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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진세상 살아내게 한 선지식을 만나 / 이창숙
나의 삶 나의 불교
[83호] 2020년 09월 01일 (화) 이창숙 불교학자

첫 종교 생활 

   
 

나의 종교 생활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어릴 때 나는 서울의 종로구와 서대문구를 잇는 사직터널이 생기면서 없어져 버린 동네, 사직동의 끝자락에서 살았다. 교회는 사직공원 앞에 있었다. 동네 아이들을 따라간 것이 아니었나 싶다.

교회에서 배우는 것은 학교와 달랐는데, 재미있었다. 동요, 동시를 읽을 때였으니 3, 4학년쯤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이 동시를 가르쳐 주시면서 다음에 올 때는 하나씩 지어오라고 했다. 집에 와서 동시를 짓는데 잘 안됐다. 이 책 저 책을 뒤지다가 아주 멋진 동시를 발견했다. 거침없이 그 동시를 베꼈다. 지어온 동시를 발표하는 날 선생님이 한 사람씩 이름을 부르면 친구들이 나가서 자기가 지은 동시를 읽었다. 선생님은 끝까지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씀했다. 다른 사람이 지은 동시를 베껴서 낸 어린이가 있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선생님은 그 어린이가 누구인지는 말씀하지 않았다. 아, 그때의 부끄러움이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와중에 내 이름을 밝히지 않으셔서 친구들이 모른 것이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움이 적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 일에 대해 선생님은 개인적으로도 한마디 말씀을 안 했다. 

그 교회에서 재미있었던 일들은 다 잊었는데, 동시 표절 사건은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 종교 생활에서 얻은 첫 번째 교훈이다. 

중 · 고등학교 시절에는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러 영락교회에 다녔다. 대학 시절에는 강원용 목사님 설교를 들으러 경동교회에 다녔다. 그 시절 나름대로의 정신적인 충만감이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교회에 가는 일이 시들해졌다. 같이 다니던 친구 중에는 평생 크리스천이 된 친구도 있다. 그러나 교회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한국일보 기자 시절의 필자

법정 스님

30대 중반, 나는 한국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세 살 터울의 어린 남매가 자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짠해지곤 했다. 얘들이 이 풍진세상을 어찌 살아갈 거나, 하는 마음이었다. 이웃에 사시는 여고 선배이자 소설가인 정연희 선배께 내 심정을 털어놓았다. 선배는 마음을 긍정적으로 가져야지 아이들을 불쌍하게 생각하면 아이들이 그렇게 되는 거라고 했다. ‘그런 말’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니, 여기 있다고 소책자를 줬다. 불교입문서였다. 읽어보니 ‘그런 말’은 없었으나 ‘불교’라는 말이 내 속으로 훅 들어왔다.

초여름이었다. 선배네 아파트에 놀러 갔는데, 선배가 회색 무명천으로 옷을 만들고 있었다. 여름 3개월 절에 가서 머물 건데 그때 입을 법복이라고 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 절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뚝섬에서 배를 타고 건너 봉은사를 찾으라고 했다. 신문사 K 선배와 점심 후 잡담을 하다가 봉은사에 정연희 작가가 가 있는데 만나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더니 선뜻 가자고 했다. 그때 정연희 작가의 인기가 높았다. 

가르쳐준 대로 찾아갔다. 절 문에 들어서면서 바로 정연희 선배를 만났다. 그동안 와 본다는 이는 여럿 있었는데 정말 온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며 반가워했다. 자그마한 건물로 우리를 데려갔다. 거기 스님 한 분이 계셨다. 풀 먹여 빳빳하게 다린 여름 베옷같이 칼칼한 느낌을 주는 분이셨다. 그런데 방 안쪽에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강남이 개발되기 전이었다. 툇마루에 앉으니 지금의 삼성역 네거리에서 남쪽으로 올라가는 언덕이 보였다. 무심히 “저기는 황톳길이네요.” 하고 중얼거리니까, 스님이 “조금 있으면 황야의 포장마차가 넘어올 거예요.” 하셨다. 다 같이 웃었다. 스님이 잠깐 자리를 뜨더니, 밥상 하나가 뒤따라 왔다. 5시경인데, 이 시간에 웬 밥? 절에서는 이 시간에 저녁밥을 먹는다고 했다. 처음 먹어본 절밥이었다. 다래헌(茶來軒)에 계신 법정 스님을 그렇게 만났다.

