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불교

여섯 글자의 화두

1993년 가을이었다. 1993년은 국가가 ‘책의 해’로 정한 해였고, 그때 마침 나는 ‘책의 해’ 행사를 주관해야 할 출판문화협의회의 기획 · 홍보담당 상임이사를 맡고 있었으므로 종로 한복판 경복궁 동쪽 문 앞에 자리 잡은 출판협회에 매일 출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협회 회관 바로 옆에 있는 법련사의 청학(靑鶴) 스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법정(法頂) 스님께서 만나고 싶어 하시니 시간을 좀 내달라는 말씀이었다.

그날 밤, 다 쓰러져가던 납작집 법련사 뒷방에는 법정 스님, 헌화 스님, 청학 스님, 그리고 동화작가인 정채봉, 출판인 김형균, 《불교사상》 편집기자였던 김자경, 그리고 나까지 모두 일곱 사람이 모였다. 평소 사람 만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고 불임암을 짓고 내려가신 후에는 바깥출입을 끊다시피 하셨던 법정 스님께서 대체 어쩐 일로 서울 나들이를 하셨고, 무슨 일로 사람들을 만나자고 하셨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 뵙는 자리, 수인사가 끝나고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법정 스님께서 무겁게 말씀을 꺼내셨다.

“그동안 내가 시주의 은혜만 입고 살아왔는데, 이제는 뭔가 밥값은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세상을 맑히는 일을 무엇인가 해야겠는데, 내가 정한 것은 ‘맑고 향기롭게’, 이 여섯 글자뿐,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으니, 여러분들이 힘을 보태 주시오.”

“맑고 향기롭게.” 이 여섯 글자는 그야말로 그날 밤 법정 스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화두(話頭)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가꾸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자는 법정 스님의 깊은 뜻을, 과연 어떻게 구체적으로 펼쳐야 할 것인가는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날 그 자리에 참석했던 분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이 지난한 숙제를 나더러 풀라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법정 스님이 내려주신 이 화두는 어느 한 사람이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모두 각자 구체적인 안을 마련해보기로 하고 헤어졌다.

나는 그날 밤부터 ‘맑고 향기롭게’라는 여섯 글자를 내놓으신 스님께서는 과연 어떤 세상을 꿈꾸셨을까, 우선 그것부터 파악하기 위해 그동안 출판된 스님의 저서를 모아 놓고 스님이 그동안 쓰신 글들을 꼼꼼히 읽었다. 한 달이 넘도록 스님의 글을 읽고 나니 어렴풋이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러나 아직 그 생각들은 뜬구름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 모두 맑고 향기롭게 살아갑시다.” 그것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표현하고 이끌어야 할 것인지, 그것이 문제였다. 뜬구름같은 생각을 그리고 지우고, 또 그리고, 끙끙대기 얼마였던가. 청학 스님의 독촉 전화를 몇 번 받고 나서야 내 나름대로 생각을 가다듬은 ‘맑고 향기롭게’의 설계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을 제대로 펼치려면 우선 무엇보다도 나로부터 출발해서 세상으로, 자연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먼저 ‘맑고 향기롭게’의 목표를 마음을 열고 맑고 향기롭게,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자연을 맑고 향기롭게 세 단계로 정하고 그다음에 각 단계마다 세 가지씩 실천덕목을 설정, 누구나 생활 속에서 아홉 가지 실천덕목을 지킴으로써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가꾸어 나가자는 취지였다.

 

● 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욕심을 줄이고 만족하며 삽시다.
화내지 말고 웃으며 삽시다.
나 혼자만 생각 말고 더불어 삽시다.
 

●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나누어주며 삽시다.
양보하며 삽시다.
남을 칭찬하며 삽시다.

 

● 자연을 맑고 향기롭게

우리 것을 아끼고 사랑합시다.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가꾸며 삽시다.
덜 쓰고 덜 버립시다.

