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불교

어머님의 깊은 불심

나는 1944년 1월, 서울 성북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경성의전병원(京城醫專病院, 현 서울대학병원)에서 의사와 간호사로 근무하던 중 결혼하셨다. 그 뒤 아버지께서는 충남도립병원장을 거쳐 고향인 충북 음성군 금왕으로 이사하고, 영제의원(寧濟醫院)을 창업했다. 나는 부모님을 따라 금왕에 있는 무극초등학교와 무극중학교를 다녔다. 나의 제2의 고향은 어린 시절 15년간을 살던 금왕인 셈이다.

어머니 고원만심(高圓滿心) 보살은 신심이 깊은 분이었다. 어머니는 평생 세 군데에 절을 지으셨다. 첫 번째는 금왕부인회의 협조를 얻어 금왕 탑골에 ‘보현암’이라는 절을 창건했다. 불사를 위해 터파기 공사를 하던 중 탑신과 불상 범종 용두가 출토되어 어머니는 금동불 2좌를 음성군청에 기증했다. 벌써 창건된 지 60년이 넘은 보현암은 지금은 사명을 보현사(普賢寺)로 바꾸고 전통사찰로 지정되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한편 어머니는 금왕 읍내에 포교당으로 활용할 태극사(太極寺)도 창건했다. 불자들이 교리 공부가 부족하다며 설법을 자주 들을 수 있는 시내 포교당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렇게 큰 원력이 성취되자 어머니는 이화응(李華應) 큰스님을 증명법사로 모시고 점안법회와 낙성법회를 했다. 초대 주지로는 비구니 홍정륜 스님을 모셨다. 이후 태극사는 금왕 무극리 3구로 첫 번째 이사를 하였고, 지금은 육령리 저수지 맞은편 산으로 옮겼다. 이 절은 거듭 사세가 확장되고 발전을 거듭했다.

세 번째로 창건한 절은 고심사(高心寺)다. 이 절은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 어머니와 인연을 맺은 수많은 분이 함께 화주하여 주신 선연의 결실이었다. 하루는 어머님 꿈에 산신이 나타나, 삼태기를 돌려 쌓은 듯한 산골짜기 한 곳을 가리키며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라.”는 말씀을 했다고 한다. 어머님은 당신이 꿈에 본 산골짜기를 찾아 수십 군데를 헤매던 중 마침내 지금의 고심사 터인 미륵골에 와보니 바로 꿈에 보던 그 자리였다. 어머님은 절터 3천 평을 매입하여 불사를 착공하고 수년에 걸친 노력 끝에 완공시켰다.

1954년 4월 초파일에 고심사의 낙성식을 했는데, 나는 삼성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점심시간인데 운동장에 나와 놀던 아이들 중 누군가 “와아, 서기가 떴다!” 하여 고심사 쪽을 보니 광목을 펼쳐 놓은 듯 서기가 뻗쳐 있었다. 길도 없는 길을 따라 기왓장 벽돌을 이고 지어 나르던 신도님들의 정성과 순박한 신심이 하늘에 사무쳐 상서로운 서기가 펼쳐졌을 것이다.

작은 초막에 지나지 않는 인법당(因法堂) 고심사였지만, 점안법회에는 증명법사로 이화응 큰스님이 초대되었다. 기왓장을 나르던 신도님들이 동참하여 참으로 감동적인 법회 장면이 펼쳐졌다. 이후로 나는 화응 스님과의 인연이 깊게 이어져 스님으로부터 무애(無碍)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리고 이 인연 공덕으로 아내 법계성(法界性)을 만나게 되었으니, 실로 불법이란 묘하고 희유하다 할 것이다.

 

대전고등학교에서 동국대로

아버지의 바람은 내가 좋은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울의 경기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렀는데 실력이 모자라 낙방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학교를 포기할 수도 없고 해서 가까운 음성고등학교에 적을 두게 되었다. 그러나 시험에 떨어져 부모님께 죄송하고 마음을 붙일 곳도 마땅찮아 방황을 거듭했다. 이렇게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을 맞았는데 당시 대전고등학교의 교무과장이시던 작은 형님의 알선으로 전학을 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대전고등학교는 지역의 명문이어서 음성에서와 같이 놀기만 하다가는 낙제하기가 여반장이라 열심히 공부했다.