불교라는 말을 정 선배에게서 처음 들은 건 아니다. 대학 때 원의범, 이기영 두 선생님의 불교 강의를 들었다. 멀고 어렵기만 한 내용이었다. 그 분위기라면 어쩐지 스님은 근엄해야 할 것 같은데,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유머 감각이 있는 스님이라니! 막연하게 갖고 있던 스님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이론 불교 아닌 살아 있는 불교를 만난 순간이었다. 스님은 불교라는 말을 잘 안 썼다. 다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했다. 스님을 만나면서 가랑비에 옷 젖듯이 불교가 서서히 내 속으로 젖어 들어왔다.

유신독재와 언론자유가 첨예하게 충돌하고 있던 시기였다. 나는 스님을 만난 지 얼마 안 돼서 한국일보 노조설립의 주동자가 되어 회사에서 해고되었다. 서울시는 노조 설립을 불허했다. 부당해고를 입증하기 위한 민사소송과 서울시를 상대로 한 행정소송이 시작되었다. 나는 법정에서 요샛말로 ‘쓰레기’ 기자가 되어 있었다. 이 건 싸움이니까 이겨야 한다, 나를 객관화하는 데 집중했다. 7년의 법정 다툼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가족이 나의 지지자였지만, 또 하나의 응원군은 법정 스님이었다.

법정 스님은 그때 불교계의 대표적 반체제 인사였다. 스님의 영향으로 노동조합에 관계한 것은 아니나, 그 무렵 큰 틀에서 스님과 나는 같은 편이었다. 사회운동이라는 게 얼마나 외로운 싸움인지 알아 가면서, 마음이 힘들어질 때 스님께 가면 힘을 돋워주었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었다. 그 응원으로 당당하게 버텼다. 스님은 내가 나중에 불교 공부를 시작했을 때도 응원해 주었다.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에서 각각 한 번씩 등록금을 내주기도 했다.

스님은 불교에 대해 바른 인식을 가진 수행자였지만, 문화적인 안목도 특별한 분이었다. 소소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음악을 알아듣는 절대 미감, 독서력, 맛깔스러운 글,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었다. 그리고 직필(直筆). 성철 스님의 삼천 배를 비판했지만, 내가 만난 성철 스님은 법정 스님을 ‘직필’이라고 인정했다. 불교의 안내자로서 스님을 만난 것은 내 인생의 행운이었다. 30대의 감수성으로 안목에 대해 배울 수 있었던 것도 그에 못지않은 행운이었다.

스님이 돌아가실 무렵, 삼성병원으로 찾아갔다. 눈을 감고 계신 스님께 내가 왔다는 말을 못 했다. 마음으로만 인사하고 물러났다. 며칠 후 입적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집 거사와 길상사에 가서, 스님의 육신에 마지막 인사를 했다. 다비장에도 갔다. 가사 한 장 덮고 장작더미 위에 누우신 스님, 스님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스님의 육신이 불꽃 속에서 연꽃으로 피어났다. 뒷날 나는 내 학위논문을 단행본으로 출판했을 때 그 책을 들고 가서 스님의 영전에 올리고 길상사 도서관에 기증했다. 살아계실 때 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바람에 스치는 산죽(山竹) 소리를 들으며 다실에서 차담을 나누었던 그 유장한 시간들, 돌아갈 수 없는 그리운 시간이다. 우리 사회에 맑은 자취를 남기고 가신 스님은 나에게도 지남(指南)이었다.

   

나를 성철 스님께 데려다준 원정 스님과 동행했던 친구들(해인사).스님 왼쪽의 필자 옆은 1960년대 농구 스타 박신자.

기도의 시작

1980년대 초에 들어서 신군부는 언론 통폐합을 시행했다. 우리 집 거사(정인섭, 당시 동양방송 라디오제작본부장)가 다니던 방송사는 TBC의 깃발을 내리고 KBS에 합쳐졌다. 일반 사원들은 KBS로 가고, 임원이었던 우리 집 거사는 중앙일보 쪽으로 옮긴다고 했다. 안정된 생활을 해왔던 우리 가정이 예측할 수 없는 변화의 바람 앞에 서 있었다.

아는 스님에게 거사의 신변에 변화가 왔다는 말을 하면서 불안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스님이 “기도를 해 보시죠.” 했다. “기도요?” ‘내게 어려운 일이 닥쳤다고 그걸 부처님께 빌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올라왔다. 뭐랄까,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염치없다는 생각도 들고, 마음이 복잡해졌다. 스님은 내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건방진 생각들을 알아채고 이렇게 말했다.

