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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불교] 부처님 울타리 속에서 평생을 살다 / 송석구
나의 삶 나의 불교
[84호] 2020년 12월 01일 (화) 송석구 sksong@dongguk.edu
   
송석구(宋錫球)

나의 삶 나의 불교. 나의 삶이란 내가 살아온 역사일 것이요, 나의 불교란 나와 불교는 어떤 관계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내가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철학과를 입학할 때부터 나는 불교와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이미 나의 자의적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온 역사는 동국대학교의 울타리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동국대학교 생활이 나의 삶의 역사이다. 

얼마 동안 다른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한 때가 있긴 하였으나, 그때도 동국대 강사와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있었으니 동국대학교를 떠난 적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나의 불교도 단 한 번도 다른 종교를 넘나든 경험이 없기에 나는 불교 속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불교 속에 살았다는 뜻은 나의 팔십 평생의 역사 속에 명멸되었던 슬픔과 기쁨, 고뇌와 좌절, 성공과 실패가 모두 불교의 믿음에 의존해서 극복되었기 때문이다.

1958년 3월에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지금은 문과대 철학과이지만 내가 왜 불교대학을 강조하느냐 하면, 나는 그때 문과대 철학과였다면 동국대학교 철학과에 지원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의 매력, 즉 보편적 학문으로서 인간과 우주의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기초적인 지식은 가지고 있었으나, 그중에서도 불교적으로 인간과 우주를 탐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인생 중에 가장 잘 선택한 것은 불교와 철학이요, 그것은 곧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철학과를 선택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도 불교적 진리로 인생의 장도를 마감하는 노정을 걷고 있다. 물론 동국대학교에서 불교를 위하여 한 번은 직선, 한 번은 간선으로 총장을 8년 역임하기도 하였으나, 그러한 명예보다 오히려 불교적 믿음과 그로 인하여 내 인생이 더욱 희열과 선열을 맛보는 데 심취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보다도 동국대학교와 불교의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 생각한다. 내가 어려울 때 부처님께 매달려 기도하고 내가 죽음에 직면해서도 부처님의 가피로 살아왔고, 지금도 그 가피를 갚기 위해 전법에 힘을 쏟고 있다.

나의 이번 생은 부처님의 시봉 노릇을 하는 것으로 끝을 맺으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깨달음에 대한 신심이 확고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다. 지금부터 나의 살아온 생애와 불교적 믿음의 변천을 말하고자 한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철학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영어를 자유자재로 읽고 써야 한다고 믿었다. 사실 그때는 불교학 개론이나 불교문화사를 배웠지만, 불교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고 다만 인간의 실존적 고뇌와 허무, 무상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젊은이가 생각하는 인생의 무상성에 대한 회의와 함께 학교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선배인 박성배 교수(미국, 스토니브룩대 한국학과 교수, 정년퇴직)를 만나게 되고, 그분을 선배로서 존경과 신뢰를 갖게 되었다. 박 교수가 우연히 공부 모임에 동행하기를 권해, 입학한 그해 겨울방학에 필동에 있는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기숙사인 기원학사에 갔다. 그곳에 서경수 교수가 계셨고, 그분의 지도로 영어 원서를 읽기 시작했다.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의 《철학이란 무엇인가(The problems of P hilosophy)》를 한겨울에 완독했다. 서경수 교수는 영어에 능통했으며 철학 용어에도 해박했고, 특히 그의 비판의식은 상대방의 허점을 찌르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예리함이 있었다. 그는 언제나 학문과 저널리즘을 비교하여 언론은 단편적 지식이기 때문에 다이제스트적 지식은 학문이 아니고, 이론적 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전을 독파하여 지식을 갖춰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아무튼 나는 그 한 권의 책을 완독한 후 영어에 자신감이 생겼고 나의 대학 동료들과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읽기도 하였다. 나는 동국대학교에서 서경수, 박성배 교수 등과 같은 훌륭한 선배를 만나 큰 기쁨을 얻게 되었다.

   
뉴욕주립대에서 박성배 교수(왼쪽)와 필자(1995년)

학문에 대한 열정과 현실비판 의식의 각성 면에서 서경수 교수께서 나에게 영향을 끼쳤다면, 박성배 교수는 나의 불교적 인생의 좌표를 설정해주신 분이다. 언젠가 박 선생과 내가 광화문 앞을 걷고 있었다. 내가 인간의 실존, 고뇌 죽음 등을 얘기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나에게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를 설명하며 이미 무상을 느꼈으면 무상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이때 ‘죽음, 고뇌, 불안 등이 사라지면서 그렇다. 죽음을 인식하고 고뇌를 느끼고, 불안을 알면 그것은 이미 극복된 것이다.’라고 확인하면서 삶의 새로운 긍지와 자존감을 갖게 되었다.

