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불교

어린 시절 내가 자란 곳은 소백산 아래 풍기다. 5백여 년 전 양주에서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남으로 피란해온 곳이 영주시 장수면 토계. 송가만 사는 집성촌이다. 50여 집이 종씨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경찰 간부로 있었던 아버지가 공직을 그만두시고, 외가댁과 친구분이 많은 풍기에 안착하였다.

어렸을 때, 간혹 기억이 나는 것은 대여섯 살 때쯤 절에 갔던 일이다.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소백산 죽령 중턱에 있는 백룡사(白龍寺) 신도였다. 백룡사는 소백산 죽령 도로 밑, 큰 바위와 바위 사이에 있는 작은 절이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우리 집에서 제법 많은 불사를 한 절이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절 밑 희방사역까지 가서 교대로 나를 업고 올라가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처음 그 절에 올라갔더니 많은 사람들이 무슨 행사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내가 잘 놀고 있는 것을 보고 절 일을 거들었다. 그런데 갈 때가 돼 찾아보니 내가 없었다. 산속 해가 넘어갈 무렵 애가 없어졌으니 모두 찾느라 야단이 났다. 혼자 놀다가 산 밑으로 떨어진 것은 아닌지 소리 지르며 찾았다. 

그런데 나한전에서 기도하고 내려오는 신도들이 하는 말이, 웬 어린애가 나한님들에게 중얼거리며 자꾸자꾸 절을 하더란 것이다. 그들은 나를 문수동자 같았다고 했다. 사실 나는 별로 기억나지 않지만, 외갓집에 가면 할머니나 친척들은 그때 이야기를 하면서 ‘저 아이는 전생에 스님이었던 모양’이라며 나를 보면 ‘아기 스님’이라 부르곤 했다. 그 외할머니도 벌써 돌아가셨고, 나 역시 칠순 중턱을 넘어선 나이이니 그때의 일이 자세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내 최초의 불연(佛緣)이 아닌가 싶다.

 

촛불은 자신을 태우고 

영주에는 천년고찰 부석사가 있다. 부석사의 큰 법당 무량수전은 고색이 창연하고 자태가 우아하여 보는 사람마다 감탄을 쏟아낸다. 이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도 유명하다. 나는 1965년 여름. 부석사 취현암 뒤편 구석방을 하나 얻어 들어갔다. 출가를 하러 간 것은 아니고 대학입시 준비를 위해 산사를 찾아간 것이다. 굳이 절로 간 것은 그때가 세상의 대소사를 모두 고민하고 불안해하고 사색하고 몽상하며 고독해 하던 사춘기였기 때문이지 싶다. 밤이면 책상에 붙어 앉아서 입시 공부에 열중하려고 하였지만,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갖가지 망상으로 가득했다. 당시 그 절 주지는 근대의 고승 중 한 분인 동암(東庵性洙, 1904~1969) 스님이었다. 스님은 나를 볼 때마다 “부모가 널 낳기 전에 너는 누구였누?” 하며 사춘기 소년으로서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곤 했다.

하루는 내가 취현암 봉당에 앉아 스님들이 울력하다가 놓아둔 낫을 들고 있는데, 지네 한 마리가 내 앞을 지나고 있었다. 나는 무심결에 낫으로 지네를 토막 내고 말았다. 토막 난 지네는 그래도 꼼지락거렸다. 나는 ‘지네야, 나는 너에게 무슨 감정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그저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한 것이야.’ 하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때 스님이 지나가다 이걸 보시고는 “이놈아, 지네가 너에게 밥을 달라 하더냐? 왜 남을 못살게 구느냐?” 하며 꾸중했다. 또 어느 날은 석양 무렵 찌는 듯한 더위가 물러난 범종각 마루에 스님이 와선(臥禪)을 하고 계셨다. 퇴침을 벤 채 비스듬히 누운 노스님은 한 마리 학 같았다. 내가 모른 척 지나가려 하자, 스님은 갑자기 “무(無)다, 무여!” 하고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 혼자서 촛불 서너 개를 켜놓고 책을 읽는데 갑자기 등골이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촛불은 제 몸을 녹여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태워 세상을 밝힐 것인가. 미력하나마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편다면 세상을 밝힐 수 있을까. 나는 전전반측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불교 공부 시작

