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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복제와 불교교리는 모순되는가 / 최정규
특집 - 생명공학과 불교
[4호] 2000년 09월 10일 (일) 최정규 고려대 강사

1. 머리말

인간의 상상력은 전율을 느낄 정도로 무한하다. 복제인간이란 용어도 그러한 상상력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인간을 복제, 즉 복사한다는 것은 기발하고 흥미로운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다음 순간 우리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손오공이 재주를 부리는 것처럼 나와 동일한 복제인간이 현실 속에 무수하게 존재한다? 재미있을 것도 같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음을 막연하게 감지할 수 있다. 옹진군 옹진골 옹당촌에 성은 옹가요 이름은 고집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옹고집은 부유하였지만 노모를 괄시하고 걸식하러 온 중을 결박하여 매질을 하는 등 인색하고 못돼먹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에 월출봉 학도사가 이 옹가놈을 벌주고자 짚 한 묶음의 허수아비로 옹고집과 똑같은 분신을 만들어 옹고집의 집으로 보냈다. 실제의 옹가와 가짜의 옹가가 서로 진위를 가리게 되는데 결국 가짜 옹가의 판정승으로 매듭지어진다.

실제의 옹가는 그 길로 산에 들어가 학도사를 만나게 되고 자기의 허물을 깊이 뉘우치게 됨으로써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권선징악을 주조로 하는 이 이야기는 현대의 복제인간이라는 주제와는 거리가 멀지만 인간복제의 모티브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과연 복제인간은 가짜 옹가의 출현을 말하는 것일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은 옹고집의 이야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21세기의 화두는 생명과 정보라고 한다. 인간복제는 생명의 영역에 깊이 관계되는 것이다. 생명이라는 담론 속에서 인간복제를 논의할 때 우리는 많은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불교의 시각에서 인간복제나 유전자 조작과 같은 현대의 생명공학 기술을 조망한다면 그것의 의미나 의의는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불교와 생명공학’이라는 주제는 자칫 앨런 소칼과 장 브리크몽이 힐난하였던 것처럼 ‘지적 사기’가 되지 않을까 자못 저어되는 점도 없지 않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고 있다.

① 막연하게밖에 모르는 과학 이론들을 장황하게 늘어 놓는다.
② 자연과학에서 나온 개념을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 도입하면서 최소한의 개념적 근거나 경험적 근거도 밝히지 않는다.
③ 완전히 동떨어진 맥락에서 전문 용어를 뻔뻔스럽게 남발하면서 어설픈 학식을 드러낸다.
④ 알고 보면 무의미한 구절과 문장을 가지고 장난을 친다.

논자는 위와 같은 지적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논의를 전개해 나가고자 하지만 분명히 짚어둘 점은 필자가 생명공학을 전공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논의가 다소 피상적인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논자는 생명공학의 인간복제와 유전자 조작이라는 주제가 불교의 윤회설과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점을 환기시키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할 뿐이다.

생명공학의 영역에서 최근 들어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키며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인간복제와 유전자 조작에 관한 내용이다. 이제 인간은 인간 스스로의 생명을 임의대로 조작할 수 있는 약간의 능력을 갖게 되었다. 인간이 그 동안 꿈꾸어 왔던 불로장생이 기대되기도 한다.

생명공학의 발달은 앞으로 인간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몇 가지 예견되는 바에 따른다면 그것의 위력은 지금까지의 과학기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1997년 영국의 에딘버러 로스린 연구소의 아이언 윌머트 박사에 의해서 복제양 ‘돌리(dolly)’가 공개되면서 인간복제가 사회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복제양 돌리의 탄생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우수한 품질의 가축을 무한으로 생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유전적인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의 치료에 빛을 던져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나아가 논란의 대상이 될 복제인간의 탄생도 예견할 수 있다.

2000년 들어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생명의 책’이라고 불리우는 인간의 게놈정보를 전 세계에 공개하였다. 지난 10여 년 간 총 30억 달러를 투입해 수행해 온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완성을 알리는 것이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미국의 주도하에 다국적으로 추진되어 온 ‘인간 게놈 프로젝트’에 앞서 미국의 생명공학 회사인 셀레라가 인간의 게놈 지도를 먼저 완성하게 된다면 미국 정부는 난처한 입장에 처할 것이므로 연구에 박차를 가한 저간의 사정이 놓여 있다고 한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실질적으로 주관하고 있는 기관이 ‘미국 국립 보건연구소’라는 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게놈 정보는 인간의 유전병과 같은 질병치료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될 것으로 판단된다.

