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이렇게 생각한다. 

‘정말 입산하기 잘했다. 내가 만일 시골 촌구석에 그대로 있었다면 무엇이 되었을까? 입산해서 불교를 만나게 되었고, 대석학인 탄허 노사를 만나게 되었고, 학문을 알게 되었고, 천직인 불교출판을 하게 된 것은 내 인생의 최고의 선택이었다’라고.

 

출가, 입산

1965년 12월 4일 아침 8시, 집을 떠나 월정사로 입산했다. 열네 살. 강원도 산골짝엔 싸락눈이 흩날렸다. 다리를 건너 뒤돌아 집을 바라보니 그때까지도 어머니는 마루 끝에 서 있었다. 아마 내가 전나무 숲속으로 사라질 때까지도 거기에 서 있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졸업 후 여름 어느 날 “이렇게 집에 있는 것보다는 절에 들어가서 한 2, 3년 동안 한문 공부라도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어머니의 권유에 월정사로 입산했다. ‘절(寺)’ 하면 한문이고, 또 당시 월정사에는 한문에 능통하다는 탄허 스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새벽 3시 기상은 매우 힘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3개월이 지나고 6개월이 지나니 일상이 되었다. 1년 동안은 염불만 외웠다. 그 후 입산 초짜들의 교과서인 《초발심자경문》을 외울 때면 가슴이 쿵쿵거렸다. 절하는 무릎이 얼음같이 차갑더라도 불(火)을 생각하지 말란다. 그래야 불도를 이룰 수가 있단다. 행자 생활 3년, 열일곱 살에 사미계를 받았다. 장삼과 오조가사를 입고 계를 받던 날은 행자에서 스님으로 신분이 바뀌는 날, 그 기분은 ‘팔짝’ 하늘을 날아올랐다. 어느 동요 노랫말처럼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였다. 

 

탄허 노사와의 만남

당시 탄허 노사는 월정사 조실채인 방산굴에 계셨다. 때마침 시자가 공석이었는데, 주지이자 은사이신 만화 스님은 나를 불러 “네가 노스님(탄허) 시봉을 해 보라”고 하셨다. 마침 공부하려면 가까이서 시봉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2년 후 탄허 노사께서는 《신화엄경합론》 원고 교열작업을 위해 부산 삼덕사로 가셨다. 《신화엄경합론》은 번역 기간 10년, 원고 매수 65,000매로 방대한 분량이었다. 여기서 약 7, 8개월 동안 본격적으로 《화엄경》 번역 원고를 놓고 여러 사람이 대교(對校), 확인하는 교열작업이 이루어졌다. 교열팀에는 국문과 출신의 김상숙 씨와 오늘날 대강백인 각성 스님, 무비 스님, 칠불암 통광 스님, 비구니 자민 스님, 성일 스님 등 쟁쟁한 분들이 합류해 있었다. 교정하는 중에도 간간이 탄허 스님의 특강이 이루어졌다. 

나는 개별적으로는 탄허 노사로부터 《서장(書狀)》을 배웠다. 대혜 선사의 《서장》은 간화선의 텍스트로 매일 7줄, 10줄을 배웠는데, 탄허 스님의 교육방식은 그날그날 배운 것을 외우지 못하면 절대 가르쳐주지 않는 암기 방식이었다. 

배울 때는 먼저 큰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전날 배운 것을 모두 외워야 한다. 외우지 못하면 큰절을 하고 물러 나와야 한다. 이런 날에는 온종일 탄허 노사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해인사 강원에 가다

《화엄경》 교열작업 후 전통 강원을 거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학을 하는 사람에게 강원은 필수적인 코스였다. 또 당시만 해도 큰 절에서 대중 생활을 해 보지 않으면 여러 면에서 위축되기 십상이었다.

