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불교 - 금강경 독송으로 삶의 지혜를 얻다

불교 입문

내가 태어나서 자란 시대는 전반적으로 향학열이 높았다. 그때 유행한 노래 중 하나가 “젊은이는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룩하기가 어려우니 짧은 시간이라도 가볍게 보내지 말라(少年은 易老하고 學難成하니 一寸光陰이 不可輕이라)”는 내용이었다. 나의 부모님도 열성적이셨다. 6 · 25 때 서울에서 낙향하여 시골에 사시던 부모님은 중학교부터는 나를 서울로 유학(?) 보내셨다. 나도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여 열심히 공부했다.  

나는 학창 시절에 불교를 접하게 되었다. 부모님을 따라 가끔 절에 갔지만, 의식적으로 종교를 불교로 선택한 건 체신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불교학생회가 생겨 거기 가입하고 나서다. 한번은 모임에 동국대학교 대학원생이 초청 강사로 나왔는데, 강의가 무척 인상 깊었다. 관음회(당시 대표 김상봉)에서 활동하던 윤영흠 법사였다.

‘사람들이 세상을 인식하는 것은 동물원에서 원숭이들이 각자 문틈을 통해서 보는 세상과 같다. 제각기 자기가 보는 창을 통해 세상의 한 면만 본다. 그러나 부처님같이 깨달은 분은 동물원을 벗어나 전체적으로 우주를 본다’라는 설명이 마음에 다가왔다.

졸업 후에는 관비생(官費生)이라 의무적으로 체신부에 근무해야 했다. 기계과를 졸업한 덕에 전화국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불교를 접하고부터 나는 기계공학보다 철학, 역사, 정치 등 인문학에 관심이 있음을 알았다. 

졸업 후 나는 조계사에 다니면서 오계를 지키는 불교도가 되려고 노력하였다. 거기서 여러 불교도를 만났다. 청년회의 전신 비슷한 단체에 소속되었는데, 법회 때마다 김한천 거사, 이종익 교수 등 유명 불교 인사를 초빙하여 법문을 들었다. 법운 이종익 박사를 모시고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야외법회도 했다. 회원들 간의 친목도 다지고 불교 공부도 열심히 한 기억이 남는 시절이었다. 회원이 20여 명쯤 되었던 것 같다. 

김현도 거사, 윤호강 거사, 이광옥 보살, 이건호 법사, 김웅태 거사를 비롯해 대학 졸업 후 함께한 이경숙 보살, 정정자 보살 등이 조계사 《금강경》 법회를 통해 일생의 도반이 된 분들이다. 

체신부 5급 공무원으로 전화국에 근무한 지 2년이 지난 후 곧 군대에 입대했다. 제대하고 나서 복직하여 3년 의무 기간을 다 채운 다음 사직하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1967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여 1971년 졸업했다. 그다음 해에 고려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갔다.

 

백성욱 박사 친견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나는 다시 조계사에 정기적으로 다니게 되었다. 대학에서 친하게 지내던 같은 학과 이경숙 동문과 나와 사귀던 정정자 도반과 함께 다녔다. 조계사에 다시 나가니 낯익은 불자들이 법회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관음회 윤영흠 법사가 전과 같이 《금강경》 강의를 하고 있었다.

윤 법사의 《금강경》 강의는 예전과 달랐다. 부처님에 대한 신심과 경건함을 불러일으키는 한층 업그레이드된 강의였다. 그는 자기의 《금강경》 해설은 자기 말이 아니라 덕 높은 도인이 계시는데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윤 법사는 때가 되면 우리를 그분에게 인도하겠다 약속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을 때 윤 법사는 그 약속을 지켰다. 우리를 소사의 백성목장에 계신 백성욱 박사께 인도한 것이다. 

때는 1972년으로 기억한다. 함께 간 사람은 윤영흠 법사, 모임의 살림을 맡고 있던 김정호 도반, 김웅태 도반, 이경숙 도반, 정정자 도반, 나 그렇게 7~8명이 동참했다.