불교적 관점에서 이와 같은 생명공학의 성과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생명공학의 성과는 불교 교리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양립할 수 없다면 어떤 점이 그러한가? 붓다의 가르침 즉 불교가 인류의 모든 문제에 답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적어도 인류의 어떤 문제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고 의사를 표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특히 그 문제가 윤리적인 가치의 문제일 경우 더욱 그러하다. 인간복제나 유전자 조작은 과학기술의 영역을 넘어서 인간의 가치 문제를 야기한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불교적 관점과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과도한 관심의 표명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2. 생명공학과 불교

생명공학이 발달하면 개인별로 맞춤약을 조제하여 주고 나아가 원하는 대로 인간을 제조하는 ‘맞춤인간’의 생산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한다.

필요하다면 건강한 신체와 아름다움, 명석한 두뇌를 갖춘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을 닮은 천재, 박찬호나 박세리와 같은 운동선수, 조수미와 같은 성악가, 헤어진 연인과 닮은 사람뿐만 아니라 조합형 인간도 만들 수 있다. 외모는 유명한 연예인으로 하고 내적인 능력은 노벨상 수상자를 조합한 복제인간을 만들어 낸다.

이와 같은 맞춤인간의 출현은 인간의 상품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은 적지 않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따라서 생명공학이 인류에게 가져다 줄 빛도 적지 않겠지만 그와 아울러 어두운 그림자 또한 넓게 드리워질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과학기술의 야누스적 양면성이다.

이쯤 되면 사르트르의 ‘출구 없는 방’이나 프랑켄슈타인이 연상될 수도 있을 것이며 좀더 비근한 예로는 핵폭탄을 들 수 있겠다. 생명공학은 생명 그 자체를 연구의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인간도 생명체이므로 생명공학의 연구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생명공학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라는 양면이 노출될 수 있다. 인간이 인간 자신을 연구하여 기술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는 점을 불교적 관점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1) 인간복제와 윤회

오늘날에는 그리 새로울 것이 없을 정도로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지만 복제(clone)란 말은 20세기 초에 생식세포가 아닌 일반 식물체를 설명하기 위해서 처음 생겨났다. 그 이후 개체의 세포나 세포 덩어리로부터 전혀 새로운 개체를 만들어내는 조작 방법을 복제기술(cloning)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때 얻어진 새 개체를 원개체의 복제(clone)라 정의한다. 따라서 생명복제 기술은 한 개체와 동일한 유전자 세트를 지닌 새로운 개체를 만드는 기술로 정의한다. 추상적 의미에서의 인간복제는 어떤 인간과 모든 면, 즉 유전형질뿐만 아니라 외모·성격·감정·취미·능력·기억 등이 똑같은 인간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인간복제는 생물학적인 인간복제 즉 한 개체와 유전적으로 동일한 또 다른 개체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복제에는 인간개체복제(human individual clonimg), 인간배아복제(human embryonic cloning), 장기복제(organ cloning) 등이 있는데 각각 불임·불치병·장기이식 등의 치료에 이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복제양 돌리는 인간개체 복제기술,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체세포핵이식법에 의해서 탄생되었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복제는 인간의 존엄성 혹은 생태계 질서 파괴 등의 이유로 비판을 받는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였으며 인간의 생명을 관장하고 있다고 믿는 개신교나 천주교계에서는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을 신성모독이자 도전이라고 보고 있다. 또한 인간의 존엄성이 그 생명과 인격은 절대적으로 고유하며 유일한 것이라는 점에 근거한다고 하여 인간복제를 비난하는 경우도 있다. 그 외에 복제인간의 법률적 지위와 인간 복제에 따른 가족제도의 혼란 등의 문제점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복제인간은 일란성 쌍생아와 다르지 않으며 그러한 까닭에 추상적 의미의 인간복제를 상정하는 것은 아직까지는 무의미하다. 유전자가 인간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유전자 결정론에 의한다면 인간복제는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지만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쉽지 않다. 유전자 결정론과 동일한 비중으로 환경 결정론을 고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환경 결정론은 인간의 행동이 생물적 요인 보다 사회적 환경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한다. 유전자 결정론과 환경 결정론의 논쟁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논의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 논쟁은 우리가 인간복제를 유전자 결정론이나 환경 결정론 가운데 어느 한쪽의 입장에 서서 일방적으로 이해하는 위험성을 피할 수 있도록 해준다. 유전자 결정론은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환경 결정론은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는 것은 당연하지만 심은 토양과 자랄 때의 환경에 의해서 그 수확은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두 입장 모두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불교적 관점에서 인간복제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불교는 연기(緣起) 즉 인연(因緣)을 말한다. 인연은 전체적인 관계를 지적하는 말이므로 인간복제의 경우도 유전자와 환경을 모두 고려하여 조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인격의 고유함이란 유전과 환경의 조합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인간의 윤회(輪廻)가 언급될 수 있다. 윤회라는 말은 ‘함께 달리는 것’, ‘함께 건너는 것’을 뜻하는 상사라(sam.sa-ra)를 번역한 것이다. 불교 경전에 의하면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것처럼 중생들이 여러 세계를 도는 것을 윤회라고 한다. 윤회에 관한 설명으로는 《밀린다팡하(milinda-pan~ha : 那先比丘經)》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서 태어난 자가 여기서 죽고, 여기서 죽은 자가 다른 곳에 태어납니다. 거기서 태어난 자가 거기서 죽고, 거기서 죽은 자가 다른 곳에서 태어납니다. 대왕이시여, 이와 같은 것이 윤회입니다.