그 무렵 영주 포교당에서는 탄허 스님이 내려와 《화엄경》을 강설하는 대법회가 열렸다. 동암 스님은 나를 앞세우고 그 법회에 가자고 했다. 영주 포교당은 근동에서 모여든 도속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동암 스님의 소개로 탄허 스님께 인사를 올리고 법회의 말석에 앉아 강의를 들었다. 스님은 《화엄경》을 노장철학에 비교해가며 장강에 물 흘러가듯 장광의 설법을 했다. 《화엄경》 법회는 석 달 동안 계속됐다. 나는 이 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영주 집에 머물면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한 말씀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모았다. 그렇게 했더니 무엇인가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것 같았다. 

다시 절로 올라가자 동암 스님은 나에게 머리를 깎으라 했다. 중노릇을 하라는 것이었지만 아직 확신은 서지 않았다. 다만 아침저녁으로 예불 올리는 일은 빠지지 않았다. 그러자 스님은 다시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으로 보냈다. 당시 금당선원은 재가의 거사들에게도 선방 문을 열어주고 있었다.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한 철을 지내는데 이번에도 공부할 좋을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영남대 교수로 와 있던 불교학자 이기영 박사가 동화사에서 기신론을 강의하는 것이었다. 매주 토요일에 올라와 강의하는데, 나는 말석에 앉아 최고의 강의를 들었다. 그때 메모해두었던 공책은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중도 속도 아닌 채로 살다 보니 복잡한 문제가 생겼다. 군대에 가야 하는데 때를 놓쳐 기피자가 된 것이다. 방법은 대학에 들어가 병역연기를 하는 것이었다. 부랴부랴 시험을 쳐서 1968년 춘천교대에 입학했다. 당시 춘천교대에는 목월 선생의 아들 박동규 교수, 뒷날까지 사제의 인연을 맺어온 이승훈 교수가 그 후임으로 오셨다. 동기로는 후일에 소설가로 문명을 드날린 이외수, 시인 최돈선, 임동윤 등이 있었다. 나는 이들과 교유하면서 문학을 배우고 때로는 저들에게 서푼짜리 불교 지식도 털어놓곤 했다. 아내 고경자를 만난 것도 이때였다. 

졸업 후에는 정선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벽탄국민학교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했다. 아내는 정선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젊은 우리는 곧 연애를 시작했고 결혼했다. 동암 스님이 당신의 상좌가 되라고 하던 바람은 이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나는 이제부터 교사로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촛불이 되고자 했다. 

선어록을 읽으며

정선에서의 국민학교 교사 노릇은 내 삶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왔다. 천방지축으로 헤매던 생각을 한군데 매어두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 조용함을 감당하기에는 아직 나는 혈기방자한 나이였다. 옛사람들은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옛날 선비들은 시골에 가서 살면 어느 때보다 옛 성현의 가르침이 들어 있는 책을 많이 읽었다고 했다. 실력을 키우는 기회로 삼는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잠시 놓았던 경전과 어록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처음 손에 들었던 것은 《육조단경》. 탄허 스님이 번역한 책인데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육조단경》은 혜능과 신수의 벽상시(壁上詩) 대결이라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유명하다. 마음에 낀 때를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인데, 신수는 때때로 쓸고 닦아야 한다는 것이고 혜능은 본래 없는 때니 닦을 게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러나 특히 《육조단경》에서 가장 나를 매혹시킨 말씀은 혜능이 홍인 대사로부터 의발을 전수하고 길을 떠나 대유령에 이르렀을 때 추격해온 혜명에게 한 말이다. 혜명이 법이란 완력으로 취할 수 없음을 알고 가르침을 청하자 혜능은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不思善 不思惡).”고 했다. 이 말은 혜능이 한 최초의 법어였다. 나는 이 대목에 이르러 무릎을 쳤다. 