백성욱 박사님 친견은 나에게 감동 그 자체였다. 이마의 백호가 뚜렷하고 부처님 상호를 닮은 신상(身相), 그리고 독특한 스타일의 《금강경》 법문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첫 만남에서 백 선생님은 한 시간 남짓한 짧은 시간에 부처님의 45년간의 가르침을 아함, 방등, 반야, 법회-열반으로 요약해 알기 쉽게 강의해 주셨다. 또 선생님의 수행 요체인 《금강경》 독송과 미륵존여래불 봉송을 설명해 주셨다. 조계사에서 여러 스님과 전문 강사들로부터 불교 강의를 들어온 사람들에게 아주 필요하고 목말라 하던 법문이었다. 

‘부처님의 설법 중 《금강경》은 21년간 설하신 《반야경》의 핵심으로서 일생 중 정오에 해당하는 가장 밝은 경전이다. 그러니 《금강경》을 읽을 때 거기 등장하는 1,250명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는 마음으로 경전을 읽어라. 그럼 한국과 인도 사이의 공간과 수천 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부처님의 밝은 정신과 교류하는 것이므로, 재앙이 소멸하고 소원이 성취된다’라고 하셨다. 

그때부터 나는 아침저녁으로 《금강경》을 읽었다. 그리고 얼마 후 선생님의 말씀처럼 변화를 느꼈다. 우선 거울을 보면 얼굴이 전보다 밝아졌고, 마음도 정리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와 이경숙 도반, 훗날 나의 아내가 된 정정자 도반, 나중에 이경숙 도반과 부부가 된 정재락 도반이 합류해 네 사람이 선생님을 매주 찾아뵙고 법문을 들었다. 선생님의 법문 중에서 나를 감명시킨 말씀은 또 있었다. 

나는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더욱 오늘날과 같이 사악(邪惡)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는 길은 불교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교도가 사회 정화에 이바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질문했다.

선생님의 고견이 기대되었으나 선생님께서는 대뜸 “걷지도 못하는 놈이 뛰려고 하는구나.” 하시면서 “한 몸이 깨끗하면 여러 몸이 깨끗하고, 여러 몸이 깨끗하면 팔만사천 다라니문이 다 깨끗하다.”라는 《원각경》 구절을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무안했으나 사회를 정화하기에 앞서 자기가 먼저 밝아지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씀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나는 한국외국어대학교를 나온 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을 공부하던 가난한 고학생이었는데, 백성욱 선생님은 나에게 희망을 심어주셨다.

신혼여행과 새벽 법회

백 선생님을 찾아뵙는 일은 우리 네 사람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를 빼고는 거의 매주 소사로 선생님을 찾아뵙고 법문을 들었다. 선생님은 만나 뵐 때마다 나에게 새로운 깨우침과 자극을 주셨다. 선생님은 각자의 마음 씀씀이(用心)를 환하게 보고 계셨다.

선생님은 세계 역사, 세계 지리에 관한 법문도 해주셨다. 율곡 선생 등과 같은 이인(異人)들에 관해 이야기해주시고, 곤륜산에서 뻗어 내려오는 강줄기와 거기서 나오는 홍보석, 에메랄드 등 흥미로운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다. 

선생님은 아침저녁으로 《금강경》을 읽고, 평소에는 보고 듣고 마음속에 올라오는 모든 것을 ‘미륵존여래불’ 하고 부처님 명호를 불러서 부처님께 바치라고 하셨다. 미륵부처님의 명호는 전체 이름이 ‘미륵존여래불’이니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하셨다. 얼마 후 함께 공부하던 이경숙 · 정재락 도반이 결혼해서 부부가 되었다. 