중생들은 여러 세계를 돌면서 삶과 죽음을 끝없이 되풀이한다. 이것을 윤회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지은 모든 업은 반드시 결과를 낳고 그 결과가 다음 생을 만든다는 것이 윤회의 법칙이다. 이와 같은 윤회의 길을 일반적으로 3계(界) 6도(途)로 설명한다. 욕계는 욕망에 따른 생활을 하는 중생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저급한 신들의 세계이다.

색계는 욕망을 떠났지만 육체를 가지고 있는 중생들이 사는 곳으로 천상의 신들이 머무는 세계이다. 무색계는 욕망과 육체 모두 없는 순전히 정신적인 존재들이 사는 세계이다. 이러한 6도의 윤회 가운데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가장 의미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계에서만 수행을 할 수 있고 열반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세계에서는 업의 과보를 받을 뿐이지만 인간계에서는 윤리적인 생활을 함으로써 윤회의 원인인 업(業)도 지을 수 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과거의 행위(業)에 의해서 현재의 삶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고, 현재 인간의 행위 즉 업(業)에 의해서 다음의 생이 결정되는 것을 윤회라고 한다. 인간의 행위(業)에는 신체적·언어적·의지적인 것이 있는데 그 가운데 의지적인 행위 즉 심리적인 행위가 가장 중요하다.

심리적인 행위가 중요하다는 말은 인간의 윤회가 심리적인 행위 즉 의지적인 요인에 의해서 가장 크게 좌우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심리적인 행위는 유전적 요인와 환경적 요소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인간복제가 일란성 쌍생아를 낳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인간복제 그 자체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부분에서 인간복제는 좀더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인간복제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개체복제와 인간배아복제 그리고 장기복제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배아복제이다. 인간의 수정란은 수정 후 약 14일쯤에 원시선(primitive streak)이 나타나면서 배아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부터 8주째까지 각종 기관이 형성되는데 이 시기를 배아기(embryonic period)라 한다. 이 후로는 이미 형성된 기관과 신체부위가 자라는 태아기(fetal period)로 넘어간다.

의료계에선 14일 미만의 배아는 인간이 아니라 ‘세포더미’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런 수정란을 기술적으로 사용하고 폐기한다면 이것은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로 간주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1987년 교황청에서는 훈령을 발표하여 사람의 생명은 수태된 순간부터 온전한 인격체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생명은 잉태된 순간부터 하나의 인격체로 간주되어야 한다.