이 아홉 가지 실천덕목을 정리해서 청학 스님을 통해 법정 스님께 전해 올렸다. 과연 스님께서는 이 실천덕목들을 어떻게 평가하실 것인가, 이제는 스님의 하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청학 스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법정 스님께서 보시고 좋다고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토씨 하나 보태지도 않으시고 빼지도 않으시고, 내가 만들어 올린 그대로 단번에 인가를 해주신 셈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쯤 후, 우리는 스님의 부름을 받고 ‘맑고 향기롭게’ 운동을 펼칠 단체의 명칭과 직책과 기구의 책임자를 의논하기 위해 법련사에 다시 모였다. 그 자리에서 스님이 느닷없이 “본부장은 윤 거사가 맡으시오!” 하시는 게 아닌가. 순간, 솔직히 나는 아찔했다.

“스님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왜요?”

“저는 술도 마시지요, 담배도 피우는 데다 그보다도 더 나쁜 짓을 많이 하는 사람인데, 감히 어떻게 맑고 향기롭게의 본부장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저는 안 됩니다.”

그런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스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맡아야 합니다! 아시겠소?”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그동안 맑고 향기롭지 못한 삶을 살아왔다고? 그러면 지금부터라도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야 할 것이 아닌가?’ 스님께서는 나에게 그렇게 엄히 꾸짖고 계신 셈이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찍소리도 못하고 그날로 ‘맑고 향기롭게’의 본부장 직책을 맡아, 장장 17년간 스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까지 지근거리에서 스님을 모시는 과분한 복을 누리게 되었다.

선배의 유혹 “동국대로 와.”

나는 전라남도 영암군 삼호면 용당리라는 작은 농촌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목포(木浦)항에서 영산강 건너 바로 눈앞에 바라다보이는 바닷가 마을이었지만, 어업에 종사하는 집은 한 집도 없었고, 모두가 논농사, 밭농사를 짓고 살던 순박한 마을이었다.

우리 마을에서 시오리쯤 서남쪽으로 걸어가면 해남군의 화원반도를 마주 보는 바닷가 벼랑 위에 축성암이라는 아주 작은 암자가 있었는데, 어렸을 적에 할머니, 어머니를 따라 가끔 그 절에 갔던 기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모두가 가난하게 살던 그 무렵, 축성암에만 가면 얻어먹을 수 있었던 능금과 떡, 그리고 하얀 쌀밥이 지금까지 내 뇌리에 그대로 박혀 있다. 또 한 가지, 축성암에는 구멍 뚫린 큰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그 바위를 ‘쌀바위’라고 불렀다. 축성암에 계시던 스님께서 어느 날 내 또래의 아이들에게 떡과 과일을 나누어 주신 뒤 쌀바위 앞으로 데리고 가시더니 쌀바위에 얽힌 옛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이 쌀바위 구멍이 보이지?”

거기서 수도를 하는 스님이 지극정성으로 수도를 하고 막대기로 이 구멍을 쑤시면 하루 세끼, 먹을 만큼의 쌀이 나왔단다. 그런데 수도를 열심히 하지도 않고 게으름을 피우던 어떤 스님이 쌀만 많이 나오라고 마구 쑤셔댔더니, 쌀바위가 노해서 그 뒤로는 쌀 한 톨도 나오지 않게 되었단다.

“그러니 너희도 부모님 말씀 잘 듣고 무슨 일이든지 지극정성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더 많이 나와라, 더 많이 나와라 하고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면 벌 받는 법이란다. 알았느냐?” 대충 그런 말씀이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내 생애 최초로 설법을 들은 것이 바로 이 쌀바위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내 어릴 적 불교와의 인연은 그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1958년 겨울방학 때였다. 나보다 1년 선배로 박진호 형이 있었는데 그 형은 시(詩)를 쓰는 문학청년으로 내가 고등학교 문예반 활동을 시작했을 때부터 나를 이끌어주던 분이었다. 그야말로 친형님, 친동생처럼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 그 형은 1년 전에 서울 동국대학교 국문과에 진학해서 저 유명한 서정주 시인, 양주동 박사 등 내로라하는 유명한 분들의 지도를 받는 중이었다. 그 형이 나에게 동국대학교에 진학하면 학교에서 발행하는 신문이 있는데, 그 학보사 학생 기자가 될 수 있고, 학보사 기자만 되면 학비도 어느 정도 벌 수 있으며 훌륭하고 유명하신 교수님들과도 친해질 수 있으니 동국대학교로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만 그 형의 유혹에 홀딱 빠져서 동국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고, 그 형의 말씀대로 1년 후 1960년 4월에는 〈동대신문〉 학생기자 공개모집에 응시, 백여 명의 응시자 가운데 4명이 합격했는데 그중에 나도 당당히 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동대신문〉의 학생기자, 편집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청담 스님, 박춘해 스님, 법화 스님, 김운학 스님, 손경산 스님 등 덕 높으신 스님들을 가까이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박완일 선배, 김지민 선생, 〈불교신문〉의 박경훈 편집국장 등과 가까이 지내면서 가랑비에 옷 젖듯이 차츰차츰 불교 분위기에 젖어 들게 되었다.