우리 독서팀은 서경수, 박성배, 김해동(불교학과 대학원, 해동고등학교 교사), 고(故) 박동기(동국대학교 체육부장) 등과 함께 1959년 겨울방학 때 사찰 공부 여행을 떠났다. 먼저 삼척 영은사에 탄허(呑虛, 1913~1983) 스님을 뵙기 위해 갔으나, 스님이 계시지 않아 며칠간 묵고 정선 정암사로 떠났다. 정암사에는 석호 스님(石虎, 1912~2003, 후에 종정을 지내시고 西翁이라 함)에게 갔다. 그러나 정암사에서는 새로운 선불교의 결사가 시작되어 함께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서 교수와 서옹 스님이 친숙했던 덕분에 서옹 스님께서 안내해준 철암 대승사로 갈 수 있었다. 대승사에 쌀 한 가마와 무 한 가마를 보냈으니, 거기에서 공부하라 하셨다. 그때만 해도 스님들이 공부하는 불교인들을 잘 대접해주어, 먹고 자는 것은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 여장을 꾸리고 눈이 정강이까지 푹푹 빠지는 태백산 정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서산에 지고 어둠이 가라앉은 때였다. 정상에 오르니 움막으로 길게 지어진 집 두 채가 있었다. 본채에 가니 서 교수가 잘 아는 태백산 무당의 본거지였다. 한밤중에 생미역과 진수성찬으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다음날 철암의 대승사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요사채가 없어서 칠성각에서 다섯 명이 자면서 공부를 했다. 아침 식사 전에 부처님께 참배할 때 삼배하는 법을 몰라 쩔쩔매기도 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잠자고 먹는 것 외에는 각자 자기 공부를 하면서 공동으로 원서를 읽었는데, 웨이브의 《서양철학사(The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였다.

저자는 영국 철학자로서 18세기 인물이기 때문에 문장이 길고 문법이 까다로웠다. 온종일 공부해야 5~6페이지 나갈 정도였다. 거의 50일간 이곳에 있으면서 이 책을 다 읽었다. 학문에 대한 자신감이 붙으면서 공부의 새 맛을 느꼈다. 그러나 불교 속에 있으면서도 불교의 예식이나 수행 방법은 누구에게도 배울 수 없었다. 대학 2학년 때 박춘해 교수가 《육조단경(六祖檀經)》을 강의하면서 책상 위에서 반가부좌와 호흡법을 가르쳐주었으나 그렇게 감동으로 와 닿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음이 무엇이며 어떻게 깨달음을 얻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깨달음의 방법이 간절했다. 하지만 간경, 주력, 염불, 간화선 등에 대한 새로운 수행 방법을 알고 스스로 수행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고 나서였다.

나는 철학 공부에 열중했다. 특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떠한 행위가 선인가, 선(善)과 악(惡)이란 무엇인가 하는 윤리의 문제, 행위(수행)의 문제가 중요한 과제였다. 특히 불교의 ‘깨달음(覺)’을 얻고, 유교의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선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할 것인가? 그때만 해도 내가 아직 미숙하여 각자(覺者), 성인(聖人)의 방법론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을 테마로 서양철학의 방법론을 연구하여 동양철학의 직관주의에 연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원에 진학하여 서양 윤리학을 연구하기로 했다. 그리고 난 뒤에 동양의 유교와 불교를 정립하자고 마음먹었다.

대학원에서는 안호상(安浩相, 1902~1999) 박사에게서 독일 관념론과 헤겔(Hegel, 1770~1831)의 논리학, 김경탁(金敬琢, 1906~ 1970) 교수에게서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의 철학을 배우면서 율곡의 불교관과 이기론의 통합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63년, 군에 입대해야 하게 되었다. 나는 일반병으로 가는 것보다 월급을 받는 장교로 가기로 하고 각종 장교 시험을 보았다. 그중에 해병대가 복무기한도 짧고 서울 근교의 김포에서 근무할 수 있어, 해병대 사관후보생 모집에 응시했다. 마침내 합격해 3개월 훈련을 받고 소위가 되어 6개월간의 해병 OBC(기초반) 훈련 뒤, 1964년 1월에 김포 포병 관측장교로 부임했다. 나는 관측소에 근무하면서 한 달에 하루 외박을 빼고는 철학 공부에 열중했다. 마침 분석철학자인 영국의 무어(G.E. Moore)의 《윤리학 원리(The principle of ethic)》를 추천받아 외우다시피 하며 읽었다.