불교의 중음신(中陰身;中有)이 이러한 관점을 대변한다. 중음신은 죽은 사람의 5온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태어남의 주체적 요소이다. 인간의 탄생은 부모의 현실적 조건과 태아(中陰身)의 의지적 조건이 결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불교적 시각이다. 따라서 배아기의 수정란을 인격을 갖춘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는 시각이 엄존하는 한 인간배아복제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커다란 위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적 시각에서 볼 때 인간의 존엄성이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을 모든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다고 한다면, 14일 미만의 배아일지라도 그 생명의 씨앗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 점이 생명공학 혹은 인간복제와 불교의 관계를 조망하는 데 관건이 된다.

인간의 행위 가운데 윤회의 근본적 원인은 의지라고 볼 수 있다. 의지는 무명이라고 하는 어리석은 지적 판단에 따라 특정한 지향성을 갖는다. 판단에 따라 이루어지는 모든 상황 즉 총체적 정보는 축적되어 다른 판단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전체적인 과정을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생사의 반복이다. 생사의 반복은 생명공학의 복제와는 다른 차원이지만 복제의 불교적 표현이고 그것이 바로 윤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복제와 윤회를 생각할 때 중요한 점은 인간의 판단과 결정이다.

2) 유전자 조작과 종자식

생명공학은 이제 ‘생명의 책’이라 불리우는 인간의 유전자 지도를 완성한 단계에 와 있다. 인간복제의 핵심에 자리한 유전자 정보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단순히 인간을 복제하는 수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인간을 원하는 대로 조작할 수 있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바로 그것이다.

게놈(genome)이란 유전물질인 DNA를 담고 있는 그릇에 해당하는 염색체 세트를 의미하는 것이다. 게놈은 유전자(gene)와 염색체(chromosome) 두 단어를 합성해 만든 말로서 생물에 담긴 유전정보 전체를 의미한다. 유전자는 우리 몸의 세포에 존재하는데 각 세포의 핵에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1쌍의 성염색체를 포함하여 총 23쌍의 염색체가 존재한다. 이 염색체를 구성하고 있는 주요성분은 이중나선 구조의 DNA이다.

유전자의 비밀은 바로 이 DNA에 담겨있는데 DNA는 A(아테닌)·C(시토신)·G(구아닌)·T(티민)이라는 네 가지 염기를 가지고 있다. 인간 게놈의 염색체 속에는 약 30억 개의 DNA 염기쌍이 배열되어 있으며 이들의 조합에 따라 키, 피부색, 생김새와 같은 외형적인 특질뿐 아니라 성격과 소질 등의 유전형질이 결정된다. 2030년 쯤에는 두뇌의 상세지도를 완성하여 원할 경우 강력한 두뇌를 가질 수도 있게 된다고 한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란 이렇게 배열되어 있는 생명체의 DNA 염기서열을 모두 밝히려는 계획을 일컫는다. 1950년대에 왓슨과 크릭이 DNA의 구조가 이중나선형이라는 것을 밝혀냄으로써 유전정보가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방식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이후 인간의 생노병사와 희노애락과 같은 생명현상에 대한 의문이 유전자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하나씩 밝혀졌다. 인간의 유전자가 생명현상의 궁극적인 열쇠라는 시각은 오래 전부터 인간이 품어 왔던 풍요롭고 행복한 생활에 대한 염원과 기대에 직결되어 있다.

한편 불교의 유식학에서는 인간 생명현상의 근원 즉 명근(命根)으로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제시한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담지한 일체의 종자식이 바로 아뢰야식이다. 유전자의 비밀을 담고 있는 DNA가 모든 종자를 담지하고 있는 아뢰야식인가 하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생명현상의 근원으로서의 아뢰야식은 DNA와 흡사하다고 볼 수 있지만 아뢰야식은 식(識)인 한에 있어서 객체가 아니라 주체성의 측면이 강조되고 있는 반면에 DNA는 주체적인 면과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실험과 관찰의 대상이라고 하는 객체성이 두드러진다.