절망의 나락에서 만난 《법구경》

내가 〈동대신문〉 편집부장 시절, 군사독재 치하에서 계엄령이 선포된 일이 있었다. 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 계엄사령관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권총을 찬 채 거들먹거리면서 동국대학교를 방문하여 총장, 학 · 처장들을 총장실에 몰아 놓고 무지막지한 망언과 폭언을 쏟아냈다.

 

-똑똑한 교수들은 국회의원 해 먹고 등신 같은 교수들만 대학에 남아 있으니 학생들이 데모만 한다.

-데모하면 무조건 퇴학을 시켜라. 그러면 데모할 놈이 없어질 것이다.

-남학생들이 여학생을 저 숲속으로 끌고 들어가서 강간을 왜 안 하는지 아는가? 그것은 법이 있기 때문에 법이 무서워서 못 하는 것이지, 안 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 법을 엄히 제정해서 강력히 처벌해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계엄사령관이라는 자는 복도에서 지나쳐 가는 학생을 불러 세워놓고 “이 개돼지 같은 놈들, 앞으로 데모를 또 하면 총살을 시킬 거야!” 하면서 금방이라도 권총을 뽑아 들 기세였다. 이런 무지막지한 망언과 폭언을 현장 취재기자로부터 보고받은 나는 계엄사령관의 망언과 폭언을 그대로 인용하여 “계엄사령관 일행, 공갈 협박차 내교(來校)?”라는 제하의 기사로 〈동대신문〉에 폭로했다. 그러나 그 신문은 밤사이 시내에 있던 〈민국일보〉에서 제작, 인쇄되어 다음 날 아침 학교 신문사에 실려 오자마자 전량 압수되었고 보일러실로 옮겨져 소각 처분되었다.

“계엄사령관을 건드리다니, 정신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이 사건으로 학교는 발칵 뒤집혔고 관할 중부경찰서 치안국 담당 형사들은 물론 정체불명의 자칭 수사관들이 이곳저곳에서 들이닥쳐 나를 족치기 시작했다.

“이 새끼 이거 철삿줄로 발목 묶어 돌멩이 달아서 동해바다에 버려야겠구먼. 너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영원한 실종이야 인마! 알겠어?”

“이 새끼 이거 겁두 없네. 고춧가루 물맛 좀 볼래?”

중앙정보부인지, 특수부대인지, 경호실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에게 혹독하게 시달린 3, 4일은 그야말로 공포의 도가니였다. 그렇게 해서 문리과대학 학장이셨던 오석규 교수님의 읍소와 신원보증으로 다행히 불구자가 되기 직전에 ‘그동안 있었던 일은 일절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겨우 방면이 되면서 그 길로 학교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이 무렵, 나는 어머니와 동생 둘을 부양해야 하는 학생 가장으로 혹독한 가난 속에 놓여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가장 믿고 의지하던 사람으로부터 하루아침에 배신을 당했다.

매일 매일 식구들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절박한 가난의 슬픔, 배신한 사람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 세상에 대한 원한, 군사독재에 대한 복수심…… 그때 나는 정말 폭탄처럼 터지고 싶었다.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옆을 보아도 끝없는 절망만이 나를 조여오고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인연이었을까, 그 끝없는 절망의 밑바닥에서 어느 날 내 손에 쥐어진 한 권의 책, 그것은 바로 《법구경》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지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가지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나니.

 

상처 입은 내 영혼을 사로잡은 《법구경》의 말씀은 나에게 운명처럼 다가와서 또 하나의 새로운 다른 세상을 내 눈앞에 열어주었다.