21세 봄 해제 직후, 마침 대타(代打)가 있어서 탄허 스님 시봉을 맡기고 해인사 강원에 입학했다. 객실에서 대기한 지 7일 만에 입방이 이루어졌고 《절요》를 배우다가 갔기 때문에 상반인 ‘능엄경 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월정사에 있다가 해인사에 가니 마치 ‘승가 도시 명동’에 온 느낌이었다. 해인사는 산지(山地) 가람으로 너무나 아름답고 멋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해인사는 스님들이 150~200명가량 상주했던 전국 최대의 사찰이었다. 선원에 50여 명, 강원에 70, 80여 명, 기타 스님들까지 합하면 너무 많아서 누가 누군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강원 대중들 80명의 얼굴을 익히는 데만 족히 한 달이 걸렸고 선원 대중, 기타 대중들까지는 3개월이 걸렸다. 말 그대로 나의 승단 세계관은 정와(井蛙, 우물 안 개구리)였다. 

해인사 강원 생활

해인사 강원 생활은 매우 재미있었다. 일과와 본인이 맡은 소임 외에는 자유 시간이 많은 편이었다. 당시(1972년) 해인사 방장은 성철 큰스님이었고, 주지는 훗날 동국대 총장과 총무원장을 지낸 지관 스님, 강주는 종진 스님이었다. 종진 스님은 강원 은사로 청정한 승가상의 전범이었다. 입적하기 전까지도 서울에 오시면 항상 민족사에 들러서 학문적인 말씀을 해 주셨다. 여름 안거 때 성철 큰스님은 《육조단경》을 강의하셨는데, 대단한 열강에 박학다식하셨다. 그런데 말씀이 너무 빠르고 발음도 특이한 경상도 사투리여서 겨우 반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강원의 정규 강의는 새벽예불 후 4시 반경에 열린다. 전날 저녁예불 후에 학인들끼리 모여 발표하는 논강(論講)이 있다. 발표자 선정은 통을 흔들어 자기 번호가 나오면 발표한다. 또 다음날 정식 강의에서 해석 담당자도 이 방식으로 뽑는다. 강주 스님은 학인들의 해석을 듣고 틀린 곳이 있으면 수정해 주는 방식이었다. 나는 13번이었는데, 기도도 하지 않았는데 한 번도 내 번호가 나오지 않았다. 

 

해인사의 축구 경기

해인사에는 축구장이 있었다. 산불이 나면 대중들이 불을 끄러 가야 하는데 체력을 단련해야 한다 해서 영암 큰스님이 축구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축구 시합은 1년에 한 번씩 각반 대결이 있고, 강원과 선원의 대결은 2~3일에 한 번씩 수시로 열렸다. 점심 공양 후에 경기가 열렸는데 나는 수비수였다. 그것도 11명 구성이 불가능할 때 숫자 채우기 멤버로 존재감은 전혀 없었다. 

선원과 강원의 축구 대결은 막상막하였지만, 선원이 이기는 경우가 많았다. 선원은 단일팀으로 팀워크가 좋았고, 강원은 3, 4개 반이 모여 하나의 팀을 이루었기 때문에 좋지 못했다. 강원팀의 공격수는 수경 스님(전 화계사 주지), 일공 스님, 선광 스님 등이었다. 선원 스님 가운데는 도법 스님(인드라망 상임대표)이 기억난다. 선원과 강원의 축구 시합은 ‘마이 보올’ ‘꼬링(골인)’을 외치면서 적막한 가야산을 뒤흔들었다. 

 

영화를 보러 몰래 대구로 가다

또 때로는 점심 공양 후에 몰래 2, 3명이 대구에 가서 영화를 보고 올 때도 있었다. 당시 〈벤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무기여 잘 있거라〉 등의 명화가 처음으로 우리나라 극장에서 개봉되었는데, 이번에 못 보면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몰래 2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대구까지 영화를 보러 다녔으니 참으로 추방을 무릅쓴 낭만이었다. 스릴도 꽤 있었다. 나가고 들어올 때는 발각되지 않기 위하여 한 명씩 분산해서 정문이 아닌 뒷문을 통해서 나다녔다. 

 

탄허 현토역해 《신화엄경합론》 출판과 나의 운명

1972년 가을, 해인강원을 졸업(13회)하고 동안거는 본사인 월정사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월정사 주지이자 은사이신 만화 스님이 급거 상경 후 귀사하시더니, 나를 불러 “노스님 시봉할 사람이 없으니 네가 다시 서울로 올라가서 노스님을 모셔야겠다.”고 말씀하셨다. 나 역시도 강원을 마치긴 했지만 그건 대중 생활을 해 보기 위해서였고, 공부를 계속하자면 탄허 노사를 모시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판단했다. 