1965년 3월경, 서울 육군정훈학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마침 박성배 교수가 인도철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대학선원의 간사 일을 맡고 있었다. 당시의 대학선원장은 정선 정암사에서 한밤중에 잠깐 뵈었던 석호 스님이셨다. 마침 대학선원 법당 옆에 요사채가 있어서 그곳에 기거하기를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동기인 김항배 교수가 대학선원 조교로 있어 둘이서 함께 석호 스님께 일본어를 배우며 처음으로 화두(話頭)를 받았다. 그리고 참선 방법을 지도받아 지금까지 호흡법(단전호흡)과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공안과 싸움하고 있다.

그때 박성배 교수가 《화엄경》 〈보현행원품〉을 매주 일요일마다 강의했다. 나도 매주 일요일 강의를 경청했다. 보현십대행원 가운데 원(願)마다 “극미진수 제불세존(極微塵數 諸佛世尊)”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티끌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이라는 뜻이 풀리지 않았다. 박 교수는 열심히 칠판 위에 원을 그려놓고, 그 원 속에 수없는 부처님이 계시고 그 하나하나 속(큰 원 속의 작은 원)에 또 수없는 부처님이 계신다고 열변을 토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마 박 교수도 비슷한 사정이었던지, 나중에 영동에 있는 어느 절에 가서 매일 수백 독씩 한 달 동안 〈보현행원품〉을 독송하니 그 뜻이 이해되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나는 정훈학교 교육을 마치고 김포 부대로 복귀했으며 벙커에서 새벽마다 참선을 하며 〈보현행원품〉을 독송했다. 〈보현행원품〉 책자는 지금과 같이 잘 인쇄된 정장본이 아니라 필경하여 등사해서 실로 꿰맨 등사본이었다. 얼마나 읽었던지 나중에는 너덜너덜해졌다. 아무리 읽더라도 그 ‘티끌같이 많은 부처님’의 부처님은 나에게 나타나지 않았다.

귀대한 뒤에도 매월 외박을 나올 때면 대학선원에 들러 강의를 들었다. 전진한 선생의 《금강경》 강의와 탄허 스님의 법문(얼마 후 탄허 스님이 대학선원 원장에 취임했다.)의 법문을 들었다.

그 후 1966년 3월에 교대 근무로 부대가 포항으로 이전하게 되었고, 나는 광주 육군 포병 OBC로 3개월간 교육 파견되었다. 6월에 교육을 마치고 오니 우리 포병대대가 월남에 파병하게 되었다. 나는 관측장교로 8월에 월남으로 파병돼, 남중국해의 검푸른 바다를 헤쳐 4박 5일 만에 캄란에 도착, 전투지에 배속되었다.

   
월남전 당시 145m 고지 벙커에서(1968.10)

백사장이 길게 뻗은 ‘투이호와’를 거쳐 ‘츄라이’에 이동 진지를 구축하고 수색을 실시하는 보병중대에 배속, 포 지원 임무를 맡았다. 우리 중대는 145m 고지의 산 정상 분지 근방에 땅굴을 파고 정착하였고, 수색전을 전개했다. 그 145m 고지의 분지에 사찰이 있었는데, 그 사찰에 몇 분의 스님이 계셨다. 우리는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주기 위해 노력했다. 수색에 나가면 적의 부비트랩에 다리가 절단되는 전상자가 생기고, 어쩌다 전투가 벌어지면 피아(彼我)의 시체를 ‘장애물’로 하여 몸을 숨기고 시레이션을 먹기도 했다. 나는 어두워진 저녁에 부상당한 해군 위생병을 업고 긴급 수송 헬리콥터가 있는 데까지 수백 미터를 달리기도 하였다.

나는 여기서 전쟁과 생사(生死)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졌다. 아무리 인생이 무상(無常)하다 해도 나는 아직 죽을 나이가 아니며, 죽는다면 죽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고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매일 목에 건 관세음보살에게 물어보았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내가 죽는다면 무슨 이유(죄)가 있는가, 내가 전생에 무엇을 잘못했나, 당신은 그것을 알고 막아 주어야 하지 않는가 하고 하소연도 해보았지만, 죽음에 대한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나는 대학 시절에 배운 모든 철학을 동원했다. 《금강경》 무상 무주 무명, 실존철학의 죽음, 병, 전쟁, 불안 등. 그러나 그것들이 죽음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합리적 논리는 되지 않았다. 