《법구경》은 계속해서 나를 타일렀다.

 

이 세상에서 원한은
원한에 의해서는
결코 갚아지지 않는다.
원한은 원한을 버릴 때만
갚아지나니
이것은 변치 않을 영원한 진리일세.

 

따뜻하고 포근한 부처님의 말씀 덕분에 나는 서서히 절망의 나락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나는 출판사 편집장이 될 수 있었고 방송작가가 될 수 있었다.

1972년 가을, 내가 출판사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었을 때 ‘털보 교수’로 이름난 불교학자 서경수 교수가 법정 스님과 함께 출판사 아래층 다방으로 찾아오셨다.

“이 친구가 계엄사령관의 망언을 폭로한 바로 그 친구요.”

서 교수가 나를 법정 스님께 그렇게 소개했다. 서 교수는 얼마 전 나와 계엄사령관의 망언 사건을 수필로 써서 잡지 《사상계》에 발표했는데, 그 일로 정보기관에 끌려가 며칠간 죽을 고생을 하고 나온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 사건의 주인공이 바로 이 친구입니다.”라고 법정 스님께 나를 소개한 것이었고 이것이 나와 법정 스님과의 첫 만남이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나를 불교로 이끈 결정적인 계기와 인연이 세 번 있었는데, 첫 번째 인연은 나를 동국대에 진학하도록 유혹해준 박진호 선배 덕분에 불교계가 설립한 동국대에 입학하여 불교와의 인연을 맺은 것이고, 두 번째는 계엄사령관의 망언을 폭로한 필화사건으로 절망의 나락에 빠졌다가 그 절망의 끝에서 만난 《법구경》이 결정적으로 나를 불교에 빠지게 해주었고 세 번째는 박정희와 전두환 두 독재자의 군사통치 덕분에 더더욱 불교에 심취하게 된 것이다.

〈전설 따라 삼천리〉에 불교 전설 소개

1965년 가을부터 나는 MBC문화방송에서 방송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우리나라에 TV 방송이 아직 생기기 전이라 라디오 방송뿐이었는데, 공영방송인 KBS라디오에 이어 최초로 탄생한 민간 상업방송이 바로 MBC문화방송이었다. MBC의 프로그램 가운데 〈오발탄〉이라는 사회 부조리와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비록 5분짜리였으나 최고의 청취율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프로그램을 집필해오던 최원 선배와 오학영 선배가 후임 작가로 나를 추천해준 덕분에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오발탄〉의 작가가 되었고, 다음 해부터는 〈전설 따라 삼천리〉 프로그램에도 일주일에 한 편씩 불교 전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전설 따라 삼천리〉라는 프로그램도 〈오발탄〉과 함께 최고의 청취율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 전설 가운데 불국사의 창건 설화, 에밀레종의 이야기 등 재미있는 불교 관련 전설과 설화를 여러 편 극화해서 방송했다. 그 당시 조계종 교무국장이셨던 김운학 스님은 정말 고맙다면서 함께 집필하던 민병훈 작가와 나에게 조계종 총무원장 명의의 감사패를 주기도 했다. 이 무렵 나는 한국방송작가협회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었는데, 방송작가들의 불교에 대한 이해가 너무 빈약함을 절감, 총무원 조정희 과장을 통해 부산 범어사 능가 스님께 방송작가 초청 불교 세미나를 열어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그 당시는 방송작가들이 불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으로 불교를 우상숭배나 미신으로 잘못 표현하는 일이 많았다. 또한 불교 소재가 무궁무진함에도 불교에 대한 지식이 없어 작품화하지 못하거나, 정확한 불교 교리나 불교 용어를 몰라서 잘못 전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따라서 이를 예방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방송작가들에게 불교를 항해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나의 호소를 접한 능가 스님은 사찰의 살림살이가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영단을 내려 방송작가 40여 명을 범어사로 초청, 1박 2일의 ‘방송작가 초청 불교 세미나’를 최초로 열어 알기 쉬운 불교 교리 등을 전달하고 방송작가와 불교계가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 후로도 총무원장을 직접 찾아뵙고 방송작가 초청 불교 세미나의 중요성을 설파하여 거의 매년 40여 명씩 방송작가들을 초청 세미나를 열었고, 저 유명한 한운사, 신봉승, 김교식 작가를 위시한 80여 명의 작가가 세미나 현장에서 총무원장 스님으로부터 불명(佛明)을 얻고 팔뚝에 연비하고 수계까지 받았다. 이 방송작가 불교 세미나는 1994년 종단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 14회 이상 개최되었으나, 그 후로 중단된 채 오늘에 이르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제는 종단에도 템플스테이를 전담하는 부서가 있고 수많은 사찰이 현대적인 시설도 갖추고 있으니 방송작가들을 초청하여 불교 세미나를 열어준다면 수많은 TV, 라디오, 유튜브 등에 불교 관련 작품을 집필하는 작가들을 통해 획기적인 포교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종단에서는 왜 관심조차 없는 것일까?