“보살님, 기도를 해서 손톱만큼이라도 좋아진다면 기도를 하는 겁니다.”

다음 날 아침 우리 집 서가를 훑어보다가 별생각 없이 소책자 한 권을 빼서 읽기 시작했다. 《대망을 품어라》. 오늘의 거창고교를 만든 전영창 교장의 훈화집이다. 전 선생님(내 대학 동기의 아버지이시다)이 1956년 미국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귀국했을 때 대전대학에서 부학장으로 오라고 했다. 그러나 농촌 청년 교육을 통해 기독교의 복음을 전도하겠다는 사명감으로 폐교 직전의 거창고등학교를 맡았다. 취임해보니 교사는 70년 된 주택과 엉성한 바라크 건물이 전부였고, 교장실이란 게 선교사들이 화장실 겸 목욕탕으로 쓰던 방이었다. 교장 취임식에 학생 8명이 참석했다. 더 난감한 일은 재정난이었다. 교사들에게 월급 줄 돈도 부족했는데 전임 교장이 남겨 놓은 빚이 적지 않았다. 미국의 후원자들에게서 돈이 와야 해결이 되는데, 돈이 오지 않았다. 교장실 문을 잠그고 하나님께 철야기도를 했다. 그래도 돈은 안 왔다. 하나님과의 담판을 작심하고 거창에서 40리 되는 웅양의 굴에 들어가서 일주일 금식기도를 했다. 하나님께 따졌다. ‘내가 여기 돈 벌러 왔소? 명예를 위해 왔소? 당신의 부름을 받고 복음을 전하러 왔는데, 왜 학교 운영할 돈을 안 보내주는 거요? 하나님이 있기는 한 거요?’ 고향에 있는 13마지기 논을 팔아서, 하나님은 없으니 속지 말라는 광고를 〈동아일보〉에 내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이렇게 훌륭한 분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자기가 믿는 신에게 기도를 하는데……’ 나의 건방진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나의 기도가 시작되었다.

나는 인연이 닿는 대로 기도했다. 분별하지 않았다. 산신기도도 했다.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팔공산 갓바위에도 갔다.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데 안 갈 수 있나? 먼 길을 걸어 올라가며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았다. 아들이 삼수 만에 대학에 들어갔을 때, 엄마가 (시쳇말로) 혀 빠지게 기도해도 본인이 발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세 살 터울인 딸이 고3이 되었다. 한 달쯤 후 딸이 말했다. “엄마, 내 짝은 대학에 꼭 붙어야 한 대. 걔네 엄마가 교회에 새벽기도를 다니는데, 그래서 자기는 꼭 붙어야 한 대.” “그래?” “그런데 엄마는 내 기도는 왜 안 해주는 거야?” 오 마이 부처님! “알았어, 내일부터 할게.” 내 기도는 다시 시작되었다. 진정한 기도는 기복이 아니고, 남을 위한 기도는 나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산 스님

법정 스님이 송광사로 내려갔다. 스님은 송광사 산내에 불일암(佛日庵)을 새로 지었다. 불일암이 다 지어졌을 무렵 친구와 같이 내려갔다. 큰 절에 묵으면서 불일암에 올라가 청소를 했다. 집 지으면서 생긴 먼지를 걸레로 닦아냈다. 청소가 다 될 즈음에 구산 스님이 올라왔다. 완공된 암자를 보러 온 것이다. 청소하는 우리를 기특하다고 칭찬했다. 한 달쯤 지났을까, 구산 스님이 서울 사간동의 법련사에 오셨다고 해서 친구와 같이 인사하러 갔다. 법정 스님도 함께 있었다. 구산 스님은 우리가 청소했던 일을 또 칭찬했다. 법련사 주지 현호 스님에게 지필묵을 내오라고 했다. 우리에게 무엇인가 친필을 써 주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현호 스님은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글씨 쓰는 판이 벌어지는 걸 마땅치 않아 했다. 지필묵은 내오지 않고 구산 스님에게 다음에 하시라고 말렸다. 살짝 민망스러워졌다. 그때 구산 스님이 아무렇지도 않게 한마디 했다. “너는 너 할 일 해라, 내 일은 내가 할게.” 스님의 음성과 표정은 여전히 편안하였다. 상황이 자연스럽게 정리되었다. 수행의 힘이란 저런 거구나! 나는 그날의 장면을 구산 스님의 상당법문(上堂法門)으로 간직하고 있다.

