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불교

1. 나의 아버지 백운암 거사  

나의 아버지는 평생 염주를 걸고 사신 가라월(거사)이셨다. 법호를 백운암(白雲庵)이라 했다. 우리 집안은 내 조부 대까지는 볏백이나 거두는 유족한 집이어서, 할아버지는 독사장(獨師丈)을 모셔놓고 외아들인 내 아버지에게 사서삼경을 가르치게 하셨다. 그런데 문제의 아버지였다. 20대 초반부터 가출을 해서 낭인 생활을 한 것이다. 수소문해서 찾아다 놓으면 또 나가곤 했다. 집에서 농감이나 하고 있으면 가족과 당신이 편할 것인데, 온 집안에 걱정을 끼쳤다. 편한 것을 귀찮게 여기는 젊은이였다.

아버지가 주로 머문 곳은 우리 마을인 의성 땅에서 백릿길이 훨씬 넘는 상주 남장사(南長寺)였다. 아버지는 여기서 불도의 경전을 공부하고 참선을 하셨다. 아버지가 따르고 싶은 길이 유성출가(踰城出家) 하신 부처님뿐인데, 가정이 있어 그러지 못하자 절에 가서 공부하신 것이다.

아버지가 가정에 정착하고 아래 윗마을 구장(區長) 노릇을 하시게 된 것은, 할아버지가 아들 걱정을 하며 세상을 떠나신 후의 일이었다. 이후 만주에 이민을 가서 4년을 살다가 되돌아오니 집과 재산이 줄어, 우리는 오막살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면내에서 유일했던 대학생(만주 길림 師道大學 재학, 후일 경북대 교수)이었던 형(鉉鑽)이 형수를 데려갔기 때문에, 가족은 아버지와 내 아우와 나의 세 식구였다. 당연히 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이런 홀아비 생활에서도 아버지의 불심은 대단했다. 집에서나 들에서나 염주를 걸고 계셨고, 저녁이면 남장사가 있는 서쪽을 향해 독경하면서, 불도보다 더 큰 것은 없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초하루 보름이면 치성을 올리셨다. 아버지는 나와 아우에게도 경을 같이 읽자고 하셨다. 이것은 대단한 고통이었다. 우리 집은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길쌈과 바느질, 빨래를 할 사람이 없었다. 나와 아우는 때 묻고 찢어진 옷 때문에 마을 애들에게 멸시를 당했다. 그런 형편에 다라니의 관음(觀音)에게 귀의하는 좋은 범어송(梵語頌) ‘도로 도로’ ‘다라 다라’ ‘못자 못자’는 아이들의 놀림감일 뿐이었다. 그래서 경 읽기가 싫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밥 먹기 전과 다 먹고 난 다음에 합장까지 하라고 하셨다. 이것도 하기 싫어서 아버지가 보고 있을 때만 두 손을 모으는 척했다.

어쨌든 나는 아버지의 강압에 못 이겨 국민학교 때부터 경을 잘 외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는 중간 부분까지 외우다가 앞부분으로 되돌아가기도 했지만 곧 시정이 되었다. 《천수경》 〈십원문(十願文)〉에서 원아속지(願我速知), 원아조득(願我早得) 등, 속(速)과 조(早)가 혼동되던 것도 이내 고쳐졌다. 이리하여 나는 알게 모르게 불도를 제법 알게 되었다.

 

2. 불교 어린이 운동 참여  

나는 중학교를 거쳐 사범학교에 다녔다. 내가 다닌 학교는 안동사범이다. 학교에 다니면서는 한때 교회에도 다녔다.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많은 일을 해준 기독교라는 종교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교회에 다니면서는 성경을 갖고 다니며 열심히 읽고 주기도문도 외우고 찬송가도 불렀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가 생활에 맞는 종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계속 교회에 나갔으면 현대생활에 맞는 기독교 신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동양사를 배우면서 아편전쟁의 원인과 결과에서, 또 월남의 패망사에서 기독교가 침략을 도운 사실을 알았다. 서양사를 배우면서 서양의 수많은 전쟁 원인이 종교 때문이라는 걸 배웠다.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의 식민지 개척에서 원주민 학살을 종교가 방조한 사실까지 알고 보니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사랑과 평화를 가르치는 종교가 어떻게 증오와 전쟁의 앞잡이가 된단 말인가. 그때 나는 다시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늘 평화의 종교는 불교뿐이라고 말씀했다. 또 불교는 우리의 역사요 문화라고도 했다.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 생각이 옳다는 걸 깨달았다.