 

목표는 ‘알기 쉬운 불교, 재미있는 불교’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불교 신도의 대부분이 부녀자였던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고, 남자가 불교를 믿는다 하면 ‘약간 맛이 간 사람’ 정도로 취급했다. 나는 MBC에서 〈오발탄〉 〈신문고〉 〈신판 암행어사〉 〈전설 따라 삼천리〉 〈세계 속의 한국인〉 등을 집필하면서 해마다 초파일 무렵이 되면 초파일 특집 프로그램을 집필했고, 다른 프로그램의 PD들에게도 초파일 특집 아이디어를 제공해가면서 불교 포교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일반 상업방송이라 한계가 있었기에 우리나라에는 왜 기독교방송만 있고 불교방송은 없는가 하고, 불교계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던 가을에 내 인생에 또 한 번의 시련이 닥쳐왔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부가 10월 유신을 선포하면서 MBC에서 내가 집필하던 사회 부조리 고발 프로그램 〈오발탄〉 〈신문고〉 〈신판 암행어사〉가 하루아침에 사라져 방송국에서 내가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무슨 악연인지, 군사독재에 의한 필화사건 이후 또 한 번 나에게 시련이 닥쳐왔고 나는 졸지에 백수가 되었다.

또다시 절망의 밑바닥에 내팽개쳐진 나는 이때부터 닥치는 대로 불교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기댈 곳은 오직 부처님 말씀뿐, 어느 누가 뭐라고 위로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군사독재에 대한 복수심으로 폭탄처럼 터지고 싶었던 나를 붙잡아 앉히고 달래준 것은 부처님 말씀뿐이었다.

그때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이 세상의 어떤 가르침, 어떤 처세술, 어떤 명상록, 어떤 종교보다도 가장 솔직하게, 가장 따뜻한 손길로 중생들의 고통을 어루만져주고 영원한 행복의 길로 이끌어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다 더 재미있고 알기 쉽게 전하는 데 앞장서야겠다고. 한자(漢子)의 감옥에 갇혀 있는 부처님의 말씀을 알아듣기 쉬운 우리글, 우리말로 더더욱 알기 쉽고 재미있게 전달해 보자. 그런 생각으로 이때부터 박완일 회장이 발행하던 월간지 《법륜》에 옛 큰스님들의 이야기를 연재하기 시작했고, 뒤이어 부처님의 말씀을 우리의 실생활에 대비하여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는 불교 에세이를 연재했다. 그리고 1980년에는 아예 동국출판사를 설립 《예수의 잃어버린 세월》 《불경과 성경, 왜 이렇게 같을까》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의 불교 서적을 출판,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기 쉽고 재미있게 전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원래 부처님께서는 아이를 만나면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쉬운 말로 말씀하셨고, 여자를 만나면 여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고, 왕을 만나면 왕이 알아듣도록 적절한 비유를 들어 설법하셨지, 결코 고매하고 어려운 말씀을 하신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그 말씀들이 인도의 문자로 기록되고 그 기록이 한자로 번역된 경전이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진 채 장장 1천6백여 년 동안 그 어려운 한자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러니 웬만한 한자 실력자가 아니면 읽을 수도 없고, 너무 전문적인 용어가 많아 일반 백성은 무슨 말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불교는 배우기 어렵고 염불도 설법도 모두가 한자투성이라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들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서 나의 목표는 너무나도 확실하게 정해졌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기 쉽고 재미있게.’