《육조단경》을 읽다 실눈이 트인 나는 내친김에 선어록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인상적인 책은 원오극근이 편집한 《벽암록》이다. 《벽암록》은 중국 선사들의 선화 1백 개를 추려 소개하면서 평창과 게송을 덧붙인 종문제일서다. 첫 번째 이야기는 달마불식(達磨不識)이다. 양 무제가 불교의 근본을 묻자 불사의 공덕을 묻자 달마 대사는 “모르겠습니다(不識)”라고 한다. 이런저런 설명을 해봐야 자칫하면 시비만 생길 뿐이니 차라리 입을 막는 것이 옳다는 뜻이리라. 《육조단경》에서 선악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계속해서 읽어나가는데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특히 제100칙 파능취모검(巴陵吹毛劍)은 압권이었다. 어떤 사람이 파능 화상에게 “어떤 것이 무엇이든 잘라내는 취모검입니까?”라고 묻자 화상은 이렇게 답한다. “산호의 가지마다 달이 걸려 있구나(珊瑚枝枝撐著月).” 이것은 이것대로 저것은 저것대로 아름답다는 말이다. 수행자가 이쯤은 돼야 수행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번 재미를 붙이자 나는 계속해서 선어록을 읽어나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많은 어록이 아직 번역되기 전이어서, 어려서 서당에서 겨우 소학과 대학 정도를 읽은 실력으로는 독파에 어려움이 많았다. 나는 옥편을 펴놓고 필사를 해가며 《서장》 《선요》 《조주록》 《선문염송》 등을 공부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야말로 문자반야(文字般若)에 불과했다. 산호 가지마다 달이 걸려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내가 정말로 그렇게 살아가는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 나섰다. 파계사 고송 스님, 해인사 성철 스님, 통도사 경봉 스님을 비롯해, 제방에서 납자를 제접하는 노스님들을 찾아뵙고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때로는 혼이 나기도 하고 때로는 열심히 하라는 격려를 받기도 했다. 

강릉에서 시작한 불교 강좌

정선에서 2년간 교사 생활을 하다 다음으로 발령받은 곳은 태백시에 있는 태백초등학교. 여기서 1년간 근무하다가 도(道)를 옮겨 경북 성주국민학교로 갔다. 성주는 옛날에 아버지가 경찰서장을 하던 곳이다. 성주에서 1년간 근무한 뒤 다시 발령받은 곳은 대구 달성초등학교. 5년간 4군데 학교를 전근해가며 교편생활을 했다.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전근을 다니자니 가정생활이 불안정했다. 아내도 교사였으니 떨어져 살아야 하는 게 여간 고단하지 않았다. 그러던 터에 어느 날 박 모라고, 당시 박 대통령의 인척 되는 사람이 시멘트 대리점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왔다. 아내와 상의한 끝에 나는 학교를 사직하고 대구에서 시멘트 대리점을 시작했다. 아무런 경험도 없는 백면서생이 사업을 시작하다니, 그 장래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금방 밑천마저 거덜 내고 쪽박 차는 신세가 됐다. 이제부터는 호구가 문제였다. 궁리 끝에 우리는 처가가 있는 강릉으로 집을 옮겼다. 그곳에 가서 한 일은 ‘강원장업(江原粧業)’이라는 화장품 전문판매점이었다. 강릉포교당 앞 중앙시장에 거점을 두고 시작했는데 운이 좋아 사업은 마른 장작에 불이 붙듯 일어났다. 강릉을 본점으로 하여 남으로는 울진, 서쪽으로는 영주, 북쪽으로는 춘천까지 영역을 넓혔다. 이 사업은 강릉을 떠날 때까지 25년간 계속했는데 돈을 많이는 아니지만, 먹고살 만큼은 벌었다. 

강릉에서의 생활은 나의 불교 활동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왔다. 내 사업장이 강릉포교당 바로 앞에 있었기 때문에 틈만 나면 포교당에 드나들었다. 당시 포교당 주지는 탄허 스님의 상좌 양운 스님이었다. 강릉포교당은 영동 포교의 핵심 거점으로 대학생불교연합회, 강릉불교청년회 등이 결성돼 있었다. 이 단체는 강릉지방 불교계의 큰 어른인 홍덕유 선생의 지도 아래 활발하게 활동했다. 어느 날 절에 갔더니 홍덕유 선생이 당신은 늙고 힘에 부치니 내가 대불련과 청년회를 지도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사양했지만 선생의 권유가 간절해 마냥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나는 그동안 들은풍월로 《반야심경》을 강론하기 시작했다. 교사들이 자주 쓰는 말로 ‘교학상장(敎學相長)’이란 말이 있다. 가르친다는 것은 사실은 스스로 배우는 일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교사는 가르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가르친다는 것이다. 내가 그랬다. 어깨너머로 불교를 배우기는 했지만 남을 가르칠 만한 능력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남 앞에서 강의하자니 내가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한 시간 강의를 위해 열 시간을 공부했다. 