또 당시 탄허 노사는 《신화엄경합론》 조판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인력이 필요했다. 초기에는 조판을 외부에 의뢰했으나 막대한 조판비 때문에 사진식자기(寫眞植字機) 3대를 구입하여 직영체제로 전환했다. 이것을 건의한 분은 당시 무비 스님과 함께 교정을 보셨던, 오늘날 종정이신 중봉성파 스님이시다. 

나는 당시 22~23세 때였는데, 시자 겸 출판 업무관리, 사찰 살림 등 일체를 맡게 되었다. 가능한 한 1년 이내에 조판을 완료해야지 오래가면 지치게 된다는 판단에 오퍼레이터를 3교대 체제로 만들어서 24시간 가동했다. 1인 3, 4역을 하게 되었던 것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고 탄허 스님을 오래도록 모셨다는 점, 그리고 최말단이다 보니 잡일을 도맡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국대학교에서 《화엄경》 출판비를 빌리다 

조판은 1년 만에 마쳤으나 인쇄, 종이, 제본비 등 출판비가 전혀 없었다. 탄허 노사께도 더 이상 대책이 없었다. 나는 고민 끝에 예약 방식(1질당 예약가 10만 원)을 도입하여 전국 사찰에 우편물을 보냈더니, 3개월 만에 약 200질(2천만 원)의 예약이 들어왔다. 종이를 구입하여 인쇄에 들어갔으나 제본비 300만 원이 부족했다. 

나는 탄허 노사께 동국대에서 돈을 빌리자고 말씀드리자 아무 대답이 없으셨다. 차마 동국대학교에 가서 돈을 빌려달라고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탄허 노사는 청빈한 유학자 출신이 아닌가? 나는 노스님께 “제가 빌려달라고 말할 테니 같이 가시기만 해 달라”고 청하자 노사께서 허락했다. 

약속 날이 되어 탄허 노사를 모시고 동국대 총장실로 갔다. 당시 동국대 총장은 이선근 박사였다. 이 총장은 “말씀은 충분히 이해하겠으나 학교 재정은 절대 빌려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참으로 난감했다. 탄허 노사를 모시고 왔는데, 이대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용기를 내어 “총장님, 300만 원을 빌려주시면 《화엄경》이 출판될 수 있습니다. 지금 인쇄 중인데 제본비가 부족합니다. 8월(1975년 8월)이면 출판되는데 3개월만 빌려주시면 갚을 수 있습니다.” 300만 원을 빌려주면 《화엄경》이 출판될 수 있으나 빌려주지 않으면 출판되기 어렵다는 부담스러운 말로 재고를 요청했다. 이선근 총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총무처장을 불러서 가능 여부를 물었고, 조마조마한 순간에 총무처장은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만일 총무처장도 불가능하다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빈손으로 노사를 모시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탄허 노사를 모시고 8년을 살았으니 탄허 노사와의 이야기가 내 인생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 않을 수가 없다. 

 

환속, 세속인이 되다

27세, 13년 만에 환속했다. ‘왜 무엇 때문에 환속했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환속 후 승복이 그리웠다. 승복은 자유를 상징했다. 13년 동안 입었던 회색 승복에 대한 그리움이 컸고, 다시 승복을 입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울컥울컥 치밀었다. 불교 출판사인 민족사를 시작한 것도 나의 정신적 고향이 불교이기도 했지만 산사, 승복에 대한 동경, 그리움도 작용했다. 환속했지만 불교 주변에 있고 싶었다. 전세방을 보문사 주변에 얻은 것도 왠지 사찰 주변에 살면 심리적으로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민족사를 시작하다 

환속 후 해보고 싶은 것은 출판이었다. 탄허 현토역해 《신화엄경합론》 출판이 그 인연이었는데, 탄허 노사를 찾아오는 인사 가운데는 학자, 언론인, 출판인 등 지식층들이 많았다. 책을 만든다는 것이 신기했고 동경의 대상이었다. 