우리가 먹을 갈았다. ‘불(佛)’ 자를 써 주면서 ‘선근 공덕으로 내생(來生)에 좋은 도량에서 공부하게 될 것’이라고 덕담도 해주었다. 옆에 계시던 법정 스님이 한마디 덧붙였다. ‘내생이라는 게 반드시 몸 바꾸는 때를 말하는 것만이 아니고, 금생일 수도 있다’고. 

불교여성학

박정희 정권 유신 치하에서 11년의 기자 생활이 끝났다. 나를 오라는 신문사는 없었다. 나는 전업주부가 되었다. 인사동에서 골동품가게를 하던 P 여사가 어느 날 내게 학교에 들어가 불교학 공부를 해보라고 권했다. 나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 어려운 공부를 왜 하느냐고, 절에나 슬슬 다니겠다고 했다. P 여사와 헤어져 오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를 안 지 10여 년이 넘는 이가 하는 권고를 그냥 무시해버리는 건 아니지 않나?’ 다음 날 봉은사에 가서 선혜 스님과 의논을 했다. “보살님의 10년 후를 생각해 보십시오, 공부한 보살님과 안 한 보살님이 같겠습니까?” 스님의 이 한마디가 나를 학교로 밀어 넣었다. 

마흔한 살에 동국대 불교학과 석사과정에 들어가서 공부를 시작했다. 학부의 기초가 없어서 공부는 어려웠지만, 재미있었다. 석사논문은 지도교수이신 김영태 선생님의 권유로 〈《승만경》의 사상과 그 신라적 수용에 대한 연구〉를 썼다. 《승만경》은 승만 왕비가 부처님 앞에서 대승 보살의 윤리와 서원을 설파하는 경전이다. 이 경전은 신라 진흥왕 37년에 안홍 법사가 수나라에서 들여왔다. 신라의 세 여왕 중 진덕여왕의 이름이 승만(勝曼), 선덕여왕은 덕만(德曼), 진성여왕은 만(曼)이다. 여왕들을 승만 왕비와 동등한 지위에 놓으려는 국가적 목적이 있었다. 교학적으로는 원효의 《승만경소》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1994년 〈인도불교의 여성성불 사상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30대 중반부터 절에 다니면서 여성 불자에 대한 편견을 많이 목격했다. 내 속에 잠재해 있는 여성은 사회적 약자라는 의식이 불편한 모습들과 충돌했으나, 구업(口業) 짓지 말라는 명분이 나를 누르곤 했다. 평소에 열린 스님이라고 존경했던 스님이 “여자들 해봐야 별수 있나, 내생에 남자 몸 받는 것밖에.” 하시는 말씀을 듣고, 부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내가 직접 알아보자고 발심했다. 불교여성관의 변천과 왜곡의 역사를 정리했다. 이 논문은 나중에 지인의 권고로 2015년에 책으로 냈다. 제목은 《불교의 여성성불 사상》. 이 책은 의외의 호평을 받아 2016년 대한불교진흥원에서 주는 원효학술상(비전임교수 부문)을 받았고, 다음 해에 청호불교문화원에서 주는 청호불교복지상(저술상)을 받았다. 우리 집 거사가 그랬다. 당대의 싸움꾼이 보살이 되었다고. 

성철 스님

불자가 아닌 친구 둘이 해인사에 가보고 싶다 하여 내가 앞장을 섰다. 해인사에 내가 아는 원정 스님이 있었다. 스님에게 부탁하면 한 이틀 절에서 지낼 수 있겠지 하는 요량이었다. 하룻밤 자고 나니 원정 스님이 “저 위에 계신 우리 노장님 뵐래요?” 하는 것이었다. 저 위가 어딘지, 노장님이 누구신지 묻지 않았다. 원정 스님은 우리가 만나러 가는 노장님은 당신의 은사이며 삼천 배를 해야 만날 수 있는 분이라고 했다. 그때까지 나는 성철 스님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백련암이었다. 직사각형의 큰 방 저쪽 끝에 스님이 앉아 있고 우리는 반대편 끝에 있는 문으로 들어가 스님께 삼배를 했다. 절을 마치고 앉아서 스님을 바라보니 그 안광이 번쩍였다. ‘엉, 이 스님은?’ 원정 스님이 나를 법정 스님 신도라고 소개했다. 대뜸 “절에는 왜 오노?” 하고 물으셨다. “절하러 오지요.” “니는 좀 아는구나.” 여기까지는 좋았다. “절 몇 번 하노?” “세 번 합니다.” “와, 세 번 하노? 한 번이면 되제?”(이건 무슨 말씀이지?) 벽력같은 스님의 말씀에 말문이 꽉 막히고 얼굴이 화끈했다.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성철 스님을 친견했다. 