나도 함께 공부하던 정정자 도반과 삼청동 칠보사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되어 바로 소사로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선생님 저희 오늘 결혼했는데 신혼여행 왔습니다. 머물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거절하시면 어쩌나 은근히 걱정했는데 의외로 쉽게 허락해 주셨다. “그래 저기 위에 우사(牛舍) 옆에 방이 몇 개 있으니 그곳에서 지내려무나. 여기서 공부하는 게 궁금해서 핑계 삼아 온 게로구나. 녀석들, 참.”

선생님을 오래 모시고 있던 이병수 씨가 법당 위로 조금 올라가 우사 옆방 중 하나로 안내해주어 거기서 《금강경》을 읽으며 신혼의 밤을 보냈다. 새벽 4시가 되어 세수하고 법당에서 열리는 법회에 참석했다. 법회에는 그곳에서 머물며 공부하던 강대관 · 김정섭 · 신금화 · 이병수 씨 등과 함께 삼칠일 기도를 위해 와 있던 강신원 씨가 참여했다. 

새벽 법회는 그대로 부처님 회상을 방불케 했다. 각자가 공부하면서 의문이 생긴 점을 말씀드리면, 이에 대해 선생님이 법문해 주시는 형태였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현대에 오시면 저와 같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부부는 사흘을 그곳에서 머물렀다. 

 

대통령 비서실 시절

선생님께 다닌 지 3년이 못 되어 고학으로 근근이 학업을 이어 가던 내가 취업을 하게 되었다. 어느 토요일 고려대학교 정외과에서 명강의로 유명한 하버드대 출신 김경원 교수님이 나에게 전화하셨다. 나는 그분의 강의를 수강하고 그분 연구실에서 조교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대통령 국제정치 담당 특보로 가게 되었는데, 함께 일할 사람이 필요하니 정 군이 같이 가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아내와 상의한 후 월요일에 찾아뵙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래서 나는 1975년 7월부터 1983년 3월까지 대통령 비서실에서 근무하였다. 국제정치 담당 특보실에서 일하면서 박 대통령 서거 후 최규하 대통령, 전두환 대통령으로 국가지도자가 교체되는 격변기를 보냈다.

국제정치 담당 보좌관실에서 나는 대학에서 하던 것처럼 교수님이 국내외 학자들을 초청하여 정책 세미나를 하고 이를 대통령께 보고하는 일을 보좌했다. 세미나에 참석하여 이를 메모하고 그 결과를 대통령께 드리는 보고서를 교수님의 지침을 받아 내가 작성했다. 당시에는 아직 컴퓨터가 상용되지 않았을 때라 손으로 썼다. 

김경원 특보는 미국에 인맥이 많았다. 키신저와 브레진스키, 리처드 홀브룩 같은 역대 미국 대통령의 쟁쟁한 보좌관과 각료들을 잘 알아서 박정희 대통령과 그분들의 만남도 주선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보고서를 빼놓지 않고 보았다. 보고서에 일일이 코멘트를 달고 지침을 내려보냈다. 한문이나 철자를 고쳐서 내려보낸 적도 있다. 보고서를 쓴 사람으로서 민망한 일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감동하기도 했다. 다른 부서의 보고서들도 대통령은 그렇게 했다. 대통령이 자기가 작성하는 문서를 직접 꼼꼼히 검토하는 걸 알고 실무자들은 분발했고 정성을 다해 일했다.

김경원 교수님은 정권이 바뀌면서 비서실장까지 맡았다. 나는 비서실장 보좌관이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하나밖에 없는 직책이다. 거기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참으로 많이 배웠고 부처님을 모시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었다.

언젠가 소사로 백 선생님을 찾아뵈었는데, 선생님은 느닷없이 아내를 가리키면서 “네가 이제 교수 부인이 되겠구나.” 하셨다. 나는 청와대에 다니고 있어서 대학원 공부를 쉬고 있었는데 의외의 말씀이었다. 집히는 바가 있어 특별보좌관이던 김경원 교수님께 말씀드려서 직장에 다니면서 짬을 내어 두 과목 정도 남은 학점을 마저 이수했다. 그리고 밤을 새워가며 논문을 써서 학교에 제출했다. 그 결과 1982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1979년에는 박 대통령이 서거하고 대통령이 두 번 바뀐 후 김경원 교수님은 주UN 대사로 나갔고, 그 후 레이건 대통령 시절 주미 대사가 되었다. 나도 무언가 결정을 해야 했다. 나는 대학에 가기로 원(願)을 세웠다. 박사 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다. 1983년 나의 아내는 마침내 백 선생님이 예언하신 대로 교수 부인이 되었다. 