1980년 5월 민족사를 출판 등록하여 다음 해 5월, 1년 만에 제1호로 출판된 책이 여익구 편 《불교의 사회사상》이었다. 이 책은 불교의 사회적 역할, 불교의 대사회 인식을 모색했던 책이다. 당시 여익구 씨와 나, 홍사성 선생, 성문 스님, 원혜 스님 등 5~6명이 민족사에서 1주일에 한 번씩 스터디를 했는데, 그때 여익구 씨와 내가 구상하여 만든 책이 이 책이었다.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판금(판매금지)’을 당했다. ‘불교 판금 도서 제1호’였다. 당시 신군부는 언론 통제를 위하여 지금의 서울 시청에 검열반을 두고 모든 신문과 출판물을 사전 검열했다. 처음엔 별문제 없는 것 같았는데, 3천 권을 인쇄하여 제본까지 완료한 상태에서 뒤늦게 문제가 되어 판매금지를 당한 것이다.

난처한 상황이 되자 당시 스터디에 참여했던 원혜 스님(전 마곡사 주지)이 책을 가지고 범어사 등 전국 강원을 누볐다. ‘불교 판금 도서’라는 것이 오히려 장점이 되어 강원으로부터 주문이 쇄도하여 3천 권이 한 달 만에 완판되었다. 당시 일반에서도 ‘판금 도서’가 되면 오히려 완판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 책을 계기로 더 이상 불교 사회의식을 고취하는 책은 기획할 수 없었다. 필자나 자료도 부족한 데다가, 책은 서점 판매가 기본인데 매번 직판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뒤에 나온 책이 《교단일기》였는데, 이 책도 교단의 현실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완성된 책 4~5쪽을 삭제 후 배포하라는 조건부 판매 허가를 받았다. 

 

외국 원서 리프린트 판매

처음부터 무일푼으로 시작했지만, 이 두 책을 계기로 돈도 바닥이 났고, 특히 단행본은 기획에서 출판까지 적어도 1년 이상이 걸리니, 자금회전이 늦어 제작이 불가능했다. 고민 끝에 택한 것이 외국 불교 학술서를 리프린트해서 판매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는 개발도상국으로 국제저작권협회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고(1994년 가입), 또 이 무렵 대학가를 중심으로 외국 원서 리프린트 판매가 유행했다. 

나는 일본에서 나온 《망월불교대사전》 《불서해설대사전》 《신수대장경》 《남전대장경》 기타 불교 학술서 200여 종 등 많은 원서를 리프린트했다. 또 《팔리대장경(pāli 大藏經)》, Sanskrit-English Dictionary, 《팔리어사전》 《티베트어사전》 《선학대사전》 Buddhist Sanskrit text 등 학문적으로 필요하다면 제작하지 않은 불교 원서가 없었다. 박봉의 학자들, 특히 대학원생들이 원서를 개인적으로 구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많은 부담이 되었는데, 원서 대비 5분의 1, 또는 10분의 1 가격이었으니, 아마 지금 60대 이상의 학자들은 민족사 리프린트 책자를 거의 다 사 보았을 것이다. 

어떤 책을 리프린트할 것인가는 주로 학자들의 자문을 받으면서 나 역시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조사했다. 그 기준은 각주에서 인용 빈도가 높은 책, 일본에서 절판된 책이 대상이었다. 일본에는 이른바 명저는 대체로 1년 이내 품절되었고, 품절되면 재간하지 않는 것이 통례였다. 

일본 도쿄 간다(神田) 진보초(神保町) 양쪽에 있는 1km가량의 고서점 거리는 세계 최대 중고서점 거리인데, 유명한 학술서가 출판되면 몇십 권씩 사 두었던 책들이 절판되면 가격이 10배로 치솟는다. 츠카모토(塚本善陸) 편 《조론연구(肇論硏究)》, 야나키타(柳田聖山) 선생의 《조당집색인》 등은 고서점 가격이 정가 대비 10배였다. 

 

일본에 상륙하다 

그러나 리프린트 서적도 곧 우리나라가 국제저작권에 가입할 예정이라서 한시적이었다. 국제저작권에 가입하기 전에 일본에 판매하여 그 잉여금으로 본격적인 불교 전문서, 학술서 출판을 하고 싶었다. 어떻게 일본 불교학자들에게 민족사 리프린트 서적을 알릴 것인가? 