그러한 고민을 하던 중 모든 것은 인연의 소산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번개같이 지나갔다. 결국 나라는 주체는 없는 것이다. 나의 죽음도 삶도 연기(緣起)라는 직관(直觀)이 나를 위로했다. 그리고 스피노자(Spinoza, 1632~1677)의 인간은 자연의 하나로 자연과 필연적 관계에 있다는 사상이 떠올랐다. 인간의 존재도 필연이기 때문에, 죽음도 필연이요 사는 것도 필연이요 다만 범신론적 실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연도 필연이듯이 나의 삶과 죽음도 인연이요 필연이지 않은가?’라는 생각에 이르자 마음이 편안해지고 죽음의 불안이 극복되는 듯했다.

1967년 4월 말에 귀국했다. 동기생 중 한 사람이 군 인사법에 3년의 복무기간을 지키지 않는다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소청을 낸 것이 계기가 되어, 32기 전원이 귀국 조치와 동시에 임시 대위로 승진했다. 바로 전역이 안 되어 포항의 포병 11연대 측지장교 정보장교를 하던 중, 그해 9월 해병대에 155mm 포가 도입되면서 11대대가 창설되었다. 나는 11대대 1중대장을 맡아 대대 TTT(전술훈련테스트) 준비를 했다. 훈련 연습 중 1968년 10월 말로 전역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다음 해 2월 3일에 대대 TTT가 예정돼 있어, 그 훈련까지 마치고 2월 6일 대대 장병이 도열한 가운데 전역했다. (전역 명령이 떨어졌는데도 끝까지 훈련을 지휘했다는 포상이었고 중대원들은 와이셔츠와 커프스버튼을 선물로 주었다)

나는 이렇게 군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때 석사과정에 입학했는데, 한 학기만 등록하고 영어시험과 예비시험에 합격하면 되었다. 등록금은 삼보법회의 장학금을 받았고, 옛날처럼 서경수 교수, 박성배 교수와 친교가 이어졌다. 그때 마침 풍전호텔이 있는 풍전빌딩에서 매주 큰스님을 모시고 삼보법회가 개설되었다. 이 법회에 관응(觀應, 1910~2004) 스님께서도 강의하셨다. 《금강경》 야부송(冶父頌)을 이해하기 쉽게 차근차근 해석하고 설명하실 뿐 아니라 여러 경전과 교리를 서로 비교 분석하는 관응 스님의 강의에 무척 감동하였다. 특히 선(禪)과 교(敎)는 하나로 서로 떨어질 수 없으므로 참선도 중요하다고 강조하시던 모습이 눈에 환하다. 탄허 스님은  《장자》를 선해(禪解)로 강의하셨다. 

그해 8월에 나는 석사학위를 받았다. 제목은 〈무어(G.E. Moore)의 선에 관한 연구〉였다. 마침 대학생 불교연합회에서 여름 수련대회를 해인사에 간다고 해서 따라가기로 했다. 일주일간의 수련 기간 중 성철(性徹, 1912~1993) 큰스님의 법문이 있었는데, 윤회가 과학적으로 증명된다는 내용이었다. 최면을 통한 전생 여행에 관한 말씀도 있었다. 수련회가 끝나기 전날 3천 배가 있었다. 나는 그때 박성봉 경희대 교수, 박희진 시인 등과 함께 갔는데, 우리는 왈가왈부하다가 대학생들과 함께 3천 배를 시작했다. 오백 배쯤 하다가 박희진 시인은 이것이 뭐냐 하며 중단하고 내려가버렸고, 박성봉 교수와 나는 그만하자는 말 없이 절을 했다. 절반쯤 하니 박희진 시인의 용기 있는 포기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해야겠다는 오기로 3천 배를 끝냈다. 그때의 그 상쾌함과 자신감이라니. 나는 그때부터 신념의 마력을 믿었다. 