1955년, 사범학교를 졸업한 나는 1958년부터 상주 읍내 상주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상주는 경상도라는 도명(道名)에 들어갈 만큼 한때 번성하던 곳이어서 읍내에는 상주포교당이 있었다. 포교당에는 청년회, 중고등학생회, 어린이회가 있었다. 나는 1958년부터 상주포교당에서 불교 어린이 운동을 시작했다. 상주는 아버지께 오계(五戒)를 내린 남장사가 있어서 좋았다. 이 무렵 나는 아버지가 그때까지 사용하던 ‘불도’라는 말을 ‘불교’로 바꾸어 불렀다. 아버지가 가르치신 ‘불도’를 교과서에서 ‘불교’라 하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었다.

상주포교당에서 불교어린이회를 조직하고 서투른 솜씨로 법회를 시작했지만, 어린이라고는 나의 담임반 아이들이 중심이었다. 법당에 어린이들을 앉혀 놓고 어린이 법회를 열었다. 아이들은 내가 부처님 앞에 참배하는 걸 보고 따라서 했다. 선생님이 절을 하니 같이 하는 것이었다.

어린이들은 부처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 노래도 잘 불렀다. 아쉬운 점은 교재가 부족했다. 찬불가는 〈둥글고 밝은 빛〉 한 곡뿐이었고, 〈산회가〉가 있었다. 아직 한글대장경이 간행되기 이전이어서, 설법 교재로는 《팔상록(八相錄》이 고작이었다. 《팔상록》은 명나라 보성법사(寶成法師)가 쓴 부처님의 응신(應身) 일대기를 우리나라에서 안진호 스님이 177개 이야기로 엮은 것이다. 한글대장경이 나오기 전까지 가장 많이 읽히는 부처님 이야기책이었다.

내가 중심이 된 상주 불교어린이회에서는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가까운 남장사에서 여름학교도 열고 학예회를 차리기도 했다. 나도 젊은 시절이었으니 열성을 다 바칠 수 있었다.

이 무렵 나는 불교운동이 민족운동이라고 생각했다. 불교운동은 외래문화 침입에서 우리 문화를 지키는 문화적 독립운동이기도 하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었다.

3. 동시로 시작한 문단 활동  

나는 본시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한때 제법 열심히 소설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내가 아동문학으로 전환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초등학교에 재직한 것이 계기였을 것 같다. 교직에 있으면서 어린이 글짓기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김성도, 강소천 선생 등 아동문학가들을 만나 아동문학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었다.

1959년 나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해서 동시가 가작으로 뽑혔다. 상주포교당 불교어린이회 지도 선생이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에 나타나다니, 이것은 시골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이며 부처님의 가피였다. 당시 신춘문예 심사위원은 아동문학의 윤석중, 시의 양주동, 소설의 정비석 · 최정희, 희곡의 유치진 선생 등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분들이었다. 그분들을 바라보는 것만 해도 황홀했다. 시상식에서 윤석중 선생은 20대 청년인 나를 앞에 놓고 뜨거운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눈물 나도록 고마운 일이었다.