또한 아뢰야식은 윤회의 근거이므로 관찰 가능한 현상뿐만 아니라 관찰할 수 없는 영역 즉 육도윤회의 세계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까지는 DNA와 차별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DNA는 과학적인 관찰과 실험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만 아뢰야식은 관찰과 실험의 영역이 아니라 수행과 깨달음의 영역에서 언급되는 것이므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상당한 차별성을 갖는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찾아낸 생명현상의 근원이 DNA이고 불교 유식학이 찾은 생명현상의 뿌리가 아뢰야식이라는 점에서 상호 비교와 대화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일차적으로 DNA의 염기서열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그것의 의미는 앞으로 해석의 과정을 남겨 놓고 있으며 그 배열도 개인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 사람마다 게놈의 서열에 차이를 보이는 것을 단일염기다형성(single nucleotide polymorphism)이라 한다.―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아뢰야식과의 대비는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볼 수 있겠다.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의 모든 정보가 유전자 정보 속에 저장되고 그것이 다음 세대로 전달되어 현실화하는 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과학적인 의미에서 윤회의 얼개를 이루는 것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또한 모계의 유전형질과 부계의 유전형질이 만나서 독자적인 개체를 형성할 때 거기에는 분명 새로운 주체의 영역이 개입되고 있다. 그러므로 공(空), 무아(無我)라는 불교적 맥락에서 유전자 정보가 윤회의 주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윤회는 그 시작을 알 수 없으므로 경전에서는 ‘무시(無始)’라고 한다. 모계의 유전자와 부계의 유전자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그 처음을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을 알 수 없다면 그것도 ‘무시(無始)’이다. 무시의 의미가 이렇게 간단하고 단순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과학이 찾아 낸 유전자와 불교의 윤회 종자설은 외형적인 의미에서 상호 접근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연기 즉 인연의 의미에서 볼 때 인간의 유전자는 인(因)에 해당하는 것이라 보아도 손색이 없다. 콩 심은 데 콩이 난다고 할 때, 그 콩은 인간의 유전자에 비유할 수 있고 동시에 그것은 인간의 업(業)종자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콩 = 유전자 = 업종자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윤회의 근원에 지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볼 경우에는 아뢰야식과 유전자의 접근성을 인정할 수 있지만 아뢰야식이 깨달음의 원인까지도 포함한다고 본다면 문제는 사뭇 달라질 수 있다. 즉 깨달음이 불교의 화두인 것처럼 유전자와 종자식의 관계에서도 깨달음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불교와 생명공학이 대화를 하기 위한 전제와 범위를 정하는 데 고려해야 할 참고사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 생명공학과 불교의 지향점

생명공학과 불교가 지향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붓다가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게 된 까닭은 생로병사의 고로부터 벗어나고자 함이었다. 좀더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윤회의 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불교에서는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불교의 지향점은 해탈에 있다. 한편 생명공학은 생명의 신비를 밝혀 이를 기술적으로 응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생명의 신비를 밝히고 이를 기술적으로 응용하는 것에는 반드시 가치 ― 윤리적인 측면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여기에서 생명공학과 불교가 서로 대화를 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아직 많은 부분에서 생명공학에는 채워 넣어야 할 미지의 여백이 많이 남아 있다. 당장 게놈 프로젝트로 완성된 염기배열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염기배열의 암호를 해독할 수 있어야 그것을 정확하게 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의미 해독은 100%의 정확성을 요한다. 100%의 정확성을 요구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사람과 침팬지를 비교해 보면 사람과 침팬지의 게놈은 98.7%가 동일하고 다른 것은 1.3%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 1.3%의 차이가 인간의 고유한 특성 즉 언어의 사용, 예술을 창조하고 감상하는 능력, 과학과 기술의 진보를 가져온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사람과 효모의 경우는 대략 20%가 동일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80% 이상이 동일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우리가 인간의 게놈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예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담고 있다.