석사학위 이력서를 여기저기 내놓았으나 아무 대학에서도 강의 요청이 없었다. 집에서 쉬는 동안 임시로 직장을 가지라 해서 형님이 소개해 주는 지금의 KT 임시직으로 취직했다. 하는 일이란 전보 통계를 기록하는 일인데, 내 앞 내 옆 모두가 대학 출신이고 계장은 나와 함께 석사학위를 받은 사람이었다. 매일 출근할 때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12월 21일, 캐럴과 크리스마스트리가 눈부시게 광화문 네거리를 뒤덮고 있었다. 나는 직장 근무 20일 만에 용기를 냈다. 스피노자가 정신적 자유를 위해 베를린대학 초청 교수를 수락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서, 사표를 냈다. 광화문의 노란 은행잎이 찬바람에 떨어져 흩어졌다. 나는 환희의 자유를 느끼며 광화문을 걸었다.

1969년 1월 2일, 박성배 선생이 미국 유학하기 전 성철 큰스님께 인사하러 간다고 해서 나도 가면 안 되겠느냐고 하니 쾌히 동행을 허락했다. 당시 나는 앞이 꽉 막혀 있었다. 어떤 대학에서도 강의 초청이 없어서 막막했다. 이참에 해인사에 가서 부처님께 매달려 기도를 해보자고 굳게 결심했다. 박성배 선생과 함께 성철 스님께 인사를 드리니 마침 정암사에 계셨던 보성 스님(1928~2018, 송광사 방장)이 와계셨다. 성철 스님은 독성각에서 새벽에 천 배, 사시에 천 배, 저녁예불에 천 배를 하라고 친절히 일러주셨다. 인사를 하고 내려오니 보성 스님이 총무방에서 함께 기거하며 기도를 드리라고 과분한 배려를 해주셨다. 얼음이 얼고 찬바람이 가슴속을 아리는 새벽에 청수를 떠서 부처님께 바치고, 천 배를 시작했다. 순일무잡하게 이루어져야 하는데, 한 배 한 배가 번뇌 망상이었다. 번뇌 망상과 싸우다 보면 천 배가 끝났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스스로 반성했다. 진정 이 기도가 나의 것이라면 부처님께 절을 할 때마다 기쁘고 환희에 차야 할 텐데, 이렇게 번뇌 망상이 많고 고통이 따른다면 결코 아직은 나의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한 배 한 배가 진정 기쁨에 차서 부처님 품 안에 있는 어린아이의 심정이 되도록 절실하게 하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8일이 되는 아침에 성철 큰스님이 주석하는 퇴설당에 올라가 “이제 가겠습니다. 기도 마쳤습니다.”라고 말씀드리니 웃음으로 하산을 허락하셨다. 보성 스님의 환대에 감사하며 일주문을 나서니 번뇌 망상이 사라지는 듯한 자유를 맛보았다.

대구로 해서 서울에 오니 뜻밖의 전보가 한 통 와 있었다. 국민대학에서 1월 20일까지 와서 면접을 보라는 내용이었다. 진정 이러한 기쁨의 통지는 그 누가 주었는가? 일주일간의 해인사 독성각의 기도 가피임이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좀 멋적었지만 나는 기도의 기복을 맛보았다. 나는 이때부터 기도를 알게 되었고 부처님은 믿는 만큼 복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교의 주변만 돌아다니며 방황했던 나는 지성보다 높은 믿음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새롭게 느꼈다. 〈보현행원품〉 독송, 참선 등의 수행이 허망하지 않았고, ‘마음에 있는 것이 현실로 나타난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진리를 터득했다.

1969년 국민대에 취직했으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1972년에는 이기영(1922~1997) 박사가 학장으로 오시고, 나는 대학생불교연합회 국민대 불교학생회 지도교수를 맡고 있었다. 은사이신 이기영 박사는 나에게 신문사 주간을 맡으라 해서 얼마간 보직을 수행했다. 불교학생회 지도교수이기 때문에 방학 때마다 사찰에 가서 수행하고 스님들의 법문을 들었다.

1972년 대학생불교연합회 하계수련대회가 경주 ‘화랑의집’에서 열렸다. 광덕(1927~1999) 스님이 대불련의 고문이셔서 법문을 해주셨다.

스님과 나는 2층 침대 아래위층에 기거했다. 스님은 밤새도록 잠을 주무시지 못하고 괴로워하시는 듯했다. 아침에 어디 편찮으시냐고 물으니 “치통이 놀아달라고 보채서 이놈하고 놀아주다 잠을 설쳤다.”고 하셨다. 얼마나 멋진 대답인가. 나는 그전에도 광덕 스님은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스님이라고 믿고 있었으나 이 말씀에 더욱 믿음이 갔다.