격려를 받고 나니 결심이 생겼다. 이왕 시작했으니 세계적인 작가가 돼 보자는 다짐이었다. 열심히만 하면 시방상주 하시는 부처님이 도와주실 거라는 신념과 자신감이 생기기도 하였다. 한국의 아동문학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동화가 아닌 동시로 현대 아동문학을 시작한 역사가 있다. 오늘날 한국은 동시를 쓰는 시인이 많고, 좋은 동시가 생산되는 나라로 세계 아동문학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1961년, 나는 당시로써는 큰돈인 1만 원을 들여서 첫 동시집 《아기 눈》을 펴냈다. 반응이 대단히 좋았다. 나의 문학 원력이 이루어져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우리 문단은 율문, 산문을 합쳐 40명이 채 안 되던 시대였다. 그러다 보니 아동문학은 문학인조차 이해하는 이가 드문 개척 분야였다. 그렇기 때문이었을까, 문학인들은 아동문학에 대해서 아무렇게나 입방아질을 하는 이가 있었다. 나는 이에 개의치 않았다.

학교를 대구로 옮겨서 근무할 때인 1964년에 제2 동시집을 냈다. 제목은 《고구려의 아이》였다. 이 시집에서 나는 동시가 노랫말 투의 정형시가 아니라, 자유시와 같은 이미지의 시임을 보여주었다. 시적 소재도 역사와 우주 등으로, 동시의 영역을 넓히는 데에도 성공을 거두었다는 평을 얻었다. 또한 동시로도 서사장시(敍事長詩)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고구려의 아이〉가 그 본보기 시 작품이었다. 덕분에 〈고구려의 아이〉는 꽤 많이 알려져, 나의 필명이 되기도 했다.

만세 100년의 해인 지난해(2019)에, 나는 제36 동시집 《만세 100년에》를 출간했다. 마침 등단 60년이라, 제자들 권유에 못 이겨 등단 갑년 잔치를 하게 되었다. 제자들이 차린 잔치였는데 제36 동시집 출판기념회를 겸했다. 60년 동안에 동시 36집을 낸 것은 오로지 시방에 상주하시는 부처님 가호로 이룬 것이었다.

오랫동안 아동문학에 매진하다 보니 몇몇 작품은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동화 〈숙제로봇〉과 동시 〈참새네 말 참새네 글〉이 그것이다. 또 《본생경》 54화를 개작한 〈손대지 않은 암라나무〉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이 동화는 1992년 현암사에서 나온 《어린이 팔만대장경》 제2권에 나오는 첫 번째 이야기다.

나는 특별히 역사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저들의 것으로 하겠다며 ‘동북공정(東北工程)’을 내세우자 이에 격분한 나는, 고구려 옛 땅인 둥베이(東北)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난 다음 항동북공정(抗東北工程) 시집을 엮었다. 제호는 《동북공정 저 거짓을 쏘아라!》(2013, 세손)였다. 

일본의 아베(阿部)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서 그런 일 없다고 잡아떼는 것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나는 처녀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데이신따이(挺身隊) 잡아가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본 대로의 사실을 시로 엮고, 경험한 일제 말년을 그대로 형상화한 격분의 항일시집 《속 좁은 놈 버릇 때리기》(2015, 시선사)를 펴냈다. 이 항일시는 대한민국 순국선열유족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순국(殉國)》에서 지금까지도 연재되고 있다. 덕분에 이 시집으로 2015년, 한국자유문인협회(대표 신세훈)에서 시상하는 한국자유문협상을 받기도 했다.

 