그날 스님이 그러셨다. “중보고 절에 다니지 말라”고. 물러나는데 “내 만날래문 삼천 배 해야 하는데, 니는 옆문으로 들어왔데이.” 하고 짚으셨다. “외상은 갚겠습니다.” 백련암 댓돌을 내려오면서 나는 스님께 깊이 감사했다. 겉으로는 말대답 한번 못한 것밖에 없는데, 내 속에서 뭔가가 깨졌다. 절에 다닌답시고 그럭저럭 왔다 갔다 하다가 세월 다 보내고 나면 어쩔 뻔했나 하는 각성이 생겼다. 내 나이 서른여섯 때였다.

동행한 친구가 미국에서 책을 쉽게 살 수 있는 처지여서 스님이 책을 부탁하셨다. 지금이야 외서(外書) 주문하는 게 일도 아니지만 그때는 3개월 걸렸다. 책을 가지고 원정 스님과 같이 백련암에 올라갔다. “스님이 마중 나와 계시네요.” 올려다보니 백련암 문 앞에 스님이 서 계셨다. 어렵게 구한 책인데 우편으로 부치면 혹시라도 잘못될까 봐 가지고 왔다고 말씀드리니, “그래야 핑계 삼아 또 오제.” 하셨다. “니가 먼 곳에서 낼 위해 책을 가져왔는데, 내가 니를 위해 해줄 게 뭐가 있겠노? 법문이나 해 주제.” 책을 한 권 내주면서 그 서문을 읽으라고 했다. 광덕 스님이 번역한 《화엄경》 〈보현행원품〉에 성철 스님이 얹은 서문이었다. 나는 스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리 내어 읽었다.

“……자기는 아주 잊어버리고 오직 일체중생을 위하여서만 산다. 영원에서 영원이 다하도록. 법성(法性)이 무진(無盡)하므로 법계(法界)가 무한하며 법계가 무한하므로 시분(時分)이 무량하다. 시분이 무량하므로 중생이 무변하며 중생이 무변하므로 자비가 무궁하다……”

“알았제?” “예, 알겠습니다.”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그 후 친정어머니 49재를 백련암에서 지냈다. 원통전에서 밤새워 절을 하고 다음 날 사시에 재를 올렸다. 재 올린 후에 큰 방에서 스님을 뵈었다.  

“우짤까? 화두하고 불명하고 둘 중에 하나만 주어야 하는 긴데.” “스님, 바쁜데 언제 또 오겠습니까? 둘 다 주십시오” “그랄까?”

불명을 주시면서 스님이 그러셨다. “니 불교 공부 한다메? 공부 끝내고 포교사 해라.” 옆에 계신 원정 스님이 “자격을 주어야 포교사를 하지요” 했다. “내가 주지.” 

내가 받은 불명은 일화선(一化船)이다. 마당에서 만난 원택 스님이 불명은 어떻게 받았냐고 물었다. “보살님, 노 저으려면 팔 많이 아프시겠네요.”

1993년 스님이 입적하셨을 때 우리 집 거사와 함께 해인사에 갔다. 퇴설당에 들어가 스님의 육신에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다비장에 가서 연화대에 불이 들어갈 때 가르침대로 살겠다고 말씀드렸다. 성철 스님은 평소에 말씀했다. “내가 무에 잘났다고 내 만날래문 삼천 배 하라고 하겠나? 다 지들 수행하라고 그라는 거지.” 스님은 늘 ‘자기를 바로 보라’고, ‘남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외람된 말이지만, 나는 스님이 내 친아버지 같았다. 무슨 말을 해도 다 긍정해 주실 것 같았다. 등 뒤로 가서 어깨를 주물러드리고 싶었다. 

삼천 배 

성철 스님을 친견하면서 삼천 배 외상을 갚겠다고 말씀드린 지 몇 달 지났다. 그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부산에 갈 일이 생겼다. 일을 끝내고 오는 길에 언양 석남사에 가서 절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석남사는 비구니 스님들이 사는 도량이다. 법정 스님께 의논을 드리니, 스님이 아는 명조 스님이 그 절에 산다고, 편지 한 장을 써 주었다. 나의 여고 후배이기도 하니, 편리를 봐 줄 거라고 했다. 초파일 일주일쯤 전이었다. 명조 스님은 여고 선배라고 반가워하면서도 초파일이라 일이 많아 같이 있어 주지 못한다고 연신 미안해했다. 