이것이 작가로서 나의 확실한 목표였다. 초등학교 정도만 졸업하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게 알기 쉽고 재미있는 불교 이야기를 들려주자는 것이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방송인데, 드디어 그 방송이 1990년 5월에 탄생했다. BBS 불교방송이다. 그동안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던 불교방송이었던가.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환호작약(歡呼雀躍)하였고 정휴 스님, 이태행 편성제작국장, 홍사성 부장 등의 도움을 받아 꿈에도 그리던 연속방송극 형태의 〈고승열전〉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불교방송은 전파를 발사하자마자 폭발적인 호응을 얻어 청취율이 하늘 높이 치솟았고, 〈고승열전〉 또한 단시간에 고정 청취자를 확보, 열광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승열전〉이 성공적인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은 데는 드라마의 연출을 맡은 원로 박용기 선생의 탁월한 연출력과 구민, 신구, 박일, 김성원 등 기라성 같은 국내 최고의 성우들이 출연해서 열연을 해준 덕분이었다. 작가인 나로서도 이것이 나의 마지막 열정이라는 각오로 자료수집, 인터뷰, 현지답사에 소홀함이 없도록 만전을 기했고, 그야말로 ‘〈고승 열전〉을 쓰다가 죽자’라는 비장한 자세로 극본을 집필했다.

그렇게 해서 〈고승열전〉은 갈수록 청취자들의 인기를 얻어 오디오 테이프로 제작되어 불교방송을 들을 수 없는 지역의 불자들에게까지 보급되었고, 열화와 같은 청취자들의 요구에 응해 극본을 다시 구도소설로 집필,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집필, 〈고승열전〉에 방송한 스물네 분 큰스님의 일대기는 본방송이 끝난 후에도 불자들의 요청에 의해 재방송되기도 했다. 청취자들의 〈고승열전〉 청취 소감은 한결같이 ‘알기 쉽고 재미있다’였으니, 내가 목표로 삼았던 ‘알기 쉬운 불교, 재미있는 불교’를 어느 정도 달성한 셈이라고 생각되어, 이 작품은 나의 생애에서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그 후로도 비구니 묘엄 스님의 일대기 《회색 고무신》에 이어서 종정을 역임하신 설석우 스님, 월하 스님, 총무원장을 지내신 법장 스님의 일대기를 집필, 모두 스물일곱 분 큰스님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냈다. 불립문자를 앞세운 독특한 우리 불교의 풍토 때문에 옛 스님들에 관한 기록이나 자료가 너무 빈약해서 옛날 스님을 모셨던 제자와 손상좌들을 찾아다니며 구술을 통해 자료를 수집 · 정리하느라 많은 고생을 하기도 했다.

끼니도 굶은 채 깊은 산 암자로 어떤 스님을 찾아뵙고 스승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찾아왔노라 말씀드리면 일언지하에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 우리 스님은 참선밖에 모르시던 분이니 그런 잡스러운 이야기는 꺼내지 말라.”고 호통을 치는 스님을 만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도 자료수집과 취재에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주셨던 큰스님들도 계셨다.

〈금오 스님〉 편을 쓸 적에는 월산 큰스님, 월탄 큰스님께서 자상하게 옛이야기를 들려주시고 여비까지 보태주셨는가 하면, 〈만암 스님〉 편을 쓸 적에는 종정을 지내신 서옹 큰스님이, 〈용성 스님〉 편을 쓸 적에는 도문 큰스님이 도와주셨다. 또 〈동산 스님〉 편을 쓸 때는 광덕 큰스님께서 적극적으로 발 벗고 나서서 성철 큰스님과 직접 통화까지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다. 간혹 작품을 집필하다가 막힐 때면, 동국역경원 박경훈 부장님께 여쭈어보면 언제나 자세히 가르쳐 주셨고, 때때로 법정 스님께 여쭈면 자상하게 말씀해 주셨다.

한번은 〈겸익 스님〉 편을 쓰다가 겸익 스님이 어디서, 언제, 어떻게 열반에 드셨는지 도무지 기록을 찾을 길이 없기에 법정 스님께 흔적 없는 옛 스님의 열반을 어떻게 써야 할지 여쭈어보았다. 그날 스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는 참으로 충격이었다.