4. 불교 아동문학회 조직과 활동

1975년, 나는 대구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 한국일보사의 자매지 〈소년한국일보〉로 직장을 옮겼다. 1960년에 창간된 〈소년한국일보〉에는 조풍연, 김수남 선생 같은 어린이 운동 선구자가 있었다. 나는 이 신문사에서 마련한 세종아동문학상을 수상한 것이 인연이 되어 입사하게 되었다. 회사는 이 신문을 통해 어린이 운동 차원에서 각종 어린이 행사를 많이 개최했다. 신문사에서 나는 편집부 기자를 거쳐 취재부장으로 일했다. 그러는 사이 공부를 계속했다. 사범학교 졸업은 고등학교 학력이었으므로, 대구에서 근무할 때는 야학으로 학사 자격을 얻고, 서울로 와서는 단국대학 대학원에서 석 · 박사 과정을 마쳤다. 박사학위 논문은 〈한국 동시문학사(童詩文學史) 연구〉였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나의 불교 활동에도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불교 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 장경호 거사가 설립한 대원불교대학(야간 2년)에도 나가 공부를 했다. 미타사(彌陀寺)에 주석하셨던 대은(大隱) 스님을 계사로 오계를 받고 선행(善行)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극락에 계시는 아버지처럼 나도 이제 가라월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 칠보사(七寶寺)에 주석하던 석주 스님을 자주 뵙게 된 것이 행운이었다. 스님은 안동이 고향으로 어린이 포교에 관심이 많은 어른이었다.

1982년 불심(佛心) 김종상, 진우(眞愚) 조철규, 무상(無相) 김진식, 그리고 나 선행(善行) 신현득 네 사람이 뜻을 모아 불교아동문학회를 결성했다. 초대 회장으로는 원로 소설가 김동리 선생을 추대하고 나는 총무가 되어 심부름을 맡았다. 뒤에는 회장도 했다. 우리가 한 일은 불교아동문학상 제정과 회보를 발간하는 일이었다. 어린이 포교에 관심이 많은 석주 스님이 1천2백만 원의 거금을 내놓으셨다. 우리는 이 기금을 잘 굴려서 한국불교 아동문학상 상금과 회보 · 회지 발행 비용에 충당했다.

불교아동문학상 1회 수상자로는 부산의 아동문학 대가 향파(向破) 이주홍(李周洪) 선생을 모셨다. 상금 100만 원은 당시의 한국 아동문학상 상금으로는 최고액이었다. 찬불가 운동과 작사에 힘을 쏟아온 운문(雲門) 스님이 3회 수상자가 되었다. 올해 2020년에는 제37회 한국불교 아동문학상이 시상될 예정이다.

한국불교아동문학회는 아동문학 단체로는 매우 모범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40여 년 동안 꾸준히 회원들이 늘어나 현재는 우리나라에서 동화 동시를 쓰는 유수한 아동문학가 80여 명이 소속돼 활동하고 있다. 이 단체는 매년 회원들 작품을 모아 연간집을 발간하는 외에 세계 최초의 동화집으로 알려진 《본생경》을 불교동화로 개작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까지 회원들의 공동작업으로 10집을 발간했다.

2020년에는 김일환 현 회장의 노력으로 이솝우화가 된 불교설화만을 엮은 유아 동화집 《이솝이 빌려 간 부처님 이야기》를 발행한다. 이 밖에도 불교아동문학의 나아갈 길을 모색해보는 세미나 개최와 논문집 발간, 불교어린이 글모음집 간행 등의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이런 사업들은 일반 아동문학 단체들에 비해 매우 오랫동안 지속해온 모범적인 사례다. 그 바탕은 우리가 불교아동문학회를 창립할 때 석주 스님이 거금을 쾌척해서 밑거름을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다. 오늘의 불교아동문학을 생각하면 두고두고 감사할 일이다.

 

5. 팔만대장경은 이야기의 바다  

세계의 아동문학 명작은 모두 개작된 작품이다. 예컨대 우리에게 알려진 안데르센 동화나 그림 동화는 원작 그대로가 아니다. 출판사에서는 원작을 문장의 난이도와 길이를 학년성에 맞추어서 다시 개작한다. 그러므로 아동문학 고전에서 산문은 원작이 거의 없다. 개작은 아동문학의 특수성인 독자 수용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당연한 것이다.

한국 불교아동문학회 회원들이 경전을 동화로 개작하는 작업도 이에 준하는 불사(佛事)이다. 팔만대장경에 수많은 동화가 있음을 처음 발표한 이는, 한국불교아동문학회 회장을 역임한 조명렬(趙明烈) 교수(중앙승가대 명예교수)이다. 부처님의 본생담 547화(話)를 모아놓은 《본생경(本生經)》이 좋은 예다. 이 밖에도 불교의 경전에는 수많은 본생담과 비유담이 있다. 《육도집경(六度集經)》 《백연경(百緣經)》 《백유경(百喩經)》 《현우경(賢愚經)》 《출요경(出曜經)》 등이 그것이다.