대전고등학교에서 나는 또 한 분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인연을 만났다. 뒷날 동국대 교수를 지낸 불교학자 박선영 선배였다. 박 선배는 나보다 1년 선배였는데 대전고 학생위원장이면서도 전체 수석을 놓치지 않은 준재였다. 선배는 실력이 뛰어났음에도 남들이 그렇게 선망하는 서울대를 가지 않고 동국대 불교학과로 진학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그해 초파일 날, 박 선배께서 나를 양정묵 스님의 절로 오라고 하였다. 가서 보니 절 마당에 신도님들이 꽉 차 있는데, 법당 댓돌에서 대학 1학년생인 박선영 선배가 설법을 하고 있었다. 법회가 끝난 후 선배는 내게 “불교보다 좋은 건 없다. 그러니 꼭 동대로 와서 함께 공부하자.”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1962년, 마침내 대학 진학을 결정해야 할 때가 오자, 나는 동국대 불교학과를 지망했다. 여기에는 신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이에 못지않게 나를 이끈 사람은 누구보다도 박선영 선배였다. 박 선배는 박사과정을 전후하여 논문만 쓰면 잊지 않고 한 책씩 보내주어 내게는 많은 공부가 되었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진학한 나는 초동에 있는 기숙사에 기거하면서 공부와 교유를 넓혀나갔다. 동국대 불교학과는 대한민국에서 유일무이한 불교학과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 땅에 구현하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이 담긴 대학이므로, 동국대학교의 주인은 옛날에도 지금에도 불교대학이 그 주인이다. 그래서 다른 과에는 없는 불교학과만의 기숙사(기원학사)가 초동 107번지에 있었다.

일본 절 동본원사를 개조하여 리모델링한 기원학사는 200여 평 규모의 건물로서 중앙에 법당이 위치하고 빙 둘러 주방과 학생들이 기거하는 침실이 있었는데, 모두 다다미방이었다. 여름이면 덥고 겨울이면 추웠다. 한 달에 쌀 서 말만 내면 한 달을 살 수 있었지만, 그걸 못 내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예불이 끝나면 법당에 빙 둘러앉아 발우공양을 하였는데, 동기생 차재익(육군 소장 예편, 작고)도 쌀 서 말을 못 내어 누룽지로 끼니를 때우던 기억이 새롭다. 사생 모두 성실 근면하였고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는 풍토를 만드는 지혜로운 이들이었다.

 

군포교의 숙원이 이루어지다

1968년 11월 30일, 나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행되는 불교 군종장교로 임관되었다. 그러나 포교의 황금어장이라는 군대에 군법사 제도가 만들어지고 마침내 내가 임관하게 되기까지는 그야말로 우여곡절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 군종제도가 도입된 것은 6 · 25 전쟁 중으로, 미군의 군종제도를 본떠 시행됐다. 1950년 12월 해군에서 군목실, 1951년 육군에서 정식으로 군종과가 창설되었는데 이름만 군종과였지, 개신교와 천주교만 참여했고 무급 위탁 형태의 문관으로 운영됐다. 그러다가 1952년 군목과로 이름을 바꾸고 유급으로 전환하였다. 1954년 군목과를 군종감실로 승격시키고 군종병과로 개편하여 성직자 문관들을 정식 장교로 임관시켰다. 불교계는 1963년부터 불교계의 군종 참여를 요구해왔으나 김성은 국방장관을 비롯한 기독교계의 방해로 관철이 되지 않고 있었다.

이에 불교단체들이 합심하여 조계사 마당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는데, 이때 이무웅(관음종 종정 홍파 스님)이 대불련 회장으로서 사회를 진행하였고, 이평래(충남대 교수)가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기도 하였다. 나는 덩달아 연단에 올라가 김성은 장관과 방해 세력을 성토하는 연설을 했다.