나는 인천대학교 교수로 봉직하면서 교무처장과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대학이 정도를 벗어나 소요에 휘말렸을 때 이를 바로 잡고 대학을 정상화하는 데 나름 역할을 했다. 당시 정상화 운동을 함께 했던 교수들 중 안옥수, 장석우, 김선형, 송재운, 한명수, 김종희, 고혜영, 최재순 교수는 지금도 매달 수필 쓰는 모임에서 만나는 지기들이다. 같은 과에서 근무했던 이재석 교수와 독실한 불자인 김강녕 교수와도 연락한다. 나를 따랐던 정외과 학생 중 졸업 후 국회의원이 된 김교흥 의원은 매년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중요한 날에 나에게 인사를 한다. 내가 지도교수를 맡았던 시낭송회 ‘소나기’ 회장이던 배미경 불자는 내가 책임을 맡고 있는 연구원에 가입하여 요즈음도 연락을 주고받는다. 

1997년 나는 영산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영산대학교 총장 시절

내가 인천대학교에서 신설 대학인 영산대학교 총장으로 자리를 옮긴 데에는 설립자 박용숙 이사장이 독실한 불자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분은 일제강점기 보통학교 시절에 대학을 만들기로 원을 세웠고 사업으로 돈을 모아 대학을 설립하고자 했다. 대학 설립 요건이 완화되자 그분은 먼저 2년제 성심대학을 세웠고 그다음 4년제 영산대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설립자 측은 초대 총장을 물색하고 있었는데, 불교 신자로서 자격을 갖춘 사람을 찾았다고 한다. 마침 나의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후배인 부남철 교수가 설립자 측을 잘 알고 있어서 나를 총장 후보로 추천했다고 한다. 

박용숙 이사장 아드님이 당시 판사로 재임하고 있어서 나는 그와 두어 번 만난 다음 영산대학교가 위치한 양산에 내려가 박용숙 이사장을 면담했다. 승용차 안에서 자연히 불교 이야기가 나오고 내가 《금강경》을 독송한다고 하자, 한번 외워볼 수 있겠냐고 하기에 그 자리에서 외웠다.

영산대학교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정신과 둥글고 걸림 없는 대자유를 말하는 ‘원융무애(圓融無碍)’ 정신을 설립 이념으로 삼았다. 총장 부임 후 나는 즉시 양산 통도사 방장으로 계시던 전 조계종 종정 월하(月下) 스님에게 취임 인사를 드렸다. 스님은 그 자리에서 일필휘지로 ‘홍익인간 원융무애(弘益人間 圓融無碍)’라는 휘호를 써주셨다. 나는 액자로 제작하여 대학교 본관 현관에 걸어 놓았다.

나는 참다운 대학이라면 ‘최고(最高)와 최고(最古)를 겸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최고(最高)는 첨단 기술을 말하고 최고(最古)는 문화의 뿌리를 뜻한다. 하버드대학교의 예를 본뜬 것인데, 하버드대는 최고의 첨단 대학 인프라를 갖추고 옌칭연구소를 만들어 중국문화의 최고의 연구소가 되었다.

총장으로 부임한 날부터 나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영산대학교는 처음 개교할 때 신입생 정원 960명으로 시작했으나, 개교 이후 4년이 지났을 때는 3개 대학원, 11개 학부 34개 전공을 갖추고 신입생 정원 2,240명에 이르는 명실공히 종합대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부남철 교무처장을 비롯한 간부들과 구성원들이 함께 이룬 업적이다.