대학교수가 되어서도 여전히 불교는 내 생활의 일부였다. 1973년부터는 집이 수유리 화계사 근처여서, 더욱 신심을 내어 새벽에 일어나 화계사에 가서 108배를 하고 《금강경》과 〈보현행원품〉을 독송했다. 내가 목탁을 치고 염불을 하니 사중 스님이 목탁을 치지 말라고 했다. 마침 숭산 큰스님께서 미국에서 귀국해 계셨다. 큰스님께 인사하니 교수가 새벽에 108배하고 염불과 독경을 하니 믿음직스럽다고 하시면서 불자 교수가 학교발전에 기여해야 한다고 용기를 주셨다. 그리고 송 교수는 목탁을 치고 기도해도 된다고 허가했다고 나중에 말씀하셨다. 나는 1998년까지 거의 매일 25년간을 108참회로 기도했다.

1974년 이기영 박사께서 한국불교연구원을 개원했다. 그리고 불교교양 강좌를 개설하고 강좌를 끝낸 불자들을 모아 구도부를 창설하였다. 이기영 원장, 서경수 지도위원, 이용부 간사 등과 함께 나도 참여해 실참 구도를 하였다.

1975년 여름방학 때는 통도사로 50여 명이 구도 수련을 떠났다. 이기영, 서경수 교수의 강의와, 종범 스님의 《화엄경》 강의도 열렸다. 수련대회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극락암 경봉(鏡峰, 1892~1982) 큰스님을 친견하고 법문을 들었다. 스님께서는 ‘이 세상이 꿈이다. 이 꿈속의 세상에서 한바탕 연극을 하라’고 하셨다. 삶이 꿈속의 연극이요, 연극이 연극인 줄 알고 꿈인 줄 알면 곧 참나, 진실한 세계를 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날 저녁 밤새도록 흥분하면서 큰 환희심으로 잠을 설치고,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극락암으로 달려가 큰스님께 삼배로 문안을 드리니 웬일로 다시 올라왔느냐고 친절히 말씀하셨다. 나는 “스님께 법명을 받고자 합니다.” 하였다.

스님께서는 두말없이 시자에게 지필묵을 가져와 먹을 갈으라 하시고 내 이름을 묻고 즉석에서 취산(翠山)이라는 법명을 주시면서 계송을 써주셨다. ‘설후시지 송백조 사난방견 장부심(雪後始知 松栢操 事難方見 丈夫心). 눈이 온 뒤 송백의 지조를 알 수 있고 어려운 일을 당해야 장부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글을 액자로 만들어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나는 사실상 그때 처음 정식으로 법명을 받고 취산이라는 불자가 되어 지금까지 이 법명을 자랑스럽게 쓰고 있다. 항상 푸른 산같이 살려 한다.

1975년 초 광덕 스님께서 불광법회를 창립했다. 1975년 말 큰스님께서 전화하셔서 불광법회를 체계적으로 조직하고자 구도의 사명이 있는 불자들과 구도법회를 출발시키는데 함께하자고 하셔서 불광법회 부회장 겸 전법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우리 불광 식구들은 매주 목요일 정기법회 매주 셋째 토요일 철야정진 법회, 매주 넷째 일요일 순회법회를 하면서 신심을 다졌다. 나 이때부터 부처님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 스스로 수행을 해야지 글과 이론의 관념으로서는 깨달음의 세계를 맛볼 수 없음을 자각했다. 불광은 그 믿음의 체계가 확실했다. 《금강경》과 《육조단경》의 〈반야품〉 그리고 그 실천은 《화엄경》 〈보현행원품〉이다. 《금강경》을 통하여 진리의 참모습은 무상(無相), 무명(無名), 무주(無住)임을 깨닫고, 그 깨달음을 기초로 우리 마음은 본래부터 청정하고 절대적이며 무한능력을 확인한다. 그것이 확인되면 일체중생이 부처이기 때문에 겉모양이 어떻게 생겼든 부처로 예배 존경하고, 칭찬의 말을 통하여 보현십대행원을 실천하는 것이다.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1976년 여름, 한라산 백록담에서 광덕 스님(앞)과 필자(오른쪽) 