불과 1.3%의 차이로 인간과 침팬지로 나뉘어질 수 있다는 점을 새겨 두어야 할 것이다. 윤회는 개인적인 판단에 의한 선택적 행위(業)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생명공학의 발달도 인간의 판단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넓게 보면 윤회의 한 모양새이다. 신중하게 고려해야 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측면이다. 생명공학에 의해서 얻은 결과물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하는 판단이 문제의 관건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은 생명공학에 대한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키기에 충분하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가장 주요한 이유는 바로 자본의 논리이다. 즉 1990년대 들어서 체제 대결 의식이 희미해진 이후 그 자리를 메운 것은 경제적 이윤추구의 욕구·욕망이다. 자본의 논리는 이윤이 남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상품화한다. 거기에서 인간이 예외일 수 없음은 자명하다. 오히려 이윤 추구의 초점에 인간이 자리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인간의 삶과 관계된 모든 것은 이윤추구의 대상이 된다. 자본의 논리는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 자체를 이윤 추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인간은 생로병사라는 실존적 한계상황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계상황을 넘어서고자 하는 것은 인류의 오래된 염원이었다. 생명공학이 인간의 이러한 염원에 빛을 줄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바로 이 점에서 현실적으로 자본의 논리와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지금까지 불치병이라 여겨졌던 질병에 대한 진단과 치료를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도 가져다 줄 것이라 한다. 또한 원하는 인간을 제작할 수도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인간은 수퍼마켓의 물건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월등한 재능의 유전자를 가진 인간을 주문 제작하여 배달하는 광경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폐기처분되는 인간과 개량 개조되는 인간에 의한 계급의 분화와 불평등이 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상업성과 그에 따른 부작용이다.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어떤 위험도 마다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호기심과 이기적 성향을 제어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유전자 조작에 의해서 얻을 수 있는 갖가지 이점은 인간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실제로 생명공학회사의 주가가 오르고 생명공학 관련 특허가 벌써부터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다. 예를 들면 파이저, 스미스클라인 비첨, 글락소-웰컴 등의 제약회사와 밀레니엄, 인사이트 같은 생명공학회사들은 사운을 걸고 질병을 초래하는 유전자를 찾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고, 휴먼게놈 사이언스사는 게놈 정보를 이용해 유전자로부터 만들어지는 단백질을 약제로 활용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많은 반대와 신중론에도 불구하고 조만간 복제인간을 만들어주는 회사가 도처에서 문을 열지도 모른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생명공학과 불교적 지향점의 분기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불교의 지향점은 영원한 삶이 아니라 삶의 고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삶에 구속되고 속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외적 조건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적인 변화에 의한 것이다. 설사 윤회의 근거인 아뢰야식과 인간 유전정보의 집결체인 DNA가 동일한 것이라 하더라도 불교는 아뢰야식의 질적인 전환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수행을 계속해 간다. 불교와 생명공학의 분기점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제 불교와 생명공학의 첫 자리로 돌아가보기로 하자. 인간이 고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원인은 분별하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뢰야식의 총체성이다. 이점을 《밀린다팡하》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다. 죽을 때 생존에 대한 집착을 갖는다면 저 세상에 다시 태어날 것이요, 집착을 버린다면 저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불교의 지향점은 무분별과 무집착에 있다. 생(生)에 대하여 집착하는 것은 동시에 사(死)에 대하여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생겨나는 것과 없어지는 것은 별개의 것이지만 서로 앞서거나 뒤지지 않고 동시에 지속됩니다.

그리하여 모든 존재는 동일하지도 않고 상이하지도 않으면서 최종 단계의 의식으로 포섭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뢰야식의 질적인 전환의 가능성이 엿보인다. 반면에 생명공학의 출발점과 기반은 개별 분자들의 공통성에 있다. 분자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엄존성과 항존성만이 있을 뿐 질적인 전환은 고려되고 있지 않다. 이제 이 말을 좀더 풀어 보기로 하자. 여기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이 있다.

그는 빼어난 외모뿐만 아니라 탁월한 지적 능력을 겸비한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다. 이제 그의 유전자를 채취하여 그 정보를 해독하였다. 그리고 그를 복제하여 그와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복제인간을 만들었다. 그러면 그 복제인간은 원래의 사람처럼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인가? 그 대답은 간단하지 않지만 유전자 정보는 윤회의 정보일 뿐 해탈의 정보와는 무관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복제인간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깨달은 사람은 윤회유전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했다고 말한다. 깨달은 사람을 복제한 복제인간이 수행을 한다면 깨달음을 성취할 가능성은 높겠지만 그 역시 일정한 수행의 과정을 생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을 복제하는 것조차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수행은 질적인 전환의 과정이기 때문에 내외의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야 그 결과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깨달음의 경우만이 아니라 탁월한 지성과 빼어난 외모를 갖춘 인간을 복제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복제인간이 가지게 될 가능성, 즉 종자에 지나지 않는다. 복제인간이 원래의 사람과 완전히 동일하게 되기 위해서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모든 조건이 동일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100%의 복제인간이란 아직까지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고 인간을 복제하려는 동기에서 본다면 그것은 윤회의 재생산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불교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인격은 단순한 복제와 달리 주체적인 자각과 수행을 통하여 인격을 질적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4. 결론

