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불교 - 시와 선, 하나 혹은 둘? -

   1.

꼭 그런 건 아니겠지만 여느 평균인들도 믿음/신앙에 드는 데는 나름의 계기가 있다. 물론 모태신앙의 경우는 다를 수 있다. 집안 전래의 깊은 신앙 속에서 그 분위기나 믿음에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할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가 아닐 때는 나름의 계기가 있다. 예컨대 자식을 일찍 가슴에 묻은 어머니의 경우도 그 한 예일 터이다.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장년의 나이에 그만 하세한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절에 다니기 시작했다. 막막한 기댈 데 없는 마음을 기대기 위해 그니는 부처님을 찾았던 것이다.

 

아들이 죽은 뒤

홀어머니는 절에 다니기 시작했다.

 

텅 빈 내부가 무시로 털썩털썩 떨어져 내리는

대문 닫힌 집에는

저 혼자 섬돌가로 주저앉은

핏기 얇은 입술 꼭꼭 다문 채송화의

검은 씨앗들 속에 핵이, 뉘만 한 무덤들이 차오르느라 부산한 소리

투명한 가을볕 속의

누군가 오랫동안 은밀히 마련해온 이별 같은

먼 독경.

— 졸시 〈마음경 · 13〉 전문

 

여느 때 그녀는 어쩌다 초파일 날 절 구경이나 다녔을 터이다. 부처님은 그니의 마음 밖 어디쯤 멀찌막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고. 그랬던 그녀가 절집을 찾아 부처님께 고두례를 올리고 엎드려 자기 서원을 빌기 시작한 것이다. 예불 자리에서는 평소 입도 벙긋 못하던 《반야심경》이나 《천수경》을 따라 읽었을 것이고. 그렇게 그니의 마음속 신심(信心)은 시간과 함께 자라났다. 어느 땐가 그니는 계를 받았고, 그리고 자연으로 다시 돌아갈 때까지 누구보다 열렬한 신앙인이 되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그렇게 독실한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

인용한 시는 어머니가 기도를 위해 절집을 찾은 뒤의 정경을 잘 보여준다. 화자는 채송화를, 그것도 미래의 생이자 현재의 무덤인 씨앗이 검게 여무는 모습을 눈으로 듣는다. 그런가 하면 멀리서부터 와 귀에 걸리는 독경 소리를 가을볕 속에서 보기도 한다.

 

내 나름 불교라는 왕양한 지혜의 바다를 처음 들여다본 언덕은 모교였다. 갓 입학한 신입생인 내게 교양과목으로 듣게 된 ‘불교학 개론’과 ‘불교문화사’ 강의는 낯설고 새롭기만 했다. 그렇기는 했어도 감히 본격적으로 불교에 입문 한다는 생각은 못 했다. 그 시절 나에게는 시가 있었고 문학이란 블랙홀이 있었다. 같이 시 공부를 하는 동아리들과 시 쓰기에, 책 읽기에 온 정신이 팔렸었던 것이다. 지난 세기의 1960년대 초입인 그 무렵 젊은이들 앞에는 문 · 사 · 철이 전부였다. 당시로는 계층 이동의 유일한 사다리였다. 그다음 순위로는 사회과학 정도가 올랐었다. 이즘 말로 하자면 인문학의 황금시절이었던 것이다. 나는 중고교 시절부터 소설과 시집을 남독(濫讀)했다. 주로 학교 앞 세책가(貰冊家)를 들락거리며 가리지 않고 책을 빌려 읽었던 것이다. 그 덕에 문학은 지금까지 내게 고황(膏肓)처럼 치유할 길 없는 병통으로 자리 잡았다.

아무튼 그 시절 나는 시에 눈먼 일개 문청(文靑)에 불과했다. 그런 나에게 불교란 심오한 사유의 세계는 영 딴 나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같은 세계를 그나마 기웃거릴 수 있게 한 것은 교양과정의 저 불교학 개론과 문화사였던 셈이다.

그런 나에게 불교가 꼭 알아야 할 신대륙의 비경처럼 다가왔다. 학창 시절로부터 한 세대 30년이 지난 1990년대 초였다. 당시 문학 동네에서는 현실주의 문학이 퇴조하기 시작했다. 지난 20년 동안 위세를 떨쳤던 문학의 한 트렌드가 물러나고 있었던 것. 당시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정권들의 몰락에 따른 결과였다. 현실주의가 퇴조한 자리에는 여러 갈래의 새로운 문학적 트렌드가 대안처럼 나타났다. 시에서는 이른바 정신주의가 그것이었다. 정신주의라니. 잠정적인 용어이긴 했지만 정신의 해방을 추구한다고 했다. 갖가지 소유론적 욕망들을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을 구가하자는 것이었다. 그 기반은 당연히 선불교에 있었다. 나는 이 같은 시 동네의 기류에 무젖어 들었다. 그러면서 선사들의 각종 어록을 비록 번역본이지만 닥치는 대로 읽었다.