모든 것은 시절인연이 맞아야 결실을 이룬다더니 그처럼 염원하던 군종법사 제도가 마침내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월남전에 국군을 파견하고 있었는데 월남은 알다시피 불교국가였다. 한국군의 대민사업에는 군종 승려가 절대 필요했다. 이에 마침내 정부는 군승제도를 시행키로 하고 불교계에 군승 자원을 요청했다. 이렇게 하여 군승제도가 도입되자 나는 군종장교를 지원하여 제1기 군법사로 선발되어 임관을 위해 광주 보병학교에서 10주 훈련을 받게 되었다. 이때 같이 선발된 1기 군법사는 이지행, 장만수, 김봉식, 권기종, 필자(권오현) 등 5명이었다. 제1기 군법사로 입대한 우리는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았다. 어느 때는 밤새워 비상 집합이 반복되고, 어느 때는 알몸으로 얼음 속을 들어가기도 하였다.

보병학교 훈련 중 많은 스님과 신도들이 위문을 오셨다. 월남의 친한파 불교 대표 틱탐차우 스님이 방문하여 우리를 위문하셨는가 하면, 총무원 월주 스님, 운학 스님 등과 송광사 보성 스님 등이 찾아주셨고, 광주지역 신도님들이 교대로 방문해 주셨다. 일요일 외출이 허용되면 후보생 모두는 인근 신흥사, 흥룡사, 관음사 등을 찾아 배가 터지도록 포식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월남 파병과 백마사

1968년 12월 30일, 그러니까 임관 한 달 만에 나는 부산 제3부두에서 월남으로 가는 발레트호에 승선했다. 10여 일 후, 중부 월남 나트랑에 도착했다. 백마부대에서 마중 나온 사단 군종참모부 군종병이 나를 반겼다. 당시 류창훈 사단장님은 내게 군법사로서 1년 동안 부대를 위하여 할 일에 대하여 계획서를 제출하라 했다. 내가 제출한 계획서 내용은 첫째 사령부 내에 백마사 창건, 둘째 월남어 교육 이수, 셋째 부대 인근 사찰 스님들과 유대 강화를 통한 대민 활동, 넷째 직할부대를 포함한 포병사령부와 3개 연대 장병에 대한 인격 지도 교육이었다. 이 계획은 사단장과 장병들의 협조로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우선 백마사가 완공되었다. 낙성식에는 닌호아 소재 천보사 주지 스님과, 뚝미훈련소 소속 월남 군승과, 주월 법사님들과, 류창훈 사단장님을 비롯한 부대 장병과, 가까이 살고 있는 월남 신도님들이 운집한 가운데 여법하게 봉행되었다. 백마부대의 백마사는 호네오산을 마주하며 그 위용을 자랑했다. 법당은 30여 평으로 108계단 위에 우뚝 자리 잡았고, 좌측에 세운 범종각에는 전리품으로 보관하던 월남 범종이 이역만리 전선에 울려 퍼져 장병들의 외로움을 달래주었고, 산화한 영령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다시 가서 살고 싶던 월남, 사람도 순박했고 산하도 좋았고, 내가 한 일도 여한이 없다는 기억이 남아 있다. 나는 월남에서 1년간 근무를 마치고 귀국했다.

 