일본의 여러 불교학회에서 발행하는 논문집에는 반드시 필자 주소가 있었고, 또 일본 최대 학회인 ‘인도학불교학회’ 회원 주소록도 있었다. 목록을 만들어 100여 명의 학자에게 보냈는데 아무 소식이 없었다. 한 달 만에 사건이 터졌다. 일본 〈마이니치 신문(每日新聞)〉 〈요미우리 신문(讀賣新聞)〉 등에서 “한국 민족사에서 일본 원서를 복사하여 판매한다”고 7단 기사로 보도했고, 우리나라 〈동아일보〉도 사회면 1단 기사로 보도했다. 

일본 외무성은 한국 외무부에 항의 서한을 보냈고, 외무부는 문화관광부로 이첩하여 문화관광부 출판과에서 출두하라는 연락이 왔다. 바로 가면 문제가 심각해질 것 같아서 사흘 후에 갔더니, 출판과장이 출판등록을 취소하겠으니, 제작한 도서는 속히 판매해 없애든지 폐기하라고 했다. 일본과의 무역마찰도 매우 심한데 이런 작은 문제 때문에 약점을 잡힐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5공화국이라 신문사도 통폐합시키고 대기업도 쓰러뜨리는 판인데, ‘아! 끝이로구나. 사정해 봐야 소용도 없을 것이니 할 말이나 하자’는 생각으로 이렇게 말했다.

“과거 일본은 한국을 36년 동안 식민지로 지배했는데, 우리나라 국보급 문화재와 고서적 등 그들이 도둑질해 간 것은 수천억도 넘습니다. 지금 민족사에서 일본에 책을 판다고 해봐야 조족지혈입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더니 담당 과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렇기는 합니다만 국제적인 문제라서 자꾸 항의하면 피차 곤란해집니다. 출판등록은 취소하지 않을 테니 이 책들을 가능한 한 속히 처분해 주세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만 짧은 시간에 처분할 방법은 없었다. 

 

전화위복, 새옹지마

이 사건 후 근 5개월 동안 매우 힘들었다. 그런데 서서히 일본 불교학자들한테 주문 편지가 왔다. 이리하여 5, 6년 동안 일본에 역수출한 책이 민족사 운영에 절대적인 도움이 되었다. 대만 불교학자들과 미국, 독일 등 서양의 불교학자들도 주문했다. 일본과 대만 불교학자들은 책값을 깎지도 않았지만, 청구서를 보내면 책이 도착하기도 전에 송금했다. 반면 미국학자들은 입금 태도가 대부분 좋지 못했다. 

어느 날 일본에서 이런 편지가 날아왔다. “친구가 한 달 전에 사망했다. 책상을 정리하다 보니 민족사에서 보낸 청구서가 있는데 아무래도 송금하지 않은 것 같아서 돈을 보낸다”는 것이었다. 약 5만 엔 정도였는데, 그 일로 인해 일본 학자에 대하여 다시 인식하게 되었다. 

 

학술서, 전문서 출판의 외길

일본 원서 리프린트 판매가 발판이 되어 불교 전문서, 학술서 출판에 올인했다. 이것은 사실 내가 하고 싶었던 불교출판의 이상향이었다. 15년 동안 오로지 불교 전문서 · 학술서만 출판했다. ‘이 책을 출판했다가 원가를 건지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학문적 가치가 있는 책, 불교를 탐구하는 데 필요한 책이라면 머뭇거리지 않았다. 한마디로 눈에 콩깍지가 씌어 전문서 외에는 책으로 보지 않았다. 