고백건대 선불교에 대한 내 ‘알음알이’의 이력과 수준이란 대략 이런 것이었다. 문득 이쯤서 성철 스님의 말씀 한 대목이 떠오른다. 서울 구경을 다녀온 시골 사람 얘기다. 누구는 침을 튀기며 남대문 얘기를 하고 누구는 종로가 어떻다고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는다. 성철 스님은 서울을 제대로 본 사람이란 이런 자(者)라고 일갈하셨다. 곧 남대문을 들어서서 한참을 더 올라가 종로쯤 아니, 광화문 정도는 둘러본 자라야 한다고. 어설프게 남대문 밖에서 혹은 그 인근 외곽에서 서울을 봤다고 하는 게 무슨 제대로 된 서울 관광일 것인가. 선불교 운운하는 내 알음알이도 결국은 남대문 인근 어디쯤서 바라본 서울 관광이 아닐 것인지 싶기만 하다.

2.

꽤는 먼 옛적의 일일 터이다. 세속 간에 이름이 드르륵 높이 들린 한 사람 도인(道人)이 있었다. 그는 숱한 제자들에게 자신의 높은 깨침을 가르쳤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이 도인을 찾아왔다. 깍듯한 예를 갖춘 뒤 그는 제자로 거두어 줄 것을 간청했다.

“허허, 이 사람 정 소원이라면 예서 한동안 지내보시게.”

“예, 감사합니다.”

그렇게 해서 젊은이는 그 도량에 머물게 되었다. 뭇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며 젊은이는 스승이 불러줄 때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철이 바뀌고 한 해가 넘어가도 스승으로부터는 일체 전갈이 없었다. 참다못한 젊은이는 기회를 엿보았다. 그리곤 스승의 거처로 쫓아 들어갔다. 언제 가르침을 내려줄 것인지를 따지기 위해서였다.

“그래, 너는 뭘 가르쳐 달라는 게냐?”

“저도 스승님처럼 도를 공부하고 싶습니다.”

당돌한 젊은이를 도인은 한동안 딱하다는 듯 건너다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이 사람아. 도라는 게 어디 있나, 벽장 속이나 다락 위에 모셔져 있나. 그건 아니야. 네가 지금껏 하고 있는 물 긷고 땔 나무 하고 설거지하는 그 가운데 다 도가 있지. 도는 어디 하늘 위에 따로 모셔져 있는 게 아니야.”

이 같은 옛 얘기 한 토막을 읽고 사실 나는 당황했다. 당황하기로 말하자면 도에 관한 공부를 열망했던 젊은이가 나보다는 더했겠지만. 도(道), 혹은 절대 원리란 것은 그것이 절대적인 만큼 일상 아닌 별도의 시공간에 특별 존재하는 것으로 알아왔기 때문이다. 또 힘들여 공부한 시론만 해도 그랬다. 시가 일상의 여느 담론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또 시에 쓰인 언어는 여느 일상적인 말과 어떻게 다른가를 따져왔지 않은가. 그리고 그 담론이나 언어는 때 묻은 일상의 맥락과는 별개의 맥락에 속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는가. 시어나 시적 언술이란 일상의 맥락과는 절연된, 아니 그 맥락에서 끊어내야 한다고 설명했던 것이다. 실제로 읽은 여타의 시론들도 다 그러했다. 그런데 일상의 맥락 속에, 아니 그 맥락 자체에 실은 도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내가 이러한 한 토막 담화를 ‘응 그러면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인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동일 대상도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마음먹기에 따라 그 뜻과 값은 얼마든지 달라진다. 중국 유학길의 묘지에서 등걸잠을 잔 원효의 고사(故事)도 한 본보기일 터이다. 또 실생활에서 우리네가 물 한 컵을 두고도 상반된 소리를 하는 경우 역시 그 예이다.

“아직도 반 컵이나 남았네.”

“겨우 반 컵밖에 안 남았네.”