나는 신생 대학을 발전시키는 방법의 하나로 국제교류도 열심히 추구했다. 유창하지는 않지만 영어, 중국어를 조금 할 줄 알아서 직접 외국에 나아가 국제교류를 추진했다. 당시 한국 통일문제의 전문가 중 한 사람이던 미국 남가주 대의 조지 토튼(George Totten) 교수를 그 대학 출신 김경안 교수의 도움으로 영산대학교에 초청하여 특강을 실시했다. 나는 그 답례로 남가주대학교의 초청을 받아 한국 통일문제에 관하여 영어로 강연하였다. 

또한, 나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된 세계총장협의회(IAUPP),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한국 통일문제 국제회의, 중국 북경에서 개최된 한 · 중 총장 회의에서도 영어로 논문을 발표하였다. 중국에서는 논문 발표 당시 중국의 여러 대학교 총장들로부터 논어 교육 등 ‘가치관 교육 문제의 중요성’에 관심을 표명하여 활발한 토론이 있었고, 이것을 인연으로 영산대학교와 학술교류 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른 경우도 여럿 있었다. 

나는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직접 방문하여 그곳의 세계적 명문 스텔렌보스대학과 학술교류 협정을 체결하였다. 각국의 명문대학과 학술교류를 맺었기에 영산대학교 학생들은 해마다 세계 여러 대학교에서 학술 연수를 받을 수 있었다.

영산대학교는 원효대사가 1천 명의 성인(聖人)을 배출했다는 천성산(千聖山) 기슭에 세워졌다. 나는 영산대학교를 원효 연구의 성지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원효대사에 관한 논문을 학회지에 두 편 발표하였고, 천성산과 불교 무술 선무도 수련을 경주 선무도 수련장 골굴사와 연결하여 국제적 네트워크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선무도를 정규대학에서 처음으로 교양과목으로 채택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지금 영산대학교는 ‘화쟁연구소’를 설립하여 원효 연구 전집 발간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총장직을 마친 후 1년 동안, 미국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에 있는 조지메이슨대학교에서 방문학자로 있었다. 

나는 주말에 그곳에 있는 보림사에 다니면서 주지인 경암 스님과 각별한 관계를 맺었다. 그 절에 학기마다 찾아오는 아메리칸대학교 등의 종교 실습생들을 위한 주지 스님의 법문을 통역하는 등의 역할도 했다. 스님은 웨스트버지니아에 큰 절 아란냐사를 짓고 있었다. 아란냐사는 26만 평의 대지에 짓고 있는 절인데 거기에 국제평화대학 건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경암 스님과 두어 번 가보았는데 국유림인 워싱턴 포레스트에 소재하였다. 스님은 아란냐사를 중심으로 불교 포교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고 나도 동참하기로 했다. 스님은 내가 귀국하고 나서 몇 번을 한국에 와서 나와 그 일을 논의했는데, 몇 년 후 열반하시는 바람에 큰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쉽게 생각한다. 

나는 귀국 후 영산대학교에서 정년 퇴임하고 석좌교수로 1년 정도 더 근무하다가 서울로 복귀하였다. 회고하면 부산에 있는 동안 좋은 분들을 많이 사귀었다. 그중 동의대 정경환 교수는 함께 범어사에 자주 참배하고 그 주변을 함께 드라이브하는 등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와는 지금도 전화로 거의 매일 학문적 대화를 나눈다. 백성욱연구원의 중요한 구성원 중 한 분이다. 

나는 서울에 돌아와 서울디지털대학교 법무행정학과 석좌교수로 8년 정도 더 강의했다. 백 선생님께서 나에게 미리 정해주신 교수라는 직업을 평생의 업으로 삼은 셈이다.

