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깊은 불심나는 1944년 1월, 서울 성북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경성의전병원(京城醫專病院, 현 서울대학병원)에서 의사와 간호사로 근무하던 중 결혼하셨다. 그 뒤 아버지께서는 충남도립병원장을 거쳐 고향인 충북 음성군 금왕으로 이사하고, 영제의원(寧濟醫院)을 창업했다. 나는 부모님을 따라 금왕에 있는 무극초등학교와 무극중학교를 다녔다. 나의 제2의 고향은 어린 시절 15년간을 살던 금왕인 셈이다.어머니 고원만심(高圓滿心) 보살은 신심이 깊은 분이었다. 어머니는 평생 세 군데에 절을 지으셨다. 첫 번째는 금왕부인회의
서른에 부처님을 만나다1938년 음력 동짓달 초사흘, 나는 창원 합성리에서 태어났다. 아 버지는 시골 선비 김기성(金基聲), 어머니는 김대광명(金大光明) 보살로 나는 이 두 분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마을 뒤로는 옥천 (玉川)이라는 작은 시내가 ‘촐촐촐 콸콸콸’ 흐르고 있었다. 나는 이 옥천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백일홍 나뭇가지에 올라 매미처럼 노래 하며 자랐다. 지금도 옥천 물소리는 내 깊은 영혼 속에서 순수한 열 정으로 흐르고 있다.초등학교 5학년 때 마산으로 이사를 갔다. 그때부터 나는 ‘마산 사 람’이다. 마산상고를 졸업하고
불교 입문내가 태어나서 자란 시대는 전반적으로 향학열이 높았다. 그때 유행한 노래 중 하나가 “젊은이는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룩하기가 어려우니 짧은 시간이라도 가볍게 보내지 말라(少年은 易老하고 學難成하니 一寸光陰이 不可輕이라)”는 내용이었다. 나의 부모님도 열성적이셨다. 6 · 25 때 서울에서 낙향하여 시골에 사시던 부모님은 중학교부터는 나를 서울로 유학(?) 보내셨다. 나도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여 열심히 공부했다. 나는 학창 시절에 불교를 접하게 되었다. 부모님을 따라 가끔 절에 갔지만, 의식적으로 종교를 불교로 선택한 건 체
나는 늘 이렇게 생각한다. ‘정말 입산하기 잘했다. 내가 만일 시골 촌구석에 그대로 있었다면 무엇이 되었을까? 입산해서 불교를 만나게 되었고, 대석학인 탄허 노사를 만나게 되었고, 학문을 알게 되었고, 천직인 불교출판을 하게 된 것은 내 인생의 최고의 선택이었다’라고. 출가, 입산1965년 12월 4일 아침 8시, 집을 떠나 월정사로 입산했다. 열네 살. 강원도 산골짝엔 싸락눈이 흩날렸다. 다리를 건너 뒤돌아 집을 바라보니 그때까지도 어머니는 마루 끝에 서 있었다. 아마 내가 전나무 숲속으로 사라질 때까지도 거기에 서 있었을 것이다
여섯 글자의 화두1993년 가을이었다. 1993년은 국가가 ‘책의 해’로 정한 해였고, 그때 마침 나는 ‘책의 해’ 행사를 주관해야 할 출판문화협의회의 기획 · 홍보담당 상임이사를 맡고 있었으므로 종로 한복판 경복궁 동쪽 문 앞에 자리 잡은 출판협회에 매일 출근하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협회 회관 바로 옆에 있는 법련사의 청학(靑鶴) 스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법정(法頂) 스님께서 만나고 싶어 하시니 시간을 좀 내달라는 말씀이었다.그날 밤, 다 쓰러져가던 납작집 법련사 뒷방에는 법정 스님, 헌화 스님, 청학 스님, 그리고
어린 시절 내가 자란 곳은 소백산 아래 풍기다. 5백여 년 전 양주에서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남으로 피란해온 곳이 영주시 장수면 토계. 송가만 사는 집성촌이다. 50여 집이 종씨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경찰 간부로 있었던 아버지가 공직을 그만두시고, 외가댁과 친구분이 많은 풍기에 안착하였다.어렸을 때, 간혹 기억이 나는 것은 대여섯 살 때쯤 절에 갔던 일이다.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소백산 죽령 중턱에 있는 백룡사(白龍寺) 신도였다. 백룡사는 소백산 죽령 도로 밑, 큰 바위와 바위 사이에 있는 작은 절이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우리 집에
고향 강릉에서 불교를 만나다내 고향은 강원도 강릉이다. 강릉시 금학동에는 강릉포교당 관음사가 있다. 강원도 3본사(유점사, 건봉사, 월정사)가 연합하여 영동지방의 중심도시 강릉 지역의 포교를 위하여 1922년 강릉포교당을 개원하면서 창건된 사찰이다. 관음사는 부설 유치원도 함께 개원해 운영했다. 1923년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그 명부가 발견되어 이곳이 우리나라 유아교육의 남상지(濫觴地)임을 입증했다. 이 절에 강릉불교학생회가 있었다. 중 · 고등학생 불자들의 모임이었다. 1963년 나는 중학생이 되면서 학생회의 일원이 되었
1. 죽음이라는 것강릉여중 3학년 시절이었다. 매일 아침 이른 새벽 동틀 무렵이면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 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하고 젊은 군인들이 노래를 부르며 ‘하나! 둘!’ 구령에 맞추어 훈련하는 소리를 듣고 선잠을 깨고는 했다. 창설된 사단 신병들의 훈련 소리였다. 어느 날 누군가 ‘담요를 준비해 학교를 지키러 오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38선이 가까운 강릉은 일찍 포위되어 날벼락 같은 6 · 25사변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에는 문교부 산하 ‘학도호국단’이라는 학생군단이 전국적으로 조직되어 있었는데 여학교에도