학술서 출판은 모든 출판의 바탕이었다. 학술서가 출판되지 않는다면 여타 입문 · 문화 · 개론서의 수준이 높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당시 민족사 도서 목록이나 봉투에는 “불교의 학문적 발전을 위하여 전력투구하는”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명기했다. 당시 불교 학술서 출판은 오직 민족사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느 날 직원들(7명)과 회식이 있었는데, 직원들은 내가 대중서를 도외시하고 학술서 · 전문서에 올인하는 데 대하여 불평불만을 털어놓았다. 출판사 운영을 위해 대중서를 하자는 것이었는데, 말투가 ‘사장님이 좀 아둔하다’는 식이었다. 나는 “만일 여러분이 내 방식이 싫다면 떠날 사람은 떠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의미를 먹고 살겠다.”고 했더니, 하는 수 없이 모두 수긍했다. 솔직히 그때와 비교하면 나는 지금 많이 타락했다. 30대 후반, 40대 초반 나는 현실을 무시한 채 오로지 의미에 집중했다고 할 수 있다. ‘불교 학술서 출판사’라는 민족사의 이미지는 이때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부채 1억, 민족사의 위기 

불교 전문 · 학술서에 올인한 지 15년, 그 결과 사채만 1억 원에 달하였다. 15년 동안 운영비를 조금씩 조금씩 빌리다 보니 그렇게 불어나 있었다. 당시 민족사 현실로서는 도저히 갚을 수가 없는 돈이었다. 이자도 많이 나갔다. 빌린 돈 중에는 처제가 결혼 자금으로 모아 둔 돈 3천만 원도 있었다. 그런데 10월에 결혼한다는 것이었다. 3천만 원. 민족사로서는 이것도 당장은 변제가 불가능한 돈이었다. 매달 운영도 급급한 상황, 어음도 할인해서 쓰는 판인데 언제 3천만 원을 모은단 말인가? 

그해 여름 내내 고민한 끝에 ‘깨달음 총서 시리즈 45권’을 정가의 50%를 할인해서 판매하기로 했다. 돈을 빌리는 연줄도 고갈되어서 대안은 이 방법밖에 없었다. 50% 할인판매는 민족사 자존심에 큰 상처였다. 9월 한 달 동안 자로 잰 듯이 정확하게 3천만 원어치의 책이 팔렸다. 다음 해에는 전 품목을 50% 할인판매를 단행하여 일단 빚을 모두 청산했다. 이자가 나가는 사채가 없으니 극락이 따로 없었다.

 

민추(한국고전번역원)에 들어가다

경제적 홍역을 치르고 나니 불교출판에 올인하기에는 인생이 좀 아까웠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한다. ‘불교출판=윤창화’라는 생각으로 출판에 종사해 왔지만, 학문을 탐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고단한 삶 속에서 학술서 출판에 대한 지조도 약간 꺾였다. 회의가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43세에 민추(民推, 한국고전번역원)에 입학했다. 출판 외에 시간 나는 대로 학문을 탐구했다. 

민추는 고전 번역자 양성을 위한 한문 교육기관으로 오늘날 한문학자의 80%는 이곳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사서오경(四書五經)이 주 텍스트였고 주 4회, 강의 시간은 저녁 7시부터 9시까지였다. 나는 7, 8년 동안 한문 독해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모든 약속을 제쳐놓고 민추에 다녔다. 불교학, 불교 경전, 선어록을 탐구하자면 원전 독해 능력 없이는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또 불교 경전 번역 출판에도 필수적이었다. 적어도 일견(一見)에 번역의 오류는 잡아낼 수 있어야 했다.

또 《논어》 《맹자》 등 사서(四書)와 《시경(詩經)》 《서경(書經)》 《춘추》 등 중국 고전은 사유와 사색, 가치관 확립에 필수적인 고급 지적(知的) 문화유산이었다. 특히 《논어》는 인생의 지침이 되는 동양고전의 백미였다. 《논어》를 꼭 세 번 반 배웠다. 반은 중간쯤에서 그만두었기 때문인데, 《논어》는 문장이 매우 간략해서 그 의미를 자세히 알려면 여러 번 읽어야 했다. 만일 출판이 어려워지면 시골에 내려가 동네 청년들이나 가르치며 스스로 자신을 위로하면서 살 대안이기도 했다. 

 

《근현대 한국불교 명저 58선》 저술

이 책은 1901년부터 1999년까지 근현대 100년 사이에 출간된 불서 가운데 한국불교에 영향을 준 책 58권을 선정하여 그 의의와 가치, 시대적 역할 등을 주관적으로 평가한 책이다. 독창적인 연구서, 불교에 대한 이해를 높인 책, 새로운 관점과 해석을 시도한 책, 불자들의 삶에 도움이 된 대중적인 책 등을 선정하여 그 의의와 역할, 그리고 저자의 삶에 대해서도 논평했다. 그 속에는 여전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책이 있는가 하면 자취도 없이 사라진 책도 많다. 아울러 근현대 불교출판의 역사를 점검한 책이기도 하다. 