백성욱 박사님의 열반과 그 후

백 선생님은 1981년 8월 19일, 당신이 태어나신 바로 그 날짜에 열반에 드셨다. 내가 아직 청와대에서 근무할 때였다. 그날 새벽 사모님께서 ‘선생님이 열반하셨다’고 연락을 주셨다. 아내와 함께 급히 한강 변 반도아파트로 갔다. 막 열반하신 백성욱 박사님의 모습은 마치 부처님의 열반상을 보는 것 같았다.

나에게는 선생님의 빈 자리가 너무 컸다. 나는 인천대학교로 자리를 옮기고 난 후 인천대 입사 동기인 송재운 교수와 함께 서울에서 인천으로 출퇴근하면서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백성욱 박사께서 동국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할 당시 학보사 기자였기 때문에 백 선생님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월간지 《불교사상(佛敎思想)》이 창간되었는데 송재운 교수가 주간이 되어 나를 편집위원으로 위촉했다. 그곳에서 《불교사상》의 최재구 회장, 사장을 맡고 있던 양산 스님과 매달 편집회의 때 만나고 함께 여행도 했다.

또 최재구 회장이 불교신도회 회장을 맡았을 때 사무총장을 하던 이건호 거사 등 당시 신도회 주역들의 모임인 보림회의 회원이 되었다. 우리는 매달 만나 신앙심을 다졌다. 이분들은 내가 영산대학교 총장으로 부임할 때 양산까지 내려와 나의 취임을 축하해 주기도 했다.

한번은 송 교수가 나에게 《불교사상》에 실을 원고를 청탁해왔다. 나는 백 선생님에게 들은 법문을 기억해 내어 〈《금강경》 독송의 이론과 실제-백성욱 박사를 통한 불교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했다. 《불교사상》 1985년 3월호와 5월호에 글이 실렸다. 백성욱 박사님의 생생한 가르침을 처음으로 활자화하여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독자들의 반응은 의외로 뜨거웠다. 

바로 김양경 사장이 작은 책자로 내놓았고 곧 이건호 회장의 도서출판 보림사에서 정식으로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신심이 깊고 열성적인 김양경 사장은 책을 들고 전국 사찰을 돌면서 무료로 배포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해서 소사에서 백 선생님께 수학한 사람들 간의 연락이 빈번해져 1986년에는 ‘《금강경》 독송회 중앙회’라는 단체가 조직되었다. 내가 회장을 맡고 김재웅 법사가 지도법사를 맡았다. 2년이 지나 회칙에서 정한 대로 신임회장을 선출하여 업무를 인계했다. 그 후 중앙회는 사실상 활동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백성욱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단체들은 저마다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처음에는 ‘왜 동문수학한 사람들이 합치지 못하고 각자 활동하는가?’ 하고 의아한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도 제자들 사이에 분쟁이 있었는데 부처님께서는 그들이 섞여서 다투기보다 각자 따로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셨다. 부동주(不同住)가 그것인데, 부파불교가 번성하여 불교의 외연을 넓히는 데 활용된 것으로 알고 있다. 선생님은 마음이 크고 넓으신 분이라 다양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선생이 펼치신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부동주가 오히려 법을 펼치는 데 더 유효할 수 있다고 본다.

백성욱연구원의 발족과 연구 활동

2018년 당시 김광식 교수가 회장을 맡고 있던 만해학회에서 ‘백성욱과 만해’라는 제목의 세미나를 개최했다. 나에게 〈백성욱의 불교사상〉이라는 제목으로 발제해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때 참석한 백 선생님 제자 중에서 ‘우리도 이제 백 선생님의 철학 · 사상 · 일생을 학문적으로 조명할 연구소를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다. 윤근향 보살과 김양경 사장이 기본 출연금을 내고, 송재운 교수, 이선우 거사, 고영화 교수 그리고 내가 동참했다. 출연금이라는 하드웨어와 지적 자산이라는 소프트웨어가 합쳐진 셈이다. 그래서 2018년 11월 25일 자로 ‘백성욱연구원’을 비영리 단체로 등록하였다. 내가 이사장을 맡고, 송석구 전 동국대 총장이 원장직을 맡았다. 