저녁예불 끝내고 8시부터 절을 시작했다. 밤이 되니 산 전체가 적막 속으로 들어갔다. 지나가는 바람에 나뭇잎 하나만 흔들려도 인기척같이 느껴졌다. 처음 간 산속의 절, 큰 법당의 흐릿한 불빛 아래서 이 밤에 혼자서 삼천 배를 해내야 한다. 여러 가지 생각이 올라왔다. 다리가 아파지기 시작했지만 견딜 만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명조 스님이 과일과 물을 가지고 나를 격려하러 왔다. 무섭지 않으냐고 물었다. 나는 무섬을 타는 편인데 그날은 무섭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주고 싶은데 몸이 너무 피곤해서 못하겠다고 미안해했다. 그 마음이 고마웠다. 왔다 간 지 두 시간쯤 지났을 때 명조 스님이 한 번 더 왔다. 낮에 코피가 터질 정도로 일하는데 나 때문에 잠을 편히 못 주무시는구나, 이번에는 내가 미안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허리가 끊어지게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 이 절 끝내고 나면 내 허리는 고장이 나겠구나! 허리 고장이 나기 전에 그만둬야 할까? 그런데, 여기서 포기하면 해내지 못했다는 좌절감이 올 텐데 그건 어쩌지? 허리 병신이냐, 좌절감이냐? 성철 스님께 삼천 배 외상은 갚겠다고 했고, 불교 믿겠다고 들어왔는데 남들이 다하는 삼천 배 하나 마치지 못하고 물러선다면 말이 되나? 차라리 허리 병신이 되는 게 낫겠다!

마지막 백팔 배는 한 배 한 배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절하는 바른 자세도 사라졌다. 그냥 땅에 엎어졌다가 기어 일어났다고 할까? 기어서 일어나더라도 숫자는 채워야 한다. 이 세상 천지간에 이 순간 이 일을 해결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어쩌다가 여기서 이 고생을 하게 되었지? 분한 생각이 뱃속에서 쑥 올라왔다. 그렇다. 내가 그 노장님 말씀에 걸려 넘어진 거구나. 그래서 이 고생을 사서 하고 있구나! 지옥 같은 한 배 한 배도 끝이 있다. 새벽 6시 반에 절이 끝났다. 환희심에 벅찰 줄 알았는데, 그냥 울음이 터졌다. 마법처럼 허리 아픈 것이 싹 없어졌고 분한 마음도 사라졌다. 얼마 후 성철 스님을 뵈었다. “니, 석남사 와서 절했다메.” “예.”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그 후 어려운 일,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일단 삼천 배를 하는 것은 우리 가정의 매뉴얼이 되었다. 아들이 대학입시 삼수할 때와 취업할 때, 딸이 미국 유학 갈 때, 거사가 불교방송에서 일할 때 다들 삼천 배를 했다. 그 후에도 나는 이 절, 저 절 다니면서 했다.

   

우리 집 거사(정인섭, 불교방송 사장 역임)와 길상사에서.

용화선원과 송담 스님

인천의 용화선원에는 만년위패가 있다. 매년 음력 3월 16일에 만년위패에 모셔진 영가들을 위해 법보재를 지낸다. 창건주인 전강 스님이 물 맑고 경치 좋은 산천경개를 제쳐놓고, 먼지와 소음의 주안공단 가운데 선원을 세우시면서 수행승을 외호하는 방편으로 만드신 제도라 한다. 1984년, 시댁과 친정 양가 부모님들의 위패를 올린 인연으로 용화선원은 우리 가정의 원찰이 되었다. 그 후에도 양가의 조상님들, 형제들 중에 인연이 닿는 이들을 올려서 여러 분이 거기에 계시다. 집안에 대소사가 생기면 우선 용화선원에 가서 부처님과 조상님들께 신고한다. 조상 영가들이 우주 법계를 떠돌지 않고 절에 안착해서 법회 때마다 스님의 법문을 듣는다고 생각하니 안심이다. 