인간이 윤회하는 것은 주체적인 판단에 의한 행위(業) 때문이다. 인간의 윤회 정보가 DNA에 유전정보로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이 점은 DNA의 염기배열에 관한 의미가 아직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정할 수 없다. 다만 DNA의 유전정보를 불교의 인연설에 대비시켜서 그것을 인(因)과 연(緣) 가운데 인(因)에 견주어 보는 것은 가능하겠다. 앞으로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 DNA의 염기배열과 그 의미 그리고 작동방식에 따른 의미확대나 전이 등이 해독된다면 그 대비점은 더욱 확대될 수 있겠지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은 매우 빈약하므로 모든 것은 추정에 지나지 않다.

이러한 시점에서 특정 내용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온당하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의 윤회에 관한 불교의 관점은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자기가 책임을 진다는 것 즉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원리이다. 어떠한 경우에서건 한 인간의 유전정보는 고유한 것이고 조작된 유전정보 또한 고유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모든 것은 인간의 판단에 따른 행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윤회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의 판단은 내외의 모든 조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윤회 또한 조건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아뢰야식의 종자와 DNA의 유전자 정보가 유사한 것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아뢰야식의 외연이 유전자 정보의 외연보다 더 넓다고 하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뢰야식은 윤회의 근원이지만 동시에 깨달음의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전자 정보는 윤회의 한 근거로만 상정할 수 있을 뿐 생사를 넘어선 깨달음의 영역으로까지 그 의미를 확장시키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과학기술의 영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의 현실적인 응용이다.

그 응용 또한 윤회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전자 조작이나 인간복제가 불교의 윤회설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은 불교의 지향점에서 볼 때 논외의 문제일 수 있다. 불교의 지향점은 윤회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인격을 성취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인격은 과학기술에 의해서 만들어지거나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조작과 분별적 행위는 윤회의 범주 속에 들어가는 것이며 과학기술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유전자를 조작하고 복제인간을 만들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 무엇을 얻고자 함인가 하는 것을 반추해 본다면 그 기술의 응용이 궁극적인 해답일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자명해질 것이다. 그 속에서 깨달음의 길을 찾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생각해 볼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나는 죽음을 환영하지도 않으며, 삶을 환영하지도 않는다. 나는 죽음을 바라지도 않으며, 삶을 바라지도 않는다.

유전자 조작은 삶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또 다른 윤회의 굴레를 만드는 것이다. 불교의 지향점은 거기에 있지 않다. 삶과 함께 죽음이 동시에 고려된다. 죽음이 문제라면 그와 동일하게 삶도 문제이다. 삶과 죽음의 동시성, 그것은 자각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설사 유전자가 윤회의 정보를 담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조작하는 것은 윤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결국은 실존적 한계상황의 테두리 속에서 방황하는 인간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각성이 문제해결의 관건임을 직시해야 한다. 늘 그러한 것처럼 과학기술을 현실에 적용하는 인간의 판단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불교의 윤회설은 생명공학의 영역을 진정으로 포섭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유전자 조작이나 인간복제는 일면 윤회설의 과학적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유위법(有爲法)의 일부분을 이룬다고 볼 수 있으므로 궁극적으로 유위법 전 범주에 걸치는 윤회설의 전모를 밝혀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끝>

최정규
고려대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현재 고려대 강사. 〈무착(無着) 유식철학의 연구〉 〈阿賴耶識의 의미구조〉 〈무아(無我)에 대한 일고찰〉 《논쟁으로 보는 불교철학》(공저) 등의 논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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