강산(糠山)절강산절. 우리는 그 절을 그렇게 불렀다. 내가 우리 나이로 다섯 살 때 약 여섯 달 동안 생활했던 절이다. 어머니가 앞장서고 머슴의 지게에 얹혀 산길을 십 리나 걸어서 들어간 절이었다. 전라남도 무안군 해제면 신길리 강산이라는 산속에 묻힌 절. 지금 생각나는 건 거의 없다. 조그만 대웅전과 풀이 무성한 마당 건너에 요사가 있던 작은 절. 절 뒤편의 옹달샘에서 개구리 알을 막대기로 헤집었던 기억이 있을 뿐. 나중에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로는 내가 태어날 때 포대기를 뒤집어쓰고 나온 탓에 절에 목숨을 팔아야 했고, 아버지가
어머니의 합장7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탑골승방(현 보문사) 부처님 앞에 합장하고 서 계신 어머니의 뒷모습. 초등학교 5학년짜리는 제법 먼 길을 걸어 기도 중인 엄마를 보러 갔었다. 한복을 입고 간절하게 두 손을 포갠 어머니의 뒷모습은 왠지 낯설고 조금은 거룩해 보였다. 선뜻 다가서지도 못하고 절 마당에서 한참 동안이나 서성거렸다. 그 한낮의 기온이 지금도 기억된다. 고요한 마당에 울려 퍼지는 독경 소리. 그분의 합장 속에 드리워진 비원(悲願)은 무엇이었을까? 이제 겨우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머니의 아들, 나는 왕
불교학도가 되기까지나는 대대로 기독교를 신봉하던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청소년 때까지 예수 믿는 일은 나의 일상이었다. 주일학교를 거쳐 매주 수요일 밤, 일요일 낮에는 교회를 다녔고, 집에서도 온 가족이 토요일 날 모여 가족예배를 보았다. 고역이라면 한 달에 한 번쯤 돌아오는 나의 기도시간인데 어른들 앞에서 찬양과 참회를 섞어서 점잖은 표현을 하는 일이 힘들고 싫었다. 불교와는 철저히 차단되었고, 고2 때 불국사로 수학여행을 갔던 것이 불교와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예수 믿는 줄 알고 성장하였다.대학
“내가 남들보다 더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었던 덕이다”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의 표현을 잠시 차용해본다면 내가 불제자임을 자각하고 공명정대한 불법을 수지하게 된 데에는 불교계의 큰 거목 법정 스님과의 남다른 인연 덕이라고 생각한다. 법정 스님과의 첫 만남은 1968년 초 서울 명동에 있던 대한전척 사옥의 〈대한불교〉(현재의 〈불교신문〉) 기자 공채 시험장에서였다. ‘작문’ 시험 시간에 감독관으로 들어온 분은 훌쩍한 키에 파르라니 삭발한 두상에서 서릿발 같은 기상이 느껴지는 스님이었다. 그분이 당시
나의 삶 나의 불교. 나의 삶이란 내가 살아온 역사일 것이요, 나의 불교란 나와 불교는 어떤 관계인가를 말하는 것이다.내가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철학과를 입학할 때부터 나는 불교와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이미 나의 자의적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온 역사는 동국대학교의 울타리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동국대학교 생활이 나의 삶의 역사이다. 얼마 동안 다른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한 때가 있긴 하였으나, 그때도 동국대 강사와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있었으니 동국대학교를 떠난 적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첫 종교 생활 나의 종교 생활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어릴 때 나는 서울의 종로구와 서대문구를 잇는 사직터널이 생기면서 없어져 버린 동네, 사직동의 끝자락에서 살았다. 교회는 사직공원 앞에 있었다. 동네 아이들을 따라간 것이 아니었나 싶다.교회에서 배우는 것은 학교와 달랐는데, 재미있었다. 동요, 동시를 읽을 때였으니 3, 4학년쯤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이 동시를 가르쳐 주시면서 다음에 올 때는 하나씩 지어오라고 했다. 집에 와서 동시를 짓는데 잘 안됐다. 이 책 저 책을 뒤지다가 아주 멋진 동시를 발견했다. 거침
1. 나의 아버지 백운암 거사 나의 아버지는 평생 염주를 걸고 사신 가라월(거사)이셨다. 법호를 백운암(白雲庵)이라 했다. 우리 집안은 내 조부 대까지는 볏백이나 거두는 유족한 집이어서, 할아버지는 독사장(獨師丈)을 모셔놓고 외아들인 내 아버지에게 사서삼경을 가르치게 하셨다. 그런데 문제의 아버지였다. 20대 초반부터 가출을 해서 낭인 생활을 한 것이다. 수소문해서 찾아다 놓으면 또 나가곤 했다. 집에서 농감이나 하고 있으면 가족과 당신이 편할 것인데, 온 집안에 걱정을 끼쳤다. 편한 것을 귀찮게 여기는 젊은이였다.아버지가 주로 머
1.꼭 그런 건 아니겠지만 여느 평균인들도 믿음/신앙에 드는 데는 나름의 계기가 있다. 물론 모태신앙의 경우는 다를 수 있다. 집안 전래의 깊은 신앙 속에서 그 분위기나 믿음에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할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가 아닐 때는 나름의 계기가 있다. 예컨대 자식을 일찍 가슴에 묻은 어머니의 경우도 그 한 예일 터이다.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장년의 나이에 그만 하세한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절에 다니기 시작했다. 막막한 기댈 데 없는 마음을 기대기 위해 그니는 부처님을 찾았던 것이다. 아들이 죽은 뒤홀어머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