강릉포교당 법사 노릇은 강릉을 떠날 때까지 계속했다. 《반야심경》은 여러 번 강의해서 나름으로는 제법 아는 척할 정도가 됐다. 나는 내가 이해한 《반야심경》의 세계를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 《반야심경 강론》이라는 책을 쓰기 시작했다. 400여 쪽에 이르는 이 책은 1993년 경서원에 의해 출판됐다. 내가 쓴 최초의 불교 관련 저서다.

서옹 선사를 참문하다

내 인생에서 서옹상순(西翁尙純 1912~2004) 선사를 만나게 된 것은 크나큰 광영이었다. 스님을 처음 친견한 것은 1986년 8월 15일이었다. 내가 스님을 찾아뵙고 선법을 여쭈어보기로 작정한 것은 대구에서 교직 생활을 할 때다. 어느 날 반월당 근처 작은 서점에 들렀더니 스님이 쓴 《임제록 연의》가 있었다. 그걸 사 들고 들어와 며칠 동안 밑줄을 그어가며 읽고 많은 깨우침을 받았다. 이후 인연이 되면 언젠가 참문하리라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좀처럼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스님이 서울 상도동 백운암에 자주 들르신다는 소문을 들었다. 마침 평소 친하게 지내던 부운 수좌가 스님의 시봉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연통해 스님을 찾아뵙고 싶다 했더니 겨우 승낙이 떨어졌다. 대구에서 《임제록 연의》를 사서 읽은 지 꼭 15년 만이었다. 

스님의 첫인상은 학처럼 맑았다. 부운 수좌의 안내를 받아 조실에 들어가 삼배를 하자 스님은 솔바람 같은 소리로 물었다.

“움직일 때나 움직이지 않을 때 너는 어디에 있느냐. ……잠잘 때나 깨어 있을 때 너는 어디에 있느냐. ……꿈꿀 때나 꿈꾸지 않을 때 너는 어디에 있느냐.” 

스님의 질문에 나의 의식은 하얗게 바래졌다. 뭐라고 모깃소리로 대답했는데, 스님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그건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도 모르면 다 모르는 것이다.”

나는 그 말씀에 자책과 자괴감으로 온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캄캄했다. 그러나 스님은 자애로운 분이었다. 공부가 되면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이후 나는 매년 8월 15일이면 스님이 계신 곳으로 가서 공부를 점검 받았다. 

스님을 찾아다닌 것은 전후 일곱 차례였다. 그때마다 스님은 내 공부를 살피시고 향상일로의 길을 일러주셨다. 나는 스님이 아버지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때로는 옷자락을 잡기도 하고 안마도 해드리며 그 법향에 취했다. 스님은 그런 나를 점점 귀여워해 주셨다. 이에 용기를 얻어 《반야심경 강론》 출판을 앞두고 스님을 찾아가 서문을 부탁드렸다.

“뭐라고? 반야심경을 강론한 책이라고? 그럼 한 가지 물어보자. 어떤 이는 반야심경의 요체가 ‘반야바라밀’이라 하고 혹 어떤 이는 ‘마음 심자(心字)’를 요체라 하고, 또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요체라 하는데, 너는 무엇이 반야의 요체인 것 같으냐?“

나는 지체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마하는 반야요, 반야는 바라밀다이고, 바라밀다는 심이며, 심은 경입니다. 또 관은 자재이고, 자재는 보살이며, 보살은 행이요, 행은 심이고, 심은 반야이며, 반야 역시 바라밀다이며, 시며, 조견이고, 오온이며 개공도이고 일체고액입니다.”

나는 이어 《반야심경》 260자를 이어 암송하려 했다. 그랬더니 스님은 “그래, 그만 됐어. 그 원고를 두고 가거라.” 하며 일어났다. 달포 후 스님의 시자가 전화를 주었다. 서문으로 큰스님이 게송을 써놨으니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그 게송은 이렇다.