군법사단장에 취임

귀국 후 나는 선임자라는 이유로 초대 군법사단장이 되어 예편할 때까지 3군 불교 장교회 연석 임원회의, 3군사관학교 생도 합동법회 등을 주관했다. 그리고 장교회 임원들과 법사단이 자주 모여 군불교 포교 방향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고, 종단과 불교진흥원, 관음회 등의 지원을 받아 각급 부대에 군법당을 짓고, 법사님들의 원활한 활동을 위한 오토바이를 지원받기도 하였다. 예편 후에는 초대 예비역 법사단장을 맡기도 하였는데, 이제 현역 군법사가 150명, 예비역 법사들이 250명을 넘어섰고, 군법당도 400여 동에 이르러 군법사단은 거대 군종교구로 새로 태어났다. 군법사단의 조직은 인화(人和)가 생명이다. 나는 군법사 충원을 위해 노력한 끝에 1차로 100명을 제도화시켰다. 많은 분의 협조로 이 일이 이루어진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이 일들이 우연이나 행운의 결과도 아니었다. 군법사 복무 5년여,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 스스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던 시절이었다. 5년여 동안 신축된 군법당이 무려 30여 개에 이른다. 각급 군법당에서는 보통 주 2회 이상의 정기법회가 열리고 있다. 이 법회에는 장성, 장교, 사병은 물론 일반 신도 또는 학생회원들이 함께 법문을 경청하고 있다. 그 많은 눈과 귀와 심성 속에 더욱 큰 용기와 희망 그리고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심을 심어주는 보람된 일을 했다니, 내 인생에서 최고의 시기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대산의 기도

군법사 5년여! 그동안 나는 후회 없이 살았다.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예편과 동시에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그것을 부처님에게 여쭙고 싶어 무작정 기도를 떠나기로 작심했다. 어디로 갈까 궁리하다가 이왕이면 오대산 적멸보궁이 좋겠다 싶어 보궁을 찾아갔다. 중대사에서 숙식하며 3km 위 적멸보궁을 하루에 네 번 오르내렸다. 7일 기도를 기약하고 사흘간 오르내리다 보니, 다리는 아프고 기도도 별 진척이 없어, 아예 나머지 기간은 보궁에서 단식 철야기도를 하기로 작심했다. 평생 그때처럼 열심히 기도해 본 적도 없다.

일과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았다.

 

03:00. 기상과 동시 적멸보궁에 올라 새벽기도를 올린다. 어둠이 깔린 보궁의 공기가 차갑기만 하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곳, 법당에 부처님은 아니 계시고 좌복이 대신한다. 향 2개비가 타는 동안 기도한다.

09:30. 아침 공양 후 비로봉의 부운과 울울한 오대의 삼림을 호흡하며 다시 보궁에 오른다. 어제와 오늘의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14:00. 하루에 네 번을 중대와 보궁을 오르내리는 셈인데 왕복 12km는 될 듯하다. 오르고 내리며 내 마음을 읽어보자. 다람쥐 한 마리가 길가에서 재주를 넘는다. 초조해하지 말고 결과를 기대하지 말자. 그저 기도 자체가 목적이어도 좋다.

18:30. 저녁 산사의 노을을 보며 오른 보궁에서의 석가모니불 정근. 황홀경에 나를 잊은 듯 보궁의 열띤 송경이 무아를 부른다.

내일 할 일이 무엇일까 생각지 말고 이 시간 이 기도에 전념하자. 별을 헤며 하산하여 중대(中臺)에 눕는다. 하루의 기도가 끝났다. 무엇을 얻었냐고 묻지 말자.

7일째 새벽 3시. 아, 보궁 앞 공터로 뛰어나와 하늘에 떠 있는 별을 잡았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환희심이 일었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因地而到者 因地而起)”는 보조 국사의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의 말씀이 새로웠다. 내 삶의 진로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전국신도회와 조계종 총무원, 동국대에서

보궁에서 기도를 마치고 내려온 후 나는 평생 크든 작든 불교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전국신도회. 그곳에서 2년여를 일한 뒤 1977년 조계종 총무원 총무계장직을 맡아 근무를 시작했다. 그 기간 중 특히 기억나는 것은 호국승군단의 조직이다.

당시는 예비군 교육과 민방위 교육이 철저하던 때였는데, 스님들이 일반인과 어울려 교육을 받게 되니 여간 민망하지 않았다. 나는 군법사의 경험을 살려 예비군과 민방위 본부를 찾아가 스님들의 딱한 사정을 설명하고 조계종이 종단 자체의 예비군 조직과 민방위 조직을 만들어 스님들만이 따로 교육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청원이 받아들여지자 곧바로 호국승군단을 결성했다. 호국승군단의 조직은 총재에 종정 스님, 단장에 총무원장 스님을 당연직으로 하고 종단의 24개 본사와 선학원을 합하여 25개 지단을 편성했다. 전국에서 2,000여 명의 스님들이 조계사 마당에 운집한 가운데 호국승군단 발대식을 거행했다.