용화선원에는 송담 스님이 계시다. 나는 40년 가깝게 송담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스승인 전강 스님의 녹음 법문을 먼저 듣게 한 후, 송담 스님이 법문을 했다. 스승에 대한 그 절절한 일향심(一向心)은 항상 감동적이다. 스님의 법문은 한결같다. 게송도 드는 예도 다르지만, 결론은 활구참선법이다. 생각이 일어나는 찰나에 생각에 끄달려 가지 말고 ‘이뭣고?’를 챙기라는 말씀이다. 작년 법보재 때도 “백 살이 가까운 늙은 몸으로 여러분에게 간곡하게 당부하니, 무슨 일을 하면서 살더라도 ‘이뭣고?’를 꼭 챙기시라.”고 했다. 나는 참선행자는 안 되었지만, 스님의 법문을 들을 때는 자세를 바르게 고친다. 더구나 그날은 스님이 ‘죽을 날이 머지않은’이란 표현을 써서 속으로 울었다.

용화선원에는 신수(身數)기도가 있다. 음력 정월 초 3일부터 9일까지 7일간 4분 정근의 관음기도다. 지난 한 해의 잘못을 참회하고 새해의 안녕을 발원하는 기도다. 이 기도도 전강 스님이 정한 법이다. ‘선원에서 웬 관음기도냐?’라고 할 이도 있겠지만, 속세 가운데 선원을 세운 전강 스님의 깊은 뜻이 있었다고 믿는다. 송담 스님이 신수기도 때마다 강조하는 법문이 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그 심보를 고쳐라. 좋은 일 열 개 하려 애쓰지 말고 남의 오장육부 찌르는 말 한마디 조심하라’는 말씀이다. 항상 명심하고 있다. 나는 사십 대부터 신수기도로 한 해를 시작하곤 했는데, 그 기도 덕분에 아직까지 무탈하게 살아온 게 아닌가 한다.

우리 집 거사가 은퇴한 후 십수 년간 용화선원의 시민선방에서 참선 수행을 하다 3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거사는 1990년 불교방송(BBS)이 개국할 때 전무로 참여하여 수년간 불교방송에서 일하면서 불자가 되었다. 시민선방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우리 부부는 송담 스님에게 대승십선계를 받았다. 거사는 송담 스님으로부터 대덕(大德)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거사의 사십구재 날 시민선방의 도반들이 와주셨다. 거사는 가족과 친구와 도반의 환송을 받으면서 세상과 하직했다.

길상사 삼천 배 법회

법정 스님이 창건한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는 2004년부터 매달 둘째 토요일 밤 8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철야로 삼천 배를 올리는 법회를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법회는 박종린 법사가 인도한다. 여기에는 적을 때는 30, 40명, 많을 때는 80, 90명의 남녀노소 불자들이 모인다. 절 수행을 인도하는 박종린 법사가 몸이 괴로워 꾀가 나는 마음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휴식시간에 짧은 법문을 한다. 

이 법회에서는 절하면서 ‘나무아미타불’ 염송을 한다. 참회와 발원이다. 부처님께 귀의하고 나를 낮추는 몸동작으로 몸과 입과 생각으로 지은 잘못을 참회하는 가운데 마음은 변화하고, 그 과정을 통해 업장은 조금씩, 조금씩 녹아내린다. 겨울 얼음이 봄물이 되듯이. 업장이 녹아내리면 삶도 조금씩 가벼워질 것이다. 그리고 극락왕생을 발원한다. 완성은 희망사항이고, 끝없는 정진이 있을 뿐이다.

나는 이 법회가 좋다. 지금은 못 가지만 한때는 열심히 다녔다. 토요일 저녁의 이런저런 사정들을 제치고 이곳으로 모여드는 이들이 대견스럽다. 그 속에 끼어 있는 것이 좋다. 내가 조금 맑아지는 듯싶은 시간이다. 하루하루 순간순간 깨어 있으면서 제대로 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나, 밀린 숙제를 밤새워서 하는 심정이다. 공부는 도반(道伴)이 시킨다는 말이 있듯이, 절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도반들의 힘으로 하는 것이다. 

   

원효학술상을 받고 수상소감을 밝히는 필자

나의 불교 수행

법정 스님이 봉은사 다래헌(茶來軒)에 있을 때, 그 회상(會上)에서 만난 보살님이 있다. 30대 초에 남편과 사별한 후 1남 4녀를 키우셔서 시집 장가 보내고, 아들 내외와 손자들과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보살님이 문득 말씀했다. 늙어서 사는 게 힘들고 지루하다고. 그러면서 그간 살아온 속내를 털어놓았다. 굽이굽이 어려웠던 고비를 넘기고 이만큼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불법(佛法)을 만난 덕분이라고. 나는 그분의 성품대로 조용조용히 해 온 신행생활을 알기에 보살님다운 결론이라고 생각했다.