 

반야의 칼이여 부처와 조사를 쳐죽이고/ 시퍼런 칼을 쓰고는 급히 갈아라/ 나무 까치는 날아서 하늘 밖에 사무치니/ 바로 천 봉오리 만산악을 통과해 가도다

(般若劍兮殺佛祖/ 吹毛用了急須磨/ 木鵲飛翔徹天外/ 直透千峯萬嶽去)

佛紀 2535年 辛未年 4월 3일 西翁

 

문학이라는 배를 타고

내가 문학을 시작한 것은 어린 시절부터였다. 초등학교 때 〈꿈속에서〉라는 동화를 썼더니 선생님이 칭찬해준 것이 계기였다. 이런 인연으로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시도 읽고 소설도 읽으며 문학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대학 시절이었던 것 같다. 1960년대 후반 춘천교대에는 이외수, 최돈선 등 오늘날 강원문학을 대표하는 문인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나는 저들과 어울리며 춘천 보리수다방에서 시화전도 하고, 교대 학보에 〈하루 만에 일어난 일들〉이라는 소설을 연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방거사 어록》 등 선어록에 빠져 있던 나는 본격적으로 문학을 하기에는 머리에 건방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나의 30, 40대는 문학보다는 선수행에 빠져 있었다. 그런 내가 다시 문학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강릉에서 시민선방을 열고 있을 때였다. 유명한 한의사였던 최종백 선생이 내가 가끔 낙서처럼 끄적거린 메모를 당신의 친구였던 정광수 선생이 주관하는 《해동문학》이란 잡지에 보내 1992년도에 시인으로 등단시킨 것이다. 나로서는 좀 어리둥절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이로 인해 시인의 이름을 얻고 문학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옛날 교대 시절의 친구들이 강릉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이들의 방문은 축하도 격려도 아닌 힐난(?)을 하려는 것이었다. ‘문학을 하려면 번듯한 잡지에 투고해서 당선해야지, 이름 없는 잡지로 등단하면 우리가 어떻게 같이 교유하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은근히 자존심이 상해 〈본래면목〉을 비롯, 몇 편의 시를 골라 1995년 《월간문학》에 투고했다. 이 작품은 성춘복 선생 등의 추천으로 당선되어 드디어 문단에 얼굴을 내밀게 되었다. 등단작들은 모두 불교적 영향 아래 쓴 것들이다. 당선작 가운데 나는 〈본래면목〉이 더 좋은데 친구들은 〈굴산사〉라는 작품이 더 좋다고 한다. 소개하면 이렇다.

어저께 굴산사 옛터를 다녀왔다

가을햇살이 따사로웠다

부질없는 세월 넘어 다져진 솔향기

마주 선 범일국사의 당간지주는

무심한 구름덩이로 엉켜 있었다

산도 초목도 사람도 끊임없이 넘나들었다는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면에 

내가 있다는 사실

다람쥐 한 마리가 또르르

천년을 깨뜨렸다.

— 졸시 〈굴산사〉

 

이후 나는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1999년 첫 시집 《눈 속에 핀 하늘 보았니》를 상재하고 2000년부터 3년간 《시현실》이라는 계간지의 주간을 맡았다. 이 기간 중 박인환문학상을 제정하는 한편 이승훈, 박찬일, 강동우 등 모더니즘 계열의 문인들과 교유를 넓혀나갔다. 내가 생각하기에 모더니즘 계통의 시는 내가 읽은 《선문염송》 등에 나타나는 선시와 흡사한 데가 많았다. 서양에서 발생한 선시와 동양의 오랜 전통인 선시를 결합시킬 방법은 무엇인가. 나의 화두는 점점 이쪽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시와세계》 창간