나는 호국승군단 사무국장으로서 이 모든 일을 기획하고 집행하였다. 종회의원 스님들에게 브리핑하여 동의를 얻었고, 종정 스님의 최종 결재로 호국승군단이 창설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권기종 선배로부터 동국대학교로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나는 곧 총무원에 사표를 제출하고 동국대학교로 적을 옮겼다. 초대 정각원장 지관 스님 밑에서 간사 역을 했다. 정각원이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는 대학 전체의 교수와 직원을 4개조로 편성하고 1년에 한 차례씩 2박 3일의 일정으로 불교 수련회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교직원 수련대회 개최를 위하여, 사찰 선정에서부터 수련 일정과 강사를 섭외하는 일들을 계획하고 이를 집행하는 일을 했다. 부처님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어떻게든 해내겠다는 사명감으로 살던 때였다.

 

장상문 대사와의 인연

그러던 어느 날 대원회 장상문 이사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같이 일하자는 것이었다. 장상문 이사장은 동국제강주식회사 창립자 대원 장경호(大圓 張敬浩) 거사의 아드님이었다. 대원 장경호 거사는 재단법인 대원정사와 재단법인 대한불교진흥원을 설립했고, 평생을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온 근대의 유마거사로 불렸다. 그분의 아들 장상문 이사장은 대통령 의전실장, 정무담당 차관보 등을 거쳐 스웨덴, 멕시코, 유엔 등 중요 우방의 대사를 역임한 외교관 출신이었다. 외교 일선에서 공직자 생활을 마감한 장 이사장은 바로 아버지의 유훈인 불교 중흥에 뛰어들었다. 공직 마감과 동시에 대원정사 이사장으로 취임했는데 그때 내가 발탁된 것이다.

재단법인 대원정사는 교육부 산하 장학법인으로서, 학자금이 어려운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으며 한편으로는 대원회와 대원불교대학(학장 조명기 박사) 등을 설립하여 불법 포교와 교육을 병행하였다. 대원불교대학은 불교 교리를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무상으로 교육을 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불교대학이었다. 대원불교대학은 1973년, 대원 거사께서 열반에 들기 2년 전 개교하였다. 내가 처음 교무과장을 맡은 후 1학년과 2학년 교실에 들어가 내 소개를 하고 운영방침을 설명했는데 학생 수가 200명이 넘었다.

대원회로 출근한 지 한 달쯤 지나자 장 이사장께서 내게 교무행정과 함께 별도의 업무를 맡기기 시작했다. 하루에 보통 4, 5가지 과제를 주었다. 외무부의 교육 스타일이 아닌가 생각했다. 매일 주어지는 과제는 나로서는 모두가 난제였다. 과제가 쌓이다 보면 어떤 때는 50~60개로 불어나기도 하였다. 완전히 처리된 문제는 빨간색 볼펜으로 지워버리고, 진행 중인 사항은 삼각형 표시를 했고, 도저히 풀 수 없는 난제는 따로 표기하였다.

학사 업무와 교수 선정, 학생들의 신행상담, 경리 등 일반 업무도 만만치 않은 터에 난제가 자꾸 쌓이니 정신적인 고통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렇게 1년을 했더니 괜찮다고 판단했는지 그 후로는 과제도 주지 않았고 일상적인 업무를 모두 믿고 맡기셨다. 나도 여러 군데를 전전하며 웬만한 행정은 자신 있게 처리할 수 있다고 자부하였는데, 행정뿐만이 아닌 다방면의 교육은 나를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1년 동안은 서류를 한 다발씩 집으로 가지고 가 난제를 검토하고 출근 후 보고하곤 하였다.