그동안 교불련(교수불자연합회) 활동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서울로 돌아온 후로 학술대회에 참석하여 논문 발표도 여러 번 했으며, 중국과 인도의 성지순례에도 거의 빠지지 않았다. 교불련 초대 회장인 고준환 교수, 최장수(最長壽) 회장으로 봉사한 최용춘 교수, 류종민 전 회장과 함께 교불련 활동을 함께 하던 송재운 교수, 김선형 교수, 김한란 교수, 박재철 교수, 원혜영 교수, 이주현 교수 등이 백성욱연구원에 참여하여 많은 힘을 보태고 있다.

나는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직을 병고 중 사임했기에, 병고에서 벗어나면서 백성욱연구원 발전을 위해 자유롭게 일할 수 있었다. 나는 일생 중 두어 번 큰 병을 앓았고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는데, 부처님의 은혜로 모두 극복할 수 있었다. 이제 부처님 사업에 전념할 일만 남은 것 같다.

백성욱연구원은 2019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여 매년 백성욱 박사님의 철학과 사상, 활동을 주제로 월례 발표회를 열어왔다. 연말에는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였다. 백성욱연구원TV라는 유튜브 채널도 만들어 발표 내용을 올려서 일반인들이 시청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발표회와 학술세미나 원고를 모아 책자를 발간하고 있다. 첫 책자가 《금강경 독송과 마음 바치는 법》(백성욱연구원, 2020)이고 두 번째 책자가 《시대의 활불 백성욱 박사의 삶과 수행 정신》(백성욱연구원, 2022)이다. 나의 저서 《금강경 독송의 이론과 실제》는 백성욱연구원에 판권을 기증하였다.

세미나에 참가한 연사와 필자들의 면면은 고준환 교수, 김광식 교수, 김선형 교수, 김양경 사장, 류종민 교수, 류주형 동국대 총동창회 회장, 리영자 교수, 박재철 교수, 송석구 전 동국대 총장, 송재운 교수, 여해룡 교수, 원혜영 교수, 임덕규 디플로머시 회장, 이건호 한강수상법당 회장, 이종찬 교수, 이주현 교수, 장한기 교수, 정재락 교수, 필자(정천구), 최용춘 교수, 헬렌 S. 정 작가(이상 가나다순) 등이다. 모두가 백성욱 박사님과 직간접으로 관련 있는 각계의 저명인사들이다.

2020년부터는 코로나19로 단체 모임이 쉽지 않아 연말 세미나는 한국의 저명한 학술단체인 한국민족사상학회(회장 정경환) 학회지 《민족사상》 특집호에 백성욱 연구 관련 논문들을 학회 심사과정을 거쳐 연속 게재하였다. 그래서 백성욱연구원 논문들은 등재 학회지에 게재되어 국내뿐 아니라 하버드대학을 비롯한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도 검색해 볼 수 있는 논문이 되었다.

2022년 제4주년 기념 학술회의는 ‘백성욱 박사의 문화예술 정신과 업적’을 주제로 개최하였다. 대한불교진흥원 지원사업으로 선정된 학술대회였다. 2023년 올해 기획하고 있는 연말 학술대회는 백성욱 박사의 연구 분야 중 하나였던 ‘불교와 현대과학’을 주제로 준비하고 있다. ■
 

정천구 
한국외국어대 정치외교학과, 고려대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정치학과 졸업(석사, 박사). 1975년부터 1983년까지 대통령 비서실에서 근무하고, 인천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영산대학교 총장 및 교수, 미국 버지니아주 조지메이슨대학 방문학자 등 역임. 주요 논저로 《금강경 독송의 이론과 실제》 《중국인의 세계관과 대외정책》 《중국정치 산책》 《붓다와 현대정치》 등 저서 다수와 〈오바마 행정부 출범과 한국의 대중전략〉 등 논문 40여 편이 있다. 현재 백성욱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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