 

《당송시대 선종사원의 생활과 철학》 

2008년 가을(57세), 나는 가족과 함께 교토 선종사원을 여행했다. 료안지 석정(龍安寺 石庭), 텐류지(天龍寺), 도후쿠지(東福寺), 난젠지(南禪寺) 등 교토의 선종사원과 정원, 그리고 가을 풍광이 고혹적이었다. 시간이 정지되어 있었다. 문화적 ·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22세에 사마천의 《사기열전》에서 충격을 받은 후 처음이었다. 《사기열전》이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 인생은 없다’는 말로 요약된다면, 교토 선종사원의 충격은 ‘모르는 자는 느낄 수 없다’였다. 인생을 새롭게 포맷, 디자인할 필요가 있었다. ‘무엇을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공상에 빠졌다. 

다음 해 가을 다시 일본 선종사원을 답사하고 나서 《선원청규》 8종, 《전등록》 등 자료를 모아 선종사원의 가람 구성과 소임 등 제도, 생활철학, 문화, 오도 시스템 등에 관하여 탐구하기 시작했다. 8년 만에 탈고했는데, 그 책이 2017년 2월에 출판된 《당송시대 선종사원의 생활과 철학》이다. 

선불교가 사상적 · 문화적 · 철학적으로 가장 꽃을 피웠던 시대는 당송 조사선, 공안, 문자선 시대이다. 이른바 ‘황금시대’로, 이 시기 지식인들은 선을 모르면 지식인이 아니었다. 담론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문화적으로 당송시대 선불교의 모습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후쿠이에 있는 에이헤이지(永平寺), 교토에 있는 도후쿠지 등 선종사원, 가마쿠라 엔가쿠지(圓覺寺) 등이다. 철학이나 사상은 문화를 통해 보면 한층 더 분명했는데, 이 책을 쓰는 동안엔 모든 번뇌를 잊을 수 있었다. 막신일호(莫神一好, 하나에 몰입)였다. 당송시대 선원은 제도, 가람 구조 등 모든 시스템이 미혹한 인간을 전인적 인간, 즉 부처로 만드는 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나는 과분하게도 이 책으로 2017 불교평론 학술상을 받았다.

속명을 쓰지 않고 수계명 ‘창화’를 쓰다

나는 환속 후 지금까지 43년 동안 서류 외에는 속명(윤재승)을 써 본 적이 없다. 수계명(受戒名)인 ‘창화(暢和)’를 쓴다. 속명을 쓰면 무언가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 같고, ‘창화’를 쓰면 정체성(불교, 산사)이 살아 있는 것 같아서였다. 어느 날 예비군 훈련 출석부 조교가 ‘윤재승’ 하고 불렀다. 즉시 들리지 않아 대답하지 못했다. 조교가 다시 ‘윤재승’ 하고 불렀다. 그 뒤로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책은 저자와 출판사, 독자가 삼각관계가 되어 만들어 가는 지적 예술이다. 저자는 책 속에 자신의 혼(魂)과 사유 세계를 담고, 출판사는 그 혼집[魂家]을 짓는다. 그리고 독자는 그 책을 읽고 삶의 지혜를 얻는다. 나는 불교를 가지고 영혼의 집을 짓고 있는 사람, 만추(晩秋)같이 아름다운 혼집을 짓는 것이 나의 삶이다. ■

 

윤창화 changhwa9@hanmail.net

1972년 해인사 강원 졸업(13회). 1999년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 졸업. 주요 논문으로 〈해방 후 역경(譯經)의 성격과 의의〉 〈한암(漢岩)의 자전적 구도기 일생패궐(一生敗闕)〉 〈무자화두 십종병(十種病)에 대한 고찰〉 등과 저서로 《근현대 한국불교 명저 58선》 《왕초보 선 박사 되다》 《당송시대 선종사원의 생활과 철학》 등 다수가 있다. 현재 민족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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