이 두 가지 언술과 태도는, 설명을 더 덧댈 필요 없이, 서로 정반대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같은 반 컵의 물이지만 그걸 대하는 태도는 얼마나 사뭇 다른가. 이렇듯 관점과 마음먹기에 따라 같은 사상(事象)도 얼마든지 뜻과 값을 달리한다.

나는 선사들의 가르침인 분별과 집착을 끊어낸 마음자리는 어떤 것일까 생각한다. 솔직한 말로 나로서는 상상도 못 미치는 경지의 마음일 터이다. 다만, 시에 관한 지식을 모탕 삼아 가늠하자면 그 마음은 대략 ‘오브제’와 비슷한 무엇 아닐까. 이를테면 여느 사물에서 기존 관념, 곧 통념의 뜻이나 값, 기능 같은 걸 벗겨내면 거기 순수 물상이 드러난다고 한다. 그 순수 물상을 오브제라고 할 때 선사들의 가르침인 분별과 집착을 끊은 관점에서의 사상(事象)도 그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래 이때의 사상을 본디의 사상, 곧 참사물이나 현상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 ‘참사물’ ‘참현상’을 범박하게 불교식 언술로는 불성이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흔히 같은 대상도 깨침 전과 후에 각각 다르게 보인다고 한 일이 이러한 까닭이리라.

일찍이 송나라 소식(蘇軾)은 계곡 물소리와 바람소리가 다 부처님 설법에 다름 아니라고 했다. 동파소식은 항주에서 여주로 가는 부임(赴任)길에 올랐다. 마침 여산을 지나게 됐다. 그는 동림사에 들러 상총 선사를 만나 많은 담론을 나눴다. 특히 선사는 무정물도 유정물처럼 불법을 설하고 들을 수 있다고 일렀다. 이는 그 무렵 선가에서 회자하던 공안이기도 했다. 소동파는 깨달은 바 있어 이내 게송을 지었다. 곧 “계곡 물소리는 바로 부처의 장광설이니/ 산색인들 어찌 청정신이 아니겠는가./ 밤이 와 팔만사천 게를 설하니/ 다른 날 사람들에게 어찌 다 일러줄거나.(溪聲便是長廣舌 山色豈非淸淨身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擧似人)”란 시가 그것이다. 이 시에 따르자면 물소리도 산색도 모두 부처님의 설법이자 그 형자(形姿)인 셈이다. 선불교는 당송 시대를 거치며 발전을 거듭해 이처럼 자연의 무정물도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다음의 졸시도 이 같은 의미 선상에서 읽을 수 있다.

 

오늘도 그 절 뒷산의

대소의 오리나무와 상수리나무들이 제가

마음에다 새기고 깎은 부처님들을

만불전처럼 모셔 내놓고 있습니다.

감출 것 없이 있는 그대로

이내 빛 부처들을 내놓습니다.

무량의 햇볕들을 오월 햇볕들을

다포계 지붕 위에 수수천 장씩 기왓장들로 쌓아 놓고 섰는

그 절 뒷산에……

— 졸시 〈불사(佛事)를 하는 절에 가서〉 일부

 

조금 산문적인 설명을 덧붙여보자. 한 스님의 출가담(出家譚)을 읽고 나서 나는 이 작품을 썼다. 그 출가담은 이 작품의 전반부에 요약해 언급했다. 출가담인즉 이렇다. 한 사냥꾼이 봄날 개구리를 잡았다. 그놈들 멱을 꿰어 논 귀퉁이 물속에 감춰두었다. 그리고는 무슨 건망증인지 깜빡 잊고 말았다. 다음 해 봄에 우연히 그 논에 다시 갔던 사냥꾼은 그때까지 멱을 꿴 채 숨 쉬는 개구리를 보았다. 그래 “그 사냥꾼은/ 그 자리에서 마음에다 부처님 새기는 길”로 바로 나서게 된 것이다. 또 그 덕에 사냥꾼은 오랜 수행 끝에 절 뒷산 나무들이 실은 만불전 부처에 다름 아닌 오월 정경과 마주친 것이다. 대략 이런 뒷얘기를 이 시에는 덧붙일 수 있는 것.