20대에 비슷한 환경에서 출발했으나, 자신은 남편과 사별한 후 처지가 달라져서, 늘 부러웠던 친구에 대한 생각도 지금은 달라졌다고 했다. 남부럽지 않게 살아온 친구가 늙음과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직도 자식들과 다투면서 마음의 지옥을 넘나드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잘살았다는 게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도업 성취까지는 못했더라도 분수에 맞는 수행을 꾸준히 해온 결과로 번뇌가 적어지고, 가게 되는 날에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정도가 되면 괜찮은 것이 아닐까. 나는 병중에 가더라도 행복한 마음으로 죽어야 극락에도 갈 수 있다고 믿는다. 행복한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 

고마운 것이 많은 마음, 가족이나 세상살이에 너무 집착하지 않고 떠날 수 있는 마음, 천지 만물과 화해하는 마음, 아무 예외 없이 누구라도 무엇이든지 용서하는 마음, 잘못한 일이 있어도 이미 참회하고 참회하여 죄의 그늘이 없는 마음, 가까운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도 씻어버린 마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가는 못난 자기 자신도 봐주는 마음, 좋은 일을 많이 했고 업적이 산처럼 높더라도 ‘했다’는 생각을 다 놓아버린 텅 빈 허공 같은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 불교 수행의 궁극이라고 생각한다.

법문 노트

10여 년간 신문기자를 한 데서 오는 직업병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보든지 법문을 듣든지 할 때 밑줄 치고 싶은 대목을 적는 버릇이 있다. 공책에 손 글씨로 적는다. 그렇게 모인 법문 노트가 여러 권 있다. 이 글을 마감하면서 훑어보았다.

불교의 수행법에는 각각에 차이가 있다. 나는 그 차이를 차별화하여 가치 매김을 하고 싶지 않다. 어떤 수행을 하든, 믿는 만큼 자신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하는 만큼만 수행의 성과를 건진다고 생각한다. 이상한 신념인지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닌데 수행이라는 걸 부둥켜안고 이리저리 구르다가 얻은 결론이다.

그래서 ‘만선동귀(萬善同歸)’라는 말을 좋아한다. 북송 초 영명연수(永明延壽) 선사는 그 당시 선교(禪敎) 양가의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고질적인 폐단을 지적하고 바른 수행으로 인도하기 위해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을 지었다. 크고 작은 모든 선행이 깨달음으로 귀결된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이다(回萬善 向菩提). 만선동귀라니, 얼마나 넉넉한가! 내 그릇만큼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내 성향대로 노력해 가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데. 쓸데없는 허위의식으로 헤매지 않고.

또 하나의 노트는 남회근(南懷瑾) 선생의 《불교수행법 강의》(신원봉 번역,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다. 7백여 페이지의 이 책을 읽으면서 불교의 경(經) 논(論)을 회통하여 수행법을 짚어내는 그 박학함에 기가 질렸다. 열등감에 시달리면서 읽었다. 뭔가 미진했다. 쓰는 사람도 있는데 읽지도 못하랴, 하는 오기에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먼저 읽을 때는 지나쳤던 ‘진정한 수행은 순간순간의 간절한 자기반성이다’라는 대목에서 책을 덮었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알아차림이 늦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이다. ‘이것이면 됐다’는 생각이었다. 

남회근 선생이 스승인 노스님을 찾아뵈었다. 스승은 제자가 도착하자 바로 화로에 불을 붙이더니 차를 끓였다. 제자가 말렸다. “사부님 그러지 마십시오. 차까지 끓일 필요는 없습니다.” “자네 모르는구먼. 그대는 손님이고 나는 주인이야. 온갖 행(行)에 있어서는 어느 법 하나도 버리지 않네. 당연히 자네에게 차를 끓여줘야지.” 

내가 오랫동안 명심하고 있는 법문이다.

돌이켜 보니, 고비마다 내가 만난 선지식들이 머뭇거리는 내 등을 떠밀어 앞으로 나가게 했다. 부처님 법을 만나 그 안에서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법을 배웠다. 그 힘으로 이 풍진 한 세상을 살아냈다. 부처님과 선지식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

 

이창숙 / 불교학자.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졸업(철학박사). 대한일보 · 한국일보 기자,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강사, 불교여성개발원 자문위원 등 역임. 저서로 《불교의 여성성불 사상》 《1974년 겨울-유신치하 한국일보 기자노조 투쟁사》(공저)가 있다. 원효학술상, 청호불교학술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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