2012년, 강원도 인제 백담사에서는 만해축전이 열리고 있었다. 여기서 춘천교대 시절 스승이었던 이승훈 선생을 만난 것은 운명이었다. 이승훈 선생은 내가 시를 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워하면서 모더니즘 이론과 현대 선시의 상관성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자는 제안을 했다. 나는 매주 목요일 서울로 올라와 이승훈 선생을 만나 현대시와 선시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다. 이 공부를 바탕으로 월간 《현대시》에 이승훈 시력 40년을 기념하는 평론 〈현대선시의 새로운 기미〉를 발표했다. 이 논단은 이승훈 시집 《인생》을 선시 이론의 측면에서 고찰한 것인데, 당시 시단에서는 생소한 주장이었다. 이를 본 《현대시》 주간 원구식 선생이 그 잡지에 선시를 소개하는 연재를 부탁해왔다. 제목은 〈송준영 시인의 선시의 향기〉. 이 연재는 2005년까지 28회를 계속했다. 나중에 이 연재물은 2006년 푸른사상사에서 《선시의 세계》라는 단행본으로 출판됐다. 이 연재가 끝나자 오랜 전통의 시 잡지 《현대시학》에서 새로운 제안이 들어왔다. 정진규 주간께서 2006년부터 선시에 관한 연재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몇 번 사양하다가 〈송준영 선시 엿보기-선(禪), 발가숭이 어록〉 연재를 시작했다. 주로 《선문염송》에 나오는 선시를 소개한 이 연재는 무려 7년간 계속됐다. 나로서는 벅찬 일이었지만 보람된 작업이기도 했다. 이 연재도 나중에 책으로 묶었다. 소명출판사에서 펴냈는데 무려 1.100여 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이다. 이 책은 뒷날 나에게 ‘유심작품상’을 안겨준 저서이기도 하다.

이런 일을 해나가는 동안 나는 큰일을 하나 저질렀다. 이승훈 선생을 고문으로 모시고 계간 시 잡지 《시와세계》를 창간한 것이다. 잡지는 강릉에 주소를 두고 2003년에 창간했다. 창간 목적은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로 대표되는 서양의 현대시와 동양의 선시를 이종교배하는 못자리가 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모험 중의 모험이다. 무엇보다 잡지를 발행하려면 적지 않은 경비가 투입되는데 그것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이는 가장 큰 문제였다. 아내는 이에 대해 큰 우려를 했지만 내가 평생 해보고 싶은 일이라고 하자 모른 척 양보해주었다. 이 잡지는 그동안 어려운 여건 아래서도 모더니즘 계열 시인들의 활동 무대가 되어 왔다. 특히 2008년부터는 ‘이상시문학상’을 제정해 모더니즘과 선시를 표방하는 작품을 쓴 시인들을 격려해왔다. 첫 수상자 이승훈을 비롯해 정진규, 박의상, 송재학, 김언희, 박찬일, 이수명 등이 수상했다. 모두 한국 시단의 쟁쟁한 맹장들이다. 

선시와 전위적 현대시를 결합하려는 노력은 《현대선시》의 동인 결성으로 이어졌다. 이 동인은 그동안 내가 주장해온 선시의 중요한 작법인 적기수사법(賊機修辭法)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인 단체다. 내가 주창하는 적기수사법은 《금강경》의 논리를 현대시 이론으로 정립한 것으로, 간단하게 소개하면 이렇다. 

 

……《금강경》 주 수사법으로 나타나는 ‘불설 반야바라밀 즉비 반야바라밀 시명반야바라밀’로 대표되는 금강경적 적기수사법(賊機修辭法)을 있게 하는 근본 설법이다. 이것이 도식화된 ‘A는 A가 아니라 그 이름이 A다’는 곧 A와 A가 아닌 요소 Ā(없는 A)가 서로 상치하고 대립하는 듯하나, 보다 큰 차원에서는 서로 어우르는 것, 즉 A=Ā로 있음을 말한다. 이것이 적기수사법을 이루는 근본이 된다. ……이를 필자는 적기수사법이라 명명하였고 선시의 하위 단위로 반상합도(反常合道), 초월은유(超越隱喩), 무한실상(無限實相)을 명명(命名)했다.

— 졸저 《禪, 언어로 읽다》 소명출판, 2010 참조

설악무산 스님의 은혜

나의 불교적 삶에는 세 분의 스승이 있다. 영주 부석사에서 나를 불문에 귀의시켜준 동암성수 화상, 서울 상도동 백운암 등에서 전후 일곱 차례에 걸쳐 몽매한 나의 참문을 받고 자비로 가르침을 주신 서옹상순 화상, 그리고 최근 10여 년간 나의 문학과 선에 대해 새로운 안목을 열어준 설악무산 화상이 그분들이다.