지난날 미당 서정주 선생은 불전 속에 많은 파천황의 은유들이 쟁여 있다고 일러준 바 있다. 이미 경전 속에는 현대시가 추구한 이미지와 이미지, 정황과 정황 사이의 돌올한 폭력적 결합의 예가 많다는 언급이었다. 물론 이들 이미지 연결의 뒤에는 불교적 상상력이 뒷받침하고 있는 것. 이를테면 인연설과 윤회설, 선적인 관법(觀法) 등등이 그것이다. 내 경험으로 봐도 불교적 상상력은 이들을 축으로 하고 두루 작동된다. 여기서 말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시를 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늘 시에 방점이 찍힌다는 사실이다. 선불교든 교학불교든 시인은 수행보다는 ‘알음알이’에 더 무게중심을 둘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3.

지난 세기말 불교적 상상력에 기댄 시들이 널리 생산된 적이 있었다. 앞서 말한 정신주의 시라고 불린 일련의 시적 흐름이 그것이다. 이 시적 흐름은 불교적 상상력에 기반해 정신적 해방을 추구하고자 했다. 흔히 세속적 욕망, 달리는 소유론적 욕망들을 내려놓고 자유로운 삶을 누려보자는 것.

대학에서 학생들과 현대시 공부를 하던 나 역시 이 같은 흐름에 무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손에 붙잡은 책이 《선학의 황금시대》였고 그 책을 통해 당송시대 선사들을 첫 상면할 수 있었다. 이후로 나는 여러 조사들의 어록집을 구해 읽었다. 그러나 저 선불교 특유의 논리를 초탈한 화두나 직관적 사유의 세계를 내가 어찌 헤아리고 이해할 마련인가. 결국 관련 학자나 선학(先學)들이 풀이한 해설서들을 주로 구해 읽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고(故) 이기영 교수의 일련의 조사록 강의와 이은윤의 《중국 선불교답사기》 《혜능 평전》 등을 주의 깊게 읽었다. 특히 이기영 교수의 삼귀의(三歸依) 해석에 나는 매료됐다. 그리고 그 해석을 그대로 작품으로 옮기기도 했다. 졸시 〈마음경(經) · 43〉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유마힐이 그토록 귀의하려 한 대중들은 누구 누구인가.

 

목멱산 순환로에는

안력 모두 쏟아버린 시각장애인과

간 겨울 고사한 풀 자리마다 용수철처럼 튀어나온 움싹과

연일 피로에 입 불어터진 벚꽃,

탁발 내보낸 듯

길가에 등짝만 내놓고 엎드린

암석………

 

맨 얼굴 면면들을 봄볕 속에 환하게 내놓고 있다.

경전의 대문(大文)인지 견고딕체 돋을새김들이 띄엄띄엄 헐겁게 떴다.

 

모교인 동국대학에서 일하며 나는 매일 오후 남산 둘레길을 걸었다. 건강을 붙잡기 위한, 내 딴에는 유일한 운동이었다. 지금도 그 무렵 둘레길의 정경은 선명한 화면으로 떠오른다. 특히 봄날에는 길에 고인 따사로운 햇볕과 산책을 나와 걷는 여러 사람들, 막 활기를 띤 푸나무들이 제각각 삶의 경연을 벌여 이채롭기 그지없었다. 이 뭇 무정물과 유정물 모두가 말 그대로 사부대중이었다.

이기영 교수는 이들 대중에게 귀의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유마경》의 핵심이라고 적시했다. 그렇게 유마힐이 가르친 귀의해야 할 사부대중을 나는 봄날 남산 둘레길에서 맞닥뜨린 것이다. 길가의 바위, 움싹들, 벚꽃, 그리고 시각장애인을 비롯한 뭇 사람들………. 인용한 졸시는 더 산문적 설명이 필요 없는 작품이다. 말하자면 이 같은 느낌과 생각을 번거로운 시적 조사(措辭) 없이 곧이곧대로 적어 본 것이기 때문이다.