 

문서포교로 시작한 대중불교 운동

1982년, 장 이사장은 대원불교회관을 신축하고 월간 《대원회보》를 창간했다. 후에는 월간 《대원》으로 제호를 변경하였다가 다시 《대중불교》로 바꾸고 책의 면수도 크게 늘렸다. 잡지 한 권이 포교사 한 명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이사장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기자단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월간 《대중불교》는 30,000부를 돌파했다. 이로부터 《대중불교》는 산골, 어촌, 공장 등지에서 폭넓게 읽히는 명실공히 불교계 최대의 월간지가 되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어린이 포교를 위한 월간 《어린이 굴렁쇠》를 발행하기 시작하였고, 단행본 출판도 시작했다. 《100문 100답》 《우리말 통일불교법요집》 《우리말 통일불교성전》 《설법지침서》 등이 그때 출판된 책이다.

이어서 사단법인 한국불교대원회 창립법회가 개최되고 장상문 이사장께서 초대 회장에 선임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 회장은 재단법인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직과 불교방송국 사장직을 맡게 되었다. 그러자 한국불교대원회의 대소사를 대폭 내게 맡겼다. 이때를 전후하여 대원회는 전국적인 대중불교 결사운동을 전개했다. 전국의 시군을 일일이 방문하여 지역대표 불자들을 만나고 대중불교 운동의 당위성을 설명하며 조직화해 나갔다. 김길성, 전찬규, 이상준, 백영혁, 정상우, 김갑년, 김용직, 문황진 법우님 등과 3개월을 발로 뛰었다.

월간 《대중불교》 지방기자들과의 인연도 이때 이루어졌다. 제1차 대중불교 결사가 전국 시군 대표 2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봉선사에서 2박 3일로 봉행되었다. 장상문 회장의 개회사에 이어 주제 발표와 분과토의가 이루어지고 ‘우리는 불교의 현대화, 생활화, 대중화 운동의 첨병이 된다.’는 요지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때 모인 시군 대표자는 불교개혁 의지가 투철한 불자들이었고 서울에서 제주까지의 모든 지역대표가 한자리에 모인 일찍이 유례가 없는 모임이었다. 이 조직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하여 전국의 각급 대도시와 읍 소재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대중불교 법회를 개최했다. 대략 4개 팀으로 나누어 경상도, 전라도(제주도), 충청, 경기, 강원 등 전역에서 준비하고 강연했다. 강사로는 무진장 스님과 이기영, 목정배, 홍윤식, 권기종, 강건기, 정병조 교수 등이 주로 애써주었다.

 

대중불교 결사대회

대중불교 결사와 전국 강연회는 약 10년간 계속되었다. 전국 큰 도시에서 단기(7일간)불교대학을 개최한 것도 이때쯤이다. 1차로 광주, 전주를 선정하여 수강료 1만 원을 받고 단기불교대학을 시험 운용한 것이다. 그냥 와서 들으라고 해도 별 반응이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수강료 1만 원을 내고 수강할 불자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가 관건이었다. 수강료 1만 원의 제안은 장상문 회장께서 했는데 이는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의 있는 수강생이라야 이들을 정예화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 광주, 전주의 대표 불자들을 통하여 적지 않은 홍보를 하였으나 수강생 확보에는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양대 도시에서 동시에 강의가 시작되던 날, 각기 500명 넘는 수강생들이 몰려들었다.

전주, 광주의 단기불교대학이 성공하자 전국의 도시로 확대되어 계속 이어졌다. 이것이 씨가 되어 현재 전국에는 사찰과 단체에서 운영하는 1~2년제 불교대학이 수백 개에 달한다. 대중불교결사 전국대회와 전국순회강연회 등의 각종 행사는 주로 내가 기획하고 대한불교진흥원에서 비용 지원을 받아 한국불교대원회가 주관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한국불교대원회에서 좌고우면하지 않고 열심히 활동하던 때, 나는 갑작스럽게 장상문 회장으로부터 재단법인 대한불교진흥원 사무국장직을 맡으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리하여 나는 1991년 초, 사무국장직을 맡아 ‘다보수련원’을 개원하고, 《불교총람》을 발간하였으며, 월간 《불교와 문화》를 계간으로 창간하였다.