무산 스님은 오래전 낙산사 등에서 잠깐씩 친견한 적이 있지만 가까이서 인사를 하고 가르침을 받은 것은 2007년 만해축전 때였다. 당시 나는 《불교문예》 세미나에 작은 논문을 발표하러 만해마을에 가서 스님을 뵈었는데 스님의 접객 인사가 특이했다. 

“종사가 웬일로 누지에까지 오셨소. 뒤에 신사동 선불선원에서 한번 봅시다.”

나를 종사라 불러 준 것도 황송한데 선불선원에서 만나자니 괜히 얼굴이 벌게졌다. 그해 가을 현대시학 정진규 선생이 ‘무산 스님이 한번 보자고 하시니 선불선원으로 가보라’며 전화번호를 일러주었다. 그 즉시 전화를 드렸더니 길을 일러주는데 마치 곽암 선사가 십우도를 그려서 마음공부의 길 안내를 해주는 것 같았다. 새벽 6시 신사동 선불선원으로 찾아갔더니 골방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며 칼날 같은 한 말씀을 던졌다.

“참 잘 왔소. 서옹 노장께서 월조(越祖)라 했다는데 그래, 뭘 뛰어넘었는가? 일러보소.” 

나는 직감으로 나를 거량해 보는구나 느끼고 그냥 웃었다. 스님은 “그렇게 웃으면 안 되는 거야.” 하고 다시 나를 쳐다봤다. 나는 한 발 앞으로 나갔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스님은 ‘그것도 안 된다.’고 했다. 내가 이번에는 “아직 아침 공양 안 하셨습니까?”라고 물으니 스님은 ‘저놈 내쫓아야겠다.’고 했다. 나는 스님 앞에 있는 탁자를 집고 “저는 월조입니다.” 하며 뛰어넘었다. 그제야 스님은 “그래, 월조 맞구나.” 하시면서 웃었다. 

이런 거량이 있고 난 다음부터 나는 스님의 포로가 되었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심부름할 일이 생기면 심부름을 했다. 나는 스님에게서 불교가 문학을 통해 어떻게 현대사회와 소통해 나가야 하는가를 배웠다. 스님은 내가 주장해온 반상합도, 초월은유, 무한실상의 적기수사법을 인정하면서 ‘그렇게만 시를 쓴다면 뒷날 아랫마을에 물소로 태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격려까지 해주었다.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그 법은(法恩)을 억만 분의 일이라도 갚기 위해 스님의 문학에 대한 강호제현의 글을 모아 《‘빈 거울’을 절간과 세간(世間) 사이에 놓기》라는 책을 만들어 올렸다. 46배판 판형으로도 1,0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이었다. 

그러나 스님과의 인연은 거기가 끝이었다. 아직 더 배울 일이 많은데 스님은 지난 2018년 갑자기 세연을 거두고 무상(無常)의 법문을 보여주셨다. 스님은 평소 곁에 항상 해골 모형을 놔두고 당신의 본래면목이라 했다. 돌아보면 내 불교적 삶도 때로는 이 본래면목을 생각하지 않고 엉뚱한 곳에서 헤맨 적이 많았다. 이제 내 나이 일흔하고도 중반. 더는 본래면목을 잊어버린 채 헤매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내 살림살이는 어떠했던가. 언젠가 스스로를 돌아보며 〈이법(理法)〉이라는 시를 쓴 적이 있는데, 독자와 함께 읽는 걸로 이 글을 마친다. ■

 

우수 지난

봄날 

양지쪽

섬돌

 

청개구리

자맥질 연습

퍼얼쩍 

 

송준영
경북 영주 출생. 춘천교육대학교 졸업. 1995년 《월간문학》으로 시인 등단. 시집으로 《눈 속에 핀 하늘 보았니》 《습득》 《조실》 《외발아지랑이 노래》 등이 있으며 논저로 《禪의 시각으로 읽는 반야심경》과 선문염송 강의록 《현대언어로 읽는 선시의 세계》 《禪, 발 가숭이 어록》과 선시론 《禪, 언어로 읽다》 등 다수가 있다. 한국불교문학상, 박인환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유심작품상(학술부문) 등 수상. 현재 계간 《시와세계》 《현대선시》 발행인 겸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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