말이 쉬워 불교적 상상력이라고 하지만 그 상상력은 경전을 읽다가 또는 선사의 어록을 읽는 중에 발동한다. 나를 자극한다. 여기서 일단 발동된 상상력은 시적 대상에 대한 인식의 폭과 깊이를 더해준다. 그것은 온전히 불교를 세계관적 기반으로 삼은 덕택이라고 할 일이다. 나름대로의 경험을 통해 보건대 이 같은 불교적 상상력은 필연 뭇 생명과 존재들이 거대한 인드라망을 구축하고 있음에 당도한다. 흔히 말하듯 하나의 커다란 ‘온 생명’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불교의 자연 해석은 종종 서구 합리주의를 대신할 대안사상으로 주목받는 연유가 되기도 한다. 이른바 도구적 이성에 기대온 서구의 합리주의로는 인류가 몸담은 자연을 보존하거나 생태환경을 가꿔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현대시의 경우도 생태환경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그동안 기울여 왔다. 특히 서정주의 시는 대표적인 경우로 꼽힌다. 널리 알려진 대로 서정주의 일련의 시들이 시인의 의도 여부와 상관없이 생태론의 관점에서 읽히고 해석돼 온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시 〈국화 옆에서〉를 읽었을 때 한 송이 국화가 배후에 거느린 저 거대한 인드라망에 경탄하게 되는 일도 그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그의 시에서 연꽃과 바람은 서로 만나고 헤어지며 얼마나 유장하게 인과 연을 짓고 있는가. 또 시인은 천 년 천오백 년 세세유전으로 인연 따라 꽃다발/삶의 가치들을 뒷사람들에게 전할 일이라고도 했다. 이처럼 시공간을 통틀어 뭇 세상일과 사물들이 인과 연을 짓는다는 생각은 결국 그로 하여금 영원주의에 이르도록 했다.

아무튼 불교사상은 생태학과 통섭하며 지난 세기말 획기적인 전기를 만났다고 할 터이다. 그리고 이는 시인들로 하여금 과거와는 달리 새로운 상상력을 작동토록 만들기도 했던 것이다.

얼마 전부터 시골에 와 살면서 나는 이 국화의 미학을 단순 알음알이 아닌 실감으로 체득했다. 늦가을 볕 좋은 날 산 자드락을 걷다 보면 산국(山菊) 몇 송이와 대면한다. 극히 사소하고 잔망스럽기까지 한 이 산국은 그 행색과 달리 향기가 독하리만큼 짙다. 정말 국화 향이란 게 이런 거였구나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 손톱만 한 꽃은 어디에 저 끔찍한 내력을 숨기고 피는가. 이른 봄엔 여느 들쑥 정도로 알았고 그래 그냥 내 발길에 무심히 채이고 짓밟히지 않았는가. 여름을 지나 가을에 접어들자 이놈은 비로소 제 본 모습을 드러낸다. 꽃대를 밀어올리고 태깔을 제법 갖추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산국 대접을 시작한다. 그리곤 지켜본 대로 이들이 그동안 얼마나 모질고 험난하게 목숨을 부지해 왔었는가를 생각한다. 비록 잔망한 꽃송이지만 그 지난 행정(行程)을 돌이켜보자면 너무나 눈물겨운 바가 많지 않았던가. 보잘것없는 푸새일지라도 제 목숨 하나 건사하는 데는 남모를 숱한 곡절과 역경을 견뎌야만 했던 것이다. 그 곡절과 역경을 겹쳐놓고 산국의 작고 노란 꽃들을 보노라면 어찌 절로 숙연하지 않을 일인지. 그렇다. 삶을 영위하는 뭇 것들이란 거기 전 우주/인드라망을 쟁이고 사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것이 이즘 내가 귀 기울여 듣는 설법 중 하나이다. 아니 눈으로 듣는 설법의 하나이다.

가을날 산국뿐이겠는가. 그것이 유정물이든 무정물이든 이 산골짜기 내 주변의 것들은 나름대로 불성을 지니고 설법도 하고 강의도 할 터이다. 하지만 그걸 내 몸의 무딘 이목구비만으로 어찌 다 깨칠 수가 있겠는가. 나는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소리 없는 자연물의 설법은 귀가 아닌 눈으로 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런가 하면 태깔 없는 무정물의 강의는 결국 듣는 것보다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할 마련이었다. 이 글 서두에 읽은 졸시 그대로인 것이다. 곧 소리는 눈으로 보고 태깔은 귀로 들어야 제격인 것을.

마당 끝 벚나무 가지들이 흔들린다. 거기 무슨 게송처럼 지나가며 우는 바람은 누구인가. 내 마음의 눈에 보이는 그는 마침 치의(緇衣) 차림으로 허공을 건너는 어느 구도자는 아닐는지. ■

 

홍신선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동 대학원 졸업. 1965년 월간 《시문학》 시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서벽당집》 《겨울섬》 《우리이웃사람들》 《다시 고향에서》 《황사바람 속에서》 《자화상을 위하여》 《우연을 점 찍다》 《삶의 옹이》 연작시집 《마음경》 등 다수.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역임. 현대문학상, 불교문학상, 한국시협상, 김달진문학상, 김삿갓문학상, 노작문학상, 문덕수문학상 등 수상. 현재 《문학 · 선》의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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