 

불교방송국 사태 수습

1997년 불교방송국은 한 경리직원이 약 30억 원의 공금을 횡령한 사건이 발생했다. 자체 수습이 지지부진하자, 불교방송 이사회는 사태의 책임을 물어 이사장과 사장의 사표를 수리하고 후임 사장직무대행에 서돈각 박사를 선임했다. 그리고 진흥원 사무국장인 나를 전무로 임명했다. 말하자면 불교방송에서 벌어진 횡령 사건을 사장직무대행과 전무가 책임지고 수습하라는 이사회의 결의였다. 참으로 어수선한 때였다. 불교방송국은 횡령 사건뿐 아니라 IMF로 인하여 광고 수주액도 반 토막이 났다. 노조도 목소리를 높였다. 정권도 바뀌었다. 이런 와중에서 1998년, 불교방송은 사장직무대행 체제를 종식하고 성낙승 전 광고공사 사장을 사장으로 영입했다. 신임 사장이 취임할 때는 이미 광고공사의 수주가 30%를 밑돌 때였다. 불교방송이 어려운 시절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성낙승 사장의 노고가 컸다고 믿는다. 불교방송이 전대미문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사장에서부터 평직원에 이르기까지 뼈를 깎는 고통을 함께 이겨냈기 때문이다. 사장 스스로 급여를 낮춰 책정하고 전 직원의 급여를 깎았다. 직원 모두가 광고 수주에 투입되고 심지어는 프로그램 제작비를 20%까지 하향 조정했다.

구조조정은 내가 역할을 맡게 되어 20명 이상의 사원이 직장을 떠나야 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찾아가 설득하고 사정하였다. 내 평생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을 꼽으라면 이 일일 것이다.

 

고심사 주지법사로 취임

1998년 늦여름, 나는 내가 살고 있던 아파트 5층 옥상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는 사고를 당했다. 석 달 동안을 병원에서 지내고 이듬해인 1999년 말 방송국을 떠났다. 정든 다보빌딩과의 인연도 여기서 모두 접었다. 자의 반 타의 반의 떠남이었다.

내가 고심사에 내려와 1년이 지났을 때의 이야기이다. 성낙승 사장이 방송국을 떠난 후 나는 서돈각 이사장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방송국 사장직 제안을 받았지만 두 번 다 거절하였다. 솔직히 말하면 스님들과 다투는 일이 싫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내 결심이 옳았다고 믿는다.

내가 고심사의 주지법사로 취임한 것은 군법사로 월남에 가서 백마사(白馬寺) 주지, 육군본부의 군법사단장을 끝으로 절 살림을 떠난 지 20여 년 만이었다. 절 살림은 아내인 법계성 보살이 맡았다. 법당은 법련 스님, 법현 스님, 성법 스님, 이시우 법사가 맡아서 각종 법회와 제례를 맡아주었으니 그 고마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법계성 보살이 혼자의 몸으로 가람을 가꾸고 부처님을 시봉한 기간을 뺀다 해도, 20여 년의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과연 나는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실로 부끄럽기만 하다.

고심사가 백운산 미륵골에 자리 잡은 지 어언 58년, 이제 전임 주지 스님들은 모두 앞서 열반에 드셨고, 옛 신도님들도 한 분 두 분 이승을 떠나시는데 나라고 얼마나 남았겠는가? 지난 3년여 동안 큰아들과 작은아들이 세상을 떠나 자식으로는 딸 하나만 남더니, 금년 초에는 아내 법계성 보살마저 극락으로 갔다. 나의 삶, 나의 인연도 이렇게 다해가고 있다. ■

 

* 이 원고는 권오현 선생의 타계로 집필이 불가능하여, 대학 후배인 김형균이 그의 저서 《수행록》에서 중요한 부분을 발췌 요약한 것임.—편집자

권오현
전 군법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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