더라도 뚜렷한 자연현상, 즉 불, 물, 비, 폭풍, 해, 달, 하늘, 땅 등의 명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신과 영웅들은 아시아든 유럽이든 아리아어(Aryan)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정착한 곳이면 어디에서든 신화 전통의 핵심이 되었다.

뮐러에 의하면 신의 계시란 어떤 특정한 텍스트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이 창조한 자연 속에 있다. 그리고 세계의 종교사와 문헌들은 신에 의해 심어진 본래적인 종교적 능력을 완성하기 위해 인간이 시도하였던 긴 시간의 기록들이다. 뮐러가 즐겨 인용한 성 오거스틴(St. Augustine)의 한 구절이 있다. “모든 종교는, 가장 불완전하고 가장 낮은 것일지라도, 우리에게 성스러운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들에는, 비록 그것이 알려지지 않는 신이라 할지라도, 진리를 갈망하는 어떤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즉 뮐러에게 종교사란 하나의 사다리로서, 그것의 가로장들은 당시의 신 관념의 가장 완전한 표현들이다. 그것은 사상과 언어의 복합적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 것들이다. 이들은 진화하는 과정으로서, 그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의미가 담긴 것이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베다는 인류가 ‘무한’을 자연 속에서 파악하는 그 능력을 최초에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기록이다. 베다의 저자들은 신들의 이름을 바꾸어 부르며 때에 따라 그 각각의 신을 최고의 신으로 섬겼는데, 뮐러는 이 베다의 종교를 ‘단일신교(henotheism)’ 혹은 ‘교체신교(kathenotheism)’라고 불렀다. 뮐러의 종교진화론적 도식에 따르면 종교사는 이 단일신교의 단계에서 다신교(poly-theism)로, 그리고 최종적 단계인 유일신교(monotheism)로 발전하게 된다.  

이와 같이 뮐러의 인도 사랑은 크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 인도에 가보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뮐러가 사랑한 인도는 고대의 베다의 땅(ancient land of Vedas)이었을 뿐, 현실의 인도는 아니었다. 반면, 인도인들은 달랐다. 인도인들은 그를 열렬히 사랑했다. 흔히 ‘괴테 인스티튜트’라고 불리는 세계 각국의 독일문화원 중, 인도에 설립된 독일문화원만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막스 뮐러의 집(Max Mueller Bhavan)”이라는 명칭을 병기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를 알 수 있다. 


8. ‘종교개혁’ 통한 세계평화와 종교 일치 꿈꾼 이상주의자

막스 뮐러에 대한 오늘날 학자들의 평가는 매우 다양하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하나의 ‘보편 종교(universal religion)’의 구상에 대한 비판이다. 뮐러는 미래에 세계의 수많은 각종 진리의 보고들로부터 도출된 ‘하나의 새로운 형태의 종교(a new form of reli-gion)’가 출현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것은 ‘진정한 인간성의 종교(true religion of humanity)’가 될 것이었다. 여기서 초점은 종교의 기준, 표준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 될 것이다.

그런데 뮐러의 궁극적 목표는 기독교의 우산 안에 모든 종교를 수렴하는 사상체계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 중심에 기독교라는 표준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기독교의 우월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뮐러는 ‘미래의 진정한 종교’는 과거의 모든 종교를 충족시킬 것이며, ‘이 새로운 종교의 핵심은 여전히 기독교, 즉 예수의 윤리적 · 도덕적 이상에 근거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뮐러의 이상적인 새 종교 속에는 기독교 중심론과 아리안 인종주의 · 제국주의적 면모가 결합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다양한 비판과 평가가 있다. 이 가운데 바람 다트 바티(B. D. Bharti)는 뮐러가 평생 베단티스트적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사실은 기독교제국주의자에 불과했다고 혹독한 비판을 하기도 했다. 

최근 한국의 연구자들에게서도 동일한 맥락에서 뮐러에 대한 비판 움직임이 포착된다. 뮐러의 종교 이론은 사후 엘리아데의 운명과 같이 명예를 잃었으며, 그의 신화 이론도 오늘날 따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반면에 뮐러에게 오리엔탈리스트로서의 면모를 넘어 동양의 학자와 협력을 추구한 긍정적 얼굴도 있다거나, 세계평화를 위한 뮐러의 노력과 꿈, 그의 베단타 연구와 ‘브라모 사마지(Brahmo Samaj)’협회에 대한 기여를 순수하게 높이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막스 뮐러의 종교학이 그 당시 기독교계 인물들로부터도 혹독한 비판과 불신을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하나의 보편적 종교에 대한 뮐러의 기대가 반드시 서구 편향적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 당시 시대적 한계 속에서 뮐러로서는 전 인류의 종교적 유산을 아우르려는 보다 진전된 종교 인식과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종교학, 지금은 단지 하나의 바람(desire)과 하나의 씨앗(seed)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때가 되면 완성되고 충만한 추수를 거둘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그 추수의 시간이 되어 세계의 모든 종교의 가장 깊은 토대들이 자유롭게 놓이고 복구되면, 이 토대들이 …… 더 나은, 더 순수한, 더 오래된, 더 진실한 어떤 것을 동경하는 사람들을 위한 안전한 하나의 안식처(a place of refuge)가 될 수 있을지? ■

 

송현주 songcloud@naver.com
서울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졸업(철학박사). 주요 논문으로 〈현대 한국불교 예불의 성격에 관한 연구〉 〈근대 한국불교의 종교정체성 인식: 1910~1930년대 불교잡지를 중심으로〉 〈여성에 대한 불교의 시선, 불교에 대한 여성의 시선〉 〈불교는 철학적 종교-노우에 엔료의 ‘근대일본불교’ 만들기〉 등과 저서로 《근대 한국 종교문화의 재구성》(공저) 등이 있다. 현재 순천향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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