나는 이제껏 불교의 변두리만 헤매고 다니다 광덕 스님의 믿음 체계에 의하여 수행하면서 방향과 목적을 찾았다. 1965년부터 10년 이상 의심이 꽉 차 있던 응어리가 드디어 터진 것이다.
광덕 스님은 1976년 말쯤 《화엄경》 〈보현행원품〉을 강의하셨다. 나는 그때 스님께서 ‘극미진수 제불세존(極微塵數 諸佛世尊)’을 어떻게 설하시는지 신심(身心)을 기울여 들었다. 스님이 ‘그 티끝같이 많은 부처님은 일체중생이다(九類衆生). 곧 우리의 부모 형제 인간이다.’라고 하시자, 나의 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뚫렸고 머릿속은 텅 비어 맑고 밝아지는 듯했다. 그때 나는 알았다. 모든 세계는 우리의 일념에서 구축되어 있어 마음이 없으면 이 세계도 없는 것이다. 그 많은 부처님은 우리다. 모든 것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 일체유심조, 마음에 있는 것이 현실에 있다. 우리의 마음은 청정하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확인하고부터는 이제까지 해석이 안 되던 경전의 곳곳이 이해되었다. 나는 부처님의 진정한 제자로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터득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그러한 기초에서 믿음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1977년 3월에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철학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더욱 수행에 매진하면서 박사학위 준비를 했다. 나는 한국철학과 중국철학사를 가르쳤는데, 1980년 중화민국 대만대학 철학연구소로 수학을 위해 떠났다. 타이베이에 도착하여 가오슝의 불광산 불광사로 참배를 갔다. 그때 마침 문화대학에 유학하고 있던 법산 스님과 함께, 불광사에서 성운(性雲) 스님을 친견하였다. 그 후 법산 스님과 나는 경일학당을 빌려 교민들에게 불교교육을 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손건 선생(타이베이 거주 사업가)과 법산 스님은 마침내 타이베이시에 한국불교홍법원을 세울 수 있었다. 

나는 불교의 이치를 원용하여 원시 유가를 발현시킨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였는데, 특히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율곡 선생의 성리학 연구로 박사 논문을 쓰기로 하였다. 매일 108참회와 기도를 하면서 원고를 써나갔다. 율곡 선생이 이기(理氣)를 말하는 내용 중에  이통기국(理通氣局)이 이기(理氣)의 특징이라고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이(理)는 무성, 무취, 무위이니 영원하다. 기(氣)는 유형, 유위이기 때문에 유한하다. 그런데 이기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다. 이는 이요, 기는 기로 각자 독립성을 유지한다고 한다. 어떻게 해서 기국(氣局), 즉 기는 국한되어야 하는가. 나는 이것을 2주 이상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면서 골똘히 생각했다. 마침내 불교의 반야(般若, 지혜)는 번뇌, 망상에서 일어난다. ‘심(心), 불(佛), 중생(衆生)이 하나다.’라는 경전 말씀이 떠올랐다. 아! 그렇다! 이(理)는 불교의 불성, 지혜에 비교하고, 기국(氣局)은 번뇌, 망상에 비교하니, 불성, 지혜는 영원하지만 번뇌, 망상이 없으면 불성, 지혜가 어디서 나오는가? 또 심(心)으로 비교할 때 심(心)은 두 종이 있으며 본원심(本源心)과 무명취상심(無明取相心)으로 나누니 본원심은 생멸(生滅)이 없는 이(理)요, 무명취상심은 생멸(生滅)이 있는 기(氣)로서 번뇌, 망상이다. 따라서 기국(氣局)이 아닌가. 심, 성, 정으로 볼 때도 율곡은 ‘심은 기(心是氣)’라고 했다. 심은 이(理)와 기(氣)가 함께 있어도 움직이는 것은 기(氣)이기 때문에 이(理)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생멸하는 정(情, 통칭 七情, 情은 수만 가지로 나타난다)은 기국(氣局)이고 그것이 가라앉으면 이(理)가 드러난 성(性)이라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통기국의 참뜻을 깨닫고부터 단번에 학위논문을 썼다. 마침내 1981년 가을학기에 율곡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때부터 더욱 연구와 정진을 계속했다.

1986년 2월 황수영 총장이 임기를 끝내고 지관(智冠, 1932~2012) 스님이 11대 동국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스님이 필자를 총무처장으로 임명하여 보직을 맡았다. 취임해보니 의과대학 부속병원을 건축해야 했다. 총장의 명을 받아 경주부속병원 부지 46,000평을 취득했다. 나는 그 땅을 살 때 매일 기도를 했다. 살 수 없는 땅을 부처님 은혜로 취득한 것이다. 총무처장을 끝내고 의료원 기획실장을 맡아 의료원 체계를 확립하였다. 그러다가 1989년 말에 입학부정이 생겨 의료원 발전의 플랜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고, 지관 총장이 2차 연임 한 달 만에 퇴임하셨다. 나는 의료원장에 임명되었으나 새로 온 총장서리에게 사표를 내고 평교수로 돌아왔다.