나는 작심하고 이 경전들을 다 읽어내기로 하고 한글대장경을 갖춘 서가를 만들었다. 이 가운데 어린이 동화가 될 만한 작품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아직 회사를 다닐 때였으므로 작품을 쓰거나 기사 쓰고 남는 시간만 갖고는 경전을 다 읽어낼 도리가 없었다. 나는 집이 있는 둔촌동에서 회사(한국일보)가 있는 안국동까지 출퇴근하는 시간에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앉거나 서서 이 경전들을 읽어냈다. 읽은 다음에는 메모한 주제와 내용으로 카드를 만들었다. 이것을 A++(이야기가 아주 재미있다), A+(이야기가 재미있다), A°(이야기가 될 만하다), A(작품성이 있다), B(작품성이 약하다)로 분류했다. 이 경전들을 읽어내는 데는 꼬박 3년의 세월이 걸렸다.

설화 경전 읽기를 모두 마치고 보니, 팔만대장경을 ‘이야기의 바다’로 부르고 싶어졌다. 팔만대장경의 종교성, 교육성 안에는 판타지가 다 모여 있었다. 판타지는 동화와 동시의 중심기법이다. 신비성을 띤 상상의 세계가 그것이다. 그래서 아동문학 세계를 불가능이 없는 세상이라 한다. 하나의 동물이 여러 개의 머리를 갖거나 나무가 걸어 다니는 것이 아동문학 세계인 것이다. 이처럼 재미있고 많은 이야기를 설법의 교재로 하셨으니 부처님은 더할 수 없는 동화작가요, 이야기 할아버지였던 셈이다. 문제는 이 이야기들을 요즘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바꾸어놓는 일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듯 팔만대장경 안의 설화를 동화로 다시 쓰지 않으면 어린이들이 읽기 어렵다. 누구든 이 일을 해내자면 절대적으로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1989년 15년 동안 다니던 소년한국일보사에 사표를 냈다. 오로지 불교설화를 동화로 엮어내기 위해서였다. 이만저만한 만용이 아니었다. 사표를 내고 돌아오자 아내는 말이 없었다.

이런 결심으로 시작한 작업은 1991년 현암사에서 낸 《어린이 팔만대장경》 1, 2, 3권(현암사, 1991~94)을 시작으로 하여 63권이 간행됐다. 여기에는 모두 494편의 불교설화가 동화로 개작되어 실려 있다. 그러나 불교동화는 출판이 쉽지 않다. 〈주간불교〉에 불교동화를 3년 동안 연재했지만 책으로 출판되지 못하고 원고인 상태로 있다. 현재도 계간지에 수년 동안 불교동화를 연재하고 있지만 출판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불교동화를 내겠다고 하는 곳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구색으로 재미있는 것 1권 정도 내겠다는 것이다. 욕심대로 불교동화만 내겠다 하는 곳이 있으면 계속해서 출판을 하겠지만 이는 자금이 따르는 문제다. 출판이 쉬울 것으로 생각한 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출판이 되지 않자 당장 급한 것은 생계 문제였다. 할 수 없이 몇몇 대학에 나가서 세계아동문학사, 아동문학 창작론 등을 강의하며 호구를 마련했다. 부처님의 가호였다. 나는 불교동화 쓰는 작업을 멈출 수가 없다.