“옛날 스님들이 가장 멋지게 죽는 방법이 뭔지 아시오? 천화(遷化)라고 하는데, 죽을 때가 됐다 싶으면 아무도 모르게 깊고 깊은 산속으로 기력이 다할 때까지 걸어 들어가요. 기력이 다해 더 이상 못 가게 되면 그 자리에 쓰러져 나뭇잎 긁어서 덮고 그대로 가는 거지. 훗날 그 자리에 율무가 자라기도 하는데, 그건 그 스님이 율무 열매로 염주를 만들어 걸고 다니다가 그 자리에서 천화했다는 징표지. 흔적 없이 가는 것, 그게 가장 멋진 죽음 아니겠소? 그런데 말요, 요즘은 아주 간단하게 천화하는 방법이 있어!”

“그게 뭔데요 스님?”

“제주행 여객선을 타면 간단해!”

“예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주 가는 배가 저녁때 목포에서 떠나 한밤중에 가거든. 중간쯤에 가다가 한밤중에 풍덩 바다에 뛰어내리면 누가 알겠어? 그야말로 흔적 없는 멋진 죽음이지.”

그날 그 말씀을 듣고 나는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던지, 그 후 스님께서 병환이 들어 제주로 내려가실 때, 절대로 배는 못 타게 하시라고 단단히 일렀다.

그동안 법정 스님께서는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쓰셔서 인세 수입도 수십억 원을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많은 인세 수입을 스님은 다 어디다 쓰고 계실까. 그것이 많은 호사가들의 궁금증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내가 용기를 내서 여쭈었다. “스님, 그 많은 인세 수입을 많은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쓰신다는 그런 소문이 있는데, 대체 어떤 학생들인지요?” “그런 건 알려고 하지 마시오.” “장학금 말고도 다른 어려운 사람들도 도우셨지요?”

“글쎄 그런 건 알려고 하지 말라니까!”

“〈고승열전〉은 가끔 들으면 재미있던데, 고승 열전은 죽은 뒤에 쓰는 거 아니오? 그런데 왜 산 사람 놓고 고승 열전을 쓰려고 그래?”

“모두들 궁금해하는 일이라…….”

“설령 누굴 도와줬다고 하더라도, 그걸 받은 사람의 체면과 입장을 생각해 줘야지, 그걸 무슨 자랑이라고 떠벌리면 되겠소?”

그렇게 단호하게 나를 꾸짖던 법정 스님이었다.

〈고승열전〉을 집필하면서도 ‘맑고 향기롭게’ 행사를 위해 나는 법정 스님을 모시고 춘천, 강화, 전주, 청주, 대전, 광주, 창원, 부산, 대구 등지를 순회하며 법회를 열었다. 어느 날 스님께서 나를 불러세웠다.

“본부장, 이 늙은 중한테 좀 심한 거 아니오?”

“무슨 말씀이신지요?”

“늙은 중을 밤무대까지 오르게 하고 전국 순회공연까지 시키니 말입니다.”

스님도 웃으시고 나도 웃었다. ‘맑고 향기롭게’를 위해서라면 스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으셨고 천릿길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이제 돌이켜 보면 ‘맑고 향기롭게’를 위해 봉사하면서 법정 스님을 모실 수 있었고, 〈고승열전〉을 통해 알기 쉬운 불교, 재미있는 불교의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기간이야말로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불교를 만난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었노라 여기며 노후를 보내고 있다.

내가 불교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아마도 시정잡배가 되었거나 길거리 투사가 되어 폭탄처럼 터지고 말았을 텐데, 내 인생을 건져준 것은 바로 불교였고 부처님 말씀이었다. 그러니 내 어찌 그 은혜를 잊을 수 있으리……. ■

 

 

윤청광
법명 古牛(옛 소). 전남 영암 출생. 동국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MBC 보도국 작가, 한국방송작가협회 사무국장, 한국출판문화진흥재단 이사장, 맑고 향기롭게 본부장 등 역임. 주요 저서로 《고승 열전》(전 24권) 《불경과 성경 왜 이렇게 같을까》 《불교를 알면 평생이 즐겁다》 《회색 고무신》 《큰스님 큰 가르침》 등 30여 권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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