1990년 4월 나는 동국대학교의 개혁을 내세우면서 총장직선제를 주장, 총장선거에 임했다. 10월 12일 선거에서 나는 1등을 했으나 1991년 2월 이사회에서 한 표 차로 2등을 한 민병천 교수(1932~2011)가 선임되었다. 그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이 생각났다. 모든 것은 나의 속세 죄업의 결과다. 오늘 내가 선임되지 못한 것은 죄업소멸의 한 과정이라는 것. 나는 그날 밤 모든 스님이사 분들께 “스님, 오늘의 일은 모든 저의 죄업소멸로 생각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하고 인사를 드렸다.

1993년 3월에 부총장에 임명되어 민병천 총장을 보필하면서 교과과정 개혁을 주도했다. 1995년 1월 27일, 총장 직선투표에서 나는 또 1등을 했다. 동료 교수들과 직원 선생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재단에서 만장일치로 13대 총장에 선출되었다.

나는 총장으로서 대내적으로는 인화를 통한 과감한 개혁, 대외적으로는 홍보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홍보는 업적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교육개혁과, 일산에 불교병원을 건립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자금이 있어야 했다. 그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1996년에 힐튼 호텔에서 대대적인 모금행사를 실시했고 하루 저녁에 76억 원의 기부금을 모았다. 1999년에 14대 총장으로 재임하여 2003년 2월에 정년퇴직하기까지 8년 동안 500억을 모금하여 불교병원 건립의 기초를 세웠다. 

   
동국대 일산 불교병원 준공식. 중앙의 녹원 스님과 왼쪽 한 사람 건너 필자

나는 동국대학교 중흥의 하나로 교세를 확장하고,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취약한 과학, 의학의 발전에 헌신하고자 했다. 교세를 확충하기 위해 학부생 증원을 꾀했다. 당시 서울시 내의 대학 정원이 막혀 있었는데 마침 김영삼 정부에서 IT 전산계 학생증원이 있어 150명을 증원했고 대학원, 경주캠퍼스 등 약 500명을 확충했다. 대학입학 정원을 500명을 증원하여 3,300명까지 늘림으로써 일약 대단위 대학으로 도약했다. 

또한 경기도 일산에 동국대학 불교병원을 갖은 고초를 다 겪으면서 건립했다. 1998년에 기공하여 2002년 9월 27일에 준공을 보았는데, 대지 25,000평에 건축면적 12,000평, 1,000개 병상을 갖추는 데 건축비 1천억 원이 소요되었다. 그때까지 불교재단이 소위 약국 하나도 짓지 못했는데, 불교병원의 건립은 곧 부처님의 보살행의 현대적 징표이기도 하고, 동국대학교의 사명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나의 힘이 아니라 모든 불자들의 성원에 힘입은 것이고, 나는 그저 부처님의 시봉으로 심부름을 했을 뿐이다.

지금까지 내 삶의 과정은 내 안에 있는 부처님을 찾기 위한 실험의 몸부림이었다.

이제 내 나이 82세,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으랴. 이제는 진정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을 때까지 내 안의 부처님을 찾기 위해 참선에 매진해야 한다. 역대 조사의 선어록과 그를 통한 실수(實修)에 전념한다. 특히 인천 용화사 송담(松潭) 스님의 녹음법문을 들으면서 수행한다. 이제 그 길밖에 없다. 나의 주인공을 찾아야 생사의 일대사 인연이 해결된다.

죽음을 선험(先驗)하기 위해서는 의식이 우선 성성적적(惺惺寂寂)하고 그러기 위해 화두가 순일하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야 하는데, 너무 간단(間斷)이 많다. 그러나 밀고 나가자. 어찌 생사 해탈의 길이 쉽기만 하겠는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

 

송석구
충남 대전 출생. 동국대학교 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박사). 동국대학교 교수, 동국대학교 총장,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장 등 역임. 주요 저서로 《송석구 교수의 불교와 유교 강의》 《송석구 교수의 율곡 철학 강의》 《대통합》 《진리와 실천》 《바람이 움직이는가 깃발이 움직이는가》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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