 

6. 불교가 아동문학을 안아줘야 한다

부처님이 설하신 설법은 매우 쉽고 편안하다. 설법을 하실 때 재미있는 비유를 들어서 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는 경전의 내용을 풍부하게 할 뿐만 아니라 불교가 지혜와 자비의 종교임을 알게 해준다. 나아가 이런 비유적 가르침을 담고 있는 불교 경전은 세계의 문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인 본생담(本生譚)을 모아놓은 《본생경(Jātaka)》은 세계 최초의 동화집이다. 이 경전의 이야기들은 5~6세기에 아라비아와 페르시아를 거쳐 유럽에서 번역되어 여러 편이 이솝우화가 되었다. 또 유럽 여러 나라의 속담 설화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니까 이솝우화는 부처님 우화인 셈이다.

예를 들면 《본생경》 383화 〈닭의 전생 이야기(닭과 고양이)〉는 이솝우화 〈여우와 닭〉의 원형이다. 또 《본생경》 44화 〈모기의 전생 이야기〉는 이솝우화 〈대머리 남자와 파리〉가 되었다. 《본생경》 342화 〈원숭이의 전생 이야기〉는 우리의 고대소설 《별주부전》이 되었고, 《본생경》 78화 〈엘리사 장로의 전생 이야기〉는 우리의 고전 《옹고집전》이 되었다.

 

세상은 그리스 신화에 대한 비유가 많다. 그래서 많은 문학작품에 인용된다. 그 작품성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들은 피 흘리는 전쟁 이야기가 있고 〈트로이의 목마〉 같은 속임수가 있다. 평화의 이미지로 봐서 그리스 신화는 부처님 이야기에 견줄 수가 없다. 신비성(神秘性)이나 경이성(驚異性) 면에서도 그렇다.

어린이 운동이 활발한 기독교에서는 오래전에 성경 이야기를 동화로 개작하는 작업이 시작되어, 하나의 장르가 되고 있다. 세계 여러 곳에서 성경 이야기 동화가 출판되고 있다. 또 이를 바탕으로 월트디즈니에서는 애니메이션을 만든다. 오늘날 세계의 어린이들을 열광시키는 애니메이션은 기독교를 배경으로 하는 서양의 동화나 성경 이야기가 바탕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질과 양에서 성경 이야기는 불교설화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불교설화는 우선 수적인 면에서 압도적이다. 내용이 풍부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설화를 현대 동화로 개작해 내놓으면 불교는 아동문학의 보고가 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면 포교 효과가 엄청날 것이다.

부처님이 들려주신 이 이야기를 ‘불교설화’라 한다. 모든 불교설화는 모두 아동문학이 될 수 있다. 아이들은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불교설화는 불교동화로 만들어져야 한다. 이 모두가 불교아동문학인이 해야 할 일이다.

 

팔만대장경은 이야기의 바다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 부처님이 말씀하신 이야기 바다를 즐겁게 헤엄쳤다. 나이가 들어서는 경전을 읽으며 더 깊은 심해를 헤엄쳤다. 그리고 지금도 부처님이 들려주신 이야기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는 중이다

돌아보니 나도 내 아버지처럼 몸에 염주를 지닌 것이 꽤 오래되었다. 내복을 입은 목에 염주를 건다. 그 위에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맨다. 그렇게 하고, 길을 다니고 일을 하면 든든하다. 부처님 손이 나에게 닿아 있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나는 내가 아버지 백운암 거사를 닮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아버지의 불심을 못 따르고 있다. 그러면서 아버지 말씀을 가끔 떠올린다.

 

“불도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팔만대장경을 읽으면서 불교는 ‘워낙 큰 사상’이라는 걸 알았다. 아버지의 말씀에 공감한다. 불교보다 큰 사상은 없다! 나는 힘닿는 데까지 계속 이 큰 사상을 더 쉽게 풀어서 어린이에게 전해주는 일을 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요 보람이라 생각한다. ■

 

신현득
아동문학가. 1933년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태어났다. 안동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에서 20년간 교사로 근무하였다. 교직 생활 중에 대구교육대학을 졸업하고 1982년 단국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아동문학가로 활동했다. 1975년부터 〈소년한국일보〉에서 15년간 일했으며 윤석중문학상, 방정환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새싹회 이사